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적 숙명, 한반도의 통증 들여다보기
[서평] 정의길 <지정학의 포로들>
18.04.13
글: 김성훈(writerprison)편집: 최은경(nuri78)
하루는 어깨 통증이 심해 동네 정형외과를 찾았다. 의사는 장시간 컴퓨터 작업을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어깨 통증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자주 스트레칭을 하라는 권유도 받았다. 너무나도 상식적이었다. 통증의 원인이 운동 부족이라는 소리 아닌가. 전문가의 소견이라는 것이 허탈할 정도로 간단했다.
통증은 호소하면서 가장 간단한 것을 잊고 살았구나. 가장 간단한 것을 무시했을 때 병은 커지는 구나. 어깨 통증이라는 것이 어깨만 아픈 것이 아니었다. 고개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의사의 진단을 받기 전까지는 거북목 진단을 받는 것은 아닌가 하고 덜컥 겁도 났다.
창고에서 이름과 집주소를 말하고 대기 번호를 받았다. 간호사가 호명하기 전까지 얌전히 대기석에 앉아 기다렸다. 다리나 팔에 깁스를 하고 있는 사람, 물리치료를 끝내고 나오는 사람, 휠체어, 목발, 허리 보호대 등이 보였다. 이렇게 다치거나 아픈 사람이 우리 동네에는 많이 살고 있었구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정도의 차이일망정 병원에 머문 우리는 각자의 통증에만 신경 쓰고 있었다.
'삶의 질'과 관련된 통증은 비단 병원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삶의 질'이란 것이 무엇인가. 말초적인 감각에만 의존하는 삶이 아닌 좀 더 고르게 사회적 상황을 인식하고 자신의 역할을 해나가는 것 아니겠는가. 고상한 척, 권위 있는 척, 혹은 이상에 목매는 것이 아닌 내 가치와 품격을 올리는 것이 바로 '삶의 질'이지 않을까.
개인의 통증을 떠나 국가적 통증은 무엇일까. '분단'이다. '분단'의 맥락은 어떻게 읽어왔는가. 이데올로기나 이상과 관련하여, 아니면 한민족이라는 감상에만 국한하여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다보니 '국가의 질'이라 부를 수 있는 정책, 노선도 땅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닌 구름에 바탕을 두었던 것은 아닌가. 그마저도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이지 않았는가.
정의길 <지정학의 포로들>
▲ 정의길 <지정학의 포로들>ⓒ 한겨례출판
"우리는 흔히 지정학적 위기라는 말을 쓴다. 국제사회의 질서를 위협하는 심각한 위기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하지만 냉전 이후 국제사회는 지정학을 잊어버렸다. 국가와 세력의 위치와 힘의 관계를 논하는 지정학은 제국주의 시대의 유산으로 치부되며, 사이비과학으로 간주됐다. 기본적으로 국가와 세력들을 생존을 위한 갈등관계로 보는 지정학은 냉전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승리함으로써 갈등이 해소된 듯 보이자 가치가 폄하되었다. 지정학은 이데올로기나 이상과 상관없이, 지리적인 위치에 따른 국가와 세력 간 힘의 관계와 구도를 논할 뿐이다." (5쪽)
<한겨례> 국제부 정의길 선임기자가 쓴 <지정학의 포로들>은 '통증'이라는 현상만 보는 것이 아닌, 그 원인, 더 나아가 우리가 앞으로 해나가야 할 과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한다. 지정학이라는 학문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지정학을 통해 남북한의 대립, 더 나아가 동아시아와 유럽, 중동 등의 패권 질서, 대외 정책 등에 대해 폭 넓게 이야기를 이끌어 냈다.
30여 년의 기자 생활 중 적지 않은 기간 동안 국제 문제에 관한 기사를 썼다고 말하는 그는, '한국의 보수와 진보 진영은 모두 이상주의자들이다'는 말을 남겼다. 북한 문제에 대해서는 100%라고 확신을 하기도 했다.
결론인즉, 이제는 냉철하게 북한을 적이나, 민족애를 느끼는 동지라는 사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생존과 국익을 위해 몸부림치는 집단으로 봐야한다고 했다. 감정이 아닌, 계산기를 두들기자는 말로 들렸다.
책은 1. 유럽의 지정학과 1차 그레이트 게임, 2. '독일 딜레마'의 지정학과 세계대전, 3. 미국과 소련, 새로운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등장, 4. 냉전, 미국과 소련의 2차 그레이트 게임, 5. 중국의 지정학과 3차 그레이트 게임으로 크게 구성하였다.
저자가 자주 사용한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용어는 영국과 러시아가 19~20세기 초 중앙아시아 내륙의 주도권을 두고 벌였던 패권 다툼을 일컫는다. 당시 중앙아시아 내륙을 탐험했던 영국 동인도부대의 정보장교 아서 코널 리가 명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책에서는 이보다 더 넓은 의미로 영국과 러시아에만 제한하지 않고 지중해의 패권 다툼, 미국과 소련의 다툼, 그리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중국과 그 주변 세력들간의 다툼으로 다루고 있었다.
