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25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 | 이산의 책 42 | 후쿠자와 유키치 | 알라딘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 | 이산의 책 42 | 후쿠자와 유키치 | 알라딘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  | 이산의 책 42
후쿠자와 유키치 (지은이),허호 (옮긴이)이산2006-03-17
원제 : 福翁自傳 (1899년)




























Sales Point : 997

8.7 100자평(1)리뷰(5)

376쪽
책소개
일본 메이지 시대 계몽사상가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의 근대화와 교육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 1만엔권 지폐에 초상화가 실려있고, 문명(civilization), 연설(speech), 경쟁(competition), 저작권(copyright) 등의 번역어들의 기원을 제공하기도 했다. 또한 그의 저작은 일본의 근대 고전으로 끊임없이 읽히고 있으며, 산케이신문의 전신 '지지신보'와 명문 사립대학인 게이오기주쿠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 자서전(원제 '복옹자전')은 1897년 후쿠자와가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만년까지의 인생역정을 구술하여 속기사에게 필기시킨 것이다. 가난한 하급 무사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서양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양이론과 쇄국이 주류를 이루던 당시 일본의 서양문명화에 평생을 바친 일대기를 만날 수 있다. 일본 자전문학의 백미이자 일본근대사 연구의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는 기록이다.

성장기와 나가사키 유학 당시의 비화나 조기교육을 반대하는 자녀교육관, 술을 끊기까지의 에피소드 등 후쿠자와의 인간적인 면모를 묘사한 부분도 상당부분 포함되어있다. 또한 부국강병으로 시작하여 군국주의로 이어지는 대표되는 일본 근대 지식인의 어두운 가치관을 함께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하여, 일본 근대사에 대한 흥미로운 텍스트로 읽을 수 있다.


목차


차례

초판 서문
나가사키 유학
오사카 수업
오가타주쿠의 기풍
오사카를 떠나 에도로 가다
처음으로 미국에 가다
유럽 각국에 가다
양이론
다시 미국으로
왕정유신
암살 걱정
잡기
일신일가(一身一家)의 유래
품행과 가풍
노후의 생활

옮긴이의 해설
후쿠자와 유키치 연보


책속에서


세상이 모두 거칠어지니 사도보즈까지 입성이 바뀌어, 긴 칼을 차고 까까머리를 곤두세운 채 다니는 자들이 있었다. 당시 고케닌이나 하타모토 사이에서는 생모시 사이에 우루시몬(옻으로 무늬를 새긴 천, 특히 삼베옷)이 유행이었다. (...) 무술 일변도인 양이의 세상이 되니 큰 칼이나 투구 등의 하리코를 매달게 되었다. 이렇게 전반적인 분위기가 완전히 옛날의 무사풍으로 되어버리니, 이래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혼자 몸가짐을 조심하면서, 아무래도 칼은 필요 없다, 어리석은 짓이다, 칼은 팔아버려야겠다고 작정했다. - 본문 189쪽에서 접기
P. 71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처음으로 이런 병서를 보았습니다. 새로 수입된 이런 원서가 번역된다면 아마도 해상방위에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 하지만 이런 좋은 책은 가난한 서생이 구입할 수가 없지요.감사합니다. 잘 읽고 돌려드립니다.˝ 이렇게 무사히 마무리하고 나니 기뻤다.그 책을 베끼는 데 며칠이 걸렸는지 확실히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도 20~30일 사이에 끝냈던 것 같다. 그러니 원서의 주인은 전혀 의심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런 보물의내용을 감쪽같이 내 것으로 만든 이 일은 악한이 보물창고에 잠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접기 - Redman
P. 115 어쨌든 당시 오가타 서생들은 십중팔구 목적도 없이 고학을 하는 사람들이었지만, 목적이 없는 덕분에 오히려 에도의 서생들보다 공부를 잘할 수 있었던 듯하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의 서생들 역시 학문을 공부하면서 동시에 지나치게 자신의 앞날을 걱정하면 오히려 학업에 지장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별 생각 없이 책만 보는 것은 가장 좋지 않다. 하지만 또한 방금 말했듯이 항상 자신의 앞날만 걱정하여, 어떻게 하면 입신출세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수중에 돈이들어올까, 어떻게 하면 멋진 집에 살면서 호의호식할 수 있을까 하는것만 염두에 두고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결코 진정한 공부가 아니라고생각한다. 면학하는 중에는 그저 조용히 지내는 것이 최상일 것이라는게 나의 결론이다. 접기 - Redman



