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31
대한민국 해병대 - 한국전, 월남전, 대간첩작전 : 네이버 블로그
마침내 귀국, 전역, 귀향 그리고 월남전 참전.. : 네이버블로그
해병206기 김영기 42개의 글
마침내 귀국, 전역, 귀향 그리고 월남전 참전 정리와 소감 |
해병206기 김영기/해병대명 글
2010.
https://blog.naver.com/ojh7071/30090
귀국자 해병들과 육군병력을 실은 서민호는 베트남 중부의 다낭항을 떠난지 일주일이 된 1971년 10월 4일 주위가 아직 캄캄한 새벽에 마침내 부산항 외곽 면 바다에 도착하였다.
배를 타고 한국으로 오면서 하루 하루를 손꼽이 계산하며 지내다 보니 이 배가 언제쯤에 한국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귀국사병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드디어 내일 새벽이면 부산향에 입항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를 비롯 해서 아마도 모두가 흥분되는 밤을 맞이하여 오지않는 잠을 청하며 모두가 취침에 들어갔으리라
누가 나를 깨웠는지 모른다
나는 한장 점이 든 상태에서 나도 모르게 잠을 깨고 눈을 떴다 한번 잠이 들면 야간 경계근무를 위해 누가 나를 깨우지 않는 한 아침에 거상할 때 까지 한번도 안깨고 잠을 자던 내가 어떻게 나도 모르게 잠을 깨고 눈을 뜨게 되었는지 모른다
선실침대에 누워서 희미한 조명 아래 시계를 보니 지금 기억에 대충 새벽 4시 정도... 그런데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저 가슴 밑에서 부터 무언가가 벅차오르기 시작한다 눈만 떠진 것이 아니라 의식이 또렷이 깨지 기 시작했고 무엇 때문인지 모르나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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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를 깨웠는지 모른다 야간 근무 외에는 자다가 일어나 본적이 없던 내가
귀국일 새벽에 나도 모르게 잠을 깨 일어났다)
동료해병들이 곤히 잠든 그 시간에 나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자던 침대에서 일어나 군복을 입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나 선실 밖에 나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선실 밖으로 나가기로 했는데 때는 이미 10월의 한국날씨이고 더욱이 새벽이라 바다공기가 대단히 자므로 야전점퍼(이것을 우리는 필드 자켓-Field jacket - 이라 불렀다)를 입고 군화를 신은 뒤 선심문을 열고 상갑판으로 나갔다 선심 밖은 예상대로
서만호 상갑판에 나와 저 멀리 육지 쪽을 보니 반짝이는 우수한 물빛이 눈에 들어왔다.
부산항이다
부산항과는 아직도 십여 킬로메터 정도 떨어져 있는 것 같았고 배는 그렇게 부산항과 연 거리에 정박해 있 있다 아마도 부산항에 입항할 시간에 맞추기 위해 원거리에 닿을 내리고 대기중인 것 같았다. 노란 빛으로 좁쌀만한 크기로 영롱하게 빛나는 부산항의 불빛들을 바라보며 나는 가슴에 박사 오르는 흥분을 누를 수가 없었다
아 드디어 나는 살아왔구나...... 파월될 때는 살아온다고 생각지도 못했는데 나는 결국 살아서 돌아왔구나 이것이 청년 꿈은 어니렸다....
(1971년 10월 4일 새벽 4시 경 곤히 자던 잠을 깨고 사만호 상갑판 난간에 서서 멀리서 반짝이던 부산항 불빛을 바라보던 순간)
나는 참으로 감사했고 만감이 교지했다.
파월근무 중에 성동부대 여단본부 안에 위치한 윙남어 교육대에서의 3개월 간의 교육기간도 있었고 월남어 교육대를 수료하여 여단본부 안에 위치한 민사합모실에서 14개월 간 아주 안전하고도 편안한 행정요원으로 써의 근무기간도 있었으나 오직 생각나는 것은 소총중대에서의 오늘의 생사를 알 수 없는 협난했으나 하는 의 은혜를 느끼게 해주었고 하늘을 향해 기도를 난생 처음으로 돌렸던 그 피땀으로 얼룩진 5개월 간의 소종 중대 시절의 기간이었다.
