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5-23

“핵이 절대 악이 되면 일본의 침략 전쟁이 떠오르지 않아” : 일본 : 국제 : 뉴스 : 한겨레

“핵이 절대 악이 되면 일본의 침략 전쟁이 떠오르지 않아” : 일본 : 국제 : 뉴스 : 한겨레

등록 :2016-05-23

인터뷰/ ‘한국의 원폭피해자를 구원하는 시민의 모임’ 회장 이치바 준코
이치바 준코(60·사진) ‘한국의 원폭피해자를 구원하는 시민의 모임 회장’(이하 시민의 모임)은 한국인 원폭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해 싸워온 이 문제의 ‘산 증인’이다. 17일 <한겨레>의 취재에 응한 이치바 회장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을 바라보는 그의 견해와 한국 원폭 피해자 운동의 40년사를 알기 쉽게 증언해줬다. 그는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을 바라보는 한-일간의 관점 차이에 대해 “히로시마가 ‘그날로 인해 모든 게 사라졌다’고만 말하면 핵이 절대 악이 되고, 일본이 침략 전쟁을 해서 많은 아시아인들을 고통스럽게 했다는 게 떠오르지 않는다. 핵이란 분명 인류에게 큰 피해를 끼친 것이지만 한국인 입장에서 보면 더 큰 고통은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이었다”고 정리했다. 인터뷰는 17일 신오사카역의 한 찻집에서 이뤄졌다

-오랫동안 한국인 피폭 문제에 관심을 가져왔다.
“고향이 히로시마현이지만 (원폭이 떨어진) 히로시마시는 아니다. 시에서 좀 떨어진 후쿠야마라는 시골이었다. 그래서 직접 부모님께서 피폭을 당한다던지 하는 일은 없었다.”

-한국인 원폭 피해 문제에 처음 관심을 가진 계기는?
“난 1956년생이다. 1960년~70년대 일본 사회는 한국인 피폭과 같은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 1975년에 처음 대학에 입학해서 교토에 갔다. 거기서 처음 일본이 조선을 식민 지배했다는 사실과 피폭자 가운데 한국인(한반도 출신자 전부를 이르는 개념으로 한국인이라는 표현을 사용)이 10% 정도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1975년이면 ‘손진두 재판’(한국인 손진두씨가 일본에 밀항해 들어와 자신의 원폭 피해를 호소하며 피폭자 수첩 교부를 요구한 재판)이 진행 중이었다. 그때만 해도 일본 사회는 한국인에 대한 차별 의식이 너무 강했다. ‘자이니치’(재일동포) 입장에서 보면 일본인은 차별을 하는 사람들이니 친구가 되기도 어렵고, 평등하고 대등하게 대화하기도 어려웠다. 일본 정부 관계자들은 그런 차별 의식을 더 강하게 갖고 있어서 한국인 피폭자들이 일본 외무성을 상대로 교섭할 땐 기본적인 태도가 매우 냉정하고 차별적이었다.”

-1971년에 현재 대표를 맡고 있는 ‘시민의 모임’이 결성되는데.
“나는 1979년부터 참여하게 됐다. 1979년 1월에 현지 한국인 피폭자를 조사하는 현장 조사가 있었다. 처음부터 시민의 모임에 참여한 선배가 있어서 처음 그 사람을 따라갔다. 1979년부터이니 활동을 시작한 지 벌써 30년이 넘는다.”

-그 시간 동안 참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1966년 한국에서 한국원폭피해자협회(당시 이름은 한국원폭피해자원호협회)가 만들어졌다. 1978년 손진두 재판이 원고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고 우린 이 문제가 쉽게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런 추가적인 성과 없이 시간만 흐르는 시기가 이어졌다. 당시 협회를 이끌던 신영수 회장(신영식 전임 히로시마 총영사가 그의 아들이다), 서석우 회장 등의 생활이 너무 가난했다. 곽기훈 회장은 중고등학교 선생님이라 수입이 있었지만, 대부분 협회 임원들이 몸이 아파 직장을 다니지 못했고, 장사를 해도 잘 되지 않았다. 특히 신영수 회장은 얼굴에 ‘켈로이드’(피폭으로 인한 화상)가 심해 장사를 해도 잘 안됐다.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우신 분들이 협회 일을 봤다. 게다가 일본 정부와 교섭을 해도 별달리 좋은 일도 없었다. 그런 상황이 일본 정부가 1991년부터 한국인 피폭자 문제 해결을 위해 40억엔을 내놓을 때까지 이어졌다. (협회 결성으로부터) 일본 정부로부터 지원을 이끌어내기까지 24~25년이 걸렸다. 당시 협회 임원들이 자기들도 힘들면서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회원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했다.”

