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26

19 나는 사형수 권재혁의 딸입니다. 통일혁명당 사건


나는 사형수의 딸입니다. 통일혁명당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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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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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이 꿈꿨던 세상

1960년대 박정희 정부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조작 사건을 만들며 반공 정책을 펼쳤다. 1968년 중앙정보부는 ‘통일혁명당’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노동운동 방안을 논의하던 모임을 발견하게 된다. 중앙정보부는 이들이 반국가단체를 조직했다고 발표한 뒤 허위 자백을 받아내고 진보 경제학자인 故 권재혁에게 사형, 사회주의 노동운동가인 故 이일재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 외 관련자들에게는 각각 징역을 선고했지만 이들 대다수가 노동 운동을 하던 인사들이었다.

▣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1969년 故 이일재 씨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여 년간 옥살이를 하게 된다. 그 후 노환과 오랜 병원생활 끝에 2012년 세상을 떠나게 된다. 故 이형락 씨는 10년 형을 살고 만기 출소 후 1985년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의 자식들인 이정건 씨(故 이일재 아들)와 이단아 씨(故 이형락 딸), 그리고 권재희 씨(故 권재혁의 딸, 프리젠터)는 60년대 당시 노동운동을 했던 아버지를 회상한다.

▣ 배우 권재희, 아버지의 흔적과 마주서다

80년대 당시 최고 인기의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며 존재감을 입증한 배우 권재희 씨. 대중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그녀는 방송 활동 당시 비통한 죽음을 당한 아버지의 과거를 깊숙이 숨기고 살아야 했다. 30년이 흐른 지금, 그녀는 다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조각을 맞춰 나간다. 9부의 내레이션은 배우 한석규 씨가 맡아,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전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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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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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은 1968년 박정희 정권 시절 진보경제학자이었던 권재혁 등 12명에게 "국가 전복·공산주의 혁명을 목적으로 하는 반국가단체 남조선해방전략당을 구성하고 내란을 예비음모했다"고 하는 간첩사건으로 조작된 공안사건이다.

사건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은 박정희 정부때인 1968년 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가 통일혁명당 사건을 수사하면서 1968년 7월 30일에 권재혁 등 13명을 강제 연행해 3∼53일간 불법구금하고 고문과 가혹행위로 허위 진술을 강요하여 이들의 친목모임에 대해 남조선해방전략당이라고 하면서 8월 24일 '간첩사건'이라고 발표한 사건이다.

연행된 사람들은 국가보안법 위반과 반공법 위반, 내란음모 등의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7년에서 사형을 각각 선고받았다. 반국가단체 구성 및 수괴죄, 내란예비음모죄, 간첩죄가 적용돼 1969년 9월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권재혁은 두 달 만인 11월 4일 교수형 집행됐고 이일재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뒤 1988년 8·15 특별사면으로 석방, 이강복은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대전교도소에 복역 중 1971년 10월 암으로 옥중에서 사망했다.[1]

이후 시민사회에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계속되었고[2]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9년 10월 12일에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은 1968년 중앙정보부가 권재혁 등 13명을 강제 연행한 뒤 불법구금과 가혹행위를 통해 조작한 사건이다"고 하면서 국가에 피해자 보상과 재심을 권고했다.[3]

서울고등법원 형사3부(부장판사 강영수)는 남조선해방 전략당 사건으로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은 고인이 된 나경일의 부인 임모(84)씨 등 유가족 5명이 낸 재심에서 나경일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4]

대법원 3부(주심 박보영 대법관)는 내란예비음모와 간첩 등의 혐의로 기소돼 사형을 선고받은 권재혁의 유족이 청구한 재심에서 권재혁에게 무죄를 선고했다.[5]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0부(부장 이은희)는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의 권재혁 유족에게 35억원, 7년~무기징역 형을 받은 이일재 등 3명의 유족들에게 8억~14억여원씩을 지급하라"고 했다.[6]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이후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한 문무일 검찰총장은 이 사건에서 재심을 청구하지 않은 피고인에 대해서도 형사소송법에 의해 직권으로 재심을 청구하기로 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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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민주열사/희생자 소개-권재혁(당45세)/사회학과50년졸

