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6-16

[통인] 평화로, 평화로 가는 길 - 이행우 평화운동가 - 월간참여사회 - 참여연대

[통인] 평화로, 평화로 가는 길 - 이행우 평화운동가 - 월간참여사회 - 참여연대
  •  2014년 04월
  •  2014.04.07 
  •  1192

평화로, 평화로 가는 길

이행우 평화운동가


인터뷰 박정은
정리 송윤정
사진 박영록


참여사회 2014-04월호
"나는 “HERE AND NOW”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오늘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내 양심에 비춰서 양심에 따라서 하는 것이지요.
평화를 원하고 전쟁을 반대하면 그렇게 되도록 운동을 해야지요."

이행우 선생은 재미 평화운동가다. 퀘이커교도다. 북한이 미국, 한국과 전혀 교류가 없던 시절부터 북한 알기 운동을 지속해왔고, 그 과정에서 북한을 수십 차례 방문했다. 재미동포 운동 단체인 미주동포전국협의회NAKA를 조직하였고, 미 의회와 정책 담당자들을 상대로 평화를 위한 로비 활동을 해오고 있다. 선생의 이름이 생소한 독자가 많으리라. 막후에서 일하는 탓이다. 올해 나이 84세. 최근엔 북미 간 교류가 거의 단절된 현 상황에서도 3년째 남북미 반관반민 대화를 3년째 진행 중이다.

한국을 떠난 지 46년이 되셨어요. 미국에 가시게 된 계기가 있나요.
대학 들어가던 해에 한국 전쟁이 났는데, 퀘이커들이 병원을 복구하고 간호사들 교육하고 구호물자도 나눠주고 그랬어요. 그때만 하더라도 외국에서 들어온 선교사들이 굉장히 유세를 했어요. 구호물자 나눠 준다면서 좋은 집에 살고, 도둑이 많으니까 집에 철조망도 많이 치고. 근데 퀘이커들은 조금 달라. 보통 한국 사람 사는 구공탄 때는 작은 집을 빌려서 살면서 봉사활동을 하더라고요. 굉장히 감명을 받았어요. 1960년 12월 18일에 정식 퀘이커 한국 모임이 시작됐고, 이후로 나는 퀘이커 모임 계속 나갔어요. 그러던 중 68년에 미국 퀘이커 성인 교육 센터 펜들힐에서 초청이 와서 1년 동안 퀘이커 역사 공부를 했어요. 어떻게 초청이 왔는지 몰랐는데, 가서 보니 함석헌 선생이 나를 추천했다고 하더라고.

1년 계획으로 가셨다가 정착하신 거예요? 
퀘이커 공부 1년 하고 수학을 공부하려고 했어요. 내가 한국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거든요. 그런데 수학 공부를 다 못해서 한국에 못 돌아왔어요(웃음). 펜들힐 일 년 공부하고 나니 서른여덟 살인데, 돈이 하나도 없었어요. 집에는 내가 부양해야 할 식구들이 있었어요. 수학 공부 하긴 틀린 것 같고, ‘이제 컴퓨터 시대로 간다, 컴퓨터를 공부를 해서 우선 먹고 살 도리를 하자’ 싶더라고. 그래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4개월 단기 속성으로 배웠어요. 그리고 34년 동안 컴퓨터 일로 내 생계를 유지했어요. 일흔 세 살 까지 일하고, 이제 은퇴한지 십년이 넘었지.

한국엔 언제 처음 들어오셨어요? 
80년에 처음으로 한국에 왔어요. 열흘 와 있는 동안 5·18이 일어났어요. MBC 방송국에 있던 조카딸을 통해 광주의 참상에 대해 들었어요. 그리고 그때 함석헌 선생님 댁에 자주 있었는데, ‘내일 몇 시에 광주 도청에 쳐들어간다’ 그 말만 하고 끊어버리는 전화가 오더라구요. 그 전화에서 이야기 한 그 시간에 딱 사건이 일어났어요. 군부 안에 사람들이 몰래 나와서 공중전화에서 알려 준 거죠. 그리고 5월 20일쯤엔가 미국 돌아가는 길에 동경에 들러서 정경모, 오재식, 박형규, 지명관을 만났어요. 만나서 광주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했지요. 그 사람들은 일본에서 세계로 5.18을 알리는 일을 하고, 나는 미국에 가서 또 자세히 알리고 그랬어요.

