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31

한의학 - 위키백과, 韓醫學, Korean Medicine

한의학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의학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의학
침을 사용해 치료 중인 모습
학문명한의학

한의학(韓醫學, Korean Medicine)이란 한국에서 기원하고 꾸준한 교류를 통해 발전한 인체의 구조·기능을 탐구하여 보건의 증진, 질병의 치료·예방 등에 대한 방법과 기술을 연구하는 전통학의 일종이다.

명칭

일제 강점기 이후 일본의 영향으로 일본식 용어인 한방(漢方)으로 불렸으나[1] 해방후 북한에서 먼저 동의(東醫)라는 명칭을 사용하며 전통의학의 자주성을 강조하자, 한의학의 漢을 韓으로 바꿔표기하다가 1986년에 의료법개정으로 명칭변경이 법제화되었다.[2]

현대의학과의 차이

첫째. 현대의학과 다른 점은 사람의 몸을 환원적인 개체의 모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유기체로 본다는 것이다. 한의학에서는 사람의 몸은 또 다른 우주라고 하여, 서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기관 사이에도 흐름이 존재하고 이것이 질병을 치료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본다. 즉 한의학은 전체적 통찰적인 관점(거시적)에서 인체를 바라본다.

둘째. 치료관점에서 본다면 현대의학이 미시적인 변화(병인)이 질환을 만들어낸다고 보고 이 변화를 되돌리고자 한다면, 한의학은 거시적인 변화가 질환을 만들어낸다고 보고 치료 또한 이 부분에 중점을 두고 있다.

한의사는 망진(望診), 문진(聞診), 문진(問診), 절진(切診)의 사진(四診)을 통해 수집된 정보를 종합 분석함으로써 질병에 대해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질병에 대해 한의학적 진단을 내리게 된다.[3] 이러한 진단을 바탕으로 한의사는 약침부항추나한약한방물리치료[4] 등과 같이 선조들로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한의학(韓醫學)을 기초로 한 한방의료행위와 이를 기초로 하여 현대에 들어 새롭게 응용·개발한 한방의료행위[5]를 통해 환자를 치료하게 된다.

서양에서 한의학은 대체의학 또는 대체요법의 일종으로 여겨지며 이는 한국에서 한의학이 의료법상 대체의학으로 분류되지 않는 것과 대비된다. 한국에서 한의학은 중국의 중의학, 일본의 한방의학처럼 현대의학과 병행하여 주류의학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특징을 보인다.

치료 방법

한약

한약

하나의 방제가 그와 같은 효능과 기전을 가짐은 처방을 구성하는 본초들이 가지는 성질과 상호작용하면서 이루어진다. 이것을 방제라고 한다.[6]

침구치료

한국한의학연구원의 한국 침법 발굴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침구술은 다음과 같다.[7]

  • 부산 사상침법
  • 서울 태극침법
  • 서울 파동침법
  • 서울 월오사암침법
  • 서울 한침법
  • 대구 평침화침법
  • 충북 영동 곡운침법
  • 대전 황구침법
  • 서울 격팔상생역침
  • 서울 동양자연의학연구소
  • 전남 함평 안침
  • 경북 고령 전통한침
  • 서울 체절신경조절요법
  • 경기도 과천 주행침법
  • 서울 편자요법
  • 충북 청원 할침
  • 대구 오기침법
  • 서울 한서자기요법
  • 경기도 용인 삼극침법
  • 경북 영주 회침
  • 충북 청주 중완침
  • 충북 제천 독맥부항요법
  • 제주 신침요법
  • 제주 소아침법
  • 서울 타임라인 의약침법
  • 부산 에너지 테라피 침법
  • 충남 홍성 소침도 요법
  • 서울 파동공진요법
  • 대구 화인기경요법
  • 서울 혈위매선요법
  • 서울 정통사암오행침
  • 서울 화주경락온열요법
  • 부산 태곤 왕뜸
  • 대구 요통특화 직접구요법
  • 충북 청주 수경요법
  • 서울 용화당 인산뜸
  • 전남 해남 금사주입요법
  • 부산 마야구
  • 대전 황제침법
  • 서울 도암 사대체질팔상침법
  • 서울 거머리요법
  • 서울 석호침법
  • 서울 청자괄사요법
  • 서울 EFT
  • 서울 SI기법
  • 서울 평평침법
  • 강원도 양구 벌침요법
  • 강원도 강릉 활혈침
  • 인천 강화도 북한침법
  • 강원도 강릉 기문둔갑침법
  • 대전 목침요법

약침치료

약침요법은 한국 한의학에서 시작되어 발전해 온, 차별화된 매우 독특한 치료기술이다. 학문적으로 분류하자면 약침요법은 침구요법과 약물요법을 결합한 신침요법의 일종이다. 침구요법은 경락론을, 약물요법은 기미론을 바탕으로 하므로 약침요법은 경락론과 기미론 모두를 근간으로 한다. 시술하는 과정에서 주사기를 사용하나 치료 약물의 선정은 기미론, 치료 부위의 선정은 경락론을 위주로 하므로 약침요법은 과학기술 및 의료기기의 발달로 탄생한 한의학의 독특한 치료기술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약침은 1963년 한약업사인 남상천의 저서 [경락]에 의해 세계 최초로 소개되었다.[8][9]

대표적인 연구단체로 사단법인 대한한의학회 정회원 학술단체인 대한약침학회 가 있어, 안전한 약침제제의 조제법 연구 및 다양한 약침액의 개발을 위해 본 학회 연구실을 개설하여 현재 KGMP 시설에 준하는 무균실을 갖추고 회원들이 연구에 매진하고 있으며, 신뢰받을 만한 연구역량을 회원 및 대외에 알리고자 노력하고 있다.[10]

교정치료

인체의 균형을 중시하는 한의학의 대표적인 치료법 중에는 교정치료가 있는데, 이는 주로 척추를 교정하여 인체의 정상 대사를 찾아주는 데 의미가 있다.

추나는 대표적인 교정치료 중 하나이다. 대표적인 연구단체로 척추신경추나의학회 가 있다. 추나요법은 한의학 경전인 『황제내경』 등에 기록된 도인안교에서 유래된 치료법으로서 근골격계 기능이상 및 관절가동성 장애에 대한 관절교정을 주로하는 정골 추나술; 경혈 (각종 반사점 포함)에 대한 자극과 경근(근육, 인대, 근막)의 기능이상을 바로 잡는 경근 추나술 ; 수동운동 및 능동운동을 통하여 경근(근육, 인대, 근막) 및 관절의 기능이상을 해소하고 국부의 운동기능을 개선시키는 도인 추나술을 포함하는 수기치료(손으로 하는 치료)를 가리킨다.[11]

또한 대한한의학회 정회원 학술단체인 척추진단교정학회 보관됨 2014-12-18 - 웨이백 머신 가 있어 공간척추교정학으로 인체 구조 기능을 연구하고 교육하고 있다. 공간척추교정학은 골반 및 척추를 교정해 근골격계 질환뿐만 아니라 내장기계 질환, 만성질환, 성인병, 알레르기, 면역질환, 난치병 등 전신질환을 치료하고 예방 교육하는 통합치료의학이다. 시술법과 치료효과를 표준화하고 객관화하기 위해 고려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공학부 ERC센터와 공동연구업무협약과 콘소시움을 구성해 인체공학적인 차원에서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12]

심리치료란 어떠한 사람의 심리를 바꾼후 처방하는 것이다. 한의학에서는 마음을 단순히 하나의 기관의 기능으로 보지 않고 몸 전체의 균형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설명한다.

외과수술

현대에는 도침요법 등 마취가 필요하지 않은 시술들을 중심으로 외과시술이 이루어지고 있다.

부작용

한의학에서 사용하는 치료 역시 다른 여타의 의약품 및 처치와 동일하게 부작용 등이 보고되고 있다. 한약의 경우 2016년까지 국내외에 보고된 244건의 한약 RCT에서 보고된 이상반응을 살펴본 결과 15,441명의 복용자 중 480건(3.1%)에서 이상반응이 보고되었으며, 258명에게서 혈액검사상의 변화가 관찰되었다. 소화불량(44.3%), 신경증상(17.3%), 식욕부진(16.3%)가 주요 이상반응이였으며, 간수치변동은 5명(1.1%)였다.[13] 현재 한약부작용 중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부분은 Aristolochic acid로 인한 신독성이다. 광방기, 관목통 등이 여기에 해당되며 2000년 이후 대한약전에서 삭제되었다.

현재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은 한약의 간독성 부분이다. 한약간독성 관련 대규모 연구 2가지를 소개하면 2012년 소화기학회지에 보고된 연구로 100병상 이상의 다기관 연구로 약인성간손상의 비율과 위험인자에 대하여 살펴보는 연구였다. 약인성 간독성의 비율은 10만명당 12명으로 타국과 비슷했으며 보고된 371명의 원인에서 "herbal medications" (102, 27.5%), "prescription or non-prescription medications" (101, 27.3%), "health foods or dietary supplements" (51, 13.7%), "medicinal herbs or plants" (35, 9.4%), "folk remedies" (32, 8.6%), "combined" (30, 8.2%), "herbal preparations" (12, 3.2%), and others (8, 2.2%)로 보고되었다.[14]

2015년 대체의학회지에 보고된 코호트 연구에 의하면 근골격계 질환으로 입원한 6,894명의 입원환자에게서 한약 복용 전과 후의 LFT통한 간수치 변화를 살펴보았는데 입원당시 354명(5.1%)의 수치상 이상이 있었으며, 퇴원시에는 217명(3.1%)에서 간수치 이상을 보였다. 정상이었던 환자 중에서 27명(0.6%)에서 수치상승을 보여주었다.[15]

한의학계는 국내에서 진행된 이들 연구는 국내의 의료체제를 고려하였을 때 이해관계로 인한 편향이 작용하였을 것이기에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미국에서 2015년에 발표된 연구 자료에 따르면 약인성 간손상을 입은 환자 899명을 조사한 결과 항균제(46.52%), 순환기계 약제(10%), 중추신경계 약제(9.35%), 항종양제(5.59%), 진통제(3.76%), 면역억제제(3.08%) 등 약으로 인한 간 손상이 약 80%이상으로 나타났으며 약초나 음식물에 인한 간손상은 16.52%라고 한다.[16]

2015년 대전대학교에서 국내에 보고되었던 한약의 간독성에 대한 자료를 체계적 고찰한 결과[17], 한약에 의한 간독성 유발 사례로 보고된 사건의 약 90%가 전문가의 처방에 의한 한약이 아니라 개인이 단일 약재를 임의로 복용하거나 건강원 등에서 복용한 경우라고 밝혔다. 나머지 10%의 간독성 사례는 한의사에게 처방받은 약제에 의해 발생했기에, 체계적인 시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개인의 임의로 처방되는 한약제 자체의 위험성을 시사한다.[18]

침, 부항, 약침, 뜸의 경우 문제는 각 술기에 따른 특수한 부작용이 아닌 주로 침습적 처치로 인한 의료사고로 피부질환(발적, 물집) 및 감염(봉와직염, 골수염), 의인성기흉, 화상 등이 보고되고 있다. 한의학계는 이러한 의료사고는 전문의료인에게 시술을 받을 경우 그 위험성이 줄어든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전통의학

한국에서는 삼국시대 이전에도 독자적인 의학이 발달해 일본에 의료기술을 전해주기도 하였다. 고려 말기에는 중의학에서 사용하는 본초(本草)와 한국에서 사용하는 한약재인 본초의 차이점을 구분한 '향약(鄕藥)'이 나타난다. 이러한 노력이 조선시대 초기 '향약집성방' 등의 책자의 편집으로 이어진다.

광해군 재위 기간에 허준은 '동의보감'을 집대성하게 되는데, 내경과 외형, 잡병, 탕액, 침구편 등으로 나뉘어 만든 점과 치료 부분을 탕액, 음식, 침구, 도인(수양법)으로 정리하고 있는 점은 기존 임상서와 많은 차별을 둔 역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중국 중심의 '한의학(漢醫學)'으로부터 '동의(東醫)'라고 하는 이름을 조선후기 동무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으로 이어지게 한다. 한편 동의보감 이후의 임상서적은 동의보감을 간추려 보는 방식이 유행하여 조선 말기 황도연의 방약합편은 광복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의학 임상가가 애용하는 책이 되었다.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은 체질의학이라는 한국의 독특한 의학사상으로 익히 알려져 있으며 조선 성리학적 세계관이 투영된 의학이라는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자연과 사람, 사회와 사람, 사람과 사람, 물질과 사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만든 심신의학이다.

한편 일제 강점기 중에 선교사를 통해 전래된 의학과 학문 논쟁이 일기도 했는데, 여기서 조헌영은 '통속한의학원론'이라는 책에서 한의학으로 보는 인간관과 의학으로 보는 인체관의 차이점과 한의학의 특수성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근현대의 한의학

조선 말기 고종, 순종 때 활동했던 의사들은 조선후기까지 이어온 한국 한의학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조선 후기까지 이어진 한의학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개항기 유입된 의학으로 인한 한의학의 위기를 점차 인식하기 시작한 세대였다. 일부 인물들은 궁중에서 어의로 근무하면서 세계 의료계의 변화를 느끼면서 진료를 했고, 민간에서 활동한 인물들은 한의학에 대한 국민적 선호를 바탕으로 사회적 입지를 굳혀나갔다.

궁중에서 어의로 근무한 인물들은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일성록 등 궁중의 역사 속에서 그 활동상을 찾아볼 수 있다. 박준승(1847~?), 홍철보(1853~?), 서병효(1858~1939) 등 이 시기 어의들이 치료의 공적으로 상을 받거나 관직의 품계가 상승하거나 지방관에 임명되었다는 기록들이 나온다. 이들 어의는 일제가 조선을 점령한 1910년 후에도 한의사 단체를 설립하거나, 한의학 교육기관의 운영 등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일제가 조선을 점령하자, 이들은 크게 좌절하여 궁중에서 나와 서울 장안에 한의원을 개설하여 진료활동을 하기도 했다. 일제의 의학 위주의 정책은 이들로 하여금 한의학 부흥을 위한 운동에 나서도록 했고, 이 때마다 이들은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된다.

이준규(1852~1918)는 1906년 의방촬요라는 제목의 의서를 간행하는데, 이 책은 고종의 명령을 받고 직접 지은 조선 최후의 관찬의서라는 데 의의가 있다. 이준규는 당대에 명망 있던 어의로서 백성에게 도움이 될 의서를 만들어달라는 고종의 뜻을 받들어 책을 지었다.

배석종(1874~?)은 어의로 1906년 상중임에도 고종이 치료를 위해 입궐할 것을 명할 정도로 실력 있는 명의였다.

홍재호(1872~?)는 구한말 궁중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일제강점기에 '음양백초정'이라는 약물을 개발하여 대중화시킨 어의 출신 한의사이다. 그는 약물 개발로 얻어낸 대중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동아일보>와 의방유취를 찬양하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개항기에 민간에서 활동하면서 한의학 연구로 시대를 빛낸 3대 명의 황도연(1807~1884), 이제마(1836~1900), 이규준(1855~1923)의 활동도 두드러진다. 이들 세 인물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온 한국 한의학의 명맥을 현대 한의학으로 계승한 학술 대가들이다. 유의라는 공통점을 지닌 이들은 당시 최고의 지식인들로서 독창적인 학문관을 드러내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인물들이다. 1898년 최규헌과 이학호는 대한의사총합소라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한의사 단체를 구성하는데, 이 단체는 이후 설립되는 한의사 단체들의 모태가 되었다. 이 단체는 1909년에 취지서를 내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 때 발기인 명단에 들어간 인물들은 임병후, 김해수, 김진하, 김양제, 홍종철, 조병근, 김관직, 이해성, 경도학, 노구영, 장형빈, 정재철, 이희풍 등이다. 1904년에는 장용준(1867~?)을 중심으로 동제의학교라는 한의학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는데, 이 학교는 이후 설립된 한의과대학의 모태가 되었다. 이 학교에 도교수로 선발되었던 김영훈(1882~1974), 전광옥(1871~1945) 등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유흥기(1831~?) 같은 인물은 김옥균박영효홍영식, 서광법, 백춘배, 정병하, 이종원 등 개화파 지도자들을 키운 '백의정승'으로 명성을 떨쳤다. 조성찬(1865~1942), 손사준, 심희택 등은 이 시기에 명의로서 장안에 이름을 널리 알린 인물들이었다. 구한말 이들의 활동은 일제의 폭압이라는 길고 긴 터널을 뚫고 지나갈 바탕을 만들었다. 이들의 활동은 현대 한의학의 정신적 자양분이 되었다.

