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5-03

병역 거부 운동 10년과 평화의 기독교

복음으로 역사와 사회를 조명하는 복음과상황
병역 거부 운동 10년과 평화의 기독교
[254호] 2011년 11월 29일 (화) 15:42:41이종연  lmpid@goscon.co.kr
2011년에도 대한민국은 인권 후진국
사랑하는 아들에게
서너 명의 판결이 끝나고, 네가 재판정에 들어왔다. 쿵쾅이는 가슴을 양손으로 누르고 힘주어 붙잡고 있었다. 지금 기억나지 않는 어떤 말들이 잠시 오갔고, 네가 ‘최후진술입니까?’ 물으니 판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 네가 울컥 말 잇지 못했을 때, 그저 그 자리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버지는 ‘아버지’ 하기 싫었다. … ‘여기에 와 주신 아버지’ 그 말에,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는데, 내가 듣는 내 울음소리는 참혹했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 임재성 씨의 아버지가 감옥에 있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이다. 기사를 준비하며 많이 참고한 임재성 씨의 책,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그린비)에서 이 편지를 읽는데 눈물이 무겁게 툭, 하고 떨어졌다. 이념이나 운동으로 무장한 저네들만의 그라운드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가슴에 날선 금을 내는 감옥행을 바라보는 모든 평범한 이들의 아버지의 울음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오늘, 양심적 병역 거부를 이유로 감옥에 있는 이들이 800여 명, 한국전쟁 이후로 형사 처분을 받은 이들은 1만 6천 명이 넘었다. 그들의 가족과 친지, 친구들까지 더한다면, 두세 배 아니 열 배는 족히 넘을 이들이 아마 이 문제로 벙어리 냉가슴 앓는 참혹함을 견뎌야 했을 것이다. 내 아들이, 내 친구가 감옥에 갔다고 입 밖으로 꺼내놓고 슬퍼할 도리조차 없었을 테니 말이다.
특별히 2011년은 2001년, 그러니까 그간 여호와의 증인들만 하는 것으로 알았던 병역 거부를, 불교신자 오태양 씨가 함으로써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지 10년이 되는 해이다. 병역 거부를 특정 이단의 ‘이상한 교리’쯤으로 치부하던 우리 사회에서 오 씨의 병역 거부는, 양심적 병역 거부를 보편적 인권 문제로 접근하게 하는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아직, 우리 사회는 그 다음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EU 회원국을 포함한 G20 회원국 32개국 중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구금 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유일”한 국가로 남아 있다. 또한 세계적 반전운동단체인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WRI: War Resisters’ International, www.wri-irg.org)은 지난 10월, ‘이 달의 전쟁 수혜자’(무기 산업 등 전쟁을 통해 이득을 보는 이들을 지칭한다)를 한국의 제1 기업 ‘삼성’으로 선정했다. 이 뉴스는 또한, 스웨덴의 외교정책연구소인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 : Stockholm International Peace Research Institute)가 펴낸 2011 연감에서, 2009년 세계 100대 무기 생산 기업 중 삼성이 58위를 차지했다고 친절히 알려 주고 있다. 삼성이 전 세계에 수출하는 군수물자의 45%를 삼성의 방위산업체인 삼성테크윈이 생산하고 있고, 제주 해군기지 건설업체 중 한 곳이 삼성이라고도 알려 준다. 자랑스러운 한국의 대기업, 삼성이 이들에게는 전쟁 수혜자로 비춰진다는 점이 한탄스럽다.
개인적 희생에서 평화의 운동으로  
한국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의 역사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역사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들은 1953년 신자 박종일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만 3000명 이상이 병역 거부로 범법자가 되어 국가에 의해 처벌받아 왔다. 재림교회로 약칭되는 제7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또한 1956년 세 명의 신자가 병역 거부를 한 것을 시작으로 20년간 ‘집총 거부’라는 교리를 지키며 처벌을 받았다. 박정희 군사 정권이 입영률 100% 달성을 위해 병역 거부자에 대한 처벌 강화, 즉 반복 처벌과 가중 처벌로 탄압의 강도를 높이자 재림교회는 1976년 집총 거부에 대한 교리를 수정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재림교회 개혁파에서 양심적 집총 거부 행렬이 조금씩 줄을 잇고 있는 상황이다.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장로교 신자인 문기병, 함석헌의 영향을 받은 홍명순이 1950년대 말 집총 거부를 해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병역거부운동이 사회운동으로 등장한 것은 2000년이다. 퀘이커의 사회단체인 미국친우봉사위원회(AFSC: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의 활동가 카린 리가 한국 평화활동가들에게 징병제에 대한 활동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한 제안을 한국의 평화활동가들이 받아 시작된 것이다. 평화인권연대에서 활동하던 최정민 활동가가 이 운동의 출발에 서서 병역 거부 현황 파악, 외국 자료 번역 등과 같은 기초적인 작업을 했고, 2001년 2월 <한겨레 21>의 ‘차마 총을 들 수 없어요’라는 기사가 나간 후 언론 보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에 앞서 1999년 김두식 교수가 <복음과상황> 7월호에 기고한 ‘여호와의 증인과 그 인권’이라는 글에서 병역 거부 문제를 다루기도 했다. 또 2002년부터 비공개로 만나 오던 병역 거부자들과 지지자들의 모임 ‘양심을 나누는 사람들’이 2003년 5월 15일 세계병역거부자의 날을 계기로 ‘전쟁없는세상’이라는 단체 결성으로 이어져, 현재까지 병역 거부자들을 돕고, 군사주의를 넘어서는 평화운동을 펼치고 있다.
