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세트] 북한 현대사 산책 - 전5권
[세트] 북한 현대사 산책 - 전5권 l 북한 현대사 산책
안문석 (지은이) | 인물과사상사 | 2016-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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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안문석 교수가 원고지 5,500매 분량으로 북한 현대사를 전5권으로 집필했다. 국내 최초로 북한 현대사를 사건과 사실과 기록을 바탕으로 가장 객관적으로 집필한 것이다. 수많은 자료에서 사실(史實)을 찾아내서 기자의 눈과 학자의 눈으로 북한 현대사를 꿰뚫고 있다.
북한의 대표적인 역사서인 <조선통사>, <조선전사> 등과 <김일성 선집>, <김일성 저작 선집>, <인민의 지도자>, <김정일 위인상> 등 북한 자료의 진위를 정밀하게 파악하고 통찰력 있게 북한 현대사를 분석했다. 또한 남한의 학자들의 논문과 단행본, 조선인민군의 수기를 통해 균형 잡힌 시각과 안목으로 왜곡되고 잘못된 사실들을 바로잡기도 했다.
▣ 차례 제1권
머리말 · 4
제1장 해방과 김일성 : 1945년
오, 자유!
‘만세’의 대향연 15 · 자생적인 정치조직들 19
소련군의 진주
소련군은 ‘마오제’ 22 · 북한은 전리품 26 · 소련의 간접통치 28
김일성의 등장
세력을 확장하는 김일성 31 · 김일성의 요정정치 35
공산당 창당
김일성과 박헌영의 담판 38 · 속도전 창당 42 · 『로동신문』창간 45
최고 권력자가 되다
신의주학생시위 사건 50 · 민족통일전선론의 승리 52 · 권력을 손아귀에 넣다 56 · 소련은 왜 김일성을 택했는가? 59 · 김일성과 보천보전투 62
김일성의 정적들
조선의 트로츠키, 오기섭 67 · 황해도의 아버지, 무정 73
김일성과 다른 길을 가다
시인형 운동가, 조만식 80 · 의문의 죽음, 현준혁 84 · 김일성이 현준혁을 암살했을까? 87
초등학생 눈에 보인 1945년 · 91
제2장 모든 것을 바꿔라 : 1946년
김일성 정권의 수립
공산청년동맹을 민주청년동맹으로 97 ·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출범 100 · 민주기지론과 국토완정론 106
사회를 개혁하다
모든 토지는 농민들에게 110 · 8시간 노동과 남녀평등 117 · 친일파 청산 119
사회주의의 시작
자본주의를 제한적으로 이용하다 124 · 주요 산업시설을 국유화하다 127
북조선노동당을 창당하다
연안파의 분열과 조선신민당 창당 130 · 김일성과 박헌영의 모스크바행 134 · 북조선노동당 출범 136
박헌영의 월북
미 군정에 쫓기다 139 · 남조선노동당의 탄생 143
정권의 물리적 기초 다지기
군대 창설 148 · 첫 선거 152
의식개혁운동
김일성종합대학 개교 155 · 건국사상총동원운동 159 · 기독교 탄압 162
문인들의 월북
이기영·한설야·이태준의 월북 166 · 응향 필화사건과 구상의 월남 171 · 최초의 한류스타, 최승희 175
통역장교가 본 1946년 · 179
제3장 멀어지는 통일의 길 : 1947년
사실상의 단독정부 수립
북조선인민위원회 출범 185 · 군 장교 숙청 작업 187 · 첫 화폐개혁 194
사회주의로 가기 위한 개혁
생산합작사를 만들다 197 · 사회주의적 농업협동화 200
물 건너간 통일임시정부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203 · 『동아일보』의 오보 208 · 여운형 암살 211
예술도 사상이 있어야 한다
영화를 통한 사상 교육 215 · 전국미술전람회 개최 220 · 원조 개그맨 신불출의 흥망 222
여성 광부의 1947년 · 229
제4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 1948년
정규군 완성
조선인민군 출범 235 · 기관단총 첫 시제품 생산 239
국내파의 몰락과 소련파의 득세
김일성의 국내파 비판 242 · ‘당박사’ 허가이의 권력 245
통일정부를 향한 마지막 몸부림
성시백의 활약 249 · 김구의 방북 253 · 홍명희와 허헌의 월북 261
정부 수립의 예비 단계