1910년 국권이 일제로 넘어가면서 한의학은 위기에 봉착했다. 일제가 1905년 통감부를 설치하여 한국에 대한 간섭을 본격화하면서 이듬해인 1906년 국립의료기관인 광제원에서 강제로 서양의학 위주의 시험을 치러서 한의사들을 축출하는 등 한의학을 탄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렵 한의들은 고종의 도움으로 1904년 동제의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었는데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후원자인 고종이 강제로 퇴위 되면서 1907년 동제의학교가 폐교되고 모처럼의 한의학 공교육의 기회도 사라지게 되었다.

1913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제정된 의생제도 역시 한의학의 위상을 떨어뜨렸다. 의생제도가 시행되면서 한의사를 '의사라는 호칭보다 아래의 '의생'이라는 호칭으로 격하시켜 부르기 시작했다.

1914년 조선의생회에서는 '한방의약계'라는 학술잡지를 간행하는데, 이 잡지는 한국 최초의 한의학 학술잡지라는데 그 의의가 있다. 전국에 있는 한의사들은 1915년 가을, 공진회라는 산업박람회를 계기로 770여 명이 창덕궁 광장에 모여 전선의생대회를 열었다. 이때 전선의회라는 한의사 단체가 구성되었다. 이 단체의 회장으로는 지석영, 부회장으로는 최동섭, 총무로는 김수철, 임원으로는 조병근, 경도학, 김영훈 등이 선출되었다.

1921년에는 한의사들의 친목과 학술진흥을 목적으로 하는 동서의학연구회라는 단체가 설립되었다. 회장은 김성기, 부회장은 이을우였다. 동서의학연구회는 1923년부터 '동서의학연구회월보'라는 학술지를 간행하면서 학술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이 단체는 1936년 4월 18일에 동아일보 후원으로 '통속한의학강연회'를 열고 한의학의 확산을 위해 노력한다. 이때 김영훈은 '폐병과 뇌염에 대하여', 신길구는 '민중보건과 한방약', 조헌영은 '한방의학에서 본 현대병'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한편, 1935년에는 성주봉을 발행인으로 하는 '충남의약'이 창간되었다. 충남의약은 충남의약조합이라는 충청남도에 조직된 한의약계를 총망라하는 단체에서 간행한 기관지로서 1937년에 '한방의약'이라고 이름을 바꾸어 1942년 제50호까지 간행되었다.

1939년 4월 16일과 17일 양일간 태평동 부민관에서 동양의약협회의 결성식이 거행된다. 이날 창립총회에서는 이사장 김명녀, 부이사장에 조인섭, 이정옥을 선출하고, 의약계를 망라한 42명의 이사를 위촉하여 총무, 재무, 연구사업의 각 부서를 정했다. 또한, 한방의약전문학교와 부속한방병원을 설립하고 학술지 및 한방문헌을 간행하며 한약재의 생산 권장과 조달 등을 실천할 것을 결의했다.

노병희(1850~1918)와 조종대(1873~1922), 강우규(1855~1920)와 심병조(1894~1945) 등은 일제에 저항한 한의사들로 이름이 높다. 이들의 독립운동활동은 청사를 빛내고 있다.

일제강점기 한의사들은 시대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학술 논쟁을 전개했다. 1934년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소개된 한의학 분흥 논쟁은 특히 유명하다. 당시 조선일보에 실린 조헌영, 장기무, 정근양, 이을호 등의 논쟁은 한의학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을 유도해내기에 충분했다.

일제강점기 한의학 학술잡지를 살펴보면 당시 어떤 문제가 주된 논쟁거리였는지 분명해진다. 이 시기 한의들은, 시대에 맞게 한의학을 개량하고 한의사들의 의식을 개혁해 진정한 보건의료인으로서의 자질을 함양시키려고 했으며 한의사에게 주어진 사회적 소명을 수행하여 한의학의 사회 속에서의 위치를 정립할 것을 갈망했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한의학을 부흥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1947년에 동양의학회라는 학술단체가 결성된다. 이 단체는 1947년에 '동양의학'이라는 학술잡지를 간행하면서 조병근, 김영훈, 홍재호, 신채성 등을 명예회장으로 추대하여 한의학 부흥을 위해 노력했다.

교육계에서의 활동도 빛났다. 1946년에 동양의학전문학교설립기성회에 경기도의 한의사들이 경기도의생회관을 기부하는데, 이것이 바탕이 되어 1948년 한의학교육기관인 동양대학관이 설립된다. 박호풍이 초대 학관장을 맡았다. 이 학교는 1951년에 서울한의과대학으로 승격되었고 1953년 동양의약대학을 거쳐 1964년 동양의과대학으로 교명을 바꾸면서 더욱 발전하여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의 모태가 되었다. 1957년에는 박성수, 김장헌, 홍성초 3인의 한의사들이 대학교수 자격을 공식적으로 획득하면서 현대 한의과대학 교육이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965년 경희대학교가 동양의과대학을 흡수합병하면서 한국 한의계는 새로운 역사를 열었다. 명문 사학에 한의학과가 설치되어 한의학이란 전통학문이 현대화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경희대학교는 1971년 한국 최초로 한방 병원을 설립하였고 1972년에는 세계 최초로 무약물 침술 마취에 성공해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한의사제도의 창립도 큰 업적으로 꼽힌다. 1951년 1월 전쟁기간 동안 부산에 임시국회의사당이 마련되었을 때 김영훈, 방주혁, 박성수, 박호풍 등이 적극적으로 국회의원들과 교섭하고 윤무상, 권의수, 이우룡, 정원희 등이 국회에서 증언해 한의사제도가 국회본의회에서 통과되었다. 한의사제도가 완비되면서 대한한의사협회 와 대한한의학회 가 정식으로 출범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1973년에는 서울에서 제3회 세계침구학술대회가 개최되어 세계 25개국의 학자들 700여 명이 모여서 학술대회를 열었다. 학술대회가 열릴 수 있기까지 배원식의 노력이 빛났다.

976년에는 강효신, 구본홍, 최용태, 유근철 등 4인이 최초로 한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의사 제도화 성공 이후로 학위제도에 의한 최초의 박사학위 수여자들이라는 점에서 큰 영예라고 볼 수 있다.

1976년부터 '집념'이라는 드라마로 허준의 동의보감 열풍을 일으킨 이은성은 한의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제고시킨 인물이다. 1990년에는 드라마 각본을 바탕으로 소설 동의보감이 집필되었고 1999년에는 드라마 '허준'이 제작되면서 한의학에 대한 신뢰가 높아졌다.

최광수, 김만호, 신경희 등은 문화계에서 이름을 떨친 인물들이다. 특히 최광수가 그린 허준, 이제마, 유성룡의 영정과 김만호, 신경희의 글씨가 유명하다. 동양의약대학에서 배구로 국가대표를 지낸 한의사들은 배우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활동했다.

개인적 학술활동도 빛난다. 조규철, 임홍근, 허연, 최석근 등은 한의학을 학술적으로 한 단계 도약시키기 위해 학술지를 간행했으며 의료봉사에도 힘썼다.

조선시대부터 이어진 한의사 가문의 활동도 두드러진다. 일부 인물들은 후손들을 한의대에 진학시켜 지금까지 한의사 가문을 이어가고 있다. 춘원당한의원 가문, 홍가비전의 홍순승 가문, 삼성가계로 대표되는 권오진 가문, 전광옥과 전석붕 부자, 박병곤과 아들 박경균 등이 대표적이다. 김기택 교수와 조세형 원장처럼 학문적 사승관계로 끈끈이 이어진 경우도 있다.

한편, 조헌영, 채인식, 맹화섭, 노정우, 신길구, 김상효, 이은팔, 박인규, 한남수, 최주약, 이병행 등 한의학의 신 영역을 개척해나간 선구자들의 활약도 눈에 띈다. 이들은 이론과 임상, 저술 등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한의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상승시켰다.[19]

중국과 일본의 전통 의학과의 비교

중국의 중의학

한의학에서는 조선 말기에 동무(東武) 이제마가 기존의 한의학적 사고를 종합하여 현대 한의학으로서의 사상의학을 주창하였으며, 이외에 부양론, 형상의학, 사암침법 등의 다양한 현대 한의학 이론들이 있다. 사상의학은 인간의 체질, 성격에 따라서 약의 처방을 달리하는 맞춤의학으로서, 현대 중의학에는 이러한 내용이 없다.

둘째로 의학과 협력할 수 있는 법적 제약이 어느정도인가에 있다.

중국은 의학과의 결합을 법적, 제도적으로 지원하고 있으나, 한국은 이러한 결합에 있어 많은 제약이 있다. 중국의 경우 중의(中醫)와 서의(西醫) 외에 이들이 결합된 중서의(中西醫)로 삼원화되어 있지만. 아직까지 한의학은 특별히 융화되기보다는 이원화하여 따로 분리되어 다뤄지고 있다.

일본의 한방의학(캄포)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는 한의사 제도가 사라지고 일원화되었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가 한약(일본에서는 한방약이라고 칭함)처방을 할 수 있고, 침구대학을 졸업한 침구사가 따로 존재했다.

그러나 그 후 일본은 1934년부터 한방에 관심있는 의사들 사이에서 조직적으로 전통의학과 동양의학에 대한 전문 분과 추진이 이루어져 동양의학회가 부활하고, 한방 수련기관 병원들이 생김으로서 한방 전문의들이 동양의학회 소속으로 약 2만여명이 활동 중이다. 즉, 1989년부터 한방 전문 분과 병원에서 수련을 받고, 한방 전문의로 인정을 해주는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일본동양의학회는 한방 전문의들의 모임이다. 1950년 창립되어 1991년에 정식으로 일본의학회에 등록이 되었다.[20]

영문 정식 명칭은 "The Japan Society for Oriental Medicine(JSOM)으로, 2008년 2월 현재 회장인 이시노 쇼고는 산부인과 전문의로 키타사토연구소 동양의학연구소에 근무하고 있다.[20]

일본에서는 1954년도부터 한방처방에 대한 의료보험이 적용이 되면서 현재 많은 의사들이 한방약 처방을 내리고 있다. 2007년 기준으로 일본 후생성의 발표에 따르면, 인가된 한방약 처방은 210종이며, 이 가운데 의료보험 약가수재는 148종이다.[20]

한의학과 중의학의 공통점과 차이점

공통점

  • 한의학은 중국에서 전래돼 우리나라에서 발달된 고유 의학으로 한의학은 중국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의학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처방을 중의학에서 사용하고 있고 약재의 이름이나 내용도 비슷하다. 한의학과 중의학 두 학문의 기본적 이론은 같다고 볼 수 있다.[21]

차이점

  • 중의학은 오행학설이 주도니 내용이고 이를 기초로 음양학설에 기반들 두고 치료한다. 이처럼 중의학이 한의학의 뿌리라고 할 수 있지만 세부적인 부분에서 많은 변화가 있다. 우선 약물 인식에 있어 현대 중의는 약물의 사기오미(四气五味),한열온량(寒热温凉), 귀경이론(归经理论)을 중시한다. 그러나 현대 한의학은 중의와 달리 약물의 효능에 중점을 둔다.치료방법에도 차이가 있다. 중의학과 한의학 모두 '황제내경'[1]과 '음양오행'이론을 기초로 하며 중의는 의종금감,수세보원을 중시하고 한의는 동의보감,동의수세보원을 중시한다.이 학문들에 기반해 중의는 미리 만들어진 약 위주로 치료를 진행한다. 중의는 질병과 처방 중심 연구가 대부분이다. 중의학 관련 책을 보면 모든 편제가 질병과 처방의 나열이고 사람의 생리에 대해 설명한 것은 많지 않다. 중의는 약제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있지만 세밀한 생리를 이해하기는 어렵다.반면 한의는 중의와는 달리 인체의 발생에서부터 개인의 정확한 생리와 병리적인 상태를 알고자 하므로 한의는 개인 체질에 맞춘 처방을 한다.[22]
  • 중의학의 전문화 과정에는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국가정책에 의해 전문화를 달성했다. 그러나 한의학은 정책적 지원 없이 독자적인 노력으로 전문화를 추구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한의학과 중의학 육성정책에 대한 양국의 지원도 두드러지게 차이를 보이고 있다. 중국사회는 중의학 이용이 한국사회보다 비교적 높고, 이용이 용이한 중의약 개발이 활발하다. 그 결과 중국인들의 일상생활에는 중의약 이용률이 매우 높다.[23]

분야

기초 연구 분야

분과

같이 보기

각주

  1.  연세대학교 의학사연구소. 《한의학, 식민지를 앓다》. 아카넷. 58쪽.
  2.  국가법령정보센터
  3.  이봉교 외.《한방진단학》. 성보사, 41쪽.
  4.  한의학 치료방법 보관됨 2015-04-02 - 웨이백 머신, 한국한의학연구원.
  5.  한의약육성법, 한의약육성법 제2조.
  6.  약학박사 박영순. 《한방의 약리해설》. 아카데미서적. 14쪽.
  7.  침구경락연구거점기반구축사업 연구책임자 최선미. 《한국 침법 발굴조사 보고서》. 한국한의학연구원. 4-5쪽.
  8.  남상천. 《면역약침학 (Pharmacopuncturology)》. 경락의학사. 14쪽.
  9.  대한약침학회 학술위원회 • 약침의학연구소. 《약침학 (Pharmacopuncturology)》. 엘스비어코리아 (Elsevier Korea). 3쪽.
  10.  대한약침학회, 대한약침학회.
  11.  “척추신경추나의학회”. 2019년 4월 23일에 확인함.
  12.  척추진단교정학회 보관됨 2016-01-28 - 웨이백 머신, 척추진단교정학회.
  13.  Lee, Ji Young; Jun, Seung Ah; Hong, Sung Shin; Ahn, Yo Chan; Lee, Dong Soo; Son, Chang Gue (2016). “Systematic Review of Adverse Effects from Herbal Drugs Reported in Randomized Controlled Trials”. 《Phytotherapy Research》. doi:10.1002/ptr.5647ISSN 0951-418XPMID 27196988.
  14.  Suk, Ki Tae; Kim, Dong Joon; Kim, Chang Hoon; Park, Seung Ha; Yoon, Jai Hoon; Kim, Yeon Soo; Baik, Gwang Ho; Kim, Jin Bong; Kweon, Young Oh; Kim, Byung Ik; Kim, Seok Hyun; Kim, In Hee; Kim, Ju Hyun; Nam, Soon Woo; Paik, Yong Han; Suh, Jeong Ill; Sohn, Joo Hyun; Ahn, Byung Min; Um, Soon Ho; Lee, Heon Ju; Cho, Mong; Jang, Myoung Kuk; Choi, Sung Kyu; Hwang, Seong Gyu; Sung, Ho Taik; Choi, Jong Young; Han, Kwang Hyub (2012년 6월 26일). “A Prospective Nationwide Study of Drug-Induced Liver Injury in Korea”. 《The American Journal of Gastroenterology》 107 (9). doi:10.1038/ajg.2012.138.
  15.  Lee, Jinho; Shin, Joon-Shik; Kim, Me-riong; Byun, Jang-Hoon; Lee, Seung-Yeol; Shin, Ye-sle; Kim, Hyejin; Byung Park, Ki; Shin, Byung-Cheul; Lee, Myeong Soo; Ha, In-Hyuk (2015년 7월). “Liver enzyme abnormalities in taking traditional herbal medicine in Korea: A retrospective large sample cohort study of musculoskeletal disorder patients”. 《Journal of Ethnopharmacology》 169doi:10.1016/j.jep.2015.04.048.
  16.  Chalasani, Naga; Bonkovsky, Herbert L.; Fontana, Robert; Lee, William; Stolz, Andrew; Talwalkar, Jayant; Reddy, K. Rajendar; Watkins, Paul B.; Navarro, Victor (2015년 6월). “Features and Outcomes of 899 Patients With Drug-Induced Liver Injury: The DILIN Prospective Study”. 《Gastroenterology》 148 (7): 1340–1352.e7. doi:10.1053/j.gastro.2015.03.006ISSN 1528-0012PMC 4446235PMID 25754159.
  17.  Lee, Woo-Jin; Kim, Hae-Won; Lee, Hyun-Yong; Son, Chang-Gue (2015년 10월). “Systematic review on herb-induced liver injury in Korea”. 《Food and Chemical Toxicology: An International Journal Published for the British Industrial Biological Research Association》 84: 47–54. doi:10.1016/j.fct.2015.06.004ISSN 1873-6351PMID 26165727.
  18.  ““약인성 간손상 일으킨 한약물, 대부분 개인이 민간약 형태로 복용한 것””. 2019년 2월 1일에 확인함.
  19.  김남일. 《근현대 한의학 인물실록》. 들녘. 24-30쪽.
  20.  일본 동양의학회
  21.  상하이저널 (2019년 3월 25일). “한의학과 중의학은 어떻게 다를까?”. 한국무역신문.
  22.  상하이저널 (2019년 3월 25일). “한의학과 중의학은 어떻게 다를까?”. 한국무역신문.
  23.  틀:논문 이용

외부 링크


==

Traditional Korean medicine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A Korean acupuncturist inserting a needle into the leg of a male patient (19th century)[1]

Traditional Korean medicine[n 1] (known in North Korea as Koryo medicine) refers to the forms of traditional medicine practiced in Korea.

