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겨레의 운명
김 낙 중
[1] 나 (김낙중)의 삶
1) 나의 소년, 청년시절
나(김낙중)는 1931년 일본이 중국침략을 시작한 해에 태어나서, 제2차세계대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유년시절을 지냈고, 1945년 8.15 후의 혼란 속에 소년시절을 지내다가 20세가 되는 1950년에 6.25 동족상잔의 전쟁을 맞아 전쟁 속에서 청년이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나의 삶은 전쟁의 화약 냄새 속에 태어나서, 전쟁의 포탄소리 속에서 성장하여, 전쟁과 싸우는 한평생을 살았습니다.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인 1946-50년 당시 나는 “죽음”이라는 문제와 씨름하는 참으로 목마른 구도자였습니다. 그 까닭은 내가 당시로서는 죽음의 병이라고 알려졌던 폐결핵에 걸렸었기 때문입니다. 아침 10시에는 새문안 교회에 나가서 성경공부도 하고, 목사님의 설교도 열심히 들었습니다. 점심 먹고 오후 2시에는 태고사(지금의 조계사)에 가서 스님의 설법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오후 4시에는 기독교회관(Y.M.C.A)에서 있었던 함석헌선생의 무교회주의 집회에 나갔습니다. 그때의 나는 참으로 “朝聞道면 夕死可矣”(아침에 진리의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겠다).라고 하신 공자님의 말씀을 이해할 것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나는 학교 공부보다 종교 철학 등의 서적을 탐독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1950년 6.25 그날 까지도 내 인생 철학의 문제를 풀지 못한 채, 전쟁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 수 없었습니다.
1950년 6.25에 남북간에 전쟁이 터지자 서울은 일주일도 못가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치하로 되었고, 나는 서울에 머물 수 없는 처지라서 시골로 가야했는데, 가는 길가에는 여기저기 군인들의 처참한 시체가 널려 있었고, 부서진 장갑차가 여기저기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곧 7월에는 인민군을 돕기 위한 의용군 모집이 시작되었고, 많은 내 초등학교 동창생들이 의용군에 입대해서 인민군과 함께 전선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왜 의용군에 나가서 소련제 총을 들고 미국제 총을 든 국방군과 싸워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산속으로 들어가 숨어버렸습니다. 그러다 1950년 9.28 수복으로 마을에는 다시 국군이 들어왔고, 나는 다시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군에 입대해야 할 연령이었기 때문에 관청에 등록을 하고, 총을 들고 국군에 나가야 할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국군에 나가서 의용군으로 나간 동창생들에게 총질을 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습니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한다면 총 들고 전쟁터에 나가서 동포형제들을 죽이려 하다가 자신이 총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러던 차에 1950년 10월 나는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 자리에 주둔한 미군부대에 취직을 했고, 곧 그들을 따라 부산으로 피난가게 되었고, 다음해인 1951년 10월경에는 부산 피난지에서 개교한 서울고등학교에 등록을 하고, 다음해 4월에는 부산 피난중의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지난 몇 달 동안 전쟁의 와중에서“사람이 산다”는 것은 싫으나 좋으나 “사회”라고 불리는 “겨레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사람의 삶”은 본질적으로 “겨레와 함께” 즉 ‘사회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전쟁은 일어났고, 전쟁은 나에게 총 들고 싸움터로 갈 것을 강요하는 것이 바로 나의 인생이라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사회학과”를 선택하여 이 “사회”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왜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는지? 왜 우리는 남북으로 분단되고, 좌우로 분열하여 동족상잔의 전쟁을 해야 하는지? 왜 세계는 온통 미소 양대 진영으로 나뉘어 핵전쟁의 위험 앞에서도 싸움질을 하고 있는 것인지? 사람은 사는 게 목적일 텐데, 왜 사람들은 이렇게 서로 죽여야 만 되는지? 그것을 탐구해야만 했습니다. 물론 내가 아무리 목마르게 열심히 찾아 다녀도, 그 답이 쉽게 찾아질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나에게는 또 하나의 고통스러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나는 당시 밤이면 부산 부두에서 돈벌이를 해야 했는데, 부산 부두에는 매일 같이 피범벅이 되어 철도편으로 실려 오는 젊은 부상병들과 시체들을 목격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학교에 가면 이승만 정부의 요구에 따라 학도호국단 간부들의 인솔 하에 “휴전반대 북진통일”을 외치는 거리 데모에 동원되는 처지에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학생 증집보류”라는 특혜를 받아 자기 자신은 군대에 나가지 않고 후방 부산에서 대학에 다니면서, “휴전반대 북진통일”을 외치며 거리 데모를 한다는 것이 도저히 양심에 허락되질 않았습니다.
나는 인민군에 나가기를 피했듯이, 또 국군에 나가기를 피했듯이, 또 다시 “휴전반대 북진통일”을 외치는 데모대열에 참여하기를 피해서 뒷산(대덕산) 나무 그늘로 가서 숨었습니다. 나는 나무 밑에 숨어서 무척 고민을 했습니다.
“너는 뭐냐? 너는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고, 북의 인민군에 나가기도 피하고, 남의 국군에 나가기도 피하고, 지금은 또 “휴전반대 북진통일”을 외치는 시위에 나가기도 피하고, 너는 도대체 뭘 하자는 것이냐?”“네가 이렇게 비겁하게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면서 산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런데 또 이 세상 사람들은 지난 3년 동안의 전쟁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죽었는데도, 아직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어째서 한 사람도 없는 것일까?”나는 계속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는 자비를 가르치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라는 스님들도, 사랑을 가르치신 예수님의 제자임을 자처하는 목사님, 신부님들도 왜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정책을 반대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당시의 한국에 지금 이 자리에 계신 퀘이커 여러분들이 계셨더라면 아마도 감옥에 가는 일이 있더라도 “전쟁을 멈추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민족통일을 추구해야 된다”고 나와 함께 항의를 하시는 분이 계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1950년대 당시의 이 땅에는 그런 사람을 한 분도 볼 수가 없었고, 나는 한 사람의 동지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신이 실수로 잘못 태어난 게 아닐까? 나는 종류가 다른 딴 세상에 태어나야 했을 사람은 아닐까? 왜 사람들에겐 눈물이 없는 것일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고 했는데도 어째서 아직 무력에 의한 목적 추구의 방법을 멈추고, 평화적으로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일까?
