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5-08

1604 [제국의 위안부]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제국의 위안부]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제국의 위안부]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최근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토론회에서 일본 지식인 사회가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그동안 논의의 초점이 ‘표현의 자유’ 문제로 이동하면서 정작 논란을 일으킨 책의 내용이 뒷전으로 밀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2016년 04월 25일 (월) [449호]
도쿄·이령경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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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28일 오후 일본 도쿄 대학에서 열린 비공개 토론회에서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논의가 전개되었다. 토론회의 주제는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박유하씨의 논저와 그 평가를 소재로’였다. <제국의 위안부>에 비판적인 인사들은 그동안 ‘양심 세력으로 불리는 지식인들까지 <제국의 위안부>를 절찬하는 이유’를 고찰해왔다.

<제국의 위안부> 저자인 박유하 세종대 교수는 지난해 11월 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었다. 이에 따라 논의의 초점이 ‘표현의 자유’ 문제로 이동하면서 정작 ‘책의 내용’은 뒷전으로 밀리고 말았다. 이날 행사의 목적은 책의 내용에 이견을 가진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토론하는 것이었다.

<제국의 위안부> 옹호 진영은 주로 박유하 교수 기소에 항의하는 성명서(‘54인 항의 성명’)를 발표했던 일본의 지식인들이다. 옹호론 측의 첫 주자는 리쓰메이칸 대학의 니시 마사히코 교수였다. 그는 <제국의 위안부>를 정확하게 읽고 ‘건전’하게 비판한다면, ‘명예훼손’이라는 판단이 내려질 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니시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를 높이 평가한 이유로, 박유하 교수가 이 책을 통해 기존 ‘가해자(일본인) 대 피해자(한국인)’ 혹은 ‘협력자 대 저항자’라는 이항 대립(과 민족주의 담론)을 해체·극복하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제국의 위안부>에서 가장 논란을 일으킨 부분은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 병사를 구조적으로 “같은 일본인”이며 “동지적 관계”였다고 서술한 구절이다. 이 구절에 대해 니시 교수는 오히려 ‘피해자’였던 ‘위안부’들을 ‘협력자’였던 것처럼 포장해버린 ‘구조’를 논증해낸 것으로 해석했다. 이 같은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 ‘제국 일본’의 폭력성이 지닌 본질이라는 이야기다. 한편 조선인 ‘중간업자’ 부분 역시, ‘한국인-조선인은 어디까지나 피해자-저항자’라는, 이항 대립적 시각의 탈피를 요청하는 논증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니시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가 ‘기억의 무화(無化)와 망각’을 제기한 것도 높이 평가했다. 즉,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한동안 ‘위안부’라는 존재 자체가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무화) 잊혀졌다(망각)고 한다. <제국의 위안부>는 이런 현상 자체를 “국민으로서의 ‘바른 기억’만을 필요로 하는 ‘국가의 공모’였다”라고 주장했다(일어판 84쪽). 니시 교수는 이 부분이 바로 해방 후 ‘위안부’ 생존자들을 침묵시킨 ‘편견’이며, 그녀들을 ‘민족의 배반자’로 간주하고 그 ‘기억을 무화시키고 망각하는’ 방향으로 이끌었을지도 모를 전후 역사 전체를 비판 대상으로 하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자료 오독’이라는 결정적 결함부터 따져야

니시 교수의 이 같은 논지에 정면으로 반박한 논자는 정영환 메이지가쿠인 대학 교수였다. 정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 출간 이후 박유하 교수와 계속 논쟁을 벌여왔고, 최근엔 관련 도서를 출간하기도 했다. 정 교수에 따르면, <제국의 위안부>는 ‘위안부’와 일본 병사 간의 ‘동지 의식’ ‘동지적 관계’ 등을 논증하기 위해 피해자 증언이나 서적을 인용했다. 그러나 정작 인용된 ‘1차 자료(증언이나 서적)’들을 살펴보면, 박 교수의 주장(‘동지적 관계’)을 입증할 만한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박 교수가 주요 자료로 인용하는 센다 가코 씨의 저서 <종군위안부>에는 ‘조선인 ‘위안부’가 애국적 존재’라는 주장이 없다. 또한 박유하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 일어판 92쪽에서 일본 병사를 원망하지 않는 ‘위안부’가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근거’를 인용한다. 후루야마 고마오의 소설에서 어떤 ‘위안부’ 피해자가 “운이야. 위안부가 된 것도 운이지. 군인들이 총알 맞는 것도 운이고, 모두가 다 운”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영환 교수는 이렇게 말한 소설 속의 화자가 ‘위안부’가 아니라 일본인 병사라고 지적했다. 즉, 박 교수가 ‘위안부’와 일본인 병사 간에 ‘동지 의식’이 있었다고 전제하면서 소설을 읽었기 때문에, ‘모두가 다 운’이라는 목소리가 일본 병사의 시각이라는 것을 놓쳤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1차 자료들을 검증해봤을 때, 박유하 교수는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고 하지만, 사실은 ‘병사들의 목소리’와 일본 제국의 논리에 따라 증언을 재해석했을 뿐이라는 것이 정 교수의 지적이었다.

