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18

1602 아! 내 고향, 우리 고향 (분단 북녘조국 방문기) Seungbae Joseph Pa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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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 고향, 우리 고향 (분단 북녘조국 방문기)
Seungbae Joseph Paik
·
Last edited 10 February 2016

아! 내 고향, 우리 고향 (분단 북녘조국 방문기)

1. 아! 내 고향, 우리 고향


책머리에

세계 제2차 대전 후 종전의 희생양으로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온 지 근 반세기,


우리 민족이 살아온 광야 반세기, 그것도 억울한 데, 그동안 얼마나 많은 우리의 형제들, 자매들이, 다름아닌 다른 ‘우리’들에 의하여 조롱을 당하고, 학대를 당하고, 고문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는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형님, 누님이 그리움과 한을 품고 눈을 감았는가!


오늘도 배달 자손 그 누군가가 그리움과 한을 품은 채 눈을 감는다. 아프다. 괴롭다.


동서냉전의 산물인 이데올로기가 세계 곳곳에 무너지는데, 우리 삼천리 반도엔 언제나 새 봄이 오려는가!


바람은 계속 불어오니 그 날은, 통일의 그날은 반드시 오겠지.


그러나 우리의 아버지대처럼 우린 운명으로 살 수는 없다. 우린 ‘역사’로 살아야 한다. 기다리거나, 방관하거나, 무시하고 살 수만은 없다. 손짓하며, 발짓하며 눈짓이라도 하며 눈뜬자로 듣는자로 살아야 한다.


여기 이 글이 통일을 여한 한 작은 열쇠가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7천만 겨레가 다시 ‘아픔’의 소리를 듣고, 다시 ‘같음’의 소리를 듣고, 다시 민족적 ‘소명’의 소리를 듣고 자그마하나마 ‘실눈’이라도 뜨는 기회, 자극제가 되었으면 좋겠다.


떳떳한 배달민족의 21세기를 여는 작은 씨앗이 되었으면 좋겠다. 스스로 두 발을 딛고 일어서는 배달민족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당 하나의 지구를 향해 불을 밝히는 등불민족이 되었으면 좋겠다.


시성 타골이 노래한 것처럼.


1993년 8월 29알


발디산 기슭, 클레어몬트에서


지은이


* 주 1: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91년 1월이었을 것이다. 1990년 10월 고향을 떠난지 근 40년만에 북녘 조국을 방문하고 크리스천 헤랄드지에 주1회 글을 쓰기 시작하여 책자로 발행한 것은 1993년 9월 25일 초판을 조서출판 예루살렘에서 발행하였다. 머리말에서의 바램 21세기가 오기 전에 통일의 소원은 이미 지나갔고, 늦어도 21세기 초에는 민족의 소원은 통일이 되기를 소원하며. 이 방문기를 페북에 묶어 올리기로 작정하고 2016년 2월 9에 머리말을 다시 복사한다. 이 책 발행을 도와준 도서출판 예루살렘 발행인 윤희구 권사는 나의 첫 목회지 부천군 포리감리교회의 고등학생이었다. 그런데 그도 벌써 하늘나라 시민으로 떠난지 수년이다. 10살이던 내가 74세를 넘어섰고 당숙, 당숙모로, 8촌 형님을 비롯한 많은 이산가족, 통일운동을 하던 인사들도 이 세상을 떠났다. 조국 조선반도는 아직도 전쟁중이다. 그날을 바라보며 다시 이 글을 올린다.


2016년 2월 8일 발디산 기슭에서 백승배




아! 내고향, 우리고향(3) 출발을 앞두고 생긴 일들


1990년, 나는 설레이는 마음으로 봄을 맞았다. 계절 탓이 아니었다. 부활절이 자나면 근 40년 전에 떠나온 북녘의 내 고향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방문 초청장도 이미 받았고 교회에도 미리 말해둔 터였다. 그런데 사정이 급변했다. 초청장을 받고 국경에 가서 비자를 받아 입북할 수 있던 것이, 세계정세의 변화 때문인가, 이곳 미주에서 미리 비자를 받는 것을 확인해야만 북한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동구의 변화로 인해 정책이 바뀐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일었다. 설레이던 봄은 실망의 봄으로 바뀌고, 나는 이제나 저제나 손꼽아 비자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홍동근 목사께서 8월 범민족 대회 참관인으로 갈 수 있다는 연락이 왔다. 그러나 교우인 고 이은택 목사님의 따님인 김성희 권사님의 결혼이 그 기간 중에 약속되어 있었으므로, 나는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기회가 왔다. 10월에 있는 범민족 음악회 참관인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8월 초부터 말이 오가던 중 드디어 참관단 모집을 담당하고 있던 황영애 자매에게서 연락이 왔다. 8월 31일 여행사에 가서 초청장과 신청서 등을 받으라는 것이다. 때는 남북 총리회담을 앞둔 시기였다.