1954년 4월 나는 이런 세상이라면 살려고 애착을 가질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결론했습니다.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으며 살아온 나에게 사람들은 형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기 보다는 기를 쓰고 서로 죽이기를 강요하는 이런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됐습니다.
그래서 나는 죽음을 결심한 다음, 목욕재계하고, 머리 박박 깎고, 하얀 한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눈물을 찾는다”는 뜻의 탐루(探淚)라고 쓴 등불 하나를 들고 부산 광복동거리로 나갔습니다.
“눈물을 가진 사람은 없는가? 눔물을 가진 사람은 없는가?”“전장에서 피 흘리며 쓰러진 동포 형제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려 줄 사람은 없는가?” “이 겨레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서 세계열강의 분할정책을 반대하며, 진정으로 눈물 흘려 줄 사람은 없는가?” “전쟁반대, 평화통일 만세”를 소리치며 길거리를 혼자 누비고 다녔습니다.
물론 나는 몇 시간도 안 되어 경찰서에 잡혀 갔습니다. 그런데 나를 잡아간 결찰서의 책임자가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평화통일을 주장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평화통일을 하자는 말이요?” 그 말을 듣고 보니 사실 나에게 구체적인 평화통일 방안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2) 겨레의 평화통일을 위한 나의 몸부림
그래서 경찰서에서 풀려난 다음 나는 어떻게 하면 우리 민족이 평화적으로 통일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열심히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년 뒤 나는 “통일독립청년공동체 수립안”이라는 평화통일방안을 만들어 이승만 대통령에게 청원서로 제출했습니다. 우리 헌법에는 모든 국민에게 청원권이 보장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나 나는 이 승만 정부에 의해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구속되어 조사를 받았고, 정신병자 취급을 받고 풀려났습니다. “호전적인 공산도당과 평화통일을 하자고 주장하는 놈은 정신병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제출했던 똑 같은 평화통일방안을 가지고 다시 북조선에 갔습니다. 북측이 그 동안 전쟁의 방법으로 통일을 추구해 봤으나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이제는 평화통일의 길에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임진강을 넘어 평양에 간 나는 북녘 당국으로부터 남한 당국에 의해서 특파된 간첩이라는 혐의를 받고, 남조선 간첩이라는 죄명으로 기소되어 머리를 박박 깎이었습니다. 나는 평양 감옥에서 단식투쟁도 하고, 늑막염에 걸리기도 하여 쇠약할 대로 쇠약해져서 6개월 이상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56년 6월에 나는 재판 없이 다시 남한으로 송환조치 되었습니다. 북조선 당국은 내가 가지고 간 평화통일 방안에 대해서는 그것을 그대로 찬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측 당국이 원한다면 언제든 토의할 용의가 있다고 전달하라 했습니다.
휴전선을 넘어 남으로 넘어온 나는 미군 및 국군 정보기관들에서 3개월 동안 거짓말탐지기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많은 심문을 받고, 다시 한국 경찰로 넘겨져서 혹독한 고문에 의한 조사를 받았습니다. 나는 검찰에 넘겨져 “북에서 1년간 어떤 간첩훈련을 받았냐?”고 추궁당했고, 간첩 및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기소되었습니다. 재판 결과로 간첩죄는 무죄로 판결되었으나,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며, 1년 징역형을 받았습니다.
남북을 오가면서 내가 얻은 결론은 남이건 북이건, 권력 당국에게 필요한 것은 “이 땅의 백성들이 평화롭게 함께 더불어 사는 평화통일 방안” 그 자체가 아니라, 그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권력을 상대방 지역까지 확대하는가? 하는 것에 관심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남과 북의 집권자들이 입으로는 “자유”를 말하고, “평등”을 말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는 국민들의 자유, 공산주의 사회에서 권력이 없는 인민들의 평등이란, 자기의 부와 권세를 유지 확장하기 위한 감언이설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Corea의 평화통일 문제도 방법을 몰라서 평화통일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평화통일이 진정으로 필요한 민중들, 당시는 전체 주민의 80% 이상이 농민들이었는데, 민중들에게는 힘이 없고, 강력한 외세를 업고 돈과 권세를 가진 권력자들은 평화통일에 뜻이 없기 때문에 민중들은 정권 당국들의 권력투쟁을 위해서 동포간의 상쟁에 내몰리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3) 나의 농민운동과 노동운동
1957년 이후 나는 다시 대학에 들어가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 했습니다.
