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29

부드럽고 약한 사람들의 고리가 만든 변화 - 고 정병호 교수의『긴 잠에서 깨다』를 읽고

부드럽고 약한 사람들의 고리가 만든 변화 - 고 정병호 교수의『긴 잠에서 깨다』를 읽고


부드럽고 약한 사람들의 고리가 만든 변화 - 고 정병호 교수의『긴 잠에서 깨다』를 읽고

입력
고 정병호 교수의 『긴 잠에서 깨다』를 읽고
필자: 권혁범 대전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문화인류학자인 고 정병호 선생의 유작『긴 잠에서 깨다』 ⓒ푸른수
문화인류학자인 고 정병호 선생의 유작『긴 잠에서 깨다』 ⓒ푸른수


1989년 당시 미국 일리노이대-어바나 샴페인 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인류학도 정병호는 일본 홋카이도에서 현장 탐사의 일부로 보육 문제를 조사 중이었다. 그때 만난, 홋카이도 출신으로 아이누 등의 소수자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도노히라 요시히코는 그에게 '슈마리나이 우류댐' 건설과정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인 강제노동 희생자와 일본인 노동자 등의 유해를 발굴하자는 제안을 했다. 정병호는 긍정적으로 답했다. 그가 교수가 되어 학생들과 함께 가서 약속을 지킬 때까지는 무려 8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그 일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작년 이맘때쯤 갑자기 세상을 떠난 고 정병호 선생(한양대 명예교수)은 균형 잡힌 시각으로 다수의 글을 발표한 문화인류학자이자 따뜻하고 자상한 선생이었고 무엇보다도 열정이 넘치는 시민운동가였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저소득층 보육 운동에 뜻을 두고 소수의 사람들과 선구적인 일을 벌였다. 80년대의 학생/노동자 중심의 조직 운동과는 결이 다른 운동이었다. 그는 잠시 유학을 떠났다가 귀국해서는 공동육아 협동조합을 설립하고 관심을 넓혀 '남북 어린이 어깨동무'를 주도적으로 결성했으며 탈북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대안학교를 만드는 등 탁월하고 민주적인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 와중에 홋카이도 강제노동 희생자 유해 발굴 사업에 뛰어들어 거의 18년간 활동했다.  

고 정병호(오른쪽) 한양대 명예교수와 배우자 정진경 전 충북대 교수의 모습. ⓒ정진경씨 제공
고 정병호(오른쪽) 한양대 명예교수와 배우자 정진경 전 충북대 교수의 모습. ⓒ정진경씨 제공


이번에 유작으로 출판된 이 책은 유해 발굴 및 송환 운동에 대한 섬세한 기록일 뿐만 아니라 기존의 국가, 국적, 민족, 국경 등에 도전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구술 텍스트이기도 하다. 가령 이 운동에 참여한 다양한 젊은이들은 처음엔 '한일 대학생 공동 워크숍'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했지만, 점점 그것이 현실에 조응하지 못하는 명칭임을 깨닫게 된다. 갈등과 협력을 통해서 한국인, 일본인, 아이누인, 조선인('자이니치') 등의 다양한 주체가 안팎에 존재함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이 운동은 적지 않은 성과를 남겼다. 또한 참가자들은 이주민과 소수자에 대한 새로운 인식도 가지게 된다. (이 운동은 '평화 디딤돌' 조직으로 이어진다). 젠더에 따른 전통적인 성별 분업을 거부하는 것만으로도 참여자들은 '발굴' 이외의 깨달음을 얻는다. 현장에 압도적으로 여성 대학생이 많았던 것도 이러한 운동의 다층적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빼어난 이야기꾼인 정병호 선생은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면서 큰 그림을 놓치지 않는다. 그것은 반일과 친일, 가해자 대 피해자 같은 개념과 감정이 포착할 수 없는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영역이다. 유해 발굴 운동은 표면적으로 과거를 다루는 사업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현재와 미래까지 포괄하는 초국적 운동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제대로 유해를 발굴하기 위해서는 일본 정부와 사회의 전향적 변화와 그리고 한국의 새로운 시각과 전폭적 동의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와 개인적 공적 인연이 있는 나는 책을 읽으며 몇 번이나 울컥했다. 슬프고 감동적이며 때때로 희망도 보았다. 그러다가 그가 인용한 한 재일조선인의 고백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선생님, 통일이 돼도 우리는 차별받을 것 같아요. 남한에서도 북한에서도, 그리고 일본에서도요." 정 선생이 얘기한 "부드럽고 약한 사람들 사이의 고리가 결국엔 거대한 권력이나 체제를 움직이는 변화"는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필자: 권혁범 대전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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