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7-21
[취재후] 2013 북한읽기 ① “요즘은 다들 광산 뜯어먹고 삽니다” > 취재후 > 정치 > 뉴스 | KBS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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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후] 2013 북한읽기 ① “요즘은 다들 광산 뜯어먹고 삽니다”
입력 2013.11.19 (17:52) | 수정 2013.12.02 (15:04)단신뉴스| VIEW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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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만의 취재현장 복귀
취재현장으로 복귀한 것은 사실 뜻밖이었다. 7월 1일자로 출범한 보도국 북한부에 배속된 이후 ‘북중 국경을 답사해서 <남북의 창> 프로그램(11~12분짜리)을 만들어 보라, 가는 김에 <9시뉴스> 거리도 발굴해 보라’는 취재지시가 떨어졌다. 따져보니 2006년 4월 베이징특파원을 마치고 귀국한 지 7년여만의 일이었다. 오랜만에 취재현장에 나서려니 다소 낯설고 불편하였다. 수년간 ‘책상 생활’을 하는 동안 지시하는 일에 너무 익숙해졌던 탓일 게다. 후배들의 취재과정을 살펴보고 기사를 교정하는 쪽으로 머리를 쓰다 보니 스스로 기사거리를 발굴하고 취재원을 섭외하는 역량은 많이 퇴화한 것 같았다. 출장문서를 기안하고 외화를 바꾸고 정산을 하는 등의 사소한 일마저도 답답하게 여겨졌다. 특파원 시절 국경지역을 수차례 취재한 경험이 있어 나름 익숙하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가장 먼저 예전의 인연들과 다시 연락하며 ‘선(線)’을 구축하고자 애를 썼다. 국경지대 취재는 사실 북한 취재이다. 국경의 풍물을 담는 수준이 아니라 북한의 내면을 파악해야 하는 만큼 통상적인 취재와는 조금 다르다. 일상적인 취재원만으로는 깊이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없다. 더욱이 작전과 음모가 넘쳐나는 위험지역...나를 숨긴 채 숨어있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곳이 국경이다. 선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굳이 국경까지 갈 이유도 없다. 그냥 관광만 하고 오는 셈이니까. 특파원 시절 몇 차례 시행착오 끝에 얻은 교훈이었다. 선이 어느 정도 구축됐다고 보고 출발한 8월의 첫 출장...성과와 평가는 나쁘지 않았지만 나로서는 조금 불만이었다. 기대했던 3개의 선 가운데 2개가 불발됐기 때문이다.
9월 말~10월 초에 이뤄진 2번째 출장은 더 충실한 준비 끝에 이뤄졌다. 8월 보다 많은, 두 자릿수 ‘취재원’을 만나 심층문답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갑자기 운세가 상승한 덕분이 아니고 사전준비가 더 탄탄했기 때문이다.
만남
국경지대에서 ‘취재원’을 직접 대면하려면 사전 준비와 여러 사람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많은 곡절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자세히 밝힐 수 없다. 남북 주민 간의 접촉은 설령 ‘우연’일지라도 환영받지 못하는 현실 때문이다.
▲ <단둥과 신의주>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신의주와 맞닿아 있는 단둥은 북한인이 가장 많이 나와 있고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지역이다. 북중 국경취재의 중심지는 당연히 단둥이다.
만남은 식당과 찻집, 공원, 골목길, 호텔방, 사무실, 작업장, 취재원의 거주지 등 다양한 장소에서 이뤄졌다. 식당이나 찻집, 호텔방이나 지인의 사무실 등은 나에게 편안한 장소인 반면 취재원들에게는 그리 탐탁찮은 곳들이다. 반대로 취재원의 거주지나 작업장 근처는 내게 불편한 장소였다.
여러 사람이 가면 상대가 꺼리므로 홀로 접촉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낯선 골목길을 지나 약속장소로 향할 때마다 나는 일이 잘못될 가능성을 떠올리며 목을 움츠리곤 하였다. 약속에 문제가 생길 개연성은 상존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국경지대는 북한 보위부의 활동무대가 아닌가?(북한과 중국의 공안기관은 국경선 백리=40킬로미터 안에서는 상대방 지역을 수시로 넘어다니며 자국의 범죄인을 체포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필요한 ‘작업’을 마치고 상대측에 통보만 해주면 된다는 얘기인데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조금 우습지만, 촬영기자와 운전기사에게 나의 위치를 알려주며 만약의 위험에 대비하였다. 사실 만남을 두려워하기는 나보다 ‘상대방’이 더 하였다. 남조선 사람과 접촉한 사실이 알려지는 날에는 거의 죽은 목숨이다. 그런 만큼 만남은 늘 애를 태우다가 가까스로 이뤄졌다. 약속이 깨어지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불안한 표정으로 쭈뼛쭈뼛 나타난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전하는 내용은 풍성하였다. 북한 공무원의 부정부패, 빈부격차 심화, 마약과 폭력배 확산, 휴대전화 급증, 부동산 거래 일상화 등 장막 건너편의 경제사회 실상을 손에 잡힐 듯이 파악할 수 있었다. 뉴스 아이템들이 쏟아지는 셈이었다. ‘북한은 정권안보에는 탁월한 반면 나머지 부문에는 행정력이 크게 부족한 나라’라는 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한번 말문이 트이면서 평소의 불만과 고민, 가슴 속의 한(恨)도 줄줄이 쏟아내기 시작하였다. 특히 북한 공무원의 부정부패상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제법 신랄하였다.
