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야마 마사오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 丸山 眞男 | |
|---|---|
| 출생 | 1914년 3월 22일 |
| 사망 | 1996년 8월 15일 |
| 성별 | 남성 |
| 국적 | 일본 |
| 학력 |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졸업 |
| 직업 | 정치학자 |
마루야마 마사오(일본어: 丸山 眞男, 1914년 3월 22일 ~ 1996년 8월 15일)는 일본의 정치학자로서 일본정치사상사의 권위자이다. 1937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생애
종전까지
1914년 3월 22일, 저널리스트 마루야마 칸지(丸山幹治)의 차남으로 오사카시 아베노구에서 태어났다. 구 마쓰시로번 사족 가문이다. 형은 방송인, 평론가인 마루야마 테츠오(丸山鉄雄). 동생은 평론가인 마루야마 쿠니오(丸山邦男)가 있다. 1921년 도쿄 요츠야로 이사했다. 아버지의 친구 하세가와(長谷川如是閑) 등의 영향으로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조류 속에서 성장했다. 요츠야제일심상소학교, 제일중학교를 거쳐 1931년 제일고등학교 (일본)에 진학했다.
1933년 4월 10일 혼고 불교 청년관에서 개최된 유물론 연구회의 강연회에 참가했는데 경찰에 의해 불법화되었다. 하세가와가 인사로 행사를 개회하자 강제해산되어 청중이었던 마루야마는 후지경찰서에 구금되었고 특별고등경찰의 조사를 받았다.[1] 체포되었을 때 "나도모르게 한숨도 못자고 구치소에서 눈물을 흘렸다. 이후 그 경험이 내가 지성에 의존하지 않게끔 자각시켰다."고 느꼈으며 이후 "군대 경험 못지 않은 경험이었다."고도 회고했다.[2]
1934년 일고 졸업후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회에 입학했다. 강좌파의 영향을 받았다. 1936년 현상논문 공모를 위해 쓴 「정치학에 있어 국가의 개념」政治学に於ける国家の概念이 1등없는 2등으로 입선했다.[3] 『녹회잡지』緑会雑誌 8월호에 게재되었고 이를 계기로 조수 채용이 내정되었다.
마루야마는 원래 아버지처럼 저널리스트를 지망했지만 조수 공모를 보고 우연히 응모했다고 한다. 자기처럼 체포 경력이 있고, 마르크스주의 영향이 짙은 논문을 쓰고 특고와 헌병의 감시를 받던 사람을 조수로 채용할 정도의 사람이 도쿄 대학 법학부에 있다면, 연구실에 남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지도교수였던 난바라 시게루는 마루야마를 사상적 동지로 간주하고 채용했다.[4]
1937년 졸업후 난바라 시게루의 연구실 조수가 되었다.[5] 유럽 정치사상사를 연구하고 싶어했지만 일본 정치사상사 연구를 시작했다. 1940년 「근세 유교발전에서 소라이학의 특질과 국학의 관련」近世儒教の発展における徂徠学の特質並びにその国学との関連을 『국가학회잡지』国家学会雑誌에 발표했고 6월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조교수가 되었다. 1941년 「근세 일본사상사에 있어 자연과 작위」近世日本思想史における「自然」と「作為」-制度観の対立としての를 같은 국가학회잡지에 발표했다.
1944년 3월 코야마 유카리(小山ゆか里)와 결혼했다. 7월 「국민주의이론의 형성」国民主義理論の形成을 발표했다.[6] 이등병으로 징집되었다. 간부후보생에 지원하면 장교로 복무할 수 있었지만 군대에 간 것은 자신의 의사가 아니므로 이병 그대로 징집되어 평양에 보내졌다. 9월 각기병으로 전역하여 11월 귀환했다.
평양에서 복무할 때 마루야마는 중학교도 가지 못했던 일병에게 이지메를 당했다.[7] 마루야마는 "군대란 지방의 집안, 사회적 지위와는 무관하게 화족(華族)의 도련님이 잡역부 출신의 상병에게 따귀를 맞습니다. 어쩐지 그 묘하게 민주적인 느낌이 사회적 계급에서 오는 불만을 마취시키고 있었습니다. 일본 군대의 역설적인 점이지요." 하고 말했다.[8][9]
1945년 다시 소집되어 히로시마시 선박통신연대에서 암호교육을 받은 뒤 선박사령부에 배속되었다가 참모부 정보반으로 전속되었다. 마루야마는 연합 통신의 주간지를 바탕으로 국제 정보를 정리하여 보고했다. 이는 비망록이라는 메모로 아직 남아있다.[10] 8월 6일, 사령부에서 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원폭이 떨어졌다. 1945년 8월 15일 전쟁이 끝났고 9월 귀향했다.[11] "상관의 의도를 알아맞춰야 하는 것은 궁궐의 하녀같은 느낌이었다."고 좌담회에서 언급한 바 있다. 이런 경험은 이후 마루야마에게 '자립한 개인'을 하나의 목표로 삼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12] .
전후
1946년 2월 도쿄 제국 대학 헌법연구위원회 위원이 되어 헌법 개정의 절차를 정리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위원장 미야자와 도시요시는 마루야마가 제시한 '8월혁명설'을 발전시켜 「8월혁명과 국민주권주의」八月革命と国民主権主義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13] 마루야마는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超国家主義の論理と心理를 『세계』世界 46년 5월호에 발표했다.[14] 이후 전후민주주의 사상전개 국면에서 지도적 역할을 했다. 이 즈음 미시마 타이샤(三島大社) 등에 설치된 서민대학 등 여러 곳에서 강연을 다녔다. 1950년 교수가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을 둘러싼 논쟁에서 평화문제담화회平和問題談話会의 중심인물로 1960년 안보투쟁을 지지하는 등 아카데미즘을 넘어 민주주의의 여론 주도자로 발언하고 영향을 주었다. 이런 활동으로 학술계와 저널리즘을 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본인은 현실정치분석을 분점으로 일본정치사상사 연구를 본점이라고 불렀다.[15]
1960년대 후반엔 반대로 기만적인 전후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져 전공투 학생 등에게 격렬하게 공격당했다. 1968년 도쿄대 투쟁시 연구실을 점거하고 귀중한 자료나 필름을 파괴한 전공투 학생들이 기동대에 의해 해산되고 법학연구소에 들어갔다가 이런 회고를 마이니치 신문에 남겼다. "진흙발에 뭉개진 책이나 문헌을 닦아내며 건물이야 다시 지으면 되지만 연구결과는... 이것이 문화의 파괴가 아니면 무엇이라 부를것인가. 누를수 없는 분노로 입술이 떨렸다."[16]마루야마는 파시스트도 하지 않은 일을 할 것인가라고 분노했다.[17] 이에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겨우 연구실이 대학생에게 짓밟힌 것으로 그렇게 과장하느냐며 자신들은 자료 수집을 위해 어떻게든 도서관에 줄서서 들어가면서도 틈틈이 생활비를 벌기위해 일을 하면서 연구했다고 비난한 바 있다.[18] [19] .
1969년 간기능 악화로 입원했고[20] 1971년 교수직을 조기 퇴직했다. 1974년 도쿄 대학 명예 교수, 1978년 일본 학사원 회원이 되었다.
1993년 간암을 발견했다.[21] 이와나미서점에서 전집을 발간하던 중 1996년 8월 15일에 82세로 사망했다. 가족끼리 장례를 치르고 사망 1주일 뒤에 발표되었다. 8월 26일 추모회가 열렸다.[22]
스스로 딜레탕트하다고 평가할 정도로 문학, 영화, 음악에 조예가 있었다. 클래식 음악에 빠져들어서[23] 퇴임후 만년까지 음반과 악보를 수집, 분석하며 지냈다. 베토벤, 바그너, 푸르트벵글러를 좋아했다.
사상과 영향력
일본 제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뒤, 이와나미 쇼텐의 「세카이」지에 논문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를 기고한 마루야마 마사오는 '초국가주의[ultra nationalism]'를 맹렬히 비판하고 일본의 제국주의를 심층적으로 분석하였다. 초국가주의의 문제는, 일본 제국의 통치 원리가 중립에 기초한 공익 추구가 아니라 시민사회의 모든 가치를 천황제를 이용하여 독점하였다는 데 있었다. 일본 제국의 핵심 문제는 '보편적 가치인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 아니라, '국가가 자신의 존재 이유를 망각한 것'이었다. 그는 개인의 자유와 민주정을 보편의 가치로 신봉하지 않았고, 국가가 여러 가지 특수한 가치에서 중립을 견지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초국가주의는 가치의 독점에 집중함으로써 특정한 가치인, ‘천황=지고(至高)한 선’이라는 거짓 명제를 보편화한 것이 잘못이었다.
전형적인 헤겔리안이었으며, 서구의 근대를 인류사의 절대 가치로 여겼고 이를 전 인류의 목표로 설정하였다. 서구 중심주의 역사관을 뼛속까지 체화함으로써 동양에서 유일하게 중세를 거친 일본은 근대 또한 동양에서 유일하게 성취할 수 있다고 간주하였다.[24]
비판
마루야마는 영향력이 큰 만큼 다양한 비판도 있다. 그러나 스스로 비판에 대응하여 논란을 만들지는 않았다. 마루야마는 비판을 묵살하여 결과적으로 권위를 인정받았다는 평가가 있다.[25]
- 마르크스주의측의 비판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지향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주로 서양 근대 부르주아지 시민사회를 이상으로 삼는 근대주의자, 시민파 학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마루야마 류의 진보적 문화인들이 대학에 안주하며 대중에게서 유리되었다고 했다. 그는 마루야마를 '고공비행적 사고'上空飛行的思考의 소유자라 불렀다.[26] 요시모토의 마루야마 비판은 신좌파와 전공투 학생들에게 이어져 도쿄대 투쟁에서 권위주의자, 귀족주의자로 비판받았다.[27]
마루야마는 비록 공산당이 반전 운동을 했지만 결과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으므로 공산당에게도 전쟁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일본공산당은 방관자의 사상이라며 규탄하였다.
