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25

“군 ‘위안부’ 모집에서도 일본과 식민지 간 차별 있었다”

“군 ‘위안부’ 모집에서도 일본과 식민지 간 차별 있었다”

“군 ‘위안부’ 모집에서도 일본과 식민지 간 차별 있었다”
[짬] 신간 ‘일본군 위안부’ 펴낸 요시미 요시아키 명예교수
길윤형기자수정 2025-12-18 
등록 2025-12-18 
요시미 요시아키 일본 주오대 명예교수가 18일 오전 서울 종로구의 한 호텔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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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순 할머니 영상을 처음 본 게 1991년 11월께입니다. 일본에 오셨던 것인지 엔에이치케이(NHK) 방송이 취재를 했던 것인지 (잘 기억나진 않지만),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할머니를 처음 뵐 수 있었습니다. 그때 자신이 입은 피해를 호소하면서 ‘이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일·한의 젊은이들이 알았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그것을 보고 여기에 보탬이 되는 게 역사가의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요시미 요시아키(78) 일본 주오대 명예교수는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처음 공개적으로 밝힌 김학순(1924~1997) 할머니의 외침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난 35년의 ‘위안부 운동사’ 가운데 매우 독특한 자리를 점하고 있다. 그가 그해 12월 방위청(지금의 방위성)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발굴해 낸 6건의 공문서를 통해 일본군이 위안부 모집 과정에 직접 깊숙이 개입했다는 사실이 처음 입증됐기 때문이다. 이 문서는 1992년 1월11일 아사히신문에 보도됐고, 그로부터 닷새 뒤인 16일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는 노태우 대통령과 만나 이 엄중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 거듭 사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한·일 시민사회가 헤쳐온 지난 35년의 세월은 요시미 명예교수 개인에게도 자신의 모든 것을 건 긴 투쟁의 시간이기도 했다.

일본 내에서 본격적인 위안부 연구의 문을 열어젖힌 요시미 명예교수가 한국의 ‘정의기억연대’와 일본의 ‘정의를 위한 싸움’(Figt for Justice)이 18일 서울 글로벌센터 국제회의장에서 공동 개최한 심포지엄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35년의 연구성과와 대항 기억의 미래’ 참석을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이 행사에 앞서 한겨레와 만나 “1995년 출간한 저서 ‘종군위안부’가 나온 뒤 지난 30년 동안의 추가된 연구 성과를 종합한 새 책 ‘일본군 위안부’(이와나미서점)를 7월 출간했다면서 “이 책의 내용과 향후 과제에 대해 말씀 드리려 한국을 찾았다”고 말했다.


그에게 지난 35년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때(1980년대~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위안부 제도라는 것은 (일본)군이 만든 게 아니라 민간업자가 멋대로 만든 것이라는 이해가 꽤나 일반적으로 퍼져 있었습니다. 군이 만든 공문서가 있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을 못했죠.” 40대의 일본 현대사 연구자였던 요시미 명예교수는 이 무렵 일본군이 중국에서 벌이던 독가스를 이용한 화학전 등에 대해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미국에 유학(1989~1991)가기 전에 방위연구소에서 독가스 관련 자료를 찾다가 군 위안소의 설치를 지시한 자료를 우연히 찾은 적이 있었습니다.” 

김 할머니의 증언을 들은 요시미 교수는 더 적극적으로 자료를 찾기 시작해 1938년 3월4일 옛 육군성이 만든 ‘군위안소 종업부 등 모집에 관한 건’ 등 총 6건의 문서를 발견했다. 문서엔 위안부를 모집할 때 파견군이 통제를 할 것, 모집업자를 철저히 선정할 것, 현지의 헌병·경찰과 긴밀히 연계할 것 등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엄청난 내용이라고 생각해 복사를 떴죠.” 아사히신문에 관련 기사가 나간 뒤 일본 정부의 조사가 시작됐고 결국 이는 “위안부는 군의 ‘관여’ 아래 본인의 의사에 반해 모집됐다”는 내용 등을 인정한 고노 담화(1993)로 연결된다.

