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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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
李鍝
Prince Yi Wu 01.jpg
재위1917년 5월 28일 ~ 1945년 8월 7일
전임자이준용
후임자이청
별명성길 (초명)
시호흥영군 (사시)
배우자박찬주
자녀이청이종
부친의친왕 이강 (생부)
영선군 이준용 (양부)
모친수인당 김흥인 (생모)
출생1912년 11월 15일
일제 강점기 조선 경기도 경성부
사망1945년 8월 7일 (32세)
일본 히로시마 현 히로시마 시
사인원자 폭탄에 피폭
매장지운현궁 가족 묘지
거주지운현궁도쿄 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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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 오얏꽃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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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
생애1912년 11월 15일 ~ 1945년 8월 7일
복무일본 제국 육군
복무 기간1933년 ~ 1945년
최종 계급육군 중좌
육군 대좌 (추서)
주요 참전제2차 세계 대전
서훈 내역일본 제국 대훈위 국화대수장
일본 제국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일본 제국 공3급 금치훈장
이우(李鍝, 1912년 11월 15일 ~ 1945년 8월 7일)는 대한제국 황실의 후예이자 일본 제국의 군인이다.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의 차남이다. 본관은 전주, 초명은 성길(成吉)이며, 아호는 염석(念石), 상운(尙雲)이다.[1] 1917년에 흥선대원군의 장손 이준용이 사망하자 당숙의 양자로 입적되어 운현궁의 4대 종주가 되었다. 운현궁을 상속한 후에 공위를 세습 받아 ‘이우공 전하’라는 공족의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사망 이후에 사시인 흥영군(興永君)에 추봉되었다.
일제강점기 조선 경기도 경성부 사동궁에서 태어나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고, 일본 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계급이중좌에 이르렀다. 일본 정부에 의해 일본인과의 결혼을 강요받았지만, 조선인과 혼인하기 위해 저항하여 박영효의 서손녀 박찬주와 결혼하였다. 1945년 8월 6일에 일본 히로시마에서 원자 폭탄에 피폭되어 8월 7일에 히로시마 시 니노시마에서 사망하였다. 1945년 8월 15일에 경성운동장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으며,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의 운현궁 가족 묘지에 안장되었다.[2]

생애

운현궁 계승

이우는 1912년 11월 15일 오전 6시에 일제 강점기 조선 경기도 경성부 중부 관인방 사동궁에서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생모는 의친왕의 측실 수인당 김흥인(修仁堂 金興人)이다.[3] 1917년 3월 22일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장손 이준용이 사망하자 이우는 5월 28일에 당숙 이준용의 양자로 입적되어[4] 운현궁의 재산과 칭호를 상속하였다.[5] 이준용은 자녀로 소실 전순혁(全順爀)에게서 얻은 서녀 이진완만이 있었고 남자 상속자가 없었기 때문에 1917년 3월 23일에 덕수궁에서 열린 친족회의에서 고종의 뜻에 따라 의친왕의 차남 이우를 양자로 결정하였다.[6][7] 같은 해 5월 28일에는 상속을 승인하는 다이쇼 천황의 특지가 일본 궁내성 고시 제8호로 발표되었으며,[8] 8월 4일에는 재산 관리와 보육의 후견인으로 이준공비 광산 김씨(光山 金氏)와이왕직 장관이 선임되었다.[9]
이준용은 1912년에 사망한 아버지 이재면의 뒤를 이어 ‘공’(公)의 지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우는 운현궁의 상속자로 결정되자 공위를 세습 받아 한정된 범위의 왕공족에게만 사용되던 ‘전하’(殿下)의 경칭을 받게 되었다. 당시 조선에서 공의 지위에 있었던 인물은 이강과 이우 밖에 없었다.[10] 이우의 신분인 공족의 공은 1910년에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된 이후 일본 제국 정부가 대한제국 황실을 규율하기 위해 새롭게 창출한 신분이다. 공은 오등작의 일종인 일본 화족과 조선귀족의 공작과는 다른 개념으로 서열상 일본 황족과 왕족 아래에 위치하지만 화족과 조선귀족보다는 높은 지위이며, 일본 황족에 편입된 신분은 아니지만 병합 당시 공포된 메이지 천황의 조서에 따라 황족에 준하는 예우를 받았다.[11]

