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30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칠흑같은 밤에 빛나는 별빛처럼 <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 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금강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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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칠흑같은 밤에 빛나는 별빛처럼

기자명 금강일보
입력 2015.08.02


한남대 명예교수


참으로 더러운 세상이라고 타박하다가도, 후덥지근하고 끈적거리는 음습한 날 겨드랑 속으로 스며드는 한 자락 시원한 바람과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면 참으로 기분이 좋아 그래도 살만한, 희망이 있는 세상이지 할 때가 간혹 있다. 상당히 오래 지난 이야기지만, 삼복더위에 이런 시원한 이야기를 듣게 되면 정신과 육체에 보가 되는 것을 느끼지 않을까?

우리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한 작은 집에서 나치통치를 피하여 한 가족을 숨겨 준 이야기를 잘 안다. 그 집 뒷방에 숨어 살던 한 가족의 이야기는 어린 소녀 안네가 쓴 일기를 통하여 잘 알려져 있다. 그런 거룩한 인간의 행동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엄혹했던 시절에는 감춰졌다가 역사가 진행되면서 하나 둘 밝혀질 때, 마치 흙 속에 파묻혔다가 삽과 괭이질에 우연히 나온 진주알을 발견한 듯이 정신을 반짝 들게 한다.

여러해 전에 베를린의 퀘이커 예배모임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연세가 많은 기젤라라는 친우가 나치 때 이야기를 하여 주었다. 광란하는 히틀러 정권은 유대인들을 무차별 체포하고 동원하여 강제수용소에 가두고 강제노동을 시키고 굶어 죽게 두거나 가스실에서 대량으로 학살할 때다. 정권의 기계는 그렇게 미쳐서 돌아갈 때 차마 사람으로서 그것에 동조할 수 없는 이들이 있었다. 양심과 진리에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느 날 나치의 게슈타포요원이 퀘이커 모임 집에 왔다. ‘여기 유대인을 숨겨 두었다는 제보를 받고 왔소. 그게 사실이오?’

사실 그 때 문 하나를 열고 들어가면 그 뒷방에 유대인 가족이 숨어 살고 있었다. 그렇다고 대답하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아세우는 것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된다. 또 아니라고 한들 게슈타포요원들이 순순히 그 말을 믿고 돌아갈 것도 아닐 것이다. 이런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을 어떻게 지혜롭게 넘길 것인가? 오래도록 퀘이커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산다고 잘 알려져 있는 터다. ‘그래요?! 그러면 직접 들어가 확인하여 보세요.’ 이렇게 말하면서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그 때 게슈타포요원은 곰곰이 잠깐 생각하여 보았다. 만약 뒤에 유대인을 숨겨두었다면 이렇게 당당할 수 있을까 하는 맘이 들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런 제보가 있어서 왔는데, 혹시 앞으로라도 유대인들을 숨겨두는 일을 하지 않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가버렸다. 베를린의 퀘이커들은 그 일 뒤에 굉장히 빠르고 안전한 방법으로 그 유대인 가족을 다른 나라로 탈출시켰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시에는 소수의 퀘이커 그룹이 있었다. 이들은 어떤 집을 구입하여 쫓기는 사람들을 잠시 머물게 하는 일도 하였고, 쉼이 필요한 사람들이 잠시 쉬었다 가도록 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나치정권에 의하여 유대인들은 남녀노소를 물을 것 없이 다 생명의 큰 위협을 받고 있을 때, 어른들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더라도, 어린이들만은 살려야 하겠다는 공론이 이들 작은 집단에 돌았다.


그러나 너무나 감시가 엄중하기에 그 일을 하기에는 몹시 어려웠다. 마침 프랑크푸르트에는 영국 영사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과 잘 통하는 사람들의 힘을 빌려 유대인 어린이들을 영국으로 빼돌리는 일을 시작하였다. 이 일은 193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었다. 이 일에 참여한 사람들은 의사, 교사, 간호사도 있었고, 나이가 많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끼어 있었다. 상당히 빠른 속도와 비밀스러운 길을 통하여 프랑크푸르트 주재 영국영사관을 통하여 영국으로 어린아이들을 내보냈다.

체코슬로바키아 북쪽, 독일과 국경을 맞대는 곳에 슈데텐란트라는 지역이 있다. 여기에는 유대인들이 집단으로 이주하여 사는 곳이었다. 이들은 때가 되면 집단 수용소로 수송될 사람들이었다. 거기에도 역시 어린아이들이 아주 많이 함께 지내고 있었다. 이것은 인간이 당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니컬러스 윈턴이라는 분이다. 그는 1907년에 독일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유대인 가정에서 1909년에 태어났다. 그가 슈데텐란트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

아주 탁월한 지혜와 행동으로 그는 영국으로 유대인 어린이 669명을 탈출시켰다. 이들을 여러 가정에서 입양하여 기르게 하였다. 이 때 영국의 유대인협회 회장은 유대인 어린이를 이방종교를 믿는 사람들 손에 자라게 할 수 없다고 반대하였다. 그 때 윈턴 씨는 ‘나치의 가스실에서 사라지는 것보다 이방인의 손에서 자라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하면서 그 일을 계속하였다. 그는 지난 7월 1일 호흡기 질환으로 106세에 세상을 떠나게 되어 그 일이 세상에 더 알려 졌다.

중국인 허펑산(何鳳山) 씨의 이야기 역시 매우 감동스럽다. 그는 독일에서 유학한 뒤, 세월이 지나 오스트리아 주재 중국영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히틀러 정권이 유대인들을 박해하는 것을 눈치 챈 그는 무엇인가 일을 하여야 하였다. 승승장구하는 히틀러의 권력과 힘에 맞서서 그의 정책에 반하는 일을 할 나라는 주변에 많지 않았다. 다른 나라 대사관이나 영사관에서는 유대인들이 자기들 나라로 갈 수 있는 비자를 내어 줄 용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일련의 유대인들이 중국 영사관에 왔다.

그는 중국 상하이로 갈 수 있는 비자를 무조건 내 주었다. 점점 많아졌다. 상하이 담당자들과 중국정부에서는 비자를 그만 내어 주라고 하였으나 그는 그가 그 업무를 보는 동안 중단 없이 계속하였다. 그 숫자가 무려 4000여 명이 된다. 그는 1997년 95세로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때까지 그는 스스로 그 일에 대하여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에 의하여 목숨을 구한 사람들이 증언하여 알게 되었고, 나중에 자료가 나와서 밝혀졌다. 순간적이고 직감적인 결단에 의하여 역사적 구원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간혹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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