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6-07

나는 보수다 - 진보에 홀린 나라 대한민국을 망치는 5가지 코드

나는 보수다 - 진보에 홀린 나라 대한민국을 망치는 5가지 코드

보수를 팝니다 - 대한민국 보수 몰락 시나리오
김용민 (지은이) | 퍼플카우콘텐츠그룹 | 2011-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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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게 싸워라! 웃을 수 있어야 이긴다.

당당하게 싸우고 유쾌하게 웃자, 이것이 독자 여러분들께 내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다. 표정이 비장하고 목소리가 높을수록 속으로는 더 겁을 먹고 있다는 반증이 된다. 보수와 진보가 서로 경쟁하듯이 더 심각하고 더 험악한 구호를 외치면 누가 유리할까? 똑같이 겁을 먹고 있는 상태라면 가지고 있는 돈과 권력을 비롯해서 써먹을 수 있는 무기가 많은 보수가 더 유리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유쾌하게, 즐겁게 싸워야 한다. 상대는 내일 세상이 끝장이라도 날 것처럼 험악하게 주먹을 휘두르는데 이쪽에서는 여유 있게 껄껄 웃고 있다면, 심지어 주먹 한 방을 맞고서도 피식, 하고 웃는다면, 상대의 공포심은 더욱 커진다. 그러면 그 공포를 이기기 위해서 더욱 주먹을 휘둘러 댈 것이다. 하지만 그런 주먹은 헛방이 많고 초점이 없다. 그러다 보면 제풀에 지쳐버린다. 하지만 이쪽은 에너지가 넘친다. 왜? 유쾌하고 즐겁기 때문에, 그래서 에너지가 오히려 계속해서 솟아나기 때문이다.

<나는 꼼수다>를 많은 사람들이 사랑해 주는 이유도, ‘왜 이렇게 빨리 안 올라옵니까?’하며 성화를 부리는 이유도, 즐겁고 유쾌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같은 내용을 심각하고 진지하게, 웃음기 없는 말투로 방송했다면 이렇게 사람들이 좋아해 주었을까? 이명박 정권과 자본의 언론 탄압과 장악으로 방송도 신문도 할 말 하기 힘든 시대에, ‘탄압할 테면 탄압해 봐라, 웃겨서 원!’ 하듯이 방송 내내 흐르는 출연자들의 당당함과 유쾌함이야말로 이 방송이 가진 가장 큰 힘이라고 믿는다.

이 책은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들을 유쾌하게 만들어 주기 위한 원천을 제공하는 책이다. 의연하고 유쾌해지려면,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의연하고 유쾌해지게 하려면, 알아야 한다. 상대를 알고, 상대의 강점과 약점을 알고, 지금은 힘들고 끝이 안 보일 것 같지만 결국은 상대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이거 아무리 해도 우리가 못 이기는 거 아냐?’라고 생각하면 포기하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힘들어도 우리가 이길 거야’라고 믿는다면 유쾌해질 수 있다.

블로그에서, 트위터에서, 그리고 광장에서, 나는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유쾌하고 즐겁게 ‘노는’ 모습들을 보아 왔다. 이명박 정권은 농담을 이해하지 못한다. 웃음이 없다. 그래서 언제나 더 강한 힘으로, 더 무자비하게 억압하려고 들기만 한다. 그럴 때마다 우리 크게 한 번씩 웃어 주자. “에이 재미없어! 얼굴 좀 펴라!”하고 말이다. 이 책을 통해 여러분이 좀 더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면, 그래서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여러분의 생각을 전해주고 즐길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다.

보수는 정치적 무관심을 먹고 산다. 진보는 그래도 자체적으로 비판과 자성의 메커니즘이 있다. 대중들의 눈에는 그게 분열로 보이고, 왜 같은 진보끼리 싸우냐고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안에서 논쟁하고 비판하고, 그래서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가진다. 하지만 보수는 그렇지 못하다. 자신들이 위기에 빠졌다고 느낄 때에만 그러는 척할 뿐,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돌아가 버린다.
언론도 방송도 장악하고 있으면, 대중들을 정치적 무관심에 빠뜨리기는 더욱 손쉬워진다. 정치적인 이슈에 대해서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는 진흙탕 싸움으로만 묘사하면서 사람들에게 그놈이 그놈이란 인식을 심어준다. 사람들은 더욱 더 정치를 짜증스럽게 생각하고, 점점 더 무관심해진다. 그런 상태에서 선거를 해 봐야 결과는 뻔하다. 누굴 찍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투표를 안하거나, 개인의 이미지에 따라서 투표하거나, 언론에서 떠드는 논리에 현혹돼서 투표를 하거나.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라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비 글귀는 많은 것을 말해 준다.
-185쪽- 붉은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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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구조를 해석해온 저널리스트 조우식이 진단하는 한국사회 진보진영의 고질병 5가지는 다음과 같다. 진보에 대한 무턱댄 선호를 조장하는 ‘리버럴 강박증’, ‘신데렐라 국가’ 대한민국의 탄생·성공을 부정하는 자기모멸의 역사 허무주의, 반기업심리와 부에 대한 적대감, 과도한 이념분쟁, 앞서 말한 진보진영의 고질병들 이면에 장기지속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슈퍼밈’, 근본주의 DNA가 바로 그것이다.

얼마 전부터 주요 이슈로 부상한 지식인사회의 붕괴 위기론. 이에 대해 저자가 내린 진단은 그간 이뤄져왔던 것들과는 사뭇 다르다. 저자에게, 어느 때부터인가 느닷없이 등장한 지식인사회의 위기 혹은 붕괴 징후는 ‘지식인은 일단 진보적이어야 한다’는 ‘리버럴 강박증’의 산물이다.

한국사회 지식인 대부분은 자기가 진보적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인 ‘리버럴 강박증’에 사로잡혀 있다. 그게 알게 모르게 먹물의 허위의식을 낳고 있지만, 젊은이들 가슴에 방향 모를 분노 즉 ‘좌파정서’를 확산시키는 주범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사회 고질병을 털어내고 책임 있고 건강한 주류사회를 복원할 수 있을까? 그것도 2012년, 2017년 대선이나 총선 시즌 때 반복될 표피적이고 소모적 논의보다 깊고 본격적으로 논의해볼까? 그런 담대한 제안의 목소리가 이 책이다.

머리말
프롤로그 : 한국사회를 움직이는 힘, ‘슈퍼밈’

제1부 지식인사회의 붕괴 위기
1. ‘리버럴 강박증’에 사로잡힌 그들
2. 동서양 구분 없는 지식인의 허위의식
3. 지식인의 옛 모델, 조선 사대부
4. 허위의식을 빼고 바라본 20세기 역사경험의 실체
5. 대중사회의 반문화주의와 무교양주의

제2부 역사 허무주의
1. 현대사는 정의가 패배했다?
2. 해외의 과거사 청산, 모범답안은 없다
3. 백범 김구를 존경할 수 없는 이유
4. 현대 중국의 국부 쑨원과 마오, 그리고 장제스
5. 큰 그림 없이 세워진 건국의 부작용

제3부 반反 기업심리, 부에 대한 적대감
1. 우리의 반면교사, 라틴아메리카
2. 한국재벌, 그 출생의 비밀
3. 삼성 문제의 진정한 해법을 찾아서
4.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넘어 헤게모니로
5. 한국경제, 인식의 대타협을

제4부 이념 갈등의 내출혈
1.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의 공과
2. 문화계의 ‘민중문화운동’이라는 괴물
3. 1980년대 학생운동의 일탈
4. 좌파보다 훨씬 더 두려운 ‘좌파정서’라는 것
5. 레드 컴플렉스와 종북주의

제5부 오래된 질병, 근본주의 DNA
1. 한반도 지정학의 재해석
2. ‘성리학 신정국가’ 조선이 남긴 유산
3. 우리는 불교· 기독교·유교도 모두 근본주의
4. 변화와 전향을 두려워 말라
5. 독재자 칼뱅과 의인 카스텔리오

에필로그 : 이대로라면 앞날이 두렵다

감사의 말
참고문헌과 출처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중앙일보
 - 중앙일보(조인스닷컴) 2011년 7월 9일자
동아일보
 - 동아일보 2011년 7월 9일 새로나온 책
조선일보
 - 조선일보 Books 북Zine 2011년 7월 9일자 '북카페'

저자 : 조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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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작 : <이승만 깨기>,<인생부자들>,<남자는 서재에서 딴짓한다> … 총 17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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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눈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저널리스트 겸 문화 평론가다. 서강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지난 30년간 《서울신문》, 《문화일보》, 《중앙일보》 등에서 주로 문화부 기자로 활동했다. 음악, 미술, 연극 등 문화의 거의 모든 분야를 훔쳐볼 수 있는 행운을 누린 덕에 대표적인 ‘문화통 기자’로 꼽혀왔다. 2010년 서울언론인클럽 신문칼럼상, 2008년 대한출판문화협회 한국출판평론상을 받았다. 펴낸 책으로 《남자는 서재에서 딴짓한다》, 《굿바이 클래식》, 《한국사진가론》, 《책의 제국, 책의 언어》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미래의 저널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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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연한 부패와 포퓰리즘 정서로 비틀대는 21세기 대한민국!
구조적으로 임박한 해체와 붕괴의 징후들은 무엇인가?
진보진영의 위선과 허세에 “노!”를 외치는 조우석의 한국사회 대해부!

