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프리즘 - 우리 시대의 교양
김현진,이찬수,고병권,김동춘,이대근,천정환,오길영,안수찬,한윤형,은수미 (지은이)
사계절2010-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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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100자평(5)리뷰(18)
책소개
프랑스의 『르 몽드』가 “사상의 은사”라 불렀던 리영희. 민주주의를 꿈꾸고 고민하고 싸웠던 이 땅의 젊은 지성들에게 리영희는 뿌리이자 토대이고 출발점이었다. 이 책은 리영희를 프리즘으로 삼아 우리 시대를 이해하고, 다른 세상, 다른 삶을 위한 새로운 고민을 시작하고자 한다. 리영희의 의미와 영향력을 되새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리영희를 통해서, 리영희가 지녔던 교양의 힘을 매개로 새로운 교양 목록을 제시한다.
리영희의 팔순(2009년 12월 2일)을 축하하고 기념하기 위해서 기획된 책으로, 리영희를 사상의 스승으로 모시는 70,80년대 학번부터 리영희의 제자가 아니었다고 밝히는 90년대 학번, 20대 논객으로 주목받는 2000년대 학번까지 세대를 넘어선 다양한 필자군으로 구성되어, 리영희에 대한 다양한 시선을 읽을 수 있다.
목차
서문: 리영희를 다시 불러내는 이유 - 홍세화
리영희와 생각하기: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고병권
사상의 은사 / 조건반사의 토끼 / 계몽이란 무엇인가 / 의식화의 은사, 의식화의 원흉 / 민주주의, 그 영원한 의식화를 위하여
리영희와 책 읽기: 책 읽기와 청년, 그리고 자유 - 천정환
리영희라는 필독서 / 리영희의 책 읽기 / 리영희 읽기, 도는 읽지 않기 / 오늘날의 책 읽기. 청년. 자유
리영희와 전쟁: 전쟁의 세기 - 김동춘
전쟁이라는 최고의 현실 / 정치로서의 전쟁 /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 한반도의 냉전 체제 / 시장과 전쟁 / 반공,전쟁, 국가주의의 우상 / 제국의 전쟁, 그리고 평화
리영희와 종교: 무신론적인, 그러나 유신론적인 - 이찬수
기독교에 대한 거부 / 예수와 제도 종교의 갈등 / 한국 기독교인은 고대 유대교인 / 우상숭배 금지의 본뜻 / 우상숭배 금지에 대한 오해 / 유일신이라는 말 / 한국 기독교의 정치사회적 배경 / 무신론적인,그러나 유신론적인 / 종교의 안과 밖 /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 최고의 가르침
리영희와 영어 공부: 영어라는 우상 - 오길영
500단어의 유창한 영어 실력 / 영어 몰입 교육의 백일몽 / 영어 울렁증과 실용 영어 / 영어 공부의 본령 / 알맹이 없는 영어 강의 / 리영희의 영어 공부 / 영어를 왜 공부하는가
리영희와 지식인: 다시, 지식인의 책무를 묻다 - 이대근
야만의 시대와 지식인 / 근대적 지식인과 탈근대적 지식인 / 한국 지식인의 자화상 / 한국 사회의 특별 계급 / 다른 세상을 위한 지식인의 책무
리영희와 기자: 진짜 기자의 멸종 - 안수찬
프롤로그 / 소 잃고 외양간 고치다 / 사라진 낭만의 시대 / 기자들의 보험, 출입처 시스템 기자라는 이름의 부속품 / 낯익으면서도 낯선 언론 탄압 / 진실 보도 경쟁이 사라지다 / 기자 리영희의 교훈 / 다른 시대, 다른 기자의 꿈
리영희와 사회과학: 사회과학의 고민 - 은수미
리영희와 사회과학 / 사회과학은 비정규직을 어떻게 보는가 / 비정규직을 말하는 사회과학 / 사회과학의 딜레마 / 공공성에 대한 고민 / 사회과학에 대한 질문
리영희와 청년 세대: 냉소주의 시대의 우상과 이성 - 한윤형
'아버지 세대의 선생님'을 만나다 / 리영희와 청년 문화의 긴장 관계 / 대학생, 자유를 말하다 / 무엇이 우상이고 무엇이 이성인가 / 리영희와 청년 문화의 상실 / 전환이 불가능한 시대의 우상과 이성 / 분열증 시대에 돌아보는 리영희
리영희 인터뷰: 가혹하게 정직하고, 칼날처럼 순결하게 - 김현진
고옥의 일인자 / 레이디, 인텔리겐치아 / 그런 것이 역사다 / 혁명은 온다, 네가 형무소에 갈 때 거절하라! / 물을 건넌 개, 물에 빠진 개 / 피로 쓴다 / 생활은 간소히, 생각은 높게 / 리영희 수난곡, 리영희 스타일, 그리고 사상의 오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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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16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 ‘생각의 스승’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훌륭한 ‘정보’나 ‘견해’를 들려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생각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스승이란 우리에게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존재, 우리를 각성케 하는 모든 존재에게 부여될 수 있는 이름이다.
- 고병권의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중에서 접기
P. 34 어떤 책들은 그냥 종이 뭉치이거나 문장의 집합체가 아니게 된다.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어떤 인간과 같다. 우리는 그 시절에 어떤 이들과 조우함으로써 우리 생을 만들고 또 바꿔 왔다. ‘그/책’은 젊은 날이 성마른 열정과 숭고한 영성을 상징한다. ‘그/책’은 한 시대를 표상하는 이름이며 존재다.
- 천정환의 「책 읽기와 청년, 그리고 자유」 중에서 접기
P. 66 전쟁은 처음부터 끝까지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서, 특정한 정치경제 상황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인간적.인문학적 현실임과 동시에 적나라한 정치적.사회적 현상이다. 따라서 전쟁은 언제나 동일한 방식으로 나타나지도 않고 또 그것을 겪은 군인들이나 민간인들에게 동일하게 체험되지도 않는다.
- 김동춘의 「전쟁의 세기」 중에서
P. 88 율법의 ‘문자’가 아닌 ‘정신’을 실현하고자 한 예수가 율법을 거스른다는 이유로 율법가들에 의해 희생되었는데, 예수를 따른다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다시 예수를 죽인 율법가의 편에 선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예수의 정신을 여전히 반대로 알아듣는다. 사람들을 문자와 제도 안에... 더보기
P. 109 당시 강연장을 가득 메운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원어민’들도 그의 발음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이 관심을 기울인 것은 지젝의 어색한 발음이 아니라 강연에서 그가 주장했던 독창적인 사유의 내용이었다. 원어민 발음과 거리가 먼 영어를 구사하는 지젝은 원어민을 능가하는 유려한 글쓰기 능력으로 자신의 저서를 대부분 영어로 쓴다. 그런 능력은 500단어의 유창한 영어 발음으로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오길영의 「영어라는 우상」 중에서 접기
P. 144 리영희는 사르트르를 인용해 자유의 의미를 절절하게 전했다. 사르트르는 독일 점령하에 있을 때처럼 자유로웠던 때가 없었다고 한다. 일체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매일 정면으로 모욕을 당할 때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자유라고 했다. 막다른 골목에 쫓겨 있었던 까닭에 거동 하나하나가 앙가주망의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고 했다.
- 이대근의 「다시, 지식인의 책무를 묻다」 중에서 접기
P. 157~158 기가 막힌 노릇이지만, 이는 국소 마취의 수법이다. 시장주의의 모르핀으로 언론의 발을 마비시켰다. 방송 시장이 개방된다는데, 방송이 신문 광고를 다 빼앗아 간다는데, 이 언론사가 망하면 너는 어디 가서 잘난 기자 노릇을 할 것이냐고 겁박하는 방식이다. 기자들이 겁먹었다는 증거는 허다하다.
- 안수찬의 「진짜 기자의 멸종」 중에서 접기
P. 184~185 학문의 역사는 가설의 역사일지도 모른다. 연구자는 아직 입증되지 않은 자신의 논리, 예를 들어 “파업권 보장 없이 민주주의는 없다”는 가설을 제시하고 그것을 입증하려 한다. 학문은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가설을 통해 재구성된다. 하지만 가설을 주장하고 입증하는 것이 학문 외부의 강제에 의해 불가능하여 가설이 가설로만 남는다면 그것은 학문 세계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로 바뀐다.
- 은수미의 「사회과학의 고민」 중에서 접기
P. 204 예비 노동자인 대학생들은 자신을 착취해주기를 간절하게 바랄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대학생들이 바라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편입’이다. 자본주의로부터의 자유, 노동할 의무로부터의 자유를 꿈꾸지 못하고 자본주의 사회로 편입하기를, 정규직으로 편입하기를, 그러기 위해 좋은 대학으로 편입하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 하지만 하루하루 편입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의 삶 속에선, 우상은 바로 우리의 삶 그 자체다.
- 한윤형의 「냉소주의 시대의 우상과 이성」 중에서 접기
P. 232~233 그래도 날렵한 몸으로 채찍을 휘두르며 ‘포티 파이브’ 권총으로 백발백중의 사격 솜씨를 자랑하는 탐험복 차림의 고고학자 리영희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캐릭터로 본다면, 절대 인디아나 존스는 아니다. 아무리 적이라 해도 타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함정에 빠뜨리거나 자동차에서 떨어뜨리거나 하는 건 도저히 ‘리영희 스타일’이 아니다.
- 김현진의 「가혹하게 정직하고, 칼날처럼 순결하게」 중에서 접기
추천글
이 책은 고민하는 청춘들의 영원한 스승, 리영희를 다시 불러낸다. 리영희를 프리즘으로 삼아 우리 시대를 이해하고, 다른 세상, 다른 삶을 위한 새로운 고민을 시작하고자 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지부터(고병권), 책 읽기(천정환), 전쟁(김동춘), 종교(이찬수), 영어 공부(오길영), 지식인(이대근), 기자(안수찬), 청년 세대(한윤형)에 이르기까지 리영희를 매개로 우리 시대 교양의 기초를 다지고자 한다.
- 인문사회과학출판인협의회(인사회)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한겨레
- 한겨레 신문 2010년 2월 19일 잠깐 독서
중앙일보
- 중앙일보(조인스닷컴) 2010년 2월 20일 북 브리핑
저자 및 역자소개
김현진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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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영화와 서사창작을 공부했다. 에세이 《네 멋대로 해라》를 시작으로 〈한겨레〉 〈경향신문〉 〈조선일보〉 〈시사IN〉 등 여러 매체에 글을 실었고, 《내가 죽고 싶다고 하자 삶이 농담을 시작했다》 《지지 마, 당신》 《뜨겁게 안녕》 등의 에세이집과 연작소설집 《정아에 대해 말하자면》, 장편소설 《녹즙 배달원 강정민》 등을 썼다. 어떤 상처를 받아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때려눕혀 이겨내는 강인함보다 상처를 그대로 지닌 채로도,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을 안은 채로도, 그래서 목 놓아 울다가도 천천히 다시 일어나 나아가는 이들의 묵묵한 슬픔에 늘 마음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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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큰글자책] 나의 유기동물 애정기>,<나의 유기동물 애정기>,<[큰글자책] 한국의 발견> … 총 59종 (모두보기)
이찬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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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사상과 문화, 동아시아의 종교와 평화 연구자. 서강대학교 화학과를 거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일본의 철학자 니시타니 케이지와 독일의 신학자 칼 라너의 사상을 비교하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남대 교수,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일본)코세이 가쿠린 객원교수, (일본)중앙학술연구소 객원연구원, (일본)난잔대학 객원연구원, 성공회대 대우교수, 보훈교육연구원장 등을 지냈다.
『일본정신』,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교토학파와 그리스도교』, 『다르지만 조화한다』, 『평화와 평화들』, 『사회는 왜 아픈가』, 『아시아평화공동체』(편저), 『평화의 여러가지 얼굴』(공편저), 『근대 한국과 일본의 공공성 구상』(공저), 『北東アジア·市民社会·キリスト教から観た平和』(공저), 「비전(非戰), 반군국주의, 비핵화로서의 평화: 일본 평화개념사의 핵심」, 「平和はどのように成り立つのか」, 「北朝鮮の民間信仰」 등 80여 권의 단행본(공저서, 번역서 포함)과 90여 편의 논문을 출판했다.
현재 인권평화연구원 공동원장으로 일하면서 가톨릭대에서 평화학을 강의하고 있다. 접기
최근작 : <실패의 인문학>,<동학과 서학>,<메이지의 그늘> … 총 62종 (모두보기)
고병권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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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의집’과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공부하며 살아간다. 생의 최소 단위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언더그라운드 니체』, 『다이너마이트 니체』, 〈북클럽 『자본』〉 시리즈(전 12권),『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묵묵』, 『사람을 목격한 사람』, 『“살아가겠다”』,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 『추방과 탈주』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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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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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사회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역사비평》 편집위원, 《경제와사회》 편집위원장, 참여연대 정책위원장, 참여사회연구소 소장을 역임했고,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했다. 제20회 단재상, 제15회 송건호언론상, 제18회 임종국상을 수상했다. 현재 성공회대학교 명예교수이다.
저서로 『전쟁과 사회』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 『권력과 사상통제』 『고통에 응답하지 않는 정치』 『시험능력주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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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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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대학교 국방정책대학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고려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경향신문 편집국장 및 논설고문,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 자문위원, 북한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북한군사 문제를 넘어 한반도 평화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 저서로는 『북한 군부는 왜 쿠데타를 하지 않나』, 『김정은 시대 조선로동당』(공저), 『북한군사문제의 재조명』(공저), 『북한의 당·국가기구·군대』(공저) 등이 있다.
최근작 : <12개 렌즈로 보는 남북관계>,<당신은 정의로운 사람입니다>,<나는 천천히 울기 시작했다> … 총 9종 (모두보기)
천정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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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지성사와 현실의 문화정치에 관한 관심을 바탕으로 다양한 연구 성과와 문화 비평을 발표해 왔다. 《근대의 책 읽기》, 《조선의 사나이거든 풋뽈을 차라》, 《근대를 다시 읽는다》(공저), 《1960년대를 묻다》(공저), 《대중지성의 시대》, 《자살론》, 《촛불 이후, k-민주주의와 문화정치》, 《숭배 애도 적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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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길영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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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와 뉴욕주립대에서 영문학과 비교문학을 공부하고 영문학 박사를 받았다. 비평이론, 현대영미소설, 비교문학 등이 주요 연구 분야이다. 현재 충남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있으며 문학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영화애호가이기도 하다. 저서로 평론집 『아름다움의 지성』(2020), 『힘의 포획』(2015), 산문집 『영화의 풍경, 세상의 풍경』(2025), 『아름다운 단단함』(2019), 연구서, 『세계문학공간의 조이스와 한국문학』(2013) 등이 있다.
최근작 : <문학, 앞서가는 시계>,<영화의 풍경, 세상의 풍경>,<[큰글자책] 아름다운 단단함> … 총 19종 (모두보기)
SNS : //facebook.com/ogyjoyce
안수찬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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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교수. 《한겨레》 기자, 《한겨레21》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지은 책으로 《4천원 인생》(공저), 《뉴스가 지겨운 기자》 등이 있다.
