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6-29

09 10년 간 불러온 '해외동포들을 위한 아리랑' - 사할린 강제징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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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간 불러온 '해외동포들을 위한 아리랑'
[인터뷰] 재외동포 운동단체 '지구촌동포연대(KIN)' 배덕호 대표
일시 09.02.27 17:35l최종 업데이트 09.02.28 10:05
성하훈(doomeh)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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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조정래 선생의 <아리랑>을 읽으면서 나라 잃은 백성의 비애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절감했었다. 나라를 빼앗긴 현실은 압박과 수탈의 연속이었고, 자기가 태어나고 자라온 땅에도 살지 못하게 만들 정도였다.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은 돈에 팔려나가야 하는 신세였다. 가족과의 생이별을 뒤로 한 채 돈 몇 푼에 하와이와 멕시코 등지로 끌려갔다. 살기 위해 간도 연해주 중국 땅을 옮겨 다녀야 했고 거기서 다시 중앙아시아 땅으로 강제이주를 당해 흩어져야 했다.

어디 이뿐이랴! 일제의 강제 징용과 위안부 등등, 그들의 삶은 노예와 다를 바 없었다. 지금은 1천만 해외동포를 운운하지만 한국 해외 이주민사의 시작은 이렇듯 가슴 아픈 '한'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짧게는 60여년 길게는 100여년의 시간이 흘렀고, 이후 세월에 덮이며 고난의 기억은 옛날이야기가 되고 있다. 하지만 그 시대를 지나온 사람들에게 당시의 아픔은 아직 가시지 않은 모습이다. 지금도 고국을 그리워하지만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지구촌동포연대(Korea International Network. 약칭 'KIN')' 배덕호 대표와 인터뷰를 하면서 내내 <아리랑>에서 그려낸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배덕호 대표는 사할린 동포 이야기를 길게 설명했다. 그 내용은 소설 <아리랑>과 별 차이가 없었다. 현실은 소설과 같았고, 소설 내용은 그 시대의 일반적인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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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어머니와 동생들을 놔두고 먼 미국 땅 사탕수수 밭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끝내 가족들을 다시 보지 못한다. 연해주에서 강제로 기차에 태워져 한 달 가까이 죽음의 여행을 한 끝에 생면부지의 땅에 내려진 그들도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현실 속, 징용이란 이름하에 사할린 땅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해방을 맞았지만 고국으로 돌아올 기회조차 박탈당해야 했다.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었지만 아무도 그들을 책임지지 않았다. 해방된 조국마저도.

조국은 그리움의 대상이자 한편으로 애증의 존재였다. 하지만 그들을 외면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현실에 그들 운명의 기구함을 탓해야 할 뿐이었다. 그래서 외세에 나라를 뺏긴 힘없는 백성의 비애는 나라를 되찾은 지 수 십 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강제로 떠나야 했던 조국, 고난의 기억 한국 이민사 첫 장

'지구촌 동포연대'가 27일로 창립 10년을 맞았다. 10년 전인 1999년 출범한 '지구촌 동포연대'는 바로 이렇게 해외로 끌려간 사람들을 보듬기 위해 활동하는 단체다. 조국을 등진 이후 돌아오지 못하고 멀리 이국땅에서 '아리랑'을 부르고 있는 해외 동포들. 그들에게 고국의 정을 나눠주기 위해 애쓴 것이 지금껏 이들이 해온 역할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해 나가야 할 사명이기도 하다.

"학교 다닐 때 해외 입양아 출신과 함께 하숙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낳아준 부모를 찾으러 들어온 친구였는데, 비자 문제 때문에 3개월마다 한 번씩 나갔다 와야 하는 거예요. 괜히 화나더라고요. 해외로 팔려나간 것도 서러울 텐데 3개월에 한 번씩 나갔다 와야 한다니 국가가 돈벌이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26일 오전 서울 마포의 지구촌동포연대 사무실. 10주년 행사 준비로 피곤한 표정인 배덕호 대표는 해외동포 권익운동에 뛰어든 계기를 이렇게 설명해 줬다. 95년이던 그때부터 캠페인을 벌이며 재외동포 문제에 눈을 뜨게 됐으니 햇수로 따지면 근 15년째. 공식적 활동보다는 한참 앞선 셈이다.

99년 재외동포법 제정은 이런 노력의 결과였다. 그 즈음 '지구촌동포청년연대'라는 이름을 걸고 활동을 시작됐고, 그 이후로 해외 동포의 문제는 그의 문제가 됐다. 외교부도 아닌 민간단체가 아픈 역사를 이고 살아가는 해외 동포들을 챙기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 에다가와 조선학교와 우토로 문제 등은 'KIN'이 나섰던 대표적인 사안들이다.