1. 대한민국 보수가 『나는 보수다』를 읽어야 하는 까닭
: 대한민국 건국 63주년, ‘동의 없는 지배’와 결별할 담대한 기획은 과연 있는가?

반反기업 심리와 부富에 대한 적대감은 이렇게 알게 모르게 증폭되고 있지만, 한 번 램프 밖으로 튀어나온 지니(램프를 가진 이의 소원을 들어주는 정령)를 안에 도로 집어넣기란 매우 어렵다. 이런 사회 분위기가 걱정스러운 보수세력의 대응도 어설프고 비이성적이다. 중립적 입장의 지식인 역시 못내 안타깝다. 그들은 “삶의 조건과 방향을 설정해주는 민주공화국의 핵심 이상과 가치는 내면에서 파괴됐다. 이게 우리가 헌신해야 할 민주공화국과 인간공동체의 참 모습이란 말인가?”고 지적하지만, 여기에도 무언가 분노의 기미가 있고, 누굴 향해 삿대질하려는 심리가 없지 않다. …
… 실로 만만치 않은데, 그렇다면 이 기회에 더 큰 목표를 세워야 한다. 단순한 사회적 기부와 선행을 통해 ‘착한 기업 만들기’의 차원을 훌쩍 넘어서 어떻게 기업의 지적·도덕적 헤게모니를 구축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다. 지적·도덕적 헤게모니란 안토니오 그람시가 서구 부르주아 사회의 놀라운 성공을 관찰하면서 했던 말인데, 궁극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반기업심리와 부에 대한 적대감은 극복되지 못할 것이다. 반복되는 항구적 위기도 마찬가지로 넘지 못한다.
당장의 문제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이런 ‘인식의 내전’이 삼성 문제에서 다시 부딪친다는 데 있다. 그들이 가장 성공했고, 가장 앞서있기 때문에 더욱 질시와 견제의 대상으로 부각된 셈이다. 그 점에서 삼성 문제는 항상 덧나는 상처이자, 2000년대 초입 한국사회를 볼 수 있는 압축파일인 셈이다. 그들을 비판할 필요도 못 느끼지만, 굳이 두둔할 생각도 없다. 한때 미국에서 통했던 말대로, 왜 우리는 “GM에 좋은 것은 사회에도 좋다”는 사회적 합의가 없을까를 염두에 두고 삼성 문제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나는 보수다』, 10쪽, 196쪽에서

1987년 이후 지난 20여년 가까이, 한국사회에서 가랑비에 옷젖듯 퍼진 반기업심리와 부에 대한 적대감. 적정선을 넘어 이미 임계점을 넘어선 지 오래인 이같은 흐름에 대한 전략적이고 기술적인 해법은 과연 마련되고 있는가? 이같은 흐름의 확산을 경계하고 막겠다는 이유를 앞세우고는 있지만, 삼성그룹 등 한국을 대표하는 이른바 주류세력은 도덕적 정당성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그에 관한 비판이나 성토에 대해서도 초보적 방어마저 서툴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저자는 장구한 시기에 걸쳐 지적·문화적 헤게모니를 구축했던 구미권 국가들과 달리 불과 50년도 안 되는 시기에 근대적 산업화에 성공했던 대한민국의 역사를 먼저 짚자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개발의 주역으로 성장한 대기업과 재벌에 대한 신뢰가 크게 높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의 축적과 사회적 기여라는 논의의 첫 장을 겨우 연” 것뿐이다.
따라서 중요한 건 그 해법이다. 저자는 한국의 큰 그림을 그리던 대기획자의 실종 문제를 제기한다. 거대자본과 재벌을 통제하며 미래를 짚어내는 정부, 상식을 뛰어넘은 투자를 통해 산업고도화를 이룩해냈던 통 큰 정부는 과연 어디로 갔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대한민국 정부는 벤처정신을 발휘했던 전략적 투자가의 위치에서 기껏 유한책임만을 지고 빠지는 재무적 투자가의 수준으로 행동반경을 스스로 위축시킨 지 오래다. 마르크시즘 등 평등주의 이념의 소리없는 확산·득세도 결국 이같은 역할의 커다란 공백으로 빚어진 결과다. 한국사회가 지식인사회 특유의 ‘리버럴 강박증’과 근본주의적 사고, 반기업심리와 부에 대한 적대감, 이념적 내출혈 등에 시달리게 된 것 역시 이런 공백을 메울 지적·문화적 헤게모니가 마련되지 못한 데 따른 것이다.
한국호의 해체 징후와도 맞물린 이같은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자가 제시하는 처방은 그럼 무엇일까? 크게 세 가지다. 첫째, 편견과 독단을 앞세운 태도를 넘어 실사구시의 태도로 과거를 점검하고, 둘째, 희생양 찾기 게임으로부터 탈피하며, 셋째, 경제민주화 움직임이 자기파괴적인 평등주의의 늪이 되어 지난 세기 성취의 기초마저 허물지 않게 하는 일이다. “과연 기업은 민주주의 원리로 움직이는 조직일까?” 이런 질문 속에서 저자는 민주주의를 기업경영 원리로 대입하는 태도를 차제에 접자고 제안한다. 포퓰리즘적인 평등주의의 늪에 자꾸만 빠져드는 작금의 한국사회 현실은 경제민주화를 등한시한 결과라기보다는 경제력 집중에서 오는 특유의 에너지를 글로벌 스탠다드란 이름 아래 내다버린 결과임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을 주목해야 ‘아비 없는 사회’에 기대 성장했던 보수독과점 편향으로부터도, 이에 대한 성마른 반편향으로 대한민국의 기초 자체를 허물고 있는 자해적인 리버럴독과점 상태로부터도 벗어나, 담대한 재도약에 필요한 합의에 이를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이런 길을 트기 위한 지적·문화적 헤게모니 프로젝트에 우리가 나서지 않는 한, 문민정부 시절을 포함해 지난 민주정부 시절을 거치며 확산돼온 좌파정서, 달리 말해 분노 어린 반기업심리와 부에 대한 적대감을 누그러뜨리고 새로운 도약에 필요한 사회적 동력으로 바꾸어낼 길은 없다.
저자가 “변화와 전향을 두려워 말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21세기 초입 들어 ‘오래된 미래’의 귀환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크게 바뀌고 있는 한반도 지정학에 적극적으로 적응해야 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친미연중, 혹은 친중연미의 능소능대한 적응과 활용, 전략적 마인드를 통한 새로운 한반도 지정학의 구축은 어떻게 이뤄질 수 있을까?”란 질문 앞에서, “숱하게 등장하는 한반도선진화 전략이나 로드맵, 혹은 진보세력의 재집권 프로젝트 등”은 “눈먼 구상에 그치거나, 거대변수를 놓친 작은 그림에 불과하다.” 여기서 분명한 건 한국사회에 고질적인 근본주의 사고를 낳으며 “조선의 대표 사대부 송시열이 우리 몸에 심어준 명분 지상주의 DNA, 소학동자 조광조가 뿌리내려준 도덕 제일주의 DNA는 장애가 될 뿐”(353쪽)이라는 점이다.

2. 대한민국 리버럴과 진보가 『나는 보수다』를 읽어야 하는 까닭
: 위선과 허세 속에서 20세기 한국 현대사의 놀라운 성취를 백안시하는 역사 허무주의로 담대한 통합과 치유의 실마리가 과연 생길 수 있을까?

… 문명사가들의 통찰을 따로 빌릴 것 없이 상식과 균형감각에 비춰보더라도, 2010년대 초입의 대한민국은 붕괴된 문명들이 보여줬던 몰락의 두 징후인 정체상태와 역류 현상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 정치와 경제는 정체 상태에 진입한 게 분명하며, 반복되는 다양한 위기 징후를 보면 역류 현상에 이미 발을 내딛었다는 판단이 들 정도다. 지식인사회의 붕괴 위기, 역사 허무주의, 부에 대한 소모적 적대감, 과도한 이념분쟁, 이걸 키우는 큰 자궁으로서의 외곬과 자폐의 슈퍼밈, ‘우리 안의 근본주의 DNA’….
이걸 이제 다섯 가지 한국병이라고 부르자. 정확히 보고 합당한 처방을 해야 옳다. 문제는 치유다. 한국인의 체질로 굳어진 슈퍼밈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중세 이후 형성되고 현대를 거치면서 고착화된 채 장기지속을 거듭하고 있는 그 한국인의 부정적인 모습은 어떻게 바뀔 수 있을까? 해방 이후 반공국가 건설, 경제발전, 민주화의 압축 달성 속에서 놓쳐온 우리 공동체의 가치와 이상, 공적 시민의 덕성을 우리는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얼굴을 차근히 되돌아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한국인을 구성하는 슈퍼밈의 실체를 하나씩 확인하고, 손을 보는 작업 말이다.