-당시 한국 피폭자들의 사정은 어땠나.
“처음 한국에 현장조사를 갔을 때가 1979년 1월이었다. 겨울이어서 추웠다. 피폭자들은 대부분 달동네에서 살았다. 신영수 회장을 따라 좁은 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 대부분 수도도 안 들어오는 집이었다. 연탄을 때지 못해 아이들이 좁은 이불 속에 들어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일부 피폭자들은 혼수상태에 빠져 잠만 자고 움직이질 못했다. 당시 피폭들 당한 분들은 사회적으로 하층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살았다고 해도) 교육을 못 받아 일본어를 못했다. 동행한 신 회장이 통역을 해줬다. 더러운 이불에 누운 피폭자들이 병원에 가지를 못하니 천장에 한약이나 약초를 매달아 말리고 있었다. 우리가 방문해 소액의 위문금을 건네면 (그게 고마워) 울면서 받곤 했다. 이분들 얘길 직접 듣고 싶어서 한국어를 공부했다. 이듬해인 1980년 대구에서 150명 정도 피폭자분들을 모아 놓고 집단 면접 조사를 했던 기억도 난다. 모인 분들이 일본에 가진 원망이 상당했다.”

-협회 임원들이 한국에 오가려면 비용이 들었을텐데.
“시민의 모임에서 모금을 해 교통비와 숙박비 등을 만들었다. 그런데 협회 분들이 일본에 오면 (자연스럽게) 총련계 사람들과 만날 수밖에 없다. 그럼 귀국한 뒤 국가정보원에서 와서 조사를 해갔다. 한국은 1987년 민주화가 되기까지 피폭자들이 자신의 피해에 대해 소리를 내는 게 너무 어려웠다.”(이는 대부분의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사실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 할머니의 역사적인 첫 증언이 나오게 된 것도 한국의 민주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김 할머니가 첫 증언을 하게 되는 것은 한국이 민주화된 지 4년이 지난 1991년 8월이었다.)

-손진두 재판으로 일본에 살지 않는 한국인들도 피폭자 수첩을 교부 받을 수 있게 됐다. 그러나 1974년 후생노동성 공중위생국장이 한국인 피폭자들이 수첩을 교부 받더라도 한국으로 돌아가면 효력을 정지시킨다는 내용의 이른바 ‘402호 통달’을 내놓게 된다. 당시 한국인 피폭자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나.
“우린 1990년 정도까지 그런 통첩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중앙 정부가 지자체에 내려 보내는 것이 ‘통달’이니 외부에 공개되지 않는다. 몇년 지나면 출판사들이 통달집을 출판하는데 그 속에 ( “해외에 거주하는 이는 수급권을 잃는다”는 후생노동성의) ‘402호 통달’이 들어 있는 것을 어느 변호사가 찾아냈다. 그동안에도 한국인 피폭자들이 일본에 방문 치료를 와서 수첩을 교부 받으면 돌아갈 때 이게 무효가 된다. 무엇을 근거로 무효로 하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이 조처가 부당하다고) 재판을 하려고 해도 근거가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우린 손진두 재판에서 완전 승소를 했기 때문에 다시 재판을 하지 않아도 문제가 잘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그러나 한-일 양국 정부는 일부 피폭자들에게 도일치료를 실시하는 등 조금씩 부분적인 대책만을 내놨다. 그럴 때마다 ‘완전한 보상이 아닌 불충분한 대책’이라고 비판을 해도, (이를 거부하면) 다른 혜택이 없으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이 통첩의 존재를 알게 된 곽귀훈 회장이 1998년 10월 통첩을 무효로 하라는 이른바 ‘곽귀훈 재판’을 시작해 2003년 승소한다. 한국인 피폭자 문제 해결 과정에서 ‘손진두 재판’과 ‘곽귀훈 재판’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방문을 어떻게 보나?
“한국 언론들은 ‘일본이 피해국이 된다’는 이유로 다 비판하고 있지 않나? 일본에선 개인적으론 ‘오바마 대통령이 원폭 투하에 대해 사죄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지만 피단협(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일본 최대의 피폭자 단체) 등 큰 단체에선 사죄와 배상을 말하지 않는다. 정말 이상한 상황이다. 이게 일본 사회가 갖고 있는 가장 깊은 모순이 아닐까 한다. 일본 사회는 전쟁을 일으킨 천황에 대해 책임을 추궁하지 않았다. 나쁜 짓을 한 사람이 한 번도 국민에게 사죄한 적이 없고, 중국이나 한반도처럼 침략 받은 사람에게 아무도 사죄하지 않았다. (이를 건드리는 것은) 일본 사회의 터부다. 그래서 미국에서 사죄를 요구하면, 논리적으로 생각할 때 당연히 일본의 책임도 물어야 한다. 그래서 이것(공개적으로 사죄를 요구하는 것)을 할 수 없는 구조가 있는 것 같다. 정말 이상한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시민의 모임은 오바마 대통령에게 한국인 피폭자에게 사죄를 요구했는데.
“그렇다. 성명문을 19일 오바마 대통령 앞으로 보냈다. 실은 그 전에 한국의 협회에서 연락이 왔다. 일본 피단협이 사죄·배상을 요구한다면, 한국 협회도 같이 제출하고 싶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피단협의 고위 인사에게 물으니 아직 그런 계획이 없다고 했다.”