내 열생의 기간 중에 비록 단 오개월이라는 짧디 짧은 소총중대에서택 전투생활 기간이었으나 죽음이 바로 내 옆에 닥아온 순간들을 수차례 맞이하는 생활을 하며 비로소 생에 처음으로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기도 블 올렸으니 이 같은 소송중대에서의 생활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 같이 가슴 벅찬 귀국을 맞이하지 못했으리라
비록 첨단하였으나 그러한 모든 감사한 경험, 문혜의 시간들이 어둠속 에서 저 멀리 보이는 부산항의 아련한 불빛들을 보며 내 머리에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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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 4) 도산소 M-60 기사수시절 두고 성수작업을 하는 순간 우리소재를 것으로 오연한 사진을 마치고 그 이날 마진지를 소니지 이웃도 우리 소니에게 내므로써 기공 괴력의 박격포판들이 수없이 우리 내리며 우리 퍼진지를 강타하이 이제는 정말 죽는다고 각오했던 순간이 있었더라면 애리 귀국의 감격이
(이 그림과 금액 해당되는 이야기는 소운대 #03 머리 위로 우비간이 쏟아지던 우린 그리고 생은>에 성과 気合)
Π
성경 5) 또관 1970년 3회에 하여 우리 새이도 작지 않은 피를 읽었던 그 직진찰하던 격을 했던 같은 3소대의 질병인 이수 늘을 공주하리 다낭에서 날아오는 서 많은 수의 메드백 기능을 보면서 어서 나도 드디어 적의 부비준
성황 (6) 또한 3대대 115대 3소대 회기분대의 M-60경기권 사수로 주간 자신을 나기 기능 등에 무리를 먼지 발견한 적이 우리에게 기습 시작을 가디언지 아니낸 적도서 지장이 있는 국이면 어디든지 그들이 쓰 이미는 빗방지는 손이자는 총탄에 아랑곳 마니하고 구수한 데리고 성웅과 같이 달리가서 적들 시간이 없었다면 이러한 귀국의 김격이 없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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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 7) 무었보다도 이러한 소음중대에서 진성장을 하면서 곧 깨닫게 된 것이 나의 생명이 나의 것이 이니라 하늘에 계신 김조주의 손에 달렸다는 사실이었으니 개별내에 입대하기 전 1967년 3월 대지에 임의 사진 배했던 넘어교체의 <사랑의 (Appointment with love)>이라는 넘어선 가운데난 저 지음으로 대했던 성경구실인 <비 어두운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 우리 애니입은 주의 서 니와 함께 하심이라 Though I walk in the valley of shadow of death, I shal feat no evil for thou arl with me> 개 길에 기록된 다윗왕의 시를 생각이며 내일 아침에 살아서 이지 모두 이건배복작전에 나갈 때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하늘의 도우심이 없었더라면 이러한 귀국의 감격이 없었으리라
[이 그림과 글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소중중대 23 소종순대를 미니며(못다한 이이기에 실려 있음)
상황 8) 소송중대 시절 이긴적진을 나갈 때 어두운 밤에 필름대로 기능하므로 서로의 위치를 지 않도록 앞뒤 경우의 기동간격은 신시설 수준이다 싶을 같이 어두운 밤에 한글로 소리 없이 기동하다 보면 우리가 역으로 적의 아진 피부대에 노출될까 언리가 된다 민인에 우리의 기동이 책에게 먼지 노출되면 그이 필로 순식간에 진열이 드디어 유치에 강도하이 2인 1조의 참호를 조용히 구축한다 이때에도 아직 우리 의 전력이 갖추어 지지않았으므로 만일에 이러한 순간에 적에게 발견되면 이것도 그야로 순식간에 전념이다
이러한 순간들은 그말로 피를 말리는 순간들이다
드디어 2인 1조의 제조 참호들이 각각 완성되어 7-8개의 최초들이 완성되는 전자 앞에 크리모어 지뢰를 설치하고 그 지리 인해 조명탄들을 인계정신으로 연결하여 인사하고 나면 소대의 배역진지가 완성된다
이 때부터 마음이 이다 이지적에 숫자가 우리보다 배 원 많이도 우리에게 걸려들면 선행을 당 한다 죽고 사는 것이 안순간이요 내가 뒤지 적이 당일치 여부도 모르고 오늘 이건배복을 나가면 내일 신이 돌아옵치 아무도 모른다 내일이 아니라 당장 오늘의 다음 순간 나의 생사여부를 알수 없는 전설의 방 을 지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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Π
그리고 드디어 우지한 아침을 맞이한다
그누기 의 이질을 경신 아침이라 하겠는가 적어 기능이 인한 성금을 미라보고 매복진지를 한단 초위의 이점은 그곳이 비록 전진이라도 그럽다
초생의 출생들은 새벽이슬에 것이 영원한 이슬방들이 생일이 이 새벽을 노래하며 저 장금에서는 이름모를 새기 정액 노래를 반복하여 무비 새벽을 깨운다
자 아름다운 채 소리에 시는 교대주 곤이는 삼을 씀 그리고 비음시간에 그 새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지 새소리는 내가 아직도 살아서 듣는 소리인지 아니면 내가 죽어서 저세상에 와서 하는 소리냐>
배사는 비움서울간에 실과 죽음음 운동하면서 그래도 신아있어야한다고 희미하게 분리한다. 그러나 내가 죽인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수가 없다 비봉사용 간에 삶을 달린 덕심에 병시는 자기 허벅지를 상주시 신어보다
그런데 아프다. 아프다면 살아있다는 증거다. 즉시니 삶이 더 세게 자신이 보다 그러니까 디 아크니
그림디면 살아있다는 것이다 내가 나연 살아있다니! 애니는 것이었구나!
비용시용건이 내 허벅지를 교점으며 내 육신의 생명이 아직도 상어있음을 깨달으며 느렸던 기쁨과 감사의 마음을 미 바로부터 삼십구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주고 잊지 않고 있으니 이러한 선에서의 지질공 강험이 없었더라면 이러한 귀국의 감격이 없었으리라
(이 그렇게 길에 해당되는 이어가는 <소종중대 #02: 어산에 지 새 소리를 들으마>에 실려 있습
상황 9) 또한 이 소송승대 시절 중대진지에서 이건 경계근무를 성벽 수많은 별이 쏟아지는 반짝이는 밤 하늘을 잠시 바라보며 잘 어페이지는 뜻이지만 창조주의 위대하신 창조의 힘과 무한하신 능력을 조금이 라도 느끼고 평단으면서 난생처음으로 우름을 찾고 하나님께서 이 전신에서 저의 생명을 보존하며 주시 서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게 된다면 반드시 하나님을 깔렸다고 조용히 기도를 올렸으니 지 같은 파동수에서 우러나오는 그러핀 기도와 서원의 시간이 없었더라면 이러한 귀국의 감격이 없었으리라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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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부산화 보다에 도착하였으나 이는 어제 신상을 나치 새기기운데 서서 지리
단순히 그림전성시대 육신에 생명을 모른리어 십대리오는 것이면 등과 같이 로저 에고 있는 3000명의
내 자신의 생생한 보존하여 통해보는 것도 물은 결격스럽고 감사원 발표한 그것보다도 이제 그 신선시
사발 거르는 모든 경험들을 통하여 상호 되시는 분을 의지하게 하고 이제 믿겠다는 굳은 마음을 가지고 놀이오고
<이렇게 쓰이들이 앞으니 참으로 감사한 것이다 내가 이길게 있도록 이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으니 그 전에 부담을 듣고 아나님께 사건을 드리고 약속을 드렸던 미와 같이 나는 이제 반드시 하나님을 참되게 연도 최선을 다नलव...>에
나는 그날그 시에라시보 이러한 점을 다지고 또 다졌다.