저자 및 역자소개
후쿠자와 유키치 (福澤諭吉)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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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江戶시대 막부 말기에 해당하는 1835년에 나카쓰 번中津藩 하급무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5세부터 유학을 배웠고 19세부터 난학蘭學을 배웠으며 이후 영.미 사상을 공부하게 된다. 1858년 번의 명령으로 에도에 난학숙蘭學塾을 열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게이오대학교慶應義塾의 전신이다. 1860년과 1861년에 막부 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과 유럽을 두루 살펴보고 쓴 <서양사정>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큰 명성을 얻었다. 이후 <학문의 권장>, <문명론의 개략>과 같은 책을 집필하면서 메이지시대 일본의 지적 담론을 주도한 계몽사상가이자 교육가로 손꼽히기도 했으며, 이에 따라 일본 1만 엔권 지폐 초상화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접기

최근작 : <[단한권]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큰글자책] 서양사정>,<메이로쿠 잡지> … 총 64종 (모두보기)

허호 (옮긴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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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수원대학교 명예교수로, 바이코가쿠인대학 문학박사다.
≪일본 명단편집≫ 2차분에는 비교적 읽기 쉽고 재미있는 내용의 단편을 선정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와 호리 다쓰오의 작품을 선택했는데,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젊은 시절부터 즐겨 읽었던 작가이고, 호리 다쓰오는 비교적 뒤늦게 심취하게 된 작가다.
역자는 학창 시절 <오후의 예항(午後の曳航)>이라는 영화를 보고 원작자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에게 이끌려 일본 문학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국내에서는 개봉되지 않은 <오후의 예항>은 크리스 크리스토퍼슨과 세라 마일스가 주연한 영국 영화로서, 원작 소설의 맛을 거의 완벽하게 영상으로 재현한 뛰어난 작품이었다.
그 이후로 일본 유학 중에는 문학평론가 히라오카 도시오(平岡敏夫)와 시인 기타가와 도루(北川透)의 영향을 받아 비교적 탐미적 경향의 작품들에 관심을 갖게 됐다. 연구 논문으로는 <황순원과 미시마 유키오 비교 연구> <다니자키 준이치로 작품 연구> <미시마 유키오 대표작 연구> <호리 다쓰오 작품 연구> <미시마 유키오와 엔도 슈사쿠 비교 연구> <미시마 유키오와 오에 겐자부로 비교 연구> <나쓰메 소세키 작품 연구> <다자이 오사무와 미시마 유키오 비교 연구> 등이 있다. 번역 작품으로는 ≪금각사≫ ≪인간실격≫ ≪포로기≫ ≪산시로≫ ≪노르웨이의 숲≫ ≪고목탄≫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무라카미 하루키를 논하다>,<미시마 유키오의 작품에 관한 양성대립의 구조> … 총 29종 (모두보기)

평점
분포

8.7



이제는 그를 역사의 무덤에서 건저 내 제대로 알아야 할 때
verso 2007-10-28 공감 (2) 댓글 (0)


단절과 변혁의 시대, 계몽사상가의 일대기

시간을 맞추어야 할 급한 약속이 아닐때는 주로 버스를 이용하지만, 한때 서울시내에서 지하철이 나의 주된 이동수단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지하철을 이용하면서 아주 이상한 점을 발견했는데 다름아니라 1호선과 2호선 이후의 노선방향이 거꾸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1호선은 지하철이 왼쪽방향으로 출발하는 반면에 2호선부터는 차량이 오른쪽 방향으로 나아가고, 더 놀라운 사실은 멀쩡이 오른쪽으로 달리던 지하철도 시경계를 넘어서는 지역부터는 갑자기 방향이 또 뒤집어진다. 가만 생각해보면 지하철이 아닌 우리나라 기차선로가 모두 우리의 일상에 부자연스러운 좌측통행이다. 이유는 모두 알다시피 우리가 철도를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의 지하철 1호선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나면 초등학교 시절 복도를 걸을 때 좌측통행을 강요받던 것만큼 마음이 불편해진다. 더구나 완전히 변혁된 것도 아니고 현재와 과거의 우리가 뒤섞여 있음을 알아차릴 때는 불편함을 넘어 혼동스럽고 귀찮아진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그런 혼동스러움이 일상이었던 시절을 살았다. 에도시대를 연 도쿠가와 막부의 막바지에 태어나 왕정유신(메이지유신)을 겪었고, 쇄국이냐 개방이냐를 놓고 일본전역이 들끓던 시대를 넘어, 유신시대가 안정화 되고 일본제국주의가 움터 탐욕의 눈을 희번득거릴 때 이 글을 썼을 것이다. 그의 신념대로, 그리고 그의 예견대로 일본이 과거 봉건주의의 탈을 벗어던지고 서양 문명국가와 어깨를 견줄 근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목도하면서 그는 느긋하게 과거를 회상했을 것이다. 부럽다는 생각보다 그저 불편했다.