최근작 : <고등학생운동사>,<4천원 인생>,<대통령의 7시간 추적자들> … 총 17종 (모두보기)
한윤형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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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대구에서 태어나, 학창시절은 대전에서 보냈다. 성년 이후에는 서울의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 20대엔 한국 사회의 청년세대 문제, 미디어 문제, 그리고 현실정치에 관한 글을 주로 써왔다. 30대엔 3년의 기자생활을 했으며 이후 몇몇 여론조사기관과 선거컨설턴트 업체에서 일했다. 《뉴라이트 사용후기》(2009),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2013), 《미디어 시민의 탄생》(2017), 《상식의 독재》(2024) 등을 홀로 썼고,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2011),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제》(2011), 《추월의 ... 더보기
최근작 : <대통령의 자격>,<상식의 독재>,<아무도 행복하지 않은 나라> … 총 25종 (모두보기)
은수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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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한 뒤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정책국장으로 일하다 체포되어 6년 가까이 수감생활을 했다. 1997년 출소 뒤, 대학에 복학해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노동연구원,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노동정책 자문위원, 청년유니온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했고, 민주통합당 비례대표로 19대 국회위원을 지냈다. 2016년 테러방지법을 반대하는 필리버스터를 10시간 18분 동안 했고, 같은 해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했다. 여러 학교, 시민단체, 노동조합 등에서 ‘노동, 청년, 정치’를 주제로 한 ... 더보기
최근작 : <만국의 알바여, 정치하라>,<정치의 시대 세트 - 전4권>,<은수미의 희망 마중> … 총 23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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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어느 날 밤하늘을 탈탈탈 털었더니>,<컵라면에도 알고리즘이 필요하다고?>,<내 보물 ㅎㅎㅎ>등 총 1,301종
대표분야 : 청소년 인문/사회 2위 (브랜드 지수 271,558점), 전쟁/평화 이야기 2위 (브랜드 지수 17,863점), 청소년 소설 2위 (브랜드 지수 809,718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이 책은 리영희에게 바치는 책이 아니다. 리영희에게 바치는 책은 그 누구보다도 리영희가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그것을 모른다면 그를 ‘사상의 스승’으로 부를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글을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행위”인데, 어떻게 헌사 따위가 바쳐지는 자리에 스스로 서겠는가. - 홍세화의 「서문 : 리영희를 다시 불러내는 이유」 중에서
1. 사상의 은사, 리영희를 다시 불러낸다
프랑스의 『르 몽드』가 “사상의 은사”라 불렀던 리영희의 책 『전환시대의 논리』는 “사회과학 서적으로는 처음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저작”이다. 시대를 고민하는 청춘들에게 리영희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고 “머릿속에서 지진을 일으키”고 “몽롱한 의식에 끼얹은 찬물 한 바가지”였다. 리영희로 말미암아 눈을 뜨고 세계를 인식하고, 이전과 다른 존재로서 생을 만들고 바꾸어간 청년들은 시대의 한 가운데로 투신했다. 민주주의를 꿈꾸고 고민하고 싸웠던 이 땅의 젊은 지성들에게 리영희는 뿌리이자 토대이고 출발점이었다. 그렇게 한국 현대사의 비판적 지성의 상징, 리영희는 우리 시대 민주주의를 향한 여정의 출발점이다. 이 책은 고민하는 청춘들의 영원한 스승, 리영희를 다시 불러낸다.
2. 리영희라는 이름의 교양, 우리 시대 교양의 기초를 다진다
리영희는 깨어 있고자 한 청춘들이 읽어야 할 필독서였고, 알아야 할 교양의 첫 번째 목록이었다. 여기서 교양이란 속류화된 호사 취미나 잡다한 지식을 지시하지 않는다. 일찍이 플라톤은 교양이란 “영혼의 건강과 같은 것, 혹은 아름다움이나 반듯하게 배우고 알아야 할 최대의 덕”을 의미하고, 교양을 구현해낸 이상적인 인간상인 철학자는 “폴리스에 대한 사랑, 즉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봉사할 줄 아는 덕을 지향해야 한다”고 했다.(이광주, 『교양의 탄생』(한길사) 중에서) 또 재일 디아스포라 학자 서경식은 신자유주의 전체주의가 지배하고 전쟁이 일어나는 시대에 교양의 자리를 묻는다.(서경식 외, 『교양, 모든 것의 시작』(노마드) 중에서)
무지몽매한 우상이 지배하던 시대에 이성의 힘으로 맞서 싸운 리영희는 교양의 의미를 올곧게 보여주었다. 리영희라는 이름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일깨우는 고민의 바탕이었고, 수많은 청춘들이 스스로 서게 하는 교양의 힘이었다. 7,80년대 민주주의를 향한 거대한 물결은 바로 ‘세미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자발적인 ‘교양’ 공부의 토대 위에 있었다. 이 책은 리영희를 프리즘으로 삼아 우리 시대를 이해하고, 다른 세상, 다른 삶을 위한 새로운 고민을 시작하고자 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지부터(고병권), 책 읽기(천정환), 전쟁(김동춘), 종교(이찬수), 영어 공부(오길영), 지식인(이대근), 기자(안수찬), 청년 세대(한윤형)에 이르기까지 리영희를 매개로 우리 시대 교양의 기초를 다지고자 한다.
3. 리영희를 불러내는 또 하나의 방법
이 책은 리영희의 팔순(2009년 12월 2일)을 축하하고 기념하기 위해서 기획되었다. 그러나 어떤 금기도 허용치 않고 우상에 맞섰던 리영희에게 헌사는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이 책은 일방적인 존경과 흠모를 보내는 보통의 헌정 도서와 다르게 구성되었다. 리영희의 의미와 영향력을 되새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리영희를 통해서, 리영희가 지녔던 교양의 힘을 매개로 새로운 교양 목록을 제시한다. 리영희는 새로운 교양을 촉발하는 원재료이고, 다양한 교양의 목록을 묶어주는 고리의 역할을 한다. 또 서문을 쓴 홍세화를 필두로, 리영희를 사상의 스승으로 모시는 70,80년대 학번부터 리영희의 제자가 아니었다고 밝히는 90년대 학번, 20대 논객으로 주목받는 2000년대 학번까지 세대를 넘어선 다양한 필자군으로 구성되어, 리영희에 대한 다양한 시선을 읽을 수 있다.
[주요 내용]
리영희와 생각하기 :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_ 고병권
리영희가 ‘사상의 은사’라 불리는 점에 착안하여, 생각을 낳아준 스승이란 무엇인가,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탐색한다.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 ‘생각의 스승’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그가 정보나 견해, 지식을 전달한 사람이 아니라, 생각하기 즉 각성을 전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스승이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에게 부여되는 이름이다. 리영희는 생각 없음의 상태/체제에 도전하여 생각할 것을 일깨웠고, 생각한다는 것은 기존의 굳은 관념, 견해에 의한 조건반사의 반응을 넘어서는 것이다. 바로 생각의 전제, 토대조차 무너뜨리고 생각하는 것이고, 그것이 계몽이고 각성이고 다른 사람이 되는 주체 변형의 의식화다.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 ‘생각의 스승’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훌륭한 ‘정보’나 ‘견해’를 들려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생각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스승이란 우리에게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존재, 우리를 각성케 하는 모든 존재에게 부여될 수 있는 이름이다. _ 16쪽, 고병권의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중에서
리영희와 책 읽기 : 책 읽기와 청년, 그리고 자유 _ 천정환
독서의 문화사라는 관점에서 책 읽기를 통해 형성되고 발현되는 정신사의 풍경을 서술한다. 리영희의 독서 이력과 리영희를 읽고 또 읽지 않던 70,80년대 책 읽기의 문화사를 살펴보며, 책 읽기와 자유의 관계에 질문을 던진다. 식민지 시대 일본어로 된 문학 책으로 시작하여, 국제관계 저널리스트이자 진보적 지식인으로서 사회과학 서적의 탐독으로 이어진 리영희의 책 읽기는 당대의 문화-정치의 맥락과 맞물려 한국 지성사의 서술로 이어진다. 수많은 청년들이 책 읽기를 통해 존재를 건 모험에 나섰던 70,80년대 리영희가 ‘필독서’에서 ‘선택 교양’으로 전환되는 맥락 속에서 책 읽기와 자유, 책 읽기와 정치의 관계를 짚어본다.
어떤 책들은 그냥 종이 뭉치이거나 문장의 집합체가 아니게 된다.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어떤 인간과 같다. 우리는 그 시절에 어떤 이들과 조우함으로써 우리 생을 만들고 또 바꿔 왔다. ‘그/책’은 젊은 날이 성마른 열정과 숭고한 영성을 상징한다. ‘그/책’은 한 시대를 표상하는 이름이며 존재다. _ 34쪽, 천정환의 「책 읽기와 청년, 그리고 자유」 중에서
리영희와 전쟁 : 전쟁의 세기_ 김동춘
리영희라는 지식인이 전쟁이라는 최고의 현실을 어떻게 마주했는지를 살펴보며, 20세기 한반도와 주변에서 벌어진 전쟁의 역사와 경험을 되짚는다. 전쟁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관계들도 파괴하고 새로운 관계들을 만들어낸다. 전쟁은 모든 것을 뒤집어버리는 일종의 혁명이다. ‘제국’의 프로젝트인 전쟁은 국제 질서를 뒤흔들 뿐 아니라 국내의 정치 질서도 지배하는 정치사회적 사건이자 현상이다. 『전쟁과 사회』의 저자이자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문제를 천착한 김동춘 교수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냉전 체제의 속살을 파헤친다.
전쟁은 처음부터 끝까지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서, 특정한 정치경제 상황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인간적 ? 인문학적 현실임과 동시에 적나라한 정치적 ? 사회적 현상이다. 따라서 전쟁은 언제나 동일한 방식으로 나타나지도 않고 또 그것을 겪은 군인들이나 민간인들에게 동일하게 체험되지도 않는다. _ 66쪽, 김동춘의 「전쟁의 세기」 중에서
리영희와 종교 : 무신론적인, 그러나 유신론적인 _ 이찬수
일관된 종교 비판자였지만 종교의 가치를 좇았던 리영희를 통해, 제도와 교리에 갇힌 기성 종교를 비판하고 진정한 종교 정신을 되새긴다. 종교 간 갈등은 교리의 차이가 아니라 교리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예수는 유대교 율법의 ‘정신’을 살리려 했지만, 율법의 ‘문자’ 자체에 매달린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기독교의 우상숭배 금지, 유일신 사상도 이와 같이 교리를 문자 자체로 해석하여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 제도와 교리 속에 담겨진 정신은 뒷전으로 밀리고, 정신이 형상화된 제도와 교리에 치우친 기성 종교를 비판하며, 보편적인 종교 정신을 강조한다.
율법의 ‘문자’가 아닌 ‘정신’을 실현하고자 한 예수가 율법을 거스른다는 이유로 율법가들에 의해 희생되었는데, 예수를 따른다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다시 예수를 죽인 율법가의 편에 선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예수의 정신을 여전히 반대로 알아듣는다. 사람들을 문자와 제도 안에 가두어 두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며 강권한다. _ 88쪽, 이찬수의 「무신론적인, 그러나 유신론적인」
리영희와 영어 공부 : 영어라는 우상 _ 오길영
영어 실력이 사회적 성공의 보증수표로 여겨지는 시대, 영어를 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따져보고, 일찍이 외국어 공부에 매진한 리영희의 사례를 통해 올바른 영어 공부와 방법에 대해 논한다. 실용주의와 시장주의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영어 실력은 실용성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 실용의 수준이 텍스트 독해력과 사고의 조직력 등을 배제한 ‘관광 영어’ 수준으로 이해되고, 영어 공부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필요한지에 대한 고민 없이 모든 사람에게 강요된다. 서투른 발음에도 영어 원어민들을 압도하는 지젝과 영어 공부하는 목적과 방법을 명확히 하고 영어를 익힌 리영희를 통해 영어 공부의 본령을 제시한다.
당시 강연장을 가득 메운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원어민’들도 그의 발음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이 관심을 기울인 것은 지젝의 어색한 발음이 아니라 강연에서 그가 주장했던 독창적인 사유의 내용이었다. 원어민 발음과 거리가 먼 영어를 구사하는 지젝은 원어민을 능가하는 유려한 글쓰기 능력으로 자신의 저서를 대부분 영어로 쓴다. 그런 능력은 500단어의 유창한 영어 발음으로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_ 109쪽, 오길영의 「영어라는 우상」 중에서
리영희와 지식인 : 다시, 지식인의 책무를 묻다 _ 이대근
저항적 지식인의 전형인 리영희의 퇴장을 곱씹으며, 민주화 이후 변화된 지식인의 위상과 역할에 대해 따져본다. 민주화가 진행되고 분노와 저항의 시대를 헤쳐온 지식인 리영희가 물러났지만, 한국사회는 인간다운 사회와 가까워지지 못했다. 신자유주의가 지배하고 시장에 휘둘리는 정글 사회로 변모하고, 불평등과 억압은 세련되게 변형되고 교묘해졌다. 탈근대적 현상들로 탈근대 지식인론이 논의되지만, 근대적 과제와 탈근대적 과제가 중첩되어 있는 한국사회에서 탈근대적 지식인론이 근대적 지식인론을 대체할 수는 없다. 삶의 질이 악화되고 더욱 뿌리 깊은 억압과 불평등이 만연한 이 시대에 지식인의 책무에 대해 다시 묻는다.
리영희는 사르트르를 인용해 자유의 의미를 절절하게 전했다. 사르트르는 독일 점령하에 있을 때처럼 자유로웠던 때가 없었다고 한다. 일체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매일 정면으로 모욕을 당할 때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자유라고 했다. 막다른 골목에 쫓겨 있었던 까닭에 거동 하나하나가 앙가주망의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고 했다. _ 144쪽, 이대근의 「다시, 지식인의 책무를 묻다」 중에서
리영희와 기자 : 진짜 기자의 멸종 _ 안수찬
IMF 이후 시장에 노출되어 생존 경쟁에 돌입한 언론사의 현실 아래서, 기자들은 조직의 부속품이 되어갔다. 단독자 기자는 사라지고 매체마다 정형화된 기사가 넘쳐났다. 『시사저널』 사태는 시장 압력에 굴복한 대표적 사례다. 또 기업 이윤이라는 논리로 진행되는 언론 탄압은 민주 정부 시절의 언-권 유착에서 영감을 얻었고, 역시 시장주의와 관련된다. 기자 사회의 낭만에 빠지지 않고 기자라는 명함에도 연연하지 않으며 권력과 긴장했던 진짜 기자 리영희를 되새기며, 기자의 존재 조건과 기자 정신을 되새기고자 한다.
기가 막힌 노릇이지만, 이는 국소 마취의 수법이다. 시장주의의 모르핀으로 언론의 발을 마비시켰다. 방송 시장이 개방된다는데, 방송이 신문 광고를 다 빼앗아 간다는데, 이 언론사가 망하면 너는 어디 가서 잘난 기자 노릇을 할 것이냐고 겁박하는 방식이다. 기자들이 겁먹었다는 증거는 허다하다. _ 157~158쪽, 안수찬의 「진짜 기자의 멸종」 중에서
리영희와 사회과학 : 사회과학의 고민 _ 은수미
비정규직 문제를 천착하는 사회과학 연구자로서 사회과학의 입장과 역할, 딜레마 등에 대한 고민을 풀어낸다. 사회과학이 비정규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를 사회과학의 고전적 주제인 개인과 사회의 관계의 맥락에서 뒤르켐과 리프킨, 스티글리츠를 참조한다. 사회과학이 비정규직을 말하고 대변하는 것의 의미를 아렌트의 공론장에서 자리 확보의 논의와 만하임의 지식사회학 논의를 연관 지어 고민한다. 또 사회과학이 연구대상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 공공성이란 무엇인지, 사회과학이란 무엇인지 등에 대한 고민을 깊이 있고 진솔하게 풀어낸다.
학문의 역사는 가설의 역사일지도 모른다. 연구자는 아직 입증되지 않은 자신의 논리, 예를 들어 “파업권 보장 없이 민주주의는 없다”는 가설을 제시하고 그것을 입증하려 한다. 학문은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가설을 통해 재구성된다. 하지만 가설을 주장하고 입증하는 것이 학문 외부의 강제에 의해 불가능하여 가설이 가설로만 남는다면 그것은 학문 세계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로 바뀐다. _ 184~185쪽, 은수미의 「사회과학의 고민」 중에서
리영희와 청년 세대 : 냉소주의 시대의 우상과 이성 _ 한윤형
1980년대생의 젊은 필자가 ‘아버지 세대의 선생님’ 리영희를 매개로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청년 문화의 양태, 속내를 정리한다. 70년대 통기타 문화와 리영희의 긴장 관계부터 민중문화가 주도하던 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이론이 유행하던 90년대를 개괄하면서, 우상과 이성의 분별이 가능한지를 질문한다. 또 청년 문화가 상실되고 상품화된 대중문화로 대체되어 버린 지금 청년들의 삶의 조건과 정서, 욕망을 설명한다. 노동자마저 자본가의 사유를 내면화해, 우리 삶 자체가 우상화되어버린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스스로의 삶 자체에 대한 치열한 성찰을 요구한다.