책에서 보여주는 전쟁의 양상은, "국가와 세력의 공존과 다원성을 전제로 했기에, 이를 붕괴시킬 수 있는 압도적 힘은 갖는 세력이나 국가의 출현을 막는 기제"(37쪽)로 표현되었다.
종교적 통일이나 제국적 통합이 목표가 아닌 각 국가 사이의 세력 균형을 맞추어 평화를 유지하는 체제였다. 1871년 프로이센과의 보불전쟁, 훗날 1차 대전, 2차 대전 때 독일의 침략을 받는 통로가 되었던 북유럽평원은 나폴레옹이 이 지역을 통해 유럽을 석권하기도 했으며, 지정 질서를 규정하는 지리 조건 중 핵심 요인이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지리적 위치에 따라 전쟁의 각축장이 있다면, 한반도는 어떠한가. 저자는 책의 에필로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한반도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충돌하는 지점으로 변해갔다. 명과 일본의 한반도 분할협상은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타협으로 볼 수 있다. 중원의 대륙세력은 안보 완충지로서 한반도 북부가, 해양세력은 대륙으로 나가는 교두보로서 한반도 남부가 필요했다. 임진왜란을 시작으로 등장한 한반도 분할은 그 후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 등이 얽히며 수차례나 기도됐다. 결국 2차 대전 뒤 서방 해양세력 미국과 유라시아 대륙세력 소련에 의해 분할되어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458쪽)
충격적인 것은 남북의 분단이 '수차례 기도되었다'는 부분이었다. 미국과 일본으로 일컫는 해양세력과 중국과 유라시아로 일컫는 대륙 세력간의 교두보가 바로 한반도였다.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한반도는 전쟁이라는 지진의 진앙지였다.
저자는 한반도에서 나고 자란 우리의 숙명같은 과제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먼저 한반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한반도 평화의 최대 위협으로 간주되는 북 핵 개발의 배경은 무엇이냐. 지금 한반도의 현실적 위치는 완충지인가, 교두보인가. 완충지라면 열강은 세력 균형을 위해 자국의 방어를 힘쓸 것이다. 반면에 힘의 균형이 깨진다면 이곳은 바로 자세 전환하여 전쟁의 교두보 역할을 할 것이다. 저자는 한반도의 지정학은 먼저 이 분단 체제를 인정하는 현실주의에서 출발하자고 주장했다.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통일해야 한다'는 진보 진영의 민족 통일론이나, '북한은 공산주의이기 때문에 흡수 통일해야 한다'는 보수 진영의 반공통일론은 위험한 이상주의다. 서독이 동독을 흡수 통일한 독일 통일은 한반도의 모델이 될 수 없다. 독일의 통일은 기본적으로 유럽 최강대국인 자신들의 지정적 위상을 회복한 것뿐이다. 독일은 통일을 거부하는 주변 열강을 저지할 수 있었다. 현재 한국이 북한을 국력에서 압도한다고 해서, 그것이 평화 통일의 동력이 된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보수 진영 쪽은 북한을 압박하고 고립시키면 '통일은 느닷없이 찾아온다'고 주장하나, 그렇게 찾아오는 것은 통일이라기보다는 전쟁이나 참화가 될 가능성이 더 크다. 한국은 결코 독일이 아니다."(482쪽)
숨 가쁘게 책을 읽었다. '이게 나라냐'는 구호에서 '나라다운 나라'는 슬로건까지 전 국민적 공분 속에서 탄생한 시기가 바로 요즘이다. 어쩌면 대한민국이라는 내부 질서를 수립하는 이 과정에서 이 책은 시대적 문맥에 충실한 것 같기도 했다. '헌법'이라는 개헌 국면에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고민을 내포하지 않는다면 이 또한 어불성설 아니겠는가.
강대국의 이해득실 속에서 분단된 한반도, 그리고 그 속에서 삶을 꿈꾸는 사람들. 삶의 질을 논하기 위해서, '안보 불안'이라는 질병을 극복하기 위해서, 종아리 근육 탄탄하게 땅에 밀착하여 버티는 것, 이것이 지금 우리의 역할이지 않을까 싶다.
이런 생각 때문에 <지정학의 포로들>은 기성 세대들 보다는 20, 30대 젊은 청년들이 읽으면 좋을 것 같다. 더 어린 청소년들도 읽으면 좋겠지만, 세계사적 이해 없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분명한 건, 기존의 담론에서 벗어나 사실상 섬 국가와 진배없는 대한민국의 아픔을 벗어 던질 미래 비전을 구축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미국 지정학자 니컬러스 스파이크먼은, '열강 사이의 세력투쟁이 기본적인 현실인 국제관계의 역동적 세계에서, 작은 완충 국가들의 궁극적 운명은 기껏해야 위태로울 뿐이다'고 말했다. 한반도에서 현재 분단 체제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데 실패하면, 한반도는 미국과 중국이 대결하는 세 번째 그레이트 게임의 핫스팟이 될 것이다." (4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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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학의 포로들 - 세계의 패권 싸움은 지정학의 문제다
정의길 지음, 한겨레출판(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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