-『나는 보수다』, 29쪽 중에서

저자가 진단하는 한국사회 진보진영의 고질병은 5가지다. 1) 진보에 대한 무턱댄 선호를 조장하는 ‘리버럴 강박증’, 2) 20세기 통틀어 그 유례를 찾기 힘든 기적으로 평가받는 ‘신데렐라 국가’ 대한민국의 탄생·성공을 부정하는 자기모멸의 역사 허무주의, 3) 사회적 부패와 병폐를 넘어서 대한민국 공동체의 사회적 합의 기반 자체를 허물고자 하는 반기업심리와 부에 대한 적대감, 4) 담대한 타협의 여지를 아예 가로막으며 지적·문화적 내전까지 빚어내기에 이른 과도한 이념분쟁, 5) 앞서 말한 진보진영의 고질병들 이면에 장기지속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슈퍼밈’, 근본주의 DNA가 바로 그것이다.
얼마 전부터 주요 이슈로 부상한 지식인사회의 붕괴 위기론. 이에 대해 저자가 내린 진단은 그간 이뤄져왔던 것들과는 사뭇 다르다. 저자에게, 어느 때부터인가 느닷없이 등장한 지식인사회의 위기 혹은 붕괴 징후는 ‘지식인은 일단 진보적이어야 한다’는 ‘리버럴 강박증’의 산물이다. 바로 이 강박증 탓에 급변하는 내외적인 현실, 그리고 시효를 상실한 옛 주의와 이상 양자를 분간 못하는 ‘인식적 지체’가 빚어졌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불거지는 비판적 지식인 특유의 허위의식은 물론 동서양을 막론하는 것이긴 하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17세기 이후부터 완고하게 장기지속해온 슈퍼밈, 즉 근본주의 DNA 탓에 그 정도는 자기파괴적이라 할 만하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그 바람에 중상주의 노선의 막차를 타고 이 막차의 기관사이자 “대기획자” 노릇을 했던 이른바 개발연대의 테크노크라트들 또한 당대를 이끈 지식인 범주로는 이해되지 못한 채 종속매판 세력이라는 둥 터무니없는 폄훼에 시달리는 오류가 빚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의 맹목 속에서 진보·리버럴을 자처하는 지식인들은 20세기 현대사에 대해 거꾸로 그것이 마치 파행과 불의 일변도의 역사였던 양 공공연히 외눈박이 행세를 하며 ‘아카데믹한 거짓말’들의 목록과 조합을 차츰 늘려가고 있는 중이다. 이 와중에 무너지고 빈약해진 공적 권위와 공동체적 결속력과 신뢰는 반문화·무교양주의가 대중사회의 문화적 빈곤과 지적 공허, 끝없는 반목의 악순환만 부르는 ‘르상띠망’을 조장하고 있기도 하다.
“현대사는 정의가 패배한 역사”라는 외곬스런 주장이 공공연하게 대중화되고, 백범 김구 같이 한반도 지정학에 어두웠던 패배한 정치인이 좌우를 막론하고 존경하는 인물로 오래도록 추앙받고 있다는 사실 또한 균형잡힌 역사상의 부재와 빈곤을 방증하는 사례들이다. 이같은 난맥상이 비록 큰 그림 없이 이뤄진 대한민국 건국의 부작용이라고는 해도, 새로운 사회적 합의와 통합의 틀은 아랑곳 않은 채로 한국 현대사가 암흑과 파행으로 점철된 양 주장해온 진보·리버럴 지식인들의 무책임 내지 직무유기는 실로 우려할 만한 지경이다.
특히나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들어섰던 지난 10여년 간 진보·리버럴 인사들이 전방위적으로 곳곳에 자리잡으며 대한민국 공동체에 대한 무턱댄 회의를 부추겨온 ‘좌파정서’는 반기업심리와 부에 대한 적대감으로까지 이상증폭해 가는 중이다. 이런 분위기는 새 세기에 요구되는 새로운 대한민국 공동체의 기초 자체를 사실상 불모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를 둘러싸고 벌어져온 작금의 앙앙불락은 그래서 같이 살자는 요청이 아니라 실현불가능한 진보의 신기루를 내걸고서 “다함께 못 살자”고 외치는 대책없는 투정에 다름 아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가다간 역사의 헛바퀴에 갇힌 채 급진이념의 온상이 돼버린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처럼 되지 말란 법이 없다. 따지고 보면 그네들과 한국은 별반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저자가 진보진영을 향해 던지는 질문은 이렇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있게 한 1960~70년대 개발연대의 성취를 재음미하고 삼성·LG·현대그룹과 같은 재벌에 대한 ‘경제적·문화적 연착륙’ 전략을 아울러 모색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민주주의도, 그 민주주의를 지속가능하게 만들 그 어떤 큰 그림도 사실상 나오기 불가능하다는 걸 진보진영은 과연 언제까지 애써 외면할 참인가? 1980년대 사회과학의 시대를 휩쓴 이념 과잉의 해악과 자중지란을 넘어, 보수세력과 진보진영의 담대한 타협을 이끌어낼 ‘제3의 길’은 정녕 없는 걸까?
이같은 길을 모색하기 위해 저자는 ‘성리학 신정국가’라 불려도 손색없을 조선조 때부터 장기지속해온 한국형 슈퍼밈의 정체를 처음으로 파헤친다. 저자는 그 정체를 ‘근본주의 DNA’라고 명명하면서, 이 슈퍼밈의 장기지속이야말로 한국·한국인들이 외부 변화와 새로운 조류에 재빨리 적응하면서도 지독한 자폐적 속성을 버리지 못하게 제약해왔다고 말한다. 불교와 유교, 기독교부터 시작해 각종 급진적 사상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외래 사상들이 맹신과 독선의 교조로 전락해버린 역사적인 경험치들 또한 이같은 슈퍼밈의 장지지속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그간의 통념과 달리, 친일파로 비판받았던 춘원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을 오늘에 다시 되살려야 하는 이유도 춘원의 문제의식 속에 저자가 말하는 근본주의 DNA의 장기지속 문제에 대한 고민의 일단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오래된 질병과도 같이 고질화된 근본주의 습속에서 탈피해 변화와 전향을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한다고 저자가 책 곳곳에서 거듭 주장하는 까닭도 그래서다. 이 책 말미에 저자가 개혁과 이상의 이름으로 되려 광신주의의 생지옥을 연출하길 서슴지 않았던 ‘개혁주의 독재자’ 루터와 칼뱅에 의연히 맞서 싸우며 상대주의와 관용의 가치를 앞세웠던 에라스무스와 카스텔리오, 역시 프랑스혁명의 대의가 지닌 역설을 경계하며 ‘균형잡힌 인문주의’의 미덕을 살리고자 했던 알렉시스 토크빌과 에드먼드 버크에 관한 일화를 언급하는 것 역시 지금 우리 시대에 요청되는 변화와 전향의 원칙을 새삼 되새기기 위함이다. 진보진영은 과연 이처럼 균형잡힌 인문주의의 가치를 되살릴 준비가 돼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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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겨선수 김연아의 프리스케이팅 작품명 <오마주 투 코리아>를 언급하고 있다시피, 『나는 보수다』는 20세기 한국 현대사에 대한 존경과 감사에 바탕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기존의 자타칭 보수와 진보가 애써 외면하거나 백안시했던 20세기 한국사의 곡절들을 냉정하게 직시하자는 열정적인 요청이기도 하다. 『나는 보수다』는 한국사회에 구조적으로 임박해 있는 각종 해체와 붕괴 징후들 앞에서, 진보와 보수진영을 막론하고 사회적으로 뿌리내려 있는 암묵적 금기들을 깨고자 하는 지적 분투의 산물인 셈이다.
에드먼드 버크와 토크빌이 프랑스대혁명의 위험성을 경고한 보수주의 정치철학의 아버지로 평가받지만 반동적 왕정복고주의자라고 평가받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는 것처럼, 『나는 보수다』는 한반도와 대한민국을 둘러싼 세계와 역사를 더 크고 새롭게 바라보자는 겸허한 제안이자 본격적 논쟁에 대한 요청으로 읽힐 만하다. 지난 20세기 현대사에 대한 무턱댄 추종이나 섣부른 단절과 어떻게 철저하고 단호하게 선을 그을 것인가. 『나는 보수다』는 이 질문을 통해 새로운 사회·정치·문화적 합의를 이뤄내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다.

