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30

'한국은 스위스 같은 중립국이 되었어야' - 미주중앙일보

'한국은 스위스 같은 중립국이 되었어야' - 미주중앙일보

"한국은 스위스 같은 중립국이 되었어야"
[LA중앙일보] 발행 2017/01/05 미주판 6면 입력 2017/01/04 23:41

망명가들: 미주 한인 역사의 개척자, 분단 조국의 양심 최봉윤(상)
육성으로 듣는 미주 한인 초기 이민사: 외로운 여정(21)




미국으로 오는 배안에서 찍은 기념사진. 앞줄 오른쪽이 최봉윤.




1938년 최봉윤의 여권사진.
주영환 SF 총영사가
'공산주의자'라 고발
이민국과 긴 싸움 벌여

학자의 꿈을 갖고 있던 최봉윤 박사는 조만식, 한경직 목사, 안창호 등을 만났고 그들의 발자취를 따랐다.

"그들은 나의 영웅이었고 그들의 애국심과 기독교 신앙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 이후 최봉윤 박사는 버클리 대학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쳤고 한국어 과정도 신설했다. 이와 동시에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던 당시, 미국 연방정부의 부탁에 따라 최 박사는 전쟁정보국 산하에서 미군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쳤으며, FBI를 위해 일본 문서를 번역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해방을 맞아 한국으로 돌아온 후 최 박사는 미 군정의 정책 고문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또한 서울대학교에 정치학과를 신설했으며, 군정의 언론 홍보 담당 부소장으로서 미국식 민주주의를 한국 정치인들에게 인식 시키는 역할도 했다.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직전 최 박사는 "분단된 조국의 현실에 깊이 실망"하며 한국을 떠났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학업에만 전념했다. 그러나 이승만 독재 정권에 적극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에, 이민국과의 문제로 14년 동안 투쟁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웨인 패더슨과 일레인 김과 같은 학자들은 최봉윤 박사의 저서인 '미국의 한인들'에 대해 "미주 한인 역사를 새로 정립하고 후세 학자들이 본받아야 할 저서"라고 극찬하고 있다.

1989년 11월 오전 버클리의 아늑한 집에서 선배이자 동료인 최 박사와 인터뷰를 했다.

당시 75세였지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여전히 왕성한 열정을 보였다. 무려 여섯 시간동안 진행된 인터뷰에서 최 박사는 사람의 이름과 장소, 그리고 사건들을 또렷하게 기억해냈다. 최 박사의 아내 최영자 여사가 차를 끓여 나왔을 때 잠시 쉬었을 뿐 인터뷰는 계속 진행됐다. 인터뷰에서 처음으로 최 박사는 미 이민국에서 자신을 추방하려는 길고 긴 싸움에 대해 입을 열었다. 이 이야기는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았으나 이 책에서 처음으로 밝힌다. 최 박사와의 인터뷰 중 일부를 공개한다. 최 박사는 2005년에 90세로 생을 마감했다.

▶FBI를 위해 번역을 했고, 미 군정 고문으로 한국에서 활동을 했다. 1947년 미국으로 돌아온 후 무슨 일이 있었나?

이 이야기는 처음으로 밝힌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 나는 이승만 독재 정권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시애틀 퍼시픽 대학에서 강의할 때 이승만 정권을 비판했고, 이승만 독재 정권을 옹호하는 미국 정부의 정책에도 비판적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파들을 다수 장관으로 임명했다. 퀘이커 같은 종교 단체에서 나를 초빙해 한국전쟁에 대해 강연을 요청했다. 한국전쟁은 김일성이 시작했으며 정당성이 없는 전쟁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문제 해결 방식이었다. 나는 미국이 38선을 넘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만약 미국이 38선을 넘으면 중국이 전쟁에 참가할 것이고 그러면 또 다른 세계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이야기했고, 학생들은 한국전쟁에 대한 토론을 했다.

▶미국에서 그 당시 매우 하기 어렵고 미국 정세에 적합하지 않은 주장 아니었나.

그랬다. 그러나 누군가 해야 했고, 나는 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설적인 해결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38선을 넘지 말고, 그 곳에서 평화적 해결을 위한 만남을 가지면서, 한국은 스위스와 같은 중립국 이 되었어야 했다. 한국이 강대국 편에 선다면 동북아시아의 평화는 있을 수 없다. 분단된 한국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필요한 선택이라는 것이 나의 해결 책이었다. 주영환 샌프란시스코 총영사는 FBI에 내가 공산주의자라고 고발했다. 이민국에서 조사를 받을 때 알게 되었다.