지난 30년 한일 연구성과 종합해 출간
“일본에선 만 21살 이상만 모집했지만
조선 대만에선 21살 미만도 끌려가
일본 비준한 국제조약 차별 적용 탓”

“41년 대소련 전쟁 대비해 여성 3천명
조선에서 만주로 이송됐다는 증언도”


일본군이 ‘위안부’ 모집 관여한 문건
1991년 찾아내 일본 총리 사죄 이끌어

새 책에선 한·일 연구자들의 새 연구 성과를 종합해 
위안부 제도를 만든 것은 일본 국가였다는 점을 이전보다 더 분명히 규명했다. 특히 일본·조선·대만·중국·동남아시아 등 각 지역별로 이뤄진 모집의 특성 등을 세세히 구분해 기술한 점이 눈에 띈다.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은 본토 일본과 식민지 간에 존재하는 엄혹한 ‘차별 구조’였다.



가령, 일본에선 내무성 경보국장이 1938년 2월23일 내려 보낸 통첩 ‘지나 도항 부녀의 취급에 관한 건’을 통해 

일본에서 위안부를 모집할 때는 
△이미 성매매에 종사한 적이 있고 
만 21살 이상이며 
△성병 등 기타 전염성 질환에 걸리지 않은 이들 만을 대상으로 
해외 도항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이 통첩에 근거해 1938년 11월 제 21군 사령부와 육군성의 요구에 의해 일본에서 400명의 여성이 중국 광둥성에 있는 군 위안소로 이송됐다. 일본 정부가 여러 제한을 가한 것은 1925년 ‘인신매매에 관한 국제조약’을 비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 조약을 조선·대만 등 식민지 등에는 적용하지 않는다”고 선언해 놓고 있었다. 
이 ‘차별 구조’에 의해 조선에선 일본과 달리 
21살 미만의 성매매 경험이 없는 여성도 
주로 ‘취업 사기’ 등의 수법에 의해 위안부로 끌려가게 된다. 

새 책엔 1941년 대소련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관동군 특종 연습’에 맞춰 조선에서 
약 3000명의 조선인 여성이 만주 지역으로 이송됐다는 증언 등도 소개하고 있다. 

그는 조선에서 이런 대량 동원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등을 해명하는 게 앞으로 과제”라며 “경찰 또는 행정기구를 동원하지 않고선 이런 징모(강제모집)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요시미 요시아키 일본 주오대 명예교수가 18일 오전 서울 종로구의 한 호텔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영원 기자

다음으로 힘을 기울인 것은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일본 정부의 부인과 달리 ‘성노예제’였다는 사실을 명확히 입증하는 것이었다. 
“군 위안부 제도는 1926년 노예 협약이 규정한 정의와 딱 들어맞습니다. 
  • 거주의 자유와 외출의 자유가 없었습니다. 
  • 외출을 하려면 군의 허가서가 필요했죠. 
  • 또 성의 상대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습니다. 
  • 일을 하기 싫으면 그만 둘 즉 폐업의 자유가 있어야 하지만,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이런 일본 군의 규정과 피해자들의 증언 양쪽을 살펴 볼 때 군 위안부 제도는 성노예제였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저항은 계속돼 왔다. 2007년엔 “군이나 관헌에 의한 강제연행을 보여주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주장을 각의 결정했고, 
2015년 12월 한-일 위안부 합의 때는 피해자들이 끊임 없이 요구했던 ‘법적 책임’을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2021년엔 교과서에 ‘종군위안부’라는 말을 쓰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결정했다.

요시미 명예교수는 “일본 정부는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우리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고 계속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노 담화에서 일본 정부가 약속한 것과 같이 역사연구·역사교육을 통해 이와 같은 문제를 영원히 기억해 똑같은 잘못을 결코 되풀이하지 말아야 합니다.”

길윤형 논설위원 charisma@hani.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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