제자인 마쓰시타 게이이치같은 이들이 안보투쟁이후 사회 운동이 활발해졌고 시민의식이 성숙해졌다고 주장했지만 마루야마는 그런 정치참여는 파트타임일 뿐이라고 말했다. 일기에도 그저 전공투의 우쭐해진 리더들이라고 적었다. 마루야마 사후 그의 일기를 읽은 전공투 리더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자신을 두고 한 이야기 같다고, 도쿄대 전공투 운동에서 방관자 역할로 일관한 마루야마는 이론과 실천에 이중잣대가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했다.[28]
- 보수파의 비판
마루야마의 논의는 서구엔 있고 일본엔 없는 것을 지적하는 '결여이론'이다.[29]
마루야마의 일본 파시즘론은 초국가주의와 국가주의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있다.[30]
일본 파시즘의 개념 규정이「현대 정치의 사상과 행동」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이 책은 파시즘을 지지한 일본 국민을 둘로 나누어 하나는 공장주나 자작농, 교원 등으로 또 하나는 도시의 문화인, 언론인, 학생층으로 규정했다. 제대로 검증도 없이 이들을 파시즘의 사회적 기반으로 단정하고 그들을 (의사) 인텔리겐차로 부르며 경멸한다는 것이다.[31] .
우메하라(梅原猛)는 사상적 전통이 일본에서는 형성되지 않았다고 정의하는 마루야마에게 묘법연화경 같은 고전을 읽거나 일본의 미술, 문학, 풍속을 조사하지 않고 그렇게 단정한 것은 용서할 수 없다며 비판했다.[32]
- 사상사연구자의 비판
하시카와 분조(橋川文三)는 마루야마에게 영향받아 쓴 논문「昭和超国家主義の諸相」에서 마루야마의 초국가주의를 비판한다.[33]
후지타 쇼조(藤田省三)는 마루야마에게 처음부터 비판적이었던 제자로 『天皇制国家の支配原理』를 썼다.
제자인 와타나베 히로시는 동아시아 왕권론이라는 관점으로 일본정치사상사를 다시 쓰고있다.
고층(古層)론 비판은 여러 학자가 하고 있다. 『「維新革命」への道』(카루베 타다시苅部直), 『事件としての「徂徠学」』『日本近代思想批判』(코야스 노부쿠니子安宣邦), 『日本宗教史』(末木文美士) 등.
1990년대 후반 이후에는 강상중(姜尙中), 요네타니 마스후미(米谷匡史), 사카이 나오키(酒井直樹) 등이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국민주의나 민족주의로 치우친 면을 비판한다.[34] 사이토 준이치(斎藤純一), 가사이 히로타카(葛西弘隆) 등은 마루야마의 60년대 이후에는 다원주의외 시민사회 옹호가 더 드러난다고 지적했다.[35]
- 기타
미즈타니는 마루야마의 논의가 미국을 비판하고 북한과 소련에 경도되어 있었다며 외교 음치, 정치적 축농증에 걸렸다고 평가했다.[36]
오쓰카 히사오가 가지야마 츠토무(梶山力)와 공역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개정하며 오쓰카 단독 번역으로 적으려 하자 이를 베버 연구자인 안도 히데하루(安藤英治)가 비판했으며 가지야마도 단독번역판을 새로 내려고 했다. 이때 마루야마가 압력을 가해 이를 방해했다는 폭로가 있다.[37]
시무라 고로는 마루야마의 한학과 음악에 대한 저작에 이해도가 떨어진다고 비판했으며, 한국전쟁이 남침인지 여부를 알 수 없다고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부정한 것을 지적하며, 그가 저널리스트의 자격이 없다고 평했다.[38]
제자
마루야마는 세미나를 통해 여러 제자를 배출했으며 그들은 마루야마 학파로 불렸다.[39] 시노하라 하지메(篠原一), 후쿠다 간이치(福田歓一), 사카모토 요시카즈(坂本義和), 교고쿠 쥰이치(京極純一), 미타니 타이치로(三谷太一郎) 등 도쿄대학 계열의 정치학자들 다수가 그러하다.
정치학계 외에도 코무로 나오키(小室直樹)나 작가 쇼지 가오루(庄司薫)[40] 관료 아마야 나오히로(天谷直弘)[41] 정치가 에다 사쓰키(江田五月), 교육학자 호리오 테루히사(堀尾輝久) 등이 마루야마 세미나 출신자들이다.
이이다 다이조(飯田泰三) 이시다 다케시(石田雄) 우에테 미치아리(植手通有) 가미시마 지로(神島二郎) 사카모토 요시카즈(坂本義和) 하시카와 분조(橋川文三) 히라이시 나오아키(平石直昭) 후지타 쇼조(藤田省三) 후지와라 히로타츠(藤原弘達) 호리오 테루히사(堀尾輝久) 마츠자와 히로아키(松沢弘陽) 마츠시타 게이이치(松下圭一) 마츠모토 산노스케(松本三之介) 미야무라 하루오(宮村治雄) 와키 게이헤이(脇圭平) 와타나베 히로시(渡辺浩)
주변인
- 요시노 겐자부로(吉野源三郎) (세카이 (잡지) 『世界』)
- 다케다 다이준(武田泰淳), 하니야 유타카(埴谷雄高). 다케우치 요시미(竹内好)
- 츠루미 슌스케(鶴見俊輔) (『思想の科学』)
- 오오야마 아키오(大山郁夫)
저서
- 『일본정치사상사연구』、김석근 譯、통나무、1998년 9월
- 『政治の世界』(御茶の水書房、1952年)
- 『현대 정치의 사상과 행동』、김석근 譯、한길사、1997년 3월
- 『現代政治の思想と行動』(未來社 〈上・下〉 1956-57年、増補版 全1巻、1964年、新装版2006年)
- 英訳:Thought and Behaviour in Modern Japanese Politics, edited by Ivan Morris (Oxford University Press, 1963)
- 『後衛の位置から――追補「現代政治の思想と行動」』(未來社、1982年)
- 『현대일본정치론』、신경식 譯、고려원(고려원미디어)、1998년 10월
- 『일본의 사상』、김석근 譯、한길사、1998년 2월
- 『日本の思想』(岩波新書 青版、1961年、改版2018年)
- 『일본의 사상』日本の思想은 2005년 5월까지 102만부가 팔렸고 대학생 필독서라고 평가받았다. 일부 텍스트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다. 1985년에는 프랑스의 일본어 교수자격시험의 문제로도 등장했다.[45]
- 『전중과 전후 사이 1936-1957』、김석근 譯、휴머니스트、2011년 2월
-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후쿠자와 유키치 共著、김석근 譯、문학동네、2007년 4월
- 『충성과 반역』、박충석 譯、나남출판、1998년 11월
- 『丸山眞男 戦中備忘録』(日本図書センター、1997年)
- 『自己内対話――3冊のノートから』(みすず書房、1998年)
- 『번역과 일본의 근대』、가토 슈이치 共著、임성모 譯、이산、2000년 8월
- (加藤周一)『翻訳と日本の近代』(岩波新書、1998年)
- 『福沢諭吉の哲学 他六篇』(松沢弘陽編、岩波文庫、2001年)
- 『丸山眞男セレクション』(杉田敦編、平凡社ライブラリー、2010年)
- 『政治の世界 他十篇』(松本礼二編・注、岩波文庫、2014年)
- 『超国家主義の論理と心理 他八篇』(古矢旬編・注、岩波文庫、2015年)
- 『사상사의 방법과 대상』、고재석 譯、소화、1997년 8월
연구서
- 마루야마 마사오 / 카루베 타다시
- 오쓰카 히사오와 마루야마 마사오 / 나카노 도시오
- 마루야마 마사오가 만들어낸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신화 / 야스카와 주노스케
- 마루야마 마사오와 자유주의 / 김석근, 카루베 타다시
- 일본사상의 감성전통 / 기타자와 마사쿠니
각주
- 『丸山眞男集 別巻』岩波書店、1997年3月13日、35頁。
- 死後公表された『自己内対語』(みすず書房)による。
- 『戦中と戦後の間』所収、みすず書房
- 参考文献;丸山真男/福田歓一編『聞き書 南原繁回想録』、東京大学出版会、272頁、269頁。南原繁「日中国交回復の道」『世界』1958年10月号。南原繁/郭沫若「十八年ぶりの日本」『中央公論』1956年2月号。
- “「知の巨人たち」 第3回 民主主義を求めて~政治学者 丸山眞男~(2014年7月19日放送)”. NHK. 2019년 7월 8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1940년 동경제국대학의 조교로 근무하던 중 국가학회잡지에 기고를 시작해, 1944년까지 쓴 세 편의 논문이 「일본정치사상사연구」다.
