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원을 2002년에 나온 그는 약 5년을 이곳저곳 다니며 방랑했다. 실컷 즐기며 살고 싶었지만 마음의 안식처를 찾지 못했다.
그러다 남한 언어와 문화를 배우려고 들어간 가톨릭대학교에서 목표를 세웠다. 졸업 후 서강대에서 석사 과정도 마쳤다. 2006년 이후 10년간 쉬지 않고 학업에 매진한 그는 지금 밝은 내일을 내다본다.
조금 일찍 죽느냐 늦게 죽느냐 그 차이일뿐,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란 존재하지 않았다.” 김혁(35) 씨가 자서전 (늘품플러스 출판사)에서 밝힌 내용이다.
1982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난 그가 네 살 되던 해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10년 후에는 아버지까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남파 특수요원으로 김일성의 신임을 얻었지만 굶주림 끝에 거리에서 외로이 삶을 마쳤다.
일곱 살 무렵 함께 사는 어머니가 계모라는 사실을 알면서 집을 나와 꽃제비로 방랑을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 기차역과 시장을 돌며 주워 먹고 훔쳐 먹기를 반복하다 1995년에 고아원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학교를 졸업하면서 중국을 알게 되었고, 북한 사람과 중국의 친척을 연결해주는 일을 하면서 중국을 드나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북한 국경경비대에 잡히면서 구류장에 수용되었다. 당시 16세였다. 미성년자는 법적 처벌을 받지 않았지만 몇 개월 후 17세가 되자 2년형을 선고받고 전거리 교화소에 수감되었다.
수감자 24명 중 최연소였다. 교화소에서는 기차역에 나가 짐을 싣고 부리는 일을 했다. 당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배고픔이 아니었다.
영양실조로 무거운 짐을 들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일을 못하면 감시관들의 폭행이 이어진다. 또 저녁 교양수업 시간에는 일을 제대로 못한 것이 문제가 되어 비판을 받는다.
이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반 전체가 잠을 못 자는 처벌을 받게 된다. 그러니 사람들은 그를 집단으로 폭행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사람들은 ‘김군이 부모님이 그리워서 우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들 힘이 없어 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8개월 만인 2000년 7월에 대사령(광복절 특사)에 해당되어 풀려났다. 수감자 24명 중 단 두 명이 살아남았다.
그가 굶어 죽지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체격이 작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체격이 큰 사람들은 많은 음식물을 섭취해야 하지만 그는 적은 양으로도 버틸 수 있었다.
교화소를 나오면서 부모도 형제도 없는 북에서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바로 중국으로 넘어갔고 교회의 도움을 받으며 숨어 살다가 믿을 만한 사람들을 알게 되어 무사히 이 땅에 올 수 있었다. 물론 목숨을 건 여정이었다.
잔소리 없는 자유로운 삶이 전부
하나원을 나와 처음 시작한 것은 즐기며 노는 것 이었다. 그전에는 즐겁게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싼 오토바이를 사서 3개월 동안 다니면서 노느라 1000만 원을 써버렸다.
돈이 바닥을 드러내자 아이스크림 회사에 취직했다. 8개월 일하니 1000만 원이 모였다.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런데 딱히 할 일도 없었다.
타던 오토바이를 처분하고 새것을 사서 전국을 돌아다녔다. 고가의 카메라도 구입해 대한민국의 모습을 담았다.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였기에 즐기는 것이 우선이었다.
부모도 형제도 없었기에 누구도 그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오직 즐기면서 사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 돈이 떨어지면서 우연히 보게 된 벼룩시장 소식지에서 3개월 동안 배를 타면 700만~800만 원을 준다는 광고를 보았다. 꽃게철에 배를 탔다.
북한에서는 배 타는 일이 고급 직종에 속하기에 힘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바다에서 고기를 잡으면서 보내는 것도 즐거웠다.
매일 새벽 바다에 나가서 저녁 늦게 돌아와야 했다. 크게 힘이 들지는 않았지만 잘못하다 그물에 걸리면 바다에 빠져 죽을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
남한에서는 극한 직업으로 분류되기에 젊은 사람들이 도전하지 않았다. 그는 월급을 많이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열심히 일했다.
그러다 함께 간 지인이 중도에 포기하는 바람에 마음이 흔들렸다. 3개월을 채워야 목돈을 만질 수 있었지만 지인의 빈자리가 더 견디기 힘들어 배 타는 일을 포기했다.
그러곤 담당 형사의 조언으로 충남직업전문학교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자동차 정비기술 자격증을 취득했다. 자동차 정비로 돈을 많이 벌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정비소를 방문하는 손님들을 대하려니 언어 소통에 어려움을 느꼈다. 모든 취미 생활을 정리하고, 대학교를 다니면서 남한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리라 결심했다. 그렇게 선택한 것이 부천의 가톨릭대였다.
남한 문화를 배워가며 공부 시작
가톨릭대학교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1학년 때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해 학점이 낮아 국문학과를 지원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전공을 역사학으로 바꾸면서 학업에 매진했다. 그동안 공백기가 길었기에 학업에 어려움이 많았다.
북한에서 고아원에 있으면서 학교를 졸업하고 먹고살기에 바빴기에 10년이 넘도록 공부와 담을 쌓았다. 자신의 이름밖에 쓸 수 없는 그는 특히 리포트 작성이 어려웠다.
“공부하면서 어려운 점이 많았다. 처음에는 어렵지만 조금 알고 나면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을 그땐 몰랐던 것이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처음에는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많이 했다.” 그러나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주위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학업의 끈을 놓지 않고 이어나갈 수 있었다.
고아로 살아왔기에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그에게 힘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쉬지 않고 공부해 한 번의 유급도 없이 대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물론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다.
남한 학생들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학교를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로 등록금을 마련하는 친구도 있었다. 심지어 은행 대출로 등록금을 내는 것을 보며 탈북자인 것에 고마움을 느끼기도 했다.
탈북 대학생들은 등록금을 면제받았다. 그러나 기숙사비와 교제비 등은 직접 마련해야 했다. 새벽에 6시 30분부터 9시까지 학교 식당에서 청소를 하면서 돈을 벌었다.
식사는 하루 세끼 식당에서 할 수 있어 돈이 들지 않았다. 여기서 받는 월급은 교재비와 용돈으로 썼고, 매 학기 내야하는 기숙사비는 방학마다 음식점에서 배달 일을해 받은 돈으로 해결했다.
학교를 졸업하면서 바로 서강대 북한 통일정책학 석사 과정을 시작했다. 과정을 마치고 쓴 석사 논문으로 를 출간했다.
논문은 꽃제비 출신인 자신의 과거를 바탕으로 같은 꽃제비 출신의 탈북민을 인터뷰해 북한의 꽃제비 출현 배경과 유형, 그리고 지역 및 연령별 특성과 북한 당국의 꽃제비 통제와 단속 실태 등에 대해서 썼다.
또 교화소에 수감된 8개월의 생활과 남한 정착과 학업에 대한 내용도 담았다. 지금까지 탈북 경험을 수기 형태로 쓴 책은 많았지만 그가 쓴 학위 논문같이 회고록과 함께 구성한 책은 없다.
석사 과정을 마치고 2년 동안은 통일부 산하 통일교육센터에서 강사로 일했다. 충남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강사로 일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공부를 더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알아본 결과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맞춤했다. 다른 곳에 비해 학비도 저렴했다. 현재 그는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앞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북한 연구를 더 체계적으로 하고 싶은 꿈이 있다. 기회가 된다면 교수 생활을 하려고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과정 김혁 씨|작성자 남북하나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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