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5-05

"한국군에 당하느니 차라리..."
학살 증언 듣기 정말 괴로웠다 - 오마이뉴스

"한국군에 당하느니 차라리..."<br>학살 증언 듣기 정말 괴로웠다 - 오마이뉴스

"한국군에 당하느니 차라리..."
학살 증언 듣기 정말 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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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다. 나는 처음 밀라이 전쟁박물관에서 이 사진을 보면서 ‘왜 이 사진을 여기에 전시해 놨는지’ 의문스러웠다. 다른 전시물은 온통 학살 피해가 명백한 사진인데 이 사진 속 사람중에는 별다른 피해자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 고상만

'명진 스님과 함께 떠나는 베트남 평화기행' 6일 차. 일행은 전쟁 과정에서 희생된 민간인 학살 피해 마을을 찾았다. 그때 나는 한 장의 사진과 마주한다. 바로 밀라이 마을에 있는 '밀라이 전쟁박물관'에서였다.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다. 나는 처음 밀라이 전쟁박물관이 '왜 이 사진을 여기에 전시해 놨는지' 의문스러웠다. 다른 전시물은 온통 학살 피해가 명백한 사진인데 이 사진 속 사람 중에는 별다른 피해자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진 속에는 두어 명의 중년 여인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 옆에는 자녀로 보이는 어린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도 있었다. 그들의 표정에서 울먹이는 슬픔은 보였지만 왜 슬퍼하는지를 단박에 알 수는 없었다. 그래서 더욱 궁금했다.

그리고 알게 된 끔찍한 진실. 이곳을 방문하기 전 6일간 베트남 전쟁의 야만성을 이미 듣고 봤다고 생각했던 나는 다시 한 번 이 한 장의 사진 앞에서 무너졌다. 너무 괴로웠다. 지옥이 있다면 1968년 3월 16일, 베트남 밀라이 마을이 바로 그 '지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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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들은 밀라이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민간인 5백여 명을 무참히 학살했다. 아이들의 주검에 베트남 여성이 오열을 하고 있다. 밀라이박물관에서 촬영.
ⓒ 김성헌

피해자 최소 504명, 미군에 의한 '밀라이 학살 사건'

베트남 전쟁은 역사상 '가장 추악한 전쟁'으로 기록되어 있다. 모든 전쟁이 다 그렇지만 베트남 전쟁은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그런 베트남 전쟁 중에서도 '가장 추악하고 잔혹한 사건' 중 하나는 <밀라이 마을 민간인 학살 사건>이었다.

1968년 3월 16일. 미 찰리중대 소속 병사 150명이 남베트남 밀라이 마을로 들어왔다. 이어 윌리엄 캘리(William Calley) 중위의 명령에 따라 미군은 베트콩이 아닌 이 마을 민간인 500여 명을 무참히 학살한다. 아무런 저항도 없었다. 하지만 미군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였다. 장난처럼 사람을 죽였고 도망가는 이들을 쫓아가 또 난사했다.

찰리 부대원들은 사람을 죽이는 짓만 하지 않았다. 죽은 사람의 가슴에 '찰리 중대'라는 영문을 군용 대검으로 새겼다. 자신들의 부대 이름이었다. 그렇게 죄도 없는 민간인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인 찰리 부대원들은 마지막 순간, 마을 전체를 화염 방사기로 불태웠다. 도대체 미군은 왜 이처럼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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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였다. 장난처럼 사람을 죽였고 도망가는 이들을 쫒아가 또 난사했다.
ⓒ 고상만

놀랍게도 이유는 없었다. 그저 '베트콩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의심이 전부였다. 뒷날 이 학살 행위를 주도한 캘리 중위는 회고에서 "우리는 전쟁 동안 공산주의자들이 인간이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공산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냥 민간인이었을 뿐이다.