일본에 있어 데지마(出島)는 서양문명의 흡입구와 같은 곳이라 알고있다. 과거 300년 동안이나 일본과 우호통상관계를 유지해 온 네덜란드는 자국인을 데지마라는 한정된 공간의 섬에 거주시켰고, 여기서 흘러들어온 문물은 일본에서 난학(蘭學)을 번창하게 했지만, 전통적으로 중국과 조선과의 관계에서 형성된 유학과 유교는 일본사회를 지배하는 주된 시류였다. 그러하기에 후쿠자와가 태어나고 성장하던 시기에 유학과 난학 등 서양학문과의 대립은 쇄국과 개방의 정치이념으로 대변된다. 후쿠자와 역시 하급무사의 자제로 굴레처럼 덫씌워진 봉건적 문벌제도와 관습, 위계질서에 대한 거부감으로 난학을 배우게 되지만 개항된 요코하마에서 받은 충격으로 난학을 넘어 영학(英學)에 몰두하는데 이 때가 1850년대 후반이니 그 당시 조선의 상황과 비교하면 상당히 빠른 외부에 의한 근대화가 이루어진 셈이다.

후쿠자와 본인의 서술대로 그는 정치적 인물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정치에 대해서는 제3자의 입장을 취했는데 이는 어떤 정치세력도 그의 서양학문에 대한 경외와 열정을 뒷받침해 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저 책을 읽는 서생이라 여겼으며 오히려 혼돈의 세기에 그의 미국, 유럽에 대한 외유경험을 다양한 저술과 번역 그리고 교육에 헌신했을 뿐이었다. 무(無)의 상태에서 고학할 수 밖에 없었던 경험이 뼈에 사무쳤기에 미국에서 최초로 Webster 사전을 가져왔을 것이며, 여비를 다 털어 런던에서는 원서만을 가득 사왔을 것이다. 현재의 게이오대학인 게이오주쿠를 설립하고, 수 많은 번역과 저작활동을 했으며, 신문을 만들어내고, 많은 서생들을 길러내어 일본 전역에서 활동할 기틀을 만들었으니 그는 계몽사상가임에 틀림없다. 스스로 일본은 미개한 봉건국가라 생각했고 이를 깨쳐야 진정한 자주독립이 있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후쿠자와에 대한 나의 유감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서양문명에 필적하는 부국강병의 대일본을 만들어야 한다는 당위성에 왜, 무엇을 위한 개화인가에 대한 논의는 지극히 찾아보기 힘들다. 흔히들 20세기초 근대화와 민족주의의 떼어낼 수 없는 관계로 설정하듯 후쿠자와 역시 이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왜?'에 대한 대답없는 개화는 결국 제국주의 포함외교로 흐른 역사적 사실을 낳았을 뿐이다.

"나라 전체의 대세는 오로지 개진과 진보로 기울어 차츰 그 결실을 맺게 되고, 수년 후에는 그 성과가 청일전쟁에서 관민일치의 승리로 나타났으니, 유쾌하고 고맙기 그지없다. '살아있다보니 이렇게 좋은 구경도 하는구나. 먼저 죽은 친구들은 불행하다. 아, 보여주고 싶구나'하며 나는 몇 번이고 눈물을 흘렸다. 사실 청일전쟁은 아무것도 아니다. 단지 그것은 일본외교의 시작에 불과할 뿐이니 그렇게 기뻐할 것도 못 되지만, 그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면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일들의 원인이 어디에 있겠는가. 신일본의 문명부강은 모두 선인유전의 공덕에서 유래하며, 우리는 마침 좋은 시절에 태어나 조상님 덕분에 뜻을 이루게 된 것이니, 나에게는 두 번째 큰 소원성취라 할 수 있겠다."(364p)

애국적 민족주의 때로는 서양우월주의가 바탕이 된 그의 근대화는 일본제국주의로 흐르는 기틀이 되었을 법하다. 그러나 이 자서전은 무려 100여년 전인 1898년에 탈고된 내용인 점을 고려하면, 그의 탁견과 서양문물에 대한 적극적 의지, 학문과 교육에 대한 집념은 대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20세기를 이끌어 낸 계몽사상가로서의 일생이 잘 표현되었고 - 오히려 그의 자화자찬식의 업적보다는 신념과 생활에 대한 논의가 더 많다 - 대담식이라 읽기도 수월하며, 오래된 문헌임에도 번역이 매끄럽다. 근대 일본을 이해하기 위한 사람들에게 추천할만한 문헌이다.