그렇다면 박유하 교수가 논증한 ‘위안부’ 피해자의 다양한 다른 목소리, 즉, ‘제국의 위안부’라는 이미지는 1차 자료에 의해 검증되고 논증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조선의 위안부들이 일본 병사와 동지적 관계에 있었다’는 그릇된 전제하에 자의적으로 자료를 잘라서 사용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박 교수가 주장하는 논지를 평가하기 이전에 자료 오독이라는 <제국의 위안부>의 결정적 결함부터 따져야 한다고 정영환 교수는 주장한다.

유사한 이야기가 비판론자 측에서 이어졌다. 오노자와 아카네 릿쿄 대학 교수는 공창 출신 일본인 ‘위안부’ 피해자와 매매춘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제국의 위안부>를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오노자와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 이전부터 조선인을 포함한 중간업자들의 개입이나 일본인 ‘위안부’ 피해자들에 관한 연구는 있었다고 말했다.

오노자와 교수에 따르면, <제국의 위안부> (일본어판 37~38쪽)는 모리사키 가즈에의 <가라유키상>이라는 책에서 가라유키상(외국으로 돈 벌러 가는 여성들을 가리킴)들의 자발성과 애국, 긍지를 유출해내고 있다. 그러나 박 교수가 인용한 부분의 맥락을 살펴보면, 정작 저자인 모리사키 씨는 그렇게 주장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박유하 교수는 우선 가라유키상(일본인 ‘위안부’)들에게서 애국과 긍지를 해석해냈다. 그리고 이런 잘못된 해석을 그대로 갖다 붙여, 조선인 ‘위안부’들로부터도 자발성, 애국, 동지적 관계 등을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당연히 잘못된 논증이다. 이 밖에도 여러 구체적 사례를 들어 문제를 제기한 오노자와 교수는 니시 교수에게 다음과 같이 반문했다. ‘다른 사람의 문헌이나 증언의 문맥을 무시하고 임의적으로 가져다 쓰는 것엔 문제가 크지 않은가?’

이에 대해 니시 교수는 ‘굉장히 중요한 지적으로 재판 문제 등이 해결되면 증보 개정판을 낼 때 가능한 한 수정하도록 조언할 생각’이라며 이해를 구했다. 그러나 니시 교수는 박유하 교수의 책을 발판으로 새로운 연구가 시작되고 있다고 답변했다. 그는 또한 정영환 교수의 발표에 대해 “상황을 <제국의 위안부> 출판 이전으로 되돌리려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박유하 교수의 지적은 한국이나 재일 한국·조선인들의 욕망을 상대화하려는 시도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니시 교수의 반박은 논점을 비켜난 것으로 보인다. 정영환·오노자와 교수의 비판은 <제국의 위안부>가 자료 및 증언과 반대의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판론자로 나선 김부자 도쿄 외대 교수, 요시미 요시아키 주오 대학 교수, ‘전국행동 공동대표’ 양징자씨도 같은 지점을 공격했다.