3. 『나는 보수다』 저자와의 가상인터뷰: 내가 굳이 보수를 자처하는 이유

-책에선 이제는 터놓고 말할 때가 됐다고 하는데, 대체 무엇을 터놓고 말하고 싶다는 건가?
한국사회, 특히나 한국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일단 진보적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가히 허세를 방불케 할 정도다. 물론 그래야 했던 사회적·역사적 배경이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마냥 이해하고만 있기에는 이미 그 한계를 넘어 방향을 상실한 상태다. 가뜩이나 사회우울증의 징후가 곳곳에서 감지되는 이 시점에서, 결코 강 건너 불구경 따위가 아니다. 이미 사회적 괴물로 거듭날 조짐을 보이는 좌파정서의 확산을 막기는커녕 되려 조장하고 있다. 우리가 근대국가 건설에 필요한 ‘큰 그림’도 없이 출발했고, 이를 위한 사회적 동의 과정조차 생각됐거나 태부족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는 더더욱 예삿일이 아니다. 묻지마 분노와 방향 없는 항변의 목소리들이 갈수록 거세질지 모르는데도, 이를 부추기거나 짐짓 외면하고 마는 그간의 상황에 단호히 “노!”라고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혹세무민의 피리소리들만 요란했지, 생산적 논의의 실마리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이런 식으로 과연 지난 세기 한국에서 일구어 낸 ‘대반전의 드라마’가 과연 장수할 수 있을까? 나는 굉장히 회의적이다. 그래서 이젠 터놓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보냐, 아니면 보수냐’ 같은 질문은 제쳐두고서라도, 당신이 서 있는 자리가 궁금하다. 이마저 편가르기에 길들여진 탓에 던지는 우문일까?
썩 내키진 않지만, 차라리 그런 질문이 필요하다. 구태의연한 도식으로 이런저런 딱지 붙이기나 하고 있는 것보단 말이다. 이제껏 얘길 했는데도, 내 정체가 아직도 파악 안 되나? 내가 선 자리는 명확하다. 진보가 낫네 보수가 좋네 하는 식의 이분법은 죽었고, 이 이분법에 갇혀 있다가는 다 죽겠다는 거다. 바로 이런 이분법이 조악한 선악사관과 온갖 조급주의를 양산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이런 데 발목 잡힌 채 보수든 진보든 좋았던 옛시절이나 되뇌이며 허송세월하고 있을 때인가? 난 이 질문을 이 책을 통해 심각하고 진지하게 던지고 싶었다. 어찌 보면 내 나름의 ‘역사 구부리기’ 작업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달리 보면 당신의 주장은 어설픈 절충주의, 심한 경우에는 절충적 기회주의라는 지적도 피하기 힘들어 보이는데?
바로 그렇게 충분히 예상가능한 판단과 평가가 횡행하는지 이 참에 한 번 제대로 짚어보자는 거다. 대체 어떤 잘못된 전제들, 혹은 책에서 말한 ‘아카데믹한 거짓말’들로부터 그런 평가가 나올 수 있는지 말이다. 한국사회 진보진영의 5가지 고질병을 짚고, 이 병을 덧나게 하는 20세기 한국의 명암을 살핀 까닭이다. 나는 이 작업이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구조적 해체와 붕괴의 벼랑길이 아닌 통합과 치유, 도약의 탄탄대로로 이끌기 위해 절박하고도 시급하다고 봤다. 그 누가 뭐라고 하든 이런 내 생각엔 변함이 없다. 이 책이 자타칭 보수들한테는 그간의 게으름과 무사안일을 일깨우는 죽비소리로, 자타칭 진보·리버럴들한테는 자해적 비판과 방향 잃은 분노의 미망을 깨우는 만파식적이 되길 바란다고 한 것도 그래서다.

-잘 알겠다. 당신의 집필의도가 그런 것이라면, 내용상의 호불호를 떠나 의미있는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 같다. 또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 모쪼록 건투를 빈다.
그러게, 내 말이 그 말이다. 나 또한 이 책에서 하고 싶었던 모든 얘기들이 독자들에게 꼭꼭 씹히고 잘 저며져, 의미심장하고 생산적인 논쟁의 재료 혹은 불쏘시개가 되길 바라마지 않는다. 그러니 그리 될 수 있도록 당신도 이 책의 출간 소식 좀 널리 알려 주시라. 기존의 낡은 진보-보수 구도 속에서야 뭐 하나 마냥 반길 순 없겠지만 이에 관한 그 어떤 비판적 목소리들에 대해서도 댓거리할 준비가 돼 있다, 나는.

4. 조우석이 말하는 조우석, 그리고 『나는 보수다』

나는 누구인가 문화의 시선으로 한국사회 구조를 해석해온 저널리스트. 1981년 이후 《서울신문》과 《문화일보》, 《중앙일보》에서 문화부 기자로 활동하며 음악·미술·사진·문학·학술 등 문화 전반을 다뤄왔다. 요즘은 우리 삶의 그루터기인 한국사회 전반에 관심이 쏠려 있다. 저서는 『굿바이 클래식』과 『박정희 한국의 탄생』 등 여러 권이 있다. 《중앙일보》에 연재한 「조우석 칼럼」으로 서울언론인클럽에서 주는 2010년 신문칼럼상을 받았다.
왜 이 책을 썼나 한국사회 지식인 대부분은 자기가 진보적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인 ‘리버럴 강박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게 조우석의 판단이다. 그게 알게 모르게 먹물의 허위의식을 낳고 있지만, 젊은이들 가슴에 방향 모를 분노 즉 ‘좌파정서’를 확산시키는 주범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사회 고질병을 털어내고 책임 있고 건강한 주류사회를 복원할 수 있을까? 그것도 2012년, 2017년 대선이나 총선 시즌 때 반복될 표피적이고 소모적 논의보다 깊고 본격적으로 논의해볼까? 그런 담대한 제안의 목소리가 이 책이다.
무슨 내용을 담았나 이 책 가제가 본래 ‘디스토피아: 한국의 몰락’이었다. 한국사회 항구적 위기를 낳고 있는 다섯 가지 고질병을 도마 위에 올려 강력한 경고음을 내보자는 의도였다. 우리 역사는 실패했다고 믿는 역사 허무주의, 못 말리는 반기업 심리에 대한 균형 잡힌 분석이다. 진보와 보수 사이의 편가름 따위와는 무관하지만, 혹시 누가 보수라는 딱지를 붙여준다 해도 상관없다. 그래서 『나는 보수다』이다. 대한민국이란 공동체를 위한 ‘큰 그림’을 그리고, 뜨거운 동의와 합의를 구하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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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 1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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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보수다. - 대한민국을 망치는 5가지 코드, 대화가 필요해  새창으로 보기
사람세상 ㅣ 2011-10-10 ㅣ 공감(0) ㅣ 댓글 (0)
이대로라면 나는 이 나라의 앞날이 두렵다!" 맞는 말씀이다. 이대로라면 대한민국의 미래가 암담하다.
이런 말은 보수주의자의 입만이 아니라 진보주의자의 입에서도 들린다. 누구도 내 잘못이다란 말을 잘 하지 않는다. 모두가 네탓이다이라고 한다. 저자가 마치 진보가 다수파이고 보수가 소수파로 전락하여 헤게모니를 진보가 잡은 것인양 엄살을 떠는 주장엔 동의할 수 없다. 하진지만 그들의 시각으로 보면 보수의 목소리가 조중동을 중심으로 하는 구 미디어엔 말발이 서지만 뉴미디어인 블로그, 카페, SNS에선 신통치 않아 젊은 층으로부터 이반된 현주소를 지극히 두려워한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천편일률이 되어선 곤란하다. 새가 좌우 날개로 날듯이 인간 사회에도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양날개가 필요한 것은 아닌지. 그 어느 나라보다 중도 보수, 중도좌파, 중립을 시류에 따라 표방하는 정치인이 많아서인지 나는 보수다란 검색어로 검색하니 새는 좌와 우날개와 몸통으로 난다고 중도를 강조하는 글도 보인다.



