2016-12-14

[알라딘서재]식민지 조선의 본원적 축적과 해방이후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

[알라딘서재]식민지 조선의 본원적 축적과 해방이후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 - 빼앗긴 들에 서다
강만길 엮음 / 역사비평사 / 2000년 9월
품절 

자본주의 형성과정에서 임금노동자는 사회적 생산수단이 특정 계층의 소유로 귀속되는 한편에서 직접생산자가 생산수단에서 분리되는 과정, 즉 본원적 축적 과정에서 창출되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농민을 토지에서 강제로 추방하여 폭력적으로 이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쌀농업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사회에서는 이런 식으로 농민들을 강제 추방할 수 없었고, 또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들을 수용할 만한 산업시설도 갖추지 못했다. 따라서 반농반노(半農半勞)의 존재들이 농촌 내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열악한 조건에 놓여있었다.-76쪽
1918년 '조선지세령' 개정으로 ... 배타적 소유권에 입각하여 등기부상의 소유권자에게 과세부담에 대한 법적 책임을 부과하고, 신분 등 경제외적 요인에 의해 과세대상에서 누락되거나 은닉될 수 있는 요인을 제거했다. ... 새로운 지세제도에서 지주층은 식민정책적 차원에서 보호받는 세제특혜층으로 설정되었다. 이들은 식민지배의 동맹자로서, 민족분열정책의 한 고리로서 적어도 1930년대 초까지 조세 및 금융제도 면에서 확실하게 지위를 보장받았다. ... 1910년대를 지나 1925년까지의 쌀값 상승률이 일반 물가상승률보다 높았던 것도 지주층의 농업경영에 대단히 유리한 조건이었다. ... 지세율도 1.3%로 결정되어 일본의 3%에 비해 낮았다. 일본의 지주층은 보호육성 대상이 아니라 자국 산업화의 재원 마련을 위한 집중적인 수탈 대상이었다. 반면 조선에서는 식민지배의 유력한 동맹자로서 또 값싼 쌀의 집산자로서 지주층을 육성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97-98쪽
농촌빈민, 화전민, 토막민의 이른바 3대 빈민층은 식민지배정책의 정직한 산물이었다. 식민지 산업구조는 이농민들을 공업 인구로 수용할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이러한 빈민층이 양산되었다. 결국 1930년대 전시동원체제하에서 이들은 일제의 전쟁수행을 위해 강제동원되어 착취당했다. -136쪽
[공장노동자]들의 임금구조는 일본인 노동자 대 조선인 노동자, 남성 노동자 대 여성 노동자, 성인 노동자 대 유년 노동자라는 민족별, 성별, 연령별 차이를 뚜렷이 드러내고 있었다. 1929년의 임금상태를 보면 조선인 성인 남성 노동자를 100으로 했을 때 일본인 성인남성 노동자는 232, 일본인 성인여성노동자는 101인데 비해 조선인 성인여성 노동자는 59, 조선인 유년남성 노동자는 44, 조선인 유년여성 노동자는 32로 극심한 차이가 있었다.
1910, 1920년대에는 조선에서 식민지적 공업구조의 성립과 함께 노동자층도 형성되었다. 하지만 식민지적 공업구조하에서 형성된 노동자층은 민족과 계급의 이중적 착취를 받는 열악한 지위와 노동조건을 감수해야 했다. 열악한 노동조건과 민족간의 차별대우로 노동자들의 의식은 급격히 높아졌고 노동쟁의도 활성화되었다. ... 전국적인 노동운동 조직이 건설되어 1925년 조선 노농총동맹이 결성되었고 1927년에는 조선노동총동맹으로 분리되었다.