머리의 거리의 귀국을 맞이하며 내보낸 민호는 드디어 대림 양가 부진한 도서대 가지고 그 날 오후에 포함 1사단을 시도해 집으로 향하게 되었으 1971년 10월 4일의 귀국일 큰 나의 전부였어 되었다
그 집으로 입었으니 보고도로마로 가장 값이 사용되어 조성된 도로가 아닌가
감성 고속도로를 달려오며 다음 자기고 지리고장이 인정으로 내가 가장 늦게 내리 그린에 도착한 후 그리고리 나가며 무사히 도착하였으나 지난 3개의 बापा 군제로 그 기간 안에 22개의 피
다른 특별질병통 같이 여러종류의 건물의 가치인 커다란 국비스는 없고 그게 거지 몇 쓰이니 감시한 타다음이었다.
무엇보다도 여리의지 기간 중 정토록 도와 주신 하늘의 크신 은혜를 오늘날까지 언제나 모이라도 정부지사 감사드리는 세미나
미쁘신 중에도 이기까지 한 인기를 아주 미리 시드니다
<삼산성리차 소감
Π
당시 박정의 대동 국의 심정지 당리고 그 출신인 그는 그가 같은 자신의 강단에 우리나라의 많은 쉬는 요구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보고 많은 고민을 한 것으 프로씨는 정남진에 국군을 수 밖에 없음을 느끼고 여러분 미음 미분에 느것은 두어 훼손이 진사의 그 가치의 눈물이었고 그는 고워하는 가운데 결단을 내리며 말 레> 저의 검단새것으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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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 정리와 소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 국군을 월남전선에 참전키로 결단하려고 했을 때 군 출신인 그로서는 그와 같은 자신의 결단이 우리나라의 많은 젊은이들의 피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많은 고민을 한 것으 로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시 고속도로 하나 제대로 건설할 수 있는 경제적인 능력이 없었던 가난한 나라의 실정 으로써는 활남전에 국군파병을 할 수 밖에 없슴을 느끼고 어려운 결단을 내렸으니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마음 아프게 느낀것은 우리 젊은이들의 전사와 그 가족의 눈물이었고 그는 고뇌하는 가운데 결단을 내리며 월 남전 전사자의 가족이 후에 내 무덤에 와서 침을 뱉는일이 있더라도 지금은 어쩔수 없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 라> 하며 결단을 내린 것으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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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九七녀 월치일
월남에서 천사
1970년
( 가슴 저미는 저 어머니의 고통... 누가 저 어머니를 위로할 수 있겠는가)
어느 미운 오리 새끼의 월남참전기 4
어느 미운 오리 새끼의 월남참전기 4
https://blog.naver.com/ojh7071/220147369744
전쟁 막판이었기 때문에 전투도 소강상태에 들어가서 지루함과 무의미함 때문에 맥이 빠져 있을 때 느닷없이 사단으로 전출 명령이 떨어졌다. 영문을 알 수 없었던 나는 연대에서 사단으로 가는 보급 트럭 적재함에 올라탔다. 월남의 1번 국도를 타고 올라가는 보급용 트럭을 타고 사단까지 4시간이나 걸리는 전출길에서야 비로소 여유 있는 눈으로 월남 땅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월남의 산악지대 모습은 우리나라 산처럼 아기자기한 모습은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고, 한마디로 징그럽게 나무와 넝쿨들이 엉겨 붙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해안선을 따라 남북을 관통하는 1번 도로변 전체가 해수욕장이라 해도 지나치지가 않을 것이다. 추수를 해서 벼를 말리기 위해서 아스팔트 도로 위에 그대로 벼를 널어놓고 그 위로 차가 달리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우리나라에 서는 볼 수 없는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월남에서 근무하는 동안 가장 이상했던 일은 우리가 베트콩과 전투를 하는 동안 동네 사람들, 특히 꼬마들이 밭둑에 엎드려서 교전하는 장면을 구경하거나 다리 밑에서 한가로이 낚시를 하고 있는 월남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전쟁을 하도 오래 하다 보니 그들에게는 전쟁이 하나의 생활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떻게 내가 사단으로 전출 명령이 나게 되었는지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사단에 도착한 날 밤 내 이름을 부르기에 밖으로 나가보니 이상하게도 사복을 입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복을 보자 순간적으로 혹시 '입대 전의 활동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한 생각이 스쳤다. 그 때까지 내가 군대에서 사복을 입은 사람을 본 것은 보안대원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사복은 부드러운 태도로 차에 타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번에는 차를 보고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도 보기 힘든 고급 세단이었기 때문이다. “월남에도 이런 차가 있나?” 싶을 정도로 매끈한 그 차는 알고 보니 사단장 공관의 차였다. 한국에서 주한 미군의 장성들이 승용차를 이용하듯이 월남에서도 한국 장성들은 승용차를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기야 옆에 튀여 있는 지프차는 에어컨도 안 될 터이니 더운 열대 지방에서 귀하신 분들이 탈 수가 없을 것이다.