그러한 참혹한 학살 현장에서 촬영된 한 장의 사진.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던 그 사진 속 여인들은 바로 이 학살을 자행하던 미군들에 의해 집단 윤간당한 피해자들이었다. 사진 속 여인의 얼굴에 흐르는 두려움과 절망, 공포와 흐느낌. 옷의 단추를 채우는 한 여인의 팔에 안긴 어린 자식과 또 다른 여인의 등 뒤에는 누구인지 알 수 없는 한 남자가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그가 피해 여인의 남편인지, 아니면 이미 장성한 그의 아들인지 알 수 없으나 그 표정과 분위기 속에서 지극한 고통을 알 수 있는 일이다.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이것이 정말 아비규환의 지옥이 아니라면 무엇을 지옥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하지만 비극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우리 일행을 인솔하여 밀라이 전쟁박물관을 안내해 준 베트남 평화운동가 구수정 박사의 다음 설명은 충격이었다. "이 사진 속의 사람들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요?"라고 물었다. 사람들은 차마 상상하는 그 말을 입에서 꺼내지 못했다. 그러자 이어진 구수정 박사의 말이었다.

"미군은 그들이 강간한 여인을 비롯하여 이 사진 속의 모든 사람을 전부 학살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베트남에서 벌어진 미군에 의한 밀라이 마을 민간인 학살 사건입니다."

민간인 504명 죽인 캘리 중위, 그의 처벌은?

이러한 극악 반인륜 범죄에 대한 책임은 처음부터 드러나지 않았다. 미군 역시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밀라이 마을에서 죄 없는 민간인을 무참히 살해하고, 강간했으며, 불태운 이들에게 미국 정부는 처음엔 처벌이 아니라 상을 내렸다.

이 끔찍한 학살극은 '베트콩 요새를 격파한 빛나는 승리'로 둔갑하여 미국 정부에 보고되었다. 그리고 이처럼 전과를 세운 찰리 중대에 미군 사령관은 직접 축전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추악한 진실'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이날 현장에 있었던 미국인 종군 사진기자 덕분이었다.

나는 이 끔찍한 사진을 찍은 자가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했다. 특히 학살된 시신뿐만 아니라 곧 학살될 사람의 눈망울을 보면서도 그 사람 앞에서 카메라 셔터만 눌렀을 그 종군 사진 기자에 대해 나는 분노가 일었다. 이 끔찍한 학살극 앞에서 '추악한' 작품 욕심만 냈을 그 사진 기자 역시 '또 하나의 살인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증오한 그 기자가 아니었다면 밀라이 마을에서의 학살 행위는 진실을 드러낼 수 없었을 것이다. 알고 보니 이날 학살 현장에는 두 명의 사진 기자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중 한 명은 차마 이 끔찍한 만행을 촬영할 수 없어 카메라를 내려놓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단 한 장의 사진도 남기지 않았다.

반면 이 지독한 비극 앞에서 카메라 셔터를 누른 사람이 있었다. 미국의 사진 기자 로널드 해벌(Ronald Haeberle)이었다. 해벌은 이후 만년필 속 안에 이날의 필름을 몰래 숨겨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9년, 해벌은 학살의 진실이 담긴 이 사진을 자신이 속한 신문사와 잡지 <라이프>지에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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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살되기 직전의 한 여인. 너무도 끔찍한 범죄에 대한 처벌은 사실상 없었다. 베트남 전쟁은 너무도 추악한 범죄였다.
ⓒ 고상만

진실을 접한 미국 국민은 경악에 빠졌다. 베트남에서 벌어진 밀라이 학살 사건을 보도한 프리랜서 기자 시모어 허시(Seymore Hersh)의 폭로 이후 공개된 해벌의 사진으로 미국 내의 분위기는 반전으로 완전히 돌아서게 된다. 이 같은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는 베트남에 파병된 한 사병 어머니의 항변에도 잘 담겨 있다.

"나는 미국 정부에 착한 아들을 보내 주었는데, 정권은 그 아들을 살인자로 만들어 돌려주었다."

이러한 반전 여론과 항의가 빗발치자 미군 당국은 밀라이 마을 학살 사건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민간인 학살 행위가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어 14명의 장교가 체포된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최종적으로 처벌받은 책임자는 단 한 명이었다. 바로 윌리엄 캘리 중위였다.

