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28일 오후 일본 도쿄 대학에서 열린 비공개 토론회에서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논의가 전개되었다. 토론회의 주제는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박유하씨의 논저와 그 평가를 소재로’였다. <제국의 위안부>에 비판적인 인사들은 그동안 ‘양심 세력으로 불리는 지식인들까지 <제국의 위안부>를 절찬하는 이유’를 고찰해왔다.
<제국의 위안부> 저자인 박유하 세종대 교수는 지난해 11월 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었다. 이에 따라 논의의 초점이 ‘표현의 자유’ 문제로 이동하면서 정작 ‘책의 내용’은 뒷전으로 밀리고 말았다. 이날 행사의 목적은 책의 내용에 이견을 가진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토론하는 것이었다.
<제국의 위안부> 옹호 진영은 주로 박유하 교수 기소에 항의하는 성명서(‘54인 항의 성명’)를 발표했던 일본의 지식인들이다. 옹호론 측의 첫 주자는 리쓰메이칸 대학의 니시 마사히코 교수였다. 그는 <제국의 위안부>를 정확하게 읽고 ‘건전’하게 비판한다면, ‘명예훼손’이라는 판단이 내려질 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니시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를 높이 평가한 이유로, 박유하 교수가 이 책을 통해 기존 ‘가해자(일본인) 대 피해자(한국인)’ 혹은 ‘협력자 대 저항자’라는 이항 대립(과 민족주의 담론)을 해체·극복하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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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28일 일본 도쿄 대학에서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박유하씨의 논저와 그 평가를 소재로’라는 토론회가 열렸다. |
<제국의 위안부>에서 가장 논란을 일으킨 부분은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 병사를 구조적으로 “같은 일본인”이며 “동지적 관계”였다고 서술한 구절이다. 이 구절에 대해 니시 교수는 오히려 ‘피해자’였던 ‘위안부’들을 ‘협력자’였던 것처럼 포장해버린 ‘구조’를 논증해낸 것으로 해석했다. 이 같은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 ‘제국 일본’의 폭력성이 지닌 본질이라는 이야기다. 한편 조선인 ‘중간업자’ 부분 역시, ‘한국인-조선인은 어디까지나 피해자-저항자’라는, 이항 대립적 시각의 탈피를 요청하는 논증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니시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가 ‘기억의 무화(無化)와 망각’을 제기한 것도 높이 평가했다. 즉,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한동안 ‘위안부’라는 존재 자체가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무화) 잊혀졌다(망각)고 한다. <제국의 위안부>는 이런 현상 자체를 “국민으로서의 ‘바른 기억’만을 필요로 하는 ‘국가의 공모’였다”라고 주장했다(일어판 84쪽). 니시 교수는 이 부분이 바로 해방 후 ‘위안부’ 생존자들을 침묵시킨 ‘편견’이며, 그녀들을 ‘민족의 배반자’로 간주하고 그 ‘기억을 무화시키고 망각하는’ 방향으로 이끌었을지도 모를 전후 역사 전체를 비판 대상으로 하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자료 오독’이라는 결정적 결함부터 따져야
니시 교수의 이 같은 논지에 정면으로 반박한 논자는 정영환 메이지가쿠인 대학 교수였다. 정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 출간 이후 박유하 교수와 계속 논쟁을 벌여왔고, 최근엔 관련 도서를 출간하기도 했다. 정 교수에 따르면, <제국의 위안부>는 ‘위안부’와 일본 병사 간의 ‘동지 의식’ ‘동지적 관계’ 등을 논증하기 위해 피해자 증언이나 서적을 인용했다. 그러나 정작 인용된 ‘1차 자료(증언이나 서적)’들을 살펴보면, 박 교수의 주장(‘동지적 관계’)을 입증할 만한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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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제국의 위안부> 저자 박유하 교수가 1월29일 서울동부지법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예를 들어 박 교수가 주요 자료로 인용하는 센다 가코 씨의 저서 <종군위안부>에는 ‘조선인 ‘위안부’가 애국적 존재’라는 주장이 없다. 또한 박유하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 일어판 92쪽에서 일본 병사를 원망하지 않는 ‘위안부’가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근거’를 인용한다. 후루야마 고마오의 소설에서 어떤 ‘위안부’ 피해자가 “운이야. 위안부가 된 것도 운이지. 군인들이 총알 맞는 것도 운이고, 모두가 다 운”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영환 교수는 이렇게 말한 소설 속의 화자가 ‘위안부’가 아니라 일본인 병사라고 지적했다. 즉, 박 교수가 ‘위안부’와 일본인 병사 간에 ‘동지 의식’이 있었다고 전제하면서 소설을 읽었기 때문에, ‘모두가 다 운’이라는 목소리가 일본 병사의 시각이라는 것을 놓쳤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1차 자료들을 검증해봤을 때, 박유하 교수는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고 하지만, 사실은 ‘병사들의 목소리’와 일본 제국의 논리에 따라 증언을 재해석했을 뿐이라는 것이 정 교수의 지적이었다.
