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28

진정 한국인이 되고자 했던 서양 선교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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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쭌셴의 《조선책략》에는 저자이자 담화자인 황쭌셴이 조선에게 미국과의 수교를 권장하면서, 미국의 종교인 기독교의 문제도 함께 언급하고 있다. 당시 조선은 청의 사례를 보고 외래 종교의 유입에 대해 많이 경계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종교와 포교에 관한 문제는 당시 조선 정부에 게 있어 초미의 관심사였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황쭌쏀은 종교 포교 문제에 대해 아래와 같이 답변하였다.
"미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기독교라는 것은 천주교와 근본은 같으나 교파가 각각 다른 것으로 유교(吾教)의 주자와 육상산과도 같습니다. 이제껏 기독교의 가르침은 정치에 간여하지 않았고 그 사람들 또한 대다수가 순박한 사람들입니다. 중국이 통상을 한 이후, 선교사를 살해한 사건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기독교인은 하나도 없었으니 또한 그것이 (기독교가) 우환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그 종교의 뜻도 사람을 선량하게 하는 것을 권장하고 있으니, 살피건대 우리 중국 땅의 周公과 孔子의 道만이 어찌 무조건 좋다고만 할 수 있겠습니까? 조선은 유교를 따르고 배워 점차 갈고 닦아 이미 (배움이) 깊었으니 설사 불초한 무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절대 “喬木에서 내려와 幽谷으로 들어가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즉 그 전도를 허락하더라도 어찌 해롭겠습니까? 이 또한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至於美國所行, 乃耶蘇教, 與天主教根源雖同, 黨派各異, 猶吾教之有朱、陸也. 耶蘇宗旨, 向不幹預政事, 其人亦多純良. 中國自通商以來, 戕殺教士之案, 層見疊出, 無一耶蘇教者, 亦可證其不為患也. 彼教之意, 亦在勸人為善, 顧吾中土周、孔之道, 勝之何啻萬萬? 朝鮮服習吾教, 漸摩(靡)既深, 即有不肖之徒從之, 萬不至下喬木而入幽谷. 然則, 聽令其傳教, 亦復何害? 斯又不必疑也)
이렇게 보면 당시 19세기의 기독교는 당금 한국의 기독교와는 상반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오히려 그때는 프랑스 등 유럽국가의 천주교와 그 포교가 문제가 되었던 것인데, 반대로 기독교는 순박(?)하고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종교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구한말부터 식민시기에 학교와 병원을 세워 한국 사회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던 것은 기독교 선교사들이었다. 연희전문, 세브란스 병원 등 모두 기독교 선교사들의 노력이 담겨 있는 곳들이며 그 정신은 지금 후세에 까지 고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21세기 모 선교회와 같은 단체는 종교가 할 수 있는 사회의 공헌과 신앙의 원칙을 준수하는 목적보다는 자기 교세의 확장과 추종적인 수익 사업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이번 집단감염에서도 이들은 사회의 안전과 공통 규칙을 무시하고 편법과 불법으로 자신들의 영역과 이익만을 구축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을 두고 여러가지 말을 할 수 있겠지만, 종교가 중 하나를 불안한 개인과 사회에 대한 정신적인 버팀목 역할을 해야한다면, 이러한 자칭 종교단체들은 사회의 그림자 속에서 기생하며, 오히려 개인과 사회의 불안으로 부터 양식을 얻고 몸집을 불리는 반사회적 집단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예전 선종하신 모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다. "교회는 사회와 떨어져 있지만 사회를 위해 존재한다". 지금 이 시국에 신부님의 말과 뜻은 신앙을 따르는 모든 이들이 곱씹어봐야할 말일 것이다. 이번 시국을 통해 종교와 신앙이 우리 사회를 어떻게 떠받치고 있는지, 또 어떻게 그 존재가치를 찾아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下喬木而入幽谷】 詩經·小雅과 孟子·滕文公 上의 구절을 인용한 것으로, “깊은 골짜기에서 나와 높은 나무로 옮긴 자는 듣고 높은 나무를 내려와서 깊은 골짜기에 들어간 자는 듣지 못한다(吾聞出於幽谷遷於喬木者未聞下喬木而入出者)는 구절. 즉, 조선이 유교의 도를 어기고 서양의 교로 들어가지는 않는다라는 것을 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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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Bong-J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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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한국인이 되고자 했던 서양 선교사들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2013년 두 번째 특별전 개최
13.05.08 18:58l최종 업데이트 20.02.09 12:09l
조종안(chongani)


