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6-21

솔의 눈 :: 한국인이라면 [천년의 금서]를 꼭 읽어라

솔의 눈 :: 한국인이라면 [천년의 금서]를 꼭 읽어라

한국인이라면 [천년의 금서]를 꼭 읽어라 ▶민속/관습/설화 2012/04/18 16:47 松眼(솔의 눈)



한국인이라면 [천년의 금서]를 꼭 읽어라
아니 김진명 장편소설 모두를 삼독하여라


金辰明

1957년 부산에서 태어나 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입시 공부는 제쳐두고 철학, 역사 분야의 책을 읽었으며 대학 시절에는 사법 고시 공부보다는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종류의 책을 읽으며 세상과 사회에 대한 시각을 넓혔다.

김진명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라는 베스트셀러로 이름을 세상에 알린 작가이다. 대부분은 작가들이 신춘 문예나 전국적인 규모의 문학상을 통해서 등단한 반면 김진명은 그러한 이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말 그대로 장편 소설 두 권으로 문단에 나타나서 천문학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로서의 자리 잡았다. 그 후로 발표하는 소설마다 김진명은 대중적인 호응을 얻으며 베스트셀러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그만한 대중적 인기를 가진 작가는 한국에 드문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김진명은 문학적인 평론에 있어서는 그리 큰 작가로서 취급되고 있지는 못하다. '극단적 민족주의자'라거나 '과도하고 거친 상상력의 작가'라는 편이 김진명을 따라다니는 일종의 꼬리표이다. 그러나 작가 자신은 그러한 평가에 신경쓰고 있지 않다. 작가 자신은 "다만, 나는 작품 한 편 한편마다에 목숨을 다해 내가 아닌 우리의 문제를 담아낼" 뿐이라 답하고 있다.

문학이나 습작과는 거리를 가졌던 김진명은 어려워진 가정 형편과 80년대 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불행을 당한 형의 영향을 받으며 소설가가 되었다고 한다. 김진명의 문제 의식은 체계적이고 정돈된 서구 사회와 한국 사회의 차이점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의 문제 의식은 한국 사회가 어떻게 하면 보다 나은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인가이다. 그런 점에서 김진명은 과거 한국의 현대사를 뒤돌아보고 다양한 시각에서 문제들을 검토하고자 노력한다.

그 결과 그의 소설들은 통념을 뒤집는 역사 해석과 인물 평가, 사건 이해를 함축한다. 아마 이 과감한 문제 제기와 이해 방식이 독자를 김진명의 소설로 끌어들이는 주요한 흡인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또한 속도감있는 김진명의 문체 역시 독자들이 소설에 몰입할 수 있게 한다.

흥미롭게도 김진명은 가장 좋아하는 책으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꼽고 있다. 김진명은 이 책이 주는 주제 의식뿐만 아니라 글쓰기의 간명함에 감동받았다고 한다. 그만큼 김진명은 간단하고 명확한 글을 쓰고 있으면 그 글은 대중의 지속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김진명의 대표작으로는 한일 관계의 새로운 지형도를 펼쳐 보임으로써 베스트셀러가 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일제의 문화재 약탈과 광개토대왕비의 비밀을 파헤친 『몽유도원(구판 : 가즈오의 나라)』, 금융 대란과 함께 찾아온 우리의 정신 문화 위기와 그 극복을 위한 『하늘이여 땅이여』, 한국 현대사 최대의 미스터리 10.26을 통해서 미묘한 한미 관계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보여준 『1026(구판 : 한반도)』, 고대사 문제를 새롭게 조명해낸 『천년의 금서』,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나라 고구려의 이야기를 최근의 국제정세와 함께 풀어낸 『고구려』 등 다수의 작품이 있다.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한민족의 맥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이지 않은 채 계속 이어져오고 있으며, 모두가 힘겨워하는 어려운 시기에 그들을 격려하고 일으켜세우는 힘의 원천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는 김진명 작가의 얘기가 뇌리속 깊이 깊이 파고 든다.