공이 크다고 해서 과에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현대판 파라오라던 무바라크가 시민혁명으로 법정에 섰는데 방청객의 돌발적인 위해행위를 막기 위해 그와 그 아들이 철창으로 보호된 공간에서 심문에 응하는 모습을 오늘 아침 뉴스에서 보았는데 그는 그의 범죄사실을 극구 부인하고 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보수가 위정자들이 지난 날 범한 불법행위에 대해 갖는 태도가 아닐까?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 소장의 나는 대한민국 보수다란 한겨레 칼럼(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87919.html)의 “결과가 모든 것을 정당화한다”란 말이 나는 보수다란 책에 적용되는 말이다. 저자의 주장에 일견 공감이 가는 면이 많지만 결과가 좋으니 덮어두자.  국부라고 숭앙하는 이승만 대통령과 전쟁영웅 백선엽을 부각시키려는 프로그램을 방영하여 여론을 환기시키려는 그들의 시도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저자가 대한민국을 망치는 다섯가지 코드로 진보진영의 5가지 고질병으로 진보와 리버럴이란 신기루, 백안시와 부정 일변도의 역사 허무주의, 반기업 심리와 부에 대한 적대감, 내출혈을 반복하는 과도한 이념분쟁, 신라이후 우리를 지배한 오래된 질병 근본주의 DNA를 들어서 진보진영에 대한 비판과 대한민국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부분부분 저자의 지적에 공감이 가는 바가 전무하지 않지만 진보진영에 근본적인 문제점 모두가 진보의 문제인가, 아니면 원인제공자가 보수라는 점에 대해선 얼버무리지 않았나 싶다. 어떤 점에선 진보의 시각도 보이고 어떤 점에선 보수의 시각이 혼재되어 있다.

그가 말하는 대한민국의 빛나는 역사는 세계 10위 이내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탁월한 지도자 박정희의 허물을 지적하고 흠집내기는 그만하고 우리의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갖자고 이야기한다.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나 해방전후사의 인식, 비판적 시각으로 쓴 역사서 모두를 싸잡아 비판하고 우파의 시각으로 쓴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등의 책을 높이 사고 있다. 그런 점에선 보수와 진보의 양분론에서 탈피하고자 이책을 썼다는 그의 의도가 모호해진다.



어느 사회든 비판적인 지식인이 존재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마치 있어서는 안될 존재처럼 간주해서는 지극히 위험한 발상이 아닐까? 반기업정서는 국민들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문제를 있게 만든 정경유착의 고리, 부정부패, 탈법행위, 강부자 고소영이란 신조어를 만든 MB정부의 인사문제 등에 대한 해결없이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이념논쟁의 뿌리는 실로 깊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아직도 사상의 자유가 온전하게 보장되지 않는 것이 국제적으로 공인되어 있는 나라다. 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아직도 보수가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고 보수가 유발하는 이념논쟁도 너무나 많다.

송시열의 의리 명분에 입각한 소중화, 조광조의 도덕주의, 중국 대륙에 불교가 들어가든, 맑시즘이 들어가든 중국화된다는데 우리는 유교, 불교, 기독교든 모두 근본주의의 틀에 갇힌 꼴이라는 저자의 지적은 공감이 간다. 한문만 보더라도 중국은 간체 등으로 간소화한 반면에 우린 당나라가 쓰던 한자를 아직도 사용한다, 공자 문묘제례의 전범을 중국이 우리나라에서 배워갔다는 소리도 들리는 것을 보면 변화를 거부하는 우리의 DNA가 강하긴 강한 모양이다.



국회의원을 대상으로 존경하는 인물을 조사했는데 1위가 김구주석, 저자는 김구를 존경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나라를 세운 국부 이승만이나 오늘의 대한민국을 경제강국으로 발돋움시킨 일등공신 박정희대통령이나 전현직 대통령을 존경한다는 의원이 거의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림형제의 피리부는 사나이가 쥐를 쫓아준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 그들의 미래인 아이들을 잃어버린 주민들처럼 지금 대한민국의 미래를 허물어뜨리는 근본이 진보 혹은 좌파에게 있다고. 그리고 춘원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을 옹호하는 대목에선 뉴라이트의 잔상이 보인다. 일제가 한반도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평가하는 그 역사관을..과거사 청산에 대한 그의 부정적인 입장도 이해할 수 없다. 용서를 하든 처벌을 하든 진상만은 규명해야 하지 않는가? 물론 과거사의 상처를 들추어 덧나는 문제점도 있다하더라도. 과거사 청산을 반대하는 이유가 상처가 덧나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구린내가 나는 과거가 더 두려운 것이 아닐까?



보수의 입장에서 유구하게 내려온 진보에 대한 시각은 대한민국을 혼란스럽게 하고 북한을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다급해지면 너 빨갱이지라고 낙인만 한번 쾅 찍으면 만사형통인 시대가 있었다.(물론 지금도 그것에서 온전하게 놓여나지 않았지만). 그러나 세상은 변했다.
우리 몸안에 내재된 근본주의 DNA는 기층에서 심어준 것이 아니라 주류가 심어준것이 아닌가.

이대로라면 나는 이 나라의 앞날이 두렵다!" 맞는 말씀이다. 이대로라면 대한민국의 미래가 암담하다.
보수가 대한민국의 중추세력으로 길이길이 존재하려면 과거사의 잘못에 대한 인정과 고해성사가 필요하고 반기업정서, 부에 대한 거부감은 국민이 아니라 원인제공자가 과오을 인정하고 깨끗해지는 것이 해법이다.  MB 집권후 기독교 근본주의가 급부상하고 있어 근본주의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대한민국 현대사에 대한 시각은 극과 극이다. 그리고 쟁점에 대한 시각도 극과 극이다. 이는 비단 대한민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엔 보수와 진보가 모두 필요하다. 어느 시각도 절대선은 없다.
무상급식, 4대강 살리기, 반값등록금, 주한미군, 통일 등 어떤 문제도 원만한 합의에 의해 결론이 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세상은 변하고 있다. 4~50년대, 7~80년대의 틀로 21세기의 오늘을 살아갈 수는 없다. 진보든 보수든 이전과는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시대가 요청하고 국민들이 바라고 있다.


출발선부터 삐그덕거렸던 대한민국의 현대사, 빛나는 영광의 역사, 오욕으로 점철된 과거사 모두가 대한민국의 역사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보수만이 대한민국의 중심이 아니라 진보도 함께 대한민국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파트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남북으로 갈라지고 좌와 우, 지역으로 갈라진 대한민국이 우리모두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되는 첫걸음이 아닐까?



보수는 진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진보는 보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서로를 한걸음 더 이해하기 위해 나는 보수다라는 책이 필요한 이유가 아닐까.

보수가 집권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진보가 집권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나라는 좋은 나라가 아니다. 진보냐 보수냐를 선택하는 것은 얼마나 집권세력이 국민을 행복하게 했는지 불행하게 했는지에 대한 평가요 선택이므로.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아직도 대한민국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것은 진보가 아니라 보수다.

진보의 시각에서 대한민국을 망치는 보수의 5가지 코드는 무엇일까?



저자의 생각에 100% 공감하지 못하고 역심이 드는 나는 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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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기 있는 고언  새창으로 보기
심술보   ㅣ 2011-08-22 ㅣ 공감(0) ㅣ 댓글 (0)

 "용은 상냥한 짐승이다. 가까이 길들이면 탈 수도 있다. 그러나, 턱 밑에는 지름이 한 자나 되는 비늘이 거슬러서 난 것이 하나 있는데, 만일 이것을 건드리게 되면 용은 그 사람을 반드시 죽여 버리고 만다. 군주에게도 또한 이런 역린(逆鱗)이 있다." <韓非子>에 나오는 말입니다. 물론 지금 우리나라에 군주는 없습니다. 하지만 역린은 있습니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군주는 곧 국민이죠. 그 국민, 정확하게 말하면 대중의 역린을 건드리면 역시 죽음이긴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보수천하 같지만 실상 좌파들이 장악하고 있는 출판문화 속에 그 동안 이렇게 제대로 좌파들의 역린을 건드린 책은 없었습니다. 이문열 못지 않은 핍박과 화형이 뛰따를 테죠. 저자는 그걸 뻔히 알면서 이런 책을 썼습니다. 더구나 저자의 직업은 정치인이 아니고 저널리스트입니다. 대중의 의식을 읽고 대중을 설득해야 하는 저널리스트가 이런 책을 썼다는 건 대단한 용기입니다. 그래서 나는 저자의 진정성을 믿습니다. 예전 충신은 군주의 역린을 건드릴 땐 목숨을 걸었습니다. 책을 읽는 동안 저자도 걸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저널리스트로서의 생명을.

 대한민국 역사는 파란의 드라마입니다. 너무나 어려운 환경에서 태동한 나라였기에 숱한 고초를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살자고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똥도 묻고 피도 튀었습니다. 그래도 살아남았고 이젠 똥도 피도 닦아내는 중입니다. 숨어 있던 번듯한 인물이 드러나면서 어느새 세계의 찬탄을 듣는 나라로 환골탈태하고 있는 중입니다.똥 묻고 피 튀었다고 사람을 버릴 순 없듯 어두운 역사가 있다고 국가 자체를 부정해선 안 됩니다. 때가 묻었다면 씻어내고 어두운 구석이 있다면 밝히면 되지 더러우니 그냥 죽여버리자고 하면 안 됩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자칭 진보좌파는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다 태우자는 사람들입니다.