▲ 기독교 선교사 특별전이 열리는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전시장 입구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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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이 땅에 들어왔던 선교사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선물은 무엇이었는지, 자료사진과 유물, 영상 등을 통해 알아볼 수 있는 전시회(6월 6일~8월 10일)가 '파란 눈의 선교사가 전해준 선물'이란 주제로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3층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장에는 전국의 박물관 및 교회에서 협조받은 200여 점의 자료가 전시되고 있다. 선교사의 계승자들 공간에서는 우리 민족이 고통받던 시절 선교사들이 우리에게 준 진정한 선물로 그들의 뜻을 이어받아 무료진료와 봉사의 삶을 살다간 이영춘, 장기려 박사 등의 삶을 영상과 자료를 통해 접할 수 있다.




▲ 명성황후가 언더우드 부인에게 하사한 각종 보석이 박힌 손거울(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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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실에 들어서면 레이놀즈 선교사가 한글을 배우기 위해 필기한 메모, E, D 아펜젤러가 사용했던 타자기와 진공관 라디오, 스코필드 선교사가 한국을 떠날 때 세브란스 의전 학생들이 선물한 은잔, 구세군 선교사가 3·1 운동 때 사용했던 태극기, 명성황후가 언더우드 부인에게 하사한 손거울 등이 눈길을 끈다.



조선말 격동기에 들어온 서양 선교사들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최초 서양식 의료기관 광혜원(제중원)에서 물리와 철학을 가르쳤던 언더우드 목사는 1891년 10월 7년 동안의 선교사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테네시 주 네쉬빌 대학에서 조선에서의 선교활동을 내용으로 강연하였다. 이 자리에 참석한 테이트와 레이놀즈는 감명을 받고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 조선 파송을 신청한다.




▲ 데이비스(좌)와 전킨(우). 1958년 군산 영명고교 학생들이 데이비스 삶을 기리는 기념비를 구암동에 세웠으나 땅이 팔리면서 전주 외국인 묘지로 옮겨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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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계기로 최초로 호남지역 땅을 밟게 되는 7인의 선교사(레이놀즈, 펫시 볼링, 전킨, 매리 레이번, 테이트, 매티, 리니 데이비스)가 꾸려진다. 이들 중 펫시 볼링은 레이놀즈 부인, 매리 레이번은 전킨의 부인, 리니 데이비스는 해리슨 부인, 매티는 테이트의 누이동생으로 1892년 서울에 도착, 답사여행을 통해 선교 후보지를 물색한다.

1893년 충청도 남부지방과 제주도를 포함한 전라도를 선교구역으로 할당받은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하루빨리 전라도 땅으로 내려가 선교하기를 바랐으나 뜻하지 않은 동학농민혁명(1894), 청일전쟁(1894~1895), 명성황후시해사건(1895) 단발령(1895) 등으로 매우 어수선한 시기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남장로교는 7인의 선발대를 보낸 후 계속해서 선교사를 모집하여 조선으로 파송하였다. 7인의 선발대에는 의료선교사가 포함되지 않아 의료 선교사 파송을 적극 권하였고, 이에 부응하여 1894년 3월 드루(Drew)를 시작으로 의료선교사가 해마다 도착하여 남쪽에 선교부를 정하고 활동할 수 있는 준비를 하게 된다.