'아래는 조선일보 기사'






솔깃하지만 믿기엔…


너무 찬란한 한민족 상고사


환단고기·규원사화 등 수십년 동안 진위 논쟁
14대 환웅으로 나온 '치우' 축구응원단 상징이 되기도
'화랑세기' 필사본이 위작이라면 (드라마 '선덕여왕'에 나오는) 미실이라는 인물은 실존의 근거가 사라진다. (본지 6월 26일자 보도)
위서(僞書) 논란이 계속되는 고서(古書)는 많다. 최근 출간된 김진명씨의 소설 '천년의 금서'는 기원전 18세기의 한국 고대사에 문명을 갖춘 나라가 존재했다는 근거로 '단군세기(檀君世紀)'라는 책을 들고 있다. 무슨 책일까?
세상에 알려진 지 수십년 동안 진위 논쟁이 계속되는 책이 '환단고기(桓檀古記=한단고기)'다. '환단고기'는 4가지 부분으로 구성돼있다. '삼성기(三聖紀)' '북부여기(北夫餘紀)' '태백일사(太白逸史)'와 문제의 '단군세기'가 그것이다.
'화랑세기'는 역사학자 중에서 진서(眞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는 반면 '환단고기'는 그 책 자체가 제도권과 재야를 나누는 기준인 것처럼 인식된다. 제도권 사학자들이 거의 예외 없이 이 책을 '위서(僞書)'로 보고 있고 책 자체를 거론하는 게 금기처럼 돼 있다. 도대체 왜?
◆'환단고기' '규원사화' '단기고사'의 내용은?
이 책이 소개하는 우리 고대사의 모습은 상상을 초월한다. 한국 역사의 시발점이 1만 년 전 가까이 올라간다. 그 강역도 대단히 넓다. 세계 문명의 시원(始源)이 한민족에게 있다고 여겨질 정도다.
▲ 중국 지린성(吉林省) 왕칭(汪淸)에 세워진 웅녀의 석상.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환웅의 부인이자 단군의 어머니인 웅녀는‘환단고기’에선‘웅씨 의 딸’‘곰족의 우두머리 여인’으로 기록돼 있다. / 조선일보 DB
'삼성기'에 따르면 단군신화에서 단군의 할아버지로 등장하는 환인(桓仁)이 천해(天海) 동쪽에 환국(桓國)을 세웠다. 영토가 남북 5만 리, 동서 2만 리였고 12개의 나라로 구성된 연방국가였다. '천해'를 바이칼호로, 12환국 중 하나인 수밀이국(須密爾國)을 세계 최고(最古)의 문명을 낳은 수메르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삼성기'는 7명의 환인이 재위하는 동안 환국이 3301년 또는 6만3182년 동안 지속됐다고 썼다.

환국 말년에 아들인 환웅(桓雄)이 태백산 신단수로 가 웅씨(熊氏)의 딸과 결혼하고 백성을 교화하며 배달국(倍達國)을 세웠다. 배달국은 18명의 환인이 1565년 동안 다스렸다. 그 중 14대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이 바로 치우천왕(蚩尤天王)이다. 치우천왕은 중국 신화에서 삼황오제의 한 사람인 황제(黃帝)로 등장하는 헌원(軒轅)과 73차례 전쟁을 벌여 모두 이겼다.('삼성기'와 '태백일사')

'단군세기'는 이후 단군왕검(檀君王儉)이 배달국을 계승한 새 나라를 아사달에 열고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고조선)이라 했다고 기록한다. 조선은 2대 부루, 3대 가륵, 4대 오사구 단군을 거쳐 마지막 고열가 단군까지 모두 47명의 단군에 의해 2096년 동안 존속했다.

당시 한반도와 중국 동북 대부분의 지역이 조선의 영역이었다. 조선을 계승해 북부여를 세운 해모수가 단군의 지위에 올랐고 7대 주몽이 고구려를 세웠다.('북부여기')

'환단고기'와 유사한 내용을 지닌 역사서가 '규원사화(揆園史話)'와 '단기고사(檀奇古史)'다. 두 책 모두 다른 사서엔 없는 고조선 역대 단군의 재위 기간과 치적을 기록했다. 이 세 권의 책은 한마디로 '재야사학계 상고사 복원의 3종 세트'라 할 만하다.

◆어디 있다가 20세기에 출현했을까

교과서에 등장하지 않는 이 책들의 존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역사서이며 ▲단군조선의 역사가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고 배워 온 많은 사람의 상식체계에 혼란을 일으킨다. 도대체 언제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환단고기'의 일부인 '삼성기'란 책은 조선 초기까지 실제로 존재했던 책과 이름이 같다. '세조실록'에는 1457년(세조 3) 임금이 팔도관찰사에게 압수령을 내린 책들 중에 이 책의 이름이 등장한다.

'환단고기' 첫머리의 범례(凡例)를 보면 '삼성기'는 신라의 안함로(安含老)와 원동중(元董仲)이, '단군세기'는 고려말의 이암(李�V)이, '북부여기'는 같은 시기 범장(范樟)이, '태백일사'는 이암의 현손 이맥(李陌)이 지은 것이라고 돼 있다. 이 책들을 '환단고기' 한 권으로 엮은 사람이 평북 선천 출신의 대종교도 계연수(桂延壽)였다고 한다.

