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29

행동하는 예수 | 김근수 | 알라딘

행동하는 예수 | 김근수 | 알라딘
행동하는 예수 - 불의에 저항한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김근수 (지은이)메디치미디어2014-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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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판 확인일 : 2024-05-30

796쪽

책소개
<슬픈 예수>의 신학자 김근수 선생이 「마태오복음」 해설서를 출간했다. 마침 자정을 요구하는 가톨릭계 운동과 맞물리면서 페이스북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연재 글을 다듬고 정리한 것이다. <행동하는 예수>는 말 그대로 ‘가난한 사람들 곁으로 하느님나라의 소식을 들고 다가온 예수, 불의에 적극적으로 저항해서 고난 받은 예수’를 조명하였다. 이 책은 4복음서 해설서의 연작 중의 두 번째 책이다.

「마태오복음」의 저자 마태오는 신약성경의 복음서를 쓴 저자들 가운데서도 ‘실천’을 가장 크게 강조한 신학자이다. “입으로만 믿음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몸으로 자비와 정의를 실천하여 세상을 빛으로 밝히는 그리스도인이 많아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마태오복음이 역설하는 메시지다.


목차


1부 예수의 유래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동방박사들의 방문/ 이집트로 피신하신 예수/세례자 요한의 설교/ 세례 받으신 예수/ 유혹 받으신 예수

2부 예수와 고난의 땅 갈릴래아
갈릴래아 전도 시작/ 어부를 제자로 부르시다/ 예수와 군중/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부드러운 사람들/ 정의에 목마른 사람들/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박해받는 사람들/ 예수의 고통에 동참함/ 세상의 소금과 빛/ 예수와 율법/ 화해하여라/ 자신을 이겨라/ 아내를 버리지 말라/ 정직하여라/ 폭력을 포기하라/ 원수를 사랑하여라/ 올바른 자선/ 올바른 기도/ 예수의 기도/ 하느님나라를 빌어라/ 하느님의 뜻/ 먹을 것의 중요함/ 용서를 구하라/ 유혹과 악/ 서로 용서하라/ 올바른 단식/ 올바른 재산/ 하느님이냐 재물이냐/ 세상 걱정과 하느님나라/ 남을 심판하지 말라/ 청하는 자세/ 황금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 내 말을 실천하라/ 군중의 반응/ 나환자를 고치시다/ 군인의 병든 부하를 고치시다/ 베드로의 장모와 병자들을 고치시다/ 예수를 따르는 자세/ 풍랑을 진정시키시다/ 마귀떼를 물리치시다/ 중풍병자를 고치시다/ 세리와 식사하시다/ 단식 논쟁/ 여인들의 병을 고치시다/ 눈먼 사람들을 고치시다/ 말 못하는 이를 고치시다/ 봉사할 사람들/ 열두 제자를 뽑으시다/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박해를 각오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분열을 일으키시는 예수/ 제자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받을 상/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답하시다/ 세례자 요한에 대해 말씀하시다/ 예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 하느님과 예수/ 제자들의 안식일 의무 위반/ 예수의 안식일 의무 위반/ 하느님의 종이신 예수/ 예수와 마귀/ 요나의 표징/ 진정한 가족/ 씨앗 비유/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씨앗 비유를 설명하시다/ 가라지 비유/ 겨자씨 비유/ 가라지 비유를 설명하시다/ 보물과 진주 상인 비유/ 그물 비유/ 고향에서 무시당하는 예수/ 헤로데가 예수의 소문을 듣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물 위를 걸으신 기적/ 병자들을 고치신 예수/ 전통에 대한 논쟁/ 이방인 여인의 믿음/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 표징을 요구 받으신 예수/ 베드로의 신앙고백

3부 예수와 저항의 땅 예루살렘
첫 수난예고/ 예수를 따르는 자세/ 예수의 영광스런 변모/ 엘리야의 재림/ 마귀를 쫓아내시다/ 두 번째 수난예고/ 성전세에 대한 답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 죄짓지 말라/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라/ 형제의 죄를 깨우쳐주어라/ 형제의 죄를 용서하여라/ 결혼과 이혼/ 약한 사람을 사랑하시는 예수/ 부자는 하늘나라에 가기 어렵다/ 예수를 따름과 그 보상/ 너그러운 포도밭 주인 비유/ 세 번째 수난예고/ 제자들의 권력다툼/ 눈먼 사람들을 고쳐주시다/ 예루살렘에 도착하시다/ 성전항쟁/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다/ 예수의 권한/ 두 아들 비유/ 포도밭 소작인 비유/ 혼인잔치 비유/ 로마에 세금내는 문제/ 부활 논쟁/ 가장 큰 계명/ 예수는 메시아?/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를 비판/ 자신을 낮추어라/ 위선자가 되지 말라/ 잘못된 선교란 무엇인가/ 헛된 맹세를 하지 말라/ 정의는 십일조보다 중요하다/ 종교인은 욕심을 버려라/ 종교인은 진실되게 살아라/ 올바른 예언자 존중/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예고/ 예루살렘의 운명에 대한 한탄/ 성전파괴 예고/ 재난의 시작/ 재난을 견뎌라/ 가장 큰 재난/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무화과나무의 교훈/ 충실한 종/ 지혜로운 여인들 비유/ 소명에 충실하라/ 최후심판의 기준