북한의 송전 중단 조치 266 · 임시통일헌법 제정 269 ·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272 ·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 개최 27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공식 정부 출범 277 · 국토완정론과 북진통일론의 대립 282
자율성의 확장
2개년 경제계획 수립 285 · 소련군 철수 288 · 조선인민군과 소련군 고문의 갈등 289
평안북도 농민의 1948년 · 294
제5장 전쟁으로 가는 길 : 1949년
높아지는 자신감
북한과 남한의 유엔 가입 신청 301 · 선거를 증산의 기회로 305 · 한자 전면 폐지 307
김일성의 남침 계획
스탈린 대원수 만세 312 · 스탈린의 반대 315 · 마오쩌둥의 반대 318
통일은 멀어졌다
김구 암살 323 · 38선의 무력 충돌 327
김일성을 고무하는 것들
조선노동당 창당 332 · 주한미군 철수 335 ·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339
강대해지는 조선인민군
징병제와 군 통제 강화 343 · 사회의 지원 체계 확립 346 · 조선인 부대의 입북 349
은행원의 1949년 · 353
주 · 356
연표 · 361
찾아보기 · 364
▣ 차례 제2권
머리말 · 4
제1장 6·25 전쟁 발발 : 1950년
전쟁을 위한 준비 15 · 스탈린의 조건부 승인 18 · 마오쩌둥의 소극적 동의 21 · 북한의 전면 공격과 미국의 신속한 개입 23 · 왜 서울에서 3일간 머뭇거렸는가? 26 · 중국의 참전 31 · 미국은 왜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는가? 35 · 북한의 작전권 이양 39 · 총정치국을 설치하다 42 · 김일성과 박헌영의 갈등 44 · 무정에게 책임을 전가하다 47
조선인민군 특무상사의 1950년 · 52
제2장 휴전의 모색 : 1951년
김책은 왜 죽었을까? 57 · 중국과 미국이 휴전을 추진하다 61 · 이승만의 휴전 협상 반대 66 · 토사구팽 박일우 69 · 소련파 거두 허가이의 몰락 73 · 조선노동당 당원 배가운동 77
헝가리 기자가 본 1951년 · 80
제3장 수령의 탄생 : 1952년
개인숭배의 시작 85 · 군 장교의 전면 재교육 90 · 증산운동과 여성보잡이운동 93 · 농업집단화의 전조 96 · 행정구역 개편 99 · 터덕거리는 휴전 협상 102 · 인민들의 살아남기 투쟁 106
헝가리 의사가 겪은 1952년 · 109
제4장 휴전과 재건 : 1953년
박헌영 숙청 115 · 전 사회적 사상 단속 119 · 휴전의 성립 121 · 미국의 이승만 제거 계획 125 · 정전 체제와 평화 체제 128 · 전쟁이 남긴 상흔 131 · 김일성 권력의 공고화 134 · 사회주의 기반 강화 137 · 중공업 우선, 경공업·농업 동시 발전 전략 139 · 통일전선 사업 142
민주선전실장의 1953년 · 146
제5장 사회주의 본격화 : 1954년
경제 복구 3개년 계획 착수 153 · 농업협동화로 본격 사회주의화 155 · 농업협동화에 반대하는 사람들 159 · 개인 상공업의 협동화 162 · 군 장교 양성 체계화 163 · 제네바 회담 실패 165 · 북한식 철자법 공포 170 · 국내파를 당 요직에 앉히다 172
김일성종합대학 교수 황장엽의 1954년 · 175
제6장 주체사상이 싹트다 : 1955년
마르크스-레닌주의 교육 강화 179 · 김일성 중심의 공산주의 역사 181 · 박헌영 재판 184 · 박헌영은 미국의 간첩이었는가? 188 · 주체사상의 맹아 192 · 정치적 색체가 약화된 문학 196
평양시 당위원장이 본 1955년 · 200
제7장 김일성 반대파의 도전과 실패 : 1956년
스탈린 비판과 ‘수령’ 칭호 실종 205 · 김일성으로 권력 집중 208 · 외교의 다변화 210 · 8월 종파사건 213 · 최창익은 어떤 인물인가? 215 · 연안파와 소련파 숙청 219 · 조선인민군 8만 명 감축 222 · 초등의무교육 실시 225 · 지방인민회의 선거 227 · 농업협동화 반대 운동 229 · 천리마운동의 시작 231
조선인민군 정치장교가 본 1956년 · 234
제8장 전 사회적 사상 검증과 숙청 : 1957년
집단지도 체제 239 · 소련의 반당그룹 축출과 중국의 정풍운동 241 · 전방위 사상 검증과 김두봉의 퇴진 245 · 김영주의 부상 250 · 연안파의 우군, 중국군 철수 합의 251 · 소련파는 소련으로 255 · 김두봉 출당과 숙청 본격화 257
동독 건축가가 본 1957년 · 261
제9장 경제발전의 본격화 : 1958년