- 高田里恵子 『学歴・階級・軍隊』 中央公論新社 2008年
- 『思想の科学』1949年10月号 高田里恵子 『学歴・階級・軍隊』中央公論新社 2008年
- 『マックス・ウェーバーの例会にて』高田里恵子 『学歴・階級・軍隊』 中央公論新社 2008年
- 『丸山眞男集 別巻』前掲書、45頁。
- 苅部直『丸山眞男――リベラリストの肖像』岩波新書、107-108頁、111-112頁。
- 小熊英二『〈民主〉と〈愛国〉 戦後日本のナショナリズムと公共性』新曜社、P.55
- 『丸山眞男集 別巻』前掲書、47頁。
- 『現代政治の思想と行動』上巻(未來社、1956年12月15日)に収録された。
- 松本三之介「先生の学問的姿勢について憶う」(「未来」1996年10月号)
- 2016年2月15日朝日新聞夕刊・連載記事「新聞と9条」特集
- 山本義隆 私の1960年代
- 「収拾の論理」『吉本隆明全著作集 続 10 思想論Ⅱ』
- 竹内 2012.
- 『丸山眞男集 別巻』前掲書、70頁。
- 『丸山眞男集 別巻』前掲書、85頁。
- 弔辞は木下順二が読んだ(文藝春秋編『弔辞 劇的な人生を送る言葉』文春新書2011年pp.97-102所収)。
- 単なる趣味という次元を超えたのめりこみ振りは、大学で丸山に師事してケンウッド役員も務めた音楽仲間の中野雄『丸山眞男 音楽の対話』(文春新書)に詳述されている。
- - “아름다운 나라는 없다”, 「교수신문」(2006년 10월 31일, 동경대학 통합문화학 박사과정 김항)
- 竹内洋『丸山眞男の時代』中公新書、213-215頁
- 吉本隆明『柳田国男論・丸山真男論』、新版 ちくま学芸文庫。吉本ほか『批評とは何か/丸山真男について』吉本隆明研究会編集/吉本隆明が語る戦後55年.12、三交社
- 竹内洋『丸山眞男の時代』『革新幻想の戦後史』、すが秀実『革命的な、あまりに革命的な』など
- 나의 1960년대 - 도쿄대 전공투 운동의 나날과 근대 일본 과학기술사의 민낯
- 日本には「西洋における〇〇(民主主義や個人主義の伝統など)がない」という形式。(神島二郎『近代日本の精神構造』P326)
- 마쓰모토 겐이치 (1946년) 「일본의 내셔널리즘」『日本のナショナリズム』등
- 谷沢永一『悪魔の思想―「進歩的文化人」という名の国賊12人』クレスト社 1996年2月
- 梅原猛『美と宗教の発見』(筑摩書房、1969年、新版 ちくま学芸文庫)
- 『橋川文三著作集 5』(筑摩書房新版全10巻)より
- 情況出版編集部編『丸山真男を読む』(情況出版、1997年)
- 斎藤純一「丸山眞男における多元化のエートス」(『思想』第883号、1998年1月)、葛西弘隆「ナショナル・デモクラシーと主体性」(『思想』第896 号、1999年2月)
- 水谷三公 『丸山真男』 ちくま新書
- 羽入辰郎『学問とは何か』、ミネルヴァ書房
- 志村五郎 (2010). 《「丸山眞男という人」、鳥のように》. 筑摩書房. ISBN 978-4-480-86071-2. 다음 글자 무시됨: ‘和書’ (도움말)
- (일본어) 『丸山真男』 - 코토뱅크
- 小説『赤頭巾ちゃん気をつけて』で主人公が憧れる思想家は丸山をモデルにしていると言われる。
- 通産審議官を務め、司馬遼太郎の小説『坂の上の雲』をもじった「坂の下の沼」の「町人国家論」などの言説で知られる。
- ヘーゲル『歴史哲学』など
- フランツ・ボルケナウ『封建的世界像から近代的世界像へ』みすず書房
- または、「成る」 - 「為す」。これらは、丸山が、テンニースのゲマインシャフトとゲゼルシャフトの対概念にヒントを得たもの。
- J.J.オリガス「発見、再発見」、「みすず」編集部編、『丸山眞男の世界』、p. 58
같이 보기
丸山眞男
丸山眞男
1964年 | |
| 人物情報 | |
|---|---|
| 生誕 | 1914年3月22日 |
| 死没 | 1996年8月15日(82歳没) |
| 国籍 | |
| 出身校 | 東京帝国大学法学部政治学科 |
| 学問 | |
| 研究分野 | 政治学、日本政治思想史 |
| 研究機関 | 日本学士院、東京大学 |
| 主な業績 | 近世儒学の研究、超国家主義論、福澤諭吉論ほか |
| 主要な作品 | 『日本政治思想史研究』『現代政治の思想と行動』『日本の思想』(「である」ことと「する」こと) |
| 主な受賞歴 | 第7回毎日出版文化賞(1953年) 第4回大佛次郎賞(1977年) |
| 脚注 | |
丸山 眞男(まるやま まさお、1914年〈大正3年〉3月22日 - 1996年〈平成8年〉8月15日)は、日本の政治学者、思想史家。東京大学名誉教授、日本学士院会員。専攻は日本政治思想史。新字体で、丸山 真男とも表記される。
専門学問は、「丸山政治学」「丸山思想史学」と呼ばれ[1][2]、経済史学者・大塚久雄の「大塚史学」と並び称された。
ジャーナリスト丸山幹治の次男として生まれた。東大法学部を卒業し、長く教鞭を執り、のちに東大法学部長も務めた。師は南原繁。
初期の代表作は『日本政治思想史研究』(1952年)。西欧思想と東洋古典の素養を兼ね備えた学識を持ち、戦後民主主義思想の展開に指導的役割を果たした。〈丸山学派〉と称される後進の研究者も輩出し、日本政治学界の量的な飛躍への貢献も大きい。
経歴
政治思想史研究へ
1914年(大正3年)3月22日、ジャーナリスト・丸山幹治の次男として、大阪府東成郡天王寺村(現・大阪市阿倍野区)に生まれた。兄に芸能プロデューサー・音楽評論家の丸山鉄雄、弟に評論家の丸山邦男がいる。1920年、兵庫県精道尋常小学校に入学。1921年(大正10年)春、父が「読売新聞」経済部長となったため、東京四谷に転居、また四谷第一尋常小学校に転校。父の友人・長谷川如是閑らの影響を受け、大正デモクラシーの潮流のなかで思想形成をおこなう。1926年、東京府立第一中学校(現・都立日比谷高校)に入学、そして1930年、旧制第一高等学校を受験するが不合格、翌年(昭和6年)4月、一高文科乙類に進学。
1933年(昭和8年)4月10日、本郷仏教青年館で開催された唯物論研究会の講演会に参加。同講演会は警察の命令により、長谷川如是閑が挨拶を始めるや否や解散。聴衆の一人であった丸山は本富士警察署に勾留され、特高の取り調べを受ける[3]。
1934年(昭和9年)に一高を卒業後、東京帝国大学法学部政治学科に入学。「講座派」の思想に影響を受ける。1936年(昭和11年)、懸賞論文のために執筆した「政治学に於ける国家の概念」[4]が、第2席A(第一席該当なし)に入選。『緑会雑誌』8月号に掲載される。これが認められて助手採用に内定する。
1937年(昭和12年)、大学を卒業し、南原繁の研究室の助手となる[5]。1938年、本来はヨーロッパ政治思想史を研究したかったが、日本政治思想史の研究を開始した。1940年(昭和15年)、「近世儒教の発展における徂徠学の特質並びにその国学との関連」を『国家学会雑誌』(54巻2-5号)に発表。6月、東京帝国大学法学部助教授となる[6]。1941年、「近世日本思想史における「自然」と「作為」-制度観の対立としての」を『国家学会雑誌』に発表。
1944年(昭和19年)3月、友人小山忠恕の妹ゆか里と結婚。7月、「国民主義理論の形成」を『国家学会雑誌』に発表(後に「国民主義の「前期的」形成」と改題)。同7月、すでに30歳で徴兵年齢を過ぎていたが、陸軍二等兵として教育召集を受けた。思想犯としての逮捕歴を警戒した一種の懲罰だったとする見方もある[7]。大卒者は召集後でも幹部候補生に志願すれば将校になる道が開かれていたが、「軍隊に加わったのは自己の意思ではない」と二等兵のまま朝鮮半島の平壌へ送られた[8]。9月、脚気のため除隊決定。11月、応召より帰還。
1945年(昭和20年)3月、再び召集される。広島市の船舶通信連隊で暗号教育を受けた後、宇品の陸軍船舶司令部へ二等兵として配属された。4月、参謀部情報班に転属。丸山は連合通信のウィークリーをもとに国際情報を毎週報告。入手した情報を「備忘録」と題するメモに残す[9]。6月に一等兵に昇進[10]。8月6日、司令部から5キロメートルの地点に原子爆弾が投下され、被爆[11]。朝礼、点呼の時間で、丸山は司令部棟の建物の影となるところにいたため、爆風に晒されることは免れた。その日の記憶はショックでなく、8月9日に上官とカメラマンとで被曝地を歩いた[12]。丸山は、自分が兵隊で市民に対して傍観者のような立場にあったことからくる後ろめたさ、そしてたまたま建物のおかげで死ななかったことから被爆した死者に対する申し訳なさを抱え、戦後24年間、被爆体験を語ることをしなかった[12]。
1945年(昭和20年)8月15日に終戦を迎え、9月に復員した[13]。「上官の意向をうかがう軍隊生活は(大奥の)『御殿女中』のようだった」と座談会で述べたことがある。この経験が、戦後、「自立した個人」を目指す丸山の思想を生んだという指摘がある[14]。
戦後
1946年(昭和21年)2月14日、東京帝国大学憲法研究委員会の委員となる。憲法改正の手続きについてまとめた第一次報告書を執筆。なお委員長の宮沢俊義は、委員会で丸山が提示した「八月革命説」を、丸山の承諾を得て「八月革命と国民主権主義」として論文発表している(『世界文化』1946年5月号)[15]。「超国家主義の論理と心理」を『世界』1946年5月号に発表[16]。以後、戦後民主主義思想の進展に指導的役割を果たす。この時期には、静岡県の三島大社境内に庶民大学(公開講座の先駆け)を設け、全国各地を巡り講義を行う。1950年(昭和25年)6月に東京大学法学部教授(日本政治思想史講座)。