[1929년 원산총파업, 1920년대의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으로 발전]-138쪽
1929년 주가 폭락으로 시작된 미국의 공황은 자본주의 역사상 유례없는 세계대공황으로 발전했다. 당시 일본은 미국을 비롯한 구미국가들로부터 중공업품이나 섬유제품의 원료 등을 수입하고 견제품, 잡화 등을 수출했다. 한편 식민지 조선과 중국 등에 대해서는 역시 경공업품을 수출하고 농산물이나 철, 석탄 등의 중공업 원료를 수입했다. 이처럼 일본자본주의는 원료나 기술, 시장 등에서 높은 무역의존도를 갖고 있었으므로 세계대공황의 타격이 매우 컸다. 그리고 세계대공황은 농업공황을 수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1920년대 후반부터 일본 시장에서 이미 하락 경향을 보이고 있던 농산물 가격이 더욱 폭락했다. ... 일본의 쌀값 하락과 그로 인한 일본으로의 쌀 이입 통제는 조선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의 쌀값은 1926년 백미 100근당 35엔에서 1931년 15엔으로 폭락했다. 그리고 농업공황의 여파로 농산물과 공산품의 가격차가 더욱 확대되었다. 농가의 주요 소비공산품에 속하는 백목면, 석유, 성냥등의 가격지수가 1926년을 100으로 할 때 1931년에는 각각 79, 80, 80으로 하락한 데 반해 쌀값은 1931년에 43으로 폭락했다.
Prebisch-Singer's Thesis의 관철-145-6쪽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구미 제국주의 국가들은 블록경제 형성을 통해 자신들의 시장을 방어함으로써 세계대공황으로 인한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다. 이에 따라 일본 자본주의의 대외시장은 급격히 축소되었고, 일제는 그 대응책으로 '만주사변'을 도발하여 중국시장을 확보하고 엔블록 경제권을 만들고자 했다. 일본 내부에서도 공황과 독점화의 진전으로 유리한 투자기회를 상실한 과잉자본이 퇴적하여 자본수출에 대한 요구가 증대함에 따라 새로운 자본투자처가 필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임금, 원료 및 지가가 저렴하여 이윤획득이 유망한 조선이 일본 과잉자본의 투자처로 주목되었다.
한편 농업공황으로 인한 농가 경제의 파탄과 농민들의 저항으로 식민지배체제의 위기에 처한 조선총독부는 1920년대까지 농업에 집중했던 식민지 경제정책을 전환해야 했다. ... 1931년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우가키(宇?一成)...가 구상한 '조선공업화'의 목적은 조선 내부적으로는 "공업진흥에 의한 생활의 향상과 개선"을 통해 식민지체제를 안정시키고, 외부적으로는 일본을 정공업(精工業)지대로, 만주를 농업지대로 하되 조선은 양축의 연결고리인 조공업(粗工業)지대로 설정하여 엔블록 경제권을 완성한다는 것이었다. ...
일본에서는 이미 1916년부터 '공장법'이 실시되어 노동시간 및 유년노동에 대한 규제, 노동자 생활보장 등이 이루어졌으나, 조선에서는 이 법 역시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을 통한 노동자 착취가 가능했다. -162-3쪽
일본은 1920년대 말부터 진행된 세계대공황과 그에 따른 블록경제화에 대응하기 위해 만주침략을 감행하여 자원의 자급자족을 꾀하고 이를 바탕으로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했다. 이에 따라 일본의 식민지권은 새로이 일본산 중화학공업품의 소비지로서 기능해야 했다. ...
계속된 침략전쟁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일본 경제권 내의 자원, 특히 철과 원유의 자급도는 매우 낮았다. 전쟁수행에 필수적인 이러한 자원은 결국 일본경제권 밖에서 수입해야 했고 그에 필요한 외화결제를 위해 금이 필요했던 것이다. 1941년 태평양전쟁의 도발로 더이상 금이 결제자금으로 필요없게 될 때까지 일본은 '금자금' 특별회계' 보충금 6,000여만 엔을 조선에 투하하고 그 10배에 상당하는 금을 조선에서 채굴해갔다. ...