일본 유학과 입대

이우 (1922년경)
남대문 정거장에서 출발 장면
(1922년 7월 5일)
1915년에 경성유치원에 입학하여[12] 1918년 3월 28일에 졸업하였다.[13] 일본에서 일시 귀국한 영친왕 이은이 1918년 1월 25일에 경성유치원을 방문하였을 때 이우는 영친왕 앞에서 ‘매화와 꾀꼬리’라는 창가를 불렀다.[14] 1919년 1월 21일에 고종이 승하하자 150일 동안 복상(服喪)을 하였다.[15] 같은 해 4월에 경성종로공립심상고등소학교에 입학하였다.[12]1922년 봄에 종로소학교에서 심상과 3학년 과정을 마치고, 같은 해 7월 5일에 유학 명분으로 일본으로 보내져 학습원 초등과 4학년에 편입하였다.[16][17] 같은 해 7월 22일에 여름 휴가를 이유로 조선으로 귀환하면서 오사카 역을 통과하게 되었는데 오사카의 조선인들이 이우를 둘러싸고 일을 모의한다는 소문이 돌아 오사카 소네사키(曾根崎) 경찰서에서 다수의 조선인을 검속하였다.[18]
이우는 일본 도쿄에서 체류하면서 거주하기 위한 부동산을 구입하였으며 운현궁 도쿄 별저로 불렸다.[19] 별저는 도쿄 부 도요타마 군 시부야 정 오아자시타시부야(大字下澁谷) 아자도키와마쓰(字常磐松) 321번지(1932년 시군병합으로 도쿄 시 시부야 구 도키와마쓰 정 101번지로 개편)에 있었다.[20][21] 저택은 궁내성 내장료(內匠寮) 기사에 의하여 설계되었고, 1925년에 완공되었다.[22] 내전과 외전으로 구분되었고, 포틀랜드 시멘트 반죽과 회반죽으로 마감한 브라운색이 도는 회색빛의 서양식 2층 건물이었다.[19]
이우 (1933년경)
이우 (1934년 4월)
순종이 승하하자 1926년 4월 26일에 장례식을 집행하는 종척집사(宗戚執事)로 임명되었고,[23] 5월 10일에 순종의 능을 천릉할 때에도 종척집사로 임명되었다.[24]
한일 병합 이후 대한제국 황실을 규율하기 위하여 1926년 12월 1일에 일본 황실령 제17호로 제정·공포되었던 《왕공가궤범》(王公家軌範) 제59조에 따르면 왕·왕세자·왕세손·공은 만18세에 달한 후 육군이나 해군 무관으로 임관하여야 하는 의무가 강제되었다.[25] 학습원 중등과를 졸업한 이우는 1926년 4월에 육군유년학교 30기생으로 입교하여[21][26] 1929년 3월 18일에 졸업하였다.[27] 1929년 4월에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45기생으로 입교하였다.[28] 1931년 3월 18일에 육군사관학교 예과를 졸업하고,[29][30] 사관후보생으로 임명을 받아 도쿄 야포병 제1연대에 배치되어 근무하다가[31] 같은 해 10월 본과에 입교하였다.[32] 1932년 11월에 성년이 되어 이왕직 장관이 맡았던 후견인 업무는 종료되었고,[33][34] 도쿄와 경성 운현궁 노안당에서 관례식을 올렸으며, 조선호텔에서 피로연을 열었다.[35] 1933년 7월 11일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고,[36] 같은 해 10월 25일에 포병 소위로 임관하면서 근위 포병 제1연대에 배속되었다.[37] 야전포병학교를 수료하고,[38] 1934년 12월에 육군포공학교 보통과에 입학하였으며,[21] 1935년 10월에 포병 중위로 진급하였다.[39] 1936년 8월 1일에 도쿄 야전중포병 제8연대로 배속되었고,[40] 같은 해 11월에는 육군포공학교 고등과를 졸업하면서 본래 부대로 복귀하였다.[41][42] 1938년 3월 1일에 포병 대위로 진급하여[43] 야전포병학교 교관이 되었으며, 교도연대 중대장을 겸임하였다.[41]
1938년경에 여성운동가이자 교육자 황신덕이 운현궁에 교육사업을 위하여 이우가 소유한 경성부 서대문구 죽첨정 일대(현재 강북삼성병원 영안실 부지)의 부동산을 하사해줄 수 있는지 문의하였고, 이우는 이를 흔쾌히 승낙하였다.[19] 1940년 10월 10일에 황신덕은 하사받은 부동산에다가 경성가정여숙(현재 중앙여자고등학교)을 설립하였고, 이와 같은 인연으로 광복 이후 1950년 4월 28일에는 이우의 부인 박찬주가 재단법인 추계학원의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44][45]
1938년 12월 27일에 일본 육군대학교 제54기생으로 입교하여[46] 1941년 7월 31일에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조선인은 이우를 포함하여 영친왕 이은, 이건홍사익 뿐이었다.[47] 1940년에 3개월 동안 중국 전선을 시찰하고 9월 26일에 일본 후쿠오카로 귀환하였다.[48] 같은 해 11월에는 육군대학생의 자격으로 중부 제37부대에 소속되어 교토 사단 추계 연습에 참가하였다.[49] 1941년에 조선군사령부에 배속되었고,[47] 같은 해 10월 15일에 소좌로 진급하였다.[50]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1942년 3월에 육군대학교 연구부 부원으로 전보되어서[51] 5월에는 각 전선을 시찰하였다.[52] 1944년 3월에 중국 산시 성 타이위안으로 전출되어 북지나 방면군 제1사령부 참모 장교로 근무하였다.[19] 타이위안에서 근무하던 시기에 타이항산 유격대를 지원하였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나 현재 사료적 근거나 정황 증거는 남아 있지 않다.[53] 타이항산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군은 이우가 중국으로 전출되어 오기 전에 이미 중국 공산당에 의해서 1943년 12월부터 1944년 3월까지 옌안으로 이동을 완료한 후였다.[54]