“병역 거부, 혼자 하지 않았다”
오태양 씨의 병역 거부 이후 비(非) 여호와의 증인의 병역 거부는 10년 새 50명을 넘었다. 기자회견 등을 통해 스스로 병역 거부자임을 밝힌 경우가 그렇다. (여호와의 증인은 연 600명 이상이 병역 거부를 하며, 개인적 신념으로 병역 거부를 하더라도 공개하지 않는 경우가 꽤 있지만 그 숫자는 파악하기 힘들다.)
10년의 역사를 돌아볼 때, 병역 거부를 공개적으로 해 온 이들이 병역 거부를 하는 시점부터 수감 생활 및 출소 이후까지, 주변에서 공동체적 지지와 후원을 받는 경우가 많은 것을 주목하게 된다. 2006년 병역 거부를 한 박정경수 씨도 “나는 절대 혼자 병역 거부를 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병역 거부가 인권, 군사주의 등 뜨거운 이슈들이 중첩되는 주제이기도 하지만, 주위의 도움이 실제적으로 정서적으로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입영 당일, 훈련소로 가지 않고 기자회견을 하는 일, 변호사를 선임하고, 불구속 수사를 촉구하는 탄원서를 준비하는 일, 재판을 준비하고 그 과정을 알리는 일 등을 할 때, 실제적 도움이 필요하다. 또, 병역 거부자를 바라보는 사회의 편견을 이겨내고, 수감 생활을 할 때 생길 수 있는 불이익이나 인권침해를 예방하는 데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끈이 있다는 것은 큰 힘이다. 
지난 9월말 1년 3개월의 수감 생활의 터널을 지나 출소한 김영배 씨는, “대학생학생연대와 사회당에서 활동하면서 단체가 집단적으로 고민하던 병역 거부를 행동에 옮겼고, 많은 이들의 지지와 후원 속에 재판장으로, 감옥으로 갈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의 후배 김윤영 씨는 “평화를 만드는 것은 마음이라기보다 몸이고, 꿈이라기보다 실천이다. 김영배 선배는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로서 그 몸을 철창 속에 가두며, 온몸으로 평화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라고 그를 지지했다. 특히, 영배 씨는 “부모님이 내가 출소해서 사회적 낙인이 찍힐 것을 두려워하셨는데, 수감 생활 내내 면회 일정이 가득 차고, 영치후원금 등 물질적 지원까지 받는 것을 보시서 걱정을 더실 수 있었고, 부모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런 지원이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2009년, 불행히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 대체복무제 도입이 무산돼, 병역 거부를 하는 것이 다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때, 개신교인으로서 네 번째로 병역 거부를 한 하동기 씨. 그는 특히 학교 친구들뿐 아니라 기독교권으로부터도 두루 지지를 얻었다.
“학교 후배들이 만든 후원회를 통해 재판 과정과 수감 기간 동안 많은 도움을 받았고, 전쟁없는세상에서 기자회견 준비뿐 아니라 재판 과정이나 수감 생활에 대한 정보를 많이 주셨다. 기자회견 당시에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등에서 지지 발언을 해 주셨다. 학교에서 활동했던 종교극예술연구회에서 평화를 이야기하는 퍼포먼스를 해 주었고, 기독교평화센터 오상열 목사님의 도움을 받아 몇몇 교회와 단체에 병역 거부를 소개하는 기회도 얻었다.”