옹호론자들은 지금까지 ‘비판론자들이 <제국의 위안부>를 제대로 읽지 않았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번 토론회를 보면, 옹호론자들이 오히려 제대로 검증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옹호 측 논객인 우에노 치즈코 리쓰메이칸 대학 교수는 “고소 취하가 우선”이라며 “형사고소한 것은 한국의 사법부다”라고 발언했다. 이에 대해 양징자씨가 “고소는 피해자들이 한 것이고, 검찰 기소 전에 조정 과정을 통해 화해할 수 있었다. 검찰의 조정안을 거부한 것은 일본어판의 기술을 변경할 수 없었던 박유하 교수였다”라고 반박했다. 우에노 교수는 갑자기 “바빠서”라며 마이크를 넘기고 단상에서 물러났다. ‘내뺐다’라는 이야기가 나와도 별수 없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비판을 받아들여 반성을 표한 경우도 있었다. ‘54인 항의 성명’에 동참했던 모토하시 데쓰야 도쿄 경제대학 교수다. 그는 “박유하 교수의 책이 실증 연구 수준에서 많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상을 수상하며 공적으로 과대평가되었다”라고 인정했다. 또한 성명서에 대한 서명 철회를 밝혔다. “내가 동참한 성명에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다. 이 같은 점을 감안하면서, 나의 서명을 반성한다.” 생존 ‘위안부’ 피해자들이 어떤 심정으로 고소라는 수단까지 취하게 되었는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말도 남겼다. 다만 ‘민·형사 재판이 적절한 해결 방법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을 표시했다.

<아사히 신문> 관계자들도 이 논쟁을 지켜봤다. 이 때문에 적어도 <아사히 신문>은 <제국의 위안부>가 오독한 대목과 잘못 인용한 부분을 명확히 밝히고, 그 부분이 생존자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알릴 책임이 있다. 그랬을 때 옹호론자들이 우려하는 재판 건도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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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May 4 at 9:11am ·
급진의 보수화/정의의 악의

이 며칠 도를 넘어선 공격이 이어지고 있다.
뒤늦게 시사인 기사를 보았는데, 자료에도 없는 소리를 내가 지어낸 것처럼 쓰고 있어서 충격을 받았다.
와카미야 선생 사망 소식을 그 밤에 들었으니 내겐 최악의 날이었다.

비판자들은, 자신이 단 한사람을 향해 집단 공격에 참여중이라는 걸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재판 중이라는 것도 잊고 있을 것이다. 재판내용과 상관없는 비판마저 "박유하의 책은 문제있는 책"이라는 담론이 되어 재판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도.
물론 이 모든 것이 의식적으로 하는 일이라면 더 할 말은 없다.

정영환 비판조차 잘못 옮긴 것으로 보이는 이 "편집위원"은 알고보니 아직 박사과정 재학중인 학생이라고 한다. 아사히신문출판사에 정정을 요구하는 패기는 좋았지만, 그전에 배워야 할 것이 많아 보인다.

"제국의 변호인-박유하에게 묻다"는 책도 나왔다.
제목을 붙인 이는 페이스북에서도 나를 비난했던 손종업씨라는 걸 알았다. 그는 고발 직후에 내가 일본에 돈을 받은 것처럼 쓰고 금년 들어서는 나를 아이히만에까지 비교하며 비난했던 이다.
비판보다도, 제목의 함의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비평가"를 데려다 책을 만든 이들의 존재에 더 한숨이 나온다.
이미 여러번 말했지만 "제국의 위안부"란 "제국에 동원된 위안부"라는 뜻이다. 설사 주체적으로 보였거나 행동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의 책은, 내용의 오용에 이어, 이제 제목마저 오용되고 있는 중이다.

대중선동이 "비평"의 얼굴을 하고 세상에 나오는 시대가 되었다. 혹은 정의의 얼굴로.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정의와 악의는 고작 한 글자 차이다.

나뿐 아니라 나를 옹호해 온 이들에 대한 비판도 담았다니 사태는 이제 나만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일본에서 2007년부터 시작된 갈등이 10년후 한국에서 본격화된 양상.
그때와 다른 것은 그때는 비판자들이 극소수였지만 지금은 수십수백명이(그 뒤엔 수천명이) 한미일 연대망을 이용해 나 하나를 공격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물론 현실적패배감이 부추기는 일일 것이다.

< 제국의 위안부>는 지원단체와 일본의 일부 지원자를 비판한 책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응답"을 한번도 들은 적이 없다. 그들의 응답은, 10개월에 걸친 침묵끝의 고발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 학자들마저 본격적으로 지원단체에 발 맞추고 있다.
연구와 학문이 운동논리를 사유하지 못했던 건 사실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운동이든 이론이든, 지키는 것이 목적이 되면 보수화 될수밖에 없다.

급진의 보수화는 피해자로서의 마이너리티 의식이 만든다. 하지만 마이너리티가 온전히 정의일 수 있는 것은,그들이 적으로 간주한 이에게도 정의로울 수 있을 때다.