History

The building in the picture is a hospital that specializes in Korean medicine.

Korean medical traditions originated in ancient and prehistoric times and can be traced back as far as 3000 BCE when stone and bone needles were found in North Hamgyong Province, in present-day North Korea.[2][3] In Gojoseon, where the founding myth of Korea is recorded, there is a story of a tiger and a bear who wanted to reincarnate in human form and who ate wormwood and garlic. In Jewang Ungi (제왕운기), which was written around the time of Samguk Yusa, wormwood and garlic are described as 'edible medicine', showing that, even in times when incantatory medicine was the mainstream, medicinal herbs were given as curatives in Korea. Medicinal herbs at this time were used as remedial treatment such as easing the pain or tending injury, along with knowing what foods were good for health. In the period of the Three Kingdoms, traditional Korean medicine was mainly influenced by other traditional medicines such as ancient Chinese medicine. There was important trade with foreign countries during the period of the Three Kingdoms.[4] "In particular, medical knowledge from China and India supplemented the foundation of traditional medicine that had been handed down from the Old Joseon period."[4] In Korea, this has "spurred further developments."[4]

Medicine flourished in the period of the Joseon. For example, the first training system of nurses was instituted under King Taejong (1400–1418), while under the reign of King Sejong the Great (1418–1450) measures were adopted to promote the development of a variety of Korean medicinal ingredients.[5] These efforts were systematized and published in the Hyangyak Jipseongbang (향약집성방, 1433), which was completed and included 703 Korean native medicines, providing an impetus to break away from dependence on Chinese medicine.[6] The medical encyclopaedia named Classified Collection of Medical Prescriptions (醫方類聚, 의방유취), which included many classics from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written by Kim Ye-mong (金禮蒙, 김예몽) and other Korean official doctors from 1443 to 1445, was regarded as one of the greatest medical texts of the 15th century.[6] It included more than 50,000 prescriptions and incorporated 153 different Korean and Chinese texts,[6] including the Concise Prescriptions of Royal Doctors (御醫撮要方, 어의촬요방) which was written by Choi Chong-jun (崔宗峻, 최종준) in 1226. Classified Collection of Medical Prescriptions has very important research value, because it keeps the contents of many ancient Korean and Chinese medical books that had been lost for a long time.[7]

Dongui BogamNational Museum of Korea

After this, many books on medical specialties were published. There are three physicians from the Joseon Dynasty (1392–1910) who are generally credited with further development of traditional Korean medicine—Heo Jun, Saam, and Yi Je-ma. After the Japanese invasion in 1592Dongeui Bogam (동의보감) was written by Heo Jun, the first of the major physicians. This work further integrated the Korean and Chinese medicine of its time and was influential to Chinese, Japanese and Vietnamese medicine. In the late period of Joseon, Yi Je-ma's "unique system of constitutional medicine" illustrates the "nature of" the medicine that has been traditionally developed in Korea by example.[4] Medical treatments were based upon yin and yang principles "and the five elements."[4] A warm treatment would treat a person who is a yin.[4] On the other hand, a cold treatment would treat a person who is a yang.[4]

The next major influence to traditional Korean medicine is related to Sasang typology (사상의학). Yi Je-ma and his book, The Principal of Life Preservation in Oriental Medicine (東醫壽世保元, 동의수세보원) systematically theorized with the influence of Korean Confucianism and his clinical experiences in Korea. Yi Je-ma said that even if patients suffer the same illness, patients need to use different herbal applications to treat the same illness due to the pathophysiologies of individuals. He stresses that the health of human body had a close relationship with the state of mind. He believed that the human mind and body were not separate and they closely reflected each other, and the aspect of mind needed to be considered when examining the causes of disease. Thus, not only food and natural environment but also emotional changes in humans can be another major reason for illness. He believed that medical diagnosis and treatment should be based on person's typology rather than on symptoms alone and each person should be given different prescriptions depending on the constitution of the individual.[8] Sasang typology (사상의학) focuses on the individual patients based on different reactions to disease and herbs. Treat illness by the treatment of the root cause through proper diagnosis. Key to this diagnosis is to first determine the internal organs or pathophysiology of each patient.[9]

The next recognized individual is Saam, a priest-physician who is believed to have lived during the 16th century. Although there is much unknown about Saam, including his real name and date of birth, it is recorded that he studied under the famous monk Samyang. He developed a system of acupuncture that employs the five element theory.

In the late Joseon dynasty, positivism was widespread. Clinical evidence was used more commonly as the basis for studying disease and developing cures. Scholars who had turned away from politics devoted themselves to treating diseases and, in consequence, new schools of traditional medicine were established. Simple books on medicine for the common people were published.

Yi Je-ma classified human beings into four main types, based on the emotion that dominated their personality and developed treatments for each type:

  • Tae-Yang (태양, ) or "greater yang"
  • So-Yang (소양, ) or "lesser yang"
  • Tae-Eum (태음, ) or "greater yin"
  • So-Eum (소음, ) or "lesser yin"

The Japanese took control of Korea, which made the Korean traditional medicine fall on difficult times.[4] Colonial rule of the Japanese started since 1910.[4] The continuance of developing Korean medicine was suspended for 40 years due to the Japanese rule.[4] Academic research of this medicine was suspended as well.[4] The suppression lasted until 1945, when Korea was freed from the Japanese rule.[4] In 1951, the enactment of the National Medical Treatment Law established an organized framework for skillful practitioners who use the medicine that has been traditionally developed to treat patients.[4] Koreans and their government supported this medicine.[4] In 1970s, Korean traditional medicine including acupuncture was generally acknowledged by healthcare clinics because of its value.[4]

Originally, Korean traditional medicine was called "medicine of symptoms."[10] "Principles of traditional medicine call for an assessment of eight symptoms."[10] These symptoms are categorized "into four pairs: cold/hot, deficiency/sufficiency, large/small, and yin/yang."[10] Korean traditional medicine is ineffective when used alone in some situations.[10] The medicine from the West can be used with Korean medicine, which is more effective.[10] In Korea, this widespread practice occurs for a long time.[10] Currently, Korean Traditional Medicine is under challenges to undergo scientific examinations such as clinical trials to counter growing distrust.[11] The meme '한무당'(Hanmudang), a neologism that relates Korean Traditional Medicine to shamanism has become too prevalent among young generations that there the association of Korean Traditional Medicine Protectionists had to take measures to stop the meme from auto-completing in internet searches.[12]

In general, the history of Korean medicine can be divided into five periods. The first period, up to about the 12th century, was one of the alleged dark ages of Korean medicine, with TKM based primarily on folk tradition and some foreign (mostly Chinese) elements. In the second period, the 13th to 15th centuries, Hyangyak medicine, which emphasized the use of domestic herbs, emerged. Hyangyak medicine is a type of TKM that prescribed only Hyangyak.[13] This local focus was crucial during times of war, when access to foreign medicinal supplies was limited. The third period, the 15th to early 17th centuries, was marked by the creation of the great medical texts such as Hyangyak Jipseongbang, which combined indigenous and foreign knowledge to form a complete system of Korean medicine.

In the 17th to 19th centuries, TKM became more independent with the publication of the Principles and Practice of Eastern Medicine (東醫寶鑑, 동의보감, Dongui Bogam) in 1613, a seminal text that solidified TKM as distinct from TCM. The fifth period, roughly the 20th and 21st centuries, required a great deal of adjustment to TKM to modern medical research, yet retained TKM. This period is the time of Korea trying to incorporate KM into the national health care system and at the same time dealing with modernization and globalization.

To sum up, the growth of Korean Medicine reveals how traditional wisdom can evolve when faced with external factors or contemporary demands. Synthesis of TKM with modern science traces TKM's evolution from folk herbal medicine to integration with scientific research, albeit with a cultural dilemma of retaining the past while modernizing. Such progression provides insights into the durability and applicability of traditional systems in the contemporary world.

Methods

Medicine hawker in Seoul (1976)

The most common applications of Korean traditional medicine are acupuncture, herbal medicine, and moxibustion.[10] They describe a combination of natural and medical sciences research.[10] In Korea, adherents of the medicine that has been traditionally developed advise that acupuncture comes first.[10] Moxibustion comes second and herbal medicine comes third.[10] Depending on physical state and particular condition of the individual, these practices can be prescribed in separate ways.[10]

Herbal medicine

hanyak (traditional medicine)
Doctor's office in folk village in pre-modern Korea.
Preparation for hanyak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Herbalism is the study and practice of using plant material for the purpose of food, medicine, or health. They may be flowers, plants, shrubs, trees, moss, lichen, fern, algae, seaweed or fungus. The plant may be used in its entirety or with only specific parts.

Herbal medicines may be presented in many forms including fresh, dried, whole, or chopped. Herbs may be prepared as infusions when an herb is soaked in a liquid or decocted—simmered in water over low heat for a certain period. Some examples of infusion are chamomile or peppermint, using flowers, leaves and powdered herbs. Decocting examples may be rose hips, cinnamon bark, and licorice root consisting of fruits, seeds, barks, and roots. Fresh and dried herbs can be tinctured where herbs are kept in alcohol or contained in a vinegar extract. They can be preserved as syrups such as glycerites in vegetable glycerin or put in honey known as miels.

Non-oral herbal uses consist of creams, baths, oils, ointments, gels, distilled waters, washes, poultices, compresses, snuffs, steams, inhaled smoke and aromatics volatile oils.

Many herbalists consider the patient's direct involvement to be critical. These methods are delivered differently depending on the herbal traditions of each area. Nature is not necessarily safe; special attention should be used when grading quality, deciding a dosage, realizing possible effects, and any interactions with herbal medications.[14]

An example of herbal medicine is the use of medicinal mushrooms as a food and as a tea. A notable mushroom used in traditional Korean medicine is Phellinus linteus, also known as Song-gen.

Another example of herbal medicine is cheongsimhwan (Korean청심환lit.'clear-mind pill'), a pill formulated with thirty odd herbs and other medicinal ingredients, including calculus bovisginsengmusk, and Chinese yam root.[15]

Acupuncture

Acupuncture is used to withdraw blood or stimulate certain points on humans and animals by inserting them on specific pressure points of the body. Traditional acupuncture involves the belief that a "life force" (qi) circulates within the body in lines called meridians.[16] Scientific investigation has not found any histological or physiological evidence for traditional Chinese concepts such as qimeridians, and acupuncture points,[n 2][21] and many modern practitioners no longer support the existence of life force energy (qi) flowing through meridians, which was a major part of early belief systems.[22][23][24] Pressure points can be stimulated through a mixture of methods ranging from the insertion and withdrawal of very small needles to the use of heat, known as moxibustion. Pressure points can also be stimulated by laser, massage, and electrical means.[25]: 234  Constitutional acupuncture, medicinal acupuncture, Sa-am acupuncture, and single-needle acupuncture are unique methods of acupuncture.[10]

Moxibustion

Moxibustion is a technique in which heat is applied to the body with a stick or a cone of burning mugwort. The tool is placed over the affected area without burning the skin. The cone or stick can also be placed over a pressure point to stimulate and strengthen the blood.[26]

2013 World Traditional Medicine Expo, Sancheong

Cochrane Review found moderate certainty evidence for the use of moxibustion plus usual care for reducing the chance of breech presentation of babies but uncertainty about the need for ECV.[27] Moxibustion has also been studied for the treatment of pain,[28] cancer,[29] stroke,[30] ulcerative colitis,[31] constipation,[32] and hypertension.[33] Systematic reviews of moxibustion show that there is a need for further research about these other therapeutic applications to reduce risk of publication bias.[34]

Education

Graduate School of Korean Medicine

The South Korean government established a national school of traditional Korean medicine to establish its national treasure on a solid basis after the closing of the first modern educational facility (Dong-Je medical school) one hundred years ago by the Japanese invasion.

In 2008, the School of Korean Medicine was established inside Pusan National University with the 50 undergraduate students on the Yangsan medical campus. The new affiliated Korean Medical Hospital and Research Center for Clinical Studies are under construction.

Compared with common private traditional medicine undergraduate schools (6 years), this is a special graduate school (4+4).

General Hospital of Koryo Medicine

Koryo medicine is a form of traditional medicine used in North Korea and promoted by the North Korean government, providing half of the reported healthcare in the country.[35] It is largely practised in the General Hospital of Koryo Medicine, Pyongyang.[36] Examples of Koryo medicine sold commercially are Kumdang-2 and Royal Blood-Fresh, sold by the Pugang Pharmaceutic Company, both of which are popular with Chinese tourists to North Korea.[37]

Influence of Western medicine

According to Han (1997), Christian missionaries introduced Western medicine to Korea in the late 19th century. It was the time when there was an increased exposure to Western influences and imperialist pressures in Korea, which led to a rapid adoption of Western medical practice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e suppression of Hanbang reinforced its decline, and it was treated as secondary and behind Western medicine. However, the late 20th century witnessed a revival of Hanbang, and there was a growing nationalistic sentiment and affluence at that period.[38]

Criticism

The primary criticism of the integration of Western medicine into Korean society is its impact on accessibility because the benefits of medical development were mostly available to urban and wealthier parts of the population. This inequality was intensified by the commercialisation of healthcare, where both Western and traditional medicines were marketed aggressively, often prioritising profit over patient care. Furthermore, the overshadowing of traditional practices by Western medicine led to the marginalisation of Korean identity and culture. Despite this criticism, there have been undeniable advancements in public health, including better disease control and medical technologies that have significantly improved the quality of life. Additionally, the establishment of medical schools and training programs has professionalised and standardised healthcare, thus elevating the overall health condition of the nation.