예비 노동자인 대학생들은 자신을 착취해주기를 간절하게 바랄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대학생들이 바라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편입’이다. 자본주의로부터의 자유, 노동할 의무로부터의 자유를 꿈꾸지 못하고 자본주의 사회로 편입하기를, 정규직으로 편입하기를, 그러기 위해 좋은 대학으로 편입하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 하지만 하루하루 편입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의 삶 속에선, 우상은 바로 우리의 삶 그 자체다. _ 204쪽, 한윤형의 「냉소주의 시대의 우상과 이성」 중에서
리영희 인터뷰 : 가혹하게 정직하고, 칼날처럼 순결하게 _ 김현진
일찍이 고등학교를 박차고 나온 ‘불량소녀’로 알려졌고, 20대 필자로 다양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는 김현진이 거인 리영희를 만났다. 패거리를 만들지 않고 올곧게 독립적으로 진실만을 추구했던 리영희의 삶을 ‘리영희 스타일’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하고 지식인과 변혁, 혁명, 역사, 자본주의, 자유 등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리영희는 엄격하고 단단하고 날카로운 솜씨로 질문에 답하는 한편, 어린 손녀의 물음에 응해주는 따뜻하고 지혜로운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인다.
그래도 날렵한 몸으로 채찍을 휘두르며 ‘포티 파이브’ 권총으로 백발백중의 사격 솜씨를 자랑하는 탐험복 차림의 고고학자 리영희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캐릭터로 본다면, 절대 인디아나 존스는 아니다. 아무리 적이라 해도 타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함정에 빠뜨리거나 자동차에서 떨어뜨리거나 하는 건 도저히 ‘리영희 스타일’이 아니다. _ 232~233쪽, 김현진의 「가혹하게 정직하고, 칼날처럼 순결하게」 중에서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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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얼 먹어도 물을 싸는, 뭐 다소 흔한 질병에 걸렸다. 흔한 질병이긴 하나 그 원리가 참으로 신묘하다 아니 할 수 없다. 대처 방법 또한 그렇다. 물을 많이 배출하므로 물을 많이 먹어라. 당연한 말이긴 해도, 내 몸이 들어온 물을 그대로 내보내는 한 줄기 파이프가 된 것 같아 놀랍고 비참하다. 항쟁의지가 남다른 괄약근의 철벽수비가 아니었다면 훨씬 더 ... 더보기
syo 2017-11-20 공감 (40) 댓글 (13)

시이소오님의『모두를 위한 페미니즘』리뷰를 읽고 쓰는 글이 맞지만, 시이소오님의 견해를 지적하거나 반박할 의사가 없습니다. 첫째, 시이소오님은 syo가 깔 수 있을만큼 어쭙잖은 말을 하는 분이 절대 아니고, 둘째, syo는 시이소오님의 글을 깔 수 없을만큼 어쭙잖은 말을 하는 놈이고, 셋째, 설령 미라클적으로 앞의 두 조건이 모두 만족된다 하더라도, 시이소오... 더보기
syo 2017-11-12 공감 (42) 댓글 (28)

오늘 읽은 책에서 1 일반적으로 여자는 남자에 비해 뇌세포 수가 적기 때문인지(일본인 뇌 무게의 평균치는 남자 1372.9그렘, 여자 1242.8 그램) 천박함과 어리석음을 그 바탕으로 하며, 또 그것이 매력이 되기도 하지만 천박함과 어리석음이 이렇게까지 심해지면 그냥 넘어갈 수 없게 된다. _ 다치바나 다카시,「시대와 상황의 병리학」,『문명의 역설』에... 더보기
syo 2017-11-09 공감 (33) 댓글 (9)
책의 정체를 알수 없는 책, 차라리 이영희 선생님의 "대화"를 읽는게...

ksigene 2010-10-29 공감 (1) 댓글 (0)
마이리뷰
리영희를 통해 본 대한민국
'리영희'라는 이름은 이제는 보통명사가 된 느낌이다. 물론 나는 그를 책에서 표현하듯 '사상의 은사'로 모신 그런 70년대 세대는 아니다. 그렇다고 그를 수정주의자라 여기며 극복해야할 대상으로 여긴 80년대 세대도 아니다. 오히려 '리영희'라는 이름을 듣고도 "이게 뭥미?"하고 뜨악하게 쳐다보는 지금의 보통 세대들과 거의 다르지 않은 90년대 세대다.
'리영희'라는 이름은 많이 들어왔지만, 정작 그의 저서를 접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놀고 술마시느라 바빴으니 당연하지). 96년 어느날 동아리방에 너덜너덜해진 책 한 권이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 책의 제목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제목의 책이었다. 그 책 제목의 계시와도 같은 강렬함에 이끌려 난생 처음으로 책 도둑질을 했다(도둑질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이 책을 빌리고 반납하지 않은지 14년이 다 되어가니 훔친거나 다름없다. 깊이 반성한다...). 국제 정세와 한국 정세를 판단한 그 책은 생각보다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으나, 대결의 구도가 아닌 조화의 구도를 그려냈다는 점에서, 그 어떤 문학보다도 감동적으로 다가온 경험이 있다.
그리고 한동안 잊고 살았다. 선생이 중풍에 쓰려졌다는 소식을 접했을때도, "아, 어쩌나"라는 생각뿐이었고, 구술 자서전 『대화』가 나왔을때도 "아!"라는 감탄뿐이었지, 그의 저작을 찾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세상은 어차피 잘만 돌아가니까.
『리영희 프리즘』. 이 책을 읽고나서야 깨달았다. 그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이었는가를. 이 책에 있는 글들은 '리영희'라는 존재를 통해 지금의 대한민국과 지금의 우리들을 바라본다. 어떤 것은 놀랄만한 경탄을 이끄는 글들도 있고, 또 어떤 것은 참신한 시선이라며 무릎을 치게 하는 글들도 있지만, 어떤 것은 "이건 뭥미?"하는 핀트를 벗어난 글도 있다.
열 명의 저자들이 얘기하는 담론들- 생각하기, 책 읽기, 전쟁, 기독교, 영어, 지식인, 기자, 사회과학, 청년문화, 자유 -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진단할 수 있는 열쇳말이기도 하다. 이 담론들이 '리영희'라는 스펙트럼을 통해 이야기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의 시대'를 살아온 세대들에겐 당연한 중언부언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으나, '리영희'라는 인물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놀라움과 경의감을 느낄 것이다.
홍세화 씨가 서문에 밝혔듯이, 이 책은 '리영희'라는 우상 만들기에 관한 책이 아니다. 우상 파괴를 역설한 사람이 스스로 우상이 되는 것을 어떻게 견디겠는가. 이 책은 이제는 우리가 잊어버린, 그래서 '폐기처분해도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감히" 지닌 '리영희'라는 인물이, 사상이, 삶이 아직까지 우리 시대에 유효하다는 것을 역설한다. 일제시대와 해방과 분단과 전쟁과 독재와 민주화를 말 그대로 "온몸으로" 견디어낸 인물의 생각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다. 그는 늙었지만 낡지 않았다. 지금이나마 "선생님"을 알게되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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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ng 2010-03-08 공감(29)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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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프리즘
나는 리영희를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 이 책의 누구 말 마따나 리영희는 알지도 못하고 진중권과 홍세화를 통해 의식화된 21세기의 대학생이 바로 나이다. 그의 글은 쪽글 하나 읽어본 적 없으면서 그의 팔순을 기념하는 책부터 읽는다는 것이 웃기긴 하지만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숨겨진 의도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리영희를 모르는 이 시대의 누군가에게 그의 정신을 일러주는 것. 이렇게 그를 모르는 것이 당연한 현실이 영구해지기 전에 정신차리라고 볼때기를 때려주는 역할 말이다. 이 책을 읽고나서 보니 요즘 세대 지식인과 다른 리영희만의 특징은 그는 외로운 시대를 외롭게 살았다는 점이다. 할 말 하는 댓가로 키보드워리어들과 전투를 치뤄내고 무식한 대중들과 맞짱을 떠야 하는 요즘 지식인들과 달리 그는 무엇이 진실이고 정의인지 겨룰 상대도 없던 적막의 시대를 살았다. 요즘 지식인들이 '디-워는 돈내고 봐주는게 한국인의 도리'라고 우기는 개념없는 애들 상대해주기 피곤하긴 하지만 그래도 혼자였던 리영희보단 덜 외롭지 않을까. 먹고 살기는 커녕 목숨 부지하기도 힘들고 반공 이데올로기는 두꺼운 장막처럼 이 사회를 뒤덮고 있었다. 그 숨막히던 시대에 리영희는 배운자의 사명으로 끝없이 공부하고 탐구하는데 그 외로움은 외로움의 경지를 넘어 숭고하다는 감상마저 자아낸다.
책은 전쟁, 사회과학, 영어공부, 책 읽기, 청년세대 등 다양한 소주제를 리영희와 연결지어 다루고 있다. 한 저자가 한 주제를 맡아 글을 쓰고 있으니 그 다양함이 장점이요 글의 분위기와 농도가 제 각각인 것은 나름의 단점이라 말 할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무척 감탄하며 읽었던 글은 역시 김동춘 교수의 글이었고 한윤형씨의 글 또한 무척 좋았다. 김현진씨의 글은 이 책에서 유일하게 리영희선생님의 인터뷰가 담긴 글이니 좋을 수 밖에 없었다. 다 고르고 골라 선정된 필진일 테니 리영희를 알지도 못했던 일개 무식한 대학생인 내가 글을 품평한다는 것이 웃기긴 하다만 오길영 교수가 쓴 '영어라는 우상'이라는 글에 대해서는 뭥미?심정이 되었음을 리뷰에서 짚고 넘어가야겠다. 오길영 교수는 온 국민이 영어에 목을 매는 현 한국세태에 대해 '언어를 정보 전달과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격하시켜 혹은 생계를 버는 수단으로 격하시켜 창조적 사유와 분리하는 문제를 가져온다.'(113p)고 비판하며 '500단어 영어'를 이야기한다. 요즘 젊은애들이 외국나가고 영어학원에서 목매는 영어회화란게 결국 500단어 가지고 하는 대화란 말이다. 그 500단어 가지고 무슨 깊이 있는 대화가 되겠냐, 그런 발음 굴리기나 하니 미국대학가서 따라가지 못하고 중도탈락하는 것이다-라는 것이 그의 요지이다. 영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일 뿐인데 내가 그걸 무슨 학문처럼 파고들었단 자괴감에 슬펐던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이었다. 영어가 단순히 최강대국의 언어라는 위치를 넘어 전세계공용어로 자리잡은 현실에서 우리가 커뮤니케이션 하는 대상은 네이티브 스피커인 경우보다 영어를 제 2외국어로 삼고 있는 사람인 경우가 더 많다. 독일인을 만나도 케냐인을 만나도 중국인을 만나도 영어로 대화하는 세상이다. 미국으로 석박사 따러가는게 아닌 이상 제일 중요한건 제2외국어로 소통하는 상황에서 기본 500단어로 어떻게 자신의 의사를 효율적이고 분명하게 드러내느냐가 영어회화의 핵심인데(고급단어써서 유식하게 보이고 싶은 욕망은 이해한다만 토플에 나오는 고급단어도 일상회화에선 거의 쓰이지 않는다)이걸 가지고서 문제라고 하니 나로선 전혀 공감하지 못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500단어 회화로는 비판적 사고력의 부족을 커버할 수 없고 그래서 발음만 현란한 한국애들이 안되는 거라 이야기 하는데 그렇게 애초에 알맹이가 없는 애는 500단어 회화가 아니가 22000단어 회화로도 커버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는 또 지젝의 강연을 들었던 예를 들며, '그의 발음은 알아듣기 힘들었고 표현도 어색했지만 그의 당당했던 태도는 좌중을 압도했다' 말하는데 그건 지젝이니까 그런거고 남들에게 내 이야기를 쏙쏙 이해되게 갖다 바쳐야 하는 일반 한국인들로서는 발음도 무척 중요한 부분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나 비지니스 영역에서 유려한 말솜씨의 중요성을 무엇에 빗댈수 있으랴? 리영희는 마지막에 가서야 이 영어교육론과 연결된다.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는 왜 배우는가? 어떻게 영어를 배우고 누구를 위하여 영어를 쓰는가? 리영희에게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는 진실을 추구하려는 지식인으로서 글을 쓰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다. 다양한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세계를 조망하는 창을 더 많이 확보한다는 뜻이다. 리영희가 누구보다 날카롭게 당대의 문제를 파악하고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를 향해 열린 외국어의 창을 많이 확보했고 그 창을 통해 무엇을 봐야 할지를 명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124p) 말은 참 근사하다만 초반부에 영어를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격하시킨다 분개하더니 뒤에 와선 리영희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잘 사용했다 칭송하니 좀 뭥미?싶었다. 결국 어떤 목적은 숭고하고 어떤 목적은 천박하다는 것인가. 물론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는 알겠다. 고전을 원서로 읽어라, 더 많은 단어를 배우고(개념을 배우고) 사고의 지평을 넓혀라 그런 이야기겠지.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에 나쁜 뜻이 있었으리라곤 생각치 않는다. 그런데 요즘 현실에선 에덴의 동쪽을 원서로 읽는 것은 사치인 사람들이 많다. 비지니스 영어회화 100개 외워서 면세점 취업해야 하는 아가씨들이 가장 좋은 예일 것이다. 그런 삶의 문제.현실의 문제가 결코 격하될 수 없는 부분이란 것이 나의 생각이기에 영어가 수단으로 사용될 때에도 급이 있다는 식의 오길영 교수의 글은 불편했다. 영어로 인한 사대주의, 식민주의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영어가 필요한 사람만 배우면 된다'고 말한다. 현재 한국의 영어 열풍이 정상의 범주를 넘어서 과도한 사회적 수준의 낭비를 가져오고 있는 것에 나 역시 분명히 동감하는 바이다. 하지만 '배울 사람만 배우면 된다'는 논리는 무척 위험하다고 본다. 에덴의 동쪽을 원서로 읽을 시간적 여유가 되며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교수. 기자 등등)만 영어를 배우겠다는 소리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 시대에 영어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위키피디아 사전 한번 들춰보려고 해도 영어는 필요하다. 그래. 내가 불편했던건 이런 이야기들이다. 리영희 선생이 영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전혀 아는바가 없다. 이 책은 리영희 선생이 쓴 책이 아니니까.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오교수의 인용에 리영희 선생은 전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리영희 선생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생각을 강하게 펼친것 아닌지 하는 찝찝함이 남았다.
이 기나긴 불평글을 다 읽고 내려오신 분이라면 분명히 아시겠지만 이 책은 마지막 챕터의 인터뷰 약간을 제외하고는 리영희의 목소리나 글이 직접적으로 담겨있지 않다. 그에게 사상적으로 은혜를 입었다는 이들이 그를 떠올리며 쓴 글이 묶여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 같이 그와의 시대적 갭이 무척 큰 대학생이나 젊은 사람은 그를 본격적으로 읽기 이전에 우리 이전 세대에 그가 가졌던 의미가 무엇인가 잠시 배우고 건너갈 수 있는 징검다리가 되어줄 수 있는 책이다. 간접적으로나마 리영희의 생애나 경력이 토막토막 언급되기에 그에 대한 기본지식도 제공해준다. 나는 이제 리영희의 진짜 글을 읽어보려고 한다. 마지막 챕터의 인터뷰가 주는 감동이 너무 커서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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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10-03-16 공감(12)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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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망 없는 시절의 목발,리영희
리영희,라는 이름을 앞에 두고, 이 책을 읽으며 떠올렸던 상념들을 무슨 말로 옮겨야 할지 막막하다. 어차피 이 책에 글을 올린 필자들처럼 리영희,라는 프리즘으로 현실 사회를 진단할 능력이 없음을 제 깜냥에도 알고 있지만, 그래도 고개 숙여 큰 절이라도 한 번 하고 싶었고, 선생님이 살았던 시절보다 어쩌면 더 가망 없어진 시절을 어찌 살아내야 하는지 무슨 나침반 하나라도 거져 얻고 싶었다. 끈 떨어진 마음이 갈 곳 몰라 떠돌고 있다고 자백하는 꼴이니, 알고는 있었지만, 사람 덜 된 꼴을 이렇게도 확인하는 요즘이다.