4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예수를 죽일 음모/ 예수의 죽음을 예감한 여인/ 유다가 예수를 배신하다/ 마지막 만찬을 준비함/ 배신 예고 말씀/ 성찬례 제정/ 베드로의 배신을 예고하신 예수/ 예수 최후의 기도/ 예수 체포되심/ 유다 최고의회에서 심문받으신 예수/ 베드로가 예수를 모른다고 말하다/ 유다의 운명/ 로마총독에게 사형판결을 받으신 예수/ 로마군대에게 고문 받으신 예수/ 십자가에 처형되신 예수/ 예수를 비웃은 사람들/ 숨을 거두신 예수/ 예수 죽음 후 일어난 일/ 예수의 죽음을 지켜본 여인들/ 예수 무덤에 묻히시다/ 예수의 무덤을 지키는 군인들/ 부활하신 예수/ 매수된 군인들/ 부활하신 예수의 말씀




책속에서


그리스도교가 하느님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면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할 수 없다. 회개한 사람이 오늘 드문 이유는 그리스도교가 하느님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제대로 이해하는 종교인이 드문 탓이다. -<갈릴래아 전도 시작> 중에서
예수를 알기에 앞서 우리는 인간으로서 하느님께 부름 받았다. 인간으로 부름 받은 이 놀라운 사실을 그리스도교의 세례보다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어느 종교에 속하느냐보다 우리 모두가 인간이란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하다-<어부를 제자로 부르시다> 중에서
자비와 정의가 적용되는 대상은 각각 다르다. 죄 많은 부자나 권력자에게는 정의의 심판이 기다린다. 가난한 사람이나 역사의 희생자에게는 자비의 무대가 열린다. 자비와 정의에 대해 그 관계, 순서, 대상을 정확히 구분하는 지혜가 중요하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중에서
과거의 박해는 교회 밖 정치권력에서 왔지만 오늘날 박해는 교회 내부에서 등장한다. 교회역사에서 박해받은 시기에 교회는 대체로 일치단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박해 없는 시절에 교회는 오히려 유혹에 빠지는 모습을 보인다. 박해시대에는 신앙에 충실하지만 유혹시대에는 신앙이 흐트러진다. 박해시대엔 배신자는 있었어도 예수장사꾼은 없었다. 유혹시대에는 예수장사꾼이 득실거린다. 박해에는 저항하지만 유혹에는 자멸하기 쉽다. 박해보다 유혹이 신앙에 더 위험하다. 종교인 대부분이 안락과 호사를 누리는 오늘은 유혹시대 아닌가. 한편에선 순교자 추앙에 바쁘지만 정작 자신은 유혹에 빠져 있는 교회는 무엇인가. 지난날의 순교자를 칭송하면서 정작 자신은 순교하지 않으려는 교회는 무엇인가. -<박해받는 사람들> 중에서 접기
가톨릭 신자들은 개신교 형제자매들보다 더 절실히 은총의 고마움을 느껴야 한다. 기도와 선행 등 인간의 모든 노력이 하느님 은총을 ‘획득하는 데 도움 된다’는 생각을 깨끗이 버려야 한다. ‘무슨 기도를 하면 무슨 은혜를 받는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하느님은 인간과 거래하지 않으신다. 개신교 성도들은 세상을 맑고 정의롭게 만드는 ‘행업’에 가톨릭 신자들보다 더 애써야 한다. 세례는 곧 구원의 보증수표라는 생각을 개신교 성도들은 버려야 한다. 하느님이 개신교만 예뻐하실 것 같은 착각에서 깨끗이 벗어나야 한다. -<예수의 고통에 동참함> 중에서 접기
다신론 사회에서 모세는 하느님의 이름을 찾았다. 예수는 하느님의 진정한 이름을 십자가에서 알려주었다. 오늘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겨지지 않는 곳은 어디일까. 오늘 누가 하느님의 이름을 더럽히는가-무신론인가 우상숭배인가. 유신론의 반대는 무신론이 아니라 우상숭배다. 우리시대 우상은 돈, 권력, 명예를 가리킨다.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그들은 돈도 믿고 권력도 믿고 명예도 믿는다. 그리스도교인의 대부분은 우상숭배자에 속한다. 무신론자보다 우상숭배자가 그리스도교를 더 심각하게 위협한다. 그리스도교 안에 우상숭배자들이 많다. 이단보다 대형교회 목사가 그리스도교에 더 위험하다. 지배층 성직자나 목회자가 우상숭배자일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그리스도교는 외부 위협 때문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내부 파괴자들에 의해 자멸하기 쉬운 현실을 맞이하고 있다. 우상숭배에 빠지면 하느님의 이름은 거룩하지 않게 된다. -<예수의 기도> 중에서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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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한겨레
- 한겨레 신문 2014년 2월 24일자 출판 잠깐독서
조선일보
- 조선일보 북스 2014년 3월 1일자 '화제의 신간'