계연수는 1911년 묘향산 단굴암에서 이 책을 필사했는데 독립운동가인 홍범도와 오동진이 여기에 자금 지원을 했다고 밝혔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이 책이 곧바로 공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계연수는 1920년 사망하면서 '한 간지(干支·60년) 뒤에 발표하라'고 제자인 이유립(李裕��)에게 유언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 사이 이유립이 한 차례 계연수의 원본을 분실했다가 다시 필사했다는 얘기도 있다.

마침내 '환단고기'는 1979년 영인본 형태로 세상에 등장한다. 필사본 '화랑세기'가 공개되기 10년 전의 일이었다. 일본인 가시마 노보루(鹿島昇)가 1982년 일본에서 번역본을 출간했고 이것이 국내에 역수입되면서 비로소 큰 반향이 일어났다.

'규원사화'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훨씬 이전이다. 1675년(숙종 1) 북애노인(北崖老人)이 썼다는 이 책은 광복 직후 국립중앙도서관 직원이 서울의 한 책방에서 구입해 귀중본으로 등록했으며 이미 양주동 등의 학자가 일제시대에 필사본을 소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책의 서문에서 북애노인은 과거에 떨어지고 전국을 방랑하다 한 산골에서 '진역유기(震域遺記)'를 발견한 뒤 참고했다고 썼다. 이 책은 고려 초 발해 유민이 쓴 '조대기(朝代記)'를 토대로 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조대기'라는 책의 이름은 앞서 세조 3년의 기록에 나온다.

'단기고사'는 서기 8세기 초 발해 시조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大野勃)이 발해 글자로 편찬했다는 역사서로, 100년 뒤 황조복(皇祚福)이라는 사람이 한문으로 번역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책은 '원문' 자체가 없다. 대야발의 발해본과 황조복의 한문본 모두 전해지지 않으며 남아있는 자료는 1949년과 1959년에 나온 국한문본이다.


▲ (왼쪽부터) ‘환단고기’를 다룬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환국시대의 영토’라며 소개한 지도
‘붉은 악마’의 상징인 치우천왕. ‘환단고기’에서 14대 환웅으로 나온다.



세 책들은 공통점이 있다. ▲모두 20세기 이후에 출간되거나 알려졌고 ▲편자들은 '오래 전부터 전승돼 왔거나 전승된 책을 참고한 책'이라 말하며 ▲선교(仙敎) 또는 특정 종교의 색채가 깔려 있고 ▲1980년대 이후 재야사학계의 상고사 관련 주장에 중요한 논거가 되고 있는 동시에 강단사학계로부터는 위서로 치부되고 있다는 점들이다.

◆주류 역사학계 "말이 되는 얘기냐"
세 권의 책이 진짜라면 한국 고대사는 물론 세계 문명사를 송두리째 다시 써야 한다. 하지만 국내 주류 역사학계는 줄곧 '위서'라는 입장이다.

'환단고기'는 책의 출처가 불명확하다는 점이 문제가 되고 있다. 계연수가 썼다는 원본이 전해지지 않을뿐더러 편찬되고 나서 공개되기까지 70년이 걸렸다는 사실도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책에 등장하는 숱한 어휘가 근대 이후에 나타난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사백력(시베리아)' '파나류산(파미르 고원)' '국가' '인류' '전세계' '세계만방(世界萬邦)' '남녀평권(男女平權)' 같은 용어가 고대 사서에 등장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위서론자들은 '나라가 형(形)이라면 역사는 혼(魂)'이라는 구절은 1915년 출간된 박은식의 '한국통사'를 인용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고고학적 근거다. '환국'이나 '배달국'이 존재했다는 시기의 동아시아는 신석기시대인데 어떻게 국가와 문명이 존재할 수 있는가? 14대 단군인 고불(古弗) 때의 인구가 1억8000만 구(口)였다는 기록도 위서의 근거로 곧잘 지적되는 부분이다.

'규원사화'에 대해서도 주류 학계는 위서로 보고 있거나 '설사 숙종 때의 진본이라 해도 사료적인 가치보다 조선 후기 민족주의의 흐름을 반영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일부 내용이 성경 '창세기'와 비슷하다는 것 등이 그 논거가 되고 있다.