90년대 초반, 내가 대학이라는 곳에 발을 들여 놓고, 사회과학연구소라는 모호한(?) 성격의 동아리를 기웃거리며, 그곳에 있던 쌘(지금 보면 무섭지도, 선동적이지도 않지만 그땐 그렇게 보였다) 책들을 읽기 시작할 무렵 선배로부터 건네받은 책이 [우상과 이성]이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선배는 나를 잘 못 골랐다. 리영희 선생의 [우상과 이성]을 읽은 후, 되려 쌘 책들과 멀어졌고, 선배들의 주입식 교육을 의심했고, 자연스럽게 주변인으로 겉돌기 시작했다.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생각의 스승'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훌륭한 '정보'나 '견해'를 들려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생각하게' 했기 때문이다."라고 고병권은 이 책에 적고 있다.
정녕 그러했다! 절대의 이름으로 맹목적으로 외우고, 익히던 시절에 마침표를 찍게 한 사람, 내가 안다고 믿었던 신, 인간, 사회구조, 주의, 냉전, 자본 그리고 나 자신마저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게 한 사람, 그가 리영희,였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 IMF라는 재갈이 물려, 무한 경쟁이라는 시절을 벼락처럼 맞아야 했고, 그에 따라 수적으로는 다수일지라도 구조적으로는 소수로 전락하는 사람들의 곁을 멤돌면서, 국가도 조직이라고 본다면, 조직의 명운이 흔들리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어떻게 개인들을 위축시키는지, 조직원으로서 더 잘 조련되는지를 맥없이 지켜봐야만 했다. 그리고, 이 특별한 조련에 동원된 언론, 지식인 사회, 정치인들의 모습 또한 꾸준히 봐야만 했다. 리영희 선생님이 전 삶을 걸고 완강하게 싸운 [우상]을 떼거지로 목도한 시절이었다. 또한, 사회가 지능적으로 잔인하다는 것도, 그에 대한 각 개인의 대비가 이렇게 허술했구나,라는 사실도 이처럼 일목요연하게 경험할 수 있다니 그저 놀라운 시절이었다. 물론, 그 이후 시장이라는, 신자유주의라는 우상이 자리를 잡고 가망 없는 시절이 노골적으로 시작되면서, 그 시절 내 놀라움은 시작에 불과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지만 말이다.
얼마 전, 보험설계사 한 분을 만났다. 요즘처럼 영업이 힘든 건, 일을 시작하고 10년이 넘었지만 처음이라고 했다. 해약은 많고, 가입은 적다고. 진심은 아니었지만, 경제 대통령 시절이고, 경제가 좋아진다고 하고, 토건 사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데, 어째서 현실 경제가 그리 얼어붙었을까요,라고 나는 물었다. 내 음험한 물음에 중산층이 점점 무너지니까요,가 그분의 대답이었다. 중산층이 무너지다뇨,라고 계속 말꼬리를 물고 싶었지만, 그분이 무슨 죄라고 내 비아냥을 참아내야 하는가 싶어 그만두었다.
여튼 우리 사회에서 무너지고 있는 것이 중산층뿐일까? 아니 중산층이라 정의되는 계급이 무너진다는 것이 경제적 의미에서만 해석될 수 있는 것일까? 구조적 소수자로 내몰리는 우리가 이 위기를 극복할 수는 있는 것일까? 현실에 대한 사유가 깊어질수록, 나는 엄혹한 시절을 살아낸 스승에게, 예의없는 태도로, 스승이 살았던 그 시절보다 더 가망 없는 시절을 살고 있다고 토로하고 싶었다. 최장집의 말을 빌려, 권위주의 시대처럼 명백한 부정의 때문에 정의가 쉽게 파악되는 시절도 아니고, 소수의 기득권 세력을 위한 질서도 그 외피를 바꿨을지언정 변하지 않은, 그러기에 무엇이 무엇인지, 그저 우르르 몰려 다니며 속고 속이는 시절이라고. 시장을 획득하기 위한 전쟁이 평화의 옷을 입고, 글로벌이라는 이름이 무한 경쟁을 재촉하고, 루저가 되지 않으려면 사교육에 올인해야 하고, 조직의 무탈을 위해서 부속품으로 전락하는 개인쯤은 어쩔 수 없는 희생이며, 투자와 저축보다 투기만이 이 땅에서 살아남는 길이라는 것이 상식이 되어버린 시절이라고. 이보다 가망 없는 시절이 또 있을까 싶다고.
생각없는 노예로 죽어가는 삶보다 고통스럽지만 깨어있는 삶을 그리고 잠든 사람들을 깨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던 선생을 통해 각성의 기쁨을 맛보았지만, 정작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거대한 체제, 자본, 시장이라는 [우상]앞에서 정녕 어찌해야 하는지, 쪽팔림이라도 면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여전히 두려움과 기갈로 우왕자왕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또 한편, 따져 묻지도 말라는[우상]의 엄포앞에서 작은 용기, 내 삶이 피해입지 않을 정도의 용기로 맞섰으니까, 내가 할 몫은 다한거 아니냐고, 그런데 현실은 갈수록 왜 이모양이냐고, 계속 불평만을 늘어놓는 나에게, 삶과 앎이 불일치한 너는 리영희,를 왜 읽었느냐고, 리영희,가 그저 지적 유희로 소비되었던 것이었냐고, 리영희,가 아니더라도 네가 읽은 책 속의 어떤 글 한 줄도 너의 삶을 바꾸지 못했다면 그 책들은 무엇하려 읽은 것이냐고, 이제는 선생이 다시 꾸짖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선생의 글이, 선생의 삶이 여전히 내 주위를 떠돌며 나를 부끄럽게 하고, 깨우치게 하는 한, 적어도 가망 없는 시절을 핑계삼아 어딘가에 숨는 일도 이제는 어려울 듯 싶다. 화끈거리는 마음은 쥐구멍 앞을 서성이지만 그도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선생님, 사랑을 목발 짚어 살아온 어느 시인처럼, 선생님을 목발 짚어 살아보려는 후학, 아니 후학이라고 혼자 우기는 이가 있습니다. 어떤 이유를 들어서도 반가우실리는 없겠지만, 그렇지만 말입니다, 선생님, 다독이고 독려해야 할 청춘이, 제가 아니더라도 아직 많습니다. 그러니 아직은, 그리고 앞으로도, 강건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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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0-03-15 공감(9)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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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은 반드시 온다! 사유하라!
70,80년대 한국의 청년들, 그리고 대중의 사상적 은사였던 이영희 선생을 왜 지금 다시 논의하여야만 하는가? 다시 말해 ‘의식화’로 대변되는 정신의 혁명, 대중의 깨어남이 요구되는 까닭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 당위의 질문에 대하여 이 저술은『전환시대의 논리』,『우상과 이성』으로 상징되는 잠자던 대중을 깨웠던, 즉‘깨어난 자들의 끊임없는 증식’을 통해,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을 것 같던 독재의 암흑이란 철벽을 부수고 일궈냈던 민주화의 성취가 오늘에 다시금 어떠한 의미로 다가서는지를 세대와 분야를 아우르는 인물들의 담론으로 펼쳐내고 있다.
여기에는 인권이 유린되고, 자유는 억압되었으며, 밀실로 붙들려가 폭력에 시달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나가는 민주주의의 실현은 요원하기만 하였던 악독한 독재정권이 지배하던 시절, 역사의식도 없으며, 세계사적 흐름을 읽지 못하던 무지몽매한 지배계급의 폐쇄적 폭압의 시대에나 필요했지 오늘에 새삼스레 대중의 집단적 각성, ‘의식화’의 논리를 꺼내드는 것은‘꼰대’들의 구시대적 발상이라는 냉소도 있다. 더구나 온통 물화(物化)되어버린 사회, 당장 밥벌이라는 생존의 문제에 허덕이고 있는데 무슨‘자유’타령이냐, ‘자본주의에 편입’되기 위해 발버둥치기에도 모자란 형국이란 말이다. 라는 88만원 세대의 항변도 있다.
그러나 잠시라도 소위 자기 계발이란 것을 소홀히 하면 경쟁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높으니‘자본의 도구’가 되는 종속을 택하는 것이 옳다는 이러한 단순화된 양자택일의 논리는 왠지 설득력을 갖추기엔 미흡하지 않은가? 당장은 안전한 자신의 보위가 되는 듯 보이지만, 이는 결국 부정의와 불평등, 비인간화, 인간소외를 고착화시키고 자본의 노예로 길들이려는 지배계층에 굴종하는 삶을 완성하는 것 이상이 아닐 것이다. 오늘의 우리사회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라는 무한경쟁 시장의 논리, 즉 시장만능의 이데올로기는 경쟁의 원리, 약육강식의 원리, 탐욕의 원리만 작동되고, 이를 위해서는 인권, 자유, 민주주의는 기꺼이 희생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국가경쟁력 제고라는 미명하에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자유를 부인하던 군부독재 시절로 역진된 형국과 한 치의 차이도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무감각, 무의식을 자처하고, 지배자들에게만 가치판단을 맡길 때, 어느덧 회복할 수 없이 잘 길들여진 비인간화된 노예의 삶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불평등, 억압, 배제와 차별이 고착화된 사회, 작은 물질에 자신의 자유를 내어준 사람들이 기대할 수 있는 사회의 모습일 것이다.
‘완전한 사고 정지증’에 걸린 듯한 오늘의 사람들에게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집단적 각성, 의식화가 지닌 의미의 오늘에서의 재해석을 필두로, 신자유주의적 세속(反)윤리의 틀을 벗어나 경쟁의 바깥으로 탈주하는 것으로서의 책 읽기,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의 이해를 통한 전쟁의 파렴치한 속성들 - 권력과 민중 격차의 극대화, 제국주의의, 계급원칙의 적나라한 불평등... -에서부터 “사대주의에 기초한 허구적 주류의식과 무지몽매함”으로 한국전쟁의 참화와 분단국가의 서러움을 겪고서도 전쟁에서 완전히 벗어날 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오늘날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의 또다른 냉전체제의 병리현상을 지적하기도 하며, 정말 기형적인 한국 기독교의 본말이 전도된 제도 종교로서의 비판과, “예수를, 진리를 이기적 욕망충족의 수단으로 착각”하여 “욕망에 마음을 굽히고 돈에 허리를 굽히는 행위가 사실상 우상숭배라는 사실에는 아랑곳하지 않는”종교인에 대해 생각한다.
한편, 영어를 강조하는 상상력빈곤의 이 사회의 진정한 속셈인 “지배세력의 입장에서 볼 때 영어가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 할 수 있는 효과적 수단”이라는 통찰과, 창조적 사유의 자리가 없는 실용영어가 지니는 허위, 그리고 무엇보다 원어민 교육을 받아 혀 꼬부라진 그럴듯한 발음에도 정작 “비판적이고 포괄적인 사고력이 없는” 맹탕의 영어로 일그러진 한국인의 초상을 말한다. 그럴듯한 발음의 영어를 구사하지만 사유와 지식이 없는 무식한 영어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점이다.
특히, 지식인에 대한 사회적 책무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은 이 저술과 이영희 선생의‘배우게 하는 사람’이라는 스승의 개념과 연결되어, 학벌세상의 승자인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을 향해 매운 회초리를 든다. 삶과 앎이 불일치하는 한국 지식 사회의 고질병은 물론, 탈근대적 과제와, 여전히 매우 질 낮은 민주주의와 같은 근대적 과제까지 중첩된 한국사회에서의 합당한 지식인의 역할을 논의한다. “현학의 하늘에서 대중의 땅으로 내려와 그곳에서 지식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체득해야 한다는 권유”는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자각한 파리아(pariah,주변인)의 관점’그것으로서, 지식인의 계몽자로서의 기능을 강조한다.
극단적인 신자유주의와 시장지상주의를 밀어붙이는 이 정권은 점점 대중의 사회안전망을 축소하고 개인의 행복이나 복지가 모조리 개인의 책임이 되는 사회로 퇴행시키고 있다. 또한 교육은 “‘약자를 보호하자’가 아니라, 심지어‘강자가 어떻게 약자를 더 잘 먹을 수 있을까’를 가르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옛날 옛적부터 잘 먹고 잘산 놈들이 제 권리를 잠시 빼앗겼는데 도로 찾으려 일어나는, 반동이 일어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인 것은 역사의 경험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평등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보편적 복지가 높아지고 생산성도 높아질 수 있도록 가치관, 인간관, 세계관을 개량하는데 노력을 경주하여야 할 것이다. 눈앞의 풍요 속에 매몰되어 진정한 가치들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악덕한 제도, 정치, 사상에 굴종하지 않는다는 저항적 인간을 목표로 하는 자기의식의 전환을 이야기하는 이 저술은 그래서 지금에 다시 이영희를 말하고, 집단적 깨어남을 말하여야 하는 필연적 요구를 담고 있다. 오래전 대학신문사에서 독재정권의 말로를 지켜보고, 그리고 더욱 악질의 군사정권이 들어서는 폭력의 시대에 이영희의 저작들을 읽고, 민주화운동을 취재하며 학우들과 울분을 토해내던 그 시절을 떠올린다. 더 이상 이러한 집단 의식화를 얘기하는 세상이 아니기를 바랐건만 소비지상의 물화된 신자유주의라는 우상으로 바뀐 대상이 30년 전으로 사회를 역진시키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역사와 철학, 문학과 예술 등 다방면의‘특수 지식인’들이 바로 이러한 각성을 위해 대중을 향한 노력을 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변혁은 반드시 올 것이란 말을 되새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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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식 2010-03-12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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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를 통해 교양을 읽다
시대가 어려울 때일수록 사람들은 진정한 이 시대의 양심을 원한다. 우리나라는 해방이후 군부독재 시대라는 암울한 시기를 거치면서 많은 양심들이 힘들고 모진 시기를 거쳐왔다. 그 중에서도 ‘리영희;라는 이름이 남긴 의미는 남다르다. 지금까지도 그의 이름 세 글자는 ’민주화‘ 라는 화두와 함께 우리에게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
이 책은 2009년 12월 2일 리영희의 팔순을 기록하고 기념하기 위해서 기획된 것이다. 리영희가 이 시대에 던져준 의미와 영향력을 되새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리영희를 프리즘으로 삼아 우리 시대를 이해하고, 다른 삶과 다른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교양 목록을 제시한다.
리영희와 생각하기에서부터 책 읽기, 전쟁, 종교, 영어 공부, 지식인, 기자, 사회과학, 청년 세대 등에 이르기까지 리영희를 매개로 다양한 교양을 이야기한다. 각 주제는 지금 현실과도 직결되는 주제들이다. 간단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내용들이 아니다. 오랜 공부와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논의될 수 있는 묵직한 주제들이다. 리영희의 삶과 인생이 함께 녹아든 주제들은 리영희라는 인물 앞의 우리들이 더욱 작게만 느껴지게 만든다.
예전 세대에 비해 요즘 세대는 비주얼과 감각적인 면에 많이 노출되어 있다. 즉물적이고 즉흥적이라는 이야기도 있다(물론 절대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대중교통이나 거리에서 휴대전화, MP3, DMB에 익숙한 젊은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점점 생각하는 시간이 적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지은이들이 이야기하는 생각하기와 책 읽기, 영어공부, 청년세대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쯤 숙독해 볼 필요가 있는 이야기다.
이제는 하나의 거대한 집단으로 변해가고 있는 종교에 칼날을 들이대고, 지식인으로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지 지식인의 책무를 묻기도 한다. 이쯤되면 이 책이 단순히 리영희의 의미와 그 영향력을 읽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지금 현재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생각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로 모시는 70, 80년대 학번부터 2000년대 학번까지 세대를 뛰어넘는 다양한 이야기꾼들이 참여하고 있다. 세대를 넘나드는 이야기는 리영희에 대해 다양한 시선으로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세대를 넘어서서 리영희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리영희라는 인물이 가진 진실한 교양인으로서의 모습때문이 아닐까.
교양을 뜻하는 영어 'culture'의 원뜻은 '경작(耕作)'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풍부한 지식과 인격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경주되어야 한다. 천박한 지식과 대중들의 인기에 영합하는 아집이 판을 치는 세태가 되어서는 안된다. 급변하는 현실 사회와 정치 속에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교양인이 필요하다. 교양을 다시금 이야기해 보아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리영희를 더 읽어야 하고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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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노 2010-03-14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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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es Point : 779

책소개
프랑스의 『르 몽드』가 “사상의 은사”라 불렀던 리영희. 민주주의를 꿈꾸고 고민하고 싸웠던 이 땅의 젊은 지성들에게 리영희는 뿌리이자 토대이고 출발점이었다. 이 책은 리영희를 프리즘으로 삼아 우리 시대를 이해하고, 다른 세상, 다른 삶을 위한 새로운 고민을 시작하고자 한다. 리영희의 의미와 영향력을 되새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리영희를 통해서, 리영희가 지녔던 교양의 힘을 매개로 새로운 교양 목록을 제시한다.