좌우를 잇고 남북을 잇다 

미국에서 평화운동을 하시게 된 계기가 있나요. 
퀘이커들이 1970년대부터 북한을 열자는 운동을 했어요. 그러다가 북한이 유엔에 옵저버로 참가하게 되고, 유엔에 나와 있는 북한 사람들이 1980년 9월에 미국친우봉사회(AFSC,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대표 세 사람을 초청했어요. 미국 민간 단체에 처음으로 북한이 문을 연 거예요. 다녀온 세 사람과 저녁 먹고 얘기하다가 갑자기 퀘이커들이 좌우로 갈라진 동포 사회가 함께 운동할 수 있게 도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동포들과 미국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남북문제를 논의할 수 있도록 AFSC에서 코리아 컨퍼런스를 열었으면 좋겠다고 제안을 했어요. 그리고 1981년 5월에 필라델피아에서 첫 회의를 했어요.

당시 동포 사회가 갈라져 있었다고요?
선통일 후민주는 좌로, 선민주 후통일은 우로 갈라져 있었어요. 누가 회의하자 그러면 누가 오는지 물어보고, 반대편 사람이 오면 안 오고, 친구였었어도 상종을 안할 정도로 심했어요. 함석헌 선생께서 그런 걸 보시고선 1980년에 내가 한국 다녀갈 때 “이번에 가면 싸우지 말고 같이 좀 잘 해라”고 당부하신 것도 있었고, 퀘이커들이 한다고 하면 아무도 누가 하냐고 묻지 않고 함께할 것 같기도 해서 제안한 거였어요. 아니나다를까 초청인들은 다 왔어요. 성공리에 됐어요.

이후로 AFSC가 한국 문제에 개입하게 됐어요.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 컨퍼런스를 81년, 82년, 83년 세 번 하고, <코리아 리포트>도 나오고……. 당시 미국에 한국 문제 전문가들이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우리 역사, 군사, 정치, 분단 문제 등 분야별로 다룬 책 『투 코리아 원 퓨처』를 냈어요. 85년에 나오자마자 일본, 한국에도 번역해서 나왔어요.

그때부터 최근까지 계속 남한, 북한, 미국 사람들이 만나는 자리를 만들고 계신 거네요. 
나는 미련하거든. 한 번 시작하면 계속 끝까지 하는 사람이에요. 빠져 나오지도 못하고. 어디가도 앞에 나가서 연설하고 하는 건 좋아하지도 않고. 같이 만나서 얘기하는 자리 만들고 하는 건 좋아해요. 재미가 있으니까요.

선생님께서도 방북 하셨지요? 
그렇지. AFSC에서 처음 북한에 다녀오면서 우리도 북한 사람들을 초청했는데, 그 때 국무성에서 비자를 안 내줬어요. 그래서 AFSC 코리아 데스크 직원이 매주 목요일에 항의하러 국무성에 갔어요. 필라델피아에서 워싱턴까지 가려면 기차로 두어 시간, 국무성에 다녀오려면 하루가 다 갈 정도였지요. 이렇게 몇 달을 다녀도 북한 사람들이 못 와서 우리가 미안해하고 있었는데, 북한에서는 미국 정부가 그러더라도 우린 당신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으니까 다시 한 번 부르겠다, 그래서 제2차 북한 방문을 하게 됐어요. 그 방문단에 내가 들어가서 1982년에 처음 북한에 다녀온 거죠. 2주인가 열흘인가? 갔다 와서 언제 누굴 만나서 무슨 얘길 했는지 자세히 써서 AFSC에 보고 했어요. 그 때는 김정일이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라 불리던 시절인데, 내가 김정일이 어떻게 후계자가 되었냐고 물어보고 그랬어요.