“우린 그럽니다. 안전원보고 안전하게 해먹고 보위부는 보이지 않게 받아 먹는다. 일본 놈들보다 더하다”
“노골적으로 말하지요 뭐, 저 XX들 다 때려죽이면 좋겠다.”
“안전부 달라붙어, 검찰소 달라붙어, 당기관 달라붙어, 보위부 달라붙어 돈 빼앗아 가려고 와서 생트집 걸죠...(석)탄이 돈이니까 (석)탄 댓톤 달라, 그래서 돈 좀 때우고...안주게 되면 못견디니까.”
예상을 넘는 수위 높은 발언들도 많았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권력을 견제하고 고발’하는 한국언론의 역할을 한반도 북쪽에까지 확대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해보았다. 힘이 없어 차별당하고 물적.정신적 피해를 당하고도 어쩔 수없이 감수하는 동포들의 어려운 처지를 북한매체 대신 고발하고 시정을 촉구하는 것 역시 분단시대 한국언론의 책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물론 북한주민이 살기 힘들다는 보도는 수없이 이뤄졌지만 구체적인 개인의 사연이 아니라 일반론으로 다뤄졌을 뿐이다. 이제는 개개인의 사례와 목소리를 담아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북한주민들을 취재하면서 겪었던 몇 가지 사례들을 취재후기로 남기려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하겠다.
직장이라는 굴레
방송에서는 제대로 담지 못했던 사실 가운데 하나가 북한의 직장 이야기이다. 직장이 (삶의 터전이 아니라) 감옥소나 다름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무거웠다.
“수틀리면 사표 쓴다”...흔히 내지르는 말일 뿐 실행에 옮기기란 쉽지 않지만 막상 직장을 그만둔다고 해서 처벌받을 일은 없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그러하다. 하지만 직업선택의 자유가 없는 북한에서는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당의 계획에 따라 배치된 직장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북한주민들의 일상이요 운명이다. 문제는 당이 배치한 직장설계가 현실과 크게 어긋난다는데 있다. 당의 설계가 변동이 심한 실제 사회의 직업 수급을 따라가지 못하는 탓이다. 지금 북한 전역은 정해진 직장에서 벗어나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머리 좀 돌아가는 사람은 다들 광산 뜯어먹고 삽니다.”
요즘 북한사람들 뭘 먹고 사느냐는 질문에 전직 운전수 ‘김 선생’은 단번에 이렇게 대답하였다. 운전 일을 하며 돈을 모아 중국으로 건너올 수 있었고(국경을 넘기 위해서는 외사과 등에 천달러 이상의 뇌물을 바쳐야 한다.) 지금은 중국의 건설현장에서 하루 12시간 가까이 일하며 부지런히 돈을 버는 중이다. 김 선생의 이력을 들어보니 요즘 북한사람들의 생활상이 그려졌다. 그는 원래 평안도 어느 기업소의 직원이었다. 자재가 들어오지 않으니 공장을 돌릴 길이 없어졌다. 공장이 멈춰서고 배급(+월급)이 나오지 않은지 몇 달이 지나도 직원들은 출근을 해야 한다. 직업선택의 자유가 없는 북한에서는 다른 결정 이 나오기 전에는 무조건 정해진 직장으로 나가야 한다. 직장에 나오지 않는 사람은 ‘자유주의자’로 찍혀 산골로 추방되거나 상당한 제재를 받게 된다. 온종일 잡담을 하고 담배만 피우다가 퇴근하더라도 출근부에 도장은 찍어야 된다. 일은 하지 않더라도 이런저런 동원행사에 참여하는 것 역시 직장인의 중요한 의무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돌아가는 공장이 별로 없는 북한에서 진짜로 먹고사는 길은 퇴근 후에 있다. 밤늦게까지 장사를 하거나 노동일을 함으로써 돈을 버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침부터 직장에 가지 않고 ‘진짜 돈벌이’에 나설 수 있는 것은 상당한 혜택이다. 여기서 생겨난 것이 ‘더벌이’이다. 돈을 더 번다고 해서 더벌이라고 한다. 직장에 한 달에 얼마씩 돈을 바치는 대신(적게는 북한돈 3만원에서 많게는 20만원 정도를 바친다고 한다. 월급이 4~5천원 정도이니 사실은 비싼 편이다.)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권한’을 얻어 더 많은 돈을 버는 방식이다. 물론 불법이다.
더벌이 종류는 다양하다. 광산에 가서 일을 할 수도 있고 옷이나 수산물 장사를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괜히 장사를 하러 나섰다가 직장에 바칠 돈을 마련하지 못하는 것은 고사하고 큰 손해를 입기도 한단다. 가장 안전하고 선망받는 더벌이는 직장의 차량을 빌려 영업용으로 운행하는 경우이다.