캘리 중위는 사건 당시 군에 입대한 지 고작 4개월 2주밖에 안된 신참이었다. 그런 캘리에게 미국 정부와 미군이 모든 책임을 전가한 것이다. 게다가 캘리에게 내려진 처벌은 고작 3년간의 가택 연금이었다. 504명을 학살한 책임으로는 가당치도 않은 처벌이었다. 이마저도 당시 미국의 닉슨 정부는 사면 처분을 내린다. 이것이 학살 사건으로 인한 처벌 전부였다.

무려 504명을 학살했다. 그런데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학살 당시 우연히 이 현장을 목격한 미군 헬기 대원은 훗날 "미군들이 마을의 여자를 강간하고 어린 아기까지 전부 죽였다. 사람을 요리해서 먹는 것만 빼고 전부 다 했다"며 격분했던 사건이었다. 그런데 처벌이 고작 이렇다니 말이 되는가.

진실을 알고 난 후 우리는 분노했다. 하지만 그 분노가 다 식기도 전에 우리는 놀라운 또 하나의 사실을 들었다. 민간인 학살 피해를 본 베트남 사람들 사이에서 떠도는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너무도 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너무도 부끄러운 우리들의 자화상이었다.

한국군에게 당하느니 차라리 미군에게...

같은 인류로서, 같은 사람으로서 나는 미군의 잔혹한 만행에 대해 분노했다. 일행들 모두가 그러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구수정 박사의 다음 말에 우리는 분노 대신 고개를 떨궈야 했다. 이전에 가졌던 미군에 대한 분노조차 부끄러웠다. 구수정 박사의 말이었다.

"여러분. 그런데 아세요? 이 일을 당한 베트남 피해자분들의 후손이나 당사자들이 지금 뭐라고 하는지? '어차피 이런 학살을 피할 수 없었다면 차라리 미군에게 당할 걸, 왜 우리는 한국군에게 죽임을 당해 아무런 사과도 받지 못하느냐'고 합니다. 정말 이게 말이 됩니까?"

그랬다. 밀라이에서의 미군 학살이 있었다면 이에 못지않은 또 다른 학살 행위가 있었다. 바로 우리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이었다. 그러한 지역 중 한 곳이 평화기행 6일 차에 방문한 빈호아 마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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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전 당시 가장 많은 군인을 파병한 맹호부대 장병들의 베트남 상륙 장면이다. 사진은 밀라이 박물관에서 촬영.
ⓒ 김성헌

때는 1966년 12월 5일 새벽 5시, 밀라이 학살이 있었던 1968년 3월로부터 2년이나 앞선 때의 일이었다. 이때 출라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해병대 청룡여단 1개 대대가 꽝아이성 빈선현 빈호아 마을로 행군했다. 그리고 이날, 청룡여단은 빈호아 마을에서 '베트콩과 상관없는' 민간인 36명을 무참히 학살했다.

학살은 다음 날에도 이어졌다. 전날보다 더 큰 규모였다. 청룡여단은 다시 꺼우안푹 마을로 가서 273명의 민간인을 한자리에 모이라고 했다. 영문을 모른 채 마을 주민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이내 청룡 여단의 총기가 난사되었다.

이유도 없었다. 베트콩의 공격도 없었고, 누군가가 대항한 적도 없었다. 그렇게 비무장 상태인 민간인 273명이 죽었다. 그리고 이렇게 죽어간 이들은 모두 '교전 중 우리 군이 사살한 베트콩'으로 보고되었다. 참으로 괴로운 진실이다.

유감스러운 일은 이런 민간인 학살이 얼마나 더 있었던 것인지 여전히 자세하게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국가 차원의 조사가 이뤄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1993년 베트남으로 유학을 갔다가 우연한 계기로 이 진실을 알게 된 베트남 평화 운동가 구수정 박사의 노력으로 일부가 밝혀진 것이 지금까지의 전부다.