결혼

이우와 박찬주 (1935년)
일본인과 결혼을 강요하던 일본 궁내성과 이왕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친왕과 박영효의 지원을 받아 박영효의 둘째 서자 박일서(朴日緖)의 딸 박찬주와 1935년에 결혼하였다.
일본 궁내성과 조선총독부는 대한제국 황실의 자녀를 일본 황족 또는 화족의 자녀와 결혼시켜 혼인 관계를 형성하려 하였다.[2] 이와 같은 목적으로 《왕공가궤범》 제119조에 따르면 왕공족의 혼인은 일본 천황의 칙허를 통해서만 인정되었다.[25] 영친왕, 덕혜옹주, 이건의 혼인과 같이 일본인과의 정략 결혼이 추진되어 궁내성에서는 백작 야나기사와 야스쯔구의 딸을 이우의 배우자로 내정해 놓고 있었다. 야나기사와는 이우의 이복형 이건의 장인 해군 대좌마쓰다이라 유타카와 동서가 되었으며, 이우의 숙부 영친왕의 장인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와도 동서 사이였다. 모두 옛 사가 번의 다이묘였던 후작 나베시마 나오히로의 사위들로 궁내성의 계획대로 된다면 왕공족 남자 전부는 나베시마의 외손주 사위가 되는 셈이었다.[55]
의친왕은 아들이 일본인과 결혼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이우도 조선인과의 결혼을 고집하였다.[19] 일본인 신부를 거부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던 중에 의친왕과 긴밀한 관계였던 박영효의 서손녀 박찬주가 이우의 배우자로 물망에 오르고 혼약이 이루어졌다.[56] 이우의 양모 광산 김씨는 박영효가 내무대신으로 재임하던 1895년에 법무협판 김학우 암살과 모반 혐의로 양부 이준용을 죽이려 하였기 때문에 박찬주를 못마땅하게 여겼다.[19] 이우는 박찬주에게 사주단자와 약혼반지를 보낸 후에 당시 이왕직 장관 한창수에게는 혼약이 성립되었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하였다.[57] 왕공족의 사무를 관장하던 이왕직은 박찬주와의 혼약이 천황의 칙허없이 진행되었다고 반발하며 일본 황족과 결혼하라는 압력을 행사하였다.[58]
하지만 이우의 조선인과 결혼하겠다는 저항과 박영효의 일본 정계를 상대로 벌인 로비의 결과로 일본 궁내성과 이왕직은 이우와 박찬주의 혼약을 인정하게 된다. 박영효는 일단 혼약이 철회된 것처럼 해놓고, 직접 도쿄에 가서 귀족원 칙선 의원이자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이라는 직책과 인맥을 활용하여 추밀원, 귀족원, 궁내성에 공작을 벌였다.[59] 결국, 1934년 7월 11일에 궁내성 종질료(宗秩寮)에서 약혼을 인정하는 담화를 발표하였고,[60] 1935년 4월 17일에는 혼인을 인정하는 쇼와 천황의 칙허가 발표되었다.[61] 1935년 5월 3일에 이우와 박찬주는 도쿄 별저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며,[62] 같은 해 6월 28일에 경성으로 돌아와 종묘와 능원을 참배하고 조선호텔과 운현궁에서 피로연을 열었다.[63] 한편, 1936년 4월 23일에 장남 이청(李淸)이 도쿄 별저에서 태어났고,[3][64][65] 1940년 11월 9일에는 차남 이종(李淙)이 도쿄 별저에서 태어났다.[3][66][67]

죽음

피폭과 사망

필리핀 시찰 (1943년 6월)
1945년 6월 10일에 중좌로 진급되었으며[68] 본토결전을 위하여 일본으로 전출하라는 명령을 받는다.[69] 이우는 일본으로 가지 않고 운현궁에 머물며 전역을 신청하기도 하고 조선에 배속시켜 달라고 청원을 넣기도 하였지만 모두 거절당하였다.[19] 운현궁에 머무는 한 달 동안 윤원선김을한 등을 만나 “일본의 패전은 기정사실이며 한국이 독립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런데 미국뿐만 아니라 소련도 가만있지 않을테니 해방 후의 뒷수습이 큰 문제다”라고 걱정하면서 이제 군복을 벗고 운현궁에 있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고 한다.[70] 그리고 이우의 둘째 여동생 이해원은 이우가 히로시마로 전출될 당시 일본으로 가면 죽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부인과 자식을 죽이고 가겠다며 권총을 들고 소란을 피웠으며 가족들이 이를 만류하였다고 증언하였다.[71]
1945년 7월 16일에 일본 도쿄에서 영친왕 부부를 만나고, 며칠 후에 부임지인 히로시마로 이동하였다.[70] 이우는 히로시마의 서쪽에 위치한 고이(己斐)의 가어전(假御殿)에서 머물며 히로시마 일본군 제2총군 참모본부로 출퇴근하였다.[72] 8월 6일에 이우는 자동차가 있었지만 말을 타고 출근하겠다고 고집을 피워 참모본부로 말을 타고 출근하는 도중,[2] 시 중앙부에 있는 후쿠야(福屋) 백화점 부근(폭심지에서 710m)에서 원자 폭탄에 피폭되었다. 이우는 그날 오후 혼가와(本川) 아이오이 교(相生橋) 아래에서 흙투성이로 변한 채 발견되었다.[72] 그날 밤 히로시마 남단의 니노시마 섬(似島)에 있는 해군 병원으로 후송되어 의식을 되찾았지만 자정이 넘으면서 급속도로 상태가 악화되었고,[2] 8월 7일 새벽에 고열로 신음하다가 오전 5시 5분에 사망하였다.[73][74]