 잘못된 역사가 있다면 바로잡으면 됩니다. 대기업이 법을 어기고 부도덕하다면 징계하면 됩니다. 부정부패한 사람이나 집단이 있다면 처벌하면 됩니다. 그렇다고 대한민국의 역사 전체를 부정하고 대기업,부자와 내가 아닌 남은 모두 악이니 없애버리자고 하면 안 됩니다. 무 자르듯 세상을 이분해 선과 악의 싸움으로 규정해선 안 됩니다. 그런 생각이 적의 적은 동지라는 단순 논리에 빠져 온 세계가 비판하는 북한정권을 긍정하는 어리석음으로 나타납니다.

 책 제목은 노골적이지만 내용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고하는 충언입니다. 오랜 시간 언론에 몸 담은 사람답게 넓고 깊은 사회이해를 바탕으로 논리적인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저자는 좌우를 편가르고 싸우자고 이 책을 쓴 게 아닙니다. 오히려 함께 날자고 좌우의 날개로 함께 날자고 고언합니다. 미래를 보고 희망을 만들어 가자고 얘기합니다. 그 충언이 잘 받아들여질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저자가 지적하는 다섯 가지 "슈퍼밈"은 말 그대로 질긴 생명력을 지닌 "슈퍼밈"이니까요. 고질병이 잘 고쳐질까요? 역린만 건드린 꼴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도 저자의 용기와 충심에 박수를 보냅니다.

 출판사의 무성의만 아니었으면 별 다섯개를 줘도 아깝지 않을 책인데 아쉽습니다.최소한의 교정도 보지 않아 오.탈자와 비문이 속출합니다. 내용으로 보아 저자가 일필휘지로 상당히 서둘러 쓴 글인데 그럼에도 내용은 중심을 잃지 않고 있어 저자가 오랜 시간 고민해 온 결과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용에 대한 불만은 없는데 출판사의 무성의엔 화가 납니다. "나는 보수다"라는 제목도 출판사의 의견으로 보이는데 저자가 처음 생각했던 "디스토피아:한국의 몰락"에 비해 마케팅엔 도움이 될 지 몰라도 심하게 오해를 사기 좋은 제목입니다. 저자는 한 쪽에 치우친 사람이라기보다 균형감각이 뛰어난 사람으로 보이는데 제목이 저자의 의도를 곡해하고 있습니다.저자의 후기를 보니 잘은 몰라도 출판사 사장이 좌파인사 같은데 의도적인 태업 내지 곡해를 한 건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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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기있는 한 사람의 목소리  새창으로 보기
13번째전사 ㅣ 2011-08-10 ㅣ 공감(2) ㅣ 댓글 (0)













요즘 시대 조우석씨 같은 자신의 견해를
자신있게 표출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를 생각해 본다.
글로 살고 있고 그 글들로 상까지 받았던 분이
이 책의 파장을 고려 안했을리 없을 테니까.
그럼에도 용기있는 책 출간과 그 내용에 격려를 보낸다.
나는 단어의 사전적 어감면에서 보수란 단어보다 분명
진보가 훨씬 좋은 느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탓일까, 꼭 정치적인 이야기가 아닐지라도
자신의 성향을 보수적이라고 얘기하는 것 자체는
앞뒤가 꽉 막혔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생각되고
편하게 난 보수적인 사람이라는 표현은
누구나가 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단어 자체의 그 어감측면에서.
물론 이 또한 오래전부터 가져온 고정관념일 수 있다.
그런 '보수'란 단어를 책의 저자 조우석씨는
앞에 주어 '나'까지 붙여 '나는 보수다'라고 썼고
단 하나의 미사여구나 말돌림없이
직설적으로 책제목속에 '보수'란 단어를 선택했다.
이 책속엔 사회에 대한 굵직한 걱정들이 깔려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의 절망들도 담겨있다.
한 지식인으로써 사회의 쏠림현상을 꾀뚫고 있다는 것,
그리고 용기내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해 보는 것,
그러나 어디까지 그의 단기필마적인 용기가 빛을 보게 될까?
그가 우려하는 흐름을 돌리고 환기시킬 수 있을까?
한계를 느끼고 무력함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됐다, 저자나 독자모두.
더이상 옳은게 옳고 틀린게 틀리지 않은 세상.
너도 맞고 나도 맞으니 소통하고 대화가 정답인 세상.
말은 완전 맞는거 같은데 어딘지 모르게
휘말린 듯 너무 힘들고 말로만 가능한 불가능 일들을
등떠밀려 애써 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 말 자체도 나와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 또한
나를 향해 쓸수 있단 생각에 또 다른 혼란은 가중된다.
어렴풋한 많은 생각들을 조우석씨의 생각을 담은
이 책속 글들을 통해 정리해보는데 무척 많은 도움을 받았다.
책을 보면서 문득문득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자 또한
진보의 영향을 받은 보수일거란 생각을 가지며 읽었다.
보수를 대변하는 글을 담은 이 책에서도 진보의 느낌은 담겼기에.
진보적인 느낌의 글들이 '나는 보수다'란 책속에서
짧은 타이밍으로 노출되는 컷들처럼 느껴질 때마다
한 지식인으로써 무게 중심을 위한 첨가였을지,
아님 순도를 높일수록 늘어날 수 있는 책임감에서
조금은 자유롭고 싶어서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왔던
방어적 발현이었을지가 많이 혼동스러웠다.
그러나 어느 쪽이 됐건 그의 얘기들은 새롭고 많이 솔직했다.
오래전부터 클래식 관련한 기사들에서도
간혹 그가 쓴 관련 책 때문에라도 만나게 되는 저자였다.
그의 폭넓은 소양과 생각들을 이렇게 솔직한 책들을 통해
더 많이 자주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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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보수다.  새창으로 보기
구름산책 ㅣ 2011-08-09 ㅣ 공감(0) ㅣ 댓글 (0)
중앙일보에서 개인 칼럼을 쓰는 현직 기자의 책이다. 뜨문 뜨문 읽었던 신문에서의 글에서는 이토록 보수예찬론자인지 전혀 몰랐는데 이 책에서 저자는 떳떳한 보수, 용기있는 보수가 되고자 스스로 활짝 독자의 심판대에 나섰다. 꺼먼 바탕에 큼직한 활자로 '나는 보수다'라는 서명이 찍힌 책을 마주하니 충격효과가 꽤 크다는 느낌인데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자칭 보수라고 외칠 수 있는 상황이 장려할 만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책을 읽어가는 과정은 마치 이 저자의 생각이 진정 용기있는 보수인지 검증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박정희만 대통령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70년대의 교육현실을 떠올려보면 지금은 천지 개벽이라고 할만한다. 진보진영쪽의 두 대통령이 집권한 10년의 세월을 거쳤기에 언제나 핍박받던 진보는 아닌 상황이 되었다. 그렇다면 실세가 되었던 진보의 폐해도 심심찮게 거론될 수 있고 나름 참신한 사고의 보수진영의 발언도 기대할만 할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답습의 힘은 의외로 커서 과거의 오류를 극복한 새로운 기운으로서의 진보나 보수는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무한히 혁신의 과정이 필요하다.



저자는 에드워드 윌슨의 말 '우리는 구석기시대의 감정과 중세의 제도와 현대과학기술을 함께 가지고 있다'를 한국인 멘탈리티에 적용하고 이렇게 대입시킨다. '21세기 한국인은 조선시대의 자폐, 외곬의 마인드와 현대사회의 시스템을 가지고있다.' 즉, 한국사회는 세상의 변화를 선도하는 강력한 중심축이지만 변화를 거부하는 문화의 늪이 함께 존재하는 독특한 슈퍼밈을 가졌기 때문에 종종 심각한 갈등과 부조화를 빚어낸다는 것이다.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흑백, 선악의 진영을 나누는데 익숙하고 주류와 엘리트층과 언론 기업 정치의 기성체제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강한 평등주의 정서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공동체를 이루려는 구심력을 상쇄하는 수준으로 부정적, 소모적인 힘이 커질 경우 비극적인 한국 해체도 불가피하다는 것이 이 책의 메시지다.