직할 부대가 모두 함께 모여 있는 사단 사령부는 거의 서울의 남산 정도의 크기였다. 어리둥절한 체 승용차를 타고 어디론가는 한참 가더니 어느 큰 저택으로 들어갔다. 그 건물은 사단장 숙소였고 나를 기다리는 사람은 사단장 전속부관인 한 대위였다. 역시 사복을 입은 한 대위의 첫 질문은 "박희도 대령과 어떤 사이냐?"고 물어서 그제야 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내가 떠난 후 정희가 사돈의 팔촌이 되는 박희도 대령에게 나를 찾아보아 달라고 부탁을 했던 모양이었다. 박 대령은 자기가 육사 생도대장 시절의 제자였던 한 대위에게 나를 찾아서 사단으로 전출 시키도록 부탁을 한 것이었다. 자신도 월남전에서 대대장으로 근무했던 박 대령은 나중에 "경거망동 하지 말고 은인자중해서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기 바란다."고 손수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한 없이 고마운 일이기는 하지만 박희도 대령은 하나회 출신으로 후에 2 공수여단장으로 육군본부를 쳐들어간 12.12 반란 5적 중의 한 사람으로 나중에 육군참모총장까지 지낸 이었다. 하여간에 그렇게 되어서 백과 돈, 혹은 학벌이나 특별한 주특기가 없이 정글에서 싸우다가 죽은 5,000여명의 전우들 보기에 부끄럽게 나는 무사히 살아 돌아올 수가 있어 덕분에 나는 80 년대
에 곱빼기로 군사 독제에 대항하는 투쟁을 할 수 있었다.
사단에서의 생활은 낮에는 행정을 보고 밤에는 보초를 서는 일이었다. 남산만 한 사단 전체의 경계에 50 M 마다 늘어선 초소 안에 들어가서 보초를 서는 것이었다. 초소 앞에는 " 이곳은 내가 살 곳이요, 죽을 곳이다."라는 팻말이 전혀 심각하지 않게 세워져 있
었다. 오후 6시부터 보초를 서는데 9시부터는 1 시간씩만 서지만 첫 번째 보초는 9시까지 3 시간을 서야 한다. 시간이 길어서 모두들 싫어했지만 나는 언제나 자원해서 첫 번째 보초를 섰다. 나는 복잡한 내무반보다는 혼자 조용히 있고 싶기도 하지만 책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보초를 서면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더욱이 적에게 아군의 위치를 알려질 수 있도록 초소에 불을 켜는 일은 걸리면 영창깜인 일이었다. 초소의 위치가 실제로는 적이 접근 할 수 없는 곳이기는 하지만 군대 논리상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철모를 두른 고무줄에 충전된 배터리를 달고 앞에는 큰 널빤지로 가려서 전방에서 빛이 보이지 않도록 하고 밤마다 책을 읽었다. 그러니까 보초를 서는 것이 아니라 저녁마다 3시간씩 독서를 하는 셈이었다. 문제는 책이 없어서 어떻게 내 손에 들어왔는지 모를 무슨 '철학적 소고'인가 하는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중대에 있을 때 매복과 정찰을 나갔었지만 직접 적과 마주쳐 전투에 참여해 본 경험이 없는 나에게 정말로 심리적으로 가장 부담이 되었던 것은 베트콩이 아니라 사단에 와서 겪게 된 영어 때문이었다. 사건은 처음 입대할 때 뭔가 좀 있어 보이려고 인사기록카드에 대학 때 VUNC(지금은 없어진 용산 미군 기지 내에 있던 UN군 사령부 방송)에서 견습을 한 것을 근거로 'VUNC 아나운서'라고 과장 기록을 한 것이 문제였다. 사실은 유엔군사령부 방송국이었지만 대북 전문 방송이기 때문에 직원이 전체가 한국 사람이 었고 나는 남한의 대학생활을 소개하는 프로를 만들고 있었다. 아마 그 기록을 본 부관부 인사과장은 내가 유엔군 사령부에 근무했다고 생각해서 영어를 잘하는 것으로 판단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때까지 내 영어는 그 시절 모두가 그렇듯이 한 번도 실전에서 사용해보지 못한 교과서 영어이었던 것이다.
미군 헬기 중대에 헬기 통역병으로 파견 나가 있는 병장이 2 주간 한국으로 휴가를 가게 되었는데 내가 영어를 잘하는 것으로 잘못(?) 판단이 되어서 대신 자리를 메우게 된 것이다. 당시 월남에서 한국군은 헬기가 없고 헬기 수송은 미군이 맡아서 했기 때문에 엠브런스에 해당하는 환자수송 헬기도 전적으로 미군에 의존해야 했었다. 긴박한 전투현장에서 부상당한 병사를 헬기로 수송을 해야 하는 일은 부상당한 병사뿐만 아니라 미군 조종사와 미군 의무요원들의 목숨까지 달린 극도로 위험한 임무였다. 휴가를 떠나는 병장이 인수인계를 하면서 정작 필요한 영어는 상황이 발생하면 어차피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요란한 헬기 소리 속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서 하는 것이니 너무 걱정 하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상황이 발생해서 혹시라도 통역을 잘못 할까보아 두려워서 상황이 발생하지 않기만을 기도하면서 하루 종일 분주히 뜨고 내리는 헬기 소리 속에서도 혹시나 출동하기 위해서 나를 부르지나 않나 하는 긴장 상태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내가 있는 동안 한 번도 출동할 일이 발생하지 않았지만 미군들 사이에서 지내려니 내 영어가 객지가 아닌 본토에서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당시는 영어로 쓰여 있는 것은 보이면 무조건 기억이 아니라 머리에 인쇄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 글을 쓰려고 당시 미군들 사이에서 더스토프라고 불렀던 호송헬기를 찾아보았더니 그런 말은 없고 메드백 (MEDVAC-Medical Evacuation)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상하다. 당시 모두 더스토프라고 했는데..'했는데 하고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다. 찾아보니 'Dust Off' 이었고 먼지(Dust)가 땅(Ground)에 붙어(On)있다가 떨어지면(Off) ‘먼지가 날린다.’ 는 뜻이었다. 즉 우리 식으로 하자면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뛴다. 혹은 눈썹이 휘날리도록 뛴다.’의 의미 정도일 것이다. 젊어서 영어 때문에 고생하던 팔자가 늙어서도 변치 않아 내가 제일 잘할 뿐만 아니라 남보다도 더 잘할 수 있는 한국말을 쓰지 못하고 지금도 이국에서 영어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다.
