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 입국 문제, 남북의 평화적 관계 기반으로 풀어나가야" 재일조선인 3세 조경희 성공회대 교수 인터뷰 - 경향 모바일
"재일동포 입국 문제, 남북의 평화적 관계 기반으로 풀어나가야" 재일조선인 3세 조경희 성공회대 교수 인터뷰
기사입력 2017.05.23 15:09
최종수정 2017.05.23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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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학교의 연구실에서 만난 조경희 교수. 최미랑 기자.
일본 조선학교에서 치마저고리를 입고 자란 그에게 딸이 다니는 어린이집에서는 “기모노를 입고 다문화교육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악의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재일조선인에 대해 무지했을 뿐.
2002년 처음 한국을 찾았다가 한국사회의 역동성에 매료되었다. 그때 만났던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고 또 가족이 되면서 한국에 정착했다. 올해로 13년째 한국에서 생활하는 재일조선인 3세 조경희 성공회대학교 교수. 그를 19대 대선 전날인 지난 8일 성공회대 연구실에서 만났다. 조 교수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촉구 촛불집회에서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느꼈던 ‘평화의 예감’을 10여년 만에 다시 느꼈다고 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조선적 재일동포의 국내 입국은 사실상 금지됐다. 조 교수는 자신의 경험을 회고하면서 안보 논리가 재일조선인들에게 과잉 적용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새 정부가 남북문제를 평화적으로 풀어갈 거라 기대합니다. 재외동포들의 문제 또한 남북의 평화적 관계를 기반으로 해야 역사와 인권의 관점에서 풀어갈 수 있으니까요.”
“일본에서 재일동포들은 38선 없이 살아왔어요. 조선이든 한국이든 일본이든 국적도 뒤섞여 있고요” 이런 상황에서 조선총련 계열의 재일동포를 여전히 ‘빨갱이’로 보는 협소한 시각을 경계해야한다고 조 교수는 지적한다.
조선학교에서의 경험은 그에게 공동체의 중요성을 일깨웠고 민족주의적 성향을 남겼다. 그는 지금도 ‘민족’이라는 단어에 감흥을 느끼는 데가 있다고 했다. 최근 조 교수는 국적, 여권, 주민등록 등 제도가 개개인과 집단을 어떻게 포섭하고 배제하는지에 관한 책을 동료와 함께 준비하고 있다.
배제하고 혐오하는 사회로 남을 것인가, 열린 사고와 포용하는 자세로 새로운 평화의 시대를 열어갈 것인가. 기로에 선 한국사회에는 경계인의 시각이 필요하다. 다음은 조 교수와의 일문일답이다.
■10여년만에 다시 느낀 ‘평화의 예감’
-재일조선인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초등학교 6학년 딸이 어린이집에 다닐 때였다. 한창 다문화교육이 열풍이던 2000년대 후반이었는데, 어린이집 선생님이 나에게 아이들을 대상으로 일본에 대한 ‘다문화교육’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기모노를 입고 일본에 대해 소개해 줄 것을 원하는 것 같았다. 이를테면 일본 국기의 모양이나 일본 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해 줄 것을 기대한 것이다. 나는 ‘죄송하지만 그건 못 하겠다’고 했다. 대신 재일동포의 입장에서 아이들에게 평화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는 것이라면 할 의향이 있다고 했더니 ‘그건 다문화교육이 아니다’며 거절했다. 다문화교육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서는 민족문제와 다문화문제의 틀이 완전히 다르다 보니 좀 답답한 경우가 있다. 재외동포들은 두 가지 문제에 모두 걸쳐있는데 말이다.”
-어떻게 한국에서 살게 됐나.
“2002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한일 월드컵이 한창이었던 시기다. 이전에 한국에 친구가 한 명도 없었는데 시민단체 지구촌동포연대(KIN)에서 알게 된 사람들과 같이 축구경기도 보고 시위에 함께 나가고 하면서 많은 인연이 생겼다. 공부하러 왔지만 사실 공부는 별로 안 했다.(웃음) 그해 안타깝게 죽은 효순이·미선이를 추모하면서 처음으로 촛불집회가 열렸는데 그 규모와 열기, 한국의 시민사회의 양심과 분노가 기억에 너무나 인상깊게 남아있다. 그해 말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는 것을 보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남조선’이라고 불러왔던 한국이 갑자기 나와 가까워지면서 ‘여기서 살고싶다’고 생각했다. 결국은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일본으로 돌아간 직후 바로 한국으로 이주할 계획을 세웠다. 물론 그 후 정권에 따라 사회의 분위기가 변화되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촛불집회에도 나가봤나.