평양 건설과 ‘평양속도’ 267 · 인민경제발전 5개년 계획의 완성 270 · 중앙 숙청 총괄, 지방 숙청 시작 272 · 당대표자회와 당대회 274 · 군에 불어닥친 숙청 회오리 277 · 군에 대한 통제 강화 280 · 권력투쟁에서 사상투쟁으로 283 · 중국군 철수 285 · 평양외국어학원 개원 289 · 첫 자동차 ‘승리 58’ 생산 291
탄부의 1958년 · 294
제10장 전 사회의 감시 체제 : 1959년
어린 김정일의 활약 299 · 거대 예비군 노농적위대 출범 302 · 제2차 화폐개혁 304 · 5호담당제 실시 306 · 천리마작업반운동으로 사상의식 개조 308 · 공작기계 새끼치기 운동 312 · 교육 체계 전면 개편 314 · 재일 동포의 입북 316
소련파 고위 관료의 1959년 · 321
주 · 324
연표 · 329
찾아보기 · 333
▣ 차례 제3권
머리말 · 4
제1장 김일성 세력의 승리 선언 : 1960~1961년
농촌 관리의 혁신, ‘청산리방법’ 17 · 모든 리에 진료소를 설치하다 19 · 연방제 통일 방안 제의 21 · 통일 정책의 변천 24 · 붉은기중대운동 28 · 제4차 당대회는 ‘승리자 대회’ 30 · 유격대 국가로 34 · 중소 분쟁과 중국 지지 37 · 비날론 생산 40 · ‘자력갱생’의 등장 43 · 집단적 공장관리시스템, ‘대안의 사업 체계’ 45
김정일 처형 성혜랑의 1960년 · 49
제2장 주체사상의 출현 : 1962~1963년
만주파가 내각을 장악하다 55 · 백두산 국경 획정 57 · 경제·국방 병진 정책 60 · 4대 군사노선 제시 62 · 항일빨치산 소설 인기 65 · 농지의 국유화 지향 68 · 주체사상의 등장 71 · 주체사상이란 무엇인가? 74
산골 농장원의 1962년 · 81
제3장 김정일의 등장 : 1964~1965년
3대 혁명역량 강화론 85 · 김정일의 당 사업 시작 87 · 김정일은 어디서 출생했는가? 91 · 사회단체 전면 정비 94 · 주체사상 정식화 97 · 협동농장 분조관리제 실패 99 · 김일성 유일체제에 대한 내부의 반발 101
민주선전실장의 1965년 · 105
제4장 유일사상 체계 확립 : 1966~1967년
농업현물세 폐지 109 · 문화대혁명과 북중 관계 악화 112 · 베트남전쟁 파병 115 · 일본에 한반도의 분국이 있었다 118 · 월드컵 축구 8강 신화 120 · ‘총비서-비서-비서국’ 체계 124 · 인민경제발전 7개년 계획 연기 126 · 갑산파 숙청과 김정일의 등장 128 · 유일사상 체계 확립 131 · 주체사상은 최고 지도지침 134
김신조가 겪은 1966~1967년 · 138
제5장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 김정일 : 1968~1969년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시요” 143 · 통일혁명당 건설 실패 147 · 미국의 항복을 받다 149 · 주체사상이 ‘김일성 혁명사상’으로 152 · 군 수뇌부 숙청 156 · 강선속도운동 158 · 북중 관계 회복 160 · 최고의 경의를 표하는 호칭 164
방직공장 근로자의 1969년 · 167
제6장 유일사상 체계 가속화 : 1970~1971년
김일성의 마지막 집단 숙청 171 · 전 사회의 유일사상화 173 · 사회주의 공업국가 실현 176 · 100일 전투 178 · 3대 기술혁명 추진 181 · 혁명가극 <피바다>와 김정일 183 · 8개항 통일 방안과 남북적십자회담 187 · 헨리 키신저의 다극안정론 191
남북적십자 예비회담 북측 단장의 1971년 · 196
제7장 수령제 완성 : 1972~1973년
7·4 남북공동성명과 고려연방제 통일 방안 201 · 11년 의무교육 시행 207 · ‘사회주의 헌법’ 마련 210 · 수령제의 법적·제도적 완성 212 · ‘수령의 유일적 영도 체계’와 북한식 사회주의 214 · 당증 교환 사업 218 · 3대 혁명소조운동 220 · 국가정치보위부 설치 222 · 김정일의 당 조직 장악 224 · 주체사상이 ‘김일성주의’로 227
유치원장의 1973년 · 230
제8장 후계체제 정비 : 1974~1975년
김정일 후계자 확정 235 · 항일빨치산 세력과 후계 결정 238 · 혁명전통계승론과 후계자론 241 · 김영주의 수난 245 · 군에 대한 통제력 확보 249 · 김일성주의화와 유일사상 체계 10대 원칙 252 · 세금 제도 전면 폐지 256 · 박정희 암살 시도 258 · 3대 혁명 붉은기쟁취운동 260