See also

Notes

  1.  한의학韓醫學Hanuihak; or 향약鄕藥Hyangyak
  2.  Singh & Ernst (2008) stated, "Scientists are still unable to find a shred of evidence to support the existence of meridians or Ch'i",[17] "The traditional principles of acupuncture are deeply flawed, as there is no evidence at all to demonstrate the existence of Ch'i or meridians"[18] and "As yin and yang, acupuncture points and meridians are not a reality, but merely the product of an ancient Chinese philosophy".[19][20]

References

  1.  "A Korean acupuncturist inserting a needle into the leg of a male patient"Wellcome Collection. Retrieved 2024-05-26.
  2.  "Acupuncture Stimulated Healing".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15-04-09.
  3.  Dr. DiLeva, Rose. "The Evolution of Acupuncture in Veterinary Medicine" (PDF). Archived from the original (PDF) on July 7, 2011. Retrieved September 14, 2010.
  4.  Shin Joon-shik. (2008). Introduction to Korea's Traditional Medicine. Koreana22(1), 8–13.
  5.  Korean Medicine: A Holistic Way to Health and Healing By Seoul Selection
  6.  Selin, Helaine (2013-11-11). Encyclopaedia of the History of Science, Technology, and Medicine in Non-Western Cultures. Springer Science & Business Media. p. 506. ISBN 978-94-017-1416-7. Retrieved 9 September 2016.
  7.  "The Influence of Chinese Clothing | Oriental Style".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11-10-08. Retrieved 2011-07-13.
  8.  Archaeology of Psychotherapy in Korea: A Study of Korean Therapeutic Work ... By Haeyoung Jeong
  9.  "ChaeLab - Sasang Typology".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10-11-15. Retrieved 2010-09-22.
  10.  Ko Changham. (2008). Three Popular Applications of Korea's Traditional Medicine. Koreana, 22(1), 14–23.
  11.  김, 준호 (2020-07-16). "의사단체 "한방첩약은 비과학적, 안전·효과 불신""메디칼트리뷴 (in Korean). Retrieved 2023-04-27.
  12.  "네이버, 카카오 등에서 '한무당' 자동완성 검색어 사라진다"한의신문 (in Korean). Retrieved 2023-04-27.
  13.  Kang, Y. (2011). The characteristics of Korean medicine based on time classification. China Perspectives, 2011(3), 33-41.
  14.  Micozzi, Marc S., and Lisa Meserole (2000). Marc S. Micozzi and C. Everett Koop (ed.). Herbal Medicine: Fundamentals of Complementary and Integrative Medicine. St. Louis: Saunders El Sevier.
  15.  "Cheongsimhwan" 청심환Korean-English Learners' DictionaryNational Institute of Korean Language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10 January 2017. Retrieved 10 January 2017.
  16.  "Acupuncture". NHSChoices. Retrieved 2 May 2015.
  17.  Singh & Ernst 2008, p. 72
  18.  Singh & Ernst 2008, p. 107
  19.  Singh & Ernst 2008, p. 387
  20.  Singh; Ernst (2008). Trick or Treatment?. Bantam. ISBN 978-0-593-06129-9OCLC 190777228.
  21.  Ahn, Andrew C.; Colbert, Agatha P.; Anderson, Belinda J.; Martinsen, ØRjan G.; Hammerschlag, Richard; Cina, Steve; Wayne, Peter M.; Langevin, Helene M. (2008). "Electrical properties of acupuncture points and meridians: A systematic review" (PDF)Bioelectromagnetics29 (4): 245–256. doi:10.1002/bem.20403PMID 18240287S2CID 7001749.
  22.  de las Peñas, César Fernández; Arendt-Nielsen, Lars; Gerwin, Robert D (2010). Tension-type and cervicogenic headache: pathophysiology, diagnosis, and managementJones & Bartlett Learning. pp. 251–254. ISBN 978-0-7637-5283-5.
  23.  Mann, F (2000). Reinventing Acupuncture: A New Concept of Ancient MedicineElsevierISBN 0-7506-4857-0.
  24.  Ulett, GA (2002). "Acupuncture". In Shermer, M (ed.). The Skeptic: Encyclopedia of PseudoscienceABC-CLIO. p. 283291. ISBN 1-57607-653-9.
  25.  Pizzorno, Joseph E. Jr. and Pamela Snider (2000). Marc S. Micozzi and C. Everett Koop (ed.). Naturopathic Medicine: Fundamentals of Complementary and Integrative Medicine. St. Louis: Saunders El Sevier.
  26.  Kim, Y.-S. (2005). "Korean Oriental Medicine in Stroke Care"Complementary Health Practice Review10 (2): 105–117. doi:10.1177/1533210105279482.
  27.  Coyle, Meaghan E.; Smith, Caroline; Peat, Brian (2023-05-09). "Cephalic version by moxibustion for breech presentation"The Cochrane Database of Systematic Reviews2023 (5) CD003928. doi:10.1002/14651858.CD003928.pub4ISSN 1469-493XPMC 10167788PMID 37158339.
  28.  Lee, Myeong Soo; Choi, Tae-Young; Kang, Jung Won; Lee, Beom-Joon; Ernst, Edzard (2010). "Moxibustion for Treating Pain: A Systematic Review". The American Journal of Chinese Medicine38 (5): 829–38. doi:10.1142/S0192415X10008275PMID 20821815.
  29.  Lee, Myeong Soo; Choi, Tae-Young; Park, Ji-Eun; Lee, Song-Shil; Ernst, Edzard (2010). "Moxibustion for cancer care: A systematic review and meta-analysis"BMC Cancer10: 130. doi:10.1186/1471-2407-10-130PMC 2873382PMID 20374659.
  30.  Lee, M. S.; Shin, B.-C.; Kim, J.-I.; Han, C.-h.; Ernst, E. (2010). "Moxibustion for Stroke Rehabilitation: Systematic Review"Stroke41 (4): 817–20. doi:10.1161/STROKEAHA.109.566851PMID 20150551.
  31.  Lee, Dong-Hyo; Kim, Jong-In; Lee, Myeong Soo; Choi, Tae-Young; Choi, Sun-Mi; Ernst, Edzard (2010). "Moxibustion for ulcerative colitis: A systematic review and meta-analysis"BMC Gastroenterology10: 36. doi:10.1186/1471-230X-10-36PMC 2864201PMID 20374658.
  32.  Lee, Myeong Soo; Choi, Tae-Young; Park, Ji-Eun; Ernst, Edzard (2010). "Effects of moxibustion for constipation treatment: A systematic review of randomized controlled trials"Chinese Medicine5: 28. doi:10.1186/1749-8546-5-28PMC 2922210PMID 20687948.
  33.  Kim, Jong-In; Choi, Jun-Yong; Lee, Hyangsook; Lee, Myeong Soo; Ernst, Edzard (2010). "Moxibustion for hypertension: A systematic review"BMC Cardiovascular Disorders10: 33. doi:10.1186/1471-2261-10-33PMC 2912786PMID 20602794.
  34.  Lee, Myeong Soo; Kang, Jung Won; Ernst, Edzard (2010). "Does moxibustion work? An overview of systematic reviews"BMC Research Notes3: 284. doi:10.1186/1756-0500-3-284PMC 2987875PMID 21054851.
  35.  Canaway, Rachel (1 October 2017). "Integration of traditional and 'modern' medicine: Reflections on a visit to DPR Korea"European Journal of Integrative Medicine1532–38. doi:10.1016/j.eujim.2017.08.005ISSN 1876-3820.
  36.  Choe Thae Sop (2001). "Koryo system of medicine in DPR Korea". Traditional medicine in Asia (PDF). World Health Organization. pp. 69–74. ISBN 978-92-9022-224-8. Archived from the original (PDF) on July 31, 2020.
  37.  Talmadge, Eric (27 August 2018). "Ostrich skin, Neo-Viagra and cancer cures: A shopping guide to North Korea"National Post. Associated Press. Retrieved 1 May 2020.
  38.  Han, Gil Soo. "The Rise of Western Medicine and Revival of Traditional Medicine in Korea: A Brief History." Deleted Journal 21, no. 1 (January 1, 1997): 96–121. https://doi.org/10.1353/ks.1997.0000.
==

韓医学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韓医学(かんいがく、한의학)とは、中医薬学を基づいて朝鮮半島独自の漢方薬・医術・治療法・食療習慣などの総称。主に大韓民国で使われる用語である。

名称と定義

  • 李氏朝鮮での呼称:古代の朝鮮語での発音や漢字表記は幾つかがあり、「漢医学(한의학)」や「漢方医学・韓方医学(한방의학)」などと呼ばれた。また、韓医学の治療を行う医者・医師については「東医」と呼ばれる。朝鮮半島の医学は李氏朝鮮時代で大きな発展を遂げ、中国医学と理論の違い医学書も多く書かれた[1]
  • 日本での呼称:朝鮮半島の日本統治時代には、この医学の統一的な呼称が無かった。当時の日本政府は中国の中医薬学、日本の漢方医学、朝鮮半島の韓医学を全部同じもの[2]と看做し、どっちを書いても構わない。また、三国の漢方系医学を総じて「東洋医学」と呼ばれることもよくある。
  • 韓国での呼称:韓国政府より1980年代から「方医学」の漢字表記を全て「方医学」に書き換え、さらに1986年から「韓医学」という公式名称に定め、「医学」は正式な略称とされる。日本統治時代の東洋医学という呼び名も使われなくなったが、最近の韓国では韓医学を「Traditional Korean Medicine」に英訳する以外、東洋医学の全体を意味するはずの「Oriental Medicine」にも韓医学の英訳として使用されている[3]
  • 北朝鮮での呼称:二次大戦後は「高麗医学(고려의학)」[4][5]という公式名称を定めた。

韓医学と中医薬学・漢方医学の違い

韓医学はその多くを中医薬学に拠っているが、鍼灸学は中国・日本と比べると相当異なり、「一鍼二灸三薬」と言われるほど鍼灸が重んじられ[1]、現在の韓国は世界唯一の鍼灸専門医制度を持っている[7]

また、朝鮮半島の医療制度・伝統を持って発展し[7]、動物性生薬を多用する点にも特徴がある[8]

李朝末に李済馬が提唱した体質を4つの型に分ける「四象医学」も日本で知られている[1]。現在の韓国の医療は、現代医学と東洋医学の二本立て体制で、韓医師(Oriental Korean Medical Doctor : OMD)は、現代医学の医師同様大学で6年間の教育を受け、漢方専門医師資格と共に鍼灸の資格を持ち、鍼灸術と生薬を併用して治療を行う[7]

日本では、百済の法蔵(7世紀末 - 8世紀初頭)など、朝鮮半島から渡来した医師が古くから活躍し[9]、『医方類聚』(1445年)、『東医宝鑑』(1661年)などの医学書が日本に渡来するなど、中国医学だけでなく、朝鮮の医学も日本に影響を与えた。鎖国していた江戸時代にも、朝鮮通信使に同道した医師と日本の医師たちが活発に交流しており、その問答の記録が残されている[10]

歴史

概史

朝鮮半島の医学は、中国医学を取り入れて発展した。高麗時代には、特に庶民救済のため、済危宝(ko:제위보)・東西大悲院(ko:대비원)・恵民局(ko:혜민국)が置かれ、現存する朝鮮最古の医学書『郷薬救急方』(ko:향약구급방)(高宗時代 13世紀後半)[注釈 1]が編まれた。

李氏朝鮮時代において一般的に韓医学の恩恵に浴する事ができたのは王族・両班中人階級だけであり[要出典]、一般庶民はもちろん一部の両班(王族も含む)の間でも鬼神信仰にもとづく朝鮮独自の民俗医療が行われていた。李氏朝鮮時代では、太宗の時に医女制度が創始され、世宗の時には『郷薬集成方』と『医方類聚』が編集されたが、燕山君時代に入ると衰退し、中宗時代に入ると医学そのものに取って代わられ韓医学は完全に廃れてしまう。女真族の侵入や日本との軋轢などにより、明薬の輸入が不安定な時代が続くと明医学の持続が困難になり、韓医学が再び復活するが明医学の強い影響を受けている。宣祖の時代になると、許浚によって評価の高い『東医宝鑑』が編纂され、許任の鍼灸法や舎巖道人の新しい鍼灸補瀉法が創始された。19世紀になると、より実証的で科学的な医学が生まれ、李済馬ko:이제마)の『東医寿世保元』(ko:동의수세보원)(1894年)からは、人間の体質を太陽人、太陰人、少陽人、少陰人に分ける四象医学ko:사상의학)が創始された。朝鮮では、許浚・舎巖道人・李済馬が朝鮮時代の三大医学者とされている。

李氏朝鮮後期から末期に入ると韓医学は衰退の一途をたどり、開国後は西洋医学の流入により完全に衰滅し、朝鮮半島において韓医学(特に李氏朝鮮前期)の多くの古医書が逸失している。しかしながら、大韓民国の時代に至り、再び脚光を浴び、多くの韓方医院などが作られ復権している反面、その多くは中医学と区別することが難しいのが実情である。

漢文と日中韓の医学書

中国と日本、朝鮮半島、ベトナムなどの周辺国では、近年まで(日本では大正・昭和初期まで[11])、知的エリート層は高度な漢文の素養を持ち、翻訳を必要とせず漢文の書籍を読むことができ、互いに筆談で会話することも可能であった。このように古典中国語は、ヨーロッパにおけるラテン語、イスラーム圏におけるアラビア語、インド圏におけるサンスクリット語同様、広範囲わたって情報の伝達を可能にし、長期間影響を与えた古典言語であったといえる。韓国の医学は中国医学の影響を受けながら、日本同様に固有の発展を遂げた。日中韓では長い歴史の中で、漢文によって多くの医学書が書かれた。時代・国によって内容には顕著な違いがあるが、相互に医学書が伝えられ、渾然一体となって発展してきた。鍼灸書『神応経』のように、ひとつの書籍が明版→日本→李朝版→和刻版→中国活字版と伝承された例もある。

日本における韓医学の記録は6世紀に遡り[12]遣唐使の廃止以降は、医学をはじめ多くの大陸文化が日本化された。10世紀の日本の医学書『医心方』(984年)[13]には、中国医学書だけでなく、『百済新集方』、『新羅法師方』など朝鮮半島の医学書からの引用も数例みられ[14]、書名・内容を知ることができる[15][注釈 2]。後世の引用から、高麗時代には『済衆立効方』、『御医撮要方』などの医学書があったことがわかっているが、現存する当時の医学書は『郷薬救急方』が確認されるのみで、李朝再版本が日本の宮内庁書陵部に唯一残されている[10]

李氏朝鮮時代には、獣医などの関連分野を含めて200以上の医学書があったとされており[15]、15世紀以前の医学書を集大成した『医方類聚』全266巻(1445年)、明代までの中国医学を基に症状・処方を解説した『東医宝鑑』全23巻(1661年)などが有名で、日本にも伝来している[1]。朝鮮半島の医学書は、豊臣秀吉による文禄・慶長の役(1592・1598年)の際に日本に持ち込まれ、印刷技術も伝えられた[16]。1592年に秀吉軍が略奪した書籍は、船数艘・数千巻ともいわれる。朝鮮半島に古い書籍が残されていないのはこのためらしい。[10]。日本では、近代化を目指す明治期になると伝統的な医学書は不要とされ、多くが清に流出したが、その中には朝鮮の医学書・朝鮮で出版された中国の医書も含まれていた。清の宝物は、北平の故宮博物院(紫禁城)が所蔵したが、国共内戦の際に中華民国政府が所蔵品を厳選して持ち出した。そのため、清の学者たちが集めた医学書の大部分は、現在は台北国立故宮博物院に保存されている[10]

江戸時代には、鎖国体制のため外国の医学書はあまり伝来しなかった。そこで『東医宝鑑』に注目した徳川吉宗はこれを復刻させ、江戸時代初の官版医書として1724年・1730年に発売された。19世紀にはに輸出され、のちには版木が輸出されて清で出版された[10]。また、朝鮮通信使であった医官や同道した医師と日本の医師の間にも交流があり、筆談による医事問答などを集めた記録が残されている[10]

東洋医学の標準化問題

韓医学を含めた東洋医学が広く注目されることで、理論の標準化なども試みられ、政治問題に発展することもある。現代では鍼灸は、世界的に活用されており、世界保健機構(WHO)は、1980年代から始まる伝統医学プログラムの一環として経穴の標準化を試みた。日中韓の研究者は多くの検討と議論を重ね、2006年に経穴部位が国際標準化された。この過程で韓国側が「韓国の鍼術方法が採択された」と発表し中国側が反発したが[17]、標準化作業に関わった中国科学院の専門家によれば、最終的に決定された361カ所の経穴に関して、359カ所は中国の国家基準と一致しているという[18]。東アジアの医学は中国を源としながらも、各地で独自の発展を遂げたため、用語や処方、理論にも様々な相違点があり、標準化・統一化には多くの壁がある。しかし、漢方、鍼灸など東洋医学の標準化・グローバル化の流れの中で、アメリカ国立衛生研究所(NIH)では、大幅な予算を割いて中医学中心に研究が行われ、その成果はアメリカのものになっている。研究の規模は2003年の段階で、NIHに属するアメリカ国立補完代替医療センター(NCCAM)と国立がんセンター(NCI)を合わせて250億円に上るものである。アメリカが作ったアジアのハーバルメディスン(漢方薬)の基準が、グローバルスタンダードとしてアジアにおしつけられる可能性もあり、アジアの国々、特に東洋医学の中心である日中韓が分裂したままでいることは、アジアの伝統医学全体にとって弱みであると指摘されている。[19]

日本における朝鮮医学史研究

日本では中国医学の研究に比べ、朝鮮半島の医学・医学史の研究は非常に手薄であるが、朝鮮医学史研究の大家として三木栄(1903 - 1992)の名が挙げられる。当時、朝鮮半島の文化・科学技術の日本への影響は知られておらず、日本だけでなく朝鮮でも、朝鮮半島の科学・医学史の研究はほとんどなかった。昭和3年から16年間朝鮮半島に暮らした三木は、その解明に一人取り組み、『朝鮮医書誌』(1956年)、『朝鮮医学史及疾病史』(1963年)を刊行した[20]。日韓両国で評価が高く、韓国科学史学会感謝牌賞、日本医史学会功労賞などを受賞している[21]

脚注

注釈

  1. ^ 初刊本は現存せず、現存するのは日本の宮内庁が所蔵する1417年の再刊本のみ
  2. ^ 医心方』は、丹波康頼が中国の六朝・隋・唐の200以上(204種、10,881条とも数えられる)文献を中心に、病気の治療法や養生法、医師の心得などを抜き出し、症例別に編集した現存する日本最古の医学書で、全30巻からなる。中国医学だけでなく、インド伝統医学・アーユルヴェーダの影響を受けた仏教関係の医学書なども引用されている。『医心方』に引用された文献は、大部分が散逸しており、現存するものも時代の中で改編されている。そのため、当時の文章が引用・保持された『医心方』は、貴重な文献として日中韓で研究に活用されている。ただし、室町時代に下賜された半井家では門外不出とされ、近年まで公開されなかったため、実際の医学には影響を与えていない。