권재혁은 ’25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났다.
해방직전 중학생 신분으로 사회주의계 독립운동 모임 장소 문지기를 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웠다. ’50년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56년 미국 유학을 떠나 ’57년 10월 오리곤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에 전학하여 계속 박사과정을 밟았다. ’60년 4월 혁명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 육사 경제학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63년 6.3사태후 ‘민주사회동지회’에서 이일재 선생 만나 노동자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동지를 규합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노동자와 청년학생들을 살리기 위해 우리 민족의 운명이 남의 손안에 있고 남의 군사적 보호밑에서 유지되고 있는 것을 민족적 치욕의 극치라고 생각하고 남한 독자적인 노동자 중심의 정당을 건설하여 독재정권과 맞서야 된다는 생각에 동의하는 동지들과 조직을 만들어 갔다. 중앙정보부 ‘통혁당’조사시에 동지가 준비 중인 조직이 중앙정보부에 알려져 소위 ‘남조선해방전략당’사건으로 조작이 되었다. 동지는 ‘남조선해방전략당’ 당수로 지목되어 ’69년 11월 4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집행을 당했다.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반민주적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민주인사에 대한 대표적인 조작사건이다.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던 박정희 정권이 3선 개헌의 야욕을 불태운 1969년에는 중앙정보부의 권력의 하수인들을 이용하여, 야만스런 국가폭력을 행사하면서 민주인사에 대한 탄압과 탄압을 위한 빌미로 각종 사건을 조작해 냈다. 당시 국회에서 날치기로 3선 개헌안을 통과시킨 후 국민투표까지 한 달 만에 중앙정보부와 경찰은 3건의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그 중의 하나가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이다. 최장 53일 동안 불법 감금한 채 온갖 가혹행위를 벌여 허위자백을 받아내고, 권재혁에게 내란예비음모죄 등을 적용하여 사형을 선고, 두 달 뒤 사형이 집행되었다. 남조선해방전략당 피해자 당사자인 이강복은 옥중에 사망하였고 이일재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뒤 1988년까지 20년 동안 복역을 했다.

2009년 4월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를위한진실화해위원회(당시 위원장 안병욱)’(이하 진실화해위)에서는 박정희 군사독재시기인 1968년 중앙정보부가 권재혁, 이일재 등 13명이 반국가단체 ‘남조선해방전략당’을 조직했다고 발표한 사건이 고문에 의한 조작된 것이라는 조사결과를 발표하였다.

이어서 2014년 5월 16일, 대법원(사건번호 2011도 1434 재판장 양창수 대법관)은 이른바 “남조선해방전략당”사건으로 1969년 11월 4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법살인 당한 권재혁, 무기징역 받은 이일재, 이강복, 이형락, 김봉규에 대한 재심에서 검사상고 기각으로 무죄 판결을 내렸다.

약력
1925년 함양 산청 출생
1950년 서울대 문리과 사회학과 졸업
1952년 10월 경신중학교 교사
1952년~1954년 부산세관 근무
1956년 6월 도미유학 몬타나주리대학 경제학과
1957년 8월 미국 몬타나주립대학 경제학과 박사학위 과정 이수
1957년 10월 오리곤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 전학 계속 박사과정 이수1960년 4월 혁명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 육사 경제학과 교수
1962년 9월 건국대학교 정경대학 경제학과 강사 및 경제문제연구소 상임위원
1963년 6.3사태후 ‘민주사회동지회’(혁신계의 결집체)에서 이일재 선생 만나 노동자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동지를 규합
1963년 7월 건국대학교 정경대학 경제학과 강사 및 경제문제연구소 상임위원 사임
1963년 8월 한국 수산개발공사 영업책임자로 한국 귀국
1965년 한일협정 반대운동 지도와 수배자를 자택에 숨겨줌
1968년 1월 ‘남조선해방전략당’문건 작성
1968년 말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남조선해방전략당’의 당수로 지목
1969년 11월 4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집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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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죄판결 받은 사형수의 딸...ㅠ.ㅠ
    미스롯데 출신의 인기 여배우 권재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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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형수의 딸, 여배우의 노란 리본 그리고 다이빙 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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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권재혁선생 비문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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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재혁선생 43주기 추모식, 2012.11.4, 마석모란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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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은 2014.5.16일 대법원 재심에서 간첩죄, 반국가단체구성죄, 내란예비음모죄 등 당시 적용 혐의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날 추모식과 열사안내판 설치에는 유가족과 추모연대 관계자들이 함께 했다. [사진-통일뉴스 김종욱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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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우 권재희님의 부친이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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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운명'인가…탤런트 권재희·역사학자 한홍구 결혼한다
이원영 / 기사승인 : 2020-08-19 13:29:43