어느 미운 오리 새끼의 월남참전기 2
어느 미운 오리 새끼의 월남참전기 2
https://blog.naver.com/ojh7071/220147355918
미군 수송선의 선실은 마치 영화 빠비용에 나오는 죄수 호송선 같았다. 누에가 고치를 치기 위해 시렁 위에 누운 것처럼 병사들은 3층짜리 철 침대 위에 올라가서 잠을 잤다. 코를 찌르는 바다냄새, 병사들의 땀 냄새가 뒤죽박죽이었지만 전쟁터로 가는 길이었기에 불평스런 마음이 전혀 없었다.
수송선에서의 하루는 눈을 뜨자마자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끼니때마다 배의 좁은 복도를 따라 식당 앞에서부터 줄줄이 늘어서야 했다. 1000명이 좁다란 선내 식당에서 식사를 하려니까 밥 한 끼를 먹으려면 두 시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새벽의 서울역 대합실처럼 썰렁한 분위기 속에서 쇳덩이 통로에 줄지어 서는 것을 시작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해서 밥을 타 먹느라고 하루에 여섯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아침 먹고 조금 있다가 줄을 서서 점심, 점심 먹고 조금 있다가 또 줄을 서서 저녁을 먹으면 배 안에서의 하루 일과가 끝나는 것이다. 줄을 서는 것이 귀찮아서 한 끼쯤 밥 먹는 일을 거를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다른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노는 셈치고 줄을 서서 노닥거리는 것이다. 줄을 서는 것은 식사 때만이 아니다. 아침이면 화장실 앞에도 병사들이 줄줄이 늘어서서 그 끝이 어디인지를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잠이 덜 깬 상태로 밥 먹는 줄인 줄 알고 서서 무턱대고 아무데나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리다 보면 화장실 가는 줄이기도 했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곳곳에서 사천만의 오락인 화투판이 벌어졌다. 배 안에서는 한국 돈은 쓸모가 없고 달러는 아직 지급이 되지 않았고 지급된 것은 양담배 밖에 없기 때문에 모두들 담배를 걸고 화투를 쳤다. 나는 화투도 할 줄 모르고 담배도 피우지를 않았기 때문에 심심풀이로 나에게 지급된 담배를 가지고 밑천이 필요한 병사들을 대상으로 이자놀이를 했다. 사흘이 지나자 내 더불백에는 다 들어가지가 않을 정도로 담배가 많아졌다. 담배를 벌어들이면서 사채시장의 돈놀이꾼들이 돈을 버는 재미도 이런 것이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난 막상 나중에 배에서 하선 하자마자 정신없이 배치를 받아 가는 판에는 큰 더불백을 짊어지고 갈 수도 없는 일이어서 닥치는 대로 주변 전우들에게 나누어 주고 말았다.
닷새 동안의 불안한 항해가 다 끝나고 곧 퀴논에 상륙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모두들 마음이 뒤숭숭해서인지 갑판에 나와 하루 종일 서성거렸지만 어두워질 때까지 육지는 보이지 않았다.
부산항을 떠난 지 엿새가 되는 아침이었다. 남보다 먼저 잠자리에서 일어나 선실의 문을 여는 순간 숨을 쉬기 어려운 뜨거운 바람이 ‘훅-’ 하고 콧속으로 불어왔다. 순간적으로 놀라서 어디서 ‘불이 났나.’ 하고 돌아다보았더니 배가 이미 밤새 퀴논 항에 도착하여 부두에 닿아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뜨거운 열기 속에서 호흡을 다시 한 번 가다듬었다. 아직 새벽이어서인지 쥐죽은 듯한 부두의 모습이 기분 나쁘게 느껴졌다. 월남 땅을 처음 본 순간 이제까지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내가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날이 완전히 밝고 부두에 내린 우리들을 환영하는 공식 행사는 없었다. 그 대신에 야전잠바를 입은 부관부 준위가 어깨에 힘을 주고 버티고 선채 우리를 기다렸다. 찌는 듯 한 더운 날씨에 더욱이 대낮에 준위가 왜 야전잠바를 입고 왔을까 하는 의문은 곧 밝혀졌다. 현장에서 금반지로 된 짜웅<뇌물> 을 받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소문에 의하면 병력이 한 번씩 도착할 때
마다 야전잠바 주머니가 축 늘어질 정도로 금반지를 걷어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준위의 야전잠바는 그 후에 내가 목격한 주월 한국군의 엄청난 부패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나는 병사들이 하도 잘 죽는다고 해서 “병력을 보내나 마나” 라는 소문이 붙었다는 일명 도깨비부대로 떨어져 있었다. 우리들 도깨비부대 병력은 닌호아에 있는 사단 사령부로 가는 병력과는 달리 도깨비 부대가 있는 투이호아로 가기 위해서 더블 백을 들고 사단 부관부의 준위가 부르는 대로 대열을 지어섰다. 더블 백을 어깨에 메고 뜨거운 바람을 일으키며 기다리고 있는 쌍발 프로펠러 수송기의 활짝 열려 있는 뱃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미군이 대부분 철수한 퀴논 비행장은 그야말로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프로펠러에서 나오는 뜨거운 열기를 헤치고 들어간 원래 화물을 나르는 수송기는 안에서 밖이 훤히 내다보여서 “이 비행기가 날라 갈수는 있는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었다.
