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동원 씨 외증조부 친일 논란
1. 조상이 친일파였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 본인이 선택한 것도 아닌데 친일파 집안에서 태어난 것을 본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나?
- 단 조심해서 살아야 한다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
- 친일파였다 하더라도 친일행위로 인해 축적된 부와 지위를 물려받았나?
- 친일행적을 옹호하거나 감추었나?
- 자신이나 후손이 아버지나 할아버지 등 조상의 친일행적에 대해 사과해야 하나?
영화 뮤직박스: 여기서는 사과가 아니라 고발하는 것이 맞다:
왜? 딸로서가 아니라 변호사로서 옹호했으니까
- 3자가 어떤 개인에게 조상의 친일에 대해 사과하라고 요구할 수 있나?
2. 이종만 선생이 친일행위를 하였나?
- 친일인명사전에 기재된 것은 다 사실
- 이밖에도 발언이나 기고, 좌담 참석 여러 건 나올 수 있음
3. 이종만 선생은 친일파인가?
- 친일행위를 한 것을 부인하거나 옹호하려 해서는 안됨: 특히 유가족
- 종합적 판단 필요
- 일시적 기부 아님: 거창하게 얘기하면 1920년대 이래 고참 사회주의자 내지는 노동운동가들의 꿈을 실험해 본 것: 소작농 생활개선: 이상농촌 창설
- 향리에서의 교육운동이나 서울 상경 이후 고학당 운동
- 방기중:
사업체의 경제자립운동이 1920. 30년대 비타협적 민중적 성향의 사회 · 교육운동이나 농민적 입장의 경제자립운동을 주도한 경험이 있는 進步的 民族主義者와 일부 社會主義者가 결집하여 전개한 목적의식적 실천활동이었다는 점: 곧 대동사업체의 경제자립운동은 일제하 民族主義經濟思想、, 특히 ‘농민적 입장의 민족주의 경제자립론’ 가운데 가장 진보적인 맥을 잇고 있었다.
***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별도로 준비
4. 정해룡
– 정해진 형제와의 관계: 정해진 수기의 의미
- 정해룡 선생 전기 작업 중 동생 정해진의 수기 입수
- 정해진은 경성제대 출신으로 동경제대 대학원 철학과에 유학한 당시 최고 인텔리
- 수기에 의하면 유학 중 1941년 10월 경 동경에서 이종만 선생을 만난 것으로 되어 있음
- 1941년
10월은
<광업조선>과 <농업조선>이 폐간된 직후
- 정해진 수기에 나오는 대동인쇄 내부 상황
- 대동콘체른이 왜 갑자기 무너지게 됐는지는 방기중 논문이나 이준열 선생 전기 등에서도 설명이 없는 부분
- 정해진 수기 역시 제대로 설명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내부 사정을 일부 짐작케 함: 중역진의 배신과 친일화
- 호텔비
5천원을 정해진이 고향의 형님으로부터 받아 해결해 드렸다는 내용: 이 때 벌써 이렇게 어려워지셨나?
- 젊은 청년들과 의기투합하여 무언가 항일운동을 하려 했던 것
- 대동인쇄 상황이 여의치 않아 고향 울산의 호계광산을 소개
- 강동원씨 외조부 이영조 선생이 광권의 80퍼센트 보유: 나머지 20퍼센트를 일본인이 보유: 정해룡이 2만원에 매입하였으나 명의는 이영조 앞으로: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상당한 신뢰관계
- 왜 철광산이었을까?
- 안타깝게 사고 발생하고 철광석 판매가 저조한데다 운영자금 압박으로 손을 떼게 됨
- 그 직후 광산이 20만원에 팔려 정해진이 이영조 선생 찾아가 정해룡의 투자금 4만원 받아갔다 함
* 정해진 월북의 의미
* 이종만 선생 월북의 의미 //
- 이종만과 김일성의 특별관계: 허헌을 통한 것으로 추측
- 일제 패망 직전 항일 지식인이나 민중들의 동향: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