1957년부터 약 10년 동안 나는 “한국농업문제연구회” 회원으로서 또 연구위원으로서, 또는 농민 계몽을 위한 “농원”이라는 월간잡지 기자로서, 한국의 농업문제와 한국 농민운동의 발전 가능성을 모색하려 애썼습니다. 그러나 나는 실패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1960년까지의 이승만 정권은 미국이 무상으로 제공하는 잉여농산물을 무제한으로 들여다 한국 시장에 팔아서 국방비에 충당하고 있었습니다. 정부는 대북 군비경쟁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에, 농민들은 감히 “반공”을 위해 강요되는 정부의 농업정책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던 것이며, 둘째는 1960년 4월에 학생들 봉기로 이승만 정부는 물러갔으나, 1961년 5월 군부의 쿠데타로 박정희 정부가 들어섰고, 나는 1963년 4월 군사정부에 의해서 “학원간첩”이라며,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을 구형받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도하 각 신문에는 김낙중이 과거 1955년에 북조선에 갔다가 1년간 간첩교육을 받고 남파되었는데, 그것을 숨긴 채 학원에 침투해서 활동했다고 대서특필로 보도하며 “학생들은 학원에 침투한 간첩을 조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의 반정부운동이 조금 조용해지자 정부 당국은 결국 얼마 후 나에게 내가 친구들에게 “북조선에도 무료교육이나 무료 의료제 같은 좋은 점도 있다고 말해서 북조선을 찬양했다”는 죄목으로 반공법을 위반했다며, 3년6월의 징역형을 주는 것으로 끝내고 말았습니다. 결국 군사정부가 나를 학생 탄압용으로 이용했던 것입니다.
3년6월의 징역형을 복역한 뒤, 나는 지금의 부인과 결혼해서 생활인이 되었습니다. 1965년 이래 남한 경제는 급속히 산업화의 길을 걷고 있었으며, 많은 농민들은 이미 농촌을 떠나 도시 노동자화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의 주인으로 되어야 할 백성들은 농민에서 노동자로 변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농민운동 대신에 노동문제 연구와 노동운동에 종사할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고려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를 내 직장으로 선택했습니다.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노동교육을 하기도 하고, 농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협동교육을 하기도 하며, 민중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도록 하는 교육에 나의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오래 가지는 못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에 장기집권을 위한 유신헌법을 만들었고, 학생들이 유신반대의 투쟁을 시작했는데, 정부당국은 학생들을 공포분위기로 진압하기 위해서 다시 간첩사건이 필요해졌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10년쯤 지나면 신문에 보도됐던 지난 사건을 잊기 마련인 모양입니다.
1973년 노동조합 간부들에 대한 교육을 위해서 제주도에 출장 갔던 나는 중앙정보부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고, 중앙정보부에서는 고려대학교 강사로 있던 김낙중이가 학생들을 모아놓고 유신을 반대하는 내란을 일으켜 현정부를 타도하고, 사회주의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선동했다고 자백할 것을 고문으로 강요하였습니다. 나를 고문하는 사람들은 “북에 갔다 온 경력도 있는 네가, 무엇 때문에 하필이면 빨갱이들이 좋아하는 농민문제, 노동문제의 언저리를 맴돌며 사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노동자 농민 힘으로 혁명을 해야 된다고 주장한 공산주의자임이 분명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육신을 가진 나는 고문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내란을 선동했다고 지장을 찍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1970년 독일 에버트재단의 초청을 받고 독일의 노동문제 세미나에 참석하려고 여권 신청했던 서류들을 들고 와서, 만약 독일로 가는 여권이 나왔다면 독일로 가서 동독을 거쳐 북조선으로 탈출해서 남한의 정보를 북측에 제공하려 했다는 죄명을 만들어 나를 ‘간첩예비죄’로 추가 기소하여 무기징역을 구형했습니다. 나는 결국‘간첩예비죄’로 7년간 1970년대 또박 징역살이를 했습니다.
나는 형기를 마치고 1980년에 사회에 나왔으나 광주항쟁을 무력진압하고 집권한 전두환 정권하에서 나는 "정치활동정화법"에 의하여 활동이 제약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집에 들어앉아 글이나 쓰는 것이었습니다. 덕분에 나는 “한국노동운동사” “사회과학원론” “민족통일을 위한 설계”등의 저서를 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 후반 노태우 정권시대에는 민주화운동의 진전 덕분에 나는 통일문제에 대해 여러 곳에서 발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드디어 1999년 9월에는 나는 국회 통일특별위원회가 주최한 공청회에서 “민족통일촉진회”라는 시민단체의 정책의 의장 자격으로 “3차7개년계획에 의한 4단계통일방안”이라는 평화통일방안을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서 다시 어려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듬해인 1990년 북조선 당구에서 나에게 사람을 보내온 것입니다. 김일성주석께서는 과거 내가 북조선에 갔을 때 고생했던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면서, 이번에 내가 국회에서 발표한 통일방안을 “좋은 평화통일방안”이라고 하시면서, 평화통일을 위해서 함께 협조하자는 말씀을 전하기 위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실정법상 북한에서 온 사람과는 허가 없이 접촉할 수 없으며, 신고하지 않을 경우에는 처벌하는 “국가보안법”이라는 실정법이 있기 때문에, 나는 나를 찾아온 북측 사람을 당국에 신고해서 잡아주어야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처벌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를 신고하면 북에서 온 그는 분명히 사형이나 무기징역이 선고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내가 실정법을 어기고 나와 나의 가족이 수난을 받게 되느냐? 아니면 내가 당국에 신고 해서 북측에서 온 사람을 체포케 하고, 김일성주석의 평화통일에 대한 호의를 뿌리칠 것이냐? 하는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된 것입니다. 나는 3남매의 아버지이며 가장이었고, 나는 남한의 대중매체들에도 자주 나가는 공인이었습니다. 나는 무척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북측 사람들과의 접촉을 신고할 수 없었고, 계속 북측 사람들과 만나서 여러 가지 민족문제들을 토의 했습니다. 물론 나의 의견과 북측 당국의 의견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확인하고, 나는 나의 의견을 설명하기 위해 나의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얼마 가지 않아 1992년 남한 당국에 의해서 체포되었고, 사형을 구형받아 무기징역을 언도 받았습니다. 1998녀 8.15에 김대중대통령 정부에 의해서 형집행정지로 집에 오기는 했지만, 지금도 나는 여전히 형집행정지중의 ‘무기수’이며, 투표권도 없고, 해외여권도 나오지 않는 그런 부자유한 신분의 소유자입니다.