사후

《매일신보》의 사망 기사
(1945년 8월 9일)[73]
1945년 8월 8일에 유해는 비행기에 실려 경성비행장에 도착하였고,[75] 운현궁으로 운구되어 의무관들에 의하여 방부 처리되었다.[76] 일본인 수행 무관 요시나리 히로무(吉成弘) 중좌는 엉덩이에 부스럼이 생겨 이우를 대신하여 자동차를 타고 사령부에 미리 출근해서 피폭을 면하였지만 부관으로 이우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 때문에 유해를 운구한 날 밤에 자살하였다.[2]
1945년 8월 9일에 만주국 황제 푸이는 쇼와 천황에게 이우의 사망에 대한 조전(弔電)을 보내왔다.[77] 8월 10일에 이우의 뒤를 이어 장남 이청이 공위를 계승하여 운현궁의 재산과 칭호를 상속하였고,[78] 8월 13일에 대좌로 진급 추서되었다.[79] 장례식은 8월 15일 12시에 경성운동장(현재 동대문 운동장)에서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쇼와 천황의 항복 방송 때문에 연기되어[2] 오후 5시에 거행되었다.[80] 조선군사령부 주관의 육군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조선신궁의 궁사가 제주(祭主)로 참여하였다.[81] 장례식에는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 제17방면군 사령관 고쓰키 요시오, 천황 대리로서 궁내부 식부 차장 호조 도시나가가 참석하였다.[82] 유해는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창현리(현재 경기도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에 안장되었다.[83][84] 이우의 묘는 개별적으로 조성되어 있던 운현궁가의 묘를 한 곳에 모아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무덤인 흥원(興園) 주변에 현대식 가족 납골묘의 형태로 다시 조성하면서 개장되었고, 묘에 있던 비석을 비롯한 석물들은 2004년에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되어 박물관 경내에 전시되고 있다.[85] 사망한 이후에 황족의 예에 따라 흥영군(興永君)에 추봉되었으나 정식 시호는 아니며 사시(私諡)이다.
1945년에 광복 이후 제정된 《구황실재산법》에 따라 황실 재산이 국유화되지만 운현궁은 이우의 부인 박찬주가 흥선대원군의 사유 재산이었음을 호소하여 국유화에서 제외되었다.[86] 이우의 장남 이청의 소유로 변경된 뒤에 운현궁의 대지는 분할되어 덕성학원 등에 매각되었고, 1993년에 운현궁이 서울특별시에 매각되었다.[87]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1959년 10월 17일에 이우를 가족의 동의없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하는 영새봉안제(靈璽奉安祭)가 거행되었다.[76] 사망자의 이름, 사망 장소, 사망 날짜 등이 적혀 있는 영새부를 야스쿠니 신사의 어신체가 있는 본전에 놓으면 영새부에 적혀 있던 인간의 혼령이 어신체에 깃들어 신령이 된다는 것이다.[88] 조선인 강제 합사에 대한 야스쿠니 신사의 공식적인 의견은 “사망 시점에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일본을 지킨 신으로 모시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다. 황족과 평민을 같은 자리에 모실 수 없다며 사망한 일본 황족을 따로 분리하여 합사하였던 야스쿠니 신사는 사망 당시에 일본 황족과 동등한 지위였던 이우를 일반 군인과 같은 수준으로 합사하였다. 2007년에 이우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사실이 언론을 통하여 알려지면서 논란이 되었다.[2][76]
1970년 4월 10일에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히로시마 현 본부에 의해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건립되었다.[89] 히로시마 시의 반대로 위령비의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 건립이 어려워지자[90] 이우가 피폭을 당한 후 발견된 장소였던 히로시마 혼가와의 아이오이 교 근처에 세워졌다. 위령비의 전면에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와 함께 ‘이우공 전하 외 2만여 영위’라는 문구가 적혀있고, 뒷면의 비문에는 ‘나라 잃은 왕손이기에 남모를 설움과 고난이 한층 더 했던 이우공 전하를 비롯하여 … 이우공 전하 외 무고한 동포 2만여 위 …’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1999년 7월 21일에 위령비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안으로 이전되었다.[2][89]
2000년대에 이우의 사진과 일화가 각종 포털 사이트와 인터넷 게시판에 소개되면서 네티즌들의 주목을 받았고 ‘얼짱 황손’으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91]