サンフランシスコ平和条約をめぐる論争では平和問題談話会の中心人物として、1960年(昭和35年)の安保闘争を支持する知識人として、アカデミズムの領域を越えて戦後民主主義のオピニオンリーダーとして発言を行い、大きな影響を与えた。これらの時事論的な論述により、「アカデミズムとジャーナリズムを架橋した」とも評された。後年、本人は現実政治の分析を「夜店」、日本政治思想史の研究を「本店」と称したことがある[17]。
1961年(昭和36年)、ハーバード大学およびオックスフォード大学客員教授。1973年(昭和48年)ハーバード大学名誉博士、プリンストン大学名誉博士[18]。
後半生
1960年代後半になると逆に、「欺瞞に満ちた戦後民主主義」の象徴として全共闘の学生などから激しく糾弾された。1969年(昭和44年)3月10日、肝機能障害により入院。同年6月、1970年2月と続けて入院[19]。心労と病気が重なったことで、1971年(昭和46年)3月、東大を早期退職した。1974年(昭和49年)5月に東京大学名誉教授。1978年(昭和53年)11月には日本学士院会員となる。
1993年12月9日、肝臓がんであることを知る[20]。長年版元より依頼されていた『丸山眞男集』(岩波書店)を刊行中の1996年(平成8年)8月15日に死去。82歳だった。家族のみで密葬を行い、約1週間後に死去が公表された。8月26日に「偲ぶ会」が、新宿区信濃町の千日谷会堂で行われた[21]。墓所は多磨霊園。
家族
- 郷里は長野県で旧松代藩士族の家系。
- 曽祖父・丸山清蔵 ‐ 松代藩士(足軽)。戊辰戦争に従軍して戦死。[22]
- 祖父・丸山鉄次郎[22]
- 父・丸山幹治(1880-1955) ‐ 新聞記者、論説委員。東京専門学校邦語科行政科卒。[22]
- 母・丸山セイ(1884-1945) ‐ 山口県阿武郡萩町、大庭直也の娘。政教社社主・井上亀六の異父妹。いとこに佐野五風。1909年に結婚。夫が不在がちだったため女手ひとつで4児を育てた。眞男が入営中に死去。[22]
- 兄・丸山鉄雄(1910-1988) ‐ NHK職員。京都帝国大学経済学部卒。[22]
- 弟・丸山矩男(1917-2004) ‐ 東京帝国大学理学部卒業。[22]
- 弟・丸山邦男(1920-1994) ‐ 評論家。早稲田大学中退。[22]
- 妻・ゆか里(1922-2011) ‐ 鉄道省技師・小山磐[23]の四女。眞男の高校時代からの友人・小山忠恕(東大経済学部卒。興銀データサービス社長、日本経営システム社長)の妹。東京府立第三高等女学校高等科卒。兄の岳父に明石和衛。[24]
- 長男・丸山彰 ‐ 数学者。東京工業大学、東海大学、日本大学で教鞭をとった。明星学園高等学校、日本大学卒。
- 二男・丸山健志
業績

前記の時論的な論述のほか、日本政治思想史における業績も重要である。第二次世界大戦中に執筆した『日本政治思想史研究』は、ヘーゲル[25]やフランツ・ボルケナウ[26]らの研究を日本近世に応用し、「自然」-「作為」のカテゴリー[27] を用いて儒教思想(朱子学)から荻生徂徠・本居宣長らの「近代的思惟」が育ってきた過程を描いたものである。
また、明治時代の思想はデモクラシー(民権)とナショナリズム(国権)が健全な形でバランスを保っていたと評価し[要出典]、特に日本近代を代表する思想家として福澤諭吉を高く評価し、「福澤惚れ」を自認した。日本学士院ではもっぱら諭吉の研究を行い、日本思想史研究における生涯の大半を福沢の研究に費やした。丸山の福沢諭吉論(『「文明論の概略」を読む』など)はそれ以降の思想史家にとって、現在まで見過ごすことのできない金字塔的な存在となっている。
『日本の思想』(岩波新書、1961)の発行部数は2005年(平成17年)5月現在、累計102万部。大学教員達から“学生必読の書”と評される他[要出典]、この中に収められている『「である」ことと「する」こと』は高校の現代文の教科書にも採用されている[28]。1985年(昭和60年)にはフランスにおける最初の日本語のアグレガシオン(教授資格試験)の和仏訳、テキスト分析の試験問題にも選ばれている[29]。
早くから海外に翻訳され、現在も再版されていることは特筆に値する。まず、1963年(昭和38年)に『現代政治の思想と行動』Thought and Behavior in Modern Japanese Politics が英訳出版された(のちに中国語訳も行われた)。続いて1974年(昭和49年)には『日本政治思想史研究』Studies in the Intellectual History of Tokugawa Japan が英訳され、1996年(平成8年)にその仏訳 Essais sur l'histoire de la pensée politique au Japon が刊行された。1988年(昭和63年)には『近代日本の知識人』Denken in Japan が、2007年(平成19年)には「超国家主義の論理と心理」、「近代的思惟」などを収めた Freiheit und Nation in Japan がそれぞれドイツ語訳されている。
また「丸山論」は、没する前後から年数冊のペースで、刊行され続けている。
古代政治思想としての「勢」の発見
丸山眞男の日本政治思想における業績の一つとして「勢い(いきほひ)」が「有徳」と見なされていたことの発見がある。『忠誠と異端』所収の「歴史意識の『古層』」のなかで丸山は雄略天皇が日本書紀で「天皇以心為師。誤殺人衆。天下誹謗言、大悪天皇也」とされる一方、「是時、百姓咸言、有徳天皇也」とされていることについて、「大悪(はなはだあ しくまします)という形容詞が、普通の倫理的意味で使用されていることは文脈から明らかである。とするならば右の例における有徳天皇とか至徳天皇とかの称辞は、中国古典に多少とも共通に窺われるような規範性を帯びていないと解するほかはない。中国正史における人物描写の表現で、「大悪」にして同時に「有徳」というような規定はおよそ考えられないだろう。このことは「紀』編纂者にとって、(広義の)儒教的規範観念が既知であり、事実それが随所に駆使されているだけにますます重大である」とし、「いきほひ=徳という用法」が「日本の価値意識を特徴的に示している」とした。
影響
丸山のゼミナールからは多くの政治学者・社会思想史家を輩出した。彼らは総じて「丸山学派」と言われ、日本の政治学を飛躍させた[30]。日本政治思想史専攻以外にも、篠原一、福田歓一、坂本義和、京極純一、三谷太一郎といった東大系の政治学者は、多かれ少なかれ影響を受けており、かつそれをさまざまな形で公言している。
狭義の政治学界の外でも、社会科学者の小室直樹などは丸山眞男から政治学を学び、作家庄司薫[31]、異色官僚の天谷直弘[32]、社会民主連合創設者で、参議院議長となった江田五月、教育学者の堀尾輝久なども丸山ゼミ出身。
エピソード
関東大震災での体験
1923年(大正12年)9月1日の関東大震災のとき、9歳だった丸山は、当時、四谷区(現・新宿区)に住んでおり、東中野の長谷川如是閑宅に避難した[33]。当時の手記に、自警団によって「朝せん人が、二百余名は打殺されている」などと記している[33]。
「悪いせん人は、ほんのわずかである」としつつも、自警団について、「こんなことなら自警団をなくならせた方がよい」「決して、朝せん人を殺すやくめとはまったくちがう」と指摘している[33]。
投獄経験に関して
- 逮捕されて拘置所に送られたとき、「不覚にも一睡もできない拘置所で涙を流した。そのことが日ごろの『知性』などというものの頼りなさを思い切り私に自覚させた」といい、「軍隊経験に勝るとも劣らない深い人生についての経験」だったと述べた[34]。
- 丸山は元々は、父と同じジャーナリスト志望で、東京帝国大学に残る気はなかったが、たまたま助手公募の掲示をみて応募したという。自身逮捕歴があり、マルクス主義に影響を受けた論文を書いて特高や憲兵の監視を受けていた人間を助手として雇うだけの度量が東大法学部にあるのなら、研究室に残ってもいい、と考えたらしい。当時の丸山の指導教授だった南原繁は、丸山の論文のそういう性格を見抜いたうえで、さらには丸山が自分の逮捕歴などを告白したのを聞いたうえで、丸山を助手に採用したのは、南原の本心が、丸山とは“思想の同志”的な位置にいたからである[35]。
思想形成
- 平壌で最初の兵役に就いた際、丸山は中学にも進んでいないであろう一等兵に執拗にイジメ抜かれたという[36]。丸山は戦後、「実際、兵隊に入ると『地方』の社会的地位や家柄なんかはちっとも物をいわず、華族のお坊ちゃんが、土方の上等兵にビンタを食らっている。なんか、そういう擬似デモクラティック的なものが相当社会的な階級差からくる不満の麻酔剤になっていたと思われるのです[37]」と語ったが、影響の大きさに「日本の軍隊の持っていた、そういうパラドキシカルな民主的性格というものを、もっと言っておかないといけないんじゃないか、と[38]」とも述べた。
「運動」に関して
- 戦後日本を象徴する左派、進歩的知識人の一人だったが、新左翼運動が激化すると権力に迎合的であるとして左からの批判の対象にもなった[39]。