그러고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다 하자면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다만 한 가지만 말씀 들이자면, 나는 내가 “평화통일”을 위해 북조선에 갔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리고 내가 농민과 노동자 편에서 일했다는 사실과 북조선에서 온 사람들을 나와 똑 같은 동포형제로 대했다는 사실 때문에, 수없이 여러 번 참기 어려운 고문에 시달려야 했고, 또 죽음 앞에 서야만 했지만, 사람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지금 여기 이렇게 여러분 앞에서 말씀드리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리고 나의 삶을 인도하신 하나님께 무한히 감사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릴 뿐입니다.
[2] 우리 겨레의 운명
이제 우리 겨레의 운명에 관하여 말씀드릴 차례입니다. Corean민족은 몇 천년 오랜 역사를 이 땅에서 주로 밭과 논에 씨 뿌리고 거두는 경작농사를 지으며 평화롭게 살아온 백성입니다. 주변에는 강대국들이 나타나서 수없이 여러 번 침략전쟁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무력적 강국이 되어, 이웃 나라를 침략해서 다른 민족을 노예로 삼으려 한 일은 한번도 없는 그런 민족입니다. 물론 남한 군대가 강대국 미국의 요구에 못 이겨 월남이나 이라크에 파병한 것과 같은 슬픈 일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비록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문명사 속에서 Corean들은 열심히 이웃 사람들의 문화 풍습을 존중하고 배우면서 평화롭게 살려고 무척 노력하며 살았습니다.
기록이 남겨진 지난 5,000년의 인류 문화사를 되돌아보면 지구촌에는 유형적으로 크게 분류해서 3대문명권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갠지스강과 인더스강 유역에 형성됐던 “인도문화권”, 둘째는 황하와 양즈강 유역에서 발달한 “중화문화권”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유프라데스강 나일강가에서 발원해서 에헤게 바닷가의 그리스와 지중해의 로마로 흘러갔고, 지중해에서 유럽 대륙과 영국을 거쳐,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뻗어간 “지중해문화권” (또는 서양문화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Corean들은 이 이웃 사람들의 문화를 열심히 받아들여 “평화롭게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려고 이들 문화를 배우려 무척 노력했었습니다. 그 결과로 Corea 땅에서는 지금부터 1,000년 전에 있었던 고려왕국 시대까지는 주로 “인도문화”의 정수인 불교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불교문화에 이러저러한 폐단들이 생기자, 약 600년 전에 성립했던 조선왕국에서는 “중국문화”의 정수인 유교와 도교 등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역시 폐단들이 생겼고, 그러다 100년 전부터 “서양문화”라고 불리는 “지중해문화”가 밀려오기 시작하자 Corean들은 드디어 약육강식의 논리에 따라 바다 건너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다시 태평양을 건너온 해양세력 미국과 유라시아대륙을 넘어온 대륙세력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습니다. 우리는 강자인 미, 소에 의하여 이 땅의 남과 북에 세워진 두개 정권에 의한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으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싸움의 틈새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서양문화 즉 지중해문화는 역시 우리의 삶에서 여러 가지 폐단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우리는 그 한계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우리 민족이 21세기 전인류공동체인 ‘한겨레’의 삶을 위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야만 할 세계사적 사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 김낙중이란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부닥친 문제들이란 결국 Corean들이 살아온 세계문명사 속의 문제이며, 특히 현대 서양문명이 갖고 있는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한계를 나타내기 시작한 문제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신론과 무신론, 유물론과 관념론, 진화론과 창조론, 사적소유제의 자본주의와 사회적 소유제의 사회주의, 개인주의와 전체주의, 미소 양대진영의 냉전체제, 핵무기와 테러리즘, 황경오염과 생태계의 파괴, 이런 것들이 모두 현대 지중해문화가 가져온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난 60년간의 삶의 체험에서 우리 Corean들은 지난 수천년의 역사적 경험에서 지금은 우리가 서구문화의 한계를 극복해야만 살 수 있는 단계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이를 해결해야만 할 중대한 과제를 안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따라서 나는 Corean의 평화적 남북통일이라는 것은 결코 Corean들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고,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이 앞으로 “한겨레”를 창조하기 위해서 무엇을 찾아야만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찾는 우리 모두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통일된 Corea에 세워지는 사회는 앞으로 형성될 “한겨레”의 작은 모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에서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최강의 힘을 가지고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미국문화는 우리가 추구하는 “한겨레”의 문화가 될 수 없습니다.
앞으로 형성될 “한겨레”의 문화는 기독교, 이스람교, 부라만교, 불교 등 모든 종류의 종교가 존중되고, 유신론과 무신론이 공존하는 상생의 문화이며, 유물론도 좋고 관념론도 좋은 공존의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핵무기의 힘이 역사를 지배하는 것도 아니고, 테러리즘의 폭약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오직 서로의 처지를 헤아릴 줄 아는 (易地思之) “사랑”만이 문제를 해결하는 문화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겨레”의 문화는 “생명의 문화”“사랑의 문화” “평화공존의 문화”“상생의 문화”가 될 것입니다. 지구촌의 여러 민족들은 저마다의 빛깔을 가지고, 빛깔과 모습이 다른 서로를 존중하면서, 평화롭게 함께 더불어 조화를 이루며 사는 총천연색의 세상을 만들어야 될 것입니다.