1930년대 조선의 공업은 양적으로 성장했고 질적으로도 고도화되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일본경제권의 분업구조 속에서 이루어진 지역적 공업화로서 일국적 차원의 재생산 구조를 갖추지는 못했다. 군수공업화의 일환으로 육성된 제철공업은 선철 생산에 지나치게 편중되었고 생산된 선철의 대부분은 일본으로 이출되었다. 조선 내에서 채굴된 철광은 선철로 만들어져 일본으로 이출되고, 그것은 일본에서 강철 또는 기계로 제조되어 다시 조선에 반입되었다.-171-2쪽
대동사상:
유학에서 말하는 이상사회로 '천하가 공평무사하며, 나이든 사람들이 삶을 편안히 마치고, 젊은이들은 쓰여지는 바가 있으며, 어린이들은 안전하게 자랄 수 있고, 남자는 모두 일정한 직분이 있는' 대동세계 ([예기] 예문편)를 그리는 사상-198쪽
북한의 토지개혁(1946. 3. 5)은 일제, 친일파, 민족반역자, 대지주 뿐 아니라 5정보를 기준으로 하되 자경하지 않고 소작을 주거나 고용노동력으로 경작하는 모든 토지는 규모에 관계없이 무조건 무상몰수대상에 포함시켰다. 또 창고, 정미기계, 농기구, 종자 등 토지에 부속된 모든 것을 함께 몰수했다. 토지국유화를 유보하여 분배토지의 소유권은 부여했지만 상속과 매매 등이 금지된 제한된 사유권이었고,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은 생산물의 25%를 현물세로 납부하도록 규정되었다. 이처럼 중소지주를 포함한 모든 지주층을 제거한 북한의 토지개혁은 비슷한 무렵에 동유럽 등 다른 나라에서 시행된 것보다 훨씬 급진적이었다. -230쪽
1949년의 불황은 마샬 원조만으로 미국의 과잉생산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을 보여주었고, 냉존이 격화되면서 미국은 경제적 봉쇄에 군사적 봉쇄를 부가하게 되었다. ...
'NSC 68'은 1950년 4월에 확정되어 6.25 정쟁 발발 후 실행에 옮겨졌다. 'NSC 68'에서 강조된 점은 핵 보복력에 의한 전쟁억제와 함께 전면전 구상에서 소홀히 되었던 통상전력을 강화한다는 것이었다. 'NSC 68'에 의한 군비확장 경제체제로의 전환, 즉 군사비 증액을 통한 적자재정으로 불황을 타개한다는 것은 케인즈 경제학의 논리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의 유효수요창출론은 과잉생산력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생산력 확장을 위한 지출보다 비생산적인 투자와 소비를 의미하는 군사비 지출을 통해 불황을 타개한다는 것이었다. ...
6.25 전쟁은 1949년의 불황을 타개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미국 정부의 재화와 용역에 대한 지출(군수용 지출)은 1950년 말부터 치솟기 시작하여 1951년 말에는 1950년 중반보다 GDP의 7.5%만큼을 더 흡수했다. ...
6.25 전쟁을 계기로 한 미국의 군비지출 증대는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의 생산확대를 자극했고, 특히 일본 경제를 침체의 늪에서 구해냈다. 전시호황으로 일본은 1949-52년 사이에 수출액을 3배로, 이윤을 2배로 늘릴 수 있었다. 이러한 경제팽창으로 닷지(Dodge)의 디플레이션을 통한 안정화계획이 촉구한 합리화의 이득을 충분히 거둘 수 있게 되었다.-253-254쪽
미군정 초기의 대한정책은 ... 북한에서 시행된 토지개혁에 대응하여 예방혁명 차원의 경제개혁을 실시하고 일본의 전쟁수행 능력과 엔블록 경제권을 해체함으로써 남한을 일본경제에서 분리시키자는 것이었다. 함반도가 대일부역 일변도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라고 강조한 국무성의 '조선의 대외무역에 대한 예비조사'(1946. 2)나 일본의 공업시설을 배상 형태로 아시아 각국으로 이전하여 일본의 생산력 기반을 파괴해야 한다는 폴리사절단(대일배상문제 담당)의 중간보고서는 당시의 이러한 미국의 대한정책을 반영한다.