- 1968年(昭和43年)の東大紛争では、1969年1月19日の東大安田講堂事件の収束により、機動隊の封鎖が解除された直後に、丸山は勤務先の法学部研究室に入り、安田講堂や研究室ほか施設を占拠し貴重な資料・フィルムを壊した全共闘の学生らに対し、同日の毎日新聞で
と報道している。後にこの事を「ファシストでもやらなかったことを、やるのか」とも発言した[41]。これについて吉本隆明は、たかが大学生に研究室に踏み込まれたくらいで大袈裟な言い草である、自分などは資料収集のために図書館の列にいつも延々並んでいる、生活費を稼ぐ仕事の合間に研究しているんだ、と非難している[42][43]。床にばらまかれ、泥に汚れた書籍や文献を一つ一つ拾いあげ、わが子をいつくしむように丹念に確かめながら『建物ならば再建できるが、研究成果は……。これを文化の破壊といわずして、何を文化の破壊というのだろうか』とつぶやいていた。押(おさ)えようとしても押えきれない怒りのため、くちびるはふるえていた[40]。 - 安保闘争後、市民運動が活発になった際に、弟子の松下圭一らは「市民が成熟して「市民感覚」が養われるようになった」と主張していたが、丸山は、そのような政治参加は「パートタイム」的なものにとどめるべきものだと述べた。日記にも「全共闘の“いい気になっている”指導者たち」と批判していた[41]。
未刊の『正統と異端』
筑摩書房の叢書『近代日本思想史講座』(1959-1961年、全8巻予定)の第2巻『正統と異端』の責任編集を担当予定だったが未刊(第2巻のみ欠番)となった。だが刊行に向け30年以上にわたり石田雄らと研究会(通称「正統と異端」研究会)を行っており、その資料が残っている[44]。後年に『丸山眞男集 別集 第4・5巻』(岩波書店)で刊行した。
交友関係について
- 『世界』初代編集長の吉野源三郎とは、終生深い親交があった[要出典]。
- 作家の武田泰淳や埴谷雄高[45]、中国文学者の竹内好とは家族ぐるみの付き合いがあった。また竹内については、「『ふつう好さんのことをナショナリストと言うでしょう。ぼくはそれだけをいうと、ちょっと抵抗を感じるな。20年以上のつきあいを通して、好さんにはコスモポリタニズムが感覚としてある、と肌で感じます』と述べている」[46]。
- 鶴見俊輔とは、(戦後初期の)雑誌『思想の科学』創刊以来の付き合いがあり、丸山は終生、思想の科学研究会の会員であったが、同研究会はなんでもありの「イラハイイラハイ主義」と揶揄している[47][48]。また、鶴見の哲学は信用するが、「日常感覚は信用しないんだな」「育った生活環境からいってもわたしのほうがはるかにドロドロした『前近代的』なものなんですよ」と述べている[48]。
- 1980年11月早稲田大学大隈講堂で催された大山郁夫生誕百年記念講演会の講演会であいさつ[49]。
趣味
- ディレッタント[50]を自称し、思想史のほかにも文学や映画、音楽などに造詣が深かった。
- 中でもクラシック音楽に入れ込み[51]、東大退官後、最晩年に至るまで、レコードやスコアを蒐集して分析するのに多くの時間を費やしたとされる[52]。
- 作曲家ではベートーヴェン、ワーグナー、演奏家ではフルトヴェングラーに傾倒していた[53][54][55]。
批判
丸山は戦後日本に大きな影響を与えた人物ということもあり、賛辞の一方で様々な立場から批判がなされている。しかし、自ら批判に応えて論争になるといったことはあまり多くなく、竹内洋は評伝で、丸山が批判に余り取り合わず「黙殺」したことで、結果的に丸山の権威が認められたと述べる[56]。
丸山政治学への批判
- 吉本隆明は丸山をはじめとする進歩的文化人は大学から自立せず、大衆から解脱(往相)してしまっており、丸山を「上空飛行的思考」として批判した[57]。吉本の丸山批判は新左翼・全共闘の学生などに受容された[58]。 東大紛争では、全共闘の学生から、東大教授という立場に寄りかかった権威主義者、大衆から遊離した貴族主義者であるとして批判された[要出典]。
- 丸山の日本ファシズム論には、ウルトラ・ナショナリズムとナショナリズムを区別できないという欠点があると言われる(松本健一『日本のナショナリズム』ちくま新書 など)。
- 谷沢永一は以下のような批判を行った。日本ファシズムの概念規定が『増補版 現代政治の思想と行動』のどこにもでてこないこと。同書において、日本国民を二分し、第一類型には工場主や自作農、学校教員など、第二類型には都市における文化人やジャーナリスト、学生層などと規定したこと。日本社会の中堅層である前者に対し、日本にファシズム運動があったか否かの検証もないままファシズムの社会的基盤であると断定し、かつ疑似インテリゲンチャもしくは亜インテリゲンチャと呼んで軽蔑していること。上記の理由から丸山眞男を差別意識の権化とした[59]。
- 水谷三公は、かつての弟子として、学者としての丸山を尊敬しつつも、その政治的言説がアメリカを批判して北朝鮮やソ連に傾くものだったとし「外交オンチ」、「政治的蓄膿症」と言われても仕方がないと結論づけた[60]。
丸山思想史学への批判
- ゼミ生ではないが、親炙に浴していた 橋川文三は、丸山に影響を受けながら、論文「昭和超国家主義の諸相」にて、丸山超国家主義論に批判を加えた[61]。
- 藤田省三は当初から丸山に批判的だった弟子の一人で、『天皇制国家の支配原理』などを著した。
- 弟子の渡辺浩は東アジア王権論という視点から日本政治思想史を書き換えることを試みている。
- 子安宣邦は『事件としての「徂徠学」』で丸山徂徠論を言説論の視点から批判、別著『日本近代思想批判』で古層論(「歴史意識の『古層』」、「開国」)が江戸時代暗黒観・明治維新礼賛になってしまい、近代批判を失ったと批判した。同様に安丸良夫は『現代日本思想論』、末木文美士は『日本宗教史』など、苅部直は『「維新革命」への道』で「古層」論を批判している。
- 1990年代後半以降には、姜尚中、米谷匡史あるいは酒井直樹等のようなポストコロニアリズムの立場から、「国民主義」やナショナリストとしての一面を批判されている[62]。一方でこのような見方に対して、斎藤純一、葛西弘隆等は日本思想史研究の立場から、確かに丸山は1950年代頃までの論考で明治期の日本国のナショナリズムを肯定的に評価する面があったが、それ以降においては多元主義あるいは市民社会をより重視するようになっていたとする指摘がある[63]。
- 『日本政治思想史研究』に対しては、「自然」「作為」概念の無理な適用など近世思想史の解釈が恣意的との批判がある。加地伸行は、中国思想史研究の立場で漢籍読解の稚拙さを指摘している[64]。
- 梅原猛は、思想的伝統が日本には形成されなかったと定義する丸山に対し、『法華経』などの古典を読まず、また、日本の美術、文学、風俗を調査せずにその様な断定を行うのは許しがたいと批判した[65]。
スキャンダル
- 大塚久雄が、梶山力と共訳だったマックス・ヴェーバー 『プロテスタンティズムの倫理と資本主義の精神』を、のちに大塚の単独訳にしたことを、ヴェーバー研究者の安藤英治が批判し、梶山の単独訳版を改訂刊行しようとした。その際に丸山が圧力をかけてきたと、同じ研究者の羽入辰郎は批判している[66]。
- 志村五郎は、丸山の漢学や音楽に関する会話や著作を「一知半解」であることを記述をあげて指摘するほか、特に朝鮮戦争に関して丸山にとって都合が悪い史実(北朝鮮側から開戦)を40年以上にわたり「不可知論」で誤魔化し続けた事実を指摘し、そこに丸山のジャーナリスト的な資質の根本的な限界を見出した[67]。
著書
単著
- 『日本政治思想史研究』(東京大学出版会、1952年、改訂版1983年)
- 仏訳 : Essais sur l’histoire de la pensée politique au Japon, trad. par Jacques Joly (Les Belles Lettres, 2018)
- 英訳:Studies in the Intellectual History of Tokugawa Japan, trans. by Mikiso Hane, (University of Tokyo Press, 1989)
- 『政治の世界』(御茶の水書房、1952年)
- 『現代政治の思想と行動』(未來社 〈上・下〉 1956-57年、増補版 全1巻、1964年、新装版2006年)
- 英訳:Thought and Behaviour in Modern Japanese Politics, edited by Ivan Morris (Oxford University Press, 1963)
- 『日本の思想』(岩波新書 青版、1961年、改版2018年)
- 「「である」ことと「する」こと」を含む論考集
- 『戦中と戦後の間 1936-1957』(みすず書房、1976年、新装版2018年)。大佛次郎賞受賞
- 『後衛の位置から――追補「現代政治の思想と行動」』(未來社、1982年)
- 『「文明論之概略」を読む』(岩波新書 黄版(上中下)、1986年)
- 『忠誠と反逆――転形期日本の精神史的位相』(筑摩書房、1992年/ちくま学芸文庫、1998年、川崎修解説)
- 『丸山眞男 戦中備忘録』(日本図書センター、1997年)
- 『自己内対話――3冊のノートから』(みすず書房、1998年)
- 『福沢諭吉の哲学 他六篇』(松沢弘陽編、岩波文庫、2001年)