나는 나, 김낙중 개인의 삶이 Corean이라는 민족의 운명과 별개일 수 없었듯이, Corean이라는 한 개 민족의 삶도 “한겨레”라는 “전인류공동체”의 삶과 별개일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앞으로 21세기의 이 지구촌에 평화롭고 아름다운 “한겨레”를 건설하기 위하여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협조가 있기를 바라면서 제 말씀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김 낙 중
[1] 나 (김낙중)의 삶
1) 나의 소년, 청년시절
나(김낙중)는 1931년 일본이 중국침략을 시작한 해에 태어나서, 제2차세계대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유년시절을 지냈고, 1945년 8.15 후의 혼란 속에 소년시절을 지내다가 20세가 되는 1950년에 6.25 동족상잔의 전쟁을 맞아 전쟁 속에서 청년이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나의 삶은 전쟁의 화약 냄새 속에 태어나서, 전쟁의 포탄소리 속에서 성장하여, 전쟁과 싸우는 한평생을 살았습니다.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인 1946-50년 당시 나는 “죽음”이라는 문제와 씨름하는 참으로 목마른 구도자였습니다. 그 까닭은 내가 당시로서는 죽음의 병이라고 알려졌던 폐결핵에 걸렸었기 때문입니다. 아침 10시에는 새문안 교회에 나가서 성경공부도 하고, 목사님의 설교도 열심히 들었습니다. 점심 먹고 오후 2시에는 태고사(지금의 조계사)에 가서 스님의 설법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오후 4시에는 기독교회관(Y.M.C.A)에서 있었던 함석헌선생의 무교회주의 집회에 나갔습니다. 그때의 나는 참으로 “朝聞道면 夕死可矣”(아침에 진리의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겠다).라고 하신 공자님의 말씀을 이해할 것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나는 학교 공부보다 종교 철학 등의 서적을 탐독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1950년 6.25 그날 까지도 내 인생 철학의 문제를 풀지 못한 채, 전쟁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 수 없었습니다.
1950년 6.25에 남북간에 전쟁이 터지자 서울은 일주일도 못가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치하로 되었고, 나는 서울에 머물 수 없는 처지라서 시골로 가야했는데, 가는 길가에는 여기저기 군인들의 처참한 시체가 널려 있었고, 부서진 장갑차가 여기저기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곧 7월에는 인민군을 돕기 위한 의용군 모집이 시작되었고, 많은 내 초등학교 동창생들이 의용군에 입대해서 인민군과 함께 전선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왜 의용군에 나가서 소련제 총을 들고 미국제 총을 든 국방군과 싸워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산속으로 들어가 숨어버렸습니다. 그러다 1950년 9.28 수복으로 마을에는 다시 국군이 들어왔고, 나는 다시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군에 입대해야 할 연령이었기 때문에 관청에 등록을 하고, 총을 들고 국군에 나가야 할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국군에 나가서 의용군으로 나간 동창생들에게 총질을 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습니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한다면 총 들고 전쟁터에 나가서 동포형제들을 죽이려 하다가 자신이 총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러던 차에 1950년 10월 나는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 자리에 주둔한 미군부대에 취직을 했고, 곧 그들을 따라 부산으로 피난가게 되었고, 다음해인 1951년 10월경에는 부산 피난지에서 개교한 서울고등학교에 등록을 하고, 다음해 4월에는 부산 피난중의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지난 몇 달 동안 전쟁의 와중에서“사람이 산다”는 것은 싫으나 좋으나 “사회”라고 불리는 “겨레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사람의 삶”은 본질적으로 “겨레와 함께” 즉 ‘사회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전쟁은 일어났고, 전쟁은 나에게 총 들고 싸움터로 갈 것을 강요하는 것이 바로 나의 인생이라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사회학과”를 선택하여 이 “사회”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왜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는지? 왜 우리는 남북으로 분단되고, 좌우로 분열하여 동족상잔의 전쟁을 해야 하는지? 왜 세계는 온통 미소 양대 진영으로 나뉘어 핵전쟁의 위험 앞에서도 싸움질을 하고 있는 것인지? 사람은 사는 게 목적일 텐데, 왜 사람들은 이렇게 서로 죽여야 만 되는지? 그것을 탐구해야만 했습니다. 물론 내가 아무리 목마르게 열심히 찾아 다녀도, 그 답이 쉽게 찾아질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나에게는 또 하나의 고통스러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나는 당시 밤이면 부산 부두에서 돈벌이를 해야 했는데, 부산 부두에는 매일 같이 피범벅이 되어 철도편으로 실려 오는 젊은 부상병들과 시체들을 목격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학교에 가면 이승만 정부의 요구에 따라 학도호국단 간부들의 인솔 하에 “휴전반대 북진통일”을 외치는 거리 데모에 동원되는 처지에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학생 증집보류”라는 특혜를 받아 자기 자신은 군대에 나가지 않고 후방 부산에서 대학에 다니면서, “휴전반대 북진통일”을 외치며 거리 데모를 한다는 것이 도저히 양심에 허락되질 않았습니다.
나는 인민군에 나가기를 피했듯이, 또 국군에 나가기를 피했듯이, 또 다시 “휴전반대 북진통일”을 외치는 데모대열에 참여하기를 피해서 뒷산(대덕산) 나무 그늘로 가서 숨었습니다. 나는 나무 밑에 숨어서 무척 고민을 했습니다.
“너는 뭐냐? 너는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고, 북의 인민군에 나가기도 피하고, 남의 국군에 나가기도 피하고, 지금은 또 “휴전반대 북진통일”을 외치는 시위에 나가기도 피하고, 너는 도대체 뭘 하자는 것이냐?”“네가 이렇게 비겁하게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면서 산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런데 또 이 세상 사람들은 지난 3년 동안의 전쟁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죽었는데도, 아직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어째서 한 사람도 없는 것일까?”나는 계속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는 자비를 가르치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라는 스님들도, 사랑을 가르치신 예수님의 제자임을 자처하는 목사님, 신부님들도 왜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정책을 반대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당시의 한국에 지금 이 자리에 계신 퀘이커 여러분들이 계셨더라면 아마도 감옥에 가는 일이 있더라도 “전쟁을 멈추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민족통일을 추구해야 된다”고 나와 함께 항의를 하시는 분이 계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1950년대 당시의 이 땅에는 그런 사람을 한 분도 볼 수가 없었고, 나는 한 사람의 동지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신이 실수로 잘못 태어난 게 아닐까? 나는 종류가 다른 딴 세상에 태어나야 했을 사람은 아닐까? 왜 사람들에겐 눈물이 없는 것일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고 했는데도 어째서 아직 무력에 의한 목적 추구의 방법을 멈추고, 평화적으로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일까?