권재희, '용공조작 사형수'의 딸로 가시밭길 인생
한홍구, 권재희 부친 억울한 죽음 규명해 무죄 판결

중견 탤런트 권재희(58), 진보성향의 역사학자 한홍구(61) 성공회대 교수가 오는 28일 부부의 연을 맺는다. 두 사람은 일체의 청첩 없이 가족들만 모여 조촐한 혼례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많은 사람들에게 얼굴이 알려진 연기자와 다수의 저서·강연으로 유명한 역사학자와의 만남은 어디서 시작됐을까.

▲ 탤런트 권재희(왼쪽)와 역사학자 한홍구 [DJ엔터테인먼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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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인연은 억울한 '사법 살인'으로 지난 1969년 44세에 세상을 떠났던 권재희의 아버지 권재혁의 신원(伸寃:원한을 풀어줌)이 계기가 됐다.

권재혁은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50년대 말 미국 유학길에 올라 경제학 박사학위 과정을 수료하고 돌아온 경제학자였다. 미국의 경제발전을 체험한 그는 후진국 경제모델의 원인을 짚고 이를 어떻게 한국에 접목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던 진보 지식인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3선 개헌 후 병영 독재체제를 강화하던 때로, 많은 용공 사건을 조작했다. 이 가운데 하나가 권재혁을 '수괴'로 한 가공의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이다. 권재혁은 1968년 진보지식인 13명과 함께 연행돼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다음해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권재혁이 '사법 살인'으로 유명을 달리했을 당시 딸 권재희는 겨우 7살에 불과했다. 이후 권재희와 그 가족이 걸었을 길은 여느 용공조작 사건의 피해자 가족과 다름없는 가시밭길이었다.

▲ 탤런트 권재희(맨 앞) 가족사진. 오른쪽이 아버지 권재혁.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자료]

오랜 시간이 지나고 정권이 수차례 바뀐 2009년 과거사위원회는 권재혁을 용공조작 사건의 희생자로 규명했고, 이어 2014년 대법원에서는 최종 무죄 판결을 내렸다. 이 과정에 한홍구 교수가 있었다.

노무현 정부의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에 몸담았던 한 교수는 박정희 정권이 벌인 각종 용공조작 사건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2009년 화해·치유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권재혁을 용공조작사건의 희생자로 최종 발표할 당시 한 교수는 한겨레 신문에 기고문을 게재했다.

그는 '권재혁을 아십니까'라는 제목의 글에서 "정보부 지하실에 잡혀 와서야 자신이 '수괴'라는 남조선해방전략당의 이름을 처음 듣고, 죽은 뒤에도 전략당 사건의 권재혁이라 불려야 하는 젊은 경제학자의 40주기에 술 한잔을 올린다"며 "술 한잔이라도 올려야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정녕 그것뿐일까?"라고 끝맺었다.

한홍구 교수는 독립운동가 한기악의 손자이자, 일조각의 창업주인 언론인 한만년의 4남이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워싱턴대학교 대학원에서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항일독립투쟁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5남매가 모두 서울대를 졸업한 전·현직 교수 집안으로 유명하다.