저자 및 역자소개
김근수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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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전주에서 10킬로 떨어진 산동네 출신이다. 전주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광주가톨릭대학교를 2년 다닌 후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에서 신약성서를 전공했다. 가난한 사람들과 억압받는 사람들의 대변자 오스카 로메로(Oscar Romero) 대주교가 살았던 중남미 엘살바도르로 건너가 중앙아메리카 대학교에서 해방신학의 대가 혼 소브리노(Jon Sobrino) 신부에게 가르침을 받은 아시아인 최초의 제자가 되었다. 2002년에 제주도로 이주하여 영어를 가르치는 강사로 일해 왔다. 예수 등장부터 요한복음까지 1세기 예수 운동 역사와 신학을 집중 공부하고 있다. 2014년 8월 방한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을 알현하고, 저서 《교황과 나》(2014)를 헌정하고, 스페인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유튜브 〈양희삼TV 찍먹신약, 김근수–해방신약〉에서 신약성서를 강의한다. 〈시민언론 민들레〉 창간 위원이자 칼럼니스트이다.
저서로 마가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2013), 마태복음 해설서 《행동하는 예수》(2014), 누가복음 해설서 《가난한 예수》(2017), 요한복음 해설서 《평화의 예수》(2018), 《예수평전》(2021), 《여성의 아들 예수》(2021), 《로마서 주석》(2022), 《바울 전기》(2022), 《예수운동 역사와 신학》(2024), 《갈릴래아 예수》(2024)가 있고, 공저로 《교황과 98시간》(2014), 《지금, 한국의 종교》(2016), 《쇼! 개불릭》(2016)이 있다. 번역서로는 《희망의 예언자 오스카 로메로》(2015), 소브리노의 대표작 《해방자 예수》(2015)가 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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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불의에 적극적으로 저항해서 고난 받은 예수’를 그린
「마태오복음」의 해설서

2013 가톨릭계의 화제의 인물, <슬픈 예수>의 신학자 김근수 선생이 「마태오복음」 해설서를 출간했다. 마침 자정을 요구하는 가톨릭계 운동과 맞물리면서 페이스북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연재 글을 다듬고 정리한 것이다. <행동하는 예수>는 말 그대로 ‘가난한 사람들 곁으로 하느님나라의 소식을 들고 다가온 예수, 불의에 적극적으로 저항해서 고난 받은 예수’를 조명하였다. 이 책은 4복음서 해설서의 연작 중의 두 번째 책이다.
「마태오복음」의 저자 마태오는 신약성경의 복음서를 쓴 저자들 가운데서도 ‘실천’을 가장 크게 강조한 신학자이다. “입으로만 믿음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몸으로 자비와 정의를 실천하여 세상을 빛으로 밝히는 그리스도인이 많아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마태오복음이 역설하는 메시지다. <행동하는 예수>는 마태오의 이런 생각을 글로 풀어내면서 거침없이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과연 예수를 바로 알고 있습니까?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예수 역사를 왜곡하고 이용해 온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가난한 이들 곁에서 함께 고난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불의에 침묵하는 한국의 종교계 vs.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겠다는 프란치스코 교황

현재 정치·경제·종교·사회 등 모든 면에서 부패와 갈등으로 혼란을 겪고 있는 한국 사회에는 개혁의 새 바람이 절실하다. 많은 사람들이 불의와 억압, 가난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데도 숨구멍이 트일 여지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국면에 불의에 저항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 곁으로 다가가는 예수 정신을 회복함은 시급하고도 꼭 필요한 일이다. 역사의 예수를 알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사람만이 그러한 예수 정신을 어두운 이 사회에 구현해 낼 수 있다.
2013년에 선출된 교황 프란치스코는 이전 교황들과는 달리 구조적인 악의 문제를 주목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끌어안으라는 메시지를 전 세계에 전달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위기를 신자 개개인의 위기에 국한시켜 생각해 왔던 교회 내의 시각을 이제 불의한 사회구조의 문제, 불의한 정치와 경제의 문제로 넓혀가 교회개혁과 사회개혁의 실마리를 풀어낼 기회로 제공한 셈이다.
그런데 과연 한국 그리스도교가 이 숙제를 잘 감당해 낼 수 있을까? 성직자 중심주의와 서열화를 당연시하는 가톨릭에서 성직자들은 가난한 종으로서 살고 있지 않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봉건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한국 천주교회가 개혁을 시작할 수 있을까? 잇단 목회자들의 추문과 정치권력과의 유착, 돈 문제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한국 개신교가 회개하고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행동하는 예수>는 하느님을,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사실은 자기 마음속 탐욕의 우상을 섬기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를 깨우는 우렁찬 종소리다.