리영희의 팔순(2009년 12월 2일)을 축하하고 기념하기 위해서 기획된 책으로, 리영희를 사상의 스승으로 모시는 70,80년대 학번부터 리영희의 제자가 아니었다고 밝히는 90년대 학번, 20대 논객으로 주목받는 2000년대 학번까지 세대를 넘어선 다양한 필자군으로 구성되어, 리영희에 대한 다양한 시선을 읽을 수 있다.
목차
서문: 리영희를 다시 불러내는 이유 - 홍세화
리영희와 생각하기: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고병권
사상의 은사 / 조건반사의 토끼 / 계몽이란 무엇인가 / 의식화의 은사, 의식화의 원흉 / 민주주의, 그 영원한 의식화를 위하여
리영희와 책 읽기: 책 읽기와 청년, 그리고 자유 - 천정환
리영희라는 필독서 / 리영희의 책 읽기 / 리영희 읽기, 도는 읽지 않기 / 오늘날의 책 읽기. 청년. 자유
리영희와 전쟁: 전쟁의 세기 - 김동춘
전쟁이라는 최고의 현실 / 정치로서의 전쟁 /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 한반도의 냉전 체제 / 시장과 전쟁 / 반공,전쟁, 국가주의의 우상 / 제국의 전쟁, 그리고 평화
리영희와 종교: 무신론적인, 그러나 유신론적인 - 이찬수
기독교에 대한 거부 / 예수와 제도 종교의 갈등 / 한국 기독교인은 고대 유대교인 / 우상숭배 금지의 본뜻 / 우상숭배 금지에 대한 오해 / 유일신이라는 말 / 한국 기독교의 정치사회적 배경 / 무신론적인,그러나 유신론적인 / 종교의 안과 밖 /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 최고의 가르침
리영희와 영어 공부: 영어라는 우상 - 오길영
500단어의 유창한 영어 실력 / 영어 몰입 교육의 백일몽 / 영어 울렁증과 실용 영어 / 영어 공부의 본령 / 알맹이 없는 영어 강의 / 리영희의 영어 공부 / 영어를 왜 공부하는가
리영희와 지식인: 다시, 지식인의 책무를 묻다 - 이대근
야만의 시대와 지식인 / 근대적 지식인과 탈근대적 지식인 / 한국 지식인의 자화상 / 한국 사회의 특별 계급 / 다른 세상을 위한 지식인의 책무
리영희와 기자: 진짜 기자의 멸종 - 안수찬
프롤로그 / 소 잃고 외양간 고치다 / 사라진 낭만의 시대 / 기자들의 보험, 출입처 시스템 기자라는 이름의 부속품 / 낯익으면서도 낯선 언론 탄압 / 진실 보도 경쟁이 사라지다 / 기자 리영희의 교훈 / 다른 시대, 다른 기자의 꿈
리영희와 사회과학: 사회과학의 고민 - 은수미
리영희와 사회과학 / 사회과학은 비정규직을 어떻게 보는가 / 비정규직을 말하는 사회과학 / 사회과학의 딜레마 / 공공성에 대한 고민 / 사회과학에 대한 질문
리영희와 청년 세대: 냉소주의 시대의 우상과 이성 - 한윤형
'아버지 세대의 선생님'을 만나다 / 리영희와 청년 문화의 긴장 관계 / 대학생, 자유를 말하다 / 무엇이 우상이고 무엇이 이성인가 / 리영희와 청년 문화의 상실 / 전환이 불가능한 시대의 우상과 이성 / 분열증 시대에 돌아보는 리영희
리영희 인터뷰: 가혹하게 정직하고, 칼날처럼 순결하게 - 김현진
고옥의 일인자 / 레이디, 인텔리겐치아 / 그런 것이 역사다 / 혁명은 온다, 네가 형무소에 갈 때 거절하라! / 물을 건넌 개, 물에 빠진 개 / 피로 쓴다 / 생활은 간소히, 생각은 높게 / 리영희 수난곡, 리영희 스타일, 그리고 사상의 오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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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16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 ‘생각의 스승’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훌륭한 ‘정보’나 ‘견해’를 들려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생각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스승이란 우리에게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존재, 우리를 각성케 하는 모든 존재에게 부여될 수 있는 이름이다.
- 고병권의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중에서 접기
P. 34 어떤 책들은 그냥 종이 뭉치이거나 문장의 집합체가 아니게 된다.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어떤 인간과 같다. 우리는 그 시절에 어떤 이들과 조우함으로써 우리 생을 만들고 또 바꿔 왔다. ‘그/책’은 젊은 날이 성마른 열정과 숭고한 영성을 상징한다. ‘그/책’은 한 시대를 표상하는 이름이며 존재다.
- 천정환의 「책 읽기와 청년, 그리고 자유」 중에서 접기
P. 66 전쟁은 처음부터 끝까지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서, 특정한 정치경제 상황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인간적.인문학적 현실임과 동시에 적나라한 정치적.사회적 현상이다. 따라서 전쟁은 언제나 동일한 방식으로 나타나지도 않고 또 그것을 겪은 군인들이나 민간인들에게 동일하게 체험되지도 않는다.
- 김동춘의 「전쟁의 세기」 중에서
P. 88 율법의 ‘문자’가 아닌 ‘정신’을 실현하고자 한 예수가 율법을 거스른다는 이유로 율법가들에 의해 희생되었는데, 예수를 따른다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다시 예수를 죽인 율법가의 편에 선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예수의 정신을 여전히 반대로 알아듣는다. 사람들을 문자와 제도 안에... 더보기
P. 109 당시 강연장을 가득 메운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원어민’들도 그의 발음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이 관심을 기울인 것은 지젝의 어색한 발음이 아니라 강연에서 그가 주장했던 독창적인 사유의 내용이었다. 원어민 발음과 거리가 먼 영어를 구사하는 지젝은 원어민을 능가하는 유려한 글쓰기 능력으로 자신의 저서를 대부분 영어로 쓴다. 그런 능력은 500단어의 유창한 영어 발음으로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오길영의 「영어라는 우상」 중에서 접기
P. 144 리영희는 사르트르를 인용해 자유의 의미를 절절하게 전했다. 사르트르는 독일 점령하에 있을 때처럼 자유로웠던 때가 없었다고 한다. 일체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매일 정면으로 모욕을 당할 때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자유라고 했다. 막다른 골목에 쫓겨 있었던 까닭에 거동 하나하나가 앙가주망의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고 했다.
- 이대근의 「다시, 지식인의 책무를 묻다」 중에서 접기
P. 157~158 기가 막힌 노릇이지만, 이는 국소 마취의 수법이다. 시장주의의 모르핀으로 언론의 발을 마비시켰다. 방송 시장이 개방된다는데, 방송이 신문 광고를 다 빼앗아 간다는데, 이 언론사가 망하면 너는 어디 가서 잘난 기자 노릇을 할 것이냐고 겁박하는 방식이다. 기자들이 겁먹었다는 증거는 허다하다.
- 안수찬의 「진짜 기자의 멸종」 중에서 접기
P. 184~185 학문의 역사는 가설의 역사일지도 모른다. 연구자는 아직 입증되지 않은 자신의 논리, 예를 들어 “파업권 보장 없이 민주주의는 없다”는 가설을 제시하고 그것을 입증하려 한다. 학문은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가설을 통해 재구성된다. 하지만 가설을 주장하고 입증하는 것이 학문 외부의 강제에 의해 불가능하여 가설이 가설로만 남는다면 그것은 학문 세계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로 바뀐다.
- 은수미의 「사회과학의 고민」 중에서 접기
P. 204 예비 노동자인 대학생들은 자신을 착취해주기를 간절하게 바랄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대학생들이 바라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편입’이다. 자본주의로부터의 자유, 노동할 의무로부터의 자유를 꿈꾸지 못하고 자본주의 사회로 편입하기를, 정규직으로 편입하기를, 그러기 위해 좋은 대학으로 편입하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 하지만 하루하루 편입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의 삶 속에선, 우상은 바로 우리의 삶 그 자체다.
- 한윤형의 「냉소주의 시대의 우상과 이성」 중에서 접기
P. 232~233 그래도 날렵한 몸으로 채찍을 휘두르며 ‘포티 파이브’ 권총으로 백발백중의 사격 솜씨를 자랑하는 탐험복 차림의 고고학자 리영희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캐릭터로 본다면, 절대 인디아나 존스는 아니다. 아무리 적이라 해도 타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함정에 빠뜨리거나 자동차에서 떨어뜨리거나 하는 건 도저히 ‘리영희 스타일’이 아니다.
- 김현진의 「가혹하게 정직하고, 칼날처럼 순결하게」 중에서 접기
추천글
이 책은 고민하는 청춘들의 영원한 스승, 리영희를 다시 불러낸다. 리영희를 프리즘으로 삼아 우리 시대를 이해하고, 다른 세상, 다른 삶을 위한 새로운 고민을 시작하고자 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지부터(고병권), 책 읽기(천정환), 전쟁(김동춘), 종교(이찬수), 영어 공부(오길영), 지식인(이대근), 기자(안수찬), 청년 세대(한윤형)에 이르기까지 리영희를 매개로 우리 시대 교양의 기초를 다지고자 한다.
- 인문사회과학출판인협의회(인사회)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한겨레
- 한겨레 신문 2010년 2월 19일 잠깐 독서
중앙일보
- 중앙일보(조인스닷컴) 2010년 2월 20일 북 브리핑
저자 및 역자소개
김현진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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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영화와 서사창작을 공부했다. 에세이 《네 멋대로 해라》를 시작으로 〈한겨레〉 〈경향신문〉 〈조선일보〉 〈시사IN〉 등 여러 매체에 글을 실었고, 《내가 죽고 싶다고 하자 삶이 농담을 시작했다》 《지지 마, 당신》 《뜨겁게 안녕》 등의 에세이집과 연작소설집 《정아에 대해 말하자면》, 장편소설 《녹즙 배달원 강정민》 등을 썼다. 어떤 상처를 받아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때려눕혀 이겨내는 강인함보다 상처를 그대로 지닌 채로도,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을 안은 채로도, 그래서 목 놓아 울다가도 천천히 다시 일어나 나아가는 이들의 묵묵한 슬픔에 늘 마음이 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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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큰글자책] 나의 유기동물 애정기>,<나의 유기동물 애정기>,<[큰글자책] 한국의 발견> … 총 59종 (모두보기)
이찬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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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사상과 문화, 동아시아의 종교와 평화 연구자. 서강대학교 화학과를 거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일본의 철학자 니시타니 케이지와 독일의 신학자 칼 라너의 사상을 비교하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남대 교수,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일본)코세이 가쿠린 객원교수, (일본)중앙학술연구소 객원연구원, (일본)난잔대학 객원연구원, 성공회대 대우교수, 보훈교육연구원장 등을 지냈다.
『일본정신』,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교토학파와 그리스도교』, 『다르지만 조화한다』, 『평화와 평화들』, 『사회는 왜 아픈가』, 『아시아평화공동체』(편저), 『평화의 여러가지 얼굴』(공편저), 『근대 한국과 일본의 공공성 구상』(공저), 『北東アジア·市民社会·キリスト教から観た平和』(공저), 「비전(非戰), 반군국주의, 비핵화로서의 평화: 일본 평화개념사의 핵심」, 「平和はどのように成り立つのか」, 「北朝鮮の民間信仰」 등 80여 권의 단행본(공저서, 번역서 포함)과 90여 편의 논문을 출판했다.
현재 인권평화연구원 공동원장으로 일하면서 가톨릭대에서 평화학을 강의하고 있다. 접기
최근작 : <실패의 인문학>,<동학과 서학>,<메이지의 그늘> … 총 62종 (모두보기)
고병권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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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의집’과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공부하며 살아간다. 생의 최소 단위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언더그라운드 니체』, 『다이너마이트 니체』, 〈북클럽 『자본』〉 시리즈(전 12권),『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묵묵』, 『사람을 목격한 사람』, 『“살아가겠다”』,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 『추방과 탈주』등을 썼다.
최근작 : <철학자와 하녀>,<[큰글자도서] 사람을 목격한 사람>,<사람을 목격한 사람> … 총 84종 (모두보기)
김동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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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사회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역사비평》 편집위원, 《경제와사회》 편집위원장, 참여연대 정책위원장, 참여사회연구소 소장을 역임했고,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했다. 제20회 단재상, 제15회 송건호언론상, 제18회 임종국상을 수상했다. 현재 성공회대학교 명예교수이다.
저서로 『전쟁과 사회』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 『권력과 사상통제』 『고통에 응답하지 않는 정치』 『시험능력주의』 등이 있다.
최근작 : <권력과 사상통제>,<결정적 순간>,<쿠오바디스 대한민국> … 총 77종 (모두보기)
이대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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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대학교 국방정책대학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고려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경향신문 편집국장 및 논설고문,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 자문위원, 북한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북한군사 문제를 넘어 한반도 평화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 저서로는 『북한 군부는 왜 쿠데타를 하지 않나』, 『김정은 시대 조선로동당』(공저), 『북한군사문제의 재조명』(공저), 『북한의 당·국가기구·군대』(공저) 등이 있다.
최근작 : <12개 렌즈로 보는 남북관계>,<당신은 정의로운 사람입니다>,<나는 천천히 울기 시작했다> … 총 9종 (모두보기)
천정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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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지성사와 현실의 문화정치에 관한 관심을 바탕으로 다양한 연구 성과와 문화 비평을 발표해 왔다. 《근대의 책 읽기》, 《조선의 사나이거든 풋뽈을 차라》, 《근대를 다시 읽는다》(공저), 《1960년대를 묻다》(공저), 《대중지성의 시대》, 《자살론》, 《촛불 이후, k-민주주의와 문화정치》, 《숭배 애도 적대》 등이 있다.
최근작 : <민중의 시대>,<해금을 넘어서 복원과 공존으로>,<지식을 공유하라> … 총 38종 (모두보기)
오길영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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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와 뉴욕주립대에서 영문학과 비교문학을 공부하고 영문학 박사를 받았다. 비평이론, 현대영미소설, 비교문학 등이 주요 연구 분야이다. 현재 충남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있으며 문학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영화애호가이기도 하다. 저서로 평론집 『아름다움의 지성』(2020), 『힘의 포획』(2015), 산문집 『영화의 풍경, 세상의 풍경』(2025), 『아름다운 단단함』(2019), 연구서, 『세계문학공간의 조이스와 한국문학』(2013) 등이 있다.
최근작 : <문학, 앞서가는 시계>,<영화의 풍경, 세상의 풍경>,<[큰글자책] 아름다운 단단함> … 총 19종 (모두보기)
SNS : //facebook.com/ogyjoyce
안수찬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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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교수. 《한겨레》 기자, 《한겨레21》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지은 책으로 《4천원 인생》(공저), 《뉴스가 지겨운 기자》 등이 있다.