1954년 4월 나는 이런 세상이라면 살려고 애착을 가질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결론했습니다.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으며 살아온 나에게 사람들은 형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기 보다는 기를 쓰고 서로 죽이기를 강요하는 이런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됐습니다.
그래서 나는 죽음을 결심한 다음, 목욕재계하고, 머리 박박 깎고, 하얀 한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눈물을 찾는다”는 뜻의 탐루(探淚)라고 쓴 등불 하나를 들고 부산 광복동거리로 나갔습니다.
“눈물을 가진 사람은 없는가? 눔물을 가진 사람은 없는가?”“전장에서 피 흘리며 쓰러진 동포 형제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려 줄 사람은 없는가?” “이 겨레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서 세계열강의 분할정책을 반대하며, 진정으로 눈물 흘려 줄 사람은 없는가?” “전쟁반대, 평화통일 만세”를 소리치며 길거리를 혼자 누비고 다녔습니다.
물론 나는 몇 시간도 안 되어 경찰서에 잡혀 갔습니다. 그런데 나를 잡아간 결찰서의 책임자가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평화통일을 주장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평화통일을 하자는 말이요?” 그 말을 듣고 보니 사실 나에게 구체적인 평화통일 방안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2) 겨레의 평화통일을 위한 나의 몸부림
그래서 경찰서에서 풀려난 다음 나는 어떻게 하면 우리 민족이 평화적으로 통일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열심히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년 뒤 나는 “통일독립청년공동체 수립안”이라는 평화통일방안을 만들어 이승만 대통령에게 청원서로 제출했습니다. 우리 헌법에는 모든 국민에게 청원권이 보장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나 나는 이 승만 정부에 의해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구속되어 조사를 받았고, 정신병자 취급을 받고 풀려났습니다. “호전적인 공산도당과 평화통일을 하자고 주장하는 놈은 정신병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제출했던 똑 같은 평화통일방안을 가지고 다시 북조선에 갔습니다. 북측이 그 동안 전쟁의 방법으로 통일을 추구해 봤으나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이제는 평화통일의 길에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임진강을 넘어 평양에 간 나는 북녘 당국으로부터 남한 당국에 의해서 특파된 간첩이라는 혐의를 받고, 남조선 간첩이라는 죄명으로 기소되어 머리를 박박 깎이었습니다. 나는 평양 감옥에서 단식투쟁도 하고, 늑막염에 걸리기도 하여 쇠약할 대로 쇠약해져서 6개월 이상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56년 6월에 나는 재판 없이 다시 남한으로 송환조치 되었습니다. 북조선 당국은 내가 가지고 간 평화통일 방안에 대해서는 그것을 그대로 찬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측 당국이 원한다면 언제든 토의할 용의가 있다고 전달하라 했습니다.
휴전선을 넘어 남으로 넘어온 나는 미군 및 국군 정보기관들에서 3개월 동안 거짓말탐지기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많은 심문을 받고, 다시 한국 경찰로 넘겨져서 혹독한 고문에 의한 조사를 받았습니다. 나는 검찰에 넘겨져 “북에서 1년간 어떤 간첩훈련을 받았냐?”고 추궁당했고, 간첩 및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기소되었습니다. 재판 결과로 간첩죄는 무죄로 판결되었으나,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며, 1년 징역형을 받았습니다.
남북을 오가면서 내가 얻은 결론은 남이건 북이건, 권력 당국에게 필요한 것은 “이 땅의 백성들이 평화롭게 함께 더불어 사는 평화통일 방안” 그 자체가 아니라, 그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권력을 상대방 지역까지 확대하는가? 하는 것에 관심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남과 북의 집권자들이 입으로는 “자유”를 말하고, “평등”을 말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는 국민들의 자유, 공산주의 사회에서 권력이 없는 인민들의 평등이란, 자기의 부와 권세를 유지 확장하기 위한 감언이설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Corea의 평화통일 문제도 방법을 몰라서 평화통일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평화통일이 진정으로 필요한 민중들, 당시는 전체 주민의 80% 이상이 농민들이었는데, 민중들에게는 힘이 없고, 강력한 외세를 업고 돈과 권세를 가진 권력자들은 평화통일에 뜻이 없기 때문에 민중들은 정권 당국들의 권력투쟁을 위해서 동포간의 상쟁에 내몰리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3) 나의 농민운동과 노동운동
1957년 이후 나는 다시 대학에 들어가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 했습니다.