出典

  1. a b c d 吉冨誠 2003.
  2. ^ 中国周縁国の中国医学受容傾向-現存古医籍の調査より-茨城大学人文学部 真柳誠
  3. ^ 「西洋医学と東洋医学」 真柳誠 『しにか』8巻11号
  4. ^ 고려의학 북한용어사전 코리아콘텐츠랩 &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5. ^ 高麗医学科学院で経絡討論会 朝鮮新報
  6. a b [칼럼]‘조의학’의 중국 무형문화유산 등록과 ‘중의학공정’ 이민호 금강일보 2011.8.3
  7. a b c 曹基湖ら 2002.
  8. ^ 中国、韓国の伝統医学 帝京大学薬学部附属薬用植物園 木下武司
  9. ^ 橘 輝政 『日本医学先人伝―古代から幕末まで』 医事薬業新報社、1969年
  10. a b c d e f 真柳誠「韓国伝統医学文献と日中韓の相互伝播 『温知会会報』34号[リンク切れ]
  11. ^ 管説日本漢文學史略 大東文化大學文學部中國學科中林研究室
  12. ^ 日韓国際シンポジウム 「伝統医学における日韓交流の歴史」 寺澤捷年 真柳誠 金性洙 第61回日本東洋医学会学術総会
  13. ^ 多田伊織「<史料紹介>『医心方』所引『僧深方』輯佚 : 東アジアに伝播した仏教医学の諸相」『日本研究』第41号、国際日本文化研究センター、2010年3月、373-411頁、doi:10.15055/00000508ISSN 0915-0900NAID 120005681463
  14. ^ 真柳誠「「医心方」巻30の基礎的研究 本草学的価値について」『薬史学雑誌』第21巻第1号、日本薬史学会、1986年6月、52-59頁、ISSN 02852314NAID 40004378416 (Paid subscription required要購読契約)
  15. a b 日中韓古医籍の特徴と関連 真柳誠(北里研究所附属東洋医学総合研究所医史学研究部)
  16. ^ 日本が受容した韓医学と古医籍の交流史 真柳誠 茨城大学大学院人文科学研究科教授
  17. ^ WHO、韓国の鍼術を国際標準に 中央日報日本語版 2008年6月19日
  18. ^ 経穴の国際標準化問題、韓国と中国の駆け引き 東洋学術出版社
  19. ^ 曹基湖, 「2. 漢方薬の国際性を目指して(漢方薬の国際性を目指して)(第55回日本東洋医学会学術総会)」『日本東洋醫學雜誌』 56巻 1号 p.81-86, 2005年, 社団法人日本東洋医学会, NAID 110004012998
  20. ^ 紹介『朝鮮医事年表』真柳誠 「科学史研究」25巻2号
  21. ^ 三木栄 デジタル版 日本人名大辞典+Plus 講談社

参考文献

外部リンク

  • 日中韓、それぞれの漢方 朝日新聞 GLOBE(グローブ)
  • 広田曄子, 「3.韓国四象医学について(韓国伝統医学への理解)(第54回日本東洋医学会学術総会)」『日本東洋醫學雜誌』54(6), p.1053-1059, 2003-11-20, NAID 10016195722
  • 基鮮于, 「韓国の漢方(シンポジウム2)」『日本東洋醫學雜誌』社団法人日本東洋医学会, 54(別冊), S96, 2003-04, NAID 110004010654
  • 基鮮于, 「2.韓国の漢方(韓国伝統医学への理解)(第54回日本東洋医学会学術総会)」『日本東洋醫學雜誌』 54(6), 1049-1053, 2003-11-20, 日本東洋医学会, NAID 10016195721
  • 曹基湖, 「2. 漢方薬の国際性を目指して(漢方薬の国際性を目指して)(第55回日本東洋医学会学術総会)」『日本東洋醫學雜誌』 56(1), 81-86, 2005-01-20, 日本東洋医学会, NAID 110004012998
  • 曹基湖, 徐廷徹, 李源哲, 金甲成, 「韓国韓医学会の現状と鍼灸分野における近代韓日交流史 鍼灸学を中心に」『全日本鍼灸学会雑誌』 52巻 5号 2002年 p.601-609, 全日本鍼灸学会, doi:10.3777/jjsam.52.601
  • 高平一成, 「鍼灸医学から見た韓国・伝統医学(専攻科抄録)」『関西鍼灸短期大学年報』 15, 116, 2000-09-30, 関西鍼灸大学, NAID 110000477893
  • 崎山武志, 秋葉哲生, 「第1回東洋医学用語の国際基準作成に関するWHO会議に参加して」『日本東洋醫學雜誌』 56(4), 599-608, 2005-07-20, 日本東洋医学会, NAID 110004015802

関連項目

==

출처: 무료 백과사전 '위키피디아(Wikipedia)'

한의학 (칸이가쿠, 한의학)이란 중의약학 을 바탕으로 한반도 독자적인 한약, 의술, 치료법, 식습관 등의 총칭. 주로 대한민국에서 사용되는 용어이다.

이름과 정의

  • 이씨 조선 에서의 호칭 : 고대 조선어 로 발음이나 한자 표기는 몇 가지가 있어 '한의학(한의학)'이나 '한방의학·한방의학(한방의학)' 등으로 불렸다. 또 한의학의 치료를 하는 의사·의사에 대해서는 ' 동의 '라고 불린다. 한반도의 의학은 이씨 조선시대에서 큰 발전을 이루었고, 중국의학과 이론의 차이 의학서도 많이 썼다 [ 1 ] .
  • 일본에서의 호칭 : 한반도의 일본 통치 시대에는 이 의학의 통일적인 호칭이 없었다. 당시의 일본 정부는 중국의 중의약학 , 일본의 한의학 , 한반도의 한의학을 모두 같은 것 [ 2 ] 이라고 간청해, 어느 쪽을 써도 상관없다. 또, 삼국의 한방계 의학을 총괄하여 「동양의학」이라고 불리는 경우도 자주 있다.
  • 한국에서의 호칭 : 한국 정부보다 1980년대부터 ' 한방 의학'의 한자 표기를 모두 ' 한방 의학'으로 재작성하고, 1986년부터 ' 한의학 '이라는 공식 명칭으로 정해 '의학'은 정식 약칭으로 된다. 일본 통치 시대의 동양의학이라는 명칭도 쓰이지 않게 되었지만, 최근 한국에서는 한의학을 'Traditional Korean Medicine'으로 영역하는 것 이외, 동양의학 전체를 의미할 것인 'Oriental Medicine'에도 한의학의 영역으로 사용되고 있다 [ 3 ] .
  • 북한 에서의 호칭 : 2차 대전 후에는 ' 고려의학 (고려의학)' [ 4 [ 5 ] 라는 공식 명칭을 정했다.

한의학과 중의약학·한방의학의 차이

한의학은 그 다수를 중의약학에 근거하고 있지만 침구학 은 중국·일본과 비교하면 상당히 다르며 ‘1 침 2 완삼약’이라 불릴 정도로 침구가 가중되고 [ 1 ] 현재의 한국은 세계 유일의 침구전문의 제도를 가지고 있다 [ 7 ] .

또한 한반도의 의료제도·전통을 가지고 발전하고 [ 7 ] , 동물성 생약을 다용하는 점에도 특징이 있다 [ 8 ] .

이조말에 이제마가 제창한 체질을 4가지 형태로 나누는 '사상의학'도 일본에서 알려져 있다 [ 1 ] . 현재 한국의 의료는 현대의학과 동양의학의 2개 세워 체제로, 한의사 (Oriental Korean Medical Doctor : OMD)는 현대의학의 의사와 같이 대학에서 6년간의 교육을 받고, 한방전문의사 자격과 함께 침구의 자격 을 가지고, 침술과 생약  병용하고 있다 .

일본에서는 백제 의 법장(7세기 말 - 8세기 초) 등 한반도에서 도래한 의사가 옛부터 활약해 [ 9 ] , ' 의방류정 '(1445년), ' 동의보감 '(1661년) 등의 의학서가 일본에 도래하는 등, 중국의학 뿐만 아니라, 중국의학뿐만 아니라. 쇄국하고 있던 에도시대에도 조선통신사 에 동도한 의사와 일본의 의사들이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어 그 문답의 기록이 남아 있다 [ 10 ] .

역사

개사

한반도 의학은 중국 의학을 도입하여 발전했다. 고려 시대에는 특히 서민구제를 위해 제위보( ko:제위보 )·동서대비원( ko:대비원 )·혜민국( ko:혜민국 )이 놓여 현존 하는 조선최고의 의학서 '향약구급방'( ko :향약구급방 )( 고종 시대 13 세기 )

이씨 조선 시대에서 일반적으로 한의학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왕족· 양반 과 중인 계급뿐이며 요출전 ] 일반서민은 물론 일부 양반(왕족도 포함) 사이에서도 귀신신앙에 근거한 조선 독자적인 민속의료 가 이루어졌다. 이씨 조선 시대에서는 태종 때 의녀 제도가 창시되어 세종 때에는 ' 향약집성방 '과 '의 방류 聚'이 편집되었으나, 연산군 시대에 들어가면 쇠퇴하고 중종 시대에 들어가면  의학 그 자체로 대체되어 한의학은 완전히 폐기된다. 여진족의 침입이나 일본과의 갈등 등으로 명약 수입이 불안정한 시대가 이어지면 명의학의 지속이 어려워지고 한의학이 다시 부활하지만 명의학의 강한 영향을 받고 있다. 선조 의 시대가 되면, 허준 에 의해 평가가 높은 『동의보감』이 편찬되어, 허임 의 침구법이나 사교도인 의 새로운 침구 보사법이 창시되었다. 19세기가 되면 보다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의학이 태어나 이제마 ( ko:이제마 )의 『동의수세보원』( ko:동의수세보원 )(1894년)부터는 인간의 체질을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으로 나누는 사상의학 ( ko:사상학 ). 조선에서는 허준·사암도인·이제마가 조선시대의 3대 의학자로 되어 있다.

이씨 조선 후기부터 말기에 들어서면 한의학은 쇠퇴의 일도를 따랐고, 개국 후에는 서양의학의 유입에 의해 완전히 쇠멸해, 한반도에 있어서 한의학(특히 이씨 조선 전기)의 많은 고의서가 일실하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시대에 이르러 다시 각광을 받고 많은 한방의원 등이 만들어 복권하고 있는 반면 그 대부분은 중의학 과 구별하기 어려운 것이 실정이다.

한문과 한중일의 의학서

중국과 일본, 한반도, 베트남 등 주변국에서는 최근까지(일본에서는 다이쇼·쇼와 초기까지 [ 11 ] ) 지적 엘리트층은 고도의 한문 소양을 갖고 번역을 필요로 하지 않고 한문 의 서적을 읽을 수 있으며, 서로 필담으로 대화하는 것도 가능했다. 이와 같이 고전 중국어는 유럽에서의 라틴어 , 이슬람권에서의 아랍어 , 인도권에서의 산스크리트어 와 같이 광범위하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게 해 장기간 영향을 준 고전언어 였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의학은 중국 의학의 영향을 받으면서 일본처럼 고유한 발전을 이루었다. 한중일에서는 오랜 역사 속에서 한문에 의해 많은 의학서가 쓰여졌다. 시대·국가에 따라 내용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지만, 서로 의학서가 전해져 혼연 일체가 되어 발전해 왔다. 침구서 『신응경』과 같이 하나의 서적이 명판→일본→이조판→화각판→중국 활자판으로 전승된 예도 있다.

일본에 있어서의 한의학의 기록은 6세기에 거슬러 올라 [ 12 ] , 견당사 의 폐지 이후는, 의학을 비롯한 많은 대륙 문화가 일본화 되었다. 10세기 일본의 의학서 ' 의심방 '(984년) [ 13 ] 에는 중국의학서 뿐만 아니라 '백제신집방', '신라법사방' 등 한반도의 의학서로부터의 인용도 몇 예로 보이고 14 ] , 서명 · 내용 을 알 수 있다 [ 15 ] 후세의 인용에서 고려시대에는 '제중립 효방', '의의촬영 ​​요법' 등의 의학서가 있었음을 알고 있지만, 현존하는 당시의 의학서는 ' 향약 구급방 '이 확인될 뿐으로 이조 재판본이 일본의 궁내청 서릉부에 유일하게 남아 있다 [ 10 ] .

이씨 조선 시대에는 수의사 등 관련 분야를 포함해 200  이상의 의학서가 있었다고 한다 . , 15세기 이전의 의학서를 집대성한 ' 의방류정 ' 전 266권(1445년), 명대까지의 중국 의학을 바탕으로 증상·처방을 해설한 ' 동의보감 ' 전 23권(1661년) 등이 유명하고, 일본에도 전래하고 있다 [ 1 ] . 한반도의 의학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에 의한 문록·경장의 역 (1592·1598년) 때에 일본에 반입되어 인쇄 기술도 전해졌다 [ 16 ] . 1592년에 히데요시군이 약탈한 서적은 선수모·수천권이라고도 한다. 한반도에 오래된 서적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이 때문에다. [ 10 ] . 일본에서는, 근대화를 목표로 하는 메이지기가 되면 전통적인 의학서는 불필요하게 되어 많은 것이 청나라에 유출했지만, 그 중에는 조선의 의학서·조선에서 출판된 중국의 의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청의 보물은 북평의 고궁박물원( 자금성 )이 소장했지만, 국공 내전 때 중화민국 정부가 소장품을 엄선해 꺼냈다. 그 때문에 청의 학자들이 모은 의학서의 대부분은 현재는 타이베이 의 국립고궁박물원 에 보존되어 있다 [ 10 ] .

에도시대에는 쇄국 체제 때문에 외국 의학서는 그다지 전래하지 않았다. 거기서 『동의보감』에 주목한 도쿠가와 요시무네 는 이를 복각시켜, 에도시대 첫 관판 의서로서 1724년・1730년에 발매되었다. 19 세기에는 청나라 에 수출되었고 나중에는 판목이 수출되어 청나라로 출판되었다 ​​[ 10 ] . 또 조선통신사였던 의관이나 동도한 의사와 일본의 의사 사이에도 교류가 있어 필담에 의한 의사문답 등을 모은 기록이 남아 있다 [ 10 ] .

동양의학의 표준화 문제

한의학을 포함한 동양의학이 널리 주목됨에 따라 이론의 표준화 등도 시도되어 정치문제 로 발전하기도 한다. 현대에서는 침구는 세계적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세계보건기구( WHO )는 1980년대부터 시작되는 전통의학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경구의 표준화를 시도했다. 한·중·한 연구자들은 많은 검토와 논의를 거듭해 2006년 경공부위가 국제표준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측이 "한국 침술 방법이 채택됐다"고 발표하고 중국 측이 반발했지만 [ 17 ] 표준화 작업에 관련된 중국 과학원 전문가에 따르면 최종적으로 결정된 361곳의 경공에 대해 359곳은 중국의 국가기준과 일치하고 있다고 한다 [ 18 ] . 동아시아의 의학은 중국을 근원으로 하면서도 각지에서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기 때문에 용어나 처방, 이론에도 다양한 차이점이 있어 표준화·통일화에는 많은 벽이 있다. 그러나 한방, 침구 등 동양의학의 표준화·글로벌화의 흐름 속에서 미국 국립위생연구소 (NIH)에서는 대폭적인 예산을 나누어 중의학 중심으로 연구가 이루어지고 그 성과는 미국의 것이 되고 있다. 연구 규모는 2003년 단계로 NIH에 속하는 미국 국립 보완 대체 의료 센터(NCCAM)와 국립암 센터(NCI)를 합쳐 250억엔에 이른다. 미국이 만든 아시아의 하벌메디슨(한약) 기준이 글로벌 표준으로 아시아에 붙잡힐 가능성도 있어 아시아 국가들, 특히 동양의학의 중심인 한중일이 분열된 채로 있는 것은 아시아 전통의학 전체에 있어서 약점이라고 지적되고 있다. [ 19 ]

일본의 조선의학사 연구

일본에서는 중국 의학의 연구에 비해 한반도의 의학·의학사의 연구는 매우 수박이지만, 조선의학사 연구의 집으로 미키에이 (1903 - 1992)의 이름을 들 수 있다. 당시 한반도의 문화·과학기술이 일본에 미치는 영향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일본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도 한반도의 과학·의학사 연구는 거의 없었다. 쇼와 3년부터 16년간 한반도에 살았던 미키는, 그 해명에 혼자 대처, 「조선의서지」(1956년), 「조선의학사급 질병사」(1963년)를 간행했다 [ 20 ] . 한일 양국에서 평가가 높고, 한국과학사학회 감사패상, 일본의사학회 공로상 등을 수상하고 있다 [ 21 ] .