성서신학과 해방신학의 두 눈으로 본 마태오복음
그리스도교인들은 대부분 교회 내에서 ‘순종하라’는 말을 들으며 성장해 왔고 생활해 왔다. 그 말은 곧 성서 말씀을 전달하는 성직자에 대한 순종이라는 개념으로 이어졌다. 설교자들의 바르지 못한 성서 이해와 욕심이 설교와 성서교육에 개입될 경우 일반 신자들은 성서에 대해, 예수에 대해 그릇된 이해를 갖게 된다. 잘못된 생각은 잘못된 행동을 낳는다. 그것은 결국 그리스도교의 부패와 사회의 균열을 가져오게 된다. 성서를 잘 알고 바로 보는 눈은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행동하는 예수>는 자칫 어렵게 여길 수 있는 성서신학을 알기 쉬운 문체로 풀어내어 대중에게 다가서는 동시에 그동안 천 년 넘게 성서학계에서 쌓여 온 연구 성과들을 참조하여 학문적 깊이와 대중성을 동시에 확보하였다. 또, 독일의 정통 성서신학과 가난한 사람들의 눈으로 성서를 보는 해방신학의 두 눈으로 본 보기 드문 해설서이기도 하다. 저자 김근수 선생은 독일과 엘살바도르에서 성서신학과 해방신학을 공부했다.

현장신학자인 예수
행동하는 예수는 곧 현장신학자이다. 예수와 가난한 사람들이 만나는 신학적 장소 또는 삶의 자리가 곧 현장이며, 그러한 신학의 장소를 뒷받침하는 신학을 <행동하는 예수>의 저자 김근수 선생은 현장신학이라 명명한다. 이제는 신학의 장소가 교회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부르짖음이 <행동하는 예수>의 핵심이다. 마태오가 예수의 삶에서 발견하고 역설한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제 거리, 광장, 시장, 시위 현장에 가라.” “고뇌와 갈등과 눈물이 어린 곳으로 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며 눈물을 닦아 주어라.” “이 시대 예수의 제자들은 세상의 고통을 방관하거나 묵인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저항하며 예수가 걸었던 길을 따라가라” 라고 해석한다. 이 혼란스럽고 불의한 세대에 당신은 과연 빛과 소금이 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영달만을 위해 살며 불의한 세력에 영합할 것인가. 책을 덮는 순간 독자들은 누구 하나 예외 없이 그 질문 앞에 엄숙히 서야 할 것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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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신학이 인간에게 해방을 주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올 사순절을 이 책과 함께해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ferrone 2015-04-12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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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신학으로 본 마태오복음



어려서부터 성당에 다녔다. 일요일이면 성당에 있는 커다란 미끄럼틀을 타고 성당마당을 뛰어다니고는 했다. 어른들과 미사를 드리고 나서 같이 집에 돌아오는 길은 늘 소풍을 다녀온 느낌이 들었다. 철이 들고부터는 살짝 뛰쳐나가고 싶어서 그랬는지 자꾸 이리저리 색안경을 쓰고 보고 삐딱하게 생각하느라 많이 벗어나 살았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아예 성당을 멀리했다. 아이를 키운답시고 냉담까지 했다. 그러다 아이에게 어느정도 벗어나 자유로운 시간이 주어지자 불현듯 나는 다시 성당으로 발길을 옮기게 되었다.





성당에 관한 추억과 나의 아이들이 내가 가진 추억을 조금이나마 나눌 수 있다면 그리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아이들도 알아 가기를 기대하면서 오늘도 성당에 다녀왔다. 그러나, 성당 문을 나서면 이상하게도 나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시 예전의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보고 방금들은 복음말씀이 뭐였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미사에 빠지지 않고 끝까지 나갈 것이지만 몇 달전 언니의 죽음, 장례미사는 나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그날 복음말씀은 역시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신부님의 강론은 잊을 수가 없다. 젊은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언니와 가족들이 느낄 슬픔에 관한 것이었다. 하느님이 세상에 사람을 보낸데에는 혼자 잘 먹고 잘 살라고 보낸 것이 아니라 서로 돕고 이웃에게 봉사하며 서로 사랑을 나누라고 보냈다는 말씀이었다. 언니의 죽음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고 거의 실신에 가까운 엄마를 보듬기에 바빴던 내게 인간과 삶, 죽음에 의미가 한순간에 정리가 되었다. 바로 예수님의 말씀 아닌가. 늘 들었지만 잊고 살아왔던 그 말씀







신약성서의 첫 복음인 마태오복음을 해방신학을 공부한 저자의 강한 어조를 담은 <행동하는예수>(2014. 2 매디치미디어)를 펼치고 처음에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저자의 약력을 죽 따라가다가 그가 카톨릭대학을 다니가 유학을 떠나 해방신학을 공부했다는 점에 이르러서야 조금 들뜨게 만들던 마지막 단락이 수그러 들게 되었다.