그의 지적이 적절한 시기의 적합한 메시지가 될 수 있을까. 6, 7, 80년대를 풍미했던 반공이데올로기는 항상 집권파의 정권유지에 최후의 무기이자 보루였던 것처럼 한국해체의 비극이 운운되는 경고의 수준자체가 보수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닐까 우려의 입장이 된다. 그는 한국 해체를 부채질하는 5가지 요인을 1. 현대사회를 성난 얼굴로 바라보는 역사허무주의, 2. 반기업심리와 부에 대한 적대감, 3. 이념분쟁, 4. 무교양주의와 반문화주의-지식인 사회의 급격한 붕괴, 5. 우리안의 근본주의 DNA 이라고 말한다. 프롤로그에서 이런 순서로 언급한 다섯가지 요인은 책의 구성에서는 먼저 네번째 지식인사회의 붕괴가 이슈화되고 나머지 요인들이 순서대로 나오는데 무엇보다 저자의 생각에는 이 네번째가 더 현실감각있게 다가오는 문제라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리버럴 그룹의 지식인이 30년의 혁혁한 역사흐름을 통해 권력화했다고 보는 저자는 소외된 대중이라는 용어자체도 가차없이 처단한다. 그는 이마트나 대형백화점에서 강요된 선택때문에 불행해지고 비참해지는 사람은 한번도 없다는 것이다. 매트 리들리의 <이성적 낙관주의자>에서 인용한 소외론 비판부분은 원 저서를 확인후 문맥적 의미를 파악한 후 인용의 타당성을 확인하고 싶지만 어쨌든 지식인들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지나친 몰입은 허위의식만 조장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조선조 사대부들의 돈과 재화에 대한 자기검열과 사회적 감시의 허점을 지적한다. 그는 이렇게 조선조 사대부들의 이중적 의식이 또다른 허위의식을 가진 서구적 모델과 만나 특유의 분열증으로 증폭했다는 것이다. 유교의 비실용적 부분을 과대하게 비판하고 있는 저자의 모습은 그의 말대로 절대순수를 내건 조선조 특유의 인문학을 지지하는 세력들만큼이나 전체의 눈을 상실한 판단이 아닐까. 조선조 때 관직에서 물러난 뒤 끼니걱정하면서 말년을 보낸 학자와 정승들의 삶이 그에게는 자칫 비아냥거리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면, 퇴임후 수많은 재산을 차명으로 빼돌려 50만원밖에 재산이 없다던 전직 대통령의 삶을 칭송하고자 하는 의도란 말인지 참으로 알 수 없다.



저자는 탈유교 반전통노선의 성취를 이룬 박정희정권의 개발연대에 이룩한 모더니즘에 대해 적극적인 옹호의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충무공 이순신 동상이 광화문 한복판에 있었던 시절의 문약전통이 세종대왕상을 동상뒤에 설치하는 사업으로 변질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심지어 일본의 근대화가 메이지때 낡은 인문주의 전통을 부정함으로써 가능했다는 기존 해석을 강조하면서 후쿠자와 유키치의 전통부정의 배짱을 찬양하는 부분에 이르면 후쿠자와의 아시아 침략적 사고에 대한 새로운 비판의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더우기 동북아 최고의 유교해체주의자로서 오규 쇼라이와 이토 진사이를 언급하며 순수한 통치술의 차원으로 유학에서 도덕과 윤리의 요소를 제거한 것에 칭찬으로 일관한다. 저자는 우리에게는 오규 쇼라이와 마루야마 마사오가 없다고 통탄한다. 현재 극우내지 보수적 역사입장의 틀을 제공했다고 할 마사오를 학계의 천황이라고 부르는 저자는 과연 한국인인가, 일본인인가. 이 부분에 이르러 나는 저자, 너는 그냥 보수가 아니구나, '골수' 보수구나 하고 외친다. 마사오는 전후 일본의 황폐한 상황에 구심점을 제공한 인물로 일본인들에게 칭송될지는 모르나 그의 부드러운 듯 확고한 역사왜곡의 기반이 오늘날의 일본의 교육과 의식을 지배한다는 사실은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적어도 저자가 일본 사가와 사상가들의 저서를 통해 조선 유학자들의 이중의식을 읽었다면 이또한 식민사관의 한 예가 될 것이다.



시사교양프로와 연예인 잡담프로가 산술적으로 똑같은 무게와 가치를 가졌다고 여겨지는 국면을 정보의 무중력이라고 한단다. 저자는 이러한 정보무중력에 문화 포퓰리즘이 가세해 하향평준화를 더욱 빠른 속도로 재촉하고 있는 상황을 지적했다.  인터넷매체의 확산속에 대중문화의 속성에 대한 지식인그룹의 성찰과 반성이 요구되는 것은 사실이나 역사적으로 물질은 항상 정신을 앞서 나아갔고 우리 세대가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은 비단 한국병으로 치부될 것이 아니며 전세계적인 관심과 집중의 대상이 아닐까. 그것은 인류의 21세기적 현상이고 어느 시대건 정신세계의 가벼움에 대한  기성세대의 우려는 있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진보, 보수의 특정 한 쪽의 잘못은 아니다.



조우석은 한국형 역사 허무주의를 일컬어 나만의 진리, 자페적 진리의 늪에 빠진 진보적 지식인 그룹의 발명품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도그마에 충실하고 색안경을 끼고 본 현대사라는 것이다. 역사 허무주의는 1948년 건국이후 대한민국역사를 정통성이 없다고 규정하거나 이후 개발연대의 성취를 애써 부인하려는 역사인식을 통칭한다고 말한다. 성공의 역사인 현대사에 눈감은채 분노와 원한을 반복하고 있는 진보지식인들의 멘탈리티와 한몸으로 돌아가는 지적태도이며 불행한 정서라는 것이다. 저자는 신채호의 육경을 불살라라는 말을 인용하며 조선조 유학자들의 이중의식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나라만들기 첫삽을 뜬 할아버지세대를 따뜻하게 이해하자는데 힘을 준다. 그에 의하면 유교적 전통의 말살은 타당한 것이고 20세기 한국역사는 천지개벽이 된다. 기억공동체로서의 한국사회는 과연 근대화라는 하나의 잣대에 기초한 이러한 보수적 역사인식에 후한 점수를 줄 수 있을 것인가? 미국의 역사만들기는 구심력을 강력하게 행사했다며 부러워 하고 미국의 68세대는 한국의 386세대와는 달리 포용과 순치의 힘을 발휘했다고 칭찬하기에 급급해서야 되겠는가? 일본과 미국처럼 역사변조도 서슴지 않는 그들을 닮아가자는 말인가?



친일등의 과거사 청산이 소모적인 내출혈이라는 주장은 미래를 위한 새로운 지평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는 이유만으로 이해될 수 없다. 그 지평을 위해 무한정 무작정 무조건 보듬을 수는 없다. 물론 청산 방법의 한계도 지적될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사 청산이라는 이슈에는 도통 관심도 없다는 게 더 문제인 것같다. 아직은 소모적이라고만 볼 수 없다는 거다. 백범이 건국과정에서 부정적 반대세력의 좌장이었다는 해석은 상당히 도발적이며, 아울러 민첩하고 발빠르고 현실적응에 우수한 자만이 역사상 존경할만한 인물이라고 보는 저자의 입장은 일본 만엔권에 후쿠자와의 초상이 그려져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어떤 반감도 일어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존경할만한 인물을 뽑는 정치인들에게 던진 설문에서 김구가 유일하게 많은 득표를 보여준다고해서 그의 현실 부적응 감각을 지적하는 것은 승자의 역사라는 냉혹한 승부사 이미지만 키워줄 뿐이다.



반기업심리와 부에 대한 적대감이 한국사회에 뿌리깊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현실은 철옹성같은 대기업의 영향력과 정치와의 연루관계라는 시각에서보면 계속 유지되는 편이 더 유리하다는 생각이다. 타당한 사고의 근거없이 형성된 반감은 문제일 수 있겠으나 독점 재벌과 대기업공화국의 면모에는 발전적 요소보다 부정적 요소가 더 많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공감되고 있다. 또 저자가 제시하는 실사구시와 희생양찾기 게임의 종결은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을지 모르나, 평등주의의 늪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라는 말은 아직은 무리수다. 미국 유학생들중에서도 비싼 차를 끌고 다니며 등교하는 사람은 친구들과 교수들로부터 대접받는다는 소리를 듣고 미국식 배금주의의 정석을 본 것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우리도 이런 미국을 무조건 닮자라는 건 과거의 한국역사를 내던지고 동양의, 동아시아의 국가로서의 한국의 정체성을 버리자는 것과 같은 말이라고 본다.