왜 일본 최고액 화폐인 1만엔 지폐에 '후쿠자와 유키치'의 얼굴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한반도만큼 오래된 역사를 가진 일본에서, 1만원 지폐의 세종대왕만큼 일본인에게 그는 위대한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일본인은 철저히 봉건 과거와 단절하고 여기서부터 시작이라 생각하는 것인지? 책장을 덮으며 가만가만 생각에 빠진다.
- 접기
dalpan 2007-03-04 공감(1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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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개혁과 혼란의 격정을 극복하고자한 유신지사.





이 책은 明治 시절, 소위 말하는 일본의 대 개혁, 고대 봉건 사회의 신분제와 보수적 사고를 탈피하고자

하는 일본의 대개혁 유신에 대해서 제일먼저 앞장섰던 후쿠자와 유키치의 일생일대를 담고있는 자서전이다.

"메이지 유신" 이라 하면 가장먼저 떠오르는 것이 죠슈파와 샤쓰마이다.

죠슈는 외세에 대해 강경파로 "매 파" 라 불렸고.

그에 비해 샤쓰마는 "비둘기 파" 라고 불렸던 비교적 온건 파 의 길을 걸었다.

여러가지 유혈충돌, 주요인물 암살, 살인, 구타 가 판을 쳤으며, 버려진 마을이나 도시가 생기기도 했다.

한마디로 일본은 혼란 그 자체 였다. 해안에는 서양에서 왔다고 하는 '검은 배' 黑船(쿠로 후네)라는

괴상한 것을 타고 온 이상한 사람들이 통상을 조약하려 대포를 발사하는가 하면.

고대 봉건사회사고 에 탈피하지 못한 봉건 고수파인 보수파들과 선진 문물을 겪고 돌아온 유신지사들 과의

갈등이 매우 많이 빚어졌으며 심지어 서로 죽이기 까지 했다. 일본에선 和(와)를 존중하고 서로 싸우거나

반목하지 아니한다는 원칙을 지키고 끝없이 유지 시키고 있었는데 말이다.

여기서 사태는 두 가지로 나뉘는데, 유학자들의 이야기와 일본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나뉜다.

이 책에서는 유학자의 이야기로 외국에 간 후쿠자와가 여러가지 선진문물과 서양의 전제 체제, 그 외

많은 세계의 새로운것을 접하고 있을때 일본의 '번'의 거리에는 커다란 칼부림의 유혈충돌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설적인 뺨에 십자가의 흉터가 아로 새겨져 있었다고 전해지는 발도술(칼을칼집에 뽑아 베어버리는 기

술) 의 대가, 발도제 (도제: 아주 소질이 있는 능숙한 천재) 히무라켄신과 이에 반대되는 사이토하지메

(보수파인 신센조3번대 조장) 그들은 밤거리,해가 어둑어둑 져가면서 붉은 빛이 모두 소멸했을때 서로

나타나 거리를 뛰며 서로를 칼로 베기 위하여 거친 숩을 내 쉬었다.... 이런 이야기는 이책과는 관련이

없으나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한 나라가 개혁을 단행하려면 30년이란 긴 세월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혼란과 많은 소중한30년의 세월이 흘렀다. 10년은 혼란 그차체였고,

나머지 10년은 나라를 세우기위해 기틀을 마련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10년은 후의 희생된 자들을 추모하며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어 가는데 힘쓰는 시간이라고 한다.

희생을 치른 일본은 무서운 성장을 단행하고 마침내 공업과 상업이 발달한 산업사회로 면모가 바뀌어 군국주의의 길로 치닫게 된다.

이 책을 읽고 후쿠자와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히 강한것 같았다.

일본의 화폐에 가장 액수가 높은 1만엔 짜리 지페에 당당히 인쇄 되어 있는 인물이다.

일본인들이 그만큼 소중히 여기는 후쿠자와 유키치를 파악하면서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존중하고, 나아가 우리나라의 문화와 역사또한 준중받게 될 그러한 실마리를 바탕으로 잡아야 할 것이다.
- 접기
ymy5197 2006-07-02 공감(8)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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