마태오 복음을 성경을 그대로 읽기 평이하게 다시 읽게 하고 이스라엘 역사와 문화를 예로 들어 다시 해석하고 마지막의 저자의 날선 비판이 곁들여진 구성이다. 몇장, 몇절인 간단한 성경구절이 800p로 늘어나 있지만 결코 넘볼 수 없을 것 같은 부담은 가지지 않고 읽을 수 있다. 묵상을 하고 읽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다.







저자는 예수에 집중하라고 외친다. 성경은 사실 어떠한 시각으로 읽느냐가 중요한데 각자가 가진 생각으로 해석하고 강조하다보면 정작 예수를 지나치게 되고 결국은 전혀 다른 의미만 남게 되기 때문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가난한 교회, 가난한 사람을 가까이 하여 그 길을 걷는 길이 바로 하느님을 찾아 가는 길이자 쉽지 않은 가르침이 바로 행동하는 예수의 주제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아마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예수님 다음의 단어는 가난한 사람일 수 있다.







p 436







갈등에서 저항으로, 저항에서 해방으로 가는 길을 예수는 걸으셨다. 세상의 고통을 없애기 위한 저항의 길이다. 성서를 배운다는 것은 그런 예수의 길을 배우는 것이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 숲안에서는 숲이 안보이는 법. 내가 가진 종교를 떠나 재해석된 복음말씀을 읽는 것도 신앙생활에 가질 수 있는 고정된 관점을 깨는 데 도움이 될 책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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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 2014-03-09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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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예수를 읽고



『행동하는 예수』를 읽고

내 자신 솔직히 아직 어떤 종교든지 신봉하는 신도가 아니다. 물론 그 동안 많은 경험이나 체험도 해보았지만 아직까지 전담하여 몸과 마음을 맡긴 적은 없다. 그러나 모든 믿음에 대해서는 강력한 지지와 함께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있다. 그래서 마음을 열고 수용하는 입장에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경전 내용은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매우 생소한 입장이다. 낯설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고 임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그리 쉽지가 않다. 다만 이런 좋은 책자를 통해서 공부하면서 배우고 느끼는 기회로 삼을 수 있기 때문에 아주 좋은 시간이다. 책의 내용뿐만이 아니라 우선 저자 나름대로 연구해 온 결실에 대해서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그 누구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길을 택하여 이런 놀라운 저술과 함께 지속적인 연구 의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존경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평신도 신학자로서 한 분야에 대한 꾸준히 공부해 온 결실을 이런 좋은 결과물로 만들어 낸 저자의 대단함은 역시 독실한 믿음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성경 내용으로만 느낄 수 없는 분위기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예수의 행동에 대해서 특히 인간의 구원을 위해 활동하는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막연하게만 알고 있는 성경의 내용에 대해서도 이렇게 의미를 부여함에 따라 다른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도 참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큰 선물인 것 같다. 이 책을 통해서 느낀 여러 지식을 실제로 느껴볼 수 있도록 앞으로 시간을 좀 더 투자해야겠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성경의 내용 중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마태오복음"에 관한 연구와 해설을 통해서 새로운 많은 부분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만들었으면 한다. 진정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을 통해서 사랑이라는 가장 바람직한 모습으로 함께 하기를 기대해본다. 특히도 보통 사람들에 비해서 여러 면에서 악조건을 갖고 있는 병든 자와 가난한 자, 소외된 자와 과부, 창녀 등 사회적 약자를 찾아 사랑을 베풀면서 함께 해왔던 예수님의 진면모를 모두가 절실하게 느꼈으면 한다. 아울러 현실 생활 속에서 과감하게 실천의 모습을 통해서 내 자신과 이웃이. 국가가, 세계가 똑같은 마음으로 사랑에 넘치는 평화로운 모습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겨울 방학을 맞아서 서유럽 여행 중에 바티칸시티와 교황청을 둘러볼 기회를 가졌다. 세계에서 몰려 든 관광객 때문에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고, 박물관 전시 관람 시에도 뒷사람을 따라 가야만 하는 번잡함이 있었지만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환함을 직접 보고 느꼈었다. 바로 이런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진실한 믿음을 통해서 전 인류가 함께 가는 평화로운 모습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넘쳐났으면 한다. 좋은 책을 읽는 행복함을 맛볼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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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박사 2014-03-06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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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예수



저자 김근수는 평신도 신학자이다. 그는 오랫동안 예수에 대해서 공부했다. 예수는 행동하신 분이다. 말로만 외치는 현대의 종교적 형태보다는 삶으로 보여주셨다. 예수는 당시 이단아이다. 예수는 시대를 거스르며 살았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받아들일 수 없다. 오직 그들의 기득권을 지켜가는 것에 관심을 쏟았다. 예수는 종교라는 테두리에 놓여있지 않았다. 예수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이다. 저자는 예수의 진정성을 보았다. 예수의 행동을 보게 된 것이다.