김일성종합대학 교직원 김덕홍이 본 1974년 · 264
제9장 김일성 군림, 김정일 통치 : 1976~1977년
김일성은 국가, 김정일은 당 269 · 김정일의 강력한 통치력 확보 271 · 김동규의 김정일 후계체제 비판 274 · 8·18 판문점 사건 277 · 1977년은 ‘완충의 해’ 281 · 사회주의 교육헌장 공표 285
평안남도 강동군 협동농장경영위원장의 1977년 · 289
제10장 이중의 난관 : 1978~1979년
제2차 7개년 계획 293 · 최은희·신상옥 납북 295 · 창군기념일 변경 298 · 제3차 화폐개혁 300 · ‘숨은 영웅 따라 배우기’ 운동 303 · 식량 증산을 위한 고육책 306 · 대화 없는 남북 관계 308
최은희가 경험한 1978년 · 311
주 · 314
연표 · 319
찾아보기 · 326
▣ 차례 제4권
머리말 · 5
제1장 김정일 후계 공식화 : 1980~1981년
총리회담 제안 17 · ‘후계자 김정일’ 공식 천명 21 · 고려민주연방제 제안 24 · 자주·친선·평화의 외교 이념 26 · 김정일 개인숭배 본격화 28 · 당 규율 강화 31 · 도경제지도위원회 설치 34
외교부장 허담의 1981년 · 36
제2장 김정일, 외교에 나서다 : 1982~1983년
수세적 대남 정책 41 · 주체사상탑과 개선문 43 · 80년대속도 창조운동 46 · 법적 통제 강화 48 · 가까워지는 북한과 중국 50 · 김정일의 첫 중국 방문 53 · 아웅산 폭탄 테러 55 · 북한의 북미회담 제안 약사 59
공작원 김현희의 1982~1983년 · 63
제3장 경제난을 타개하다 : 1984~1985년
합영법 제정 69 · 연합기업소 전면 도입 72 · 제2차 7개년 계획 미완 74 · 최초의 남북 이산가족상봉 76 ·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밀사들의 활약 79 · 소련의 경제적인 지원과 관계 회복 83 · 북한의 대남 활동 87 · 글로벌화의 상징, 고려호텔 89 · 핵확산금지조약 가입 92
외교관 고영환의 1985년 · 95
제4장 김일성의 준퇴진 : 1986~1987년
카스트로 방북 101 · 협력과 불신의 이중구조 104 · 비핵지대·평화지대 제안 107 · 제3차 7개년 계획 시작 109 · 첫 보트피플 김만철 가족 111 · 첫 골프장 개장 113 · KAL기 폭파사건 116 · 김정일로 권력이양 과정을 밟다 119
보트피플 김만철의 1986년 · 122
제5장 탈냉전과 체제 경쟁 : 1988~1989년
88서울올림픽 불참 127 ·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 130 · 북미 베이징 채널의 탄생 135 · 세계청년학생축전 개최 138 ·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거부 141 · 최덕신,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묻히다 143
재독학자가 본 1988년 · 146
제6장 북한의 위기의식과 남북 해빙 : 1990~1991년
김정일의 군권 장악 151 · 한소 수교와 북한의 대미 접근 153 · 북일 수교 원칙적 합의 158 · 남북고위급회담과 남북기본합의서 탄생 161 · 남북한 비핵화 공동선언 165 · 남북통일축구대회 167 ·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170
타스통신 기자가 본 1990년 · 173
제7장 제1차 북핵 위기 : 1992~1993년
첫 북미고위급회담 179 · 국방위원장 독립·격상 181 · 한중 수교와 북한의 묵인 183 · 훈령 조작 사건 186 · NPT 탈퇴 190 · “내 청춘 통일에 묻어” 193 ·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 발표 196 · 김정일의 국가기관 장악 198 · 제3차 7개년 계획 실패 201
남한 기자가 본 1992년 · 204
제8장 김일성 시대의 종언 : 1994~1995년
서울 불바다 발언 209 · 군사정전위원회 폐쇄 213 · 지미 카터의 방북 215 · 김일성 사망 218 · 북미제네바합의 221 · 미군 정찰헬기 격추 223 · 평양이 민족의 기원이다 225 · 남북 쌀 회담과 인공기 사건 227
미국 교수가 본 1995년 · 231
제9장 고난의 행군 : 1996~1997년