김 선생은 ‘운전 더벌이’로 돈을 모았다. 운전을 할 줄 알았던 그에게 기업소 지배인이 제의했다. 놀고 있던 차량을 몰고나가서 장사를 하고 공장에 얼마만큼 바치라는 제안이었다. 김 선생은 더벌이 제안을 냉큼 받아들였다. 물류난이 심각한 북한에서 차량 수요는 넘쳐난다고 한다. 광산에서 나온 정광과 광산에 보낼 물자들을 실어날라야 할 뿐만 아니라, 지역을 옮겨다니는 장사꾼들이 많은 만큼 운전 더벌이는 제법 쏠쏠했다고 한다.어려운 점도 많다. 기름이 부족한데다 차량 부속품도 구하기 힘들고 비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도 ‘숙제’에 비할 수는 없다고 한다. 오가는 길목마다 군과 경찰의 초소가 널려 있는데 그들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온갖 트집을 잡고 차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다. 운전수들이 군과 경찰에 금품을 바치는 일을 ‘숙제’라고 부른다. 숙제비용은 전체 수입의 절반이 넘는다고 한다.
▲ <트럭을 타고 가는 북한주민들> 화물칸에 주민들을 태운 낡은 트럭이 위험하게 달리고 있다. 물류난이 심각한 북한에서 차량 운전수는 높은 수입을 올리지만 군과 경찰에 금품을 바쳐야 하는 등 어려움도 많다고 한다.
더벌이가 유행하는 현실에서 기업소나 협동농장과 같은 ‘직장’은 삶의 터전이 아니라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일 뿐이다. 월급을 주지도 않으면서 괜히 사람을 붙잡아두는 감방과 다름없다. 예컨대 광산에서 일하는 경우와 협동농장에서 일하는 사람을 비교해 보자. 협동농장에서 1년간 부지런히 일한 세대의 분배량은 최고 많아야 북한돈 30만원, 적으면 5만원 안팎이다. 시장에서 쌀 10~50kg을 살 수 있을 뿐이다.(쌀 1kg 가격은 6000원 정도) 농사를 지으니 자기네 먹을 식량은 몰래 빼돌린다고 간주하더라도, 한 가구의 1년 가처분소득이 쌀 한가마(80kg)에 못 미친다면 너무 적다.
그런데 금광에 가서 ‘망질’(광석을 갈아서 선별하는 맷돌 돌리기)을 하거나 광석운반 작업을 하면 하루에 광석 한 됫박은 얻는다고 한다. 한 됫박의 가치는 쌀 7~8kg을 살 수 있는 정도이다. 그렇다면 1년 농사와 며칠 간의 광산일의 수입이 비슷한 셈이다.(난 이 대목을 들으면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몇 번이고 맞는 말이냐고 물었는데 사실이라고 하였다.) 그런 만큼 협동농장을 떠나 광산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엄청난 혜택이자 이권이 된다.
누구나 농장을 떠나 광산으로 가서 일하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아무나 갈 수는 없다. 농장에 그만한 대가를 바쳐야 가능하다. 즉 광산에서 한 됫박을 받고 일하는 사람은 농장이든 기업소든 자신의 ‘원 소속 직장’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원래 직장은 평생의 멍에가 되는 것이다.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굴레...노예계약이란 게 이런 것이 아닐까? 흔히 들었던 ‘직업선택의 자유’란 구절이 얼마나 무게있는 말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열 받으면 직장을 때려칠 수 있는 자유는 정말 의미있는 권리이다.
여기서 북한의 기업소와 협동농장 등이 어떻게 운영되는지도 드러난다. 정해진 기준대로, 원칙대로 움직여서는 도저히 성과를 낼 수 없다. 그래서 상당수 구성원들로 하여금 장사를 하거나 광산 일에 종사하게 하고(즉 더벌이를 허용하고) 그들의 수입 가운데 일부를 받아챙기는 방식으로 수익을 올린다는 말이다.
그런데 더 무서운 변화가 생겼다. 말하자면 '배째라’가 출현한 것이다. 빼째라 단계는 직장 이탈에 따른 처벌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굶어죽으나 맞아죽으나 마찬가지란 심정으로 원래 직장의 동의나 묵인도 없이 살길을 찾아 떠나버리는 것이다. 기존 통제시스템에 대한 소극적인 저항이면서도 심대한 도전이 될 수 있는 변화이다.
그런데도 원래 직장들,즉 기업소와 농장 등의 서류에는 모든 구성원들이 열심히 출근하는 것으로 돼 있다. 북한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대강 알 것 같다. 북한은 서류와 실제, 말과 행동이 터무니없이 다른 나라이다. 모두가 알면서도 그냥 그렇게 굴러간다.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버텼지만 언제까지 이런 허위가 통할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북한은 빠르게 '예전과 다른 나라'로 바뀌어가고 있다.(계속)
장한식 기자
hansik@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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