'단기고사'는 일부 재야사학자들마저 당혹해 하는 책이다. 이런 문장들 때문이다. '매년 부(府)와 군(郡)의 대표가 의사원(議事院)에 모이게 해… 백성에게 참정권을 허락하시옵소서.'(전단군조선 9세 아술) '만국박람회를 평양에서 크게 개최했다. 각종 기계를 제조했는데 자행륜차(自行輪車), 천문경(天文鏡), 자명종(自鳴鍾), 어풍승천기(御風昇天機), 흡기잠수선(吸氣潛水船) 등이 상을 받은 발명품이었다.'(11세 도해)

'지구도 태양계의 하나의 행성이나 본래는 태양에서 분리된 천체다'(13세 흘달) '입법 사법 행정기관을 세워 다스렸다'(후단군조선 7세 등올) '도덕률이라는 것은 그 의지가 항상 자기의 자율법칙과 함께 생기는 것입니다'(기자조선 29세 마간) 등의 문장도 사람들을 아연하게 했다.

'환단고기' 등이 과연 민족주의적인 책인지에 대한 의문도 있다. 고려 말 왜구와의 전투기록은 생략된 반면 곳곳에서 일본 건국신화나 신도(神道)와 비슷한 점이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일부 학자는 고대 단군민족이 일본까지 포괄하는 거대 문명권을 이뤘다는 기술이 대동아공영권이나 내선일체론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진서론자들 "식민사관은 이제 그만"
'환단고기' 등을 '진짜'로 보는 쪽은 "지엽적인 자구에 연연해 전부를 위작으로 단정할 수는 없고 모든 내용이 후세에 창작됐다는 증거는 없다"는 입장이다. 진서라는 근거로 자주 언급되는 것은 '환단고기'와 '단기고사'에서 13대 흘달(屹達) 단군 50년조에 나오는 '오성취루(五星聚婁)'라는 기록이다. '다섯 개의 별이 누성(婁星·이십팔수의 16번째 자리에 있는 별들)에 모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1993년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 등이 수퍼 컴퓨터를 통해 추적한 결과 기록보다 불과 1년 뒤인 기원전 1733년에 금성·목성 등 다섯 개의 행성이 한 곳으로 모인 것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여기에 대해선 '고조선 건국 연대를 2333년으로 잡은 연구의 설정이 잘못됐다'는 등의 반론도 있었다.

'환단고기'에서 연개소문의 조부 이름을 자유(子遊)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도 진서라는 근거로 제시된다. 1923년 중국 뤄양(洛陽)에서 발견된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男生)의 묘비에 처음 나타난 이름이므로 책의 진가가 드러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위서론자들은 '책이 1923년 이후에 쓰여졌다는 증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규원사화'에 대해서는 1972년 이가원, 손보기, 임창순 등의 학자들이 '조선 중기에 쓰여진 진본'이라고 판정했던 것이 진서라는 논거 중 하나가 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환단고기' 등이 지난 30년 동안 우리 사회와 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중국 신화에 나오는 인물이었던 '치우'는 '환단고기'의 존재를 거쳐 국가대표 축구 응원단의 상징이 됐다. 바이칼호에서 민족의 기원을 찾는 시각도 이 책과 무관하지 않았다.

고조선 시대에 한글과 유사한 문자인 '가림토(加臨土)'가 존재했다는 주장의 논거도 '환단고기'였다. 안시성 전투 직후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당 태종을 장안성까지 추격해 항복을 받아냈다는 이 책의 기록도 곧잘 인용됐다.

반면 '환단고기' 등을 위서로 보는 주류 학계의 의견은 대중들의 큰 지지를 받지 못하고 '식민사학'으로 매도되기도 했다. 시인 김지하씨 등의 일부 문인들은 "고조선의 역사를 열지 않으면 미래를 위한 상상력을 자극할 수 없다"며 '환단고기'를 옹호하고 있다.

◆천부경·삼일신고·부도지·격암유록

이 밖에도 진서 여부가 의심받고 있는 옛 서적들은 많다. 환인이 환웅에게 전승했다는 81자의 '천부경(天符經)' 역시 20세기에 그 존재가 처음으로 알려진 책이다. '환단고기'의 편집자라는 계연수가 1916년 묘향산 벽에서 그 내용을 발견해 1917년 단군교로 보냈다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가 1929년 위작이라 말한 이후 역사학계의 자료로 쓰인 예는 거의 없다.