1981년 미스롯데와 KBS공채 탤런트 출신인 권재희는 지난해 8월 KBS다큐멘터리 '기억, 마주서다'에 '나는 사형수의 딸입니다'의 주인공으로 출연해 처음으로 아버지 이야기를 공개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권재혁 선생 50주기 추도식 및 자료집 발간식'도 열렸다. 한 교수도 이 자리에서 권재혁의 영전에 술잔을 올렸다. 아버지와 딸의 '해원'이 완성된 순간이었다.

권재희는 4년 전 개그맨 출신 남편 이하원과 사별했다. 이번에 두 사람은 재혼이다. 독재의 폭압에 스러진 한 영혼이 해원하면서 두 사람을 운명적으로 이어준 것이리라. 서로에 대한 감사와 이해의 아름다운 결실이다.

UPI뉴스 / 이원영 기자 lwy@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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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권재혁을 아십니까 / 한홍구
등록 :2009-11-03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385736.html

 
11월4일은 이른바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의 주범으로 사형을 당한 진보적 경제학자 권재혁의 40주기가 되는 날이다. 11월6일에는 학사주점 사건의 이문규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중앙정보부에 의해 간첩으로 몰린 탈북자 이수근도 권재혁보다 꼭 넉 달 전인 7월3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권재혁의 사형이 집행되기 전날인 11월3일에는 이른바 유럽간첩단 사건으로 김규남 의원과 역시 진보적인 경제학자였던 박노수가 사형 판결을 받았다. 김규남의 사형은 1972년 7월13일, 박노수의 사형은 7월30일 각각 집행되었다.

 박정희가 3선개헌의 야욕을 불태운 1969년에는 유달리 간첩 사건도 많았고, 억울한 사형 집행도, 사형 선고도 많았다. 국회에서 날치기로 3선개헌안을 통과시킨 후 국민투표까지의 한 달 동안만 해도 중앙정보부와 경찰은 3건의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나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수근의 위장귀순 사건도, 권재혁의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도, 김규남, 박노수의 유럽거점 간첩단 사건도 모두 중앙정보부가 조작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우리가 잘 아는 1975년의 인혁당재건위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살인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독재권력에 의해 희생되었다. 사형까지 당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송씨 일가 간첩 사건이나, 여러 지역의 납북어부 간첩 사건들에 대한 재심에서 법원은 뒤늦게나마 무죄 판결을 내리고 있다.
그래도 여기 거론된 분들은 억울함이라도 밝혀진 분들이다. 박정희 정권하에서 170여명, 전두환 정권하에서 10명가량이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 과거사위원회가 미처 조사하지 못한 사건들 중에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은 또 얼마일까?으로 사형을 당했다. 60년대의 희생자들은 그래도 해외 유학도 하고, 나름 인맥도 있고, 또 민주화 운동이라도 했던 분들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작간첩 사건의 희생자들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억울한 소시민들 속에서 나왔다. 국선변호인조차 귀 기울여 주지 않아 혼자서 맞춤법도 맞지 않는 탄원서 한 장 남겨놓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돈도 없고 빽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증거도 없었던 사람들 ….
이 땅의 40대 이상은 그들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1975년 인혁당 사건의 하재완이 사형당했을 때 그의 막내는 4살이었다. 잘해야 여덟, 아홉 살 먹었을 동네 형아들은 4살짜리 꼬마를 빨갱이 새끼라고 새끼줄로 나무에 묶어놓고 사형시키는 놀이를 했다고 한다. 그 형아들은 무슨 죄인가? 그 시절을 산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간첩 사건 발표 날 때 정말 큰일 날 뻔했다고, 저런 것들은 잡아 죽여야 한다고 박수 치지 않았던가? 마침 그 골목에 살지 않았을 뿐, 그 암울한 시절을 산 사람들은 모두 새끼줄 한 자락을 잡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간첩이 아니란다. 그나마 간첩 조작의 억울함을 밝혀주던 과거사위원회는 곧 문을 닫는단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남쪽 당국이 적발한 간첩 1천여명 중 진짜 북에서 남파시킨 간첩은 단언컨대 50명이 안 된다. 나머지 모두를 조작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억울하고 또 억울한 사람의 숫자가 너무 많다. 그렇게 수많은 조작 간첩이 있건만 간첩 조작의 지난 죄를 고백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스파이를 서로 교환하는 외국의 사례가 부러울 뿐이다. 정보부 지하실에 잡혀 와서야 자신이 ‘수괴’라는 남조선해방전략당의 이름을 처음 듣고, 죽은 뒤에도 전략당 사건의 권재혁이라 불려야 하는 젊은 경제학자의 40주기에 술 한잔을 올린다. 술 한잔이라도 올려야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정녕 그것뿐일까?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385736.html#csidx50c62ddaf6b6eb996ffbf59cd6a194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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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된 사실로 죽임까지... 배우 권재희 부친의 억울한 사연