평가

이준용의 장례식에서 (1917년)
경성유치원의 보모 교구치 사다코(京口貞子)는 “어떻게 영민하신지 벌써 일본어도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의 반 정도는 아시고 창가도 매우 잘하신다. 재주와 위엄, 풍채 모두 나무랄 수 없는 훌륭한 귀공자이시다. 기운 차고 침착하시며 영리하시고 남에게는 결코 지지 아니하시려 하는 굳센 성미이시지만 어린 아이들을 매우 잘 돌보아주신다.”고 평하였다.[92][93]
운현궁의 일본인 사무관은 “새로이 결정된 이준공 전하의 계자는 지난 번의 장의에서도 상주가 되셔서 태도가 훌륭하셨는데 나이는 금년 6세이시나 매우 침착하고 영리하신 성격이시다. 매우 활발하신 성격으로 어떠한 때에는 형님되시는 공자보다도 더욱 기운이 차게 보인다.”고 평하였다.[93]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인 일본 황족 아사카 다케히코는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고 항상 마음 속으로 새기고 있었기 때문에 이우는 일본인에게 결코 뒤지거나 양보하는 일 없이 무엇이든지 앞서려고 노력했다.”고 말하였다.[76] 또한 “이우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화나면 조선어를 사용했다. 글자 쓰기도 능숙했고 노래도 잘 불렀는데 일본 노래도 했고 조선 노래도 불렀다. 싸우면 바로 조선어를 쓰니까 종잡을 수가 없었다.”고 말하였다.[2] 운현궁의 가정교사 가네코는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는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있어 일본 육군에서 두려워 했다.”고 증언하였다.[76]
조선일보와 매일신보의 사회부 기자로 활약한 김을한은 “이건 공은 온화한 분이라 문제가 없지만, 이우 공은 측근의 말을 도무지 듣지 않아서 곤란하다.”라는 이왕직 회계과장 사토의 말을 언급하며, 일본인 사무관이 좋지 않게 말하는 것은 이우가 그만큼 영특하다는 반증이므로 만만찮은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고 평하였다.[94]
영친왕비 이방자는 “이우 공은 평소 성격이 활달하면서 명석한데다 일본에 저항적이어서 일본인들에게 말썽꾸러기였다. 일본 것에 대하여 병적이라고 할만큼 싫어하였고, 특히 일본 음식을 아주 싫어하였다. 일본의 간섭에 대해서도 사사건건 반발하는 성격이었다.”고 평하였다.[95]
이우가 일본 제국 육군에 복무하였고, 일본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친일 논란이 있었지만[96] 2009년에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민족문제연구소는 사실상 볼모의 처지였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인명사전 명단에서 제외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왕공족을 포함시킬 것인가의 여부에 대해서는 편찬위원회에서도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 논의 끝에 왕공족의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지만 친일보다는 망국에 대한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묻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다만 기준에 부합하는 구체적인 친일 행위가 있는 경우에는 수록대상자로 선정하기로 정리되었다”고 해명하였다.[97] 이와 더불어 “왕공족은 대한제국 황실을 예우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고안한 일본 황족과 일본 화족, 조선귀족 사이의 특수한 지위로 협력에 대한 대가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면서 “공족 중 이재면과 이준용, 이재곤이해승이재극등 구체적인 매국행위를 일삼은 인사들은 친일 행적으로 사전에 수록되었으나 영친왕 이은과 이우는 사실상 볼모의 처지였음을 감안하여 제외하였다”고 밝혔다.[98]

상훈

이은과 이건, 이우 (1938년)
1888년에 제정된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은 남자에게 수여되는 훈장인 욱일장의 최고위 훈장이다.[102] 일본 정부가 1926년 12월에 공포한 《왕공가궤범》 제58조에 따르면 “공은 만 15세가 넘으면 훈1등에 서훈되어 욱일동화대수장을 받는다”고 규정되어 있다.[25]
대훈위 국화대수장은 일본의 최고위 훈장으로 1876년에 제정되었으며 주로 황족을 대상으로 수여되었다.[104] 영친왕 이은(1920년 4월 27일)[105], 의친왕 이강(1924년 1월 10일)[106], 이건(1940년 11월 3일)[107] 에게도 대훈위 국화대수장이 서훈되었다.[108]
일본 정부는 이우가 히로시마에서 피폭되어 사망하자 육군 대좌로 진급과 함께 공3급 금치훈장을 추서하였다. 금치훈장은 일본이 1890년에 제정한 무공훈장으로 7등급으로 나뉘어 있었고, 계급에 따라 초서(初敍)의 급이 정해져 무공이 누적됨에 따라 진급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우와 같은 좌관(佐官)은 공4급에서 공2급까지의 금치훈장을 수여받을 수 있었다.[109]