구 박사가 직접 피해 마을을 찾아가 그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한 사례는 최소한 80여 건. 학살된 민간인 피해자는 약 9천여 명인 것으로 집계된다. 이는 베트남 전쟁 중 우리가 사살했다는 전체 베트콩 숫자인 약 4만1천여 명중 1/4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그렇게 죽은 이들이 추후 베트콩으로 보고된 것이다.

한편 이날 자행된 학살 과정에서 살아남은 마을 주민은 14명이었다. 이를 증언하는 사람이 있었다. 1999년 당시, 구수정 박사가 <한겨레 21>에 기고한 글에서 빈호아 마을 부주석이 증언한 요지다.

"1966년 12월 청룡부대 1개 대대가 이곳 빈호아 등 9개 마을에서 모두 430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응옥흥 마을에서는 80살 노인의 목을 잘라서 논에 걸어 놓았다. 희생자들 중에는 임산부도 7명이 있었고, 2명의 여성은 강간당했다. 또 2명이 산 채로 불구덩이에 던져졌고, 1명은 배가 갈라져 창자가 꺼내졌다."

당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이후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전투원이 된다. 우리가 적으로 여기는 '베트콩'은 바로 그 조직의 전투원을 일컬은 단어였다. '원래 베트콩이 없었던' 마을에서 우리가 적이라고 불렀던 진짜 베트콩이 만들어진 이유는 다름 아닌 한국군 때문이었다. 그 계기는 미군과 한국군에 복수하겠다는 그들의 분노였다.

전쟁이 끝난 후 세워진 '한국군 증오비'

1975년 4월 30일, 베트남 전쟁은 종전된다. 지독한 부패로 베트남 국민에게 외면받은 남베트남 정권이 끝내 무너진 것이다. 그렇게 전쟁이 끝난 후 민간인 학살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쌀을 한 주먹씩 모으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모은 쌀로 그들은 한국군에 의한 학살 행위가 벌어진 마을에 '한국군 증오비'를 세우기 시작한다. 적어도 60여 군데 이상 이러한 증오비가 세워졌다. 그중 한곳이 바로 우리가 방문했던 빈호아 마을의 '한국군 증오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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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한국군들은 이 작은 땅에 첫 발을 내딛자마자 참혹하고 고통스런 일들을 저질렀다” 베트남 빈호아 마을의 한국군 증오비 내용 중 일부다.
ⓒ 김성헌

우리 일행은 간간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한국군 증오비'에 적힌 문구를 읽으며 망연히 서 있었다.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지만, 누구도 우산을 받쳐 쏟아지는 비를 피할 자신이 없었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슬픔이 가득 넘쳤다. 그렇게 읽어간 증오비의 비문이다.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한국군들은 이 작은 땅에 첫발을 내딛자마자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일들을 저질렀다. 수천 명의 양민을 학살하고, 가옥과 무덤과 마을들을 깨끗이 불태웠다. (중략) 모두가 참혹한 모습으로 죽었고 겨우 14명만이 살아남았다. 미 제국주의와 남한 군대가 저지른 죄악을 우리는 영원토록 뼛속 깊이 새기고 인민들의 마음을 진동토록 할 것이다. 

그들은 비단 양민 학살뿐만 아니라 온갖 야만적인 수단들을 사용했다. 그들은 불도저를 갖고 들어와 모든 생태계를 말살했고, 모든 집을 깨끗이 불태웠고, 우리 조상들의 묘지까지 갈아엎었다. 건강 불굴의 이 땅을 그들은 폭탄과 고엽제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불모지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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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한국군들은 이 작은 땅에 첫 발을 내딛자마자 참혹하고 고통스런 일들을 저질렀다. 수천 명의 양민을 학살하고, 가옥과 무덤과 마을을 모두 불태웠다.
ⓒ 고상만

베트남인들의 분노가 표현된 것은 이 같은 '증오비'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한국군이 자행한 그 날의 만행을 영원히 잊지 말라고 자신들의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그래서 그 내용을 담은 자장가를 만들어 잠자는 아기에게 불러줬다고 한다.

