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문제에 관한 현실주의…서경식과 화해하기 힘든 심연
등록 :2016-03-25 20:10수정 :2016-03-27 20:00
[토요판] 특집
와다 교수 답신의 배경
와다 교수 답신의 배경
“왜 반동의 물결에 발을 담그십니까”라는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의 장문의 공개서한이 보도된 지 이틀 만인 지난 14일. 휴대전화에 익숙한 번호의 전화가 한 통 걸려와 있었다. 서한에서 혹독한 비판을 당한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였다. 그는 반론을 위한 지면을 내주길 요구했고, <한겨레>는 이를 받아들였다.
반론문을 번역하며 와다 명예교수와 서 교수 사이엔 도무지 화해하기 힘든 심연과 같은 차이가 있음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이는 둘 사이에 존재하는 두 가지 결정적인 차이에 기인하는 것이다. 하나는 가해자인 일본인과 피해자인 재일조선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 또 하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을 바라보는 와다의 현실주의와 서경식의 이상주의 사이의 갈등이다.
그래서 와다 명예교수가 1995년 아시아 여성기금을 만들 당시의 절박한 정치 상황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정부 간 12·28 합의를 “백지철회시킬 동력이 일본엔 없다”는 현실적 어려움을 토로할 때, 서 교수는 지나치게 현실 타협적으로 보이는 와다 교수에게 당신의 태도는 “너무나 애매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위안부 문제는 일본 국가가 저지른 국가 범죄이다. 그래서 이를 인정하지 않는 12·28 합의를 백지화해야 한다’는 서 교수에게 와다 명예교수는 “이번 12·28 합의를 (받아들이고) 개조·개선하는 것”이 “지금까지 운동을 해온 사람의 책임”이라고 맞선다. 어쩌면 이 논쟁은 1990대 이후 일본 리버럴 세력 안에서 발생한 가장 뼈아픈 ‘균열’을 상징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시아여성기금 만들던 1995년
절박한 정치상황 토로하는 와다
이 논쟁은 일본 리버럴 세력 내
가장 뼈아픈 균열을 상징하는 듯
박유하 교수에 관한 견해는 거절
2015년 이후 어느 정도 거리 둬와
박 교수의 형사기소에 대한
지식인 성명에도 이름 안 올려
그리고 박유하 문제. 한국에서는 물론, 일본 진보 진영 안에서도 전후 일본 리버럴들의 ‘지적 타락’을 가장 웅변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로 박유하 세종대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일본 지식인 사회의 지지를 꼽는 목소리가 있다. <한겨레>는 와다 명예교수에게 이번 반론문에서 박 교수와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입장도 서술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서씨와 이 문제(박 교수 문제)로 논의할 기분이 아니다”며 응하지 않았다. 와다 명예교수는 2014년 5월 박 교수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제3의 길’ 등을 주제로 한 심포지엄을 함께 연 적도 있다.
그러나 2015년 이후 와다 명예교수는 박 교수나 <제국의 위안부>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둬 왔다고 판단한다. 그는 지난해 5월 펴낸 신서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에서 “모집된 조선인 여성들에게 그런(자신이 제국의 위안부라는) 의식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라며 박 교수의 견해를 비판한 데 이어, 지난해 11월 와카미야 요시부미 <아사히신문> 전 주필이 주도한 박 교수의 형사기소에 대한 일본 지식인들의 항의 성명에도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당시 와다 선생은 <한겨레>와 한 전화 통화에서 자신이 성명에 참가하지 않은 이유로 △지금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최종적인 국면이다(박 교수 논란이 오히려 문제 해결에 방해가 된다는 의미. 역시 현실주의자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박 교수의 주장에 대해선 조금 더 검토가 필요하다 △양쪽이 대화를 통해 문제를 원만히 풀길 바란다는 점 등을 열거한 바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당시 대화 내용을 기사로 쓰겠다는 의견을 전했는데, 이와 관련해 딱히 반대 의견이 없었다. 박 교수에게 동의하진 않지만, 적극적으로 앞에 나서 비판할 마음도 없다는 입장인 것으로 이해한다.
도쿄/길윤형 특파원
절박한 정치상황 토로하는 와다
이 논쟁은 일본 리버럴 세력 내
가장 뼈아픈 균열을 상징하는 듯
2015년 이후 어느 정도 거리 둬와
박 교수의 형사기소에 대한
지식인 성명에도 이름 안 올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