저자는 그리스도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은 "마태오복음"이고 하며, 마태오는 예수 예수를 마르코복음보다 좀 더 풍부하게 확대하였다고 본다. 저자는 마태오복음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저자는 해방신학, 민중신학에 관심을 가졌다. 세상의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기를 원했다. 가난한 사람은 그리스도교의 중심이요 신학의 주체라고 강조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신학의 중심을 찾고자 했다. 이를 위해 예수의 복음인 "마태오복음"의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 저자는 마태오복음이 가르치는 예수와 행동하는 예수의 두 모습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한다. 저자는 행동하는 예수를 마태오복음을 통해 본 것이다. 믿음의 가장 중심은 행동이다. 믿기에 행동하는 것이다. 행동은 과정이며 결과이다. 현대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오해한다. 현대 교회들은 복음에 근거한 행동 즉, 예수의 행동을 따르지 않는다. 이벤트화된 교회들은 이미지 메이킹을 하고 있다. 예수는 이미지메이킹을 하지 않았다. 오직 굶주리고 헐벗은 이들은 찾아 복음을 전했다. 그들은 만지시고 치료하시고 함께 하셨다. 말보다 행동이다. 예수의 중심은 행동이다. 가르침을 행동으로 보이셨다.



저자는 예수의 삶을 본 것이다. 마태오복음을 통해 예수의 삶을 따르고자 한 것이다. 현대는 불균형 사회이다. 빈부귀천이 없는 사회라 하지만 계층간 간격은 좁혀지지 않는다. 심지어는 계층간 간격이 건널 수 없는 강처럼 넓어졌다. 가난이 되물림되고 있다. 가난한 이들은 숨죽어 살아간다. 어제는 세모녀의 죽음을 보았다. 우리들의 가슴을 치게 만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이정도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 마태오복음을 통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고민이 아니라 행동이다. 행동이 때로는 저항일 수 있다. 새로운 사회를 바라보며 나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현대 사회에 진리와 사랑이 있는지 묻고 싶은 것이다. 수많은 이들은 하나의 공동체로 살아가는 글로벌 시대에 우리들의 존재적 위치와 가치는 어느정도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책을 통해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을 보았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사랑했다. 그들을 위해 자신을 버렸다. 병든 자, 가난한 자, 소외된 자, 과부, 창녀, 사회적 약자를 찾았다. 그들과 함께 했다. 함께 먹고 자면서 아파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왔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종으로써 순종하여 그 길을 걸으신 것이다.

마태오복음을 통해 우리들에게 저자는 다시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행동하는 예수를 통해 행동하기를 원한다. 이 책은 예수를 통해 우리들에게 소망을 보여준다. 죽음과 부활을 통해 가질 수 없는 소망을 통해 현대를 이겨갈 수 있는 믿음의 힘을 갖게 함도 하나의 목적이다.



저자를 통해 행동하는 예수를 마태오복음을 통해 보게 되었다. 예수의 삶을 왜곡하는 시대적 흐름에 다시금 경종을 주는 책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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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미소 2014-03-01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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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삶을 통해 오늘의 신앙생활을 되돌아보다

성경은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책. 이 책은 성경 중 마태복음 부분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예수의 삶과 죽음을 다른다. 예수의 삶과 함께한 제자들의 언행과 당시 주변환경을 통해 예수의 삶을 되짚어 볼 수 있다. 특히 고난과 저항으로서의 예수의 삶을 말이다.
jumjan 2017-04-15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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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다가오는 마태복음



성경은 기본적으로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진다. 구약은 세상이 처음 탄생하게 된 배경에서 예수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까지를 다루고 신약은 예수가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종말의 때에 이루어질 이야기까지이다. 성경 자체가 워낙 방대한 역사와 문화를 다루고 있어 전체를 한 번 읽는다는 것 자체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 내용을 이해하며 읽는다는 건 더더욱 어렵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어려운 점도 있겠지만 그것보다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과정도 어렵게 만든 요인이다.