가계

흥선군 이하응의 차남 이재황이 왕에 등극하면서 이하응은 대원군이 되었으며 본가는 운현궁이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부친남연군 이구는 본래 인조의 아들 인평대군의 6세손이었으나, 장조(사도세자)의 아들 은신군 이진의 사후 양자가 되었다. 은신군도 사후에 정조의 명으로 숙종의 아들 연령군 이훤의 후사가 되었지만 세대상 조부와 손자 관계이었고, 이미 낙천군이온이 연령군의 양자로 입양된 상황이었다. 운현궁가에서는 가계를 장조로부터 은신군을 거쳐 내려오는 계통이라는 입장을 취하였지만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봉사와 대수를 감안하여 연령군에서 낙천군을 거쳐 은신군으로 이어지는 계보로 정리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적자로 이재면과 이재황을 두었고, 운현궁의 계보는 장자인 재면이 승계하였다. 이재면은 이준용과 이문용을 두었으나, 이문용은 요절하고 이준용은 후사없이 사망하자 의친왕의 차남 이우가 이준용의 양자로 입적하여 운현궁가를 계승하였다.[110]
이우는 부인 박찬주와의 사이에서 이청과 이종을 두었다. 장남 이청은 1954년에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0년에 미국 위스콘신 주 마케트 대학교 토목공학과를 졸업하였다.[86] 엔지니어로 활동하였으며, 2006년에 석파학술연구원을 설립하여 흥선대원군에 대한 연구 작업을 하고 있다.[111] 차남 이종은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3년에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브라운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쳤으며, 박사과정 연수 중이던 1966년 12월 25일에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112][113]


관련 작품

  • 연극 《운현궁 오라버니》, 남산예술센터, 2009년 12월 4일 ~ 12월 13일.