“나갔다. 특히 마지막 촛불집회가 끝나던 날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이번 촛불시위에서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느꼈던 어떤 평화의 예감같은 것을 정말 오랜만에 느꼈다. 거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다양하면서도 다음 시대를 갈구하는 비슷한 에너지를 공유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난 수년간을 생각해보면 개인적으로는 한국에서 직장도 생기고 나름 열심히 살았지만, 정치적·사회적으로 느껴지는 박탈감이 작지 않았다. 남북관계나 한일관계가 재일동포들의 현실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데, 여전히 비합리적인 힘에 의해 좌우되는 사회에 사는 것은 행복한 일이 아니다. 개성공단이 폐쇄되거나 통합진보당이 해산됐을 때는 충격이 컸다. 세월호는 말할 것도 없다. 사회가 점점 각박해지고 어떤 공공성과 가치를 추구하기보다는 생존을 위해 점점 더 무언가를 배제하고 혐오하는 쪽으로 발산되지 않았나.”
■울타리가 돼준 조선학교
<당신이 과거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긍정하지 않는다면 현재도 계속되는 식민지 지배를 용인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조선학교는 항상 식민지 지배 책임을 부인하고자 하는 일본 지배층들에게 상징적인 표적이 되어왔다. 그 압력에 대한 저항은 조선반도 남이든 북이든 재일이든, 분단 이데올로기를 넘어 전 민족적으로 공유해야 할 과제다. 학생들이나 부모들에게 그런 자각이 있는지 없는지를 떠나서, 조선학교는 이 투쟁의 최전선에 놓여 있다. 최전선에 선 사람들을 고립시켜서는 안 된다.> -서경식 도쿄경제대학 교수, <조선학교 이야기>(2014, 도서출판 선인) 추천의 글 중에서-
-조선학교에서는 무슨 말을 쓰나.
“저는 모어가 일본어다. 학교에서 조선말을 배웠지만 그 정도로는 생활이 가능하지가 않았다. 학교에서 우리가 쓰던 말은 굉장히 현지화된 언어다. 말하자면 발음이나 문장은 일본식이지만, 단어는 북한식, 또 어떨 때 억양은 경상도식이다(재일동포 1세들은 경상도 출신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마 남한 사람들이 들어보면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학교 밖에 나가면 친구들끼리 대부분 일본어를 썼다.”
-일본의 대학에 진학했을 때는.
“언어적 문제는 전혀 없었지만 아무래도 문화적 이질감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스스로도 신기하다. 일본에서 계속 살면서도 일본인 친구가 없었다. 대학교에 들어가게 되면서 처음으로 일본인 친구들을 사귀었다. 일본 사회에 나갔더니 모든 것이 (조선학교에서와) 너무 달랐다. 당황스러움이 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때는 세계사적 변동이 큰 때였다. 소련이 해체되고 냉전 체제에 큰 변화가 생겨 세계에 대한 인식이 여러가지로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조선학교에서의 경험을 긍정적으로 회상하는데.
“공동체적인 분위기에서 안정적인 자아 존중감이 생겼다. 지금 사후적으로 해석하자면 그렇다. 어떤 사상이나 이데올로기보다 ‘공동체성’을 배운 것이 컸다. 자라는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녔는데 긍정적, 부정적 양면이 있었다. 바깥 세계는 하나도 몰랐고 우리끼리 똘똘 뭉쳐 지냈다. 나와 다른 재일동포들에 대한 상상력도 전혀 없었다. 재일조선인들은 10대, 20대 때 정체성 문제로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다. (차별과 편견 때문에) 좌절하거나 깊은 상처가 남거나 오히려 일본 사회에 완전히 확 동화되거나 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조선학교에 다니면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덜한 편이었다.”