또 다른 고조선 관련 경전인 '삼일신고(三一神誥)'는 대종교 교주 나철(羅喆)이 1906년 서대문역 근처에서 한 노인으로부터 단군 초상화와 함께 전해 받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부도지(符都誌)'는 신라의 박제상(朴堤上)이 저술했다는 사서 '징심록(澄心錄)'의 일부라고 전해지는 책이다. 1953년 박제상의 55세손이 공개했고 1986년 번역본이 출간됐다. 전설상의 '마고(麻姑)'를 민족의 시조라고 기록한 이 책은 위서 논쟁조차 일어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조선 명종 때의 남사고(南師古)가 신인(神人)에게서 받았다는 '격암유록(格庵遺錄)'도 위서로 의심받는다. 이 책에는 국토 분단과 6·25사변을 예측했다고 해석되는 내용과 통일 한국이 동양 최고의 강대국이 된다는 예언이 적혀 있지만 '1960년대에 특정 종교의 지도자를 염두에 두고 쓰여진 책'이라는 주장도 있다.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입력 : 2009.07.03 16:16

<출처> [조선일보]


'아래는 오마이 뉴스 기사'



일본은 왜 국호 '한국'을 없애버렸나?


국호 대한민국의 기원과 유래를 추적한 베스트셀러 소설 <천년의 금서>는 한 작가의 '상식적 의문'에서 출발했다. 그러니까 벌써 5~6년 전의 일이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의 작가 김진명은 어느 날 문득 속으로 이런 질문을 던져 봤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국호(國號)인 대한민국(大韓民國)에 들어 있는 한(韓)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상식적 의문에서 제기된 작가의 자문(自問)은 작품 속에서도 그대로 구현된 바 있다. 등장인물 중 한 명인 고대사 전공 역사학자 박기일 교수의 다음과 같은 자성(自省)으로 이어진 것이다.

"명색이 역사학자이자 국사편찬위원이고 대학에서 선생질을 하고 있는 사람이 대한민국이 왜 대한민국인지, 한국인이 왜 한국인인지, 한반도가 왜 한반도인지, 도대체 그 한(韓)이라는 글자가 어디서 왔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천년의 금서> 77쪽)

국호 대한민국의 기원과 유래를 찾아서






▲ 김진명 작가
ⓒ 오마이뉴스 권우성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의 유래와 관련해 우리가 알고 있는 교과서 수준의 계통도(系統圖)는 이렇다.

대한민국(1948년, 제헌국회) ← 대한민국(1919년, 임시정부) ← 대한제국(1897년, 고종황제)

그러니까 대한제국(大韓帝國)에서 '제(帝)'를 '민(民)'으로 바꾼 것이 바로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그렇다면 조선(朝鮮)의 26대 국왕 고종은 왜 국호를 한국(韓國)으로 바꿨을까? 물론 사료에는 "삼한(三韓)을 잇는다"(고종실록)는 대목이 등장한다고 한다. 하지만 김진명은 도리어 그 대목에서 커다란 모순을 발견했다.

"과거 역사를 보면 대다수 나라들은 새로운 국명을 지을 때마다 화려한 과거를 계승하려 했습니다. 실제로 왕건의 고려는 만주를 호령했던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지어졌고, 이성계의 조선은 단군이 통치하던 고조선(실제 명칭은 그냥 조선이지만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그렇게 명명했다-기자 주)을 잇겠다는 뜻이었죠. 그런데 삼한은 마한, 진한, 변한을 가리킵니다. 우리 학생들이 지금 배우고 있는 국사 교과서에 따르면, 삼한은 한반도 남부에 위치해 있었던 작은 나라들이지요."

이 대목에서 김진명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시만 해도 두만강과 압록강을 국경으로 두고 있었던 조선이 고작 한반도 남단에 움츠리고 있었던 약소국인 삼한을 잇고자 국호를 바꿨을까요? 더욱이 고종은 당시 외세의 억압과 침략이라는 불온한 기운을 떨쳐버리고 조선의 기개를 펼치기 위해 칭제건원(稱帝建元)까지 했던 터였습니다. 어쩌면 삼한은 그 전에 이미 한(韓)이라는 웅혼한 뿌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문득 들었던 그 '상식적 의문'이 나로 하여금 이 소설을 쓰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김진명은 <천년의 금서>를 통해서, 한반도 일대와 중국 대륙에 세워진 한민족 최초의 국가는 고조선(BC 3세기부터 중국 고서에 등장)이 아니라 기원전 9세기 무렵의 한(韓)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작가는 한후(韓候)가 다스렸던 이 한이라는 나라가 한신(韓信)의 조국인 한(韓)이라는 나라(BC 4세기 무렵 개국)와 전혀 별개의 나라라는 사실도 규명했다. 참고로 한신은 시(始)황제가 통치했던 진(秦)나라가 망한 뒤 초(楚)나라의 항우와 한(漢)나라의 유방이 천하 패권을 놓고 다툴 때 유방을 도왔던 인물이다.