같이 보기

각주

  1. 김을한 (2010년 8월 15일).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페이퍼로드. 58쪽. ISBN 8992920458.
  2. “광복절 특집 다큐멘터리 조선황족 이우, 그는 왜 야스쿠니에 있는가?”. 한국방송공사. 2007년 8월 14일.
  3. 이왕직 (1940). “《이희공계제3세이우공족보》(李熹公系第參世李鍝公族譜)”.
  4. 순종실록부록 (1917년 5월 28일). “궁내 대신 하타노 요시나오가 이강 공의 둘째 아들로 이준 공의 대를 이을 아들로 삼았다는 사실을 고시하다”. 국사편찬위원회.
  5. “내지전보: 이준공 계자 발표” (PDF). 매일신보. 1917년 5월 30일.
  6. 순종실록부록 (1917년 3월 23일). “태왕 전하의 뜻을 받들어 이강 공의 아들을 이준 공의 대를 이을 아들로 삼다”. 국사편찬위원회.
  7. “이준공 후사의 어내의” (PDF). 매일신보. 1917년 3월 25일.
  8. 大蔵省印刷局 編 (1917년 5월 28일). “官報 宮内省 告示 第8号” (일본어).
  9. 순종실록부록 (1917년 8월 4일).“이준 공의 양자 이우 공 집의 재산 관리 및 보육의 후견인으로 이준 공의 비와 이왕직의 장관으로 할 것을 명하다”. 국사편찬위원회.
  10. 정범준 (2006). 《제국의 후예들》. 황소자리. 437쪽. ISBN 8991508189.
  11. 이승우 (2007). 《일제하 일본의 조선 왕실에 대한 인식과 이왕직의 운영》. 동아대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6, 13 ~ 14쪽.
  12. 정범준, 위의 책, 479쪽.
  13. “이우공의 답사, 귀여운 유치원의 졸업식” (PDF). 매일신보. 1918년 3월 29일.
  14. “매화와 꾀고리의 창가” (PDF). 매일신보. 1918년 1월 26일.
  15. 조선총독부 (1919년 2월 3일).“조선총독부관보”.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012년 7월 30일에 확인함.
  16. “이우공 전하 학습원에 유학”. 동아일보. 1922년 4월 7일.
  17. “이우공 전하 작야 동경유학”. 동아일보. 1922년 7월 6일.
  18. “조선인 다수 검속”. 동아일보. 1922년 7월 24일.
  19. 이청 (2007). “〈나의 아버지 이우공〉,《흥선대원군과 운현궁 사람들》 웹도록”. 서울역사박물관.
  20. 大蔵省印刷局 編 (1925년 9월 11일). “官報 李鍝公御移轉” (일본어).
  21. 人事興信所 (1937). 《人事興信録 第11版》 (일본어). 人事興信所.
  22. “이우공 전하 신관에 어이전” (PDF). 매일신보. 1925년 9월 14일.
  23. 순종실록부록 (1926년 4월 26일). “후작 윤택영을 총호원으로 임명하고 이해창, 이해승, 이윤용 등을 종척집사에 임명하다”. 국사편찬위원회.
  24. 순종실록부록 (1926년 5월 10일). “천릉할 때의 수빈원과 종척집사를 임명하다”. 국사편찬위원회.
  25. 조선총독부황실령 제12호 (1941년 7월 10일). “왕공가궤범”. 국가법령정보센터.
  26. 이기동 (1982). 《비극의 군인들》. 일조각. 232쪽. ISBN 2005563002056.
  27. 大蔵省印刷局 編 (1929년 3월 23일). “官報 陸軍省 生徒卒業東京陸軍幼年學校” (일본어).
  28. 정범준, 위의 책, 481쪽.
  29. 大蔵省印刷局 編 (1931년 3월 25일). “官報 陸軍省 生徒卒業陸軍士官學校豫科” (일본어).
  30. “포병연대에 듭신 이우공 전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신후” (PDF). 매일신보. 1931년 3월 19일.
  31. 大蔵省印刷局 編 (1931년 3월 27일). “官報 陸軍省 士官候補生任命竝配當陸軍士官學校豫科” (일본어).
  32. 정범준, 위의 책, 488쪽.
  33. 大蔵省印刷局 編 (1932년 11월 15일). “官報 宮廷錄事 公族御成年李鍝公” (일본어).
  34. 大蔵省印刷局 編 (1932년 11월 17일). “官報 宮廷錄事 公族後見人消滅李鍝公” (일본어).
  35. “이우공 전하 어관례식 거행” (PDF). 매일신보. 1932년 12월 29일.
  36. 大蔵省印刷局 編 (1933년 7월 19일). “官報 陸軍省 生徒卒業陸軍士官學校” (일본어).
  37. “이우공 전하 소위 어임관” (PDF). 매일신보. 1933년 10월 18일.
  38. 이기동, 위의 책, 240쪽.
  39. “양전하 어승임” (PDF). 매일신보. 1935년 10월 11일.
  40. “육군정기이동내명” (PDF). 매일신보. 1936년 7월 29일.
  41. 이기동, 위의 책, 241쪽.
  42. 人事興信所 (1941). 《人事興信録 第13版》 (일본어). 人事興信所.
  43. “육군정기이동발령” (PDF). 매일신보. 1938년 3월 1일.
  44. “가사와 영양에 주력 “경성가정여숙” 신설”. 동아일보. 1940년 8월 9일.
  45. 중앙여자고등학교. “중앙 70년 역사 자료”. 2012년 11월 17일에 확인함.
  46. “이우공 전하 육군대학교 어입교” (PDF). 매일신보. 1938년 12월 28일.
  47. 정범준, 위의 책, 490쪽.
  48. “이우공 전하 어참내” (PDF). 매일신보. 1940년 10월 3일.
  49. “이우공 전하 어입낙” (PDF). 매일신보. 1940년 11월 20일.
  50. “육군이동발표-타케히코왕 이우공 양전하 어진급” (PDF). 매일신보. 1941년 10월 16일.
  51. “일본 육군소좌 이우가 일본육군대학…”. 매일신보. 1942년 3월 12일.
  52. “이우공 전하 불멸 어무훈 어정려하신 어생전” (PDF). 매일신보. 1945년 8월 13일.
  53. 정범준, 위의 책, 491쪽.
  54.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의용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015년 5월 8일에 확인함.
  55. 이기동, 위의 책, 234 ~ 235쪽.
  56. 정범준, 위의 책, 485쪽.
  57. 이기동, 위의 책, 236쪽.
  58. “박후작 영손 찬주양 이우공비로 어내정” (PDF). 매일신보. 1933년 12월 13일.
  59. 이기동, 위의 책, 239 ~ 240쪽.
  60. “이우공 어배우로 박찬주양을 어확정 종질료에서 어약혼 정식발표” (PDF). 매일신보. 1934년 7월 12일.
  61. “이우공 전하 어결혼칙허” (PDF). 매일신보. 1935년 4월 18일.
  62. “이우공 전하 어혼의 3일 동경서 신식으로 어거행 궁중어참내는 4일” (PDF). 매일신보. 1935년 5월 4일.