-조선학교에서 한국에 대한 반감이 생기는 건 아닌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다만 그냥 아무것도 몰랐다. 1980년에 초등학교(조선학교)에 입학했으니 학교에 다닌 시기가 바로 한국에서 민주화 투쟁이 가장 치열하게 벌어지던 시기와 겹친다. 당시 조선학교에서 접한 ‘남쪽’에 대한 정보란 거의 투쟁하는 민중들의 모습 아니면 정권에 짓밟히는 모습이었다. 시민들이 투쟁하는 모습을 비디오로 많이 봤고, 광주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얘기도 많이 들었다. 자라면서 배운 남쪽에 대한 지식이나 이미지를 통해 어떤 관념적인 연대의식은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하지만 이런 부분 외엔 한국에 대해서 (엄지와 검지 사이에 조그만 틈을 만들며) 요만큼도 몰랐다.”
-2003년 한국적을 취득했다.
“사실 국적 문제에 대해서는 2000년대 이후 한국 입국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전까지 흔들림은 별로 없었다(조선적으로 남아있을 생각이었다는 뜻). 조선적으로 생활하면서 약간의 불편함은 있었지만 조선적이 재일동포들의 원형적인 모습이라고 여겼고, 어느 한쪽을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것 자체에 거부감이 있었다. 그런데 (조선적을 유지하는 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한국에의 입국이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촛불집회에 참석했을 때. 조경희 교수 제공.
■기준 없는 검증에서 걸러지는 사람들
<조선적은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이주한 사람과 그 후손 가운데 일본으로 귀화하지 않고 한국 국적도 북한 국적도 선택하지 않은 동포들을 말한다. 일본 정부는 해방 이후 이들의 일본 국적을 박탈하고 외국인으로 등록시키면서 편의상 조선적으로 표시하게 했다. 우리 정부는 이들을 무국적자로 분류하고 외국인보다 엄격한 입국심사를 하고 있다. 일본 법무성 자료에 따르면 2015년 12월 기준 조선적 재일동포는 3만3939명이다.
더불어민주당 강창일 의원은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조선적 재일동포에 대한 여행증명서(임시여권) 발급률이 역대 최저라고 지적했다. 참여정부 때 여러 차례 한국에 입국했다가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 갑자기 한국 정부로부터 입국을 거부당한 정영환 메이지가쿠인(明治學院)대학 준교수는 한국 정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냈지만 2013년 12월 최종 패소했다. 지난해 6월 정 교수는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해 반론을 펼친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의 한국어판 출판 기념 강연회 참석을 위해 다시 입국을 신청했지만 도쿄 총영사관은 이를 거부했다. 지난 3월 강창일 의원은 “한국 정부가 조선적 동포들에게 여행증명서 발급을 제한하는 것은 차별적 조치”라며 무국적 재외동포에 대해 여행증명서 발급·재발급을 제한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의 ‘여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조선적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하나.
“주일 한국 영사관에서는 오랫동안 조선적자들에게 국적전환을 요구하는 관습이 있어왔다. 역사적으로 뿌리 깊은 문제다. 공식적인 모국방문단 사업 등을 제외하고는 한국적으로 전환을 해야 한국입국이 가능했었고 재일동포들도 그렇게 생각해왔다. 조선적 재일동포들에게 남한이라는 것은 오랫동안 ‘가고 싶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땅’이었다. 90년대 이후 남북교류협력법 제10조에 따라 여행증명서가 발급되기 시작했고 실질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입국의 길이 열린 것은 2000년대 이후다. 민주화와 남북화해로 인한 변화가 재일동포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제까지 못 갔던 고향땅을 밟고, 못 만났던 사람들과 만날 수 있게 된 뜻 깊은 변화였다. 2008년경부터 다시 과거의 상황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조선적자들에게 ‘어차피 (여행증명서를) 신청해도 거부된다’는 인식이 퍼져갔다. 한국의 정권교체와 남북관계 변화라는 정치적 상황이 직접적으로 재일동포들의 인권과 모국 방문권을 좌우하는 상황이다.”
-2008년 이후 조선적 재일동포의 입국이 사실상 중단됐나.