선교사들이 답사여행 중 경험했던 일들




▲ 신도로 추정되는 조선 아낙과 포즈를 취한 쉐핑(서서평)(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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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3월 27일 서울을 출발, 29일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30일 군산에 도착한 레이놀즈와 드루 일행은 현감이 있는 임피에서 숙박하게 된다. 주막에서 하룻밤을 지낸 이들은 훗날 보고서에서 불편한 위생시설, 냄새가 고약한 음식 등으로 괴로운 밤을 보냈는데, 끊임없이 공격하는 빈대와 벼룩 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웠다고 회상하고 있다.



선교사들은 선교에 앞서 예정지를 순회하는 선교여행(답사여행)을 일 년에 두 차례(봄·가을) 떠났다. 목적은 구역을 답사하고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 남자는 주로 조랑말과 자전거 등을, 여자들은 가마를 이용했는데, 논두렁이나 진흙 길에 미끄러져 빠지기도 하고, 놀란 소(牛)와 부딪치기도 했으며, 동학군들과 함께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 구한말 조선 노점상들. 참빗과 얼레빗 등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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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니 데이비스 선교사는 선교보고서에 시장이 열리는 곳 사람들은 상점 밖까지 나와 목을 축이고 쉬어가라고 하거나 담배 한 모금 피우고 갈 것을 권유하는 등 특별히 친절했으며, 이상한 여자들을 보려는 사람들이 방문에 구멍을 내는 바람에 종이로 막는 일을 계속했다고 적고 있다. 아래는 조선간호부 회를 국제 간호협회에 가입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쉐핑의 회고.

"나는 서양 선교사라기보다 진정한 한국인이 되고자 했다. 고무신에 한복을 즐겨 입었고, 된장국을 좋아했다. 옥양목 저고리에 검은 통치마를 입었고, 맞는 신발이 없어 남자용 검정 고무신을 신었다." -엘리자베스 쉐핑(서서평)

선교사들이 기뻤을 때는 발음과 이해가 어렵게 느껴졌던 조선어를 조금씩 익히면서, 시골 장터와 사랑방, 아니면 길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일 때였다고 한다. 마실 '물'을, '말'을 가져오라 발음하여 머슴들이 마구간의 말(horse)을 끌고 와 깜짝 놀랐다는 에피소드도 전한다.

조선 근대화에 앞장섰던 선교사들, 결국 추방당해


▲ 서양 선교사가 설립한 군산 영명학교 건물. 지금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 군산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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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기독교 국가들이 유교 국가인 조선에 기독교를 전파할 목적으로 파견한 선교사들은 목사이면서 사무 처리도 맡아서 했다. 그중에는 정식으로 성직자 자격을 받지 않은 전문인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는데 직업은 의사, 교육자, 기술자 등이었고 독신 여성도 포함돼 있었다.

특히 교육, 문화, 의료, 체육 등 다방면에 근대화 추진에 원동력이 됐던 구한말 선교사들은 단순히 종교적 차원을 넘어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민족의 자주독립과 계몽의 방법으로 독립협회운동, 기독교 청년운동, 대한제국의 황실옹호에 앞장서기도 했다.

선교사들이 설립한 학교와 교회는 일제에 항거하는 민족운동의 중심지가 되어갔고, 기독교인들의 민족의식은 때로 무장투쟁으로 전개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인물로 안중근, 이동휘 등. 일제 헌병대자료에 의하면 1919년 3·1 운동 때 피검자 1만 9523명 중 3426명이 기독교인으로, 교인의 참여가 높은 만큼 일제의 탄압 또한 극심했다.

조선 근대화에 앞장섰던 선교사들은 3·1 운동 당시 일제의 야만적 탄압을 서방 세계에 알리는 첨병 역할도 하였다. 일제 통치 말기에 접어들면서 교회에 대한 탄압은 더욱 극심해졌고,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서양 선교사들은 더 버티지 못하고 본국으로 추방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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