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중립화 통일의 길]<36>
1. 고종 정부의 중립화 추진
조선의 영세중립 필요성은 1880년대 초반부터 제기됐으나, 조선정부가 영세중립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검토한 것이 아니고, 외국이나 학자의 수준에서 주장되었다. 더 나아가 조선의 정세도 영세중립 정책이 필요한 국제적 환경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 정부는 영세중립에 대해 무관심한 상태였다.
그러나 고종은 1891년 6월 조선의 지정학적 요인이 스위스와 유사한 점을 감안하여 국제적 보장 아래 조선의 영세중립 문제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 러시아, 미국, 영국 등은 조선의 영세중립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중국이 조선의 영세중립을 강력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고종의 영세중립 노력은 실패하게 되었다. 고종의 영세중립 정책 실천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 아시아의 국제정세는 일본과 중국 간 또는 러시아와 영국간의 세력 불균형으로 조선의 영세중립은 실현되기 어려운 문제였다.(강종일, 2006, 214~215)
대한제국 시기 고종은 외교의 최우선 과제로 열강의 보장을 얻어 대한제국을 중립화(영세중립국 지위 획득)하는데 두었다. 이 같은 고종의 외교 노선은 기본적으로 대한제국을 약소국으로 인식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고종은 1900년 의화단 사건이 확산되자 열강의 한국 파병을 우려하여 러시아ㆍ일본ㆍ미국을 상대로 중립화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그러나 고종의 외교는 조선에 야심을 갖고 있던 일본의 강력한 반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고종은 의화단 진압 과정에서 드러난 일본의 군사력을 보면서 러일 전쟁이 발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일본이 영일동맹을 체결하고 러시아에 대항하였으므로 러일 전쟁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럴수록 고종은 러ㆍ일에 의한 영토 유린을 막기 위하여 더욱 중립화를 열망하였다. 이에 고종은 열강에 특명 전권공사를 파견하여 중립화를 타진하였다.(현광호, 2006, 46~47)
조선 정부의 제1차 중립화 시도는 일본에 파견된 조병식 특사가 1900년 8월 일본정계의 중진 고에이(近衛)에게 조선의 중립화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일본이 조선을 대신하여 열강 국가들에게 조선의 중립을 제의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고에이는 조선의 중립국 준비 부족을 지적하면서 "국방은 일본에 위임하고, 조선은 내치에 전념하라"는 요구와 함께 거절하였다.
조선 정부의 제2차 중립화 시도는 고종의 밀사로 일본을 방문한 현영운으로 하여금 1903년 9월 고에이를 통해 조병식이 제출한 것과 동일한 내용의 조선 중립안을 일본 정부에 다시 제출하였으나 거절되었다.(강종일, 2000, 50)
대한제국은 일본과 러시아의 반대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자 1903년 11월 23일 세계 각국에 장래 러일 전쟁 개전시에는 국외중립을 지킨다고 선언했다. 그 후 러일 개전 2주일 전인 1904년 1월 22일에 대한제국은 또다시 전시 국외중립을 세계 각국을 향해 성명하고 그 전일(1904년 1월 21일) 중국의 지부(芝罘)에서 프랑스어로 국외중립 선언을 타전하는데 성공했다.(김경태, 119)
조선정부의 중립화 추진세력은 중립선언이 성공적으로 발표되자 고무되었다. 그러나 러ㆍ일ㆍ미[미국] 등 중립화 실현에 핵심적인 국가들은 중립선언에 무관심하거나 거부하는 입장을 보였다. 특히 종전에 한국의 중립화를 검토한 바 있던 러시아도 반대의 입장을 보였다. 사실상 한국의 중립선언을 지지한 열강은 없었으며, 영국과 미국은 일본의 러시아에 대한 개전을 지지하였다.(현광호, 2004, 213)
1904년 1월 20일 일방적으로 조선의 영세중립을 선포하고, 미국, 일본, 러시아, 중국정부에 이를 통보하면서 연합국은 조선에서 전쟁을 하지 말 것을 요구했으나, 러일 전쟁은 조선에서 발생했다.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전쟁이 1904년 2월 10일 발발함으로써 조선은 미국, 일본, 러시아, 중국 등 어느 나라로부터도 영세중립 정책을 지원받지 못했다.(강종일, 2006, 217)
대한제국은 전시국외 중립 선언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궁여지책으로 개전 직전인 1904년 2월 8일에는 서울만이라도 국외중립지역으로 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러일전쟁의 발발과 동시에 일본군은 인천에 대거 상륙하여 조선의 전시 국외중립 선언을 침범하고 서울을 점령하여 군사적 협박 아래 한일 의정서를 강제로 조인케하였다.(김경태, 119)
2. 고종 정부의 중립화는 왜 실패했을까