폭음과 한증막 같은 뜨거운 바람 속에서, 비행기 바닥에 더블 백을 깔고 쭈그려 앉은 우리들은, 한참 동안 비행기가 날기를 기다려야 했다. 갑자기 뭐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우리들의 염려를 무시하는 듯이 300명을 태운 고철덩어리는 신기하게도 활주로를 힘겹게 벗어나면서 날기를 시작했다. 30 분쯤 지나서 우리는 어딘지 알 수 없는 사막에 도착했다. 그곳은 활주로만 있는 야전비행장이었는데,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앞뒤에서 기관단총을 들고 경계를 서고 있는 수십 대의 무장트럭이었다. 마치 소떼를 몰듯 정신없이 몰아치는 인솔 하사관들의 고함소리에 쫓겨 트럭에 올라타자마자 전속력으로 사막을 가로질러 달리고 또 달렸다.
얼마를 달려서 마치 사막 한가운데 있는 외인부대의 기지처럼 겹겹이 두른 철조망 담을 몇 개 지나서 부대 안에 있는 교육대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트럭에서 내리자마자 머나먼 월남 땅까지 오느라고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는 따뜻한 위로나 격려의 말 한마디는 고사하고 “이 새끼들 좆 빨려고 월남 왔나?” 며 조교들이 정신을 못 차리도록 기합을 주고 숨이 턱에 닿도록 더블 백을 짊어진 채 뺑뺑이를 돌리는 것이 아닌가?
한국에서부터 들고 온 관물들이 가득한 40 Kg 더블 백을 둘러메고 뜨거운 모래밭인 연병장에서 선착순을 돌면서 월남에 도착하는 첫 순간부터 기합으로 일관하는 한국 군대는 참으로 “구제 불능의 집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신입병들이 딴 생각 못하도록 군기를 잡는 일종의 일본식 군대의 운영방법이었다.
다시 교육대에서 2 주간 현지 적응 훈련을 받았다. 교육대의 소대 막사는 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땅을 파고 들어가 반 지하 연립 마냥 벙커로 만들어졌다. 마치 움막같이 생겨서 한국에서는 구경도 하지 못하던 것이었다. 벽에는 모래를 넣은 마대가 차곡차곡 쌓여 있고 지붕위에도 마대를 몇 겹씩 얹어놓았다. 날씨가 더우니까 문이나 창은 없고 밤에 잠을 잘 때는 모기장을 치고 잤다. 밤에도 등화관제를 해야 했기 때문에 불을 킬 수가 없어 막사 안은 항상 어두웠다.
부대가 모래뿐인 사막에 있기 때문에 날마다 땀으로 목욕을 하며 며칠을 지냈더니 온 몸에서 소금기가 버석버석 거렸다. 군복에는 소금기가 허옇게 베어 나왔고 내무반에 들어서면 소금기에 찌든 냄새가 진동했다. 급수트럭으로 물을 하루에 한 번씩 보급해 주는데 급수사정이 나빠서 샤워는 고사하고 세수할 물도 부족했다. 어쩌다 운 좋게 수통 3개에 물을 채울 수 있으면 손수건에 물을 적셔서 대강 목욕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런 조건이었지만 우리들 300여명의 교육생들은 훈련이 끝나면 곧 바로 전투현장으로 투입이 될 처지였기 때문에 보름 동안 한눈 팔 사이가 전혀 없을 정도로 맹훈련을 받았다.
보통 군대에서는 어디서나 훈련받을 때 적당히 요령을 피우려는 것이 피교육자의 상식이다. 그러나 월남에서의 훈련은 경우가 다른 것이었다. 교육생들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도 전쟁터에서 제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훈련에 임해야 할 판이었다. 교육생들이 자발적으로 훈련을 열심히 받으려고 하니까 흔히 군대의 다른 교육에서처럼 기압을 받는다든가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우리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곳에 심각한 문제가 잠복해 있었다. 그것은 하사와 병장 사이의 권위 문제였다. 군대 짬밥을 먹을 만큼 먹은 사병들과 6 개월간의 하사관학교 교육을 받고 바로 하사 계급장을 단 일반하사들과의 갈등은 한국의 군대생활에서는 어디에나 존재했다. 짬밥이 많은 병장이 교육 마치고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신임 하사에게 고분고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국내에서는 티격태격 하면서도 그럭저럭 지냈다.