그렇다면 박유하 교수가 논증한 ‘위안부’ 피해자의 다양한 다른 목소리, 즉, ‘제국의 위안부’라는 이미지는 1차 자료에 의해 검증되고 논증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조선의 위안부들이 일본 병사와 동지적 관계에 있었다’는 그릇된 전제하에 자의적으로 자료를 잘라서 사용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박 교수가 주장하는 논지를 평가하기 이전에 자료 오독이라는 <제국의 위안부>의 결정적 결함부터 따져야 한다고 정영환 교수는 주장한다.
유사한 이야기가 비판론자 측에서 이어졌다. 오노자와 아카네 릿쿄 대학 교수는 공창 출신 일본인 ‘위안부’ 피해자와 매매춘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제국의 위안부>를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오노자와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 이전부터 조선인을 포함한 중간업자들의 개입이나 일본인 ‘위안부’ 피해자들에 관한 연구는 있었다고 말했다.
오노자와 교수에 따르면, <제국의 위안부> (일본어판 37~38쪽)는 모리사키 가즈에의 <가라유키상>이라는 책에서 가라유키상(외국으로 돈 벌러 가는 여성들을 가리킴)들의 자발성과 애국, 긍지를 유출해내고 있다. 그러나 박 교수가 인용한 부분의 맥락을 살펴보면, 정작 저자인 모리사키 씨는 그렇게 주장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박유하 교수는 우선 가라유키상(일본인 ‘위안부’)들에게서 애국과 긍지를 해석해냈다. 그리고 이런 잘못된 해석을 그대로 갖다 붙여, 조선인 ‘위안부’들로부터도 자발성, 애국, 동지적 관계 등을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당연히 잘못된 논증이다. 이 밖에도 여러 구체적 사례를 들어 문제를 제기한 오노자와 교수는 니시 교수에게 다음과 같이 반문했다. ‘다른 사람의 문헌이나 증언의 문맥을 무시하고 임의적으로 가져다 쓰는 것엔 문제가 크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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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4월13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1226차 수요시위에 참석한 길원옥(왼쪽)·김복동 할머니. 할머니들은 <제국의 위안부> 관련 소송을 진행 중이다. |
이에 대해 니시 교수는 ‘굉장히 중요한 지적으로 재판 문제 등이 해결되면 증보 개정판을 낼 때 가능한 한 수정하도록 조언할 생각’이라며 이해를 구했다. 그러나 니시 교수는 박유하 교수의 책을 발판으로 새로운 연구가 시작되고 있다고 답변했다. 그는 또한 정영환 교수의 발표에 대해 “상황을 <제국의 위안부> 출판 이전으로 되돌리려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박유하 교수의 지적은 한국이나 재일 한국·조선인들의 욕망을 상대화하려는 시도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니시 교수의 반박은 논점을 비켜난 것으로 보인다. 정영환·오노자와 교수의 비판은 <제국의 위안부>가 자료 및 증언과 반대의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판론자로 나선 김부자 도쿄 외대 교수, 요시미 요시아키 주오 대학 교수, ‘전국행동 공동대표’ 양징자씨도 같은 지점을 공격했다.
옹호론자들은 지금까지 ‘비판론자들이 <제국의 위안부>를 제대로 읽지 않았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번 토론회를 보면, 옹호론자들이 오히려 제대로 검증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옹호 측 논객인 우에노 치즈코 리쓰메이칸 대학 교수는 “고소 취하가 우선”이라며 “형사고소한 것은 한국의 사법부다”라고 발언했다. 이에 대해 양징자씨가 “고소는 피해자들이 한 것이고, 검찰 기소 전에 조정 과정을 통해 화해할 수 있었다. 검찰의 조정안을 거부한 것은 일본어판의 기술을 변경할 수 없었던 박유하 교수였다”라고 반박했다. 우에노 교수는 갑자기 “바빠서”라며 마이크를 넘기고 단상에서 물러났다. ‘내뺐다’라는 이야기가 나와도 별수 없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비판을 받아들여 반성을 표한 경우도 있었다. ‘54인 항의 성명’에 동참했던 모토하시 데쓰야 도쿄 경제대학 교수다. 그는 “박유하 교수의 책이 실증 연구 수준에서 많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상을 수상하며 공적으로 과대평가되었다”라고 인정했다. 또한 성명서에 대한 서명 철회를 밝혔다. “내가 동참한 성명에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다. 이 같은 점을 감안하면서, 나의 서명을 반성한다.” 생존 ‘위안부’ 피해자들이 어떤 심정으로 고소라는 수단까지 취하게 되었는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말도 남겼다. 다만 ‘민·형사 재판이 적절한 해결 방법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을 표시했다.
<아사히 신문> 관계자들도 이 논쟁을 지켜봤다. 이 때문에 적어도 <아사히 신문>은 <제국의 위안부>가 오독한 대목과 잘못 인용한 부분을 명확히 밝히고, 그 부분이 생존자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알릴 책임이 있다. 그랬을 때 옹호론자들이 우려하는 재판 건도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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