1957년부터 약 10년 동안 나는 “한국농업문제연구회” 회원으로서 또 연구위원으로서, 또는 농민 계몽을 위한 “농원”이라는 월간잡지 기자로서, 한국의 농업문제와 한국 농민운동의 발전 가능성을 모색하려 애썼습니다. 그러나 나는 실패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1960년까지의 이승만 정권은 미국이 무상으로 제공하는 잉여농산물을 무제한으로 들여다 한국 시장에 팔아서 국방비에 충당하고 있었습니다. 정부는 대북 군비경쟁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에, 농민들은 감히 “반공”을 위해 강요되는 정부의 농업정책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던 것이며, 둘째는 1960년 4월에 학생들 봉기로 이승만 정부는 물러갔으나, 1961년 5월 군부의 쿠데타로 박정희 정부가 들어섰고, 나는 1963년 4월 군사정부에 의해서 “학원간첩”이라며,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을 구형받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도하 각 신문에는 김낙중이 과거 1955년에 북조선에 갔다가 1년간 간첩교육을 받고 남파되었는데, 그것을 숨긴 채 학원에 침투해서 활동했다고 대서특필로 보도하며 “학생들은 학원에 침투한 간첩을 조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의 반정부운동이 조금 조용해지자 정부 당국은 결국 얼마 후 나에게 내가 친구들에게 “북조선에도 무료교육이나 무료 의료제 같은 좋은 점도 있다고 말해서 북조선을 찬양했다”는 죄목으로 반공법을 위반했다며, 3년6월의 징역형을 주는 것으로 끝내고 말았습니다. 결국 군사정부가 나를 학생 탄압용으로 이용했던 것입니다.
3년6월의 징역형을 복역한 뒤, 나는 지금의 부인과 결혼해서 생활인이 되었습니다. 1965년 이래 남한 경제는 급속히 산업화의 길을 걷고 있었으며, 많은 농민들은 이미 농촌을 떠나 도시 노동자화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의 주인으로 되어야 할 백성들은 농민에서 노동자로 변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농민운동 대신에 노동문제 연구와 노동운동에 종사할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고려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를 내 직장으로 선택했습니다.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노동교육을 하기도 하고, 농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협동교육을 하기도 하며, 민중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도록 하는 교육에 나의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오래 가지는 못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에 장기집권을 위한 유신헌법을 만들었고, 학생들이 유신반대의 투쟁을 시작했는데, 정부당국은 학생들을 공포분위기로 진압하기 위해서 다시 간첩사건이 필요해졌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10년쯤 지나면 신문에 보도됐던 지난 사건을 잊기 마련인 모양입니다.
1973년 노동조합 간부들에 대한 교육을 위해서 제주도에 출장 갔던 나는 중앙정보부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고, 중앙정보부에서는 고려대학교 강사로 있던 김낙중이가 학생들을 모아놓고 유신을 반대하는 내란을 일으켜 현정부를 타도하고, 사회주의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선동했다고 자백할 것을 고문으로 강요하였습니다. 나를 고문하는 사람들은 “북에 갔다 온 경력도 있는 네가, 무엇 때문에 하필이면 빨갱이들이 좋아하는 농민문제, 노동문제의 언저리를 맴돌며 사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노동자 농민 힘으로 혁명을 해야 된다고 주장한 공산주의자임이 분명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육신을 가진 나는 고문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내란을 선동했다고 지장을 찍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1970년 독일 에버트재단의 초청을 받고 독일의 노동문제 세미나에 참석하려고 여권 신청했던 서류들을 들고 와서, 만약 독일로 가는 여권이 나왔다면 독일로 가서 동독을 거쳐 북조선으로 탈출해서 남한의 정보를 북측에 제공하려 했다는 죄명을 만들어 나를 ‘간첩예비죄’로 추가 기소하여 무기징역을 구형했습니다. 나는 결국‘간첩예비죄’로 7년간 1970년대 또박 징역살이를 했습니다.
나는 형기를 마치고 1980년에 사회에 나왔으나 광주항쟁을 무력진압하고 집권한 전두환 정권하에서 나는 "정치활동정화법"에 의하여 활동이 제약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집에 들어앉아 글이나 쓰는 것이었습니다. 덕분에 나는 “한국노동운동사” “사회과학원론” “민족통일을 위한 설계”등의 저서를 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 후반 노태우 정권시대에는 민주화운동의 진전 덕분에 나는 통일문제에 대해 여러 곳에서 발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드디어 1999년 9월에는 나는 국회 통일특별위원회가 주최한 공청회에서 “민족통일촉진회”라는 시민단체의 정책의 의장 자격으로 “3차7개년계획에 의한 4단계통일방안”이라는 평화통일방안을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서 다시 어려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듬해인 1990년 북조선 당구에서 나에게 사람을 보내온 것입니다. 김일성주석께서는 과거 내가 북조선에 갔을 때 고생했던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면서, 이번에 내가 국회에서 발표한 통일방안을 “좋은 평화통일방안”이라고 하시면서, 평화통일을 위해서 함께 협조하자는 말씀을 전하기 위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실정법상 북한에서 온 사람과는 허가 없이 접촉할 수 없으며, 신고하지 않을 경우에는 처벌하는 “국가보안법”이라는 실정법이 있기 때문에, 나는 나를 찾아온 북측 사람을 당국에 신고해서 잡아주어야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처벌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를 신고하면 북에서 온 그는 분명히 사형이나 무기징역이 선고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내가 실정법을 어기고 나와 나의 가족이 수난을 받게 되느냐? 아니면 내가 당국에 신고 해서 북측에서 온 사람을 체포케 하고, 김일성주석의 평화통일에 대한 호의를 뿌리칠 것이냐? 하는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된 것입니다. 나는 3남매의 아버지이며 가장이었고, 나는 남한의 대중매체들에도 자주 나가는 공인이었습니다. 나는 무척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북측 사람들과의 접촉을 신고할 수 없었고, 계속 북측 사람들과 만나서 여러 가지 민족문제들을 토의 했습니다. 물론 나의 의견과 북측 당국의 의견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확인하고, 나는 나의 의견을 설명하기 위해 나의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얼마 가지 않아 1992년 남한 당국에 의해서 체포되었고, 사형을 구형받아 무기징역을 언도 받았습니다. 1998녀 8.15에 김대중대통령 정부에 의해서 형집행정지로 집에 오기는 했지만, 지금도 나는 여전히 형집행정지중의 ‘무기수’이며, 투표권도 없고, 해외여권도 나오지 않는 그런 부자유한 신분의 소유자입니다.