각주

주석

  1.  초간본은 현존하지 않고, 현존하는 것은 일본의 미야우치청이 소장하는 1417년의 재간본만
  2. ^ 의심방』은 탄바 야스요시 가 중국의 육조・수국・당의 200이상(204종, 10,881조라고도 세는) 문헌을 중심으로, 병의 치료법이나 양생법, 의사의 마음가짐 등을 빼내, 증례별로 편집한 현존하는 일본 가장 오래된 의학서로 , 전. 중국 의학뿐만 아니라 인도 전통 의학 아유르베다의 영향을 받은 불교 관계 의학서 등도 인용되고 있다. 『의심방』에 인용된 문헌은 대부분이 소산되어 있어 현존하는 것도 시대 속에서 개편되고 있다. 따라서 당시 문장이 인용·유지된 '의심방'은 귀중한 문헌으로서 한중일에서 연구에 활용되고 있다. 다만, 무로마치 시대에 하사된 한정가에서는 문외 불출로 되어 최근까지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 의학에는 영향을 주지 않았다.

출처

  1. d 요시토미 마코토 2003 .
  2. ↑ 중국 주연국의 중국 의학 수용 경향-현존 고의적의 조사보다-이바라키 대학 인문학부 마야나기 마코토
  3. ↑ 「서양의학과 동양의학」 마나야 마코토「시니카」8권 11호
  4. 고려의학 북한용어사전 코리아컨텐츠랩 &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5. ↑ 고려의학과학원에서 경락토론회 조선 신보
  6. b [칼럼] '조의학'의 중국 무형문화유산 등록과 '중의학공정' 이민호 금강일보 2011.8.3
  7. c 조기 호수 등 2002 .
  8. ↑ 중국, 한국의 전통 의학 테이쿄 대학 약학부 부속 약용 식물원 기노시타 무사
  9. ^ 타치바나 테루마사 『일본 의학 선인전-고대부터 막부 말까지』 의사 약업 신보사, 1969년
  10. ↑ f 마나야 마코토 「한국 전통 의학 문헌과 한중일의 상호 전파『온지회 회보』 34호 링크 끊기 ]
  11. ↑ 관설 일본 한문학사 약대동문화대학문학부 중국학과 나카바야시 연구실
  12. ↑ 일 한국시 심포지엄 “전통 의학에 있어서의 한일 교류의 역사” 테라자와 설년 마나기 마코토 김성수 제 61회 일본 동양 의학회 학술 총회
  13. 타다 이오리「<사료소개>『의심방』소인『승려방』배부 : 동아시아에 전파한 불교의학의 제상 』『일본연구』 제41호, 국제 일본 문화연구센터, 2010년 3월, 373-411페이지 doi : 10.150055 0915-0900 , NAID 120005681463 .  
  14. 마나야 마코토 「「의심방」권 30의 기초적 연구 본초학적 가치에 대해」 「약사학 잡지」 제21권 제1호, 일본 약사학회, 1986년 6월, 52-59페이지, ISSN 02852314 , NAID 40004378416 .   구독 계약) Paid subscription required
  15. ↑ b 한·중·한 고의적의 특징과 관련 마나야 마코토(기타사토 연구소 부속 동양 의학 종합 연구소 의사학 연구부)
  16. ↑ 일본이 수용한 한의학과 고의적의 교류사 마나 야 마코토 이바라키대학 대학원 인문과학 연구과 교수
  17. ↑ WHO, 한국의 침술을 국제표준에 중앙일보 일본어판 2008년 6월 19일
  18. 경혈의 국제표준화 문제, 한국과 중국의 추진 동양학술 출판사
  19. ^ 조기호, 「2. 한약의 국제성을 목표로(한약의 국제성을 목표로 하고)(제55회 일본 동양의학회 학술 총회)」 「일본 동양 양효 잡지  
  20. ↑ 소개 『조선 의사 연표』 마나야 마코토「과학사 연구」 25권 2호
  21. 미키 사카에 디지털판 일본인명 대사전+Plus 코단샤

참고문헌

외부 링크

관련 항목

==

韓醫學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韓醫學
諺文한의학 / 고려의학
汉字韓醫學 / 高麗醫學[註 1]
文观部式Hanuihak / Goryeo uihak
马-赖式Hanŭihak / Koryŏ ŭihak

韩医学(朝鮮語:한의학),又称东医(朝鮮語:동의),朝鲜民主主义人民共和国称为高丽医学(朝鮮語:고려의학[1],是朝鲜半岛传统医学,主要是在傳統中醫的體系上结合朝鲜本土医药發展起來[2][3][4]。中国境内的朝鲜族自治区域称为朝医。朝医是中国五大少数民族医学之一[註 2]

朝鲜半岛本土传统医学最初称为“乡药”[6]:5-6朝鲜王朝中期,朝鲜医学家许浚将《黄帝内经》和金元四大家中医理论与本国传统乡药統合开创“东医”[6]:95。朝鲜王朝末期,医学家李济馬创立以四象为纲的“四象医学”成为韩医学的重要组成部分[7]。韩医以“天、人、性、命”整体观和“四维之四象”结构为理论指导,在临床上施行辨象施治[2]。韩医与中医有许多共通之处,但韩医发展了其独具特色的治疗方法,融合了除中医以外的其它医学知识[2]。在临床方面,韩医非常注重针药并用的治法[7],應診甚少使用脈診[8]

1986年,韩国将日本式的“汉医”一词改称“韩医”。2006年,韩国为配合2013年东医名著《东医宝鉴》问世400周年的纪念活动申请将此书登录为世界记忆遗产名录。此后,《广州日报》在头版上援引民俗专家白庚胜的话以《韩国拟将中医改为韩医申报“世遗”》为题进行报道,引起舆论对韩医的关注和不满。韩国被指欲割断韩医与中医的源出关系,以突出其医学的本国化[9]。不过也有舆论表示《广州日报》的报道存在“常识性错误”,并支持包括韩医、中医在内的传统医学都成为文化遗产[10]

名称

朝鲜半岛本土传统医学最初称为“乡药”[6]:5-6朝鲜王朝时期,朝鲜医学家许浚将《黄帝内经》和金元四大家中医理论与本国传统乡药结合开创朝鲜医学——“东医”。他在其所著《东医宝鉴》中称:“王节斋有言曰:东垣北医也……丹溪南医也……则医有南北之名尚夷,我国僻在东方,医学之道,不绝如线,则我国之医,亦可谓之东医也”[6]:95朝鲜日占时期,按日本汉方医学的习惯,东医被称为“汉医”或“汉方医学”、“东洋医学”。1986年,韩国政府修改《国民医疗法》,规定将“东医”、“汉医”统一改称为“韩医”[2][11],不过民間仍有稱漢醫者[12]

历史

萌芽期

韩国民俗村中的韩医诊所

黄帝内经》载“故砭石者,亦从东方来”[13]:242,《素问·异法方宜论》和《山海经·东山经》称始于中国东海岸针灸术传入了古朝鲜。据考古发现,早在原始社会朝鲜半岛的先民就已经使用砭石来治疗外科肿气等疾病[6]:3。据相关遗址中针的发现,以及史料中有关灵艾、乾艾的记载,表明古朝鲜已经使用针灸治疗疾病。[6]:3-5。史记载古朝鲜使用艾、蒜、灵草等植物和动物做药材[6]:3-5。《神农本草经》也有提及韩医学[13]:242

创立期

三国时期,古朝鲜固有的和从中国传入的医学理论得到了融合,并在此基础上创立了自主的医学——“乡药”,即“国药”。高句丽借鉴中国建立了侍医制度,主要负责国王的医疗。百济设有药部和负责医学教育、疾病治疗和药物管理的医博士、采药师、祝禁士。三国医学在人体结构方面借鉴了中医以五脏六腑为中心的系统学说;在生理、病理方面则借鉴了印度医学以地、水、火、风四方面说明人体生理和病理的学说;在预防养生方面采纳并进一步发展了中国道家导引、按摩、辟谷、纳气、炼丹等方法[6]:6-7[14]:37。三国时期的医学书籍有《高丽法师方》、《百济新集方》等。这些医书对朝鲜本土乡药的发展影响很大。与此同时,这些书籍也传入中国和日本。据史料记载,公元645年,日本人安作得志从高句丽学习针灸术后将其带回日本,推动了日本医学的发展。[6]:6-7

统一新罗于717年开设药殿,指定专门的医博士教授医学,主要科目是其从引入的医学理论。从印度归来的僧人以及唐沿海新罗坊从事贸易的商人还将产于阿拉伯东罗马帝国等地的药材引入朝鲜半岛。三国时期曾出现的救疗制度在统一新罗时期得到进一步的完善。从统一新罗传入中国的医方、药物明显增多。高句丽的《老师方》被载入《外台秘要》。记载新罗僧人用威灵仙治愈足痹的《威灵仙传》传入中国后,很快被中国医家认可并迅速推广,并被载入《本草》。统一新罗的医书主要有《济众立效方》、《新罗法士方》、《新罗法士流观秘密要术方》和《新罗法师秘密方》四部。不过这四部书都已失佚,只有《新罗法士方》二首,《新罗法士流观秘密要术方》和《新罗法师秘密方》各一首保存在日本《医心方》中[6]:7-8。据《三国遗事》记载,新罗曾进行过尸体解剖[14]:56

发展期

高丽在建国初期设立了医学教育与行政机关体系。太医监主管全国医疗行政和医生教育及任用,尚药局负责王室的医疗事务,此外还有东宫医官、翰林医官、食医、军医、兽医、狱医等以及东西大悲院、济危宝、恵民局、救济都监等救疗机构。此外,高丽还设立了医学院,主要邀请宋医教授医生。958年,高丽开始通过科举考试任用医官。成宗穆宗时期时期,高丽医疗制度得到进一步的完善[6]:9[14]:107。高丽中期在继承唐宋医学和综合印度阿拉伯医学的知识后,高丽医学开始创立。受宋医的影响,高丽改变了原始的治疗方法,开始以阴阳五行为中心展开医学理论探讨,辩证论治的思想开始发展[6]:9-10。在本草方面,宋《本草要括》、《证类本草》的传入使高丽新药的知识更加丰富。高丽《乡草救急方*方中乡药目草部》记载有180余种药物。高丽与中国的医学交流达到空前水平。高丽使节来华大多有医官相随。中国医事制度、医药著作、药材大量输出到高丽。中国医生到高丽也不绝于途[6]:10

高丽中后期的医学自主性得到增强,虽然依然遵循中医理、法、方,但在药物的使用上形成了使用乡药的风气。乡药的理论基础是“在本国发生的疾病应以本国药材进行治疗”的宜土性理论。相对于“乡药”,从中国输入的药材被称为“唐药”。高丽代表性的医学著作有金永锡的《济众立效方》(约1146-1166年)、崔宗俊的《御医撮要方》(1226年)。脉诊在高丽很被重视,但辨证论还不成熟,仍处于对症治疗的阶段,以药物治疗为主。《乡药救急方》、《三和子乡药方》、《乡药古方》、《东方经验方》、《乡药惠民经验方》、《乡药简易方》等许多乡药方书的出现,显示高丽自主医学已经过渡到以唐宋医学为基础,适当结合经验医术的阶段。高丽末期,由于战乱,高丽内忧外患,但高丽的自主医学却有了飞跃的发展,逐渐扩充了乡药的医药知识[6]:11-12[14]:108。在医学理论方面,高丽医学对《黄帝内经》、《甲乙经》、《难经》等有了新的理解与诠释,并整理编撰了《黄帝八十一难经注义图序论》,对《难经》各条文进行注解,并对全部理论辅以图表加以解释[6]:9

成熟期

韩医名著《东医宝鉴

朝鲜王朝初期与高丽末期一样与中国的交流较少,这一时期的医学主要是继承高丽末期的乡药医学。从世宗开始,朝鲜与中国明朝的交往变得越来越频繁。到成宗中宗时期,中国明朝的许多方书能够在朝鲜直接出刊。朝鲜对明朝医学的认识也越来越深刻、全面。与此同时,朝鲜本土乡药医学的研究在成宗时期也达到鼎盛。朝鲜经常派人来华输入朝鲜不产之药,并引种、繁殖中国的药用动植物。由于中国地道药材路远而昂贵,朝鲜也越发意识到使用乡药更为方便、便宜、疗效更佳。[6]:13-15

世宗很重视用乡药治疗本国人民的疾病。为了解乡药采集的最佳时期,他命俞孝通领衔编撰《乡药采取月令》,发布乡药采集月令,收集乡药方书,最终编写了包括所有乡药方书的《乡药集成方》。《乡药集成方》全书共85卷,以《乡药济生集成方》为蓝本,借鉴中国和朝鲜本国医学书籍编撰而成,是朝鲜半岛医学史上的第一部集大成的著作[6]:15[14]:208。世宗时期,朝鲜还对实用性较强的中医方剂学进行了整理,为吸收和同化中国医学提供了有效的方法。1445年,世宗又命金礼蒙等编纂了另一部大型医学著作《医方类聚》。该书共365卷(现存仅262卷)历经朝鲜世宗世祖成宗三朝,耗时十余年于1465年最终刊印,引用中国医书153部,其中包括40多部中国已佚的古医书。训民正音发明后,朝鲜还对中国和用汉字书写的朝鲜方书进行了韩语翻译、解释、注解,为朝鲜自主医学的发展起到了重要的意义[6]:13-14[14]:208

朝鲜王朝中期的医学主要是以金元四大家和明朝中期的医书为主。燕山君之后,乡药医学开始逐渐衰落,乡药的采集被忽视,许多乡药方书也未能在临床中得到应用[6]:14。乡药逐渐衰退的原因主要是因为关于乡药使用核传播的医书都是以治疗方剂或运用技巧为主,而不是以学术理论为重点,所以除非传授秘籍,否则无法通用。此外,乡药医书中的理论和原理也不全面,如果不掌握其方剂的本意或用药技巧,就无法传授其精华部分[6]:178。壬辰倭乱期间,无辜百姓死于疾病,救济百姓成为极为迫切的任务。但当时朝鲜既有传统医学,又有中国宋、金、元时期医学,还有刚刚传入的明朝医学,出现各种医学混合在一起的混乱局面。宣祖于是命许浚编撰新的综合医书,纠正错误理论和处方,并选取正确的处方。1610年,许浚花了14年的时间最终使《东医宝鉴》成书[6]:55-56。《东医宝鉴》是一部以《黄帝内经》为理论基础,加之金元四大家的实际医学理论,并倡导朝鲜乡药运用的综合性医学理论和临床典籍[6]:54。它的问世确立了韩医学的独立地位[6]:24,并最早创用“东医”作为朝鲜传统医学的专用名[6]:20。乡药也重新得到复兴[6]:178

近现代

韩国首尔京东市场出售的草药

近代,西方科学和思想文化涌入朝鲜。1894年甲午改革时期,朝廷废除了传统韩医学考试而全面引进西医。西医学在政策的保护下逐渐定立。1900年1月,新的《医士规则》将传统韩医与西医并存[15]。尽管受到西医的冲击,传统韩医学依然有所发展。1901年,以医家李济马根据中国《灵枢·通天》五态人之说,创立了一个完整的四象医学理论体系,并於1894年编撰了《東醫壽世保元》。四象医学主要是替代辨证论治的理论体系,将人的体质分为四象来治疗以适于体质病因论的理论。它是源于中医、脱胎于中医,而由朝鲜医家创造的朝鲜民族医学。四象医学创立不久就很快传入中国延边地区,成为延边朝鲜族民族传统医学的内容之一[6]:23。四象医学学说同时也为东方传统医学增添了体质医学的新内容[2]

日本统治下的朝鲜对韩医学持否定态度。1907年起,韩医生不再被允许在国立医院行医。但由于日占朝鲜医疗资源紧缺,日帝朝鲜总督府于1913年发表《医生规则》,区分「醫生」和「醫師」,将行使韩医的人员称为「醫生」。1944年日帝总督府发表《朝鲜医疗令》,废止1913年的《医生规则》[16][17]