먼저 대외적 요인으로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적 환경을 들 수 있다. 중립화에 유리한 환경은 세력균형 체제의 확립이고, 세력균형은 5개국 이상의 국가가 해당국가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개입하여야 충족될 수 있다. 그런데 대한제국기 동북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국가는 러시아ㆍ프랑스ㆍ독일ㆍ미국ㆍ영국ㆍ일본이었다. 그리고 이 중에서 한반도에 깊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적극 개입한 국가는 러시아와 일본이었다. 따라서 한반도에서의 세력균형은 러ㆍ일 사이에서 이루어진 불안정한 것이었다. 러시아가 한국의 중립화에 관심을 표명한 사실을 고려할 때 한국의 중립화는 일본의 지지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 보호국화를 국가정책으로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의 현상유지를 의미하는 중립화를 강력히 반대했다. 미국 역시 일본의 중립화 반대론을 수용하면서 한국의 중립화를 반대했다.(현광호, 2004, 214)
중립화가 실패한 대내적 요인으로 군사력의 한계ㆍ중립화 추진세력의 분열ㆍ국제기구에 대한 지나친 신뢰를 들 수 있다.
1) 군사력의 한계
중립화는 스위스ㆍ벨기에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일정한 자위력 보유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대한제국이 중립화의 이상적 모델로 인식한 벨기에도 징병제를 통해 외침을 저지하였고, 나아가 중립화의 기초를 확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군사제도는 용병제로서 국방력에 심각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으며 이는 중립화가 일방적인 중립선언으로도 가능하다고 볼 때 중립화 추진에 가장 중요한 걸림돌로 작용하였다고 생각한다.(현광호, 2000, 59)
조선이 군비확장을 할 수 있는 재정적 여력을 갖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더 나아가 조선의 군사력은 외국의 군사력을 견제할 수 있는 힘도 비축하지 못했다.
2) 중립화 추진세력의 분열
대한제국의 중립정책을 주도한 세력은 고종의 의중을 대변한 친미계열과 이용익 계열이었다. 그러나 집권층 일각에서는 정세 인식에 따라 각기 러시아나 혹은 일본과의 제휴를 제창했다. 이와 같은 집권층의 분열은 결과적으로 중립정책의 일관성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게다가 중립화 추진세력의 분열은 중립정책의 추진력을 더 한층 약화시켰다. 중립화 추진세력은 중립화 실현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체제 지향, 제휴 대상 국가의 차이, 차관도입 주도권 문제 등으로 인해 대립하였고, 그 결과 외교 역량의 분산을 초래하였다.(현광호, 2004, 215)
3) 국제기구에 대한 지나친 신뢰
이 시기 국제법ㆍ국제회의ㆍ국제기구 등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침략성을 은폐하기 위해 만든 것이거나 제국주의 국가의 활동을 제약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따라서 한국이 이들에 큰 기대를 가졌다는 사실은 자위력을 확보하는 등의 내실 있는 중립정책을 추진하는데 있어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였다.(현광호, 2004, 215)
이와 같이 조선은 지정학적으로 강대국가에 포위되어 있으며 국력이 약하고 군사력도 취약하였을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 갈등과 분열로 중립화 보증 국가들(미국 등)의 관심권에서 배제되었다. 조선은 국제정치 환경과 지정학적 조건으로 인하여 주변 강대국들의 패권경쟁에서 자신을 방어하는 한편으로 중립화를 추구할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인용 자료> * 강종일「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남북 영세중립화 방안 연구」『시민 정치학 회보』제3권(2000)
* 강종일『고종의 대미외교』(서울, 일월서각, 2006)
* 김경태『근대 한국의 민족운동과 그 사상』(서울,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4)
* 현광호「대한제국의 중립정책과 중립파의 활동」『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제14집(2000.9)
* 현광호「대한제국은 어떻게 중립화를 실현하려 했나?」『내일을 여는 역사』제17호(2004년 가을)
* 현광호「열강에 의존한 중립화의 한계, 러일 전쟁과 고종」『내일을 여는 역사』제26호(2006년 겨울)
조선의 영세중립 필요성은 1880년대 초반부터 제기됐으나, 조선정부가 영세중립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검토한 것이 아니고, 외국이나 학자의 수준에서 주장되었다. 더 나아가 조선의 정세도 영세중립 정책이 필요한 국제적 환경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 정부는 영세중립에 대해 무관심한 상태였다.