"...아가야, 이 말을 기억하거라. 적(한국군)들이 우리를 폭탄 구덩이에 몰아넣고 다 쏘아 죽였단다. 아가야, 너는 커서도 꼭 이 말을 기억하거라..."

오늘날 남은 증오비는 3개, 이제 우리가 철거할 수 있어야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일부' 미군과 '일부' 한국군의 야만을 나는 용서할 수 없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누군가가 조국을 침략한다면 나는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다. 하지만 내 조국이라고 해서 명백한 잘못까지도 마냥 옹호할 수 없다. 베트남 전쟁에서 자행된 그 날의 만행은 결코 그냥 묻을 수 없는 잘못이다.

더 부끄러운 일은 그다음이었다. 미군은 전쟁 중이었던 그때, 밀라이 마을에서 벌인 자신들의 범죄를 조사했다. 비록 그 결과가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미약한 처벌이었다 해도 미군은 죄 없는 민간인을 학살한 장교를 체포했고 그중 가해자를 처벌했다.

또한 이에 대한 잘못도 인정했고 사과하기도 했다. 미국의 시민단체들도 사죄하며 밀라이 마을에 병원과 학교를 지어줬다. 미군들의 학살 만행을 전시한 '밀라이 전쟁박물관'에 대해서도 재정적인 지원을 해줬다. 자신들의 학살 범죄를 잊지 말라고 오히려 지원해 준 것이다. 이러한 미국과 미국인의 사과·반성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달랐다. 그때도 부인했고, 지금도 부인하고 있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가 없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니 사과도 없고, 그에 합당한 배상도 없다. '물밑으로는 그러한 일이 있었다고 인정하면서도 공식적으로는 인정할 수 없다'는 묘한 논리가 계속되는 것. 바로 베트남 전쟁 과정의 잘못을 대하는 우리나라의 태도다.

그러니 그런 말이 있었다. "학살을 피할 수 없었다면 차라리 미군에게 죽었어야 했다"는 말이었다. 나는 이 말이 그 어떤 심한 욕설보다 더 우리나라에 항의하는 베트남의 심정이라고 생각한다. 나뿐만 아니라 평화기행을 함께 한 모든 일행이 깊은 탄식을 터뜨린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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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쏟아지는 비 속에서 명진 스님은 향을 피웠다. 그리고 학살된 피해자들의 이름이 적힌 퐁니 위령비 앞에서 한참을 엎드려 사죄했다.
ⓒ 고상만

그날, 쏟아지는 빗속에서 명진 스님은 향을 피웠다. 그리고 학살된 피해자들의 이름이 적힌 퐁니 위령비 앞에서 한참을 엎드려 사죄했다. 나머지 일행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향을 피워 우리나라 일부 군인에 의해 숨져간 그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용서를 빌었다.

과연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랬다. 전쟁 후 베트남 사람들이 세운 한국군 증오비는 이제 약 3곳만 남았다고 한다. 60여 개가 세워졌던 증오비가 세월이 흐르면서 도시가 개발되며 하나둘 자연스럽게 철거되면서 남은 숫자라고 했다.

나는 이렇게 남은 나머지 3곳의 '한국군 증오비'만은 우리의 노력으로 철거하자고 말하고 싶다. 잘못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사과하며, 또 용서를 구해 베트남 국민들이 "이제 우리가 당신네 나라의 잘못을 용서하겠다. 그 증거로 남은 이 증오비를 철거하겠다"는 말을 듣고 싶다.

과연 그런 날은 올까. 지금은 어둡지만 '명진 스님과 함께 떠나는 평화기행'의 글을 통해 단 한사람이라도 우리 국민에게 알리고 싶었다. 용기있게 말하고 싶었다.

그날, 우리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자고. 그렇게 해서 용서를 구하자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또 말한다. 미안해요, 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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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명이 한꺼번에 몰살된 웅덩이 앞에서 스님은 한참을 엎드려 사죄했다. 미안해요, 베트남.
ⓒ 김성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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