[김성수의 한국 현대사] 조작 간첩으로 사형 당한 '젊은 경제학자' 권재혁20.06.07 최종
김성수(wadans)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47126


▲ 권재혁 선생 가족, 가운데가 딸 권재희
ⓒ 진실위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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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권재희의 부친 권재혁은 1925년 경상남도 산청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1955년 7월부터 1961년 11월까지 미국 몬태나주립대, 조지타운대, 오리건대 등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수료한 인재였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권재혁은 건국대학교,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을 강의했다. 1961년 5·16쿠데타 직후 대부분의 정당과 사회단체가 해산된 상황에서 1962년 '민주사회동지회'가 합법적으로 만들어져 당시 좌우익을 망라한 다양한 인사들이 모여 세미나 등 공부 모임을 했다. 1963년 9월경 민주사회동지회에서 미국경제현황 및 후진국개발문제에 대한 세미나 주제발표를 하다가 이일재 등을 알게 되었다.

이일재는 해방 후 노동운동을 해오다가 1958년 어용적인 대한노총을 개혁하고자 전국노동조합협의회를 만들었다. 1960년 4·19 시기 이일재는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가 1961년 5·16쿠데타 직후 예비 검속되어 불법감금 되기도 했다. 권재혁, 이일재, 이강복 등 13명은 4·19 시기 민주적 노동운동을 지향했던 학우들로서 비정기적으로 모여서 시국담을 나누던 사이였다.


1967년 박정희는 대통령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3선 개헌을 위해서 박정희는 1967년 6월 8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2/3 의석을 획득해야 했다. 1960년대 후반은 1965년 6월 한일협정 체결을 통한 한일국교 정상화, 한미일 협력체제 구축, 베트남파병으로 인한 냉전적·반공의식이 확대 강화되던 시기였다.

박정희 정권은 1967년 7월 동백림사건 등 대규모 조작간첩사건을 발표한다. 이어서 박정희는 한국사회 내 반공적 위기의식 강화에 따른 파시즘적 통치체제의 제도적 공고화를 급속하게 추진한다.

이런 냉전시대 흐름 속에서 1968년 7월 30일부터 8월 12일 사이 중앙정보부(아래 중정)는 어느 날 갑자기 권재혁, 이일재, 이강복 등 진보적 지식인 13명을 '남조선해방전략당' 관련자라며 강제연행해 3일에서 53일간 불법구금하며 가혹한 고문과 조사를 자행한다.

고문조사가 끝난 1968년 8월 24일, 중정은 이른바 '통일혁명당 지하간첩단사건'(아래 통혁당)을 발표한다. 당시 중정의 발표내용은 통혁당이 "재일조총련 국내지하조직인 가칭 '남조선해방전략당'(아래 전략당)과도 접선, 막대한 공작금을 지원받아 조총련계인 동해상사와 유사한 위장기업체의 설립을 획책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중정은 통혁당의 하부조직으로 권재혁, 이일재, 김병권 등 13명이 1967년 1월 1일 전략당을 조직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이른바 '주모자'인 권재혁이 1969년 4월 21일 법원에 제출한 항소이유서는 '전략당은 중정의 조작'이라고 적고 있다. 아울러 권재혁은 중정의 발표와는 달리 전혀 조선노동당에 가입한 사실이 없고 북한공작금을 받은 사실도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강제연행되어 불법 구금상태에서 고문