그런데 사건이 또 터졌다. 9월 6일 김계용 목사가 북한의 가족방문 중 타계하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심장마비설, 타살설이 범벅이 되어 나성교계와 교포 사회가 들끓었다.


한편 총리회담에서 남은 선 교류, 후 정치문제 타결을, 북은 선 정치문제 타결, 후 교류를 주장하며 서로 팽팽히 맞섰다. 대화 자체에 대한 의의 외에 다른 긍정적인 평가는 나오기 어려운 회담이었다. 너무 자신들의 의견만 고집하는 마음 가지고 장벽을 헐 수는 없는 일인데, 통일을 위해서는 ‘양보’ 정신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이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외부의 압력이 아닌 자체의 깨달음이 있어야 하겠거늘 우리는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것인가! 안타까웠다. 어쨌거나 작은 물꼬는 터졌다는 생각이 나를 위로했다. 이러는 와중에, 9월 7일 동부의 처남댁을 방문했던 어머니가 돌아오셨다.


“이제는 비자만 나오면 되는데...,”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10월에 희망적인 아야기를 황영애 씨가 전해 왔다. 곧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9월 11일 출발이 확정되었고, 12일 아내와 나는 비자를 신청했다.


27일에는 고 김계용 목사 추도식이 있었다. 김계용 목사 사건은 우리 일행에게도 파문을 일으켰었다. 함께 방문하기로 했던 분중 몇 분이 여행을 취소한 것이다. 민족간의 불행, 불신이 다시 한번 확인된 사건이었다.


10월 3일 개천절, 독일이 통일되었다는 소식이 세계를 떠들쏙하게 했다. 너무나 부러운 사건이었다. 그날의 일기를 여기 옮긴다.


개천절/우리의 개천절이/독일 통일의 날이다.


빼앗긴 개천절/아니 빠앗긴 것이 아니지/우리들이 못나/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있는 거지./저들의 통일은 우리의 개천절을 뺏어 은 것이 결코 아니지./저들의 것을 찾은 것이지./우리는 아직도 눈을 흘기고 있는데,/저들은 손에 손을 잡았고/가슴과 가슴이 통해/저렇듯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거지./저렇듯 환희의 송가를 부르는 거지.


아! 교회의 종이 울린다./분단을 마감하고/통일을 축하하는 종이 울린다./


빛이 오른다./어둠을 마감하고/민족의 빛을 가져오는 빛이 오른다.


환희의 송가가 울린다./슬픔을 마감하고증오를 마감하고/힘찬 새날을 축하하는/환희의 송가가 울린다.


동독이 죽어/서독에 합류된들/무엇이 어떠냐!/북음은 부활의 전주곡인데!


아! 단군의 자손들아,/배달의 민족아,/눈을 떠라/주먹을 불끈 쥐어라./울어라그리고/함께 웃는 그날을 가져오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것/너희들이 눈뜨지 못하면/실로암 못에 가서 씻지 않으면


하느님이신들 어떻게 도와주라!/백의민족아!/우리 주님이 진흙으로 어루만져 주신다./이제는 실로암으로 가야할 때다./배달의 겨레야! /실로암으로 가자./실로암으로 가자.


북경에서 남과 북이/어깨동무하고 노래부르듯/통일을 소원하는 노래를 불러라


“우리의 소원은 통일/꿈에도 소원은 통일/이 목숨 바쳐서 통일/통일이여 오라.


이 겨레 살리는 통일/이 나라 살리는 통일/통일이여 어서 오라/통일이여 오라.“


주여 나로 하여금/민족을 깨우는 밀알 되게 하소서.


이렇게 일기를 쓰고서도 나의 마음은 슬프고 답답했다. 더 쏟아져 나와야 했다. 그래서 나는 펜을 들었다. 그것이 10월 3일, 빼앗긴 개철절“ 이란 시이다.


이제 고향방문기를 적으며 함께 글을 나누는 것도 의의가 있겠다 싶어 여기 옮기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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