미국이 신용등급이 하향조정되면서 전 세계의 경제가 기우뚱거리고 있다. 우리 증시도 무려 몇백포인트가 내려가면서 장회복의 가능성이 있나 없나 점치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과연 우리가 진보나 보수라고 생각하는 행동과 사고의 영역이 뿌리칠 수 없는 내 과거의 오점에서 출발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때다. 기반에 오류가 있다면 과감히 재배열하고 정리할 건 정리하고 수용할 건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제발 골수 00다라는 말은 안듣고 살아야겠다. 중용의 미덕을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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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임다 ㅣ 2011-08-07 ㅣ 공감(1) ㅣ 댓글 (0)

나는 1967년에 태어났다. 그때는 버스도 다니지 않았고 친척집을 방문할때는 어른 걸음으로 40분을 걸어야 버스를 탈수 있었다. 잘살아보자고 마을마다 확성기에서 노래가 흘러나왔고 퇴비증산을 위해서 집집마다 풀을 베어 집앞 마당에 높이 쌓아올렸다. 먹을 것이 없어서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며 열매를 따먹었고 먹을 수 있는 순한 잎이면 모두 먹어치웠다. 개발연대인 1960-70년대 대한민국은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고 지금은 음식이 남아서 버릴 정도로 잘살게 되었다. 과거의 영광을 비판하자는 건 아니다. 그땐 그럴수 밖에 없었고 또 그래야만 잘살수 있다고 믿었다. 그 개발 여파가 지금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가치를 바꾸어놓았고 잘살고 있는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불만이 여기저기에서 표출되어 나타나고 있다. 기득권층은 이러한 불만을 힘으로 누르려했고 억울하다고 항변하던 일부 사람들은 죽음으로써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오히려 기득권층에 대한 분노가 일반인들의 심리에 깔려 있어서 새로운 변화를 바라는 대중들의 욕구가 이시대를 보수와 진보로 갈라지게 만든 것 같다. 앞으로도 이러한 대중의 심리적 갈등은 더 깊어질 것이고 그로 인한 사회통합은 더 어려워질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저자는 이러한 대한민국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를 5가지 코드를 가지고 위기의 대한민국을 진단하고 있다. 국민이 세운 대통령을 스스럼없이 마구 욕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또 그래야만 자기만의 색깔답다고 여기는 것 같다. 물론 대통령이 모든 걸 잘할수는 없다. 누가 대통령이 되었든 욕을 안먹을 수 없는게 작금의 대통령의 자리라고 본다. 국민들의 코드를 읽고 대통령이 되었지만 되고 나서는 국민들의 코드를 외면해버린다. 국회의원들도 그렇다. 자기를 뽑아주기만 하면 간도 다 빼어줄 정도로 표를 얻기위해 뛰어다니지만 막상 되고 나서는 상전이 따로 없다. 4년마다 되풀이 되는 선거에 싫증이 나고 새로운 대통령이 나와도 실망이 더 크다. 유력한 대선주자인 박근혜씨가 된다고 해도 욕 엄청해댈것 같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 그럴것이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게 아니다. 권세를 가진 이들이 국민을 위해 정치를 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배를 불리기 위해 살고 있으니 나라가 개탄스럽고 그런 나라를 생각하니 글쓰는 작가도 비판적일수밖에 없다고 본다. 나라의 얼굴에 침을 뱉고 있으면서 자기 얼굴에 침을 뱉고 있다고 여기지 않는 사람들은 또 뭔지 개탄스러울수밖에 없다. 왜 그럴까. 왜 이나라가 이렇게 된 걸까. 저자의 통찰력을 따라가면 분석해본 결과 역사적으로 사람들의 심리를 이끌어 간 중심틀이 근본주의라고 하는 한 단어에 멈추는 걸 보았다. 사람들의 됨됨이를 엄격한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되니 허물이 없는 사람이 없다. 안걸리는게 없고 호주머니 털어 먼지나지 않는 사람들이 없다. 그런 지도층을 보면서 대중들은 완벽한 인물을 찾아헤메는 중이다. 그런 인물이 나타날수 없는데도 그런 인물이 나타나주기를 기대하면서 살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는 그런 사람이 있을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나름대로의 도덕적, 사회적 기준에 입각한 사람들을 만들기 위해서 외치고 있는 중이다. 혼자서 안되면 둘을 만들고 그것도 안되면 집단을 만들어서라도 자기의 의견을 관철시키려고 노력한다. 무슨 일을 벌일때에는 왜 무엇때문에 이런 집단적인 일을 하는지 분명히 알고 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집단의 의견을 대변하는 꼴이 되기 쉽다. 집단적으로 움직이는 대중의 힘에 의지하려고 하는 마음이 갖게 되는 것이다.

지금 시대는 아주 복잡하다. 힘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기때문에 힘도 제대로 써야한다. 모두를 위하는 데 힘을 써야하지만 모두의 입장을 모두 대변할수는 없다. 민주주의의 폐해는 다수의 논리를 따르고 소수의 의견은 다수의 힘과 논리에 묻힌다. 그 와중에 상처지고 힘없는 소수는 보수든 진보든 상처를 입기 쉬운 존재다. 색깔을 분명히 하는건 좋다. 보수든 진보든 그게 뭐 대수겠는가. 자기가 지향하는 바가 한쪽일수밖에 없는 근본주의적 존재라면 두가지 모두를 가질 수는 없다.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을 욕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다. 그렇다면 잘못을 저지르고 백배사죄하는 일본인들을 특히 할복자결을 택하는 그들의 무서운 자세는 어찌바야할 것인가. 우리는 어떤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지만 변명하거나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을 치고 어제까지 건강하던 사람들이 오늘은 휠체어에 앉아서 검찰청을 들락거리는 쇼를 어떻게 봐야한단 말인가.

작금의 혼란을 야기한 보수층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인지 모든 근본 문제를 진보쪽으로만 돌리면 되는지 묻고 싶다. 이책을 읽으면서 참 많은 다양한 생각을 하게 한다. 과거의 역사에서부터 6.25전쟁 전후의 이념 갈등까지 많은 걸 돌아보고 생각하게 만든다. 지금까지가 대한민국의 위기라면 앞으로 무얼 어떻게 해야하는지는 잘 알고 있을것이다. 병을 진단했으면 처방만 잘하면 된다. 병이 낳지 않는 것은 처방이 잘못되었거나 진단을 잘못한 것이다. 생각하건데 지금의 리더들이 일을 제대로 못하고 있으면 모두 자기자리에서 물러나야한다. 나라의 앞날을 그를칠거라고 생각되는 그들에게 나라를 옳게 이끌어갈수 있는 기회도 주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리는 못버리면서 자기 자리를 위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끌어안지 못하면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이해가 안된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강대국인 일본과 중국 위로는 러시아가 있고 바다건너 미국이 있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일본인도 무시하고 중국도 무시하고 자기만 잘낫다고 여기는 근본주의때문에 다문화가정으로 인한 사회문제는 또 어떻게 풀어갈지 답이보이질 않는다. 우리를 감싸고 있는 근본주의의 장벽을 허물어야한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으로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바뀌어야한다. 존경하는 국회의원이라고 말만하는 게 아니라 정말 위에서부터 서로를 존중하고 싸우지않는 모습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라면 머리를 맞대고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는 정치권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다수의 민중은 그모습을 보면 대한민국의 비젼을 새로이 갖게 될 것이며 우물안 개구리식으로 안아무인격으로 무식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을것이다. 진정한 보수의 모습을 저자가 보여주기를 바란다. 뭐가 진보고 보수인지 무엇을 지향해야하는지 국민들은 한순간도 눈에 불을 켜고 이사회를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진정한 보수가 나아갈길이 뭔지 보여주지 못하고 진정한 진보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대중은 혼란에 빠질수밖에 없다.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건 과거에나 통했다. 지금은 집사기위해 열심히 살아야 겨우 집을 살수 있다. 가난은 계속 대물림되어가고 기회가 줄어든다면 누가 희망을 가지고 대한민국을 자랑스러워하겠는가. 내가 박지성 선수를 좋아하는 것은 그가 가진 재능을 국가를 위해 쓸줄 알았고 언제나 성실한 플레이를 팬들에게 보여주려고 늘 노력한다는 점이다. 그를 보면서 다수의 축구선수들이 꿈을 꾸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언제나 좋은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하는 성실함 과거에 대한민국이 가지고 있었던 자랑거리였는데 지금도 묵묵히 자기자리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대중들이 있기 때문에 건강한 대한민국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제발이지 보수와 진보로 사람들을 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좋은 역사의 모습을 지금부터라도 잘 만들어간다면 점점더 살기 어려운 국제적 여건속에서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품고 나아가는 대한민국이 되리라고 본다. 지금도 열심히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20대들이 더이상 좌절하지 않는 건강한 대한민국을 우리 정치권에서 만들어가야하지 않을까. 그렇기때문에 눈에 불을 켜고 정치권을 쳐다보고 있는 것일것이고 잘못하고 있으면 욕을 해서라고 잘하라고 말하는것일 것이다. 모든걸 좋게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면 대중은 인정하고 지켜볼 것이다. 나는 보수도 진보도 아니다. 실용적 중도가 더 와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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