방북 여러 번 하셨나요? 
서른 번 넘어서는 세질 않아서… 아마 사십 번 가까이 했을 거예요.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곳을 가봤어요. 나같이 각계, 위에서 아래까지 만난 사람은 드물어요. 김일성하고도 밥 먹고, 실무자도 접촉 하고.

이후로도 계속 북한과 교류를 하셨나봐요.  
AFSC에서 북한의 집단농장과 미국의 농장이 자매결연을 맺어 교류할 수 있도록 했어요. 우리가 초청해서 이북 대학 교수들, 농업 기술자들이 미국에 다녀가고, 미국의 농업 기술자가 북한의 농장을 시찰·컨설팅 하고 필요한 것을 지원했죠. 잘 되니까 자매결연 농장을 4개로 늘리게 되었고, 또 그 후엔 다른 단체들도 북한 농장과 자매결연을 맺기 시작했어요.

참여사회 2014-04월호

한반도 평화, 미국이 관건이다 

1990년대엔 미주동포전국협의회(NAKA, National Association of Korean Americans)를 만드셨지요? 
1993년에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잘 알고 지내던 한완상이 통일원 장관이 됐어요. 이 기회에 퀘이커가 남북문제 중재자 역할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퀘이커들이 월남전 종식할 때나 중국 개방할 때 중재한 경험이 있거든요. 그래서 남북에 접촉을 했어요. 그런데 한완상이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이 중요하다고 하더라고요. 재미동포는 미국 정부를 상대로 운동을 하는 게 맞다는 거지. 북한 쪽에서도 똑같은 얘길 해요. ‘문제는 미국이다, 미국을 움직여라’ 이렇게 된 거죠. 그래서 퀘이커 조동설, 이승만 목사, 나, 세 사람이 미국 정부 상대로 하는 운동을 하기로 합의를 했어요.

세 분이 NAKA를 창립하신 거예요?
우리 셋이 안 되니까 확대를 해서 10명을 모았어요. 미국은 땅덩이가 넓어서 비행기 타고 해야 하니까 10명 모으려면 3개월이 걸려요. 근데 10명도 모자라서 10명을 더 뽑아서 20명이 하자고 합의를 했어요. 20명이 모이면 또 새로 시작을 해요. 처음 하는 것 같이. 그러면 또 1년이 걸려요. 조직을 만들어 놓으면 사람이 안 와요. 조직을 만들 때 같이 해야지. 사람들을 모아서 ‘뭐 만들자’ 할 게 아니라, 그걸 만들자는 의견이 10명 모두에게서 스스로 다 나오도록 해야 해요. 그래야 이 사람들이 주인의식을 가지거든. 그렇게 해서 미국 전역에서 150명의 대표가 만든 단체가 NAKA, 미주동포전국협의회예요.

어려운 점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당시 국회의원 이만섭이 정부에 동포들 동향을 보고하면서 미국에 조총련 같은 단체가 생길 거 같다고 했는데, 동아일보 1면 탑에 그 기사가 나왔어요. 그게 우리 얘기였어요. 이승만, 조동설, 이행우, 이북 다녀온 빨갱이 셋이 주모자 아니냐, 이렇게 돼버린 거지. 언론에 그렇게 나오니까 모아 놓은 사람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갔어요. 내가 지금까지 통일 운동하면서 아는 사람들은 안 넣고 대학 교수, 엔지니어 이런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모았었는데, 다 떨어져 나갔지. 그러고 나면 다시 모집하기가 더 힘들었어요. 1993년 5월에 시작했는데, 1994년 10월 29일에서야 창립이 됐어요.

1994년 국내는 박홍 총장이 주사파 발언하고 ‘주사파’ ‘빨갱이’ 이런 단어들이 횡행했던 때였어요. 지금 종북 논란처럼요. 
이승만 목사가 NCC? 회장이었어요. 그러면 백악관 조찬기도회도 나가요. 클린턴 옆에 앉아서 얘기하고. NAKA 창립총회할 적에 클린턴 대통령을 초청했더니 축사를 보내왔어요. 우리보고 빨갱이라 하면 “그럼 미국 클린턴 대통령도 빨갱이라는 거냐” 했죠.

