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7-28

"김일성, 1975년 무력통일 승인 받으려다 마오쩌둥 사전차단"(종합) | Daum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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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1975년 무력통일 승인 받으려다 마오쩌둥 사전차단"(종합)입력 2016.09.01. 18:13 댓글 14개

"겉과 속 다른 중국"으로 평가..북중관계 내막 분석서 日서 출간 中전문가 선즈화 교수 "마오쩌둥, 北에 종속국 대하는 자세"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조선노동당창건 65주년 경축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2010년 10월 방북한 중국공산당대표단이 당시 김정은 조선노동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게 보낸 선물. 중국의 붉은 별인 마오쩌둥 전 주석과 김일성 주석이 환담하는 모습을 액자로 만든 것이다.

(도쿄=연합뉴스) 김정선 특파원 = 김일성 북한 주석이 1975년 마오쩌둥 중국 주석과의 회담에서 남북 무력통일을 거론하려 했으나 당시 미국과 관계 개선을 꾀하던 마오쩌둥이 김 주석의 의도를 파악하고 정치적 화제를 피하려 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일본 언론은 북중 관계 전문가 선즈화(沈志華) 중국 화둥사범대 교수가 이런 내용을 담은 책 '최후의 천조(天朝) 마오쩌둥·김일성시대의 중국과 북한'을 일본출판사 이와나미쇼텐에서 출간한다고 1일 보도했다.

이 책은 선 교수가 중국과 구소련의 옛 문서와 증언 등 미공개 자료를 바탕으로 북·중 관계를 분석한 내용을 담았다. 천조는 제후들을 거느리는 천자가 다스리는 조정이라는 뜻이다.

책은 북한과 중국 지도부가 한국전쟁 이후 '혈맹'이라는 외피의 이면에 서로 강한 불신감을 느끼고 있었다고 전한다.

보도에 따르면 이 책에는 1956년 11월 30일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 주석이 베이징(北京)의 중국 수뇌부 거처인 중난하이(中南海)에서 당시 중국 주재 소련대사와 마주 앉아 북한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묘한' 말을 던졌다.

마오쩌둥이 "김일성은 '너지'가 될 가능성이 있다"면서 "너지는 (사회주의 진영에서) 이탈하려다가 실패했지만, 김일성은 성공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너지는 1956년 헝가리에서 일어난 반(反) 소련 혁명의 주역으로, 무력 진압에 나선 소련군에 체포돼 반역 및 국가전복 혐의로 재판을 받고 같은 해 6월 극비리에 처형된 너지 임레 전 총리를 말한다. 마오쩌둥의 이 발언은 김일성이 너지처럼 비극적인 운명을 맞을 가능성을 거론한 것이어서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1956년 8월에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친(親) 중국·소련 세력인 연안파와 소련파를 대거 제거하는 이른바 '8월 종파사건'을 단행한 것을 계기로 중국의 대북 영향력이 크게 약화한 상황에서 마오쩌둥의 불만이 터져 나온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마오쩌둥의 '문제성' 발언은 중소 분쟁의 파고가 높아지던 1960년 당시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이 북한 주재 자국 대사에게 옮김으로써 김일성의 귀에 들어갔다.

대사의 보고에 따르면 자신이 마오쩌둥으로부터 비판받는다는 걸 알았던 김일성은 "이건 농담이야"라고 혼잣말을 한 뒤 "중국의 지도자는 얼굴을 마주하고 말하는 것과 뒤에서 하는 게 너무 다르다"는 인식을 드러냈다.

아울러 책에는 마오쩌둥이 1956년 중국을 찾은 북한 고위 관료를 접견한 자리에선 김일성이 중국과 가까운 관계에 있던 북한 내부 연안파 숙청을 거론하면서 "당신들 당 내부에 공포 분위기가 퍼져 있다"고 언급한 대목도 나온다. 그 자리에서 마오쩌둥은 김일성에게 한국전쟁과 관련해 "이 전쟁은 해야만 하는 게 아니다"고 주의하라고 했던 적이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마오쩌둥이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의 판단이 '잘못됐다'고 비판하면서 자신의 참전 결정도 후회했다는 사실은 지난해 관련 자료를 통해 언론에 공개된 바 있다.

중소 관계가 악화하자 김일성에 대한 마오쩌둥의 자세는 다시 한 번 바뀌었다.