- 『丸山眞男セレクション』(杉田敦編、平凡社ライブラリー、2010年)
- 『政治の世界 他十篇』(松本礼二編・注、岩波文庫、2014年)
- 『超国家主義の論理と心理 他八篇』(古矢旬編・注、岩波文庫、2015年)
集成
- 『丸山眞男集』(全16巻別巻1、岩波書店、1995~1997年)、度々再刊。※別巻(増訂新版)、2015年
- 『丸山眞男講義録』(全7巻、東京大学出版会、1998~2000年)
- 『丸山眞男書簡集』(全5巻、みすず書房、2003~2004年)
- 『丸山眞男話文集』(全4巻、みすず書房、2008~2009年)、「丸山眞男手帖の会」編
- 『丸山眞男話文集 続』(全4巻、みすず書房、2014~2015年)、「丸山眞男手帖の会」編
- 『丸山眞男集 別集』(全5巻、岩波書店、2014年12月~2024年8月[68])
- 東京女子大学「丸山眞男文庫」編、近年新たに発見された論考・随想などを集成
- 『丸山眞男講義録 別冊(一・二)』(東京大学出版会、2017年)
共著
- (加藤周一)『翻訳と日本の近代』(岩波新書、1998年)
- 『丸山眞男座談』(全9巻、岩波書店、1998年)
- (古在由重)『暗き時代の抵抗者たち-対談古在由重・丸山眞男』(太田哲男編、同時代社、2001年)
- (古在由重)『一哲学徒の苦難の道-丸山眞男対話篇 1』(岩波現代文庫、2002年)
- (梅本克己・佐藤昇)『現代日本の革新思想-丸山眞男対話篇 2・3』〈上・下〉(岩波現代文庫、2002年)
- (鶴見俊輔・北沢恒彦・塩沢由典)『自由について 七つの問答』(編集グループSURE、2006年)
- 『丸山眞男回顧談』〈上・下〉(松沢弘陽・植手通有・平石直昭編、岩波書店、2006年/岩波現代文庫、2016年7・8月)
- 『丸山眞男座談セレクション』〈上・下〉(平石直昭編、岩波現代文庫、2014年11・12月)
編著・訳書
- 『日本のナショナリズム』(日本近代史叢書1:河出書房、1953年)
- G.H.セイバイン『西洋政治思想史〈Ⅰ〉』(岩波現代叢書、1953年)
- 『反動の思想 岩波講座 現代思想 第5巻』(岩波書店、1957年)
- 『人間と政治』(有斐閣、1961年)
- 『歴史思想集 日本の思想6』(筑摩書房、1972年)
共編著
- (中村哲・辻清明)『政治学事典』(平凡社、1960年)
- (福田歓一)『南原繁著作集』(全10巻、岩波書店、1972~73年)
- (福田歓一)『回想の南原繁』(岩波書店、1975年)
- (福田歓一)『聞き書 南原繁回顧録』(東京大学出版会、1989年)
- (加藤周一と共校注)『日本近代思想大系15 翻訳の思想』(岩波書店、1991年)
その他
- 脇圭平・芦津丈夫 『フルトヴェングラー』(岩波新書、1984年/岩波書店、1994年)
- 第3章に、丸山と脇・芦津との鼎談「フルトヴェングラーをめぐって――音楽・人間・精神の位相」[69]を収録。
- 埴谷雄高 『幻視者宣言』(三一書房、1994年)
- 長年にわたり埴谷との交友があり、多くの映画・音楽・文学論を語り合った対話も収録。
門下生
脚注
- ^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丸山眞男』 - コトバンク
- ^ 大隅和雄「シンポジウム「丸山思想史学の地平」について」『日本思想史学』第32巻、日本思想史学会、2000年9月、1-2頁。
- ^ 『丸山眞男集 別巻』岩波書店、1997年3月13日、35頁。
- ^ 『戦中と戦後の間』所収、みすず書房
- ^ “「知の巨人たち」 第3回 民主主義を求めて~政治学者 丸山眞男~(2014年7月19日放送)”. NHK. 2019年7月8日閲覧。
- ^ 苅部直『丸山眞男――リベラリストの肖像』岩波新書、略年譜1頁。
- ^ 苅部直『丸山眞男』岩波新書、107頁。
- ^ 苅部直『丸山眞男』岩波新書、108頁。
- ^ 『丸山眞男集 別巻』前掲書、45頁。
- ^ 苅部直『丸山眞男』岩波新書、111頁。
- ^ 苅部直『丸山眞男』岩波新書、112頁。
- ^ a b 遠藤興一「病床における丸山眞男─その生と死のはざまで」明治学院大学社会学・社会福祉学研究151、2019年、p115-124.
- ^ 苅部直『丸山眞男――リベラリストの肖像』岩波新書、107-108頁、111-112頁。
- ^ 小熊英二『〈民主〉と〈愛国〉 戦後日本のナショナリズムと公共性』新曜社、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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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丸山真男『出身県別 現代人物事典 西日本版』p1007 サン・データ・システム 1980年
- ^ 『丸山眞男集 別巻』前掲書、70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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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弔辞は木下順二が読んだ(文藝春秋編『弔辞 劇的な人生を送る言葉』文春新書2011年pp.97-102所収)。
- ^ a b c d e f g 第1章 流動性と多様性 ─ 丸山眞男の家族 立命館大学図書館 第4回加藤周一現代思想研究センター・丸山眞男記念比較思想研究センター共同企画展示『知識人の自己形成 ─ 丸山眞男・加藤周一の出生から敗戦まで』(デジタル版) 第1部 家族 より
- ^ 小山磐『人事興信録』第8版、昭和3(1928)年
- ^ 結婚東京女子大学
- ^ ヘーゲル『歴史哲学』など
- ^ フランツ・ボルケナウ『封建的世界像から近代的世界像へ』みすず書房
- ^ または、「成る」 - 「為す」。これらは、丸山が、テンニースのゲマインシャフトとゲゼルシャフトの対概念にヒントを得たもの。
- ^ 元は1958年10月「岩波文化講演会」で、改稿し『毎日新聞』1959年1月9日-12日に掲載。これは『日本政治思想史研究』で論述した「自然」-「作為」の概念を平易に記述したものともいえる。「権利の上に眠る者」というキーワードを理解し、「である」ことと「する」ことといった、近代社会における「権利」や「自由」について考え、二項対立の思考形式による論理展開[要出典]を学びとることが求められている。平成20年度改訂版 東京書籍「現代文1」(現文031) 高校1年2学期(12月)
- ^ J.J.オリガス「発見、再発見」、「みすず」編集部編、『丸山眞男の世界』、p. 58
- ^ 世界大百科事典 第2版 コトバンク (2018年7月4日閲覧)
- ^ 小説『赤頭巾ちゃん気をつけて』で主人公が憧れる思想家は丸山をモデルにしていると言われる。
- ^ 通産審議官を務め、司馬遼太郎の小説『坂の上の雲』をもじった「坂の下の沼」の「町人国家論」などの言説で知られる。
- ^ a b c 西崎 2018, pp. 41–42.
- ^ 死後公表された『自己内対語』(みすず書房)による。
- ^ 参考文献;丸山真男/福田歓一編『聞き書 南原繁回想録』、東京大学出版会、272頁、269頁。南原繁「日中国交回復の道」『世界』1958年10月号。南原繁/郭沫若「十八年ぶりの日本」『中央公論』1956年2月号。
- ^ 高田里恵子 『学歴・階級・軍隊』 中央公論新社 2008年
- ^ 『思想の科学』1949年10月号 高田里恵子 『学歴・階級・軍隊』中央公論新社 2008年
- ^ 『マックス・ウェーバーの例会にて』高田里恵子 『学歴・階級・軍隊』 中央公論新社 2008年
- ^ 竹内洋. “左翼キャスター・コメンテーター 進歩的文化人の後裔は限りなく軽い”. ironna(産経新聞). オリジナルの2016年12月20日時点におけるアーカイ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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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小熊英二 『〈民主〉と〈愛国〉 戦後日本のナショナリズムと公共性』 (新曜社、2002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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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 b 竹内 2012, p. 330.
- ^ 丸山真男集別巻 年譜・著作目録(岩波書店)
- ^ 英,伊:dilettante、好事家。学者や専門家よりも気楽に素人として興味を持つ者
- ^ 単なる趣味という次元を超えたのめりこみ振りは、大学で丸山に師事してケンウッド役員も務めた音楽仲間の中野雄『丸山眞男 音楽の対話』(文春新書)に詳述されている。
- ^ 中野 1999, p. 13-19.