극심한 경제난 237 · 장마당의 확산 240 · 사회 전체의 병영국가화 243 · ‘남북미중’ 4자회담 제안 246 ·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 249 · 황장엽 망명 252 · 이집트 대사 장승길의 망명 256 · 김정일 총비서 추대 258
20대 초반 청년의 1996~1997년 · 262
제10장 김정일 체제 공식 출범 : 1998~1999년
소떼를 몰고 군사분계선을 넘다 267 · 금창리 사건과 대포동 미사일 시험 발사 271 · 김정일 시대의 헌법 276 · 김정일의 국방위원장 취임 278 · 국가 건설 목표, ‘강성대국’ 280 · 군이 가장 우선, ‘선군정치’ 283 · 햇볕정책과 서해교전 286
지방 공장 지배인의 1998~1999년 · 290
주 · 293
연표 · 298
찾아보기 · 305
▣ 차례 제5권
머리말 · 5
제1장 남북정상회담 : 2000~2001년
17년 만의 중국 방문 17 · 남북정상회담 20 · 6·15 남북공동선언 23 · 남북장관급회담 28 · 비전향 장기수 63명 북송 31 · 무산된 북미정상회담 32 · 유럽과의 수교 봇물 36 · 김정남의 일본 밀입국 시도 38
국가정보원장 임동원이 본 2000년 · 42
제2장 제2차 북핵 위기 : 2002~2003년
개성공단 착공 47 · 7·1 경제관리개선조치 50 · 시장의 합법화와 실리사회주의 53 · 내각 총리, 온건파 박봉주 56 · 북일정상회담 58 · 미국 특사 방북과 제2차 북핵 위기 61 · 북핵 해결을 위한 6자회담 64
성악가가 본 2003년 · 68
제3장 합의와 금융 제재 : 2004~2005년
세 번째 중국 방문 73 · 두 번째 북일정상회담 76 · 탈북자 468명 입국 79 · 핵무기 보유 선언 81 · 종합시장 통제 83 · 조용필의 평양 공연 85 · 9·19 공동성명 88 · 미국의 금융 제재 92
미국 학자가 관찰한 2005년 · 95
제4장 핵실험과 남북정상회담 : 2006~2007년
네 번째 중국 방문 101 · 대풍국제투자그룹 설립 104 · 제1차 핵실험 106 · 2·13 합의 109 · 첫 남북 합작 드라마 <사육신> 111 · 10·3 합의 114 · 두 번째 남북정상회담 118
스칼라피노 교수가 본 2006년 · 121
제5장 김정은의 등장 : 2008~2009년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125 · 김정일의 뇌졸중과 김정은 후계 내정 128 · 대남강경 노선 131 · 김정은 후계 확정 135 · 명실상부 최고 영도자 139 · 제2차 핵실험 142 · 원자바오 방북 144 · 남북정상회담 무산 147 · 실패한 화폐개혁 149
평양 주재 영국 대사가 본 2008년 · 151
제6장 김정일 사망 : 2010~2011년
종합시장 재개 157 ·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사건 159 · 김정일·김정은의 김일성 유적지 순례 162 · 김정은 후계 공식화 165 · 우라늄 농축시설 공개 168 · 김정일 사망 171 · 김정은 승계 완료 174
통일운동가가 본 2010년 · 180
제7장 김정은 체제 공식 출범 : 2012~2013년
2·29 합의와 장거리 로켓 발사 185 · 제4차 당대표자회 187 · 우리식 새로운 경제관리체계 191 · 무상의무교육 12년 193 · 제3차 핵실험 194 · 개성공단 가동 중단 197 · 핵·경제 병진 노선 199 · 박봉주 총리 재기용 202 · 장성택 처형 204
재미 목사가 본 2012년 · 209
제8장 김정은 우상화 : 2014~2015년
21세기의 위대한 태양, 김정은 215 · 3각의 권력 엘리트 체제 형성 217 · 남북고위급회담 220 · 일본과 납치자 재조사 합의 222 · 미녀응원단 불참 224 · 실세 3인방 인천아시안게임 참석 227 · 목함지뢰 도발과 4인 고위급회담 230 · 차관급 당국회담 결렬 233 · 강력한 군부 통제 235
일본 의원이 본 2014년 · 240
제9장 김정은 시대 선포 : 2016년
‘자강력 제일주의’ 제창 245 · 제4차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248 · 개성공단 폐쇄 252 · 해외식당 종업원 집단 탈북 254 · 36년 만의 당대회 257 · 사드 배치와 북한의 반발 260 · 태영호 공사 망명 264 · 제5차 핵실험 267
100세 할머니의 2016년 · 270
주 · 272
연표 · 277