한편 김진명은 <천년의 금서>를 위해 천문학적 근거(천문학자 박창범 교수의 오성취루 재연 실험)라는 과학적 자료와 서지학적 근거(<시경> 한혁편, <잠부론>)라는 객관적 자료까지 제시했다.

-지금 얘기한 것들이 모두 사실인가?
"직접 확인해 보면 될 것 아닌가."

인터뷰 막바지에 기자와 작가가 나눴던 문답이다. 기자는 인터뷰 기사를 작성한 뒤 국회도서관을 찾았다. 지금부터 '국회도서관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시작한다. 기자와 함께 역사의 타임머신을 타고 탐험을 떠나보자.

이승만 "대한민국은 '동양의 한 고대국'의 부활"






▲ 1948년 8월 15일에 열린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에 자리를 함께 한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
ⓒ NARA(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국회도서관을 찾은 기자는 우선 대한민국 국호의 유래부터 추적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한(韓)과 연관되거나 혹은 한을 연상시키는 대목을 찾아봤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국호 대한민국을 제정한 법률 주체는 제헌국회이다. 1948년 5월 10일 남한 전역에서 200명의 제헌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총선거가 실시됐다. 제헌국회가 임기 2년의 의원들을 대상으로 첫 회의를 소집한 것은 5월 31일. 이날 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 신익희·김동원이 선출됐다.

이날부터 거의 매일 회의가 열렸는데, 국호가 대한민국으로 결정된 것은 제헌국회 22차 회의가 열렸던 7월 1일이다. 신익희 부의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회의에서 서상일 의원이 "국호 문제가 결정돼야 헌법 전문과 1조도 결정할 수 있다"면서 국호 제정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어서 "헌법기초위원회가 제안한 국호 대한민국을 원안대로 통과시키자"는 이승만 의원의 제안에 대한 거수 표결이 실시됐다. 재석의원 188명 중 찬성 163명, 반대 2명으로 가결됐다.

1948년 8월 15일. 옛 조선총독부 청사였던 중앙청 석조건물 앞에서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이 열렸다. 이날 오전 11시 20분에 시작된 행사에는 맥아더 연합군 사령관을 비롯한 해외사절단, 정부 각료와 시민들이 대거 참석했다. 중앙청 건물 전면에 내걸린 현수막에는 큼직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축하식'

이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국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취임 선서를 마친 뒤 이렇게 연설을 시작했다.

"오늘에 거행하는 이 식은 우리의 해방을 기념하는 동시에 우리 민국(民國)이 새로 탄생한 것을 겸해 경축하는 것입니다. 이날에 동양의 한 고대국인 대한민국 정부가 회복되어서 40여 년을 두고 바라며 꿈꾸며 투쟁해 온 결실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란 국호가 국민에게 공식 선포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 대통령의 연설 내용 중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새로운 출발을 '동양의 한 고대국'의 부활로 규정한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더욱이 그는 제헌헌법 전문(前文)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이라는 대목을 포함시킬 것을 주장해 관철시키기도 했다.

"한(韓)이란 이름은 우리의 고유한 나라 이름"

이승만도 연설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제헌국회의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대한민국'을 계승하고 있다(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제정). 나아가 '임시정부의 대한민국'이 '고종황제의 대한제국'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고종황제의 대한제국'은 과연 무엇을 역사적 연원으로 삼았을까?

"우리나라는 곧 삼한(三韓)의 땅인데 국초(國初)에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지금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고종황제가 1897년 10월 11일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면서 신하들에게 했던 말이다. 고종황제는 이틀 후인 13일에는 반조문(頒詔文)을 발표하도록 명했다.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백성에게 널리 알리는 조서'를 뜻하는 반조문에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후로 강토가 분리되어 각각 한 지역을 차지하고는 서로 패권을 다투어 오다가 고려(高麗) 때에 이르러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을 통합하였으니 이것이 삼한(三韓)을 통합한 것이다."

이 두 개의 구절이 역사학계에서도 이미 정설로 굳어진 것으로 알려진 '삼한정통론'의 근거가 되고 있다. 대한민국과 대한제국의 뿌리인 한(韓)이라는 명칭이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언급된 것은 삼한이기에 이론(異論)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김진명이 제기했던, "당시만 해도 두만강과 압록강을 국경으로 두고 있었던 조선이 고작 한반도 남단에 움츠리고 있었던 약소국인 삼한을 잇고자 국호를 바꿨을까"라는 '상식적 의문'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기자는 <조선왕조실록> 고종편을 다시 한 번 꼼꼼히 읽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1897년 10월 11일자 기록에서 기존의 '삼한정통론'과 정면으로 배치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대목을 발견했다. 실제로 고종황제는 "지금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고 언급한 뒤 곧바로 이런 말을 했다.