그러나 1947년에 들어 냉전이 본격화되고 제3세계에서 사회주의와 결부된 강력한 민족주의가 대두하자, 독일과 일본의 생산력 기반을 파괴한다는 미국의 종래 정책은 전환되기에 이르렀다. 즉 이제까지와는 반대로 미국이 통제하는 지역경제를 확보하는 수단으로서 양국의 생산력을 유럽과 아시아의 경제재건을 이끌 축으로 평가하여 파괴전략에서 확충전략의 대상으로 설정한 것이다. ... 일본경제의 재건은 더욱 중요하게 부각되어 일본의 달러수입원을 확보해주기 위해 대한원조물자도 미국에서 조달하기보다 가격이 높아도 일본에서 조달한다는 방침까지 세워졌다.-201-2쪽
확실히 농지개혁을 통해 계급으로서의 지주는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으며 6.25 전쟁은 그 몰락을 더욱 촉진했다.-260쪽
귀속기업체 불하방식은 우선권이 부여된 경우와 경쟁입찰에 의한 경우로 나뉘어 진행되었는데, 전자를 통한 불하가 73%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 귀속기업체 불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우선권 부여방식으로 불하받은 사람은 누구였을까. 1950년 3월에 공포된 '귀속재산처리법시행령'에 규정된 우선권자 가운데 1순위로 규정된 임차인 및 관리인은 대부분 일제시기에 해당 기업체의 사무직 이상의 직원이었거나 소액 주주였던 사람, 일제시기나 미군정기의 관리였다. 이들이 '귀속재산처리법'에 규정된 "선량한 연고자"로 둔갑하여 1950년대의 신흥 자본가로 등장하게 되었다. ...
... 농지개혁이 부르주아적 발전의 길을 여는 데 걸림돌이었던 계급으로서의 지주를 해체하는 과정이었다면, 귀속기업체 불하는 한국 자본주의의 새로운 담당자로서 부르주아 계급을 육성하는 과정이었다. -263-4쪽
1950년대 사적 대자본은 생산과정에서 절대적 잉여가치를 수취하는 산업자본이면서도 특혜를 수반한 유통구조에 기생하는 상업자본적 성격도 뚜렷했다. 원료독점이 기반인 실수요자제 공업은 물론 일반공매제에 의한 원조물자 배정도 공정환율과 시장환율의 큰 차이로 수익성이 좋았기 때문에 상업자본의 좋은 투자처가 되었다. ... 1990년대의 10대 재벌 가운데 대우를 제외한 9개 재벌이 이 시기에 이미 주력기업을 형성했다.-281-2쪽
국내시장의 정체는 해외시장을 필요로 했지만 [cf. 로자 룩셈부르크] 종속적 독점에 기반한 축적구조로는 해외시장 확보에 한계가 있었다. 정부의 각종 특혜로 유지되면서 생산외적 계기에서 더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는 축적구조에서는 생산력 향상을 통한 수출경쟁력 제고를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수출 규제도 큰 장애요인이었다. 미국은 원조원료로 가공된 제품의 수출을 금지하다가 불황 이후 수출용 제품에 사용된 원조원료를 미국산 원료로 대체하여 수입할 경우 수출을 허가했다. 그러나 이 의무규정은 생산원가 이하의 출혈 수출로 벌어들이는 외화로는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1955-63년 동안 ... 수입대체 효과는 1차산업에서는 오히려 마이너스를 보이면서 경공업 중심으로 확대되어갔다. 즉 수입대체공업화는 국내수요를 주도한 사회간접자본이나 1차산업 부문과 유기적인 연관을 이루지 못해 국내수요를 재생산 기반으로 구축하지 못했다. 결국 종속과 독점에 기반한 몇몇 소비재 공업 중심의 수입대체공업화는 국내 생산 부문들 간에 분업적 연관 메커니즘을 형성하여 자율적 국민경제구조를 구축하려는 노력과는 거리가 멀었다.-285쪽
경제계획에 기반한 국가 주도의 산업화 지향은 박정희정권기뿐 아니라 이승만 정권기와 장면정권기에도 추구되었다. 이승만정권기에는 수입대체산업화가, 박정희정권기에는 수출지향산업화가 추구되었는데, 그 차이는 기본적으로 개발재원의 성격에서 기인한다. 이승만정권의 수입대체산업화 재원이 주로 상환이 필요없는 원조였던 반면에 박정희정권의 수출지향산업화 재원은 상환을 요구하는 차관이었기 때문에 수출에 의한 외화수입이 필수적이었다. ...