  63. “이우공 동비 양전하 가례후 어초환가” (PDF). 매일신보. 1935년 6월 29일.
  64. “이우공비 전하 23일 어경사” (PDF). 매일신보. 1936년 4월 24일.
  65. “이우공 전하 어장남 명명” (PDF). 매일신보. 1936년 4월 30일.
  66. “이우공비 전하 제2남자 어분만” (PDF). 매일신보. 1940년 11월 10일.
  67. “이우공 제2공자 ‘종’으로 어명명” (PDF). 매일신보. 1940년 11월 16일.
  68. “이우공 전하 중좌에 어진급” (PDF). 매일신보. 1945년 6월 12일.
  69. 이기동, 위의 책, 243쪽.
  70. 이방자 (1984년 9월 3일). “세월이여 왕조여 (49)원폭 투하”. 경향신문. 2012년 6월 7일에 확인함.
  71. “다큐멘터리 조선의 낙조”. 이상현. 2006.
  72. 読売新聞社 編 (1968). 《昭和史の天皇 4》 (일본어). 読売新聞社. 240 ~ 242쪽.
  73. “이우공 전하 7일 히로시마서 어전사” (PDF). 매일신보. 1945년 8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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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 “어영령 무언의 귀환” (일본어). 경성일보. 1945년 8월 9일.
  76. 길윤형, 스나미 게스케 (2007년 5월 3일). “〈야스쿠니 캠페인〉 조선 황족 이우, 야스쿠니에 있다”. 한겨레21. 2012년 6월 3일에 확인함.
  77. “만주국 황제 폐하 어조전에 어답전” (PDF). 매일신보. 1945년 8월 12일.
  78. 大蔵省印刷局 編 (1945년 8월 11일). “官報 宮内省告示 第21号” (일본어).
  79. “이우공 전하 대좌에 어진급 공삼급금치훈장을 배수” (PDF). 매일신보. 1945년 8월 14일.
  80. “이우공 전하 어장의”. 매일신보. 1945년 8월 16일.
  81. 이기동, 위의 책, 226쪽.
  82. 가토 기요후미 (2010). 《대일본제국붕괴》. 바오. 94쪽. ISBN 8991428088.
  83. 大蔵省印刷局 編 (1945년 9월 1일). “官報 故大勳位李鍝公ノ喪儀ヲ行フ期日、場所及墓所” (일본어).
  84. 류시원 (1996년 6월 10일). 《풍운의 한말 역사 산책》. 한국문원. 151 ~ 152쪽. ISBN 8986095289.
  85. 서울역사박물관 유물관리과 (2011). 《운현궁 생활유물Ⅸ》. 서울역사박물관 유물관리과. 9쪽.
  86. 한진수 (1991년 12월 11일). “인터뷰 대원군 5대 종손 이청씨 “운현궁 판돈 조국서 자선사업””. 동아일보. 2012년 6월 4일에 확인함.
  87. 문화재청 (2002). 《운현궁 양관 실측조사보고서》. 문화재청. 70 ~ 71쪽.
  88. 박형준, 배극인 (2013년 8월 10일). “〈토요판 커버스토리〉 군국의 城, 야스쿠니”. 동아일보. 2013년 11월 8일에 확인함.
  89. 스나미 게스케 (2007년 8월 23일). “반쪽난 히로시마 위령비를 아십니까”. 한겨레21. 2012년 6월 4일에 확인함.
  90. 이승욱 (2005년 2월 10일). “한일 양국의 ‘무시와 방치’… 밀항서 법정투쟁까지”. 오마이뉴스. 2012년 6월 4일에 확인함.
  91. 김경달 (2003년 11월 13일).“〈클릭! 이 주일의 키워드〉‘원조 얼짱’은 대원군 손자 이우”. 동아일보. 2012년 7월 26일에 확인함.
  92. “운현궁의 어린 주인” (PDF). 매일신보. 1917년 3월 29일.
  93. “고 이준공 계자로 작정된 우공자” (PDF). 매일신보. 1917년 5월 30일.
  94. 김을한, 위의 책, 64쪽.
  95. 이방자 (1984년 8월 17일). “세월이여 왕조여 (42)사랑의 승리”. 경향신문. 2012년 6월 13일에 확인함.
  96. 정진석 (2009년 11월 27일). “친일 책임 가장 큰 왕족은 왜 빠졌나”. 주간동아. 2012년 7월 22일에 확인함.
  97.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쟁점과 의의〉, 조세열, 《역사비평》 91호, 2010년 여름호, 284쪽.
  98. 조세열, 위의 책, 296쪽.
  99. 大蔵省印刷局 編 (1929년 10월 28일). “官報 敍任及辭令” (일본어).
  100. 内閣 (1933년 1월 20일). “李鍝公殿下ヲ日本赤十字社名誉社員ニ推崇ノ件” (일본어).
  101. 内閣 (1933년 1월 20일). “李鍝公殿下へ日本赤十字社有功章奉呈ノ件” (일본어).
  102. 일본 내각부. “훈장의 종류(동화대수장)”. 2012년 6월 5일에 확인함.
  103. “타케히코왕, 이우공 양전하께 대훈위” (PDF). 매일신보. 1943년 11월 9일.
  104. 일본 내각부. “훈장의 종류(대훈위국화장)”. 2012년 6월 5일에 확인함.
  105. 순종실록부록 (1920년 4월 27일). “왕세자가 육군 보병 중위에 임명되고 대훈위에 서임되어 국화 대수 훈장을 받다”. 국사편찬위원회.
  106. 순종실록부록 (1924년 1월 10일). “이강 공 부부와 이희 공 비에게 훈위를 내린다는 궁내성의 통지가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107. “다케다노미야, 이건공 양전하 서훈” (PDF). 매일신보. 1940년 11월 5일.
  108. (일본어) 나가노 문고. “대훈위국화장경식·대훈위국화대수장 수장자 일람”. 2012년 6월 1일에 확인함.
  109.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9년 11월 30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3-1》.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422쪽.
  110. 서울역사박물관 유물관리과, 위의 책, 6 ~ 8쪽.
  111. 권재현 (2006년 1월 10일). “이청씨, 한중일 역사자료 종합 ‘흥선대원군…’ 4권 펴내”. 동아일보. 2012년 6월 4일에 확인함.
  112. “이우공 차남 이종씨 크리스마스 이브에 미국서 윤화로”. 경향신문. 1966년 12월 28일. 2012년 6월 4일에 확인함.
  113. 김문택 (2007). “〈운현궁의 가계승계와 그들의 묘비〉,《흥선대원군과 운현궁 사람들》 웹도록”. 서울역사박물관.

참고 문헌

바깥 고리

전 임
이준용 (영선군)
제4대 운현궁 종주
1917년 ~ 1945년
후 임
이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