"또한 매번 각국의 문자를 보면 '조선(朝鮮)'이라고 하지 않고 '한(韓)'이라 하였다."

고종황제가 봤던 외국의 문헌에는 '삼한 이전에 존재했던' 조선을 한으로 불렀던 기록이 '많았다'는 말이다. 한편 고종은 이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이는 아마 미리 징표를 보이고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니, 세상에 공표하지 않아도 세상이 모두 다 '대한(大韓)'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을 것이다."

한민족이 주도했던 고대국가를 외국에선 이미 한(韓)이라 불렀기에 널리 알리지 않아도 모두 다 알고 있을 것이란 말이다. 대신 중 특진관 조병세도 이렇게 화답했다.

"각 나라의 사람들이 조선(朝鮮)을 한(韓)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상서로운 조짐이 옛날부터 싹터서 바로 천명이 새로워진 오늘날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고종황제와 신하들의 19세기 말엽 역사인식에 따르면, 삼한 이전에도 한은 엄연히 존재했던 셈이다.

"우리나라는 지역으로 연(燕)나라에 가까웠다"
또한 한민족의 고대국가가 차지했던 강역이 요하와 중국 동북부에까지 미쳤다는 인식이 <조선왕조실록> 정조편에도 등장한다. 지중추부사 홍양호가 1799(정조 23년) 12월 21일 <흥왕조승> 4편을 정조에게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동방에 나라가 있게 된 것은 상고 시대로부터인데 단군이 맨 먼저 나오시고 기자께서 동쪽으로 건너오셨습니다. 그때 이후로 삼한(三韓)으로 나누어지고 구이(九夷)로 흩어져 있다가 신라와 고려 시대에 들어와 비로소 하나로 섞여 살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홍양호는 동방에 있던 한민족 국가의 강역이 "지역적으로는 연(燕)나라, 제(齊)나라와 가까웠다"고 설명한다. 이에 대해 정조는 "조상의 공덕을 드러내고 선인의 아름다움을 드날린 것으로 <시경(詩經)>과 <서경(書經)>보다 더 자세한 것은 없다"고 답한다.

이러한 기록들은 공교롭게도 김진명이 <천년의 금서>에서 서지학의 근거로 제시했던 내용이나 고서(古書)와 일맥상통한다.

먼저 소설의 도입부와 마지막 부분에서 대반전의 모티프로 활용된 <시경>의 '한혁(韓奕)'편을 보자. 작가는 주나라에서 춘추시대 중기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고서의 내용 중에서 2가지 대목을 소설 속에서 형상화했는데, 다음과 같다.

(1) "한후(韓侯)는 맥(貊)족을 복속시키고 그 땅의 제후가 되었다."
(2) "한후가 수도에 들자 선왕(宣王)은 경계를 논하였으며 조카딸을 시켜 밤 시중을 들게 하였다."

김진명은 <천년의 금서>에서 주나라 선왕이 환대한 이 한후의 한(韓)나라가 대한민국 국호에 등장하는 한(韓)의 뿌리라고 주장했다.

국회도서관에서 기자는 모두 4종의 <시경> 번역본을 찾았다. 그 중의 하나인 <신완역판 시경>(명문당)의 역저자인 김학주는 한혁편에 등장하는 한나라가 "전국시대의 한나라와는 다르다"면서 한혁편의 성격을 이렇게 해설했다.

"한나라 제후가 즉위하고 바로 내조하여 천자의 명을 받고 돌아갈 때 시인이 이 시를 지어 전송하였다. <모시서>에서는 윤길보가 선왕을 기린 작품이라 하였으나 근거가 없다. 선왕보다는 이 시의 내용은 거의 전편이 한후를 기린 것이라 봄이 좋을 것이다."

한편 <시경> 한혁편에는 '보피한성 연사소완(普彼韓城 燕師所完)'이라는 구절도 들어 있다. "커다란 한(韓)나라 성은 연(燕)나라 백성들이 완성시킨 것"이라는 뜻인데, "지역적으로는 (우리나라가) 연(燕)나라, 제(齊)나라와 가까웠다"는 정조 시대 관리 홍양호가 했던 증언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잠부론 "위만에게 망하여 바다를 건너갔다"
작가가 두 번째 모티프로 삼은 <잠부론(潛父論)>은 후한의 대학자 왕부(AD 85~162)가 지은 문집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책의 '씨성(氏姓)'편에 시경에서 위대한 제후로 묘사했던 한후가 다시 등장한다.