때는 2003년, 도쿄도(이시하라 신타로 지사)는 도쿄 제2초급학교(에다가와 조선학교)를 상대로 토지양도청구소송을 제기한다. 학교 운동장의 일부가 공유지였으며, 길을 내기 위해서는 운동장을 없애야 한다는 것. 도쿄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중심지에서 내몰렸던 조선인들이 도쿄도와 계약을 통해 마을을 만들고 학교도 지었던 것인데, 그 학교를 사용하지 말라니 동포사회가 발끈했다. 재판을 통해 1억7000만엔의 화해권고 결정이 내려졌고, 이 소식이 알려지며 한국에서도 모금 활동이 벌어지게 된다. 그 중심에 KIN이 있었다.

우토로 문제도 마찬가지. 비행장 건설을 위해 강제 징용당한 사람들이 해방 뒤에도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눌러앉게 된 땅. 수십 년 촌락을 이루고 살아온 마을을 비워달라는 땅주인의 통고에 10년간 재판으로 맞섰지만 패배한다. 강제 철거의 위기 방법은 그 땅을 사는 것뿐. 힘에 부쳐 절망하던 그들의 소식이 고국에 알려졌고, 이번에도 KIN이 나섰다. 여론의 힘을 받아 국민모금이 이뤄졌고 정부도 30억 지원을 약속하게 된다. 동포애가 뭔지를 확실히 보여준 것이다.

재외동포 문제 중요한데 낙하산 내려 보내는 정부 한심

"10년을 맞아서 27일 기념행사를 할 예정인데 앞에 내걸 말이 '10년 간 아무 일도 한 것이 없습니다'예요. 아직 마무리된 일이 없거든요. 사실 제가 한 것은 없고 헌신적으로 도와준 다른 분들이 일을 다 해준 것이지요."

이런 활약에도 배덕호 대표는 "10년 동안 한 일이 없다"고 겸손해 했다.
그는 10년을 돌이켜 보니 남는 것은 빚이었다"면서 웃어 보였다. 역사적 사명감이 없으면 힘든 일을 정부산하단체가 아닌 민간단체가 감당하려니 당연한 결과인지도 몰랐다.

- 재외동포재단 등에서 지원해 주는 것은 없나요?
"신청은 하지만 기대는 안 합니다. 10주년 기념행사 한다고 초대장은 보냈습니다. 올 것 같지는 않지만요. 정권이 바뀐 게 영향이 크네요."

- 지난해 8월에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낙하산 반대 성명 발표한 것이 영향을 받는 건가요?
"불이익을 받아도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재외동포재단 수장이라면 나름 철학과 중립성을 갖추고 정파적 입장을 초월해야 하는데, 정권 탄생에 기여한 특정 단체 대표를 논공행상으로 문외한이 내려앉힌 것은 문제가 큰 것이지요. 초기에도 낙하산이었지만 그나마 관련 논문도 발표하고 전문성도 있었거든요. 그러다 민간 전문가들이 책임을 맡아야 한다는 의견이 나와 이전 정부가 잘 따라준 것인데, 정권 바뀌었다고 아무나 내려 보내고 있으니 참 한심합니다."

해외동포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그는 사람의 문제, 특히 외교관들의 역할을 많이 언급했다. 외교관 한 사람의 노력이 엄청 큰 효과를 얻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재외동포재단 낙하산 이사장에 불만이 높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들이 요즘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사할린을 예로 들었다.

"2차 대전 종전 후 일본은 적국 소련과 협상을 통해 사할린 땅의 일본인 30만 명을 데리고 옵니다. 조선인들은 나 몰라라 했지만 자국민만은 챙긴 것이지요. 유골까지 송환해 올 정도였습니다. 91년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종전 후 이런저런 이유로 본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남아 있던 일본인들을 가족까지 모두 데리고 갔습니다."

자국민 챙겨야 할 정부는 외교마찰만 걱정

자국민에 대한 외교부서의 책임감을 보여준 사례라고 했다. 이에 비해, 우리 정부는 뒤늦은 행동을 보였고 한국 외교관들은 자국 동포들을 별로 신경 안 쓴다는 것이 그의 불만이었다. 외교마찰 가능성만 이야기할 뿐 적극적인 움직임이 약해 보인다는 것이다.

"해외동포들은 국적이 한국이 아닌 외국이기 때문에 외교적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논리를 펴던데, 그럼 외교관들이 왜 필요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문제를 풀어야 하는 것이 외교관 역할 아니던가요? 하다못해 북한도 북일 미수교 상태에서 일본의 한국인들을 북한으로 송환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국민을 챙기려는 의지가 너무나 약해 보입니다."

그는 우토로 문제가 발생했을 때도 "외교부는 남의 나랏일이라며 모른 척했다"고 말했다. 형평성 문제로 지원이 힘들다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국민여론이 들끓고 국회에서도 나서자 마지못해 지원을 결정했다는 것. 우토로 협상 과정에서도 그가 직접 우토로 땅주인인 서일본식산 대표와 만나 협상을 벌였다고 밝혔다.