1948年大韩民国成立后,韩国政府在社会部保健局新设了汉方科。1951年10月,韩国政府颁布《国民医药法》,规定传统东医与西医的地位相同,享受同等待遇,从而在法律上确立了东、西医两种医学并存的二元医疗体制[2]朝鲜战争结束后,传统韩医学在诊疗手段、用药方式和医疗条件等方面都有了改善[13]:242。1994年10月,韩国正式成立韩医学研究院(KIOM),并于1996年11月在保健福祉部成立韩医管理局。2003年7月15日,韩国国会通过了《韩国韩医药发展法案》,扶植韩医药发展,促进韩医学的普及化、现代化和国际化。2005年12月21日,韩国保健福祉部与有关部门协作成立“韩医药发展审议委员会”,保健福祉部副部长任该委员会委员长,并颁布了《韩医药发展第一个五年综合计划》[2]

近年來,韓醫學界正推動韓醫使用現代醫療設備,並認為這可使韓醫客觀化、科學化。[18]2012年,有韓醫生使用超音波而遭到起訴。2022年12月,韓國大法院最終裁定韓醫生使用超音波檢查並不違法。[19]韓國韓醫學會對此表示將會推動韓醫學校開設放射學等科目,並呼籲解除對韓醫師使用X光CTMRI等影像設備的限制。[20][21]

韩医教育

2008年,釜山大學於梁山校區成立東方醫學院,為首間國立韓醫學院

韩国有完整的韓醫学士、硕士、博士学位教育[22]。1953年,東洋醫科大學开设韩国最早的韩医學院(今庆熙大学東方醫學院)[23],并于1974年开设了首個博士课程[24]

韓國目前有12所大學提供韓醫教育,每年招收約800名韓醫學生[註 3],11所為6年制韓醫大學[註 4],其中庆熙大学、 圓光大學东国大学東義大學为综合性大学,另外7所为专科大学,有大邱韓醫大學大田大学尚志大学、 又石大学、 嘉泉大學世明大学、 東新大學。而釜山大學則是4年制的韓醫大學,同時也是唯一的公立韓醫大學。[註 5][26]

注释

  1.  「韓醫學」是南韓的稱呼,「高麗醫學」是北韓的稱呼。
  2.  朝医与藏医、蒙医、维医和傣医在1984年全国少数民族卫生工作会上被正式列为中国五大民族医学[5]
  3.  入學名額為715人,若包括超額錄取名額,則為800人[25]
  4.  6年制的韓醫大學,需參加大學聯考入學,畢業後可取得韓醫國考資格及學士學位
  5.  4年制的韓醫大學,為學士後制度,需先獲得其它學士學位方可報考,畢業後可取得韓醫國考資格及碩士學位

参考文献

  1.  高丽医学研究院. 우리민족끼리. [2020-07-25]. (原始内容存档于2020-02-12).
  2.  展敏; 李晓峰. 韩医漫谈. 《环球中医药》. 2009, 2 (4). ISSN 1674-1749CNKI HQZY200904038.
  3.  中華醫史雜誌. 中华医学会. 2003.
  4.  金煜. 中韩传统医学存在源流关系:两者无本质区别新京报. 2006-10-23 [2020-07-12]. (原始内容存档于2020-07-14) –通过新浪新闻.
  5.  毛德西. 论中国传统医学基础理论的特点. 《中国中医基础医学杂志》. 1999, (4). ISSN 1006-3250CNKI ZYJC904.001.
  6.  车武. 《许浚与《东医宝鉴》》. 北京: 中央民族大学出版社. 2012年1月. ISBN 978-7-5660-0134-4.
  7.  傅进军; 陈华德. 韩国传统医学的特色分析. 《中医教育》. 2001, (5). ISSN 1003-305XCNKI ZYJI200105027.
  8.  中醫何時迎新風 韓醫發展可借鑑. 文匯報. 2018-01-03 [2020-07-12]. (原始内容存档于2020-07-12).
  9.  韩国官员称将中医改为韩医申遗是场误会. 新浪网. 2006-10-24 [2020-07-25]. (原始内容存档于2021-11-05).
  10.  传统医学都应成为“文化的遗产”. 华夏经纬网. 2006-10-18 [2020-07-25]. (原始内容存档于2020-07-25).
  11.  吴作. 韩国的传统医学. 《中国中医药报》. 2001-12-26.
  12.  中醫怎麼改名「台醫」?日韓「漢醫」自成一格的獨特藥學. NOWnews今日新聞. 2020-07-06. (原始内容存档于2024-09-02) (中文).
  13.  董向荣. 《韩国》. 北京: 社会科学文献出版社. 2009年5月. ISBN 9787509707326.
  14.  杨昭全. 《韩国文化史》. 济南: 山东大学出版社. 2009年6月. ISBN 978-7-5607-3874-1.
  15.  王孝莹. 韩医学(韩国传统医学)的历史与现状. 《国外医学(中医中药分册)》. 1995, (3). ISSN 1001-1145CNKI GWZY199503001.
  16.  丁彰炫. 韩国韩医学教育概述 (PDF). 上海中医药杂志. 2001 [2024-01-19]. (原始内容存档 (PDF)于2024-01-19).
  17.  Kang Yeonseok. The Characteristics of Korean Medicine Based on Time Classification. Chinese Medicine: The Global Influence of an Evolving Heritage. 2011 [2024-01-20]doi:10.4000/chinaperspectives.5630. (原始内容存档于2024-04-18). However, Western medical doctors were referred to as “Euisa” (kor. trans. of 醫師 – doctors), while Korean medical doctors were referred to as “Euisaeng” (kor. trans. of 醫生 – medical students).
  18.  “한의사들 초음파 사용해 국민의 한의학으로 거듭나야”. 민족의학신문. 2015-07-16 [2024-02-23]. (原始内容存档于2024-02-23) (韩语).
  19.  한의사 초음파 사용, 결국 한의사 승리 ... 한의협, 건보 급여까지 요구. 메디칼업저버. 2023-09-14 [2024-02-23]. (原始内容存档于2024-02-23) (韩语).
  20.  MEDI:GATE NEWS 한의계 한의사 초음파 합헌 판결, 엑스레이 CT MRI까지 가자. medigatenews.com. [2024-02-23]. (原始内容存档于2024-02-23) (韩语).
  21.  한의대 필수 과목에 ‘영상의학’ 추가 추진... CT·MRI 사용 본격화 시동 - 의사나라뉴스. 한의대 필수 과목에 ‘영상의학’ 추가 추진... CT·MRI 사용 본격화 시동 - 의사나라뉴스. 2023-03-24 [2024-02-23]. (原始内容存档于2024-02-23) (韩语).
  22.  朴敏哲. 韩医韩药. 《长春中医药大学学报》. 2008, 24 (2). doi:10.13463/j.cnki.cczyy.2008.02.036ISSN 1007-4813ISSN 2095-6258CNKI CZXX200802090.
  23.  경희대학교. kmc.khu.ac.kr. [2024-02-21]. (原始内容存档于2024-02-21) (韩语).
  24.  梁永宣. 韩国的传统医学教育. 《中医教育》. 1997, (5). ISSN 1003-305XCNKI ZYJI199705023.
  25.  한의대 정원, 의대 전환···팔 걷어붙인 한의계. 데일리메디. [2024-02-22]. (原始内容存档于2024-02-22) (韩语).
  26.  국내 첫 한의학전문대학원 부산대에 문열어. 청년의사. 2008-03-05 [2024-02-21]. (原始内容存档于2024-02-21) (韩语).

参见

外部链接

==

한국 의학 

위키백과, 자유 백과사전
한국 의학
잠언한의학/신경의학
한자한의학 / 한국 의학 [ 주 1 ]
원관부시Hanuihak / Goryeo uihak
마라이 스타일한의학 / 고려의학

한의학 ( Korean medicine )은 동의 의학 ( Dong eui ) 이라고도 하며 조선 민주주의공화국에서는 고려의학 ( Goryeo medicine ) 이라고 불립니다 [ 1 ] . 한의학 은 한반도 의 전통 의학 으로 , 주로 한의학 전통과 한국 전통 의학을 결합하여 발전해 왔습니다 [ 2 [ 3 [ 4 ] . 중국 내 조선족 자치구에서는 한의학을 한의학 이라고 부릅니다 . 한의학은 중국의 5대 소수민족 의학 중 하나입니다 [ 주 2 ] .

한반도의 원래 전통 의학은 "향약"이라고 불렸다 [ 6 ] : 5-6 . 조선 중기에 조선의 의사 허준 은 황제내경 과 진원 사대론 의 이론을 자국의 전통 의학과 통합하여 "동의"를 창시했다 6 ] : 95 . 조선 말기에는 의사 이제마가 사대론을 바탕으로 "사대론"을 창시하여 한의학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었다 [ 7 ] . 한의학은 "하늘, 사람, 자연, 생명"의 전체론적 관점과 "사대론"의 구조를 바탕으로 하며, 임상에서는 증상 감별 치료를 시행한다 [ 2 ] . 한의학과 중의학은 공통점이 많지만, 한의학은 한의학 외의 다른 의학 지식을 통합하여 독자적인 치료법을 개발해 왔다 [ 2 ] . 임상 실습에서 한국 의학은 침술과 약을 함께 사용하는 치료 방법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며 [ 7 ] 진단에 맥진을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 8 ] .

1986년 한국은 일본어 용어인 "한의"를 "한국의"로 바꾸었다. 2006년, 유명한 동의서인 "동의보감 " 의 출간 400주년 (2013년)을 기념하여 한국은 이 책을 세계기억문화유산 으로 등재 신청했다 . 이후 광저우일보는 민속학자 바이경성 의 말을 인용하여 1면에 "한국, 한의를 한국의로 바꾸어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고, 이는 한국의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한국이 한의학과 전통중의학의 기원 관계를 단절하고 자국의 의학의 지역성을 강조하려 한다는 비난이 제기되었다 [ 9 ] . 그러나 일각에서는 광저우일보의 보도가 "상식에 어긋나는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며 한의학과 전통중의학을 포함한 전통의학을 문화유산으로 등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10 ] .

이름

한반도의 원래 전통 의학은 "향교"라고 불렸습니다. [ 6 ] : 5-6 . 조선 시대 에 조선의학 허준은 황제내경 과 진·원나라 사대론  이론을 자국의 전통 의학과 결합하여 조선 의학인 "동의학"을 창시했습니다. 그의 저서 "동의보감"에서 그는 " 왕해 재는 동원을 북쪽의 의학으로, 단희를 남쪽의 의학으로 말했으니 의학에는 북쪽과 남쪽의 이름이 있다. 우리나라는 동쪽에 멀리 떨어져 있어 의학의 길이 끊긴 적이 없으니 우리나라 의학도 동의학이라 부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6 ] : 95. 일제강점기 에는 일본 한방의학 의 관습 에 따라 동의학을 "한의학", "한방의학", "동방의학" 등으로 불렀습니다. 1986년 한국 정부는 국가 의료법을 개정하여 "동의"와 "한의"를 "한의"로 통일하여 명칭을 변경하도록 규정했으나 [ 2 [ 11 ] 여전히 지역 사회에서는 이를 한의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 12 ] .

역사

싹트는 단계

한국민속촌에 있는 한의원

황제 내경에는 "편석도 동방에서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 13 ] : 242.소문의법방의론』 과 『산해경동산경』 에는 중국 동해안 에서 유래한 침술이 고대 한국에 전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한반도 의 조상들은 원시 사회 초기부터 이미 수술 후 부기 등의 질병 치료에 편석을 사용했다 [ 6 ] : 3. 관련 유적지에서 발견된 침과 역사 문헌에 기록된 영애와 감애를 통해 고대 한국이 이미 질병 치료에 침술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 6 ] : 3-5 . 역사 기록에 따르면 고대 한국은 애, 마늘, 영초 등의 식물과 동물을 약재로 사용했다 [ 6 ] : 3-5 . 신농본 초경(神農本草經) 에서도 한국 의학을 언급하고 있다 [ 13 ] : 242 .

창립 시기

삼국시대에는 고대 한국 고유의 의학 이론과 중국에서 전래된 의학 이론이 융합되어 독자적인 의학 체계인 '향야오' 또는 '국야오'가 정립되었습니다. 고구려는 중국 의학 지식을 바탕으로 왕의 의료를 담당하는 의사 제도를 구축했고, 백제는 약제부를 두고 의사, 약사, 승려들을 통해 의학 교육, 질병 치료, 약물 관리를 담당했습니다. 인체 구조에 있어서 삼국시대 의학은 오장육신을 중심으로 한 중국 전통 의학 의 선천적 장기론을 , 생리병리학적으로는 토수화풍의 네 가지 요소를 바탕으로 한 인도 의학 이론을 차용했습니다 . 예방과 건강 유지 측면에서, 중국 도교의 지도, 마사지, 단식, 호흡 운동, 연금술 등 의 방법을 채택하고 더욱 발전시켰다 [ 6 ] : 6-7 [ 14 ] : 37. 삼국시대 의학서적에는 『고려보살방』과 『백제신지방』 등이 있는데, 이 의학서적들은 한국의 향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동시에 이 책들은 중국과 일본에도 전해졌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서기 645년 일본인 도쿠시 야사쿠가 고구려에서 침술을 배워 일본으로 가져와 일본 의학 발전에 기여했다. [ 6 ] : 6-7

717년, 통일신라는 약당을 건립하고 전문 의사를 임명하여 의학을 가르쳤는데, 주로 당나라에서 전래된 의학 이론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 인도 에서 돌아온 승려들 과 신라의 당나라 연안을 따라 교역하던 상인들은 아라비아 와 동로마 제국 에서 약초를 한반도 로 들여왔습니다 . 삼국시대에 존재했던 의료 체계는 통일신라 시대에 더욱 발전했습니다. 통일신라에서 중국으로 전해진 처방과 약재의 양이 크게 증가했습니다. 고구려의 『 노사방』은 『외 태묘 』 에 수록되었고 , 신라 승려 가 쑥을 이용하여 족마비증을 치료한 기록이 담긴 『위릉선전』은 중국에 전해져 중국 의사들에게 빠르게 인정받고 널리 알려졌으며, 『본초』에도 수록되었습니다. 통일신라의 의학서는 주로 *기중이소방(八中邪方)*, *신라법사방(神法史方)*, *신라법육관미요서방(神法史史史方)*, *신라법미요서방(神法史史方)*의 네 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 네 권 모두 소실되었다. "신라의 처방(神法史)" 중 두 권, "신라의 비의정기(非常法)" 중 한 권, "신라의 비의정기(非法)" 중 한 권만이 일본 서적인 " 이신포(一神法)" 에 보존되어 있다 [ 6 ] : 7-8 . " 삼국유사(三國葬)" 에 따르면 신라는 한때 부검을 행했다 [ 14 ] : 56 .

개발 기간

고려는 건국 초기에 의료 교육 체계와 행정 기관을 설립했습니다. 황실의국은 국가 의료 행정과 의사 교육 및 임명을 담당했습니다. 황실약국은 왕실의 의료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또한 동궁의 의사, 황실 학원의 의사, 식의 의사, 군의관, 수의사, 감방의사, 그리고 동서대자비기관, 절위보, 혜민국, 구제국과 같은 의료 기관이 있었습니다. 더불어 고려는 주로 송나라 의사들을 초빙하여 교육과 치료를 담당하는 의과대학을 설립했습니다. 958년부터 고려는 과거 시험을 통해 의사를 임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종  무종 시대 에 고려의 의료 체계는 더욱 발전했습니다 . [ 6 ] : [ 14 ] : 107 . 고려 중기에 당나라와 송나라 의학 지식을 계승하고 인도 와 아랍 의학을 융합하여 고려 의학이 정립되기 시작했습니다. 송나라 의학의 영향을 받아 고려는 기존의 치료 방법을 바꾸고 음양오행을 중심 으로 하는 의학 이론을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변증법적 치료 사상이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 6 ] : 9-10 . 약초 분야에서는 송나라의 『한약본초』와 『한약분류』의 도입으로 고려의 신약 지식이 풍부해졌습니다. 고려의 『현약방전』에는 180여 종의 약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와 중국 간의 의학 교류는 전례 없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고려의 중국 사신은 대부분 의료 관리들을 동반했습니다. 중국의 의학 체계, 의학서적, 약재가 고려로 대량 수출되었고, 중국 의사들도 고려를 자주 방문했습니다 [ 6 ] : 10 .