그러나 고종은 1891년 6월 조선의 지정학적 요인이 스위스와 유사한 점을 감안하여 국제적 보장 아래 조선의 영세중립 문제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 러시아, 미국, 영국 등은 조선의 영세중립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중국이 조선의 영세중립을 강력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고종의 영세중립 노력은 실패하게 되었다. 고종의 영세중립 정책 실천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 아시아의 국제정세는 일본과 중국 간 또는 러시아와 영국간의 세력 불균형으로 조선의 영세중립은 실현되기 어려운 문제였다.(강종일, 2006, 214~215)
대한제국 시기 고종은 외교의 최우선 과제로 열강의 보장을 얻어 대한제국을 중립화(영세중립국 지위 획득)하는데 두었다. 이 같은 고종의 외교 노선은 기본적으로 대한제국을 약소국으로 인식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고종은 1900년 의화단 사건이 확산되자 열강의 한국 파병을 우려하여 러시아ㆍ일본ㆍ미국을 상대로 중립화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그러나 고종의 외교는 조선에 야심을 갖고 있던 일본의 강력한 반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고종은 의화단 진압 과정에서 드러난 일본의 군사력을 보면서 러일 전쟁이 발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일본이 영일동맹을 체결하고 러시아에 대항하였으므로 러일 전쟁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럴수록 고종은 러ㆍ일에 의한 영토 유린을 막기 위하여 더욱 중립화를 열망하였다. 이에 고종은 열강에 특명 전권공사를 파견하여 중립화를 타진하였다.(현광호, 2006, 46~47)
조선 정부의 제1차 중립화 시도는 일본에 파견된 조병식 특사가 1900년 8월 일본정계의 중진 고에이(近衛)에게 조선의 중립화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일본이 조선을 대신하여 열강 국가들에게 조선의 중립을 제의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고에이는 조선의 중립국 준비 부족을 지적하면서 "국방은 일본에 위임하고, 조선은 내치에 전념하라"는 요구와 함께 거절하였다.
조선 정부의 제2차 중립화 시도는 고종의 밀사로 일본을 방문한 현영운으로 하여금 1903년 9월 고에이를 통해 조병식이 제출한 것과 동일한 내용의 조선 중립안을 일본 정부에 다시 제출하였으나 거절되었다.(강종일, 2000, 50)
대한제국은 일본과 러시아의 반대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자 1903년 11월 23일 세계 각국에 장래 러일 전쟁 개전시에는 국외중립을 지킨다고 선언했다. 그 후 러일 개전 2주일 전인 1904년 1월 22일에 대한제국은 또다시 전시 국외중립을 세계 각국을 향해 성명하고 그 전일(1904년 1월 21일) 중국의 지부(芝罘)에서 프랑스어로 국외중립 선언을 타전하는데 성공했다.(김경태, 119)
조선정부의 중립화 추진세력은 중립선언이 성공적으로 발표되자 고무되었다. 그러나 러ㆍ일ㆍ미[미국] 등 중립화 실현에 핵심적인 국가들은 중립선언에 무관심하거나 거부하는 입장을 보였다. 특히 종전에 한국의 중립화를 검토한 바 있던 러시아도 반대의 입장을 보였다. 사실상 한국의 중립선언을 지지한 열강은 없었으며, 영국과 미국은 일본의 러시아에 대한 개전을 지지하였다.(현광호, 2004, 213)
1904년 1월 20일 일방적으로 조선의 영세중립을 선포하고, 미국, 일본, 러시아, 중국정부에 이를 통보하면서 연합국은 조선에서 전쟁을 하지 말 것을 요구했으나, 러일 전쟁은 조선에서 발생했다.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전쟁이 1904년 2월 10일 발발함으로써 조선은 미국, 일본, 러시아, 중국 등 어느 나라로부터도 영세중립 정책을 지원받지 못했다.(강종일, 2006, 217)
대한제국은 전시국외 중립 선언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궁여지책으로 개전 직전인 1904년 2월 8일에는 서울만이라도 국외중립지역으로 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러일전쟁의 발발과 동시에 일본군은 인천에 대거 상륙하여 조선의 전시 국외중립 선언을 침범하고 서울을 점령하여 군사적 협박 아래 한일 의정서를 강제로 조인케하였다.(김경태, 119)
2. 고종 정부의 중립화는 왜 실패했을까