NAKA에서는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요. 
첫째, 한반도의 평화와 평화적인 통일을 우선적으로 한다. 두 번째, 재미동포들의 인권과 권익을 보호한다. 세 번째, 우리 민족의 문화를 미국에 알린다. 네 번째, 소수민족과 우릴 위해서 같이 노력한다. 이렇게 하니까 어느 목사가, “지금 통일 이런 얘기하면 사람들이 빨갱이로 몰아간다. 그러니 통일 얘기를 빼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첫째 항목을 네 번째에 넣는 걸로 조정했었어요.

뉴욕에서 만들어서 워싱턴에 갔어요. 국무성에 얘길했더니, “한국계 미국인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는데, 당신들이 처음으로 찾아왔다. 환영한다” 그러더라고. 다음에 의회 외교위원회 사람들을 만났는데, 거기서도 “지금까지 어떤 한국계 미국인도 와서 얘기하질 않았다”그러더라고요. 그렇게 시작했어요. 1년에 두 번 NAKA 이사회를 할 때 국무성, 의회를 방문해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얘기해주고 그 사람들 얘기를 듣죠.

대화로 함께하는 남북미

2004년부터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는 국제회의를 조직하기 시작하셨지요. 
2000년대 들어와서 국회의원들을 모으면 괜찮겠다 싶었어요. 법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얘기를 하고, 그들이 행정부에 얘기할 수 있도록 하려는 거죠. 당시 미국 민주당 외교위원회 간사 바이든에게 호스트가 되어 국회의원들을 모아달라고 얘길 했어요. 북한에서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오게 하려고 했는데, 북한에서는 오려고 하는데 미국 정부에서 허가를 안해줬어요. 그래서 북한 UN대사를 찾아가서 얘길 하고 박길연, 한성렬 UN대사가 참석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남한에서는 장영달, 김재윤, 강혜숙, 선병렬, 이창복 의원이 왔어요. 미국 상하원 의원이랑 민간 유명인들도 좀 오고, 그래서 2004년 7월 20일에 한반도평화안보포럼을 열었어요.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요. 계속 하려고 했는데 미국에서 북한 사람들 비자를 안 내줘서 못했어요.

4년 뒤에 한반도평화포럼을 열었던데요. 
2009년에 백낙청 교수랑 몇 사람이 모여서 얘길 하다가, 워싱턴에서 회의 한 번 하자고 제안했어요. 미국 체류 등 모든 건 내가 책임지기로 했지. 그래서 온 사람이 백낙청, 오재식, 박원순, 이명숙(목사)예요. 존 케리 의원이 호스트가 돼서 9월 14일에 한반도평화포럼을 했어요.

2012년부터는 남북미의 정부와 민간 대표들이 함께하는 당국대화에 준하는 회의를 3년째 진행하고 계십니다. 요즘처럼 남북관계가 경색된 시기에 남북미가 함께 만나다니 놀라운 일인 것 같아요. 
남북미 의원들만 중심으로 해선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6자회담 구성에 독일도 함께 하고, 그러면 좋은 회의가 될 것 같더라고요. 그 제안을 독일 에버트재단에서 받아들였어요. 그래서 나하고 에버트재단 폴만 소장하고 프로그램을 짜기 시작했는데, 북한에서 학술회의 형식으로 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한신대, 시라큐스 대학, 태평양세기연구소, 세 곳을 더 섭외해서 공동주최했어요. 그 첫 회의가 뉴욕에서 2012년 3월 7일부터 9일까지 한 동북아평화협력회의예요.