나를 두고, 한편에선 "제국의 변호인"(손정업)이라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제국에 대적해 온 "일본 리버럴(진보)의 비겁한 무기"(정영환)라고 한다. 이들에겐 내 책이 대단히 혼란스러운 것 같다.
혼란은 선입견이나 목적이 있었을 때 일어난다. 기존인식에 꿰어 맞추려 하는 한, 거기서 일탈하는 기술들은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다.

금년들어 이들의 공격이 강해진 건, 일본어판의 수상과, 오에겐자브로/우에노치즈코/고노&무라야마 등의 지식인 성명, 그리고 한일합의에 원인이 있는 듯 하다. (한국은 물론 일본판 위키페디아마저, 정영환을 비롯한 이들의 시각으로 채워져 있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국정원 댓글 사건이 내겐 남의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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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 Ki shared Park Yuha's post.
May 4 at 5:29pm ·

"‘피해자’였던 ‘위안부’들을 ‘협력자’였던 것처럼 포장해버린 ‘구조’를 논증해낸 것으로 해석했다. 이 같은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 ‘제국 일본’의 폭력성이 지닌 본질이라는 이야기다. 한편 조선인 ‘중간업자’ 부분 역시, ‘한국인-조선인은 어디까지나 피해자-저항자’라는, 이항 대립적 시각의 탈피를 요청하는 논증이라고 분석했다."
시사인의 기사를 보면 니시 교수가 논점을 제대로 제시했음에도 비판자들은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기 보다 '1차자료' 인용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거야말로 논점을 비켜간 것이다.
정영환의 주장대로 소설속 화자가 '일본인 병사'면 뭐가 달라지나? 점령지에서 무차별적으로 납치 강간하는 '적의 여자'와 자기를 '위안'해주는 '우리편 여자'를 구분하며 정당화하는 의식과 연민으로의 감정이입이 그냥 한 병사 개인의 망상이고 착각일 뿐일까.
이런 정당화 이데올로기를 병사와 위안부는 물론 그 시대의 본국-조선 식민지 모든 이들에게 '내면화'하고 강제했기 때문에 직접 총칼을 앞세우지 않고 식민지사회에서 크나큰 반발과 저항없이도 수많은 여성을 동원하여 희생시킬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민간인 업자를 내세워 일본군의 직접적 폭력성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감출 수 있었다는 게 '동지적 관계'라는 위딩의 요지 아닌가.
이와 관련하여 최근 장정일씨의 글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308&aid=0000018691
도 참조해볼 만하다.
직접적인 강제성과 폭력성으로 드러나고 인지되었다면 독립운동가들은 물론 당시의 왜 그 수많은 문학가들 마저 이것을 소재로 삼아 글 한편 쓰지 않고 비망록에 기록조차 하지 않았냐는 물음...해방이후로도 반세기동안이나 이 사회가 침묵했던 이유가 뭘까. 쥐도새도 모르게 비밀리에 동원된 것도 아니고 백주대낮에 공공연히 수만에서 수십만이나 되는 처녀들이 성노예로 끌려가는데 왜 조선사회는 저항은 커녕 울분을 토해낸 기록조차 없나?
지금도 "장병들의 사기"어쩌고 하며 '위문'이라는 형식으로 여성의 성적대상화를 공적인 차원으로 정당화하며 노골적으로 부추키는 것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그 정당화를 극단적으로 밀고가면 위안부제도의 공적 정당화까지 이르게 되는 거다.
성매매합법-공창제 지지를 주장하는 남성들이 '여성이 남성의 성욕 해소에 도움을 줘서 성폭력을 방지한다"며 정당화하는 것도 당시 일본군이 위안부제도를 기획한 의도와 똑같은 맥락이다. 여성을 남성의 성욕해소의 도구로 만드는 걸 사회적으로 '도움을 주는 조력자'의 지위로 왜곡하여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는 식민지배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 재생산 된다. 이 '조력자'의 의미가 바로 전시에는 '동지'로 바뀌어 포장되고 강요되는 거다. 일본군에게 바로 이러한 여성의 성적대상화-성적도구화를 손쉽게 정당화했던 공적 구조의 책임을 묻는게 가장 먼저 전제되어야 하는 것.
그게 위안부 제도가 가지는 폭력성의 본질이다. 군인이 남의 나라 여성들을 끌고가 폭력을 행했다는 인식만으로는 그 폭력의 내용과 맥락을 제대로 다 들어낼 수가 없다. 역사를 제대로 반성케하고 청산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지점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는 게 먼저다.
위안부제도를 발상하고 기획한 총체적 책임자로서 일본군만이 아니라 그것을 용인하고 받아 들였던, 가난한 여성들의 인권에 무감했던 식민지 가부장사회의 공범적 관계의 맥락까지 들여다 보는 것이 과거 역사의 잘못을 다시 되풀이 하지 않는 길이다.
그리고 박유하 비판자들은 여전히 '강제성'와 '자발성'을 모 아니면 도 라는 식의 이분법으로만 이해하고 있다.
'강제된 자발성'이라는 개념을 정말 몰라서 저러는 걸까...<제국의 위안부>에도 혹시나 '자발성' '애국 '동지'등의 의미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 오해하는 이가 있을까바 저자는 계속 '구조적 강제성'의 맥락을 수없이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이쯤되면 오독이 아닌 악의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위기의식은 이해하지만, 사태를 정확히 파악 해야 이길 수 있다. 일본을 20년 이상 비판해 왔으면서 운동이이길 수 없던 건, 정확하게 비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냉전 이후 시작된 한일진보시민연대의 문제와 한계가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민주"라는 개념이 국가에 대한 저항으로 기능했던 시대에서 30년이 지났다. 군사독재국가를 넘어선 시대의 "민주"란,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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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질문을 이어가야 한다