이승만정권이 차관에 의한 수출지향산업화에 적합하지 못한 이유는 반일주의에 있었다. 미국이 아시아에서 구축하려 했던 일본 중심의 지역통합체제는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로 조속한 실현이 요구되었다. 미국의 주선으로 한,일간 무역교섭과 과거 청산을 위한 회담이 이승만 정권기에도 이루어졌지만, 권력의 정당성을 반공과 반일에 둔 이승만 정권으로서는 일본자본의 수입에 기반한 수출지향산업화에 적극적일 수 없었고, 결국 박정희정권이 이를 대체하게 되었다. 따라서 박정희정권의 차관에 기반한 수출지향산업화로의 전환은 국제환경의 변화에 따라 선택된 측면이 컸다.-314-5쪽
군사쿠데타로 성립한 박정희정권의 자율성이 전환의 주요 계기였다는 발전국가론의 분석시각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일면적이고 결과론적이다. 첫째, 수출지향산업화는 어느 정권이건 수입대체산업화가 포기될 경우 채택할 수밖에 없는 선택지였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의 자율성만이 그 전환을 가능하게 했다고 볼 수 없다. ...
둘째, 전환의 내부요인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박정희 정권의 자율성을 전환의 주요 계기로 보기는 어렵다. ... 국가자율성의 내적 측면에서 이승만 정권 역시 박정희정권만큼 '독립적'이었다.-314쪽
4.19의 열린 공간의 가능성은 칠레 아옌데(Allende) 정권의 가능성과 유사했다. 새로운 경제시스템을 형성하기 위한 '제도의 배열'이 '계급정치의 중심과제'라는 면에서(정태인 1998, 235) 당시의 민중역량을 평가해 보아야 하지만, 이 두 정권은 그 가능성의 실험을 온전히 해볼 겨를도 없이 군사쿠데타로 무너졌다.-318쪽
결국 발전국가론은 '공사협조'와 '축적적 간섭'에서 '적소' 배치와 '부패'를 가르는 기준, '연고자본주의', 정경유착의 효율과 비효율을 가르는 기준을 관료독립성의 한 근거인 관료의 도덕성이라는 추상적 수준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다. 그나마 (경제)관료의 자율성도 박정희정권 후반기로 가면서 점차 축소되어 대통령 직할의 일원적 관리체제가 구축되었다. 경제부처보다 대통령 비서실의 역할이 강화되었으며 새로운 정책의 추진도 기존 관료조직보다 대통령이 직접 관리하는 초관료적 임시 직책을 통해 수행되었는데, 관료는 자율성보다 정책집행 능력이 중시되어 박정희 정권기의 국가는 '한국주식회사'라기보다 하나의 군대였다.-323쪽
국가의 개입과 그것을 가능하게 한 국가의 자율성 및 관료의 독립성을 성장의 주요 동인으로 간주하는 발전국가론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비판될 수 있다. 첫째, 발전국가론이 국가자율성의 주요 논거로 들고 있는 노동운동이나 좌익운동, 지주와 같은 '반대연합'의 부재, 자본으로부터의 정치적 독립 특히 정치자금의 독립 등의 요소를 박정희 정권 자율성의 근거로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이다. ...
둘째, 자율적인 국가의 주도로 사적 자본을 견인하고 통합한 정경유착의 구조가 성장에 오히려 효율적이었다는 주장은, IMF를 위시한 신자유주의의 이해를 경계한다 하더라도 최근의 경제위기 상황에서 부각된 정경유착과 재벌의 문제와 관련하여 일면적이라는 것을 반증해준다. ???? ...
셋째, 발전국가론은 국가자율성의 기초로 노동의 정치활동 약화나 평등한 분배에 의한 노동의 포섭을 이야기할 뿐, 고도성장에 대한 노동의 기여도를 시각에 넣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 ...
넷째, 냉전체제하의 정치군사적 종속이 고도성장의 주요 요인이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냉전체제를 기초로 미국의 이해에 정치군사적으로 종속된 박정희정권의 고도성장은 '초청된 산업화'라는 성격이 크다.-320-5쪽
발전국가론의 현실적 함의
(1) 발전국가론은 동아시아의 경제적 성공을 결과론적으로 추수하는 '동아시아 자본주의 발전 모델=일본 모델'을 옹호할 뿐 신자유주의에 대한 궁극적 대안이 될 수 없었다는 점이다.
(2) 발전국가론은 발전국가의 경제성장을 결과론적으로 추인하고 이론화하는 과정에서 권위주의 정권을 합리화하고 민주주의를 그 범주 내로 한정한다.