▲ 2011년 대법원에서 재심 무죄판결 직후 이일재 선생
ⓒ 전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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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의 피해자 이일재는 지난 2006년 필자가 몸담았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실위)에 이 사건과 관련한 '사건경위서'를 제출한다. 이일재는 1968년 당시 자신을 비롯한 권재혁, 이형락, 김봉규, 노중선 등 13명이 중정에 강제연행되어 불법 구금상태에서 겪은 고문과 가혹행위에 대해 경위서에 이렇게 적었다.

"조사실에 들어가자마자 두 명의 수사관이 야전침대 참나무 막대기로 허리와 엉덩이를 무차별적으로 구타했다. 이후 수사관들은 조사내용이 자기들의 의도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구타를 했고, 사실상 매일 구타를 당했다. 또한 한 달여 조사를 받는 동안 거의 잠을 재우지 않았다. 이때 당한 고문으로 지금도 허리와 옆구리가 쑤시고 통증이 있다.

그때 함께 연행된 분들 중… 노중선이 고문으로 팔이 부러진 모습과… 김봉규가 고문으로 겨우 걷는 모습과 본 사건의 주범 격인 권재혁이 머리카락이 뽑히고 온 얼굴에 피멍이 든 모습을 보고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수사관에게 '우리들에게 만일 더 이상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강요하면 죽어버리겠다'고 격노해서 항의하니 양팔에 수갑을 채워서 책상다리에 묶어두고 신문과 조서를 작성했다."

또 권재혁의 아내 이종식은 권재혁이 중정에 연행된 다음 날인 1968년 7월 31일 중정에 연행되어 4~5일간 조사를 받는 중 화장실에 가다가 복도에서 남편을 우연히 만났는데 "(남편) 이마에 혹이 두 개, 세 개 엄청나게 크게 달렸어요. 많이 맞아가지고… 비명소리가 돼지 멱따는 소리처럼 들렸다"고 진실위에서 회상했다.

또 권재혁의 동생 권종혁은 "(형 권재혁이 중정) 지하실에서 두들겨 맞고 병신 될 정도였다"고 들었다고 진실위에서 진술했다. 피해자 노중선은 1968년 7월 30일 중정에 구속된 직후, "야전침대 각목으로 내려치는 것을 손목으로 막다가 왼쪽 손목이 부러졌다"고 진실위에서 증언했다.

김봉규는 당시 항소이유서에서 "1968년 8월 1일 아침 7시경 본인가에서 중앙정보부원에 의해 연행되어 피고가 한 범행 사실을 말하라고 약 30분 내지 1시간가량 엎드려뻗쳐하고 야전용 침대 몽둥이로 얻어맞은 후 연속 2주야 취조를 받았던 바 병신이 되거나 죽을까 두려워서 본의 아닌 사실을 진술(7통의 진술서와 기타)한 바 항목별로 다음과 같습니다"라고 중정의 고문 사실을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전략당'이란 이름도 조사받을 때 처음 들어"

나경일은 지난 2008년 진실위에서 당시의 고문 피해를 진술했다.

"중정 수사관들이 처음 저를 보고 물은 말이 '이형락을 아느냐'였는데 저는 이형락씨의 이름을 이권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른다고 하니 수사관들은 이형락은 안다고 하는데 왜 모른다고 하냐면서, 저를 '엎드려뻗쳐'를 시킨 다음 야전침대 각목으로 때리기 시작했는데 상당히 굵고 단단한 야전침대 각목이 부러졌다. 하도 맞아서 완전히 파김치가 되고 기절을 하니 수사관들이 물을 부어 깨우고 했다.