기사입력 2016-04-29 
2월24일,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영화 <귀향>이 개봉됐다. 제작비가 없어서 14년을 표류했던 이 영화는 간난 끝에 관객의 열렬한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한겨레> 2월25일자에 나온 조정래 감독과 남은주 기자의 인터뷰는 나란히 비판받아야 한다. 조 감독은 이 인터뷰에서 "수십만의 여성들이 끌려가 살아 돌아온 사람은 200명뿐이었다"라고 말했다. '위안부'의 숫자를 정확히 확정한 연구가 아직 없는 터에, 감독이라고 해서 "수십만"이라고 못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살아 돌아온 사람은 200명뿐이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영화사가 배포한 팸플릿에는 "20만명의 소녀들이 끌려갔고 238명만이 돌아왔다"라고 적혀 있으나, 거짓말이기는 마찬가지다. 

저 숫자는 1990년 11월에 발족한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 위안부 신고 전화를 개설한 1991년 8월 이후, 대한민국 정부에 '등록'된 피해자 숫자에 불과하다. 당장 북한에만 해도 1998년 기준으로 260여 명의 위안부가 신고되어 있고, 일본과 중국에도 등록되지 않은 생존자가 있다. 238명이라는 숫자 속에는 1991년 이전에 국내외에서 작고했거나, 알고도 신고하지 않은 위안부가 빠져 있다. 조정래 감독이 <귀향>을 들고 전 세계 영화제를 다니며 저런 거짓말을 계속 하고 다닌 결과 일본 우익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면, 그 책임은 취재원의 삿된 허풍을 고스란히 받아 실으면서 아무런 반론도 피력하지 못한 기자 책임이다. 
<한겨레> 4월11일자 2면에 나온 '한겨레 그림판'(권철범 그림)과 12면에 실린 기사 "열일곱에 끌려간 위안부 할머니 '생의 마지막 귀향'"은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한국 언론의 정신분열상을 보여준다. 4월13일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2·28 합의를 심판하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한겨레 그림판'은 장총을 찬 일본군 헌병 둘에게 강제로 끌려가는 치마저고리의 소녀를 한쪽에 그려놓았다. 그러나 12면에 나오는 하상숙 할머니(88세. 중국에 살고 있는 한국 국적의 위안부 피해자)의 귀향 기사는 그림이 묘사한 것과 완전 딴판이다. "하 할머니의 고향은 충남 서산이다. 그는 열일곱의 나이에 돈을 벌게 해준다는 말에 속아 중국에 위안부로 끌려갔다." 일본군 헌병에 의한 강제연행과 조선인 포주가 저지른 취업 사기로 찢긴 위안부 상(像)에 대한 <한겨레>의 견해는 무엇인가? 그대로 놔둬도 손해 볼 것이 없으니, 아무 상관없다는 식의 태도가 어떻게 언론의 사명이 될 수 있는가? 이타가키 류타와 김부자가 함께 엮은 <'위안부' 문제와 식민지 지배 책임>(삶창, 2016)이 출간되고 난 4월12일, <한겨레>는 김부자 도쿄 외국어대학 교수와 인터뷰를 했다. 한승동 기자와 김부자는 꽤 큰 지면이 주어졌던 이 인터뷰의 절반 분량을 박유하 교수가 <제국의 위안부>에서 주장했던 '위안부 평균연령 25세'설을 반박하는 데 허비했다. 박유하의 '25세'설은 위안부가 미군의 포로가 되었던 1945년 당시의 기준이며 피해자들이 연행당했던 때를 기준으로 하면 '평균 21.15세'가 맞고, 그 가운데 절반 이상이 10대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피해자가 속출한 당시의 한국 농촌에서 출생신고를 제때에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는 것은 양쪽 모두에게 고려되지 않았다. 이것보다 심각한 것은 박유하나 김부자나 조사 대상자가 고작 20~87명이었다는 것이다. 위안부는 무려 20만명이나 된다는데, 이런 표본 미달의 연구를 공들여 소개하는 것으로 위안부 문제의 얽힌 실타래가 풀릴까?
<‘위안부’ 문제와 식민지 지배 책임>이타가키 류타·김부자 엮음 배영미 외 옮김 삶창 펴냄
'조선인 공권력'의 자리에 앉혀놓은 '포주'