하 씨는 병역 거부를 선언하고 수감되기 전까지 혼란스럽고 불안할 때,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고, 특히 후원회의 도움으로 수감 생활을 견딜 수 있었다고 한다. 졸업 후 찾아뵙지 못했던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후원회를 통해 면회를 오기도 했다. 당시 하 씨는 연세대학교 신학과에 재학 중이었는데, 정종훈 교목은 “병역거부의 기독교적 뿌리는 ‘평화주의’임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개신교회가 평화주의를 소홀히 여겨 왔다. 평화주의에 근거하여 병역 거부하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그를 지지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가르침은 어디에…  
김두식 교수는 <평화의 얼굴>에서 기독교의 병역 거부는 로마 시대, 즉 초대 교회의 기독교인들부터 있어 왔다고 말한다. 170년까지는 기독교인이 로마 제국의 군대에 복무했다는 기록이 없고, 295년에 최초로 기독교인이 병역을 거부해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많은 이들이 세례를 받고 군대를 떠났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기초한 평화주의가 초대 교회 교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기독교의 국교화 이후 ‘정의로운 전쟁론’의 등장, ‘거룩한 전쟁’이라는 가면을 쓰고 자행된 십자군 전쟁 등 기독교는 평화주의와는 거리가 먼 행보를 이어 간다.
한국은 어떨까.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는 2001년, 병역 거부가 사회적 의제로 떠오르자 즉각적이고도 조직적으로 발표한 성명에서, 대안으로 제시된 대체복무제를 ‘이단을 위한 특혜입법’이라고 비난했다. 당시 대체복무제를 허용하는 법안을 제출하려던 민주당 천정배, 장영달 의원조차 한기총의 거센 반발에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이단은 인권조차 보장받을 수 없는 집단이라는 화인을 찍어 버린 사랑의 종교, ‘기독교’를 대표하는 이들의 행보가 이러했다.
한기총은 2004년, 명분도 결과도 참혹했던 미국발 이라크 전쟁에 한국군을 파병하는 데 찬성했고, 언제나 안보 논리를 앞세워 당장 내일이라도 전쟁이 일어날 것처럼 교인들을 겁박하고 이 땅에 유일한 소망이 있는 듯, 믿음 없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마 18:12~14)는 말씀에 눈을 감고,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마 25:40)는 말씀에 귀를 닫은 것 같았다.
그러나, 한기총을 부끄러워하는 무수한 한국 교회, 또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는 이십대 초반의 남학생들이 활동하는 캠퍼스 선교단체에서조차 병역 거부 문제를 공론화하지 못한 것이 우리의 한계가 아닌가 한다.
병역 거부에 대한 찬반을 떠나, 우리나라에서 군대, 군대 문화가 내포하는 본의가 무엇인지 고민하도록 한 적이 있을까. 우리 사회가 병역 거부 문제로 갑론을박할 때, 구원의 확신 없이 군대 가는 저학년생(혹은 멤버)을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밑도 끝도 없이 군대에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바라며, 지극히 개인적 신앙의 문제로 떠넘겨버린 이들도 할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일 듯하다. 병역 거부를 직접적으로 다룬 내용을 한 번도 출판한 적 없는 기독교 출판계는?
김두식 교수가 잘 지적했듯, 아마 우리는 우리가 그토록 존경에 마지않는 존 스토트나, 누구나 한번쯤은 가 보고 싶어 하고, 가 보았을 예수원의 설립자 대천덕 신부가 병역 거부자라는 사실을 절반은 모른 척하고 싶어 했던 건 아닐까.
‘겁쟁이들의 연대’를 도울 공동체가 필요하다
전쟁없는세상 여옥 책임활동가는 최근 들어 병역 거부를 고민하거나 실제로 병역 거부를 하는 이들의 양태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요즘은 오히려 군대 못 가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이런 문의가 많이 들어온다. 병역 거부가 더 이상 생소한 개념이 아닌 거다. 논술 시험에도 나오고 다들 들어는 봤을 테니까.”
2009년 11월 병역 거부를 선언하고 지난 6월 출소한 현민 씨도 자신이 거창한 신념에 의해 혹은 평화주의자라서 병역 거부를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도리어 “군대에 간다고 하면 아무도 ‘왜’라고 질문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며, 상황의 비대칭성을 문제 삼는다. 병역 거부를 하기 위해 나의 신념을 증명받아야 하는 것인지 반문하는 것이다. 군대에 가기도 전에, 식은땀을 흘리며 꿈을 꾸던 현민 씨에게 그런 고민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찌질함에 기반하면서도 궁상맞음을 경계하는 병역거부운동을 하고 싶다.” 