(3) 발전국가론은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에 내재되어 있는 종속구조를 파악하지 못함으로써 종속으로 인해 민중의 사회통제와 같은 국민경제 발전의 또다른 선택 가능성이 부정된다는 점을 간과한다. 따라서 최근의 경제위기를 '제2의 아편전쟁'으로 비유하면서 '월가-미국 재무부-IMF 복합체'의 음모론으로 파악하지만, 그것이 자본주의 이회의 다른 선택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326-9쪽
1960년대 수출의 증가에는 자유무역주의 이념을 표방하며 관세와 비관세 장벽을 완화한 브레튼우즈 체제, 원조가 아니라 무역확대를 통한 선진국의 후진국 지원을 주장한 UNCTAD(유엔무역개발회의)의 성립(1964) 등과 같은 국제환경적 요인이 작용했다(정일용, 271). 특히 베트남 찬전의 대가로 미국은 한국을 '바이 아메리칸' 정책에서 제외시켜 미국시장을 개방했다(정성진, 135). 미국시장에 대한 수출은 1961년 총수출액의 16.6%에서 1971년에는 49.8%에 달했는데, 그 중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기간에 26% 정도이던 것이 제2차 계획 기간에는 52%로 급증했다(전택수, 143).-345쪽
박정희정권에게는 1969년의 닉슨 독트린, 1971년 주한미군 제7사단 철수, 미중화해로 대변되는 냉전구조의 균열 등 국제정치환경의 변화가 1971년의 양대 선거로 표출된 그간의 경제개발전략에 대한 도전보다 더 위협적 요인이었고, 실제로 한미간 갈등도 표면화되었다. ... 한미관계는 '긴장된 동맹(strained alliance)'의 양상을 띠었다.
그러나 권력유지를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던 박정희정권의 '대미자주성'과 그로 인한 한미관계의 긴장과 갈등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에도 기본적으로 종속관계는 유지되었고, 강력한 미국의 부활을 주창한 레이건 행정부의 등장과 함께 전두호나정권은 갈등요인이었던 자주국방을 포기하고 미국과 종속적 밀월관계를 재구축했다(김창수, 356-359).-346-7쪽
국내외 정치경제적 환경의 변화에 따른 박정희정권의 대응은 경제적으로는 중화학 공업화 선언으로, 정치적으로는 유신체제로 나타났다. 달러의 금태환 일시 정지를 선언한 '닉슨 쇼크' (1971)는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와 신보호무역주의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이어서 자금과 시장을 해외에 의존하며 경공업 수출 위주로 재생산을 유지해가던 한국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최용호, 86). 더욱이 선진국이 기술, 지식집약형 중화학 공업으로 이전하고 노동집약적 조립가공형 중화학 공업을 후발국에게 이전하는 국제분업체계의 변화는 (이재희, 101-102) 이에 대한 적응, 곧 또 다른 종속을 요구했다. -347쪽
대미관계를 중심축으로, 대일관계를 보조축으로 한 한국 자본주의의 순환구조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 자본주의 분업구조 속에서 말단의 '생산공장'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기능할 수 있었다. 이 가운데 정치군사적 대미종속은 한국 자본주의의 고도성장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조건이었다. 대미, 대일의존에 기반한 고도성장은 정치적으로 독재권력이라는 위로부터 정치적 조직체의 완성, 즉 독재권력의 내포화를 통한 상의하달식 조직체를 완성시키는 과정임과 동시에 그 원인이기도 했다. ...
대미, 대일 종속에 기반한 고도성장과 독재체제는 대북생산력 경쟁에서의 우위 확보를 요구한 냉전적 조건을 통해 완성될 수 있었다. ... 반공독재와 경제발전이라는 역사적 현상을 통일적으로 파악할 경우, 박정희정권기의 특징은 1950년대에 정치적 구호에 머물러있떤 반공을 경제적 개념으로 질적 전환시켰다는 점이다. -349쪽
최근 박정희 재평가에서 일부 나타나는 분리평가의 경향, 즉 경제적 고평가와 정치적 저평가는 냉전체제하의 종속, 반공독재체제라는 박정희 정권기의 특징적 요소를 정치적 목적에 따라 분리한 것일 뿐이다. 이 두 요소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 분리될 수 없으며 오히려 서로를 규정하면서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것이었다.-3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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