그런데 엄연히 하사가 분대장으로서 지휘권을 가져야 하는 전쟁터인 월남에서는 하사의 권위가 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권위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서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이론적으로 교육은 그렇게 받았어도 잘되지 않는 것이다. 본국에서 하사와 어영부영 맞먹고 지내던 병장들이 월남에 왔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하사들에게 고분고분해 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이미 고국의 파월 훈련소에서 한 달 동안 같이 훈련을 받고 같은 배를 타고 와서 함께 교육 받는 교육생들끼리 사병과 하사 사이를 엄격하게 구별 한다는 것은 더욱 곤란한 일인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파월 장병들의 이런 풍조를 잘 알고 있는 교육대에서 훈련 기간 중에 하루 날을 잡아서 조교인 하사들과 교육생 하사들이 짜고 사병들을 반쯤 죽여서 군기를 잡는 비공식 교육과정이 정해져 있었다. 그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도록 기습적으로 진행되었다. 재앙은 달이 뜨지 않아서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느닷없이 비상이 걸려 집합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하필이면 왜 달이 없는 날이냐 하면 어두워서 교육생들끼리 사병과 하사들이 서로 얼굴을 알아 볼 수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연병장에 집합을 한 후 교육생들 사이에서 일단 하사를 분리 시켜놓고 조교 중에 가장 악명이 높은 고참 하사가 사열대에 올라가서 “여기는 전쟁터이기 때문에 오늘 기압을 받다가 너희들 중 한 놈쯤 죽어도 사고처리 하면 그만이다.”라고 겁을 잔뜩 주었다.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을 몇 번 하더니 ”포복 앞으로!“ 명령이 떨어졌다. 그리고는 끝이다. 계속 앞으로 전진이다. 연병장을 무릎과 팔로 기어서 몇 바퀴 도는 것이다. 그러나 훈련소에서 갓 전입해 온 신병들도 아니고 본국에서 나름대로 각기 군대생활에 이력이 붙은 월남 전입병들에게 조교들의 공갈이 쉽게 먹혀들어갈 리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군대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겁주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어쭈? 겁 주는데?”하며 형식적으로 적당히 슬슬 포복을 했다. 그러나 그날은 그게 아니었다.
조교들은 반복되는 교육을 통하여 교육생들의 이런 심리까지 파악을 하고 있었다. 조교들이 점점 살기가 등등해서 날치는 것을 보고서야 ‘어이구. 이거 장난이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정신이 바짝 들게 되었다. 이날 밤 기압의 목적은 단 한 가지 사병들이 하사들을 무서워하도록 하는 것뿐이었다. 정상적인 교육을 통한 설득으로 위계질서를 확립하는 것이 아니고 가장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루 밤에 사병들을 길들이자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하사들의 친위 쿠데타인 셈이다.
조교로부터 기어 다니는 사병들이 요령을 부리면 교육생 하사들이 몽둥이를 가지고 다니면서 사정없이 때리도록 명령이 떨어졌다. 하사 조교들은 사병을 감시하지 않고 교육생 하사들을 감시 했다, 사병들을 다루는 것이 시원치 않은 교육생 하사들에게 “그렇게 밖에 못해?”하면서 무자비하게 군화발로 걷어찼다. 조교 하사는 교육생 하사들을 조지고 교육생 하사는 사병들을 조지는 것이다.
물론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교육방법이기 때문에 장교들은 전혀 개입이 되지 않은 것은 물론 알고도 모르는 척 해주고 있었다. 제법 각본이 치밀하게 짜여 있는 셈이었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처음에는 마음에 걸려 머뭇머뭇 거리던 교육생 하사들도 나중에는 눈에 핏발이 서서 사병들을 잡아먹을 듯이 날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도 마음이 약한 교육생 하사들은 조교들이 미친 듯이 날뛰는 중에도 차마 연병장 바닥을 포복으로 박박 기는 동기생들을 때리지 못해 흐느껴 우는 이들도 있었다. 삽시간에 평소에 만만하게 보던 교육생 하사들이 퍼붓는 매와 하사 조교들이 퍼붓는 욕설이 난무하는 공포의 밤인 것이다.
야간에는 철모 뒤에 은박지로 부친 비표로 아군끼리 계급을 구별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날 밤은 악을 써대며 닥치는 대로 손과 발로 치는 하사 조교들과 일체 소리를 내지 않고 몽둥이를 들고 설치는 교육생 하사들과 무릎과 팔뚝이 모두 까지도록 연병장 바닥을 설설 기어 다니는 사병으로 구분이 되었다.
교육의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그날 아침부터 하사만 보면 저절로 경례를 하기 위해 손이 올라가고 식사 시간에 배식은 물론 취침 시간에 모포를 까는 것까지 분대장을 받들어 모시도록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졌다. 이렇게 해서 조교들이 계획한대로 하사들의 권위가 하룻밤에 완벽하게 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기성부대에 배치되면 분위기에 따라서 저절로 될 일을 야만스럽게 저지르는 저질 군대 문화의 단면이라고 하겠다. 힘을 가진 자들이 옳다고 생각하면 야만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단 번에 고치려고 하는 것이 군대문화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공 시절 박정희가 국가재건 최고위원회를, 5공 시절 전두환 정권이 국가 보위위원회라는 것을 설치해 보통 군대에서는 어디서나 훈련받을 때 적당히 요령을 피우려는 것이 피교육자의 상식이다. 그러나 월남에서의 훈련은 경우가 다른 것이었다. 교육생들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도 전쟁터에서 제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훈련에 임해야 할 판이었다. 교육생들이 자발적으로 훈련을 열심히 받으려고 하니까 흔히 군대의 다른 교육에서처럼 기압을 받는다든가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우리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곳에 심각한 문제가 잠복해 있었다. 그것은 하사와 병장 사이의 권위 문제였다. 군대 짬밥을 먹을 만큼 먹은 사병들과 6 개월간의 하사관학교 교육을 받고 바로 하사 계급장을 단 일반하사들과의 갈등은 한국의 군대생활에서는 어디에나 존재했다. 짬밥이 많은 병장이 교육 마치고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신임 하사에게 고분고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국내에서는 티격태격 하면서도 그럭저럭 지냈다.