그러고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다 하자면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다만 한 가지만 말씀 들이자면, 나는 내가 “평화통일”을 위해 북조선에 갔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리고 내가 농민과 노동자 편에서 일했다는 사실과 북조선에서 온 사람들을 나와 똑 같은 동포형제로 대했다는 사실 때문에, 수없이 여러 번 참기 어려운 고문에 시달려야 했고, 또 죽음 앞에 서야만 했지만, 사람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지금 여기 이렇게 여러분 앞에서 말씀드리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리고 나의 삶을 인도하신 하나님께 무한히 감사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릴 뿐입니다.
[2] 우리 겨레의 운명
이제 우리 겨레의 운명에 관하여 말씀드릴 차례입니다. Corean민족은 몇 천년 오랜 역사를 이 땅에서 주로 밭과 논에 씨 뿌리고 거두는 경작농사를 지으며 평화롭게 살아온 백성입니다. 주변에는 강대국들이 나타나서 수없이 여러 번 침략전쟁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무력적 강국이 되어, 이웃 나라를 침략해서 다른 민족을 노예로 삼으려 한 일은 한번도 없는 그런 민족입니다. 물론 남한 군대가 강대국 미국의 요구에 못 이겨 월남이나 이라크에 파병한 것과 같은 슬픈 일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비록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문명사 속에서 Corean들은 열심히 이웃 사람들의 문화 풍습을 존중하고 배우면서 평화롭게 살려고 무척 노력하며 살았습니다.
기록이 남겨진 지난 5,000년의 인류 문화사를 되돌아보면 지구촌에는 유형적으로 크게 분류해서 3대문명권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갠지스강과 인더스강 유역에 형성됐던 “인도문화권”, 둘째는 황하와 양즈강 유역에서 발달한 “중화문화권”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유프라데스강 나일강가에서 발원해서 에헤게 바닷가의 그리스와 지중해의 로마로 흘러갔고, 지중해에서 유럽 대륙과 영국을 거쳐,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뻗어간 “지중해문화권” (또는 서양문화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Corean들은 이 이웃 사람들의 문화를 열심히 받아들여 “평화롭게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려고 이들 문화를 배우려 무척 노력했었습니다. 그 결과로 Corea 땅에서는 지금부터 1,000년 전에 있었던 고려왕국 시대까지는 주로 “인도문화”의 정수인 불교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불교문화에 이러저러한 폐단들이 생기자, 약 600년 전에 성립했던 조선왕국에서는 “중국문화”의 정수인 유교와 도교 등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역시 폐단들이 생겼고, 그러다 100년 전부터 “서양문화”라고 불리는 “지중해문화”가 밀려오기 시작하자 Corean들은 드디어 약육강식의 논리에 따라 바다 건너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다시 태평양을 건너온 해양세력 미국과 유라시아대륙을 넘어온 대륙세력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습니다. 우리는 강자인 미, 소에 의하여 이 땅의 남과 북에 세워진 두개 정권에 의한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으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싸움의 틈새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서양문화 즉 지중해문화는 역시 우리의 삶에서 여러 가지 폐단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우리는 그 한계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우리 민족이 21세기 전인류공동체인 ‘한겨레’의 삶을 위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야만 할 세계사적 사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 김낙중이란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부닥친 문제들이란 결국 Corean들이 살아온 세계문명사 속의 문제이며, 특히 현대 서양문명이 갖고 있는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한계를 나타내기 시작한 문제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신론과 무신론, 유물론과 관념론, 진화론과 창조론, 사적소유제의 자본주의와 사회적 소유제의 사회주의, 개인주의와 전체주의, 미소 양대진영의 냉전체제, 핵무기와 테러리즘, 황경오염과 생태계의 파괴, 이런 것들이 모두 현대 지중해문화가 가져온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난 60년간의 삶의 체험에서 우리 Corean들은 지난 수천년의 역사적 경험에서 지금은 우리가 서구문화의 한계를 극복해야만 살 수 있는 단계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이를 해결해야만 할 중대한 과제를 안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따라서 나는 Corean의 평화적 남북통일이라는 것은 결코 Corean들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고,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이 앞으로 “한겨레”를 창조하기 위해서 무엇을 찾아야만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찾는 우리 모두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통일된 Corea에 세워지는 사회는 앞으로 형성될 “한겨레”의 작은 모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에서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최강의 힘을 가지고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미국문화는 우리가 추구하는 “한겨레”의 문화가 될 수 없습니다.
앞으로 형성될 “한겨레”의 문화는 기독교, 이스람교, 부라만교, 불교 등 모든 종류의 종교가 존중되고, 유신론과 무신론이 공존하는 상생의 문화이며, 유물론도 좋고 관념론도 좋은 공존의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핵무기의 힘이 역사를 지배하는 것도 아니고, 테러리즘의 폭약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오직 서로의 처지를 헤아릴 줄 아는 (易地思之) “사랑”만이 문제를 해결하는 문화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겨레”의 문화는 “생명의 문화”“사랑의 문화” “평화공존의 문화”“상생의 문화”가 될 것입니다. 지구촌의 여러 민족들은 저마다의 빛깔을 가지고, 빛깔과 모습이 다른 서로를 존중하면서, 평화롭게 함께 더불어 조화를 이루며 사는 총천연색의 세상을 만들어야 될 것입니다.
나는 나, 김낙중 개인의 삶이 Corean이라는 민족의 운명과 별개일 수 없었듯이, Corean이라는 한 개 민족의 삶도 “한겨레”라는 “전인류공동체”의 삶과 별개일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앞으로 21세기의 이 지구촌에 평화롭고 아름다운 “한겨레”를 건설하기 위하여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협조가 있기를 바라면서 제 말씀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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