고려 중후반에 이르러 의료 자율성이 증대되었다. 전통 중의학의 원칙, 방법, 처방을 고수하면서도 지역 약재의 사용이 보편화되었다. 지역 약재의 이론적 기반은 자국에서 발생하는 질병을 지역 약재로 치료한다는 원칙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중국에서 수입된 약재는 "당약"이라고 불렸다. 고려의 대표적인 의학서적으로는 김용석의 『기종소방』(1146~1166년경)과 최종준의 『어의낙방』(1226년)이 있다. 고려에서는 맥진이 중시되었지만, 변증론은 아직 미성숙하여 증상 치료에 주로 의존하는 양상을 보였다. *Xiangyao Jiuji Fang*, *Samhaja Xiangyao Fang*, *Xiangyao Gufang*, *Dongfang Jingyan Fang*, *Xiangyao Huimin Jingyan Fang*, *Xiangyao Jianyi Fang* 등 수많은 향토 의학 처방서가 등장한 것은 고려의 독립 의학이 당송 의학을 기반으로 한 단계로 전환되어 적절하게 결합되었음을 나타냅니다. 경험적 의료 기술. 고려 말기에는 전쟁으로 인해 내외적 혼란이 잦았지만, 고려의 독자적인 의학은 크게 발전하여 점차 지역 의학에 대한 지식을 확장했습니다. [ 6 ] : 11-12 [ 14 ] : 108. 의학 이론 측면에서 고려 의학은 황제내경 , 침술내경 , 내경 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해석을 가지고 황제팔십팔난경을 주석과 그림으로 편찬하고, 난경의 각 조항에 주석을 달고 모든 이론을 그림으로 설명했습니다. [ 6 ] : 9 .

성숙함

한국의 유명한 의학 고전인 * 동의보감 *

조선 초기에는 고려 말기처럼 중국과의 교류가 미미했다. 이 시기의 의학은 주로 고려 말기의 향토 의학을 계승했다. 세종대부터 조선 과 명나라 간의 교류가 점차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성종 과 중종 시대에 이르러서는 명나라의 많은 처방들이 조선에 ​​직접 편찬될 수 있었다. 조선의 명나라 의학에 대한 이해도 더욱 깊어지고 포괄적으로 발전했다. 동시에 조선의 향토 의학 연구도 성종 시대에 절정에 달했다. 조선은 자국에서 생산되지 않는 약재를 수입하기 위해 중국에 사람을 자주 보냈고, 중국의 약용 동식물을 도입하여 보급했다. 중국의 약재는 멀리 떨어져 있고 비쌌기 때문에 조선은 향토 약재를 사용하는 것이 더 편리하고 저렴하며 효과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6 ] : 13-15

세종대왕은 백성의 질병 치료에 약재를 활용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약재를 채집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를 파악하기 위해 유효통에게 「월간약재집집령」을 편찬하도록 명하고, 이를 통해 약재 처방을 수집하여 마침내 모든 약재를 집대성한 「전국약재집」을 편찬했다. 총 85권으로 구성된 「전국약재집」은 「전국약재집」을 바탕으로 한한의학 서적을 참고하여 편찬되었으며, 한반도 의학사상 최초의 종합적인 약재집이다. [ 6 ] : 15 [ 14 ] : 208. 세종대왕 재위 기간 동안 한국에서는 보다 실용적인 한약 처방도 체계화하여 한의학을 흡수하고 활용하는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1445년 세종대왕은 김예몽을 비롯한 여러 사람에게 또 다른 대규모 의학서적인 「 처집 」을 편찬하도록 명하였다. 이 책은 365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현재는 262권만 남아 있다), 조선의 세종대왕 , 세조대왕 , 성종대왕 의 재위 기간 10년 이상에 걸쳐 편찬되어 1465년에 출판되었다 . 이 책에는 153권의 중국 의학서가 인용되었는데, 그중 40권 이상은 현재 소실되었다. 훈민정음의 발명 이후 조선은 중국 의학서와 한자로 쓰인 한국 의학서를 한국어로 번역, 해설, 주석하는 작업도 진행하여 조선의 독자적인 의학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 6 ] : 13-14 [ 14 ] : 208 .

조선 중기의 의학은 주로 금, 원, 명 중기의 4대 의학자들의 의학서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연산군 이후 향의학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향의학의 수집은 소홀히 여겨졌으며, 많은 향의학 처방이 임상에서 사용되지 않았다 [ 6 ] : 14 . 향의학이 점차 쇠퇴한 주된 이유는 향의학의 사용과 보급에 관한 의학서가 학문적 이론보다는 치료 처방이나 적용 기술에 주로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전서가 전승되지 않는 한 보편적으로 사용될 수 없었다. 또한 향의학서에 담긴 이론과 원리가 포괄적이지 못했다. 처방의 본래 의미나 약재 사용 기술을 숙달하지 못하면 처방의 본질을 전승할 수 없었다 [ 6 ] : 178 . 임진왜란 시기에는 무고한 사람들이 질병으로 죽어갔고, 백성을 구하는 것이 매우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에는 전통 의학, 송·진·원나라 시대의 중의학, 그리고 새로 도입된 명나라 의학이 존재하여 여러 의학이 뒤섞여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선조는 허준에게 잘못된 이론과 처방을 바로잡고 올바른 처방을 선별하여 새로운 종합 의학서를 편찬하도록 명했습니다. 허준은 1610년에 14년 동안 집필하여 마침내 『동의보감』[ 6 ] 을 완성 했습니다 . 동의보감은 황제내경을 기반으로 진과 원나라의 4대 의학자의 실제 의학 이론을 결합하고 한국 전통 의학의 사용을 옹호하는 포괄적인 의학 이론 및 임상 고전입니다 [ 6 ] : 54. 이 책의 출판으로 한국 의학의 독립적인 지위가 확립되었고 [ 6 ] : 24 , 전통 한국 의학에 "동의"라는 명칭을 독점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책이기도 합니다 [ 6 ] : 20. 또한 전통 의학이 부활했습니다 [ 6 ] : 178 .

모던하고 현대적인

대한민국 서울 경기 시장에서 판매되는 허브

근대에 들어서 서양 과학과 사상이 한국에 대거 유입되었다. 1894년 가오개혁 당시 조정은 한의학 시험을 폐지하고 서양 의학을 전면 도입했다 . 서양 의학은 정책적 보호 아래 점차 자리 잡았다. 1900년 1월에는 새로운 '의료법'이 제정되어 한의학과 서양 의학의 공존이 허용되었다 [ 15 ] . 서양 의학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한의학은 꾸준히 발전해 왔다. 1901년 의사 이재마는 중국의 『영서통천 』의 오행론을 바탕으로 완전한 사행의학 이론 체계를 정립했다 . 그는 1894년에 『 동의소서보원』을 편찬했다. 사행의학은 주로 증상 감별과 치료를 대체하는 이론 체계로, 인체를 네 가지 체질로 나누어 체질적 원인론에 따라 질병을 치료한다. 이는 중국 의학 에서 유래 하여 한국 의사들에 의해 창안된 것이다. 설립 직후 사상 의학은 중국 연변 지역에 빠르게 도입되어 연변 조선족의 전통 의학 내용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 6 ] : 23 . 사상 의학 이론은 또한 전통 동양 의학에 체질 의학의 새로운 내용을 추가합니다 [ 2 ] .

일본에서는 한국 의학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1907년부터 한국 의사들은 국립병원에서 진료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령 한국에서는 의료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일본 조선총독부는 1913년에 "의사"와 "내과의사"를 구분하고 한국 의학을 행하는 사람들을 "의사"라고 칭하는 "의사규칙"을 발표했다. 1944년에는 일본 조선총독부가 1913년 의 "의사규칙"을 폐지하는 "한국의사령"을 발표했다. [ 16 [ 17 ]

1948년 대한민국 건국 후 , 한국 정부는 사회복지부 보건국에 중의학국을 설치했습니다. 1951년 10월에는 중의학과 서양의학을 동등한 지위로 인정하고 동등하게 대우하는 내용의 국민의료법을 공포하여 중의학과 서양의학이 공존하는 이중의료 체계를 법적으로 확립했습니다 [ 2 ] . 한국전쟁 이후 중의학은 진단 및 치료 방법, 투약 방법, 질병 상태 등 여러 면에서 발전했습니다 [ 13 ] : 242. 1994년 10월에는 대한한의학회가 공식 설립되었고, 1996년 11월에는 보건복지부 산하에 대한의약국이 설립되었습니다. 2003년 7월 15일에는 국회에서 대한의료발전법을 제정하여 대한의료 발전을 지원하고 대중화, 현대화, 국제화를 촉진했습니다. 2005년 12월 21일, 대한민국 보건복지부는 관련 부처와 함께 보건복지부 차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한의학 발전 위원회”를 설립하고 “한의학 발전을 위한 제1차 5개년 종합 계획”을 발표했다 [ 2 ] .

최근 한국 의료계는 한국 의학을 더욱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한국 의학에 현대 의료 장비의 사용을 장려해 왔습니다. [ 18 ] 2012년에는 한 한국 의사가 초음파를 사용한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 2022년 12월, 대법원은 한국 의사의 초음파 검사 사용이 불법이 아니라고 판결했습니다. [ 19 ] 대한의사협회는 한국 의과대학에서 영상의학과를 비롯한 관련 학과의 개설을 추진하고, X선 , CT , MRI 등 영상 장비 사용에 대한 한국 의사의 제한을 해제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 20 [ 21 ]

한의학 교육

2008년, 부산대학교는 양산 캠퍼스 에 한의과대학을 설립하여 한국 최초의 국립 한의과대학이 되었습니다.

한국은 한의학 분야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 교육의 완전한 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 22 ] . 1953년 동양의과대학은 한국 최초의 한의과대학(현재 경희대학교 동방의과대학)을 개설했고 [ 23 ] , 1974년에는 첫 박사 과정을 개설했습니다 [ 24 ] .

현재 한국에는 한의학 교육을 제공하는 대학이 12곳 있으며, 매년 약 800명의 한의대생이 등록하고 있다 [ 주 3 ] . 이 중 11곳은 6년제 한의과대학이다 [ 주 4 ] . 이 중 경희대학교 , 원광대학교 , 동국대학교 , 동의대학교 는 종합대학교이고, 나머지 7곳은 대구 한의과대학 , 대전 대학교 , 상지대학교 우석대학교, 가천대학교 , 세명대 학교 , 동신대학교 등 전문 대학이다 부산대학교 는 4년제 한의과대학으로, 유일한 공립 한의과대학이다. [ 주 5 [ 26 ]

메모

  1.  "한국 의학"은 남한에서 사용하는 명칭이고, "고려 의학"은 북한에서 사용하는 명칭입니다.
  2.  의학은 티베트 의학, 몽골 의학, 위구르 의학, 다이 의학과 함께 1984년 소수민족 보건 사업 전국 회의에서 중국의 5대 민족 의학 중 하나로 공식 등재되었습니다 [ 5 ] .
  3.  정원은 715명이며, 초과 등록을 포함하면 800명이다. [ 25 ]
  4.  6년제 한의과대학은 입학시험이 필요합니다. 졸업 시 학생들은 한의학 국가고시 합격증과 학사 학위를 받게 됩니다.
  5.  4년제 한의과대학은 학사 학위 취득 후 진학하는 과정으로, 지원자는 먼저 학사 학위를 취득해야 합니다. 졸업 후 학생들은 한의사 국가고시 응시 자격과 석사 학위를 취득할 수 있습니다.

참고 자료

  1. 한국 의학 연구소 . 우리 민족 사람들. 2020-07-25 ] . 2020-02-12에 원본에서 보존됨 .
  2.  잔 민; 리샤오펑. 한의학에 대한 가벼운 토론. 중국 전통 의학의 글로벌 저널. 2009, 2 (4). ISSN 1674-1749 . CNKI  HQZY200904038 .
  3. 중국 의학사 저널 . 중국 의학 협회. 2003.
  4.  진위. 전통 중국 의학과 한국 의학은 공통된 기원을 가지고 있다. 둘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 베이징 뉴스 . 2006년 10월 23일 2020년 7월 12일 ] . 2020년 7월 14일 시나 뉴스를 통해 원본에서 보존됨 .
  5.  마오 덱시. 전통 중국 의학의 기본 이론의 특징에 대하여. 기초 중국 의학 저널. 1999, (4). ISSN 1006-3250 . CNKI  ZYJC904.001 .
  6. the Dongui Bogam. Beijing: Central University for Nationalities Press. January 2012. ISBN  978-7-5660-0134-4 .
  7.  Fu Jinjun; Chen Huade. 한국 전통 의학의 특징 분석. 전통 중국 의학 교육 저널. 2001, (5). ISSN 1003-305X . CNKI  ZYJI200105027 .
  8. 전통 중의학은 언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것인가? 한국 의학의 발전이 모델이 될 수 있을까 ? Wen Wei Po. 2018-01-03 2020-07-12 ] . 2020년 7월 12일 원본에서 보존됨 .
  9. 한국 정부 관계자, 유네스코 인정 명칭 변경 신청(전통 중국 의학에서 한국 의학으로 변경)은 오해였다고 밝혀 . 시나닷컴. 2006년 10월 24일 2020년 7월 25일 ] . 2021년 11월 5일 원본에서 보존됨 .
  10. 전통 의학은 모두 "문화유산"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 중국경제망. 2006년 10월 18일 2020년 7월 25일 ] . 2020년 7월 25일 원본 에서 보존됨 .
  11.  우쭤. 한국의 전통 의학. 중국 전통 의학 뉴스. 2001년 12월 26일.
  12. 전통 중국 의학이 어떻게 "대만 의학"으로 개명될 수 있을까? 일본과 한국의 "한 의학"만의 독특한 약리학 . NOWnews 오늘의 뉴스. 2020년 7월 6일. 2024년 9월 2일 원본에서 보존됨 . 중국어)
  13.  동샹룽. 한국. 베이징: 사회과학학술출판사. 2009년 5월. ISBN  9787509707326 .
  14.  양자오취안. 한국문화사. 지난: Shandong University Press. 2009년 6월. ISBN  978-7-5607-3874-1 .
  15.  왕샤오잉. 한국 의학(전통 한국 의학)의 역사와 현황. 외국 의학(전통 중국 의학 및 약재). 1995, (3). ISSN 1001-1145 . CNKI  GWZY199503001 .
  16.  Ding Zhangxuan. 한국 의학 교육 개요 (PDF) . 상하이 중의학 저널. 2001 2024-01-19 ] . ( 2024-01-19에 원본 (PDF) 에서 보존됨 ).
  17.  강연석. 시간적 분류에 따른 한의학의 특징 . 중의학: 진화하는 유산의 세계적 영향. 2011 2024-01-20 ] . doi:10.4000/chinaperspectives.5630 . ( 2024-04-18에 원본에서 보존됨 ). 그러나 서양 의사는 "의사"(의학의사)로, 한국 의사는 "의생"(의학 ...
  18. "한의 사업자초음파사용해국민의한의학으로거거듭나야" . 민족학신문. 2015-07-16 2024-02-23 ] . ( 2024-02-23에 원본에서 보존된 문서 ) (한국어) .
  19. 한의사초음파사용, 결국한의사승리... 한의협, 건보급여까지요구 . 메디칼업저버. 2023-09-14 2024-02-23 ] . ( 2024-02-23에 원본에서 보존된 문서 ) (한국어) .
  20. MEDI:GATE NEWS 한의계한의사초음파합헌판결, 엑스레이CT MRI까지가자 . Medigatenews.com. 2024-02-23 ] . ( 2024-02-23에 원본에서 보존된 문서 ) (한국어) .
  21. 한의대필수과목에'영상의학' 추가추진... CT·MRI 사용본격화시동- 의사나라뉴스 . CT·MRI 사용본격화시동- 의사나라뉴스. 2023-03-24 2024-02-23 ] . ( 2024-02-23에 원본에서 보존된 문서 ) (한국어 )
  22.  박민철. 한의학과 약학. 창춘중의과대학 학술지. 2008, 24 (2). doi:10.13463/j.cnki.cczyy.2008.02.036 . ISSN  1007-4813 ISSN 2095-6258 CNKI CZXX200802090 .  
  23. 경희대학교 . kmc.khu.ac.kr. 2024-02-21 ] . (2024-02-21에 원본에서 보존된 문서 ) (한국어) .
  24.  Liang Yongxuan. 한국의 전통의학교육. 전통중의학교육저널. 1997, (5). ISSN 1003-305X . CNKI  ZYJI199705023 .
  25.  한의대 정원 , 의대 전환 ··· 팔걸이 붙이인한의계 . 데일리 메디 .
  26. 국내첫한의학전문대학원부산대에문열어 . 수출의사. 2008-03-05 2024-02-21 ] . ( 2024-02-21에 원본에서 보존된 문서 ) (한국어) .

보다

외부 링크

==

==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