그다음 날 헌병들이 들것에 사람을 하나 데리고 왔다. 저와 이형락씨와 대질을 시켜 제가 이 사람은 이권으로 알고 있다 하니 수사관이 어이없어했다. 이름 두 자 때문에 제가 하루 동안 매타작을 당했던 것이다. 저도 매타작으로 무척 힘이 들었지만 이형락씨 또한 들것에 실려 와서 고개도 제대로 못 가눌 정도였고 눈을 제대로 못 뜨고 저를 겨우 쳐다보는데 거의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

그다음부터 수사관이 본격적인 조서를 작성했는데 저는 순수한 노동운동을 한 것이라고 진술했는데, 이미 그런 내용은 수사관들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고, 자기들이 미리 정한 내용으로 진술을 강요했으며, 인정할 때까지 계속 가혹하게 조사를 해 나중에 교도소에 가서 한 달 이상 제가 똑바로 눕지를 못할 정도였다.

손바닥과 발바닥을 각목으로 가격하거나 엉덩이를 때리고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고 머리, 얼굴, 등, 허벅지 등 가리지 않고 때려 온몸이 회를 뜬 것 같은 상태였다. 수사관들이 때리다가 지치면 헌병을 불러 때리기도 했다. 나중에 교도소에 가니 간수가 똑바로 앉으라고 해 (똑바로 앉지 못하고) 제가 등을 보여주니, 교도소 간수들도 보더니 편하게 있을 수 있게 허락했다."

또 다른 피해자 김병권은 당시 상고이유서에서 "중정에서도 완강히 부인했으나 소용이 없었고 검사님이 조사할 때도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했더니 검사님 말씀이 '너 윗사람이 모두 했다는데 너만 부인해도 소용없다'고 말하더니 '정말 피고가 모른다면 전략당에 가입한 사실은 없다고 해줄 터이니 그 밖의 일은 아무 걱정 말고 조서를 만들라'고 해서 만든 것입니다"라고 함으로써 검찰의 신문조서가 협박과 회유에 의해 허위진술 되었음을 언급했다.

당시 공판조서기록에 따르면 권재혁은 검사의 범죄사실에 대한 진술의 사실 여부를 묻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략당' 조직결성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사실과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왜냐하면 중앙정보부의 수사관 입회 아래 조사를 받았기 때문에 공포 분위기와 압박감 때문에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검사 취조 때도 역시 중앙정보부에서 본인을 취조하던 수사관의 입회 아래였기 때문에 중앙정보부의 조서를 토대로 취조하는 검사의 질문에 반박할 수 없는 분위기, 즉 압박된 상태에서 취조를 받았기 때문에 자유로이 진술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략당'이란 이름도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받을 때 처음 들었습니다."

또한 권재혁은 검사의 "1968년 3월 12일 일본국 동경 소재 오타니 호텔에서 북괴노동당 중앙위원인 천만기를 만나, 이후 노동당 입당원서를 내어 정식으로 입당한 사실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천만기를) 만난 적도 없습니다"라고 강하게 부인했다.

"사형까지 집행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조작된 사건을 가지고"


▲ 권재혁 선생 묘지
ⓒ 진실위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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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강력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가혹한 고문조사결과 이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었던 권재혁은 1969년 9월 23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고 그해 11월 4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44세였고 그는 1남 2녀를 둔 가장이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당시 "중정 지하실에 잡혀 와서야 자신이 '수괴'라는 남조선해방전략당의 이름을 처음 듣고, 죽은 뒤에도 '전략당 사건의 권재혁'이라 불려야 했던 젊은 경제학자에게 술 한 잔이라도 올려야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정녕 그것뿐일까?"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한편, 무기형을 선고받은 이일재는 20년 징역을 살았고 1988년 8월 15일 특사로 석방된 후 고문 후유증으로 병원을 들락날락했다. 그리고 지난 2011년 1월 14일 그는 전략당 사건에 대한 재심 최종공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1년여가 지난 2012년 3월 24일 그는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으로 10년을 선고받은 이강복은 1971년 수감 중 암에 걸려 차디찬 감옥에서 옥사했다. 이형락은 1978년 만기출소 후 고문 후유증과 트라우마로 고생하다 1985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여 년 감옥생활 후 석방된 김병권은 지난 2005년 뇌졸중으로 투병 생활 중 운명했다. 이들은 모두 지난 박정희 독재정권 시대 저주받은 비극의 희생자들이었다.