-히로시마에선 오바마 대통령과 피폭자들의 면담을 요구하고 있는데.
“히로시마에선 원폭 피해가 절대적인 문제라는 분위기가 있다. 일본이 침략을 했지만 그런 문제는 어떻든 히로시마에 핵이 떨어졌으니 핵이 절대 악이고 핵무기가 나쁘다는 논조다. 그러나 한국인 입장에선 침략을 당해 이름을 잃어버리고, 고향의 삶이 파괴돼 땅을 잃고, 강제연행됐다는 게 원폭보다 더 고통스런 일이고 더 큰 악이다. 그래서 한국인에겐 핵이 절대 악이 아니다. 핵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일으킨 여러 전쟁 상황 속에서 사용된 것으로 이런 정치적인 분석을 빼놓고 ‘핵이 절대 악이다’라는 것에서 출발하면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게 된다. 왜 핵이 떨어졌는지를 생각하면 일본이 침략전쟁을 했고, 미국이 (이후 전개될) 냉전에서 핵의 헤게모니를 잡고 싶어 먼저 떨어뜨린 것이다. 그래서 일본 원폭 피해자들이 ‘그날로 인해 모든 게 사라졌다’고 말하면 핵이 절대 악이 되고, 일본이 침략 전쟁을 해서 많은 아시아인들을 고통스럽게 했다는 게 떠오르지 않는다. 핵이란 분명 인류에게 큰 피해를 끼친 것이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인 입장에서 보면 그것도 물론 고통스런 일이지만, 더 큰 고통을 침략을 당했던 것이 된다.”

-현재 시민의 모임의 상황은 어떤가?
“회원들이 나이가 들었다. 돌아가시거나 연금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에 회비를 못 낸다는 분들이 나오지만, 신규 가입자도 있어 회원은 600명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처음 활동을 시작할 때) 우리가 이렇게 싸워 이길 것이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한국 협회 분들의 상황을 보면 아무 것도 안 하면 안 되니까 져도 좋으니까 뭐든지 해야 했기 때문에 싸운 것이다. 자기들도 가난하고 몸이 아픈데도 더 몸이 아프고 가난한 분들을 위해 열심히 활동하는 분들이 많았다. 예전에 한국 협회엔 지부가 7개 있었는데 각 지부마다 그런 분들이 계셨다.”(현재 한국인 피폭자 문제는 2015년 일본 거주 피폭자들과 달리 1년에 30만엔으로 정해져 있던 치료비 상한선이 폐지돼 사실상 해결된 문제다. 물론, 이와 별도로 반드시 해결해야 할 피폭 2세 문제가 남아 있다.)

오사카/글·사진 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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