- ^ 中野 1999, p. 3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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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竹内洋『丸山眞男の時代』中公新書、213-215頁
- ^ 吉本隆明『柳田国男論・丸山真男論』、新版 ちくま学芸文庫。吉本ほか『批評とは何か/丸山真男について』吉本隆明研究会編集/吉本隆明が語る戦後55年.12、三交社
- ^ 竹内洋『丸山眞男の時代』『革新幻想の戦後史』、絓秀実『革命的な、あまりに革命的な』など
- ^ 谷沢永一『悪魔の思想―「進歩的文化人」という名の国賊12人』クレスト社、1996年2月。のちPHP文庫、ワックで改題再刊
- ^ 水谷三公『丸山真男』ちくま新書
- ^ 『橋川文三著作集 5』(筑摩書房新版全10巻)より
- ^ 情況出版編集部編『丸山真男を読む』(情況出版、1997年)
- ^ 斎藤純一「丸山眞男における多元化のエートス」(『思想』第883号、1998年1月)、のち『政治と複数性』収録、葛西弘隆「ナショナル・デモクラシーと主体性」(『思想』第896 号、1999年2月)
- ^ 加地伸行「丸山真男について」『日本思想史研究 中国思想展開の考察』研文出版〈加地伸行著作集 2〉、2015年。ISBN 9784876364022。元は「丸山真男―進歩的文化人の大いなる誤読 中国古典学知らず」-『この思想家のどこを読むのか 福沢諭吉から丸山真男まで』洋泉社新書y、2001年。他に「丸山真男の「漢文の理解」」- 加地伸行『〈教養〉は死んだか 日本人の古典・道徳・宗教』PHP新書、2001年。
- ^ 梅原猛『美と宗教の発見』(筑摩書房、1969年、新版・ちくま学芸文庫)
- ^ 羽入辰郎『学問とは何か』、ミネルヴァ書房
- ^ 志村五郎『「丸山眞男という人」、鳥のように』筑摩書房、2010年。ISBN 978-4-480-86071-2。
- ^ 4巻目(2018年6月に刊)と、5巻目は研究討議「正統と異端(一・二)」中田喜万、河野有理解説
- ^ 1983年1月に山の上ホテルで行った。『丸山眞男座談9』に再録。
参考文献
- 苅部直 『丸山真男 リベラリストの肖像』岩波新書
- 竹内洋 『丸山真男の時代 大学・知識人・ジャーナリズム』中公新書
- 水谷三公 『丸山真男 ある時代の肖像』ちくま新書
- 中野雄『丸山眞男 音楽の対話』文春新書、1999年1月。
- 『現代思想 特集丸山真男』1994年1月号、青土社
- 吉本隆明 『柳田国男論・丸山真男論』 ちくま学芸文庫
- 伊藤隆『昭和期の政治』、『続 昭和期の政治』山川出版社
- 筒井清忠 『昭和期日本の構造』講談社学術文庫
- 中村菊男 『天皇制ファシズム論』原書房
- 小熊英二 『〈民主〉と〈愛国〉 戦後日本のナショナリズムと公共性』新曜社
- 竹内, 洋『メディアと知識人-清水幾太郎の覇権と忘却』中央公論新社、2012年。ISBN 978-4120044052。
- 『証言集 関東大震災の直後 朝鮮人と日本人』西崎雅夫編、筑摩書房〈ちくま文庫〉、2018年8月。ISBN 978-4-480-43536-1。
関連文献
- ※丸山論は没後に、約100冊以上出版されている。
- 長谷川宏 『丸山真男をどう読むか』講談社現代新書、2001年
- 間宮陽介 『丸山真男―日本近代における公と私』筑摩書房、新版・ちくま学芸文庫/改題「丸山真男を読む」岩波現代文庫、2014年
- 松本健一 『丸山真男 八・一五革命伝説』河出書房新社 2003年/増訂版「伝説シリーズ6」 辺境社、2008年
- 田中久文 『丸山真男を読みなおす』講談社選書メチエ、2009年
- 伊東祐吏 『丸山真男の敗北』講談社選書メチエ、2016年
- 橋爪大三郎 『丸山真男の憂鬱』講談社選書メチエ、2017年
- 遠山敦 『丸山真男―理念への信 再発見日本の哲学』講談社、2010年
- 中野雄 『丸山真男 人生の対話』文春新書、2010年、※上記(参考文献)の姉妹篇。
- 板垣哲夫 『丸山真男の思想史学』吉川弘文館〈歴史文化ライブラリー〉、2003年、オンデマンド版2018年
- 池田信夫 『丸山眞男と戦後日本の国体』白水社、2018年
- 鷲巣力・山辺春彦 『丸山眞男と加藤周一 知識人の自己形成』筑摩選書、2023年
- 『丸山真男没後10年、民主主義の〈神話〉を超えて』河出書房新社〈KAWADE道の手帖〉、2006年
- 『現代思想 総特集 丸山真男生誕一〇〇年』青土社、2014年7月
- 「みすず」編集部編 『丸山真男の世界』みすず書房、※追悼文集
- 大隅和雄・平石直昭編 『思想史家丸山真男論』ぺりかん社
- 『植手通有集3 丸山真男研究 その学問と時代』あっぷる出版社、2015年
- 宮村治雄 『丸山真男「日本の思想」精読』 岩波現代文庫
- 宮村治雄 『戦後精神の政治学 丸山真男・藤田省三・萩原延壽』 岩波書店
- 松本礼二『知識人の時代と丸山眞男 比較20世紀思想史の試み』岩波書店、2019年
- 笹倉秀夫 『丸山真男の思想世界』 みすず書房
- 飯田泰三 『戦後精神の光芒 丸山真男と藤田省三を読むために』 みすず書房
- 石田雄 『丸山真男との対話』 みすず書房
- 石田雄・姜尚中 『丸山真男と市民社会』〈転換期の焦点5〉世織書房
- 加藤周一・日高六郎 『同時代人丸山真男を語る』〈転換期の焦点6〉世織書房、※2冊とも対談のブックレット
- 福田歓一 『丸山真男とその時代』 岩波書店〈岩波ブックレット522〉。小冊子
- 都築勉 『戦後日本の知識人 丸山真男とその時代』 世織書房
- 都築勉 『丸山真男への道案内』 吉田書店
- 都築勉 『丸山真男、その人 歴史認識と政治思想』 世織書房
- 山崎正純 『丸山真男と文学の光景』 洋々社
- 入谷敏男 『丸山真男の世界』 近代文芸社
- 仲正昌樹 『丸山真男と吉本隆明 〈戦後思想〉入門講義』作品社、2017年
- 佐藤瑠威 『丸山真男とカール・レーヴィット 近代精神と批判精神をめぐって』日本経済評論社
- 植村和秀 『丸山真男と平泉澄 昭和期日本の政治主義』〈パルマケイア叢書19〉柏書房
- 田中浩 『日本リベラリズムの系譜 福沢諭吉・長谷川如是閑・丸山真男』 朝日新聞出版〈朝日選書〉
- 平石直昭 『福澤諭吉と丸山眞男 近現代日本の思想的原点』北海道大学出版会、2021年
- 中野敏男 『大塚久雄と丸山真男 動員、主体、戦争責任』 青土社、新装版刊
- 渡部純 『現代日本政治研究と丸山真男 制度化する政治学の未来のために』勁草書房
- 情況出版編集部編 『丸山真男を読む』 情況出版
- 小林正弥編『丸山真男論 主体的作為、ファシズム、市民社会』〈公共哲学叢書2〉東京大学出版会
- 今井弘道 『三木清と丸山真男の間』風行社
- 今井弘道 『丸山真男研究序説 「弁証法的な全体主義」から「八・一五革命説」へ』風行社
- 富田宏治 『丸山真男 「近代主義」の射程』関西学院大学出版会
- 田口富久治 『丸山真男とマルクスのはざまで』日本経済評論社
- 安川寿之輔 『福沢諭吉と丸山真男 「丸山諭吉」神話を解体する』 高文研
- 小幡清剛 『丸山真男と清水幾太郎 自然・作為・逆説の政治哲学』 萌書房
- 中島誠 『司馬遼太郎と丸山真男』 現代書館
- 北沢方邦 『感性としての日本思想 ひとつの丸山真男批判』藤原書店
- 今井伸英 『丸山真男と戸坂潤 護憲の論理と丸山政治学の陥穽』論創社
- アンドリュー・E・バーシェイ 『近代日本の社会科学 丸山真男と宇野弘蔵の射程』 山田鋭夫訳、NTT出版
- 小田村寅二郎『昭和史に刻むわれらが道統』日本教文社。同期生による批判論考
- 小田村寅二郎「丸山真男氏の思想と学問の系譜」-『学問・人生・祖国―小田村寅二郎選集』国民文化研究会
映像
- NHKエンタープライズ編 『ビデオ 丸山眞男と戦後日本』(2巻組:みすず書房、1997年)
外部リンク
- 東京女子大学図書館 - 丸山の自宅近くに在り、東京女子大学の教員とも親交があったことから、丸山が遺した図書資料類や各種草稿資料類が寄贈され、「丸山眞男記念文庫」として収蔵公開されている。同校は「丸山眞男記念比較思想研究センター」を創設し、丸山の弟子筋にあたる日本政治思想史研究者による公開講座や読書会を常時行っている。
- 丸山眞男没後資料目録 - 詳細な資料書誌だが、2000年までの資料が掲載されている。
Masao Maruyama (scholar)
Masao Maruyama | |
|---|---|
| Born | 22 March 1914 Osaka, Japan |
| Died | 15 August 1996 (aged 82) Tokyo, Japan |
| Alma mater | Tokyo Imperial University |
| Occupations |
|
| Years active | 1950–1971 (as prof.)[1] |
| Parent | Kanji Maruyama[1] |
Masao Maruyama (丸山 眞男, Maruyama Masao; 22 March 1914 – 15 August 1996) was a leading Japanese political scientist and political theorist. His expertise lay in the history of Japanese political thought, to which he made major contributions.