그런데 엄연히 하사가 분대장으로서 지휘권을 가져야 하는 전쟁터인 월남에서는 하사의 권위가 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권위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서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이론적으로 교육은 그렇게 받았어도 잘되지 않는 것이다. 본국에서 하사와 어영부영 맞먹고 지내던 병장들이 월남에 왔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하사들에게 고분고분해 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이미 고국의 파월 훈련소에서 한 달 동안 같이 훈련을 받고 같은 배를 타고 와서 함께 교육 받는 교육생들끼리 사병과 하사 사이를 엄격하게 구별 한다는 것은 더욱 곤란한 일인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파월 장병들의 이런 풍조를 잘 알고 있는 교육대에서 훈련 기간 중에 하루 날을 잡아서 조교인 하사들과 교육생하사들이 짜고 사병들을 반쯤 죽여서 군기를 잡는 비공식 교육과정이 정해져 있었다. 그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도록 기습적으로 진행되었다. 재앙은 달이 뜨지 않아서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느닷없이 비상이 걸려 집합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하필이면 왜 달이 없는 날이냐 하면 어두워서 교육생들끼리 사병과 하사들이 서로 얼굴을 알아 볼 수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연병장에 집합을 한 후 교육생들 사이에서 일단 하사를 분리 시켜놓고 조교 중에 가장 악명이 높은 고참 하사가 사열대에 올라가서 “여기는 전쟁터이기 때문에 오늘 기압을 받다가 너희들 중 한 놈쯤 죽어도 사고처리 하면 그만이다.”라고 겁을 잔뜩 주었다.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을 몇 번 하더니 ”포복 앞으로!“ 명령이 떨어졌다. 그리고는 끝이다. 계속 앞으로 전진이다. 연병장을 무릎과 팔로 기어서 몇 바퀴 도는 것이다. 그러나 훈련소에서 갓 전입해 온 신병들도 아니고 본국에서 나름대로 각기 군대생활에 이력이 붙은 월남 전입병들에게 조교들의 공갈이 쉽게 먹혀들어갈 리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군대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겁주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어쭈? 겁 주는데?”하며 형식적으로 적당히 슬슬 포복을 했다. 그러나 그날은 그게 아니었다.
조교들은 반복되는 교육을 통하여 교육생들의 이런 심리까지 파악을 하고 있었다. 조교들이 점점 살기가 등등해서 날치는 것을 보고서야 ‘어이구. 이거 장난이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정신이 바짝 들게 되었다. 이날 밤 기압의 목적은 단 한 가지 사병들이 하사들을 무서워하도록 하는 것뿐이었다. 정상적인 교육을 통한 설득으로 위계질서를 확립하는 것이 아니고 가장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루 밤에 사병들을 길들이자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하사들의 친위 쿠데타인 셈이다.
조교로부터 기어 다니는 사병들이 요령을 부리면 교육생 하사들이 몽둥이를 가지고 다니면서 사정없이 때리도록 명령이 떨어졌다. 하사 조교들은 사병을 감시하지 않고 교육생 하사들을 감시 했다, 사병들을 다루는 것이 시원치 않은 교육생 하사들에게 “그렇게 밖에 못해?”하면서 무자비하게 군화발로 걷어찼다. 조교 하사는 교육생 하사들을 조지고 교육생 하사는 사병들을 조지는 것이다.
물론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교육방법이기 때문에 장교들은 전혀 개입이 되지 않은 것은 물론 알고도 모르는 척 해주고 있었다. 제법 각본이 치밀하게 짜여 있는 셈이었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처음에는 마음에 걸려 머뭇머뭇 거리던 교육생 하사들도 나중에는 눈에 핏발이 서서 사병들을 잡아먹을 듯이 날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도 마음이 약한 교육생 하사들은 조교들이 미친 듯이 날뛰는 중에도 차마 연병장 바닥을 포복으로 박박 기는 동기생들을 때리지 못해 흐느껴 우는 이들도 있었다. 삽시간에 평소에 만만하게 보던 교육생 하사들이 퍼붓는 매와 하사 조교들이 퍼붓는 욕설이 난무하는 공포의 밤인 것이다.
야간에는 철모 뒤에 은박지로 부친 비표로 아군끼리 계급을 구별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날 밤은 악을 써대며 닥치는 대로손과 발로 치는 하사 조교들과 일체 소리를 내지 않고 몽둥이를 들고 설치는 교육생 하사들과 무릎과 팔뚝이 모두 까지도록 연병장 바닥을 설설 기어 다니는 사병으로 구분이 되었다.
교육의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그날 아침부터 하사만 보면 저절로 경례를 하기 위해 손이 올라가고 식사 시간에 배식은 물론 취침 시간에 모포를 까는 것까지 분대장을 받들어 모시도록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졌다. 이렇게 해서 조교들이 계획한대로 하사들의 권위가 하룻밤에 완벽하게 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기성부대에 배치되면 분위기에 따라서 저절로 될 일을 야만스럽게 저지르는 저질 군대 문화의 단면이라고 하겠다. 힘을 가진 자들이 옳다고 생각하면 야만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단 번에 고치려고 하는 것이 군대문화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공 시절 박정희가 국가재건 최고위원회를, 5공 시절 전두환 정권이 국가 보위위원회라는 것을 설치해서 사회악을 일소한다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삼청교육대로 보내서 원한이 사무치게 만들던 일도 바로 그런 발상에서 나온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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