최근작 : <고등학생운동사>,<4천원 인생>,<대통령의 7시간 추적자들> … 총 17종 (모두보기)
한윤형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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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대구에서 태어나, 학창시절은 대전에서 보냈다. 성년 이후에는 서울의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 20대엔 한국 사회의 청년세대 문제, 미디어 문제, 그리고 현실정치에 관한 글을 주로 써왔다. 30대엔 3년의 기자생활을 했으며 이후 몇몇 여론조사기관과 선거컨설턴트 업체에서 일했다. 《뉴라이트 사용후기》(2009),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2013), 《미디어 시민의 탄생》(2017), 《상식의 독재》(2024) 등을 홀로 썼고,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2011),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제》(2011), 《추월의 ... 더보기
최근작 : <대통령의 자격>,<상식의 독재>,<아무도 행복하지 않은 나라> … 총 25종 (모두보기)
은수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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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한 뒤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정책국장으로 일하다 체포되어 6년 가까이 수감생활을 했다. 1997년 출소 뒤, 대학에 복학해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노동연구원,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노동정책 자문위원, 청년유니온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했고, 민주통합당 비례대표로 19대 국회위원을 지냈다. 2016년 테러방지법을 반대하는 필리버스터를 10시간 18분 동안 했고, 같은 해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했다. 여러 학교, 시민단체, 노동조합 등에서 ‘노동, 청년, 정치’를 주제로 한 ... 더보기
최근작 : <만국의 알바여, 정치하라>,<정치의 시대 세트 - 전4권>,<은수미의 희망 마중> … 총 23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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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어느 날 밤하늘을 탈탈탈 털었더니>,<컵라면에도 알고리즘이 필요하다고?>,<내 보물 ㅎㅎㅎ>등 총 1,301종
대표분야 : 청소년 인문/사회 2위 (브랜드 지수 271,558점), 전쟁/평화 이야기 2위 (브랜드 지수 17,863점), 청소년 소설 2위 (브랜드 지수 809,718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이 책은 리영희에게 바치는 책이 아니다. 리영희에게 바치는 책은 그 누구보다도 리영희가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그것을 모른다면 그를 ‘사상의 스승’으로 부를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글을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행위”인데, 어떻게 헌사 따위가 바쳐지는 자리에 스스로 서겠는가. - 홍세화의 「서문 : 리영희를 다시 불러내는 이유」 중에서
1. 사상의 은사, 리영희를 다시 불러낸다
프랑스의 『르 몽드』가 “사상의 은사”라 불렀던 리영희의 책 『전환시대의 논리』는 “사회과학 서적으로는 처음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저작”이다. 시대를 고민하는 청춘들에게 리영희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고 “머릿속에서 지진을 일으키”고 “몽롱한 의식에 끼얹은 찬물 한 바가지”였다. 리영희로 말미암아 눈을 뜨고 세계를 인식하고, 이전과 다른 존재로서 생을 만들고 바꾸어간 청년들은 시대의 한 가운데로 투신했다. 민주주의를 꿈꾸고 고민하고 싸웠던 이 땅의 젊은 지성들에게 리영희는 뿌리이자 토대이고 출발점이었다. 그렇게 한국 현대사의 비판적 지성의 상징, 리영희는 우리 시대 민주주의를 향한 여정의 출발점이다. 이 책은 고민하는 청춘들의 영원한 스승, 리영희를 다시 불러낸다.
2. 리영희라는 이름의 교양, 우리 시대 교양의 기초를 다진다
리영희는 깨어 있고자 한 청춘들이 읽어야 할 필독서였고, 알아야 할 교양의 첫 번째 목록이었다. 여기서 교양이란 속류화된 호사 취미나 잡다한 지식을 지시하지 않는다. 일찍이 플라톤은 교양이란 “영혼의 건강과 같은 것, 혹은 아름다움이나 반듯하게 배우고 알아야 할 최대의 덕”을 의미하고, 교양을 구현해낸 이상적인 인간상인 철학자는 “폴리스에 대한 사랑, 즉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봉사할 줄 아는 덕을 지향해야 한다”고 했다.(이광주, 『교양의 탄생』(한길사) 중에서) 또 재일 디아스포라 학자 서경식은 신자유주의 전체주의가 지배하고 전쟁이 일어나는 시대에 교양의 자리를 묻는다.(서경식 외, 『교양, 모든 것의 시작』(노마드) 중에서)
무지몽매한 우상이 지배하던 시대에 이성의 힘으로 맞서 싸운 리영희는 교양의 의미를 올곧게 보여주었다. 리영희라는 이름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일깨우는 고민의 바탕이었고, 수많은 청춘들이 스스로 서게 하는 교양의 힘이었다. 7,80년대 민주주의를 향한 거대한 물결은 바로 ‘세미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자발적인 ‘교양’ 공부의 토대 위에 있었다. 이 책은 리영희를 프리즘으로 삼아 우리 시대를 이해하고, 다른 세상, 다른 삶을 위한 새로운 고민을 시작하고자 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지부터(고병권), 책 읽기(천정환), 전쟁(김동춘), 종교(이찬수), 영어 공부(오길영), 지식인(이대근), 기자(안수찬), 청년 세대(한윤형)에 이르기까지 리영희를 매개로 우리 시대 교양의 기초를 다지고자 한다.
3. 리영희를 불러내는 또 하나의 방법
이 책은 리영희의 팔순(2009년 12월 2일)을 축하하고 기념하기 위해서 기획되었다. 그러나 어떤 금기도 허용치 않고 우상에 맞섰던 리영희에게 헌사는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이 책은 일방적인 존경과 흠모를 보내는 보통의 헌정 도서와 다르게 구성되었다. 리영희의 의미와 영향력을 되새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리영희를 통해서, 리영희가 지녔던 교양의 힘을 매개로 새로운 교양 목록을 제시한다. 리영희는 새로운 교양을 촉발하는 원재료이고, 다양한 교양의 목록을 묶어주는 고리의 역할을 한다. 또 서문을 쓴 홍세화를 필두로, 리영희를 사상의 스승으로 모시는 70,80년대 학번부터 리영희의 제자가 아니었다고 밝히는 90년대 학번, 20대 논객으로 주목받는 2000년대 학번까지 세대를 넘어선 다양한 필자군으로 구성되어, 리영희에 대한 다양한 시선을 읽을 수 있다.
[주요 내용]
리영희와 생각하기 :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_ 고병권
리영희가 ‘사상의 은사’라 불리는 점에 착안하여, 생각을 낳아준 스승이란 무엇인가,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탐색한다.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 ‘생각의 스승’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그가 정보나 견해, 지식을 전달한 사람이 아니라, 생각하기 즉 각성을 전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스승이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에게 부여되는 이름이다. 리영희는 생각 없음의 상태/체제에 도전하여 생각할 것을 일깨웠고, 생각한다는 것은 기존의 굳은 관념, 견해에 의한 조건반사의 반응을 넘어서는 것이다. 바로 생각의 전제, 토대조차 무너뜨리고 생각하는 것이고, 그것이 계몽이고 각성이고 다른 사람이 되는 주체 변형의 의식화다.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 ‘생각의 스승’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훌륭한 ‘정보’나 ‘견해’를 들려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생각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스승이란 우리에게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존재, 우리를 각성케 하는 모든 존재에게 부여될 수 있는 이름이다. _ 16쪽, 고병권의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중에서
리영희와 책 읽기 : 책 읽기와 청년, 그리고 자유 _ 천정환
독서의 문화사라는 관점에서 책 읽기를 통해 형성되고 발현되는 정신사의 풍경을 서술한다. 리영희의 독서 이력과 리영희를 읽고 또 읽지 않던 70,80년대 책 읽기의 문화사를 살펴보며, 책 읽기와 자유의 관계에 질문을 던진다. 식민지 시대 일본어로 된 문학 책으로 시작하여, 국제관계 저널리스트이자 진보적 지식인으로서 사회과학 서적의 탐독으로 이어진 리영희의 책 읽기는 당대의 문화-정치의 맥락과 맞물려 한국 지성사의 서술로 이어진다. 수많은 청년들이 책 읽기를 통해 존재를 건 모험에 나섰던 70,80년대 리영희가 ‘필독서’에서 ‘선택 교양’으로 전환되는 맥락 속에서 책 읽기와 자유, 책 읽기와 정치의 관계를 짚어본다.
어떤 책들은 그냥 종이 뭉치이거나 문장의 집합체가 아니게 된다.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어떤 인간과 같다. 우리는 그 시절에 어떤 이들과 조우함으로써 우리 생을 만들고 또 바꿔 왔다. ‘그/책’은 젊은 날이 성마른 열정과 숭고한 영성을 상징한다. ‘그/책’은 한 시대를 표상하는 이름이며 존재다. _ 34쪽, 천정환의 「책 읽기와 청년, 그리고 자유」 중에서
리영희와 전쟁 : 전쟁의 세기_ 김동춘
리영희라는 지식인이 전쟁이라는 최고의 현실을 어떻게 마주했는지를 살펴보며, 20세기 한반도와 주변에서 벌어진 전쟁의 역사와 경험을 되짚는다. 전쟁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관계들도 파괴하고 새로운 관계들을 만들어낸다. 전쟁은 모든 것을 뒤집어버리는 일종의 혁명이다. ‘제국’의 프로젝트인 전쟁은 국제 질서를 뒤흔들 뿐 아니라 국내의 정치 질서도 지배하는 정치사회적 사건이자 현상이다. 『전쟁과 사회』의 저자이자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문제를 천착한 김동춘 교수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냉전 체제의 속살을 파헤친다.
전쟁은 처음부터 끝까지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서, 특정한 정치경제 상황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인간적 ? 인문학적 현실임과 동시에 적나라한 정치적 ? 사회적 현상이다. 따라서 전쟁은 언제나 동일한 방식으로 나타나지도 않고 또 그것을 겪은 군인들이나 민간인들에게 동일하게 체험되지도 않는다. _ 66쪽, 김동춘의 「전쟁의 세기」 중에서
리영희와 종교 : 무신론적인, 그러나 유신론적인 _ 이찬수
일관된 종교 비판자였지만 종교의 가치를 좇았던 리영희를 통해, 제도와 교리에 갇힌 기성 종교를 비판하고 진정한 종교 정신을 되새긴다. 종교 간 갈등은 교리의 차이가 아니라 교리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예수는 유대교 율법의 ‘정신’을 살리려 했지만, 율법의 ‘문자’ 자체에 매달린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기독교의 우상숭배 금지, 유일신 사상도 이와 같이 교리를 문자 자체로 해석하여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 제도와 교리 속에 담겨진 정신은 뒷전으로 밀리고, 정신이 형상화된 제도와 교리에 치우친 기성 종교를 비판하며, 보편적인 종교 정신을 강조한다.
율법의 ‘문자’가 아닌 ‘정신’을 실현하고자 한 예수가 율법을 거스른다는 이유로 율법가들에 의해 희생되었는데, 예수를 따른다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다시 예수를 죽인 율법가의 편에 선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예수의 정신을 여전히 반대로 알아듣는다. 사람들을 문자와 제도 안에 가두어 두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며 강권한다. _ 88쪽, 이찬수의 「무신론적인, 그러나 유신론적인」
리영희와 영어 공부 : 영어라는 우상 _ 오길영
영어 실력이 사회적 성공의 보증수표로 여겨지는 시대, 영어를 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따져보고, 일찍이 외국어 공부에 매진한 리영희의 사례를 통해 올바른 영어 공부와 방법에 대해 논한다. 실용주의와 시장주의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영어 실력은 실용성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 실용의 수준이 텍스트 독해력과 사고의 조직력 등을 배제한 ‘관광 영어’ 수준으로 이해되고, 영어 공부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필요한지에 대한 고민 없이 모든 사람에게 강요된다. 서투른 발음에도 영어 원어민들을 압도하는 지젝과 영어 공부하는 목적과 방법을 명확히 하고 영어를 익힌 리영희를 통해 영어 공부의 본령을 제시한다.
당시 강연장을 가득 메운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원어민’들도 그의 발음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이 관심을 기울인 것은 지젝의 어색한 발음이 아니라 강연에서 그가 주장했던 독창적인 사유의 내용이었다. 원어민 발음과 거리가 먼 영어를 구사하는 지젝은 원어민을 능가하는 유려한 글쓰기 능력으로 자신의 저서를 대부분 영어로 쓴다. 그런 능력은 500단어의 유창한 영어 발음으로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_ 109쪽, 오길영의 「영어라는 우상」 중에서
리영희와 지식인 : 다시, 지식인의 책무를 묻다 _ 이대근
저항적 지식인의 전형인 리영희의 퇴장을 곱씹으며, 민주화 이후 변화된 지식인의 위상과 역할에 대해 따져본다. 민주화가 진행되고 분노와 저항의 시대를 헤쳐온 지식인 리영희가 물러났지만, 한국사회는 인간다운 사회와 가까워지지 못했다. 신자유주의가 지배하고 시장에 휘둘리는 정글 사회로 변모하고, 불평등과 억압은 세련되게 변형되고 교묘해졌다. 탈근대적 현상들로 탈근대 지식인론이 논의되지만, 근대적 과제와 탈근대적 과제가 중첩되어 있는 한국사회에서 탈근대적 지식인론이 근대적 지식인론을 대체할 수는 없다. 삶의 질이 악화되고 더욱 뿌리 깊은 억압과 불평등이 만연한 이 시대에 지식인의 책무에 대해 다시 묻는다.
리영희는 사르트르를 인용해 자유의 의미를 절절하게 전했다. 사르트르는 독일 점령하에 있을 때처럼 자유로웠던 때가 없었다고 한다. 일체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매일 정면으로 모욕을 당할 때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자유라고 했다. 막다른 골목에 쫓겨 있었던 까닭에 거동 하나하나가 앙가주망의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고 했다. _ 144쪽, 이대근의 「다시, 지식인의 책무를 묻다」 중에서
리영희와 기자 : 진짜 기자의 멸종 _ 안수찬
IMF 이후 시장에 노출되어 생존 경쟁에 돌입한 언론사의 현실 아래서, 기자들은 조직의 부속품이 되어갔다. 단독자 기자는 사라지고 매체마다 정형화된 기사가 넘쳐났다. 『시사저널』 사태는 시장 압력에 굴복한 대표적 사례다. 또 기업 이윤이라는 논리로 진행되는 언론 탄압은 민주 정부 시절의 언-권 유착에서 영감을 얻었고, 역시 시장주의와 관련된다. 기자 사회의 낭만에 빠지지 않고 기자라는 명함에도 연연하지 않으며 권력과 긴장했던 진짜 기자 리영희를 되새기며, 기자의 존재 조건과 기자 정신을 되새기고자 한다.
기가 막힌 노릇이지만, 이는 국소 마취의 수법이다. 시장주의의 모르핀으로 언론의 발을 마비시켰다. 방송 시장이 개방된다는데, 방송이 신문 광고를 다 빼앗아 간다는데, 이 언론사가 망하면 너는 어디 가서 잘난 기자 노릇을 할 것이냐고 겁박하는 방식이다. 기자들이 겁먹었다는 증거는 허다하다. _ 157~158쪽, 안수찬의 「진짜 기자의 멸종」 중에서
리영희와 사회과학 : 사회과학의 고민 _ 은수미
비정규직 문제를 천착하는 사회과학 연구자로서 사회과학의 입장과 역할, 딜레마 등에 대한 고민을 풀어낸다. 사회과학이 비정규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를 사회과학의 고전적 주제인 개인과 사회의 관계의 맥락에서 뒤르켐과 리프킨, 스티글리츠를 참조한다. 사회과학이 비정규직을 말하고 대변하는 것의 의미를 아렌트의 공론장에서 자리 확보의 논의와 만하임의 지식사회학 논의를 연관 지어 고민한다. 또 사회과학이 연구대상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 공공성이란 무엇인지, 사회과학이란 무엇인지 등에 대한 고민을 깊이 있고 진솔하게 풀어낸다.
학문의 역사는 가설의 역사일지도 모른다. 연구자는 아직 입증되지 않은 자신의 논리, 예를 들어 “파업권 보장 없이 민주주의는 없다”는 가설을 제시하고 그것을 입증하려 한다. 학문은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가설을 통해 재구성된다. 하지만 가설을 주장하고 입증하는 것이 학문 외부의 강제에 의해 불가능하여 가설이 가설로만 남는다면 그것은 학문 세계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로 바뀐다. _ 184~185쪽, 은수미의 「사회과학의 고민」 중에서
리영희와 청년 세대 : 냉소주의 시대의 우상과 이성 _ 한윤형
1980년대생의 젊은 필자가 ‘아버지 세대의 선생님’ 리영희를 매개로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청년 문화의 양태, 속내를 정리한다. 70년대 통기타 문화와 리영희의 긴장 관계부터 민중문화가 주도하던 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이론이 유행하던 90년대를 개괄하면서, 우상과 이성의 분별이 가능한지를 질문한다. 또 청년 문화가 상실되고 상품화된 대중문화로 대체되어 버린 지금 청년들의 삶의 조건과 정서, 욕망을 설명한다. 노동자마저 자본가의 사유를 내면화해, 우리 삶 자체가 우상화되어버린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스스로의 삶 자체에 대한 치열한 성찰을 요구한다.