2010년 12월 병역 거부 선언 후, 현재 수감 중인 문명진 씨는 이렇게도 말한다. “내가 평화주의적 삶을 지향하는 것은 맞지만, 그보다는 당장 나의 삶이 불안정하고 갈피를 못 잡겠는데 군대든 감옥에서든 내 신체의 자유가 내 의지와 무관하게 일정 기간 동안 구속되는 것이 너무나 두렵고 싫은 것이다.”
병역거부 운동 10년의 역사는, 이렇듯 사람들에게 병역 거부가 거창한 대의를 가진 자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심어 준 듯하다. 10년 동안 우리 사회의 평화감수성이 커진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래서인지 요즘은 누군가 병역 거부를 한다고 할 때, 그들이 군사주의라는 거대 담론에 맞설 준비가 되어 있거나, 삶 전체가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라서 주변에서 그들의 삶 전체를 지지해 줄 만한 그룹을 찾기 힘든 경우도 많다. 
병역 거부를 반대하는 이들은 ‘옳다구나’ 하고 군대에 가지 않는 이유가 뭐냐며 따지고 들 것이다. 그리고 거창한 이유가 아닐 바에야 얕잡아 보고 시시껄렁하다며 무시할 수도 있다. 그런 때에, 도미야마 이치로의 <폭력의 예감>이라는 책은, 문명진 씨에게 ‘겁쟁이들의 연대’가 왜 필요한지를 설명해 준 듯하다. 도미야마 이치로는 ‘모든 사람은 겁쟁이’라고 말한다. 또 약세의 위치에서 폭력을 감지할 때, 그들은 방어 태세를 취하고 이런 상태가 이미 폭력을 암시한다고 한다. 명진 씨는 여기서, “병역을 거부하겠다는 결심 이외에는 모든 게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상태에서 자학과 자기 환멸이라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을 새로운 저항의 상상력의 자원으로 삼고 새로운 언어를 발굴해내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는다. ‘겁쟁이들의 연대’를 도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병역 거부의 내일, 그리고 한국교회
이제 한국교회가 답할 차례다. 이들이 병역거부운동의 새로운 흐름과 또 그 흐름을 언어화하는 작업을 하고, 결국 ‘겁쟁이들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때에, 10년 동안 편견에서 비롯한 차별과 무시로 ‘병역 거부’라는 주제 자체에 벽 세워 온 한국교회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우리 교회 청년 누군가가 ‘군대 가기 싫다’라고 말할 때, 어떤 대답을 들려줄 수 있을까. 
분쟁 지역에서 활동하는 ‘개척자들’의 송강호 간사는 ‘군 복무’를 하는 청년들이 ‘평화 복무’를 하도록 요청한다. 세계 곳곳의 고통당하는 이들을 섬기며 봉사하는 활동을 최소 1년씩 하라는 것이다. 또 교회에서 세례 문답을 하듯, 군대에 갈 때에도 문답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한다. 동북아평화교육훈련원(NARPI: Northeast Asian Regional Peacebuilding Institute) 이재영 소장은, 평화교회라는 정체성을 표방하는 교회라면, 청년들이 ‘군대’를 고민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고민한 결과가 병역 이행이든 거부든, 교회 공동체가 그와 여정을 함께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병역 거부를 고민하는 청년을 돕는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적 도전이며 성숙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박정경수 씨는 자신의 경험에 비춰 “사람은 기대받는 만큼 행동한다”고 말했는데, 교회가 개인의 고민과 결단에 늘 동행한다면, 청년들은 큰 힘과 용기를 얻어 평화의 한걸음을 내딛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교회는 대체복무제 도입에도 앞장서야 한다. ‘겁쟁이들의 용기 있는 결단’이 ‘사회적 고립’을 강요하는 감옥행으로 직결되는 것을 막아야 하지 않겠나. 군사력을 절대 선으로 간주하는 군사주의에도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병역 거부가 걸어갈 앞으로의 10년에 한국 교회는 공동체적 평화의 바람을 들불처럼 퍼트릴 수 있을까.
글 이종연 기자 limpid@goscon.co.kr

참고 자료
강인철, ‘종교적 관점에서 본 양심적 병역 거부’, 임종인 국회의원실이 주관한 “양심적 병역 거부자, 언제까지 감옥으로 보낼 것인가?” 토론회, 2006.12.22
신윤동욱, ‘군대를 거부한 용감한 겁쟁이들’, <한겨레 21> 862호
이정환, ‘병역 거부에 꼭 거창한 정치적 신념이 필요한가’, <미디어오늘> 2011.9.23
병역거부자들(오태양, 임재성, 박정경수, 하동기, 현민, 김영배, 문명진)의 병역 거부 소견서
김두식, <평화의 얼굴>, 교양인
임재성,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 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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