당시 회의에 함께한 사람들이 쟁쟁했어요. 그들을 한 자리에 모으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 같은데요.
일단 북한에서 안 오면 소용이 없어요. 그래서 북한 UN대사에게 얘기했죠. 평양에 연락해서 대표를 보내달라고. 존 케리는 의회에서 외교위원장을 하고 있었어요. 쭉 같이 해왔으니 이번에도 참석하기로 했죠. 그리고 또 헨리 키신저가 생각났어요. 북미 교섭할 때 헨리 키신저가 가끔 오는데, 북한 사람들이 키신저 얘기는 굉장히 경청한대요. 키신저가 중국 문제 전문가이기도 하고, 국무장관도 했고, 그가 온다면 다른 학자나 관료들과 교섭하기가 더 좋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헨리 키신저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을 찾아보니, 2004년 한반도평화안보포럼을 같이 했던 도날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가 있었어요. 그레그를 통해서 헨리 키신저에게 얘기를 했더니 성사가 됐어요. 그래서 헨리 키신저, 존 케리 위원장이 오기로 했고, 남한에선 백낙청, 손학규, 임동원이 온다고 얘기하면서 북한은 거기에 상응하는 사람을 내보내라고 했지. 리용호 외무성 부상이 왔어요. 다 해서 남한, 북한, 미국, 중국, EU, 독일, 일본, 몽골, 러시아, UN에서 참석했어요. 회의는 채텀하우스 룰?로 했어요. 그래서 내용을 발표도 못하긴 했지만. 내가 지금까지 조직한 것 중 가장 큰 회의였죠.

요즘 사람들은 남북은 왜 만나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만나야 문제가 풀리죠. UN에 있는 나라들이 이해관계가 있으니까 싸워요. 문제가 있을 때 퀘이커 유엔 오피스는 그 나라 사람들을 초청을 해요. 저녁이나 먹읍시다, 하고. 정치적인 얘기 안 해요. 그냥 우선 친해지고 서로 이해하자는 거죠. 그러고 나면 그 전 같으면 싸울 것도 안 싸우고 풀리지 않을 것도 풀려요. 거기서 나도 좀 배웠죠.


활동가로서, 조직가로서 

40년 가량 계속 이 판에서 중재를 하고 의견을 모으고 계세요. 
그러니까. 누구 말마따나 미친놈이지.

비결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여러 사람들을 모아서 일을 하잖아요. 그 모든 사람들이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게 해야 해요. 여러 단체가 모일 때 조정은 내가 다 해도, 사실 그 단체들이 알아서 조정한 것처럼 보이도록 해야 해요. 역할을 나눌 때면 사람들이 체면 가리지 않고 서로 드러나는 역할을 하려고 해요. 그러면 회의 끝나고 나서 하나씩 따로 만나거나 전화로 얘기해요. 나는 전혀 개입한 것 같지 않고, 자기들이 자진해서 양보하고 조정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거죠.

사람 뿐 아니라 재정도 필요할 텐데요. 
나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프로그램이 좋으면 돈이 나와요. 2004년 한반도평화포럼 할 때, 사람은 다 조직이 됐고, 북한 사람들이 오게 하려면 돈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코리아 소사이어티를 들어오게 했어요. 코리아 소사이어티 회장 도날드 그레그와 약속을 잡고 갔더니 만나자마자 "요새 퀘이커들이 일 잘해" 하더라고요. 뜬금없이 그게 무슨 얘기야. "내가 너 퀘이커라는 거 알아. 니가 뭐 했는지 알고." 이런 소리거든요. 그 사람이 CIA 이런 것만 평생 한 사람이예요. 그래서 나도 조사한 걸 얘기했지. "당신말이야. 좋은 대학 나오고 CIA 등에서 일 잘했더라. 우리랑 만나줘서 참 고맙다”고 얘기했지. 그랬더니 두 번째로 "이게 니 아이디어냐, 바이든 아이디어냐?" 묻더라고. "우리 아이디어인데, 바이든이 받아들였다"고 했지. 그 다음에 "너 돈 있냐" 물어봐서 돈 없다고 했더니 "같이 하자" 그러더라고. 얘기가 1분 30초 만에 다 끝났어요. 그리고 회의가 성공리에 잘 됐어요. 워싱턴 포스트에 보도가 됐는데, 도날드 그레그가 사회를 봤으니 기사에 이름이 나고 그랬죠. 끝난 뒤에 통화를 하는데 도날드 그레그가 “처음엔 잘 될지 의문이었는데, 이행우와 (코리아 소사이어티) 부회장이 밀어붙여서 했다. 그런데 결국 공적은 나한테 돌아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이건 시작이다. 앞으로 계속 같이 하자” 그랬더니 오케이 했어요. 이후로 같이 잘 하고 있지요.