예비 노동자인 대학생들은 자신을 착취해주기를 간절하게 바랄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대학생들이 바라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편입’이다. 자본주의로부터의 자유, 노동할 의무로부터의 자유를 꿈꾸지 못하고 자본주의 사회로 편입하기를, 정규직으로 편입하기를, 그러기 위해 좋은 대학으로 편입하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 하지만 하루하루 편입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의 삶 속에선, 우상은 바로 우리의 삶 그 자체다. _ 204쪽, 한윤형의 「냉소주의 시대의 우상과 이성」 중에서
리영희 인터뷰 : 가혹하게 정직하고, 칼날처럼 순결하게 _ 김현진
일찍이 고등학교를 박차고 나온 ‘불량소녀’로 알려졌고, 20대 필자로 다양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는 김현진이 거인 리영희를 만났다. 패거리를 만들지 않고 올곧게 독립적으로 진실만을 추구했던 리영희의 삶을 ‘리영희 스타일’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하고 지식인과 변혁, 혁명, 역사, 자본주의, 자유 등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리영희는 엄격하고 단단하고 날카로운 솜씨로 질문에 답하는 한편, 어린 손녀의 물음에 응해주는 따뜻하고 지혜로운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인다.
그래도 날렵한 몸으로 채찍을 휘두르며 ‘포티 파이브’ 권총으로 백발백중의 사격 솜씨를 자랑하는 탐험복 차림의 고고학자 리영희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캐릭터로 본다면, 절대 인디아나 존스는 아니다. 아무리 적이라 해도 타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함정에 빠뜨리거나 자동차에서 떨어뜨리거나 하는 건 도저히 ‘리영희 스타일’이 아니다. _ 232~233쪽, 김현진의 「가혹하게 정직하고, 칼날처럼 순결하게」 중에서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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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얼 먹어도 물을 싸는, 뭐 다소 흔한 질병에 걸렸다. 흔한 질병이긴 하나 그 원리가 참으로 신묘하다 아니 할 수 없다. 대처 방법 또한 그렇다. 물을 많이 배출하므로 물을 많이 먹어라. 당연한 말이긴 해도, 내 몸이 들어온 물을 그대로 내보내는 한 줄기 파이프가 된 것 같아 놀랍고 비참하다. 항쟁의지가 남다른 괄약근의 철벽수비가 아니었다면 훨씬 더 ... 더보기
syo 2017-11-20 공감 (40) 댓글 (13)

시이소오님의『모두를 위한 페미니즘』리뷰를 읽고 쓰는 글이 맞지만, 시이소오님의 견해를 지적하거나 반박할 의사가 없습니다. 첫째, 시이소오님은 syo가 깔 수 있을만큼 어쭙잖은 말을 하는 분이 절대 아니고, 둘째, syo는 시이소오님의 글을 깔 수 없을만큼 어쭙잖은 말을 하는 놈이고, 셋째, 설령 미라클적으로 앞의 두 조건이 모두 만족된다 하더라도, 시이소오... 더보기
syo 2017-11-12 공감 (42) 댓글 (28)

오늘 읽은 책에서 1 일반적으로 여자는 남자에 비해 뇌세포 수가 적기 때문인지(일본인 뇌 무게의 평균치는 남자 1372.9그렘, 여자 1242.8 그램) 천박함과 어리석음을 그 바탕으로 하며, 또 그것이 매력이 되기도 하지만 천박함과 어리석음이 이렇게까지 심해지면 그냥 넘어갈 수 없게 된다. _ 다치바나 다카시,「시대와 상황의 병리학」,『문명의 역설』에... 더보기
syo 2017-11-09 공감 (33) 댓글 (9)
책의 정체를 알수 없는 책, 차라리 이영희 선생님의 "대화"를 읽는게...
ksigene 2010-10-29 공감 (1) 댓글 (0)
마이리뷰
리영희를 통해 본 대한민국
'리영희'라는 이름은 이제는 보통명사가 된 느낌이다. 물론 나는 그를 책에서 표현하듯 '사상의 은사'로 모신 그런 70년대 세대는 아니다. 그렇다고 그를 수정주의자라 여기며 극복해야할 대상으로 여긴 80년대 세대도 아니다. 오히려 '리영희'라는 이름을 듣고도 "이게 뭥미?"하고 뜨악하게 쳐다보는 지금의 보통 세대들과 거의 다르지 않은 90년대 세대다.
'리영희'라는 이름은 많이 들어왔지만, 정작 그의 저서를 접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놀고 술마시느라 바빴으니 당연하지). 96년 어느날 동아리방에 너덜너덜해진 책 한 권이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 책의 제목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제목의 책이었다. 그 책 제목의 계시와도 같은 강렬함에 이끌려 난생 처음으로 책 도둑질을 했다(도둑질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이 책을 빌리고 반납하지 않은지 14년이 다 되어가니 훔친거나 다름없다. 깊이 반성한다...). 국제 정세와 한국 정세를 판단한 그 책은 생각보다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으나, 대결의 구도가 아닌 조화의 구도를 그려냈다는 점에서, 그 어떤 문학보다도 감동적으로 다가온 경험이 있다.
그리고 한동안 잊고 살았다. 선생이 중풍에 쓰려졌다는 소식을 접했을때도, "아, 어쩌나"라는 생각뿐이었고, 구술 자서전 『대화』가 나왔을때도 "아!"라는 감탄뿐이었지, 그의 저작을 찾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세상은 어차피 잘만 돌아가니까.
『리영희 프리즘』. 이 책을 읽고나서야 깨달았다. 그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이었는가를. 이 책에 있는 글들은 '리영희'라는 존재를 통해 지금의 대한민국과 지금의 우리들을 바라본다. 어떤 것은 놀랄만한 경탄을 이끄는 글들도 있고, 또 어떤 것은 참신한 시선이라며 무릎을 치게 하는 글들도 있지만, 어떤 것은 "이건 뭥미?"하는 핀트를 벗어난 글도 있다.
열 명의 저자들이 얘기하는 담론들- 생각하기, 책 읽기, 전쟁, 기독교, 영어, 지식인, 기자, 사회과학, 청년문화, 자유 -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진단할 수 있는 열쇳말이기도 하다. 이 담론들이 '리영희'라는 스펙트럼을 통해 이야기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의 시대'를 살아온 세대들에겐 당연한 중언부언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으나, '리영희'라는 인물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놀라움과 경의감을 느낄 것이다.
홍세화 씨가 서문에 밝혔듯이, 이 책은 '리영희'라는 우상 만들기에 관한 책이 아니다. 우상 파괴를 역설한 사람이 스스로 우상이 되는 것을 어떻게 견디겠는가. 이 책은 이제는 우리가 잊어버린, 그래서 '폐기처분해도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감히" 지닌 '리영희'라는 인물이, 사상이, 삶이 아직까지 우리 시대에 유효하다는 것을 역설한다. 일제시대와 해방과 분단과 전쟁과 독재와 민주화를 말 그대로 "온몸으로" 견디어낸 인물의 생각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다. 그는 늙었지만 낡지 않았다. 지금이나마 "선생님"을 알게되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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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ng 2010-03-08 공감(29)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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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프리즘
나는 리영희를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 이 책의 누구 말 마따나 리영희는 알지도 못하고 진중권과 홍세화를 통해 의식화된 21세기의 대학생이 바로 나이다. 그의 글은 쪽글 하나 읽어본 적 없으면서 그의 팔순을 기념하는 책부터 읽는다는 것이 웃기긴 하지만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숨겨진 의도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리영희를 모르는 이 시대의 누군가에게 그의 정신을 일러주는 것. 이렇게 그를 모르는 것이 당연한 현실이 영구해지기 전에 정신차리라고 볼때기를 때려주는 역할 말이다. 이 책을 읽고나서 보니 요즘 세대 지식인과 다른 리영희만의 특징은 그는 외로운 시대를 외롭게 살았다는 점이다. 할 말 하는 댓가로 키보드워리어들과 전투를 치뤄내고 무식한 대중들과 맞짱을 떠야 하는 요즘 지식인들과 달리 그는 무엇이 진실이고 정의인지 겨룰 상대도 없던 적막의 시대를 살았다. 요즘 지식인들이 '디-워는 돈내고 봐주는게 한국인의 도리'라고 우기는 개념없는 애들 상대해주기 피곤하긴 하지만 그래도 혼자였던 리영희보단 덜 외롭지 않을까. 먹고 살기는 커녕 목숨 부지하기도 힘들고 반공 이데올로기는 두꺼운 장막처럼 이 사회를 뒤덮고 있었다. 그 숨막히던 시대에 리영희는 배운자의 사명으로 끝없이 공부하고 탐구하는데 그 외로움은 외로움의 경지를 넘어 숭고하다는 감상마저 자아낸다.
책은 전쟁, 사회과학, 영어공부, 책 읽기, 청년세대 등 다양한 소주제를 리영희와 연결지어 다루고 있다. 한 저자가 한 주제를 맡아 글을 쓰고 있으니 그 다양함이 장점이요 글의 분위기와 농도가 제 각각인 것은 나름의 단점이라 말 할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무척 감탄하며 읽었던 글은 역시 김동춘 교수의 글이었고 한윤형씨의 글 또한 무척 좋았다. 김현진씨의 글은 이 책에서 유일하게 리영희선생님의 인터뷰가 담긴 글이니 좋을 수 밖에 없었다. 다 고르고 골라 선정된 필진일 테니 리영희를 알지도 못했던 일개 무식한 대학생인 내가 글을 품평한다는 것이 웃기긴 하다만 오길영 교수가 쓴 '영어라는 우상'이라는 글에 대해서는 뭥미?심정이 되었음을 리뷰에서 짚고 넘어가야겠다. 오길영 교수는 온 국민이 영어에 목을 매는 현 한국세태에 대해 '언어를 정보 전달과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격하시켜 혹은 생계를 버는 수단으로 격하시켜 창조적 사유와 분리하는 문제를 가져온다.'(113p)고 비판하며 '500단어 영어'를 이야기한다. 요즘 젊은애들이 외국나가고 영어학원에서 목매는 영어회화란게 결국 500단어 가지고 하는 대화란 말이다. 그 500단어 가지고 무슨 깊이 있는 대화가 되겠냐, 그런 발음 굴리기나 하니 미국대학가서 따라가지 못하고 중도탈락하는 것이다-라는 것이 그의 요지이다. 영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일 뿐인데 내가 그걸 무슨 학문처럼 파고들었단 자괴감에 슬펐던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이었다. 영어가 단순히 최강대국의 언어라는 위치를 넘어 전세계공용어로 자리잡은 현실에서 우리가 커뮤니케이션 하는 대상은 네이티브 스피커인 경우보다 영어를 제 2외국어로 삼고 있는 사람인 경우가 더 많다. 독일인을 만나도 케냐인을 만나도 중국인을 만나도 영어로 대화하는 세상이다. 미국으로 석박사 따러가는게 아닌 이상 제일 중요한건 제2외국어로 소통하는 상황에서 기본 500단어로 어떻게 자신의 의사를 효율적이고 분명하게 드러내느냐가 영어회화의 핵심인데(고급단어써서 유식하게 보이고 싶은 욕망은 이해한다만 토플에 나오는 고급단어도 일상회화에선 거의 쓰이지 않는다)이걸 가지고서 문제라고 하니 나로선 전혀 공감하지 못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500단어 회화로는 비판적 사고력의 부족을 커버할 수 없고 그래서 발음만 현란한 한국애들이 안되는 거라 이야기 하는데 그렇게 애초에 알맹이가 없는 애는 500단어 회화가 아니가 22000단어 회화로도 커버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는 또 지젝의 강연을 들었던 예를 들며, '그의 발음은 알아듣기 힘들었고 표현도 어색했지만 그의 당당했던 태도는 좌중을 압도했다' 말하는데 그건 지젝이니까 그런거고 남들에게 내 이야기를 쏙쏙 이해되게 갖다 바쳐야 하는 일반 한국인들로서는 발음도 무척 중요한 부분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나 비지니스 영역에서 유려한 말솜씨의 중요성을 무엇에 빗댈수 있으랴? 리영희는 마지막에 가서야 이 영어교육론과 연결된다.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는 왜 배우는가? 어떻게 영어를 배우고 누구를 위하여 영어를 쓰는가? 리영희에게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는 진실을 추구하려는 지식인으로서 글을 쓰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다. 다양한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세계를 조망하는 창을 더 많이 확보한다는 뜻이다. 리영희가 누구보다 날카롭게 당대의 문제를 파악하고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를 향해 열린 외국어의 창을 많이 확보했고 그 창을 통해 무엇을 봐야 할지를 명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124p) 말은 참 근사하다만 초반부에 영어를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격하시킨다 분개하더니 뒤에 와선 리영희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잘 사용했다 칭송하니 좀 뭥미?싶었다. 결국 어떤 목적은 숭고하고 어떤 목적은 천박하다는 것인가. 물론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는 알겠다. 고전을 원서로 읽어라, 더 많은 단어를 배우고(개념을 배우고) 사고의 지평을 넓혀라 그런 이야기겠지.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에 나쁜 뜻이 있었으리라곤 생각치 않는다. 그런데 요즘 현실에선 에덴의 동쪽을 원서로 읽는 것은 사치인 사람들이 많다. 비지니스 영어회화 100개 외워서 면세점 취업해야 하는 아가씨들이 가장 좋은 예일 것이다. 그런 삶의 문제.현실의 문제가 결코 격하될 수 없는 부분이란 것이 나의 생각이기에 영어가 수단으로 사용될 때에도 급이 있다는 식의 오길영 교수의 글은 불편했다. 영어로 인한 사대주의, 식민주의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영어가 필요한 사람만 배우면 된다'고 말한다. 현재 한국의 영어 열풍이 정상의 범주를 넘어서 과도한 사회적 수준의 낭비를 가져오고 있는 것에 나 역시 분명히 동감하는 바이다. 하지만 '배울 사람만 배우면 된다'는 논리는 무척 위험하다고 본다. 에덴의 동쪽을 원서로 읽을 시간적 여유가 되며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교수. 기자 등등)만 영어를 배우겠다는 소리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 시대에 영어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위키피디아 사전 한번 들춰보려고 해도 영어는 필요하다. 그래. 내가 불편했던건 이런 이야기들이다. 리영희 선생이 영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전혀 아는바가 없다. 이 책은 리영희 선생이 쓴 책이 아니니까.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오교수의 인용에 리영희 선생은 전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리영희 선생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생각을 강하게 펼친것 아닌지 하는 찝찝함이 남았다.
이 기나긴 불평글을 다 읽고 내려오신 분이라면 분명히 아시겠지만 이 책은 마지막 챕터의 인터뷰 약간을 제외하고는 리영희의 목소리나 글이 직접적으로 담겨있지 않다. 그에게 사상적으로 은혜를 입었다는 이들이 그를 떠올리며 쓴 글이 묶여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 같이 그와의 시대적 갭이 무척 큰 대학생이나 젊은 사람은 그를 본격적으로 읽기 이전에 우리 이전 세대에 그가 가졌던 의미가 무엇인가 잠시 배우고 건너갈 수 있는 징검다리가 되어줄 수 있는 책이다. 간접적으로나마 리영희의 생애나 경력이 토막토막 언급되기에 그에 대한 기본지식도 제공해준다. 나는 이제 리영희의 진짜 글을 읽어보려고 한다. 마지막 챕터의 인터뷰가 주는 감동이 너무 커서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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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10-03-16 공감(12)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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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망 없는 시절의 목발,리영희
리영희,라는 이름을 앞에 두고, 이 책을 읽으며 떠올렸던 상념들을 무슨 말로 옮겨야 할지 막막하다. 어차피 이 책에 글을 올린 필자들처럼 리영희,라는 프리즘으로 현실 사회를 진단할 능력이 없음을 제 깜냥에도 알고 있지만, 그래도 고개 숙여 큰 절이라도 한 번 하고 싶었고, 선생님이 살았던 시절보다 어쩌면 더 가망 없어진 시절을 어찌 살아내야 하는지 무슨 나침반 하나라도 거져 얻고 싶었다. 끈 떨어진 마음이 갈 곳 몰라 떠돌고 있다고 자백하는 꼴이니, 알고는 있었지만, 사람 덜 된 꼴을 이렇게도 확인하는 요즘이다.