김부자는 책에 실은 자신의 글에서 "'위안부' 제도가 일본군 장병의 성병 대책을 위한 정책"이었다고 주장한다. 김부자가 틀린 것도 옳은 것도 아닌 저런 주장을 앞세우는 이유는 뻔하다. 저 주장은 성병을 방지하고자 했기 때문에 성 경험이 전무한 조선인 10대 소녀가 과녁이 되었다는 결론으로 박유하를 재차 공박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군이 위안부 제도를 운영한 제1의 목적은 성병 방지가 아니다.

일본군은 중국 침략을 본격화한 1937년부터 점령지와 전선에 위안소를 설치했다. <한겨레>가 '위안부 문제의 최고 권위자'로 치켜세우는
요시미 요시아키가 쓴 <일본군 군대위안부>(소화, 1998)는 일본군이 위안소를 만들게 된 네 가지 이유 가운데 ①"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군 위안소 설치가 군인에 의한 강간 사건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명토 박았다. 나머지 세 가지는 ②성병 예방 ③병사에게 위안 제공 ④군의 기밀 유지와 보안 방지다. 일본군이 병사들의 강간을 방지하려고 했던 까닭은 현지 부녀자를 강간하면 아버지·오빠·남동생·아들이 죽기 살기로 저항군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점령지를 안정적으로 간수할 수 없다는 고민에서 나온 것이 위안소다.

요시미 요시아키의 논리대로라면, 일본군 헌병이 조선에서 위안부 강제연행을 저지르는 것은 중국에서 저지하고자 했던 현지인의 저항을 조선 땅에 옮겨 오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일본은 전선을 두 개 만드는 셈이 된다. 그럴 바에는 중국에서 하던 악행을 계속 하는 게 낫다.
일본인들은 아시아·태평양 전쟁을 자신의 힘으로 치른 것으로 오해하지만, 조선과 같이 든든한 병참기지가 없었다면 엄두도 못 냈을 일이다. 일본이 내선일체를 그토록 강조한 것은 그런 필요에서였고, 조선반도에는 총칼에 의한 위안부 강제연행이 필요 없을 만큼 강력한 총독부가 있었다. 박유하를 희화화하려는 사람들만이 도지사→군수→면장→이장으로 이어지는 '조선인 공권력'의 자리에 '조선인 포주'를 앉혀놓는다. 

<귀향>보다 일주일 앞서 <동주>가 개봉되었다. 윤동주는 왜 헌병에게 끌려간 소녀를 시로 쓰지 않았나? 시인 한용운과 이상화는? 소설가 채만식과 염상섭은? 작품 발표는 못하더라도 일기나 비망록 정도는 남겨놓을 수 있었지 않는가? 이광수와 서정주는 적게는 2만~3만명, 많게는 20만명이나 되는 조선인 처녀들이 총칼에 끌려가는 것을 뻔히 알고서도 친일파가 되었더란 말인가? 

해방 직후 아무도 이 좋은 주제와 소재를 취하지 않았던 진짜 원인은 대체 무엇일까? 이 화제가 인기 없다는 것을 안다. 나처럼 편향적이라면 더욱 외면받으리라는 것도 잘 안다. 질문이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아무도 하지 않는 질문을 해서 어떤 사태의 이해를 첨예하고 풍부히 할 수 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질문을 이어가야 한다. 한국인들은 일본을 압박하면서 책임을 물을 수단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강제연행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것이 패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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