그 중 신약의 첫 번째 책이라고 알려진 마태복음을 풀어 놓은 책이 행동하는 예수이다. 이 책에서는 마태오복음이라고 하는데 마태복음이나 마태오복음이나 같은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 당혹스러웠던 것이 있다면 나 역시 기존의 교회에서 배웠던 성경의 말씀 속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우선 예수가 사단에게 유혹을 받는 장면이 있다. 사실 여기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문제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양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먹고 사는 문제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란 양식이지 우리가 먹을 떡과 빵 즉 밥이 아니란 것이다. 책에서는 이렇게 지적한다. "어떤 설교자들은 이것을 오해하여 빵보다 말씀이 더 중요하다는 식으로 간단히 해설하는 잘못을 저지른다." 여기서 살펴보아야 할 건 밥과 말씀은 둘 다 중요한 것이다. 다만 사람들이 밥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마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한 것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여러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만약 이 책을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교회를 다닌 사람들이 읽는다면 속된 말로 시험들 수 있겠다 싶었다. 그만큼 교회에서는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파격적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어쩌면 교회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책의 저자는 자유주의 신학자라고 이야기할 정도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성경을 다양하게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진리를 왜곡해서는 안되겠지만 성경을 어느 하나의 기준으로만 보는 것도 문제다. 하나의 건축 작품을 보아도 여러모로 봐야 진정한 멋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성경은 정말이지 다각도로 해석되어야 한다. 우리 한국 교회가 그동안 이런 작업을 하면 너무나 쉽게 자유주의니 이단이니 했던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물론 이런 작업을 통해 진리를 지키려는 노력은 높이 평가되어야 하지만 그 반대로 잃어버려야 했던 아니 잊혀져야 했던 상상력을 펼쳐 다각도로 해석하는 성경의 놀라운 말씀들을 놓쳐야 했던 것이 뼈아픈 것이었다. 그래서 이 책이 소중하게 다가옴은 이런 해석으로 새롭게 마태복음을 읽어야 함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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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늘 2014-03-01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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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떠나는 여행 - 33회 예수는 누구인가?



책 속으로 떠나는 여행 - 33회

예수는 누구인가?




내일은 종려주일이다. 예수가 마지막 공생애를 마치고 남은 일주일을 보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날이다. 사람들이 예수를 환영하기 위해 종려잎을 꺽어 환영했다하면 종려 주일로 부른다. 예수에대한 논쟁이 뜨겁다. 알고보명 케케묵은 논쟁이지만 늘 뜨겁게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예수가 역사의 화두요 모든 종교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고전적인 예수는 구원자. 구세주. 하나님. 신앙의 대상이다. 따라야할 삶의 모범이기도 하다. 가장 보수적인 목사로서 고 옥한흠 목사의 <유일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한국 개신교회가 믿고 추구하는 예수를 만날 수 있다. 역시 동일한 개신교 목사로서의 보수적 관점을 지행하는 조정민 목사의 <Why Jesus>도 함께 보면 좋다. 미국의 저명한 복음주의 목사인 스풀라울의 <예수는 누구인가?>와 존 오트버그의 <예수는 누구인가?> 도 전형적인 개신교 보수주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예수는 신인 동시에 하나님이다. 구원자로서 예수는 속죄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었다. 철저하게 신학적이고 성경적인 관점이다. 여기에 토를 달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근래에 들어와 예수의 상이 바뀌고 있다. 여전히 보수적인 측면이 강하지만 후광이 사라진 것이 특징이다. 즉 멀리서 사람의 예배만을 받으시는 근엄한 예수가 아닌 인간의 친구이며 상담자이며 함께 하는 공동체로서 안의 예수다. 그레고리의 <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는 이미 많은 이들이 읽은 책이다. 예수와 함께 식사하면서 자신의 고민과 어려움을 이야기하며 풀어 나간다. <예수님의 차려주신 밥상>은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말하고 있다. 폴 영의 <오두막>은 내재하시는 하나님과의 대화다. 그리고리의 책이 코믹하다면 영의 책은 진지하고 깊다. 자신의 딸이 죽어간 오두막에서 버림받은 딸에 대한 원한이 신에게 미친다. 결국 대화를 통해 풀어간다. 멀리서 구경하는 신이 아닌 함께하는 친구가 되었다.




























































예수는 점더 나아간다. 행명적이며 정치적 예수가 크게 주목 받고 있다. 십자가는 원래 정치범 처단 방법이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로마를 거역한다고 빌라도에게 고발했다. 빌라도는 풀어 주고 싶었지만 황제에게 반역한 예수를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젤롯은 초대교회 당시 혁명적 사상을 추구했던 유대인 분파이며 '젤롯당'으로 불렸다. 예수의 제자였던 요한이 그 당인 것으로 추측된다. 김규향의 <예수전>은 인간 예수로서의 면이 크게 부각된다. <예수 이야기>는 어떤가? 조반니 파파니 역시 예수를 정치적 혁명가로 규정한다. 정치적 예수는 예수의 제자들이 생각했던 예수상이다.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자 포기하고 도망가 버렸다. 여기까지는 그나마 다행이다. 더큰 문제는 다음의 책들이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는 경이로운 판매부수를 가지고 있다. 잃어버린 성배를 찾아 떠나는 고전적 판타지다. 그러나 예수에대한 이야기로 둔갑하면서 세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예수가 결혼했고, 자녀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호기심을 자아내고 있다. 얼마 전 예수의 아내가 있었다는 콥트어 문서가 발견되면서 다시 예수 논쟁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영지주의자들로 신은 육체를 입을 수 없다고 믿으며, 예수는 단지 사람일 뿐이라고 깍아 내리든지, 육체를 입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십여년 전에 발견된 <유다복음>은 더 가관이다. 유다는 예수의 죽음을 자신의 공으로 돌린다. 즉 자신이 예수를 팔지 않았다면 속죄제물이 되지 못했을 것이고, 결국 구원을 성취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영지주의 영향을 받은 유다복음은 구원의 축을 예수에게서 자신-유다에게로 돌려 놓는다.











































