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퀘이커 평화증언
미국에서 친우회는 메노나이트(Mennonites)와 형제교회(the Church of the Brethren)라는 다른 두 평화주의자 교회와 더불어 3대 "역사적 평화교회(Historic Peace Churches)"중의 하나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세 종류의 교회는 폭력이 점점 늘어가는 우리의 시대 상황 속에서 그들의 평화증언을 다시 실험해보는 작업을 최근 함께 하고 있습니다. 또한 미국 친우회의 모든 상이한 그룹들도 이 "평화 수립을 위한 새로운 부흥"에 응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자신들의 공통된 퀘이커 유산인 평화 증언의 활동을 강화시키는 일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1651년 죠지 폭스는 크롬웰의 군대에서 지휘관 자격의 수여를 거부하면서 첫 번째 평화주의자 선언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나는 모든 전쟁 행위를 몰아내는 생명과 권능의 힘으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외적인 전쟁과 싸움을 무조건 반대하며 그 어떤 목적이나 어떤 명분을 내세운다해도 외적인 무기를 갖고 하는 모든 싸움을 철저히 부정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분명히 알기 때문에 세상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증거 합니다.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은 결코 외적인 무기를 가진 사람들과 대항하여 싸우거나 전쟁을 벌이는 일에 우리를 불러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싸움이나 전쟁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함도 아니요, 세상의 왕국을 위함도 아닙니다." 친우회는 결코 타협없는 선언을 3세기 이상 지지해 오고 있습니다. 친우회의 평화주의자 증언은 하나의 종교적인 관심사로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회원 각자가 스스로 결정하고 실천해야 하는 문제이므로 그것은 회원들에게 "지켜야할 규범이나 규율이 아니라" 지침이나 안내로 제시되는 것입니다. 이 관심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결정하는 일은 각 시대와 회원 각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일부 친우들은 징집법에 응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낀 끝에 징역형을 선고받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친우들은 징집의무 대신에 봉사 의무를 이행하기 위하여 양심적인(징집)거부자(conscientious objectors)로 등록하였습니다. 런던 친우회는 그들과 퀘이커 아닌 평화주의자들을 위하여 전쟁터 가까이에서 일하는 친우앰뷸런스부대(Friends Ambulance Unit)와 민간인들 가운데에서 일하는 친우구호봉사단(Friends Relief Service)을 조직했습니다. 미국에서도 친우들은 민간인공공봉사단(Civilian Public Service) 업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다른 역사적 평화교회와 결합했는데 징집위원회는 이 대부분의 양심적 거부자들을 민간인공공봉사단에 배정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죠지 폭스가 1651년에 이룩했던 승리의 선언을 반복할 수는 없다고 깨달은 어떤 친우는 다른 사람들보다 퀘이커들에게 보다 쉽게 인정되는 군사의 의무의 면제를 요구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하다고 느끼기도 했습니다. 친우회는 각각 특이한 비상사태에 대처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하는 각종 평화 증언에 축복을 보냈습니다. 크리미야 전쟁의 전야에 죠셉 스터지(Joseph Sturge)가 제정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1세를 방문한 일, 영국의 인도 지배를 평화적으로 종식시키는데 크게 공헌한 인도화해그룹(Indian Conciliation Group)의 활동, 1967년에서 1970년 사이에 일어났던 나이제리아 내란에서 적대 세력들을 화해시키려는 시도, 베트남 전쟁에서 양편 모두에게 의약품을 공급할 수 있도록 해준 일, 짐바브웨(Zimbabwe)에서 전쟁을 종식시킨 어려운 협상을 벌인 사람들을 지원하고 격려해 준 일, 등등 그밖에도 많이 있습니다. 친우회는 평화와 이해 증진을 위하여 보다 더 장기적인 사업계획을 추진합니다. 친우회는 국제문제란 오직 전쟁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일반적인 통설을 반박하기 위하여 문서와 구두 선언 및 대중적인 평화시위 등등의 광범위한 평화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민족적 문화적 배경을 지닌 국민들끼리 우호적인 인간관계를 맺게 되면 그들 정부 사이의 관계를 향상시키는 데 보탬이 될 것이라는 신념에 따라 친우회는 수많은 다양한 형태의 국제회합과 국제 교류를 추진해 오고 있습니다. 친우들은 여러 해 동안 이와 같은 신념으로 활동해 오면서 세계 각처에서 온 외교관들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들이 직업상 부딪히게 되는 국제적인 문제들을 아주 비공식적으로 함께 터놓고 상의할 수 있는 회담(Conferences)을 주선해 주고 있습니다. 친우들은 국제 기구가 평화를 수립하는데 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초기의 퀘이커 두 사람 즉 윌리암 펜과 죤 벨러스(John Bellers)는 각각 1694년과 1710년에 분쟁을 가라앉히는 수단으로 전쟁방지기구에 대한 제안을 공포했습니다. 그들이 제시한 전쟁방지기구의 모델은 20세기에 국제연맹과 국제연합을 탄생시키게 한 사상 형성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친우들은 유엔이 평화주의자의 이상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불완전한 인간의 기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국제적인 협동의 도구로서 유엔이 지닌 잠재력을 인정하기 때문에 유엔을 지원합니다. 친우들은 '친우세계위원회'를 통하여 유엔에서 군축의 추진, 인권의 신장, 세계 자원의 올바른 분배들에 관한 그들의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자문역을 즐겨 맡습니다. 친우들은 이런 문제들을 제노바와 뉴욕에 있는 유엔 사무실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는 "퀘이커 모임집"의 비공식적인 분위기에서 정부 대표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토의할 수 있습니다. 유엔에서 친우세계위원회를 대표하는 친우들이 국제적인 모임에서 퀘이커의 견해를 표시한 첫 번째 사람들은 아닙니다. 일찍이 1678년 로버트 버클리는 루이 14세와 화란인 사이의 평화 수립을 위하여 니즈메겐(Nijmegen)에 모인 대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사랑과 우정어린 충고의 서한"을 보냈습니다. 버클리는 그들에게 자신의 "변호(Apology)"에서 약술한 기독교 원리를 채택함으로써 평화를 추구하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저서 "변호"는 라틴어로 쓰여졌는데 위의 "서한"을 덧붙였습니다. 오늘날 친우들은 (버클리가 한 것처럼) 대표단의 서류에 그렇게 많은 분량의 퀘이커 문서를 첨부해서 보내는 일은 망설이겠지만 세속적인 일과 영적인 통찰력을 관련시켜 볼 때 친우들은 버클리의 믿음에 공감할 것입니다. 만일 국가의 지도자들이 평화에 대한 추구가 (퀘이거들이 쓰는 말로) "관심사로 부과된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어떠한 인간의 기구도 세계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친우들을 주장합니다. 일반 대중 곧 관계된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 (종교적 동기를 요구하지 않는) 사이에서 평화에 대한 관심은 오늘날 예전보다 더 널리 퍼져 있습니다. 많은 친우들은 이런 관심을 나타내려고 설립된 새로운 조직들(대부분 비종교적인 조직들임)과 함께 적극적으로 협조하며 일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새로운 평화 운동에 우리 시대의 특수한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미리 마련된 방안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친우들은 300년 이상 평화 증언을 지탱해온 믿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믿음이란 평화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고한 신념인데, 그들은 이 신념을 다른 역사적 평화교회와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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