한후가 선왕을 방문한 지 거의 1천여 년이 흐른 뒤의 일이니, 왕부가 얼마나 방대한 고사와 지식을 섭렵했던 학자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후한의 3대 명저인 <잠부론>에서 변방과 이민족의 침입에 대한 국방정책, 성씨(姓氏)의 분화에 대한 학술적 연구 등 아주 다양한 지식과 견해를 쏟아냈다.

국회도서관에서 기자는 1종의 <잠부론> 번역본을 구할 수 있었다. 건국대학교 출판부가 2004년 출판한 이 책의 번역자는 임동석이다. 이 책에서 한후와 관련한 대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 주 선왕 때에 역시 한후라는 자가 있었으며, 그 땅은 연나라에 가까웠다. 그래서 <시경>에 이렇게 노래하였다. '크고 큰 저 한성이여 연나라 백성이 쌓았도다' 그 뒤의 한서 역시 성이 한씨로 위만에 멸망하여 바다 쪽으로 옮겨 갔다."
<잠부론>에 적혀 있는 한자 원문은 다음과 같다.
"昔周宣王亦有韓侯 其國也近燕, 故詩云 '普彼韓城 燕師所完' 其後韓西亦姓韓 爲魏滿所伐 遷居海中"
<천년의 금서>에서 작가에 의해 형상화된 "한후는 연나라 부근에 있었다"거나 "차츰 한의 서쪽에서도 한씨 성을 갖게 되었는데 그 후에는 위만에게 망하여 바다를 건너갔다" 등의 내용이 역사적 근거를 분명히 가지고 기술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기후한서역성한(其後韓西亦姓韓)과 천거해중(遷居海中)에 대한 임동석과 김진명의 해석이 다를 뿐이다. 임동석은 각각 "그 뒤의 한서 역시 성이 한씨로"와 "바다 쪽으로 옮겨 갔다"고 풀이한 반면 김진명은 각각 "차츰 한의 서쪽에서도 한씨 성을 갖게 되었는데"와 "바다를 건너갔다"로 해석했다.

소설이 현실보다 더 진실에 가까울 때도 있다






▲ 조선총독부 청사 한일합병을 계기로 한국이란 국호의 사용은 강제로 금지되고 말았다. 일제는 국권을 빼앗은 한국에 총독부를 설치하면서 '한국총독부'가 아니라 '조선총독부'라고 명명했다. 사진은 조선총독부 청사 전경



소설과 현실은 엄연히 다르다. 그것은 소설을 그대로 믿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때로는 현실이 소설보다 더 극적일 때도 있다. 역으로 소설이 현실보다 더 진실에 가까울 때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국호와 관련된 자료를 찾다가, 평소에는 별 의식 없이 그냥 지나쳐 버렸던,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을 때 들었던 생각도 이와 무관치 않다.
대일본국 즉 일본(日本)이 대한제국 즉 한국(韓國)의 국권을 강탈한 1910년 8월 29일. 일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칙령 제318호를 발동했다.
"한국(韓國)의 국호(國號)를 고쳐 지금부터 조선(朝鮮)이라 칭한다."
그렇다. 한일합병 당시 일제는 국호 한국을 조선으로 고쳤다. 일각에서 "일반 인민의 감정에 미치는 바 적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를 제기했음에도 그대로 밀어붙였다. 그리고 일제는 일본 헌법의 국토 범위를 기존의 "혼슈, 큐슈, 시코쿠, 홋카이도 및 타이완과 그 부속도서"에서 "혼슈, 큐슈, 시코쿠, 홋카이도 및 조선(한국이 아니라-기자 주), 타이완과 그 부속도서"로 고쳤다.
한일합병을 계기로 한국이란 국호의 사용은 강제로 금지되고 말았다. 일제가 국권을 빼앗은 한국에 총독부를 설치하면서 '한국총독부'가 아니라 '조선총독부'라고 명명한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제는 왜 한국이란 국호를 없애버렸을까?
국호의 비밀을 찾아 떠난 역사탐험의 기로에서 새로운 의문의 이정표를 만난 셈이다. 기자는 국회도서관 서고를 오랫동안 떠날 수 없었다.
오마이뉴스 정지환 기자

[관련기사] 김진명 인터뷰 "대한민국 국호의 비밀, <시경>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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