“작년 국정감사 때 외교부가 제출한 자료를 보고 좀 놀랐다. 통계를 보면 작년까지도 여행증명서 발급 건수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2016년에도 34.6%가 발급된 것으로 나온다. ‘노무현 정권시기는 거의 100%가까이 발급되었으니 문제다’라고도 할 수 있지만 오히려 나는 34.6%의 내역이 궁금하고 좀 의심스럽다. 주변의 조선적 동포들 중에 이 10년간에 여행증명서를 발급된 사람들을 본 적이 없는데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발급되거나 되지 않거나 하는지…결국은 기준이 없는 것이다. 한국정부는 여행증명서를 내주지 않을 때는 ‘여권법상 재량권이 있다’고 할 뿐 이유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다. 안보를 위협할 여지가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여권을 제한할 수 있고, 우리가 ‘임시 여권’이라고 부르는 여행증명서에 대해서도 이는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논리다. 그러면서도 ‘안보를 위협할 여지가 있는 사람’이라고 보는 명확한 근거가 무엇인지는 얘기하지 않는다. 그냥 ‘거부됐습니다’라고 하면 그만인 거다. 영사들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 발급여부가 결정되는 붙투명한 상황이 거꾸로 재일동포들의 불신을 일으키기도 한다. 누구든 약간의 문제가 있어 보이면 ‘위협이 된다’고 하면 그만이니 사상 검증이나 안보논리가 확실히 재일동포에게 과잉 적용되는 면이 있다. 이런 부분이 다음(현) 정권에서 어떻게 바뀔 것인가에 대한 당사자들의 기대감이 크다고 본다.”
-왜 조선적을 왜 유지할까.
“일본정부가 발표한 자료에서는 3만 3939명이다. 현재 상대적으로 소수의 재일동포들이 조선적을 유지하고 있지만 원래는 모든 재일동포들이 ‘조선적’이었다. 조선적자들은 분단적인 사고를 하기보다는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적극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로 볼 수도 있다. 그 수가 점점 줄어든 이유는 한국이든 일본이든 (조선적자의) 권리를 제한하기 때문이고, 조선적자 스스로도 심리적 압박이 있기 때문이다. 또 한국에서 ‘북송’으로 알려진 바와 같이 60년대 이후 귀국사업으로 9만명 이상의 재일동포들이 북한으로 귀환했다. 재일동포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면 왜 재일동포들이 북한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는지 알 수 있다. 가족과 친족들이 북한으로 귀국한 경우도 많은데 이와 같은 이산가족의 현실 또한 ‘조선적’을 유지하는 하나의 배경이자 이유가 되기도 한다. 다만 조선적의 문제를 그들의 적극적 선택으로 보기 전에 우선은 복잡한 제도적 위치의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일본의 동포사회는 분단체제의 한국과는 상황이 다른가.
“한국과 달리 북한을 방문할 수도 있고, 북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곳에서 살아왔던 거고. 환경 자체가 그런 것이다.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니 항상 흑백론리로 빠져들게 된다. 여전히 과거의 전향논리를 들고 재일동포들을 대하고. ‘들어오고 싶으면 국적 전환하라’는 입장을 요구받는 것은 당사자들에게 굉장히 힘든 경험이다.”
-조선적은 조선총련 계열이라고 전제해 입국을 막는 걸까.
“실제로 ‘조총련 동포’란 과연 누구인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저도 조선학교를 다녔으니까 원래 소위 ‘조총련 동포’였던 것인데, 그렇다고 과거를 부정하고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조선학교를 다닌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한국에서 뭔가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정체성을 A에서 B로 치환이 가능한 것으로 접근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이 논리는 재일동포들 전체를 잠재적인 ‘불순분자’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분단국가의 비극이긴 하지만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다.”
-‘그냥 귀화하면 되지 않냐’는 말을 많이 들을 것 같다.
“일본적으로 귀화하는 것이든 조선적에서 한국적으로 바꾼다는 것이든 그리 자유로운 선택은 아니다. 일본 같은 나라에서 귀화하면 편해진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저는 어쨌든 일본에서 한국으로 이주하려고 해서 국적을 바꿨지만 이 선택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 과정이 모욕적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합리화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스스로 변절자라고 여기게 되나.
“아무래도 한국정부의 국적전환 논리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에 한동안은 고민을 많이 했다. 개개인의 선택이 결과적으로 제도를 강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영사관에서 여행증명서를 받거나 국적을 신청할 때 직원들의 대응방식이나 태도에도 참 문제가 많았다. 2000년대 초반부터 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꾸준히 있어왔다. 저도 2002년 활동가들과 함께 국가인권위에 진정을 낸 적이 있었지만 바로 기각됐다.”