진실위는 지난 2009년 이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을 다음과 같이 내렸다.

"중앙정보부는 이 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권재혁, 이일재, 이강복, 이형락, 노정훈, 김봉규, 박점출, 조현창, 김병권, 오시황, 나경일, 김판홍, 노중선 등 13인을 연행해 사람에 따라 3~53일간 장기간 불법 구금하고, 고문과 가혹행위 등으로 허위자백을 받아내고, '남조선해방전략당'이라는 '반국가단체'를 구성, 가입했다는 등의 범죄사실을 조작했다."

진실위에서 당시 이 사건을 조사했던 전명혁 박사는 "아직도 의문 나는 것은 권재혁 선생을 사형까지 집행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조작된 사건을 가지고..." 라며 지난 1일 필자에게 아쉬움을 토로했다.

무죄 확정되던 날 온 가족이 부둥켜안고 통곡


▲ 2011년 재심 승소 판결 직후 기뻐하는 전력당 사건 유가족
ⓒ 전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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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위 진실규명으로 2년이 지난 2011년 1월 14일 전략당 사건 생존피해자들은 이 건에 대한 재심 최종공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로부터 3년여 지난 2014년 5월 16일, 이 사건의 '주모자'로 억울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권재혁은 사형집행을 당한 지 45년 만에 대법원에서 누명을 벗었다. 이날 대법원 재판부는 무죄판결하며 이렇게 그 이유를 밝혔다.

"당시 수사과정에서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이 권씨 등을 마구 구타하고 폭언이나 협박, 잠을 재우지 않는 등의 가혹행위를 했다. 이 같은 폭행이나 가혹행위를 견디다 못한 권씨 등이 공소사실을 자백했다. 중앙정보부 조사단계에서 고문 등 가혹행위로 인해 임의성 없는 자백을 하고 그 후 검사의 조사단계에서도 임의성 없는 심리상태가 계속돼 동일한 내용의 자백을 한 것으로 봐야 한다.

이 증거들의 증거능력을 인정한 원심은 위법하다. 피고인이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반국가단체인 '전략당'을 구성해 그 수괴의 임무에 종사했다거나 북한노동당 중앙위원으로부터 군사기밀 탐지 지령을 받고 귀국해 군사기밀을 탐지하려다가 미수에 그쳤다거나, 공작금으로 일화 40만 엔을 받은 후 적법한 환금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아무런 증거가 없다."

억울하게 간첩으로 조작되어 가혹한 고문 끝에 사형을 당한 권재혁(1925-1969)의 딸인 배우 권재희는 대법원에서 사후 45년 만에 아버지에게 무죄가 선고되던 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대법원에서 아버지 무죄가 확정되던 날 온 가족이 부둥켜안고 통곡을 했습니다. 40년 넘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살면서 담아둔 응어리가 한꺼번에 풀려 정신이 없었어요. '엄마 혼자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려요. 저는 워낙 어렸으니 당시엔 내막을 몰랐지만 철저하게 조작된 사건이란 걸 알고 나서 저 또한 너무 힘들었고요."

배우 권재희는 아버지 권재혁이 지난 1969년 간첩죄로 억울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때 불과 7살이었다. 아버지가 사형당한 후 권재희는 우울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닐 때까지 비운에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쉽게 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대학 졸업 후 연좌제 때문에 취직도 어려웠다.

그가 배우의 길을 택한 것도 연좌제로 공직의 길이 막힌 상태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권재희는 지금도 평생 한으로 남아 있는 것이 부친의 명예가 회복되기 전까지 남의 이목 때문에 부친의 묘소조차 찾아가지 못한 것과 또 부친의 옛 동지들이 부친 추도식을 지내는 것을 알게 된 뒤에도 한동안 그 앞에 나서지 못한 것이라고 회상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위해 소중한 자료를 제공해준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한홍구 교수와 전명혁 박사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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