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범죄사이
이 제목은 내가 <제국의 위안부> 에서 사용했던 소제목이기도 하다. 이런 제목을 굳이 붙여서 묻고자 했던 건 위안부문제였다. 이제는 아는 사람이 꽤 많아졌지만, 오랫동안 지원단체와 관계자들이 위안부문제에 대해 일본이 져야 할 책임의 형태로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 했던 건 “법적”책임이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건 문제발생 당시 동원형태가 군에 의한 물리적 강제연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만,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관계자들이 알게 된 이후에도 그 주장을 바꾸지는 않았다.
그런 주장을 바꾸는 대신 관계자들이 한 일은 “법적”책임을 지우기 위한 온갖 논리였다. 그래서 동원된 게 각종 법률. 자세히는 생략하겠지만 그 내용은
- 세계적인 추세가 매춘을 금지하는데도 일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던가,
- 본토에서 21세 이하는 금지시켜놓고 조선에서는 그 법을 적용하지 않았던가,
- 강제납치는 업자가 했지만 군이 (알고서도) 묵인했다던가 하는 것이다.
이런 각각의 논리는 그럴듯 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 자체로 각각 맹점들이 있다. 자세히 알고 싶은 분들은 2018년에 내가 낸 책 <제국의 위안부, 법정에서 1460일>과 <제국의 위안부, 지식인을 말한다>를 참조해주시기 바란다.
중요한 건 이런 논리들이 더이상 이들이 과거에 연상했고 그리고 지금도 위안부문제를 떠올릴 때 일반인들이 연상하는 “강제연행”의 입증과는 거리가 있는 논리들이라는 점이다. 물론 그렇게 된 이유는 물리적 강제연행이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처음 주장했던 “강제연행”설을 지키고 “법적해결”이라는 주장을 지켜야 했던 데에 있다.
이런 사고를 만든 건 “법적”책임 추궁이 죄에 대한 최고수준의 책임추궁이라는 믿음이다. 그런 사고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한 나를 비난한 ‘법학자’ 이재승 교수가 ‘법적 책임이 없다면 책임이 없는 것’이라는 과격한 주장까지 했던 것에도 그런 믿음은 드러난다. 그리고 그런 믿음을 위해 위안부 할머니들은 가급적 끔찍한 이야기들을 반복적으로 해야 했다. 무려 30년동안.
하지만 정말 그런가. 이들은 어떻게든 “법”을 위반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 온갖 법을 끌어와 대입시키려고 했지만, 그런 법이 만약 없었다면 위안부 문제는 죄가 아닌가. 법이란 늘 사후적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볼 때 누구나 인정하는 나쁜 일인데도 죄를 물을 수 없는 경우는 허다하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새로운 법이 생긴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법에 과거의 문제를 대입시키지는 못하도록 되어 있다. )
더 큰 문제는 주변인들이 그토록 주장했던 ‘법적책임’에 대해 많은 ‘당사자’들이 거의 인지하지 못했거나 상관 없다는 태도를 취했다는 사실이다. 97년에 실시된 아시아여성기금의 수령과 2015년에 합의된 한일합의를 많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받아 들였던 건 그 결과다. 받은 할머니들 중에 일본수상의 편지가 낭독되자 눈물을 흘린 분들도 있었던 건, 용서라는 것이 언제나 ‘법적처벌’을 필수조건으로 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하지만 그런 분들의 존재는 아주 나중에야 알려졌고, 30년 세월동안 두 번 시도된 일본의 “도의적 책임”완수 시도는, 정대협과 이 문제에 오랜 시간 관여해 온 관계자들에 의해서 책임회피로만 해석/주장되면서 오히려 비난 대상이 되었다. 비난을 이끈 사람들은 이후 장관이되거나 국회의원이 되어 더욱더 힘을 갖게 되었는데 그들의 목소리가 커진 만큼 일본의 ‘마음’을 받아든 할머니들은 목소리를 더더욱 내지 못했다.
피해자라고 해도 집단의 경우 그 체험은 다를 수밖에 없다. 더 중요한 건 같은 체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피해자에 따라 가해자에 대한 태도가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 일본의 사죄를 받아 들인 사람들을 정대협은 매춘에 비유하거나 일본의 ‘꼼수’에 넘어 가는 것으로 단정해 더더욱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했는데,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는 늘 단독적인 것이다. 어떤 관계를 설정하든 둘 만의 것으로서 존중 받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거기에 담긴 것이 순수한 용서의 마음이든 정대협 주장대로 단순한 돈욕심이든간에. 그리고 인간은 복잡한 존재여서 때로 그 자신도 그 양쪽을 구별할 수 없는 법이다.
장혜영의원을 둘러싼 사태 역시 마찬가지다.
- 위안부 문제에서 그토록 피해자 중심주의를 외쳤던 사람들이 지금은 피해자보다도 사건을 알아버린 ‘나’ 를 중요시하는 경향이 보인다. 모두가 재판관이 되겠다는 이야기.
- 하지만 바로 그 생각 때문에, 심지어 문제를 확장해서 ‘위안부와 일본군’의 문제를 ‘식민지 조선과 제국일본’의 문제로 확장해서(확장 자체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이때 역시 ‘법’에 의거해서 역사를 판단하려 했던 게 문제다.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법은 늘 사후적이어서 역사 판단의 잣대로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생각하려 한 법률가들의 깊숙하고 오랜 개입이 만든 여러 문제들 때문에, 위안부 문제는 30년 세월이 지나도록 풀지 못할 만큼 꼬여버렸다.
- 물론, 사건을 보는 시각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하는 해결방식도 여러 형태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위안부문제 사태를 통해 배워야 할 건 다수의 위안부 할머니들 목소리—피해자가 배제되었다는 사실이다.
- 우리가 보고 들었던 건 극소수임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이 늘 위안부할머니를 ‘대표’해 온 것이 것이 위안부문제의 30년 역사다. 문제는 극소수 할머니들의 생각조차 주변인들이 설명하고 설득해서 비로소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 그 내용이 옳은 것인지 여부를 떠나, 피해자 중심주의를 외쳐 왔던 우리 사회는 아직 단 한 번도 피해자 중심주의였던 적이 없다. 우리 사회가 위안부 문제를 통해 배워야 할 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지금 기억해야 할 건 바로 그 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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