먼저 대외적 요인으로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적 환경을 들 수 있다. 중립화에 유리한 환경은 세력균형 체제의 확립이고, 세력균형은 5개국 이상의 국가가 해당국가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개입하여야 충족될 수 있다. 그런데 대한제국기 동북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국가는 러시아ㆍ프랑스ㆍ독일ㆍ미국ㆍ영국ㆍ일본이었다. 그리고 이 중에서 한반도에 깊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적극 개입한 국가는 러시아와 일본이었다. 따라서 한반도에서의 세력균형은 러ㆍ일 사이에서 이루어진 불안정한 것이었다. 러시아가 한국의 중립화에 관심을 표명한 사실을 고려할 때 한국의 중립화는 일본의 지지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 보호국화를 국가정책으로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의 현상유지를 의미하는 중립화를 강력히 반대했다. 미국 역시 일본의 중립화 반대론을 수용하면서 한국의 중립화를 반대했다.(현광호, 2004, 214)
중립화가 실패한 대내적 요인으로 군사력의 한계ㆍ중립화 추진세력의 분열ㆍ국제기구에 대한 지나친 신뢰를 들 수 있다.
1) 군사력의 한계
중립화는 스위스ㆍ벨기에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일정한 자위력 보유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대한제국이 중립화의 이상적 모델로 인식한 벨기에도 징병제를 통해 외침을 저지하였고, 나아가 중립화의 기초를 확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군사제도는 용병제로서 국방력에 심각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으며 이는 중립화가 일방적인 중립선언으로도 가능하다고 볼 때 중립화 추진에 가장 중요한 걸림돌로 작용하였다고 생각한다.(현광호, 2000, 59)
조선이 군비확장을 할 수 있는 재정적 여력을 갖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더 나아가 조선의 군사력은 외국의 군사력을 견제할 수 있는 힘도 비축하지 못했다.
2) 중립화 추진세력의 분열
대한제국의 중립정책을 주도한 세력은 고종의 의중을 대변한 친미계열과 이용익 계열이었다. 그러나 집권층 일각에서는 정세 인식에 따라 각기 러시아나 혹은 일본과의 제휴를 제창했다. 이와 같은 집권층의 분열은 결과적으로 중립정책의 일관성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게다가 중립화 추진세력의 분열은 중립정책의 추진력을 더 한층 약화시켰다. 중립화 추진세력은 중립화 실현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체제 지향, 제휴 대상 국가의 차이, 차관도입 주도권 문제 등으로 인해 대립하였고, 그 결과 외교 역량의 분산을 초래하였다.(현광호, 2004, 215)
3) 국제기구에 대한 지나친 신뢰
이 시기 국제법ㆍ국제회의ㆍ국제기구 등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침략성을 은폐하기 위해 만든 것이거나 제국주의 국가의 활동을 제약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따라서 한국이 이들에 큰 기대를 가졌다는 사실은 자위력을 확보하는 등의 내실 있는 중립정책을 추진하는데 있어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였다.(현광호, 2004, 215)
이와 같이 조선은 지정학적으로 강대국가에 포위되어 있으며 국력이 약하고 군사력도 취약하였을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 갈등과 분열로 중립화 보증 국가들(미국 등)의 관심권에서 배제되었다. 조선은 국제정치 환경과 지정학적 조건으로 인하여 주변 강대국들의 패권경쟁에서 자신을 방어하는 한편으로 중립화를 추구할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인용 자료> * 강종일「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남북 영세중립화 방안 연구」『시민 정치학 회보』제3권(2000)
* 강종일『고종의 대미외교』(서울, 일월서각, 2006)
* 김경태『근대 한국의 민족운동과 그 사상』(서울,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4)
* 현광호「대한제국의 중립정책과 중립파의 활동」『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제14집(2000.9)
* 현광호「대한제국은 어떻게 중립화를 실현하려 했나?」『내일을 여는 역사』제17호(2004년 가을)
* 현광호「열강에 의존한 중립화의 한계, 러일 전쟁과 고종」『내일을 여는 역사』제26호(2006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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