-과정이 어땠나.
“영사관에서 처음으로 여행증명서 신청을 하면 일단은 왜 국적을 안 바꾸는지 따진다. 그래도 첫 번째는 인도적 차원에서 고향방문 시켜주겠다고 한다. 그런데 두 번째, 세 번째 신청 때는 거의 국적변경을 강요, 협박하는 수준으로 말을 한다. 가족관계도 자세하게 쓰고 서약서, 이유서 등을 쓰게 한다. 한 번은 이유 란에 ‘바꿀 생각이 없어서’라고 썼더니 창구 직원이 안 받아준다 했다. ‘당신은 지금 우리가 무슨 통일된 나라인 줄 아느냐,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데 그걸 모르고 조선적으로 계속 있으려고 하느냐, 그런 사람은 절대로 한국에 보내줄 수가 없다’고 한다. 이런 소소한 과정까지도 개개인에게는 굉장히 충격이 크다. 한국어를 잘 못하거나 한국의 사정을 잘 모르는 재일동포의 경우는 그냥 영사관 창구에서 거부되면 그만이다. 수소문 끝에 오사카 영사관에 가서 겨우겨우 여행증명서를 받았다. 이런 사례는 무수히 있고, 이제까지 많은 당사자들이 직접, 간접적으로 문제제기를 해왔다. 이제 바뀔 때가 되었다.
- 바뀔 수가 있다고 보나.
“탄핵 촛불시위를 보면서 굉장히 힘을 많이 얻었다. 제 주변 재일동포 중에서는 한 번도 빠짐없이 촛불집회에 매번 참가한 사람도 있다. 한국 시민사회는 계속해서 더 성숙해지고 있지만 남북관계나 재외동포 문제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 보인다. 광장에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촛불 시민들 중에도 ‘빨갱이는 반대하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남북관계는 일단은 상호존중이 필요한데, 새 정부가 남북문제를 평화적으로 풀어갈 거라 기대한다. 재외동포들의 문제 또한 남북의 평화적 관계를 기반으로 해야 역사와 인권의 관점에서 풀어갈 수 있기에.”
-일본은 재일조선인 출입국관리를 어떻게 하나.
“일단 조선총련이라는 조직 자체에 대한 제재를 많이 한다. 기본적으로 조선적자들을 다 총련의 일원으로 보는 관점이다. 현실적으로 꼭 그렇지는 않은데 총련계 집단을 친북적 인사로 본다. 일본 정부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대북 조치같은 것에 나올 때마다 일본의 독자적인 대북제재방침을 발표한다. 이 방침에는 예를 들어 ‘총련계 인사들의 재입국을 금지한다’같은 내용도 포함이 된다. 북한으로 갔던 총련 간부들에 대해 재입국을 금지한다거나 하는 조치를 단계적으로 취해 왔다.”
-일본에 있는 가족들도 이번 대선에 투표를 했나.
“재외국민들도 국정참정권이 생겨 2013년부터 투표가 가능해졌는데 일본의 가족들은 투표를 해 본 적이 없다. 부모님 세대같은 경우에는 아예 평생 투표를 해 본 적이 없어서 투표에 대한 상상 자체가 어려울 것이다. 무권리상태가 지속되면 이에 길들여진다. 주권의식이 있어야 권리도 행사한다. 어떻게 보면, 새로 한국적을 취득한 재일동포들에게 국가로서의 한국이란 국적 전환을 요구해왔던 영사관이다. 이제까지 신뢰관계를 맺지 못했는데 갑자기 권리가 생겼으니 이를 행사하라고 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 나라마다 뿌리 깊은 국익 중심주의
-한·일 과거사 청산에 반일감정은 동력이 될까.