▶조사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1950년 어느 저녁 제복을 입고 총으로 무장한 군인 한 명과 사복을 입은 또 한 사람이 시애틀에 있는 집으로 찾아왔다. 그 당시 나는 첫 번째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다. 일본에서 당시 학생이었던 아내와 만났고 1937년에 일본에서 결혼했다. 아내는 1940년 내가 근무하던 학교에 학생 신분으로 미국에 와서 함 께 살게 됐다. FBI가 집으로 찾아왔을 때 아내는 함께 집에 있었다.

이민국 직원이 물어볼 말이 있다고 해서 이민국에 갔다. 그곳에서 작은 방 의자에 앉으라고 해서 15분 정도 기다리면서 내가 왜 여기에 왔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비라는 사람이 들어와서 "당신이 최봉윤 교수인가"라고 물은 후, "당신이 공산주의자라는 걸, 우리는 다 알고 있다. 당신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갖고 있다. 미국에서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는 당신과 같은 사람들 은 한국전쟁에 반대하고 있다"라고 덧붙이며 욕설을 마구 퍼부었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또 다른 한 사람이 심문을 했다. 이름, 주소, 어디서 공부를 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직하게 대답했다. 심문은 오후 6시 30분부터 새벽 1 시까지 계속 진행됐다.

그들은 공산주의자인가라는 질문을 여러 번 했다. 가비는 아내와 아이들이 기다리는 우리집 28번가로 데려다주었다. 아내는 매우 걱정했다. 아내와 얘기하고 있는데, 이민국 직원이 다시 가자고 했다. 이민국으로 데리고 가서, 심문은 새벽 5시까지 계속됐다. 정신적인 고문이었고 다 기억할 수 없다. 그 후 아내를 이민국에 데려와서 다시 심문이 시작됐다. 당시 우리는 미국 시민이 아니었고, 임시 비자는 이미 만료가 된 상황이었다.

▶미국 정부를 위해 일할 때 미국 시민권을 신청하지 않았나.

민족주의자 조만식 선생님으로부터 배운게 있다. 나는 한국에서 살고 한국인으로 살다가 죽겠다. 조만식 선생님은 나에게 무슨 일이 있더라고 한국인으로 살라고 당부했다.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았다. 아내는 미국 시민권자이다. 이러한 나의 신념 때문에 미국 시민권을 신청하지 않았다. 당시 주영환 영사는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 특히 대한인국민회 사람들을 모두 공산주의자로 몰았다. 나의 추방에 대한 법정이 열렸는데, 시애틀 타임스와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 나의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를 레이먼 여사가 읽었다. 나는 레이먼 여사를 미국의 어머니라고 부른다. 여사의 남편은 영문학 교수였는데, 내가 버클리에서 그분들의 아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그 아들은 나중에 UC 샌타바버러 동아시아학과 교수가 되었다. 레이먼 여사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도왔는지 모른다. 그중 한 사람이 유명한 피아니스트이며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 음대 교수인 프랜시스 황이다. 그녀는 프랜시스 황이 네살 때부터 금전적인 지원을 했다. 내가 공산주의자로 추방당할 위기에 처했다는 기사를 읽은 레이먼 여사는 나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가 도와줄 방법이 있을까요?"

나는 그녀에게 답장을 했다. "공산주의자라는 누명을 쓰게 되어 시애틀 퍼시픽 대학교에서 사임했습니다. 그 대학에 누가 될까 봐 그랬죠. 물론 대학은 나를 옹호했죠. 내가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다고요. 그러나 이민국은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승만 정권의 말만 듣고 아무 증거도 없이 나를 공산주의자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 모임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그들 중 공산주의자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해리에타 레이먼 여사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다. 그녀는 자비로 집을 렌트해서 우리 가족이 살 수 있게 도와줬다. 일 년에 3000 달러를 주면서 다시 학교에 가서 공부에 전념하라고 했다. 그녀는 10년 전 사라토가에서 돌아가셨다. 그녀가 변호사를 고용하여 나의 추방 법정에서 변론하게 했다. 내가 5일 동안 이민국에서 고문을 당하는 동안 매일 나를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그녀는 정의를 위해 부조리와 싸운 것이다.

이경원 저·장태한 역
'외로운 여정'에서 전재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제공
정리=장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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