"같이 술 먹고 밥 먹으면서 사정하고 협박하고 애원하고… 그래서 애초 부르던 가격보다 낮출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담당자도 몇 번 바뀌고 편성된 예산이 실무적인 일로 지체되고 있어 답답합니다."

우토로 문제는 정부지원금도 책정됐고 모금도 이뤄졌으나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지원방식에 대한 절충이 아직 안 끝나고 있어서다. 정부 예산지원이기에 땅 구입 및 관리를 위해 설립될 법인의 이사장과 과반수의 이사를 우리 정부 측 관계자가 맡아야 한다는 것이 외교부의 입장.

이에 반해 우토로 마을에 대한 일본 내 관련법안 마련 및 일본 정부와의 실무적 협의는 마을 주민들이 맡아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 따라서 우리 정부가 전면에 나서는 것을 일본 정부가 꺼려한다는 것이 배 대표가 전하는 현재의 우토로 상황이었다.

"우토로 땅주인 만나 사정하고 협박하고 애원해 가격 낮춰"


우토로 관련 영화상영회에서 우토로 문제를 설명하고 있는 배덕호 대표

-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자국민도 아닌 해외동포까지 지원해 주느냐는 견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경제와 재외동포가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습니다. 재외동포 정책을 경제와 연관시키는 것은 필요하면 써먹고 필요 없으면 버린다는 의미로 보여요. 어려웠던 시기 국가는 그들을 보호해주지도 못했고, 외국으로 내보내 돈을 벌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경제 위기 때문에 지원 힘들다 이야기 하는 것은 양심도 없는 행동입니다. 재외동포를 필요할 때만 팔아먹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재외동포 현안은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금방 답이 나올 수 있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요즘 관심을 쏟고 있는 사할린 한인들의 문제에 대해서도 '99년부터 영주귀국이 진행됐지만 정부가 45년 8.15 이전에 남겨진 1세대만 데리고 와서 또 다른 이산가족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곳에서 가정을 꾸린 사람들이 자식들을 남겨두고 홀로 들어와야 했다는 것.

그래서 요즘 KIN이 접근하는 사할린 한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겠냐는 방향성이다. 일본과 러시아를 상대로 동포사회 문제의 해결방안을 제시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남북 분단 상황에서 조심스런 접근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당국자들의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한 잘못에 대해서는 평가하지 않고, 어렵게 살고 있는 동포들을 한국 사회의 빈민층과 같다는 시각으로 보려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것이다.

10년의 세월. KIN의 노력은 재외동포 문제에 대한 작은 진척들을 이뤄냈다.  2005년 재외동포에 대한 홍보자료가 정부에서 나왔고, 에다가와 학교와 우토로 마을 등에 국민적 관심을 일으켰다. 1999년 제정된 재외동포법도 계속된 노력 끝에 2004년 개정됐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 해외로 이주한 한인과 그 후손을 제외시켜 논란이 있었던 재외동포법은 2001년 헌법재판소로부터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은 이후 해방 이전으로 재외동포의 대상을 넓힌 것이다.

사할린 강제징용은 우리가 겪은 일방적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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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할린 한인 현지 실태 조사차 KIN이 방문했던 사할린의 에트노스예술학교 학생들 ⓒ 지구촌동포연대

그는 지나온 시간과 앞으로의 재외동포 운동의 방향에 대해 "모든 게 다 정치인데 그 부분에 게을렀던 것이 가난한 일을 자초한 것 같다"고 말하고 "재외동포의 네트워크를 구축해  '법제나 예산 등의 정책적 틀을 갖추고 국제적 연대 활동이 가능해졌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아울러 사할린 문제와 재외동포의 중요성 등에 사회적 관심을 요청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사할린은 강제 징용으로 우리 국민이 일방적 피해를 본 사안입니다. 재일동포는 해방 후 귀국을 보장받았지만 사할린은 돌아오고 싶었어도 올 수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문제를 KIN에서 관심 갖지 않으면 누가 나서겠습니까. 해외에 형성된 동포사회는 돈으로 일부러 만들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주요 사안에 대한 국제적 연대가 가능하고 네트워크로 활용될 수 있는 만큼 시민들의 관심이 더 높아져야 할 것입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려니 점심시간이었다. 한사코 점심을 같이 하자는데 빚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비록 밥 한 끼일망정 얻어먹는다는 것에 부담스러운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제안을 했다. 내가 사든가 아니면 나는 그냥 가든가. 그러자 절충안을 제시한다. 자기가 살 테니 후원회원이 돼 달라고, 그래서 그러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기분 좋게 반칙을 했다. 밥값까지 내가 냈다.

끝으로 물었다. "10주년 행사에 손님들 많이 오실 것 같아요?"

답변은 간결했다. "외교부 재외동포 담당 대사님이 오신다고는 연락이 왔습니다. 우토로 주민대표 분들도 오신다고 하고 한 100여명 오시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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