김기현 목사는 <가룟 유다 딜레마>를 통해 유다복음의 실체를 밝힌다음, 우리 안에도 유다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러 준다. 발터 옌스의 <유다의 재판>은 유다복음과 같은 맥락에서 전개 된다. 재판의 형식을 빌어 논증한다. 결국 예수의 공은 유다에게 돌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신학적으로 우승꽝 스러운 주장들이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매력적인 주장이다. 특히 <유다복음>은 예수가 유다와 협약을 맺은 것으로 나타난다. 예수가 유다에게 '네가 나를 팔아야 내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 그러니 너는 구원이 수단이다'는 식이다. 일리가 있는 말인듯 하지만, 보수적 개신교 안에서도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주장으로 들린다. 결국 유다는 우리 안에 꽈리를 틀고 있는 신이 되려는 욕망이다.























































초대교회 때부터 시작하여 꺼지지 않는 유다와 예수 논쟁은 예수에 대한 부정이 아닐 것이다. 타락한 기독교에 대한 세상의 반감이며, 진정한 예수의 삶을 살지 못하는 미숙한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회초리다. 교회는 새겨 들어야 한다. 예수는 누구를 위하여 살았고,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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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14-04-12 공감 (6)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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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할 대로 부패해 버린 한국교회, 출구는 없다!



부패할 대로 부패해 버린

한국교회, 출구는 없다!




칼빈이 죽어야 한국교회가 산다. 한국교회는 자정능력을 넘어 더이상 소망이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살아계시지만 신자는 없고, 예수를 믿는 이들을 많지만 따르는 이들이 없다. 근심하고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젠 생각하기를 넘어 행동할 때가 되었다. 거침 없이, 막힘 없이 정의와 공의를 향하여 손을 들어야 한다. 김근수의 <행동하는 예수>가 출간 되었다. 저자는 2013년에 이미 <슬픈예수>를 통해 진정한 혁명이 무엇인지 말했다. 이제 행동하는 예수를 통해 몸으로 혁명을 몸으로 살아가야함을 설파한다.





























































두 권도 반드시 읽어야할 책이다. 신광은의 <천하무적 아르뱅주의>와 부쉬의 <칼바르트>평전이다. 밀양에서 살인자는 하나님께 이미 용서를 받았으니 피해자의 용서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선언한다. 그 뜨거웠던 <밀양>이 <도가니>란 괴물이 되어 돌아왔고, 불사조처럼 조를 먹고 부패와 멸망을 토해내고 있다.




과연 '천하무적'이다. 누군가 괴물이 된 한국교회의 깔뱅주의를 초토화할 아서왕과 신탁의 기사들이 필요하다. 간통하다 현장에서 들켜 에어컨 붙잡다 떨어져 죽은 한기종 전 대포 모목사는 천국에 갔을까? 한심한 작태다. 삶은 없고 이론만 있다. 몸은 없고 머리가 있는 괴물이 아니던가.
























옥성호의 등장은 신선한 바람이었다. 이젠 외로운 혁명자가 되었다. 홀로 거대한 S 교회와 싸운다. 왜? 싸울까? 영혼중심을 벗어나 권력을 탐하고 탐욕스런 아르뱅주의 괴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불법이라도 교회를 위한 것이라면 선이되고, 누군가 아파하고 죽는다하여도 교회성장에 좋다면 마셔도 되는 독배를 들고 있다. 이런 어리석은 인간들이 어디있단 말인가.





오강남 교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술에 물탄듯 물에 술탄듯 모호한 경계선을 가진다. 그러나 이젠 눈여겨 보고 있다. 분명한 선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기 때문이다. 이번에 다른 종교가 아닌 개신교를 말한다. 삶이 부재한 현대 한국교회를 조준하였다. 참으로 아이러다. 그토록 존경받은 초대의 한국교회는 다 어디가고 이젠 지탄의 대상이요, 부패의 온상이 되고 말았단 말인가.











다시 김근주다. 예레미야에게 한국교회의 길을 묻는 두 권의 책이다. 반드시 읽어야할 책들이다. 예레미야는 유대의 종말을 고한 비탄의 선지자다. 스스로 자승자박하여 유다의 미래를 몸으로 보여 주었다. 아무도 그를 믿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 나쁘다고 죽이려 들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의 위력을 보였다. 뽑고 다시 심으리라고 했다. 유대가 뽑히듯 한국교회는 뽑힐 것인가. 아니면 그 전에 전심으로 회개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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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14-02-27 공감 (5)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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