90년대 초반, 내가 대학이라는 곳에 발을 들여 놓고, 사회과학연구소라는 모호한(?) 성격의 동아리를 기웃거리며, 그곳에 있던 쌘(지금 보면 무섭지도, 선동적이지도 않지만 그땐 그렇게 보였다) 책들을 읽기 시작할 무렵 선배로부터 건네받은 책이 [우상과 이성]이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선배는 나를 잘 못 골랐다. 리영희 선생의 [우상과 이성]을 읽은 후, 되려 쌘 책들과 멀어졌고, 선배들의 주입식 교육을 의심했고, 자연스럽게 주변인으로 겉돌기 시작했다.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생각의 스승'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훌륭한 '정보'나 '견해'를 들려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생각하게' 했기 때문이다."라고 고병권은 이 책에 적고 있다.
정녕 그러했다! 절대의 이름으로 맹목적으로 외우고, 익히던 시절에 마침표를 찍게 한 사람, 내가 안다고 믿었던 신, 인간, 사회구조, 주의, 냉전, 자본 그리고 나 자신마저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게 한 사람, 그가 리영희,였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 IMF라는 재갈이 물려, 무한 경쟁이라는 시절을 벼락처럼 맞아야 했고, 그에 따라 수적으로는 다수일지라도 구조적으로는 소수로 전락하는 사람들의 곁을 멤돌면서, 국가도 조직이라고 본다면, 조직의 명운이 흔들리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어떻게 개인들을 위축시키는지, 조직원으로서 더 잘 조련되는지를 맥없이 지켜봐야만 했다. 그리고, 이 특별한 조련에 동원된 언론, 지식인 사회, 정치인들의 모습 또한 꾸준히 봐야만 했다. 리영희 선생님이 전 삶을 걸고 완강하게 싸운 [우상]을 떼거지로 목도한 시절이었다. 또한, 사회가 지능적으로 잔인하다는 것도, 그에 대한 각 개인의 대비가 이렇게 허술했구나,라는 사실도 이처럼 일목요연하게 경험할 수 있다니 그저 놀라운 시절이었다. 물론, 그 이후 시장이라는, 신자유주의라는 우상이 자리를 잡고 가망 없는 시절이 노골적으로 시작되면서, 그 시절 내 놀라움은 시작에 불과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지만 말이다.
얼마 전, 보험설계사 한 분을 만났다. 요즘처럼 영업이 힘든 건, 일을 시작하고 10년이 넘었지만 처음이라고 했다. 해약은 많고, 가입은 적다고. 진심은 아니었지만, 경제 대통령 시절이고, 경제가 좋아진다고 하고, 토건 사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데, 어째서 현실 경제가 그리 얼어붙었을까요,라고 나는 물었다. 내 음험한 물음에 중산층이 점점 무너지니까요,가 그분의 대답이었다. 중산층이 무너지다뇨,라고 계속 말꼬리를 물고 싶었지만, 그분이 무슨 죄라고 내 비아냥을 참아내야 하는가 싶어 그만두었다.
여튼 우리 사회에서 무너지고 있는 것이 중산층뿐일까? 아니 중산층이라 정의되는 계급이 무너진다는 것이 경제적 의미에서만 해석될 수 있는 것일까? 구조적 소수자로 내몰리는 우리가 이 위기를 극복할 수는 있는 것일까? 현실에 대한 사유가 깊어질수록, 나는 엄혹한 시절을 살아낸 스승에게, 예의없는 태도로, 스승이 살았던 그 시절보다 더 가망 없는 시절을 살고 있다고 토로하고 싶었다. 최장집의 말을 빌려, 권위주의 시대처럼 명백한 부정의 때문에 정의가 쉽게 파악되는 시절도 아니고, 소수의 기득권 세력을 위한 질서도 그 외피를 바꿨을지언정 변하지 않은, 그러기에 무엇이 무엇인지, 그저 우르르 몰려 다니며 속고 속이는 시절이라고. 시장을 획득하기 위한 전쟁이 평화의 옷을 입고, 글로벌이라는 이름이 무한 경쟁을 재촉하고, 루저가 되지 않으려면 사교육에 올인해야 하고, 조직의 무탈을 위해서 부속품으로 전락하는 개인쯤은 어쩔 수 없는 희생이며, 투자와 저축보다 투기만이 이 땅에서 살아남는 길이라는 것이 상식이 되어버린 시절이라고. 이보다 가망 없는 시절이 또 있을까 싶다고.
생각없는 노예로 죽어가는 삶보다 고통스럽지만 깨어있는 삶을 그리고 잠든 사람들을 깨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던 선생을 통해 각성의 기쁨을 맛보았지만, 정작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거대한 체제, 자본, 시장이라는 [우상]앞에서 정녕 어찌해야 하는지, 쪽팔림이라도 면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여전히 두려움과 기갈로 우왕자왕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또 한편, 따져 묻지도 말라는[우상]의 엄포앞에서 작은 용기, 내 삶이 피해입지 않을 정도의 용기로 맞섰으니까, 내가 할 몫은 다한거 아니냐고, 그런데 현실은 갈수록 왜 이모양이냐고, 계속 불평만을 늘어놓는 나에게, 삶과 앎이 불일치한 너는 리영희,를 왜 읽었느냐고, 리영희,가 그저 지적 유희로 소비되었던 것이었냐고, 리영희,가 아니더라도 네가 읽은 책 속의 어떤 글 한 줄도 너의 삶을 바꾸지 못했다면 그 책들은 무엇하려 읽은 것이냐고, 이제는 선생이 다시 꾸짖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선생의 글이, 선생의 삶이 여전히 내 주위를 떠돌며 나를 부끄럽게 하고, 깨우치게 하는 한, 적어도 가망 없는 시절을 핑계삼아 어딘가에 숨는 일도 이제는 어려울 듯 싶다. 화끈거리는 마음은 쥐구멍 앞을 서성이지만 그도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선생님, 사랑을 목발 짚어 살아온 어느 시인처럼, 선생님을 목발 짚어 살아보려는 후학, 아니 후학이라고 혼자 우기는 이가 있습니다. 어떤 이유를 들어서도 반가우실리는 없겠지만, 그렇지만 말입니다, 선생님, 다독이고 독려해야 할 청춘이, 제가 아니더라도 아직 많습니다. 그러니 아직은, 그리고 앞으로도, 강건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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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0-03-15 공감(9)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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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은 반드시 온다! 사유하라!
70,80년대 한국의 청년들, 그리고 대중의 사상적 은사였던 이영희 선생을 왜 지금 다시 논의하여야만 하는가? 다시 말해 ‘의식화’로 대변되는 정신의 혁명, 대중의 깨어남이 요구되는 까닭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 당위의 질문에 대하여 이 저술은『전환시대의 논리』,『우상과 이성』으로 상징되는 잠자던 대중을 깨웠던, 즉‘깨어난 자들의 끊임없는 증식’을 통해,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을 것 같던 독재의 암흑이란 철벽을 부수고 일궈냈던 민주화의 성취가 오늘에 다시금 어떠한 의미로 다가서는지를 세대와 분야를 아우르는 인물들의 담론으로 펼쳐내고 있다.
여기에는 인권이 유린되고, 자유는 억압되었으며, 밀실로 붙들려가 폭력에 시달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나가는 민주주의의 실현은 요원하기만 하였던 악독한 독재정권이 지배하던 시절, 역사의식도 없으며, 세계사적 흐름을 읽지 못하던 무지몽매한 지배계급의 폐쇄적 폭압의 시대에나 필요했지 오늘에 새삼스레 대중의 집단적 각성, ‘의식화’의 논리를 꺼내드는 것은‘꼰대’들의 구시대적 발상이라는 냉소도 있다. 더구나 온통 물화(物化)되어버린 사회, 당장 밥벌이라는 생존의 문제에 허덕이고 있는데 무슨‘자유’타령이냐, ‘자본주의에 편입’되기 위해 발버둥치기에도 모자란 형국이란 말이다. 라는 88만원 세대의 항변도 있다.
그러나 잠시라도 소위 자기 계발이란 것을 소홀히 하면 경쟁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높으니‘자본의 도구’가 되는 종속을 택하는 것이 옳다는 이러한 단순화된 양자택일의 논리는 왠지 설득력을 갖추기엔 미흡하지 않은가? 당장은 안전한 자신의 보위가 되는 듯 보이지만, 이는 결국 부정의와 불평등, 비인간화, 인간소외를 고착화시키고 자본의 노예로 길들이려는 지배계층에 굴종하는 삶을 완성하는 것 이상이 아닐 것이다. 오늘의 우리사회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라는 무한경쟁 시장의 논리, 즉 시장만능의 이데올로기는 경쟁의 원리, 약육강식의 원리, 탐욕의 원리만 작동되고, 이를 위해서는 인권, 자유, 민주주의는 기꺼이 희생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국가경쟁력 제고라는 미명하에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자유를 부인하던 군부독재 시절로 역진된 형국과 한 치의 차이도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무감각, 무의식을 자처하고, 지배자들에게만 가치판단을 맡길 때, 어느덧 회복할 수 없이 잘 길들여진 비인간화된 노예의 삶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불평등, 억압, 배제와 차별이 고착화된 사회, 작은 물질에 자신의 자유를 내어준 사람들이 기대할 수 있는 사회의 모습일 것이다.
‘완전한 사고 정지증’에 걸린 듯한 오늘의 사람들에게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집단적 각성, 의식화가 지닌 의미의 오늘에서의 재해석을 필두로, 신자유주의적 세속(反)윤리의 틀을 벗어나 경쟁의 바깥으로 탈주하는 것으로서의 책 읽기,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의 이해를 통한 전쟁의 파렴치한 속성들 - 권력과 민중 격차의 극대화, 제국주의의, 계급원칙의 적나라한 불평등... -에서부터 “사대주의에 기초한 허구적 주류의식과 무지몽매함”으로 한국전쟁의 참화와 분단국가의 서러움을 겪고서도 전쟁에서 완전히 벗어날 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오늘날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의 또다른 냉전체제의 병리현상을 지적하기도 하며, 정말 기형적인 한국 기독교의 본말이 전도된 제도 종교로서의 비판과, “예수를, 진리를 이기적 욕망충족의 수단으로 착각”하여 “욕망에 마음을 굽히고 돈에 허리를 굽히는 행위가 사실상 우상숭배라는 사실에는 아랑곳하지 않는”종교인에 대해 생각한다.
한편, 영어를 강조하는 상상력빈곤의 이 사회의 진정한 속셈인 “지배세력의 입장에서 볼 때 영어가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 할 수 있는 효과적 수단”이라는 통찰과, 창조적 사유의 자리가 없는 실용영어가 지니는 허위, 그리고 무엇보다 원어민 교육을 받아 혀 꼬부라진 그럴듯한 발음에도 정작 “비판적이고 포괄적인 사고력이 없는” 맹탕의 영어로 일그러진 한국인의 초상을 말한다. 그럴듯한 발음의 영어를 구사하지만 사유와 지식이 없는 무식한 영어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점이다.
특히, 지식인에 대한 사회적 책무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은 이 저술과 이영희 선생의‘배우게 하는 사람’이라는 스승의 개념과 연결되어, 학벌세상의 승자인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을 향해 매운 회초리를 든다. 삶과 앎이 불일치하는 한국 지식 사회의 고질병은 물론, 탈근대적 과제와, 여전히 매우 질 낮은 민주주의와 같은 근대적 과제까지 중첩된 한국사회에서의 합당한 지식인의 역할을 논의한다. “현학의 하늘에서 대중의 땅으로 내려와 그곳에서 지식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체득해야 한다는 권유”는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자각한 파리아(pariah,주변인)의 관점’그것으로서, 지식인의 계몽자로서의 기능을 강조한다.
극단적인 신자유주의와 시장지상주의를 밀어붙이는 이 정권은 점점 대중의 사회안전망을 축소하고 개인의 행복이나 복지가 모조리 개인의 책임이 되는 사회로 퇴행시키고 있다. 또한 교육은 “‘약자를 보호하자’가 아니라, 심지어‘강자가 어떻게 약자를 더 잘 먹을 수 있을까’를 가르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옛날 옛적부터 잘 먹고 잘산 놈들이 제 권리를 잠시 빼앗겼는데 도로 찾으려 일어나는, 반동이 일어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인 것은 역사의 경험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평등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보편적 복지가 높아지고 생산성도 높아질 수 있도록 가치관, 인간관, 세계관을 개량하는데 노력을 경주하여야 할 것이다. 눈앞의 풍요 속에 매몰되어 진정한 가치들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악덕한 제도, 정치, 사상에 굴종하지 않는다는 저항적 인간을 목표로 하는 자기의식의 전환을 이야기하는 이 저술은 그래서 지금에 다시 이영희를 말하고, 집단적 깨어남을 말하여야 하는 필연적 요구를 담고 있다. 오래전 대학신문사에서 독재정권의 말로를 지켜보고, 그리고 더욱 악질의 군사정권이 들어서는 폭력의 시대에 이영희의 저작들을 읽고, 민주화운동을 취재하며 학우들과 울분을 토해내던 그 시절을 떠올린다. 더 이상 이러한 집단 의식화를 얘기하는 세상이 아니기를 바랐건만 소비지상의 물화된 신자유주의라는 우상으로 바뀐 대상이 30년 전으로 사회를 역진시키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역사와 철학, 문학과 예술 등 다방면의‘특수 지식인’들이 바로 이러한 각성을 위해 대중을 향한 노력을 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변혁은 반드시 올 것이란 말을 되새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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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식 2010-03-12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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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를 통해 교양을 읽다
시대가 어려울 때일수록 사람들은 진정한 이 시대의 양심을 원한다. 우리나라는 해방이후 군부독재 시대라는 암울한 시기를 거치면서 많은 양심들이 힘들고 모진 시기를 거쳐왔다. 그 중에서도 ‘리영희;라는 이름이 남긴 의미는 남다르다. 지금까지도 그의 이름 세 글자는 ’민주화‘ 라는 화두와 함께 우리에게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
이 책은 2009년 12월 2일 리영희의 팔순을 기록하고 기념하기 위해서 기획된 것이다. 리영희가 이 시대에 던져준 의미와 영향력을 되새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리영희를 프리즘으로 삼아 우리 시대를 이해하고, 다른 삶과 다른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교양 목록을 제시한다.
리영희와 생각하기에서부터 책 읽기, 전쟁, 종교, 영어 공부, 지식인, 기자, 사회과학, 청년 세대 등에 이르기까지 리영희를 매개로 다양한 교양을 이야기한다. 각 주제는 지금 현실과도 직결되는 주제들이다. 간단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내용들이 아니다. 오랜 공부와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논의될 수 있는 묵직한 주제들이다. 리영희의 삶과 인생이 함께 녹아든 주제들은 리영희라는 인물 앞의 우리들이 더욱 작게만 느껴지게 만든다.
예전 세대에 비해 요즘 세대는 비주얼과 감각적인 면에 많이 노출되어 있다. 즉물적이고 즉흥적이라는 이야기도 있다(물론 절대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대중교통이나 거리에서 휴대전화, MP3, DMB에 익숙한 젊은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점점 생각하는 시간이 적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지은이들이 이야기하는 생각하기와 책 읽기, 영어공부, 청년세대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쯤 숙독해 볼 필요가 있는 이야기다.
이제는 하나의 거대한 집단으로 변해가고 있는 종교에 칼날을 들이대고, 지식인으로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지 지식인의 책무를 묻기도 한다. 이쯤되면 이 책이 단순히 리영희의 의미와 그 영향력을 읽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지금 현재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생각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로 모시는 70, 80년대 학번부터 2000년대 학번까지 세대를 뛰어넘는 다양한 이야기꾼들이 참여하고 있다. 세대를 넘나드는 이야기는 리영희에 대해 다양한 시선으로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세대를 넘어서서 리영희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리영희라는 인물이 가진 진실한 교양인으로서의 모습때문이 아닐까.
교양을 뜻하는 영어 'culture'의 원뜻은 '경작(耕作)'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풍부한 지식과 인격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경주되어야 한다. 천박한 지식과 대중들의 인기에 영합하는 아집이 판을 치는 세태가 되어서는 안된다. 급변하는 현실 사회와 정치 속에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교양인이 필요하다. 교양을 다시금 이야기해 보아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리영희를 더 읽어야 하고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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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노 2010-03-14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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