“위안부 문제의 경우 국민적인 관심이 지속적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1990년대 초반 시작된 운동이 지금까지 이어져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피해자들의 증언과 지원단체의 힘이 크다. 역사의 증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자세가 늘 필요한데 사람들의 관심이 너무 동아시아 외교관계에만 쏠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일본에 대한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반감보다는 좀 더 심층적으로 일본을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들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 이해가 우선이라 생각한다. 1965년 박정희 정권 시기에 맺은 한·일기본조약은 (한국에) 불리한 조약이었고 두 나라 간에는 뿌리깊은 힘의 비대칭이 있었다. 그래도 냉전체제 하에서 대통령이 일본과 손을 잡았다고 한다면 우선은 과거 한국정부에 대한 역사청산 차원에서 이에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여정부 시기에 여러 과거사위원회가 조직되었는데 이런 기구들을 정권에 따라 좌우되지 않도록 정립할 필요가 있겠다. 현재는 역사문제가 국익중심으로 가다보니 신자유주의적 경쟁 논리가 확대 적용되는 것 같다. ‘밀리지 않겠다’ ‘당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상대를 눌러야 한다’는 논리가 일반 국민들에게까지도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다. 역사가 이에 활용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2002년 시민단체 지구촌동포연대를 통해 처음 서울을 방문했을 때 찍은 기념사진. 오른쪽 두 번째가 조경희 교수다. 조경희 교수 제공.
-국경을 초월한 시민 간 평화의 연대가 가능할까.
“2000년대 초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동아시아 규모의 국가폭력에 대한 진상규명이나 평화활동이 활발했다. 저도 그렇고 현재 한국에 사는 재일동포 후배들 또한 그런 동아시아 연대활동에 참여를 통해 한국사회와 인연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한일 간 역사 문제뿐만 아니라 중국 조선족, 사할린 한인 등 동포들 간의 네트워크도 있다. 물론 지금까지도 꾸준히 이어오고 있지만, 아무래도 보수정권하에서 이런 활동들이 대중적으로 확대될 만큼 동력을 갖기 어려워졌다. 한국은 세대 간 격차가 크지만 향후 특히 세대 간 소통이 절실히 필요해 보인다.”
-재일조선인이면서 여성이라는 점이 중요한 정체성인 것 같다.
“일본에서 혐오의 주요 타깃은 일관되게 재일조선인이었고 이제 ‘혐한’으로 한국인으로까지 확장되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최근 몇 년 동안 혐오의 이슈가 주로 남녀 갈등에서 분출되고 있다. 물론 현대사를 관통해서 빨갱이, 친북, 종북이라는 것도 뿌리 깊은 혐오와 증오의 대상이지만, ‘여혐’이라는 말에서 새로운 공포의 기운을 느낀다. 그 동안 나름대로 페미니즘을 공부해왔고 이는 내 삶에서 늘 중요한 주제였지만 지금만큼 실감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남편과 잘 지내지만 요즘 이슈가 되는 ‘여혐’ 문제에 대해 얘기를 하다 보면 꼭 부딪힌다. 서로 ‘말이 안 통한다’는 감각을 강하게 갖는다.”
-재일동포 문제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야 할까.
“한국 근현대사를 쭉 살펴보면 재일동포와 결국 마주칠 수밖에 없다. 일본의 식민지배라는 공통경험에서 서로 조금만 다른 길로 갔을 뿐이다. 부모님이 아니더라도 할머니, 할아버지의 친척일 수도 있고 충분히 자신들의 역사 이야기가 될 수 있을텐데 지금까지는 그게 잘 안 되어있는 것 같다. 재일동포를 그저 ‘일본의 차별받는 사람들’로 타자화하거나 거꾸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중심주의로 회수하거나. 물론 저 같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일이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재외동포들의 시각에서 한반도의 역사나 사회를 열어가는 것이 과제이기도 하다.”
- 여전히 ‘민족의 통일’이 중요한가.
“이 분단 상태에서 조금 더 자유로워지는 세상을 바라고 있고 그게 민족인 것 같다. 그러나 ‘민족’만을 바라보고 살 수 있는 것은 이미 이 사회에서는 특권이지 않나. 한국의 민족주의 담론이 아무래도 남성주의적으로 구성되어 왔고 20년 전에는 ‘민족주의냐 탈민족주의냐’ 라는 문제설정이 효력을 가졌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이는 너무 관념적인 질문이다. 그냥 대한민국의 청년들에게 이런 문제가 덜 중요해진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나 통일문제는 진행형이고 향후 더 중요해질 것이 확실하다. 양자택일이 아니라, 민족과 여성, 분단과 이주 등의 주제를 적극 횡단해서 담론을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최미랑 기자 rang@kyunghyang.com>
원문보기: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705231509001&code=940202#csidx00d295aa4498c70a8b907107ecd9cc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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