1960년을 전후해 북중 국경지역에서 중국 주민들이 북한으로 대거 월경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사히신문은 1961년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 총리와 만난 김일성이 그 인원이 2만명 정도라고 말하자 저우 총리가 "당신들이 필요한 인원만큼 우리가 제공한다"고 말했다고 책 내용을 전했다.

마오쩌둥도 이후 북한 측에 "병력이 부족하면 그곳(중국 동북지역)에서 징병하면 된다"고 가볍게 넘기듯 말했다.

중국은 국경 획정에서도 북한에 큰 폭의 양보를 했다.

1962년 북중 국경조약에 따라 백두산은 북한과 중국 영토로 나뉘었다. 천지의 경우 북한 영유 54.5%, 중국 영유 45.5%로 분할됐다.

당시 접경지역인 투먼장(圖們江) 지구에서 중국이 포기한 영토는 500㎢에 달했다고 신문은 덧붙였다.

[베이징=연합뉴스 자료사진] 1954년 10월 1일 열병식을 함께 지켜보는 김일성 전 북한 주석(오른쪽 둘째)과 마오쩌둥 전 중국 주석(오른쪽). 2015.8.26 << 경화시보 캡처 >>

1975년 4월 18일 김일성과 베이징 중난하이에서 마지막 회담을 했을 당시의 발언은 더욱 주목된다.

그 자리에서 마오쩌둥은 "나는 정치 이야기는 이제 하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이는 김일성의 '의중'을 미리 파악한 선수 치기였다는 것이 선 교수의 설명이다.

당시 국제정세를 볼 때 베트남전쟁에서 베트남 공산당의 승리가 굳어지고 미국의 패색이 짙어지던 가운데 호찌민 함락을 앞뒀고 캄보디아는 공산화의 길을 걷고 있었다.

김일성이 회담에서 "그들(베트남과 캄보디아)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와 같다"면서 남한 무력통일의 속내를 내보이려 하자 마오쩌둥이 사전에 이를 사전 차단했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우리의 공통된 승리"라는 표현을 써 가며 남한 무력통일로 화제를 옮기려 했다고 마이니치신문은 전했다.

선 교수는 김일성이 무력통일에 대한 중국의 승낙을 얻고 지원을 요청하려 했으나 마오쩌둥이 그 의도를 알고 이야기를 피하면서 발언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김일성은 마오쩌둥에게 2차 한국전쟁을 명확하게 말하진 않았지만, 사료로 볼 때 중국 방문 전에 조선노동당 내에서 그와 관련해 발언했다는 점에서 실제로 (무력통일을)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고 소개했다.

마오쩌둥은 1972년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의 방중 이후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꾀하며 외교노선에 변화를 주고 있었다.

1976년 사망한 마오쩌둥은 김일성과의 회담에서 "신이 술을 마시러 오라고 권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선 교수는 김일성-마오쩌둥 마지막 회담을 계기로 북한이 중국에 의존하지 않고 핵 개발을 진척시키는 등 독자노선을 걸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책 제목의 '천조(天朝)'와 관련, "과거 중국의 대북자세는 양보와 인내였으며 마오쩌둥은 '북한은 내 자식'이라는 생각으로 북한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려 했다"면서 "그런 태도는 중앙왕조가 주변 종속국을 대하는 자세와 같은 발상"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종속국과 경계선이 없는 중앙왕조의 개념은 세계혁명론 개념과도 일치한다고 전제하면서 "마르크스주의는 국가 개념의 소멸을 말했다"면서 "자신을 세계혁명의 우두머리로 인식한 마오쩌둥으로선 북한은 분신과도 같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선 교수는 '특수한' 북중관계는 김일성과 마오쩌둥이 만든 것이라며 이들 사이에 외교는 없고 내교(內交)만 있었다고 설명하면서 그런 북중관계는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 시대에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 이유로 "한국전쟁에서 공통의 이익을 갖고 미국과 대립했을 때는 (관계가) 좋았겠지만, 중국이 구소련과 대립하고 미중관계를 호전시키려 하자 문제가 생겼다"고 부연했다.

선 교수는 "한중 국교관계 수립 시기를 지나 이제 특수성은 없어지고 있다"면서, 최근 "북중관계가 변했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지만 중국이 과거의 사고방식을 갖고 대처하는 게 아니겠냐"고 말했다.

그는 "마오쩌둥은 대북 관계의 모순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밖으로 내보이진 않았다"며 "적에게 유리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선 교수의 저서는 아직 중국에선 출판 허가가 나지 않았다.

js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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