Early life
Maruyama Masao was born in Osaka in 1914.[2] He was the second son of journalist Maruyama Kanji. He was influenced by friends of his father such as Hasegawa Nyozekan, a circle of people identified with the liberal current of political thought during the period of Taishō democracy. After graduating from Tokyo Furitsu Number One Middle School (currently known as Tokyo Municipal Hibiya High School), he entered the Tokyo Imperial University and graduated from the Faculty of Law in 1937. His thesis "The Concept of the Nation-state in Political Science" earned a Distinguished Thesis Award, and Maruyama was appointed assistant in the same department.
Originally he had wanted to specialize in European political thought, but changed his focus to concentrate on Japanese political thought, a subject that until that time mainly centered around the concept of an imperial state, and was influenced by a foundational ordinance that required subjects to be taught "in accordance with the needs of the state."[3] Maruyama brought to the discipline a theoretical perspective grounded in extensive comparativism. The person who originally recommended this path to him was his mentor, Professor Shigeru Nambara, who was highly critical of military and bureaucratic obstructions to the growth of a constitutionally defined "national community."[4] An expert in European political thought, Nambara steered the young Maruyama into working on these topics.
In March 1945, Maruyama was drafted and stationed in the Army at Hiroshima. After experiencing the atomic blast at Hiroshima and seeing out the end of the war there, he returned to his post at the university in September. He caught tuberculosis at the time, and after an operation, spent the rest of his life on one lung.
Rise to fame
Maruyama first attracted attention from the scholarly community immediately following the war with his famous essay on wartime Japanese fascism, "The Logic and Psychology of Ultranationalism," first published in the widely-read journal Sekai in 1946.[5] In particular, Maruyama deemed the prewar imperial system a "system of irresponsibility." Maruyama continued to write about wartime and contemporary Japanese politics in the late 1940s and early 1950s, until he was forced to take a break from scholarly activities due to his being in and out of hospitals with illnesses in the mid-1950s.[5] He returned to his research in the late 1950s, but ceased writing about recent politics and focused his attention on excavating the political thought of the Edo and Meiji periods.[5] It was not until the late 1950s that Maruyama's earlier essays were anthologized and republished for the first time, bringing him fame and acclaim from a much broader cross-section of the Japanese general public.[5]
Role in protest movements
Maruyama became involved in the Anpo Protests against revision of the US-Japan Security Treaty at an early stage, in 1959, and became involved in a variety of protest activities and publishing anti-treaty statements.[5] Shortly after the shocking ramming of the Treaty through the Diet by Prime Minister Nobusuke Kishi on 19 May 1960, Maruyama emerged as one of the main faces of the anti-Treaty movement. On 24 May, he gave a dramatic speech "Time for a Choice" (Sentaku no toki) to an over-capacity crowd at a hall in central Tokyo. Maruyama argued that Japan was about to choose between democracy and dictatorship. He also argued that due to Kishi's outrageous actions, ordinary Japanese people needed to support the anti-Treaty protests in order to protect democracy, even if they did not mind the Treaty itself.[6]
However, Maruyama later came to regret his starring role in the 1960 crisis. In the aftermath of the protests, Maruyama was attacked by opponents on both the right and the left. From the right, he was attacked as a supporter of communists and socialists, and from the left, he was accused of being a supporter of a very narrow vision of "bourgeois" democracy that only supported the interest of the ruling capitalist classes.[7] Maruyama was most strongly attacked by fellow leftist intellectual Yoshimoto Takaaki, who had a large following among New Left student radicals.[8] During the university protests in the late 1960s Maruyama was strongly denounced by the students front as a symbol of "self-deceiving" postwar democracy. Maruyama in turn criticized this new student movement, especially after he was subjected to intense harassment and his personal office at the University of Tokyo was ransacked by occupying students in 1969.[9] Around this time, Maruyama angrily confronted the students, Maruyama telling them, "Even the fascists didn't do what you are trying to do!"[10] This kind of episode, combined with his own ailing health, forced him to retire in 1971.[9] He was however appointed professor emeritus at the same university in 1974.
Later life
Though Maruyama suffered from poor health especially in his later life, he continued studying and writing until he died in Tokyo on 15 August 1996.[2] The major work of his retirement years was a three-volume commentary on Fukuzawa Yukichi's principal work Bunmeiron no Gairyaku, based on a lengthy seminar he conducted with a small working group. This was published in 1986, as Reading 'An Outline of a Theory of Civilisation', (「文明論之概略」を読む) by Iwanami Shoten. Besides, he contributed several more noteworthy as well as controversial works on Japanese culture or the process of translation in modern Japan. Most noteworthy is his concept of basso ostinato. Maruyama referred to this musicological concept to capture a socio-historically substratum underlying human thought. Although basso ostinato is in constant flux, it is experienced by people as a relatively stable intellectual framework through which people give meaning to life.[11]
See also
Honors
- Order of the Sacred Treasure, Gold Rays with Neck Ribbon, 1976.[12]
- Association for Asian Studies (AAS), 1993 Award for Distinguished Contributions to Asian Studies[13]
Representative works in English
- 1963 -- Thought and Behaviour in Modern Japanese Politics.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ISBN 978-1-59740-083-1 (cloth) {reprinted by Columbia University Press, New York, 1995. ISBN 978-0-231-10141-7 (paper)
- 1974 -- Studies in the Intellectual History of Tokugawa Japan. Translated by Mikiso Hane.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ISBN 978-0-691-07566-2 (cloth) ISBN 978-0-691-00832-5 (paper)
Notes
- Nakajima, Makoto (16 September 2016). 日本大百科全書(ニッポニカ)の解説 [The Nihon Dai Hyakka Zensho: Nipponica 's explanation]. Kotobank (in Japanese). Retrieved 7 December 2021.
- James Kirkup (23 August 1996). "Obituary: Masao Maruyama". The Independent. Retrieved 8 September 2013.
- Andrew E. Barshay, State and Intellectual in Imperial Japan: The Public Man in Crisis, California University Press, Berkeley, Los Angeles, London 1988 p. 39
- Barshay, op. cit. pp. 104–108
- Kapur, Nick (2018).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p. 163. ISBN 9780674988484.
- Kapur, Nick (2018).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pp. 164–66. ISBN 9780674988484.
- Kapur, Nick (2018).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p. 166. ISBN 9780674988484.
- Kapur, Nick (2018).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pp. 166–7. ISBN 9780674988484.
- Kapur, Nick (2018).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p. 167. ISBN 9780674988484.
- Karube, Tadashi (2008). Maruyama Masao and the Fate of Liberalism in Twentieth-Century Japan. Tokyo: International House of Japan. p. 168. ISBN 978492497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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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Harmattan web site (in French)
- Association for Asian Studies (AAS), 1993 Award for Distinguished Contributions to Asian Studies Archived 17 May 2008 at the Wayback Machine; retrieved 2011-05-31
External links
- Maruyama Masao entry at the International Dictionary of Intellectual Historians Archived 13 June 2007 at the Wayback Machine
Further reading
- Barshay, Andrew E. "Imaging Democracy in Postwar Japan: Reflections on Maruyama Masao and Modernism." Journal of Japanese Studies 18, no. 2 (1992): 365–406.
- Kapur, Nick (2018).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ISBN 978-0-6749-8442-4.
- Karube, Tadashi (2008). Maruyama Masao and the Fate of Liberalism in Twentieth-Century Japan. Tokyo: International House of Japan. ISBN 978-4924971240.
- Rösch, Felix; Watanabe, Atsuko (2017). "Approaching the unsynthesizable in international politics: Giving substance to security discourses throughbasso ostinato?". European Journal of International Relations. 23 (3): 609–629. doi:10.1177/1354066116656764. S2CID 148067564.[permanent dead link]
- Sasaki Fumiko. Nationalism, Political Realism and Democracy in Japan: The Thought of Maruyama Masao. London: Routledge, 2012.
- Takeshi Morisato. "The Problem of Japanese Modernity." Genealogies of Modernity (2021). https://genealogiesofmodernity.org/journal.
- _____. "Japan and the Octopus Trap of Modernity." Genealogies of Modernity (2021). https://genealogiesofmodernity.org/journal.
- _____. "Breaking Out of the Octopus Trap of Modernity." Genealogies of Modernity (2021). https://genealogiesofmodernity.org/journal.
- 1914 births
- 1996 deaths
- University of Tokyo alumni
- Academic staff of the University of Tokyo
- Historians of Japan
- Imperial Japanese Army personnel of World War II
- Japanese social liberals
- Japanese political scientists
- Liberalism in Japan
- Hibakusha
- Recipients of the Order of the Sacred Treasure
- 20th-century Japanese historians
- 20th-century political scientists
- Academics from Osa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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