사람 모으는 것, 예산 만드는 것, 다 고민해서 이뤄내신 건데, 누군가 알아봐주지 않는 건 서운하지 않으세요? 
누가, 내가? 사업이 잘 끝났으면 됐지. 나는 사람들 모아서 조직해 주는 거, 그거 밖에 못해. 다른 건 못하니까. 무대 체질도 아니고, 아래에서 봐야 다 보여.

위에서 봐도 다 보이는데요?(웃음) 
대부분 사람들이 그걸 좋아해요. 운동 하는 사람 중 내가 만난 상당수가 직책에 대해서 굉장히 예민해요. 그리고 감투를 쓰면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자기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더라고요. No! 같이 일하도록 해야지!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좋은 아이디어를 낼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렇질 않아요. 그런 상하관계를 만드는 식으로 하면 조직이 오래 못 가요. 그리고 직책을 만들었으면 책임감을 갖고 최선을 다해서 실행을 하도록 해야 하는데, 어떤 사람은 명함부터 찍어 가지고 다니더구만요. 아니, 그걸 감투라고 생각하면서 무슨 운동을 해요? 다들 같이 좀 힘 합쳐서 직책만 생각하지 말고 해야 하는데, 그게 좀 어려운 것 같아.

젊은 활동가들에게 

박근혜 정부의 통일대박론 어떻게 보세요?
통일이 되면 그야말로 대박이지.

박근혜 정부가 그냥 해보는 소리는 아닌 것 같고, 준비는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잘 되면 좋은데, 그렇게 해서 될까? 보수들이 하면 추진력 있을 수 있죠. 중국 개방도 공화당 시절에 했고. 우리가 얘기를 하면 안 들어도 박근혜 대통령이 추진하면 보수 단체들이 반대하지 않을 거거든요. 그들이 뭔가를 하면 우리가 필요한 부분을 밀어줘야 하는 건데… 그런데 지금까지 하는 거 보면, 별로 신용이 안 가요.

젊은 평화활동가들이 많지 않아요. 일하기 쉽지 않은 영역인데다, 통일은 멀고, 북한도 맘에 안 들고, 한국 정부도 맘에 안 들고, 빨갱이니 뭐니 하는 논란에 휩싸이기 쉽고. 게다가 평화는 너무 크고 먼 문제처럼 여겨지다보니 동기 부여가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끈기있게 잘 해야지요. 혼자 하려고 하지 말고, 동지를 구해서 자꾸 넓혀가야지요. 전쟁이라는 것 여러분은 안 해봐서 모르겠지만, 전쟁 없애야 하거든요. 그럼 어떻게 전쟁을 없애느냐. 전쟁을 하지 않도록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도록 최선을 다 해야지요. 나는 무엇보다도 통일이 돼야 한다고 봐요. 통일이 돼야만 평화가 유지되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싫어하거나 나와 맞지 않는 사람까지도 같이 살아야지요.

근데 젊은 친구들은 전쟁을 잘 모르잖아요? 관심도 별로 없고…….
내가 놀랜 게 뭐냐면, 내가 어떤 모임에서 북한에 식량 주자니깐 안 된다 이거야. 아프리카에 굶는 사람이 많은데 아프리카를 줘야지 왜 북한에 주냐는 거야. 북한 사람들 식량 주면 군인들 먹는다고 하는데, 군인들도 먹여야지. 그러니까 잘 먹여서 빨리 친해져서 총을 안 겨누게 해야지. 왜 그 생각은 안 해.

수십년 평화 운동을 계속 해오신 힘이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나는 “HERE AND NOW”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오늘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내 양심에 비춰서 양심에 따라서 하는 것이지요. 평화를 원하고 전쟁을 반대하면 그렇게 되도록 운동을 해야지요. 일이 잘 되고 안 되고는 문제가 아니예요. 잘 되도록 내가 최선을 다할 따름이지.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니까. 지금까지 내 평생 내가 가난하다고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고, 내가 부자라고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어요. 하지만 항상 좋은 사람들과 함께 뜻있는 일을 했어요. 내가 이렇게 돌아보니까, 내가 만난 사람은 다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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