찾아보기 · 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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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안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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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
1965년 전라북도 진안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KBS 기자로 입사해 사회부, 통일부, 국제부, 정치부 등을 거쳤고 정치부 외교안보데스크로 외교·안보·북한 문제를 총괄했다. KBS 재직 중 영국으로 유학해 요크대학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워릭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반도 문제와 관련된 일을 하다가 공부의 필요성을 느꼈고 공부하다가 재미가 붙어 박사학위까지 받게 된 것이다.
한반도 문제와 국제정치를 깊이 파고 싶은 생각으로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2012년부터 전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국제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동북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주요 관심사이고, 그 연장선상에서 북한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주요 국가들의 외교정책을 관찰하고 있다. 북한의 대외관계, 북한의 내부 권력관계, 국제정치이론, 한국의 외교정책, 미국의 외교정책 등을 주제로 연구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동안 쓴 책으로는 『글로벌 정치의 이해』, 『오기섭 평전』, 『이제 만나러 갑니다』, 『김정은의 고민』, 『북한이 필요한 미국, 미국이 필요한 한국』, 『노무현 정부와 미국』 등이 있다. 「북미 불신 구조의 형성 원인과 극복 방안」(『한국동북아논총』, 2016년 9월), 「A Nuclear South Korea?」(『International Journal』, 2014년 3월), 「How Stable is the New Kim Jong-un Regime: a Revolution in North Korea」(『Problems of Post-Communism』, 2013년 1월) 등 북한과 국제정치 관련 논문을 국내외 저널에 계속 발표하고 있다.
북한 현대사의 모든 것,
70여 년의 사건과 사실을 생생하게 읽는다!
“1945년 해방부터 2016년 제5차 핵실험까지
북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군사 등을 한눈에 보다”
우리에게 북한은 무엇인가? 원수인가, 동포인가? 그런데 보수 정부 10년의 언행을 보면 북한을 원수로 보는 것 같다. 대북 전단 살포를 금지하면 대화하겠다는 북한의 요구를 묵살하고 대결 국면으로 가더니, 북한이 2016년 1월 제4차 핵실험을 하고 장거리로켓을 발사하자 개성공단마저 중단시켰다. 보수 정부는 대화하자고 말로는 했지만 대화를 위해 북한이 요구한 어느 것 하나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놓고는 대화를 제의했는데 북한이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남북한이 각각의 정부를 세운 이후 제2공화국 11개월과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을 제외하고 60여 년 동안은 그런 식으로 북한을 대해왔다.
어떻게 하면 북한이 발가벗은 채 손들고 나오게 만들 것인지, 어떻게 하면 북한이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하도록 할 것인지 골몰해왔다. 가진 것 없이 자존심만 남은 북한은 “굶을지언정 무릎 꿇진 않겠다”는 태도를 견지해왔다. 그러니 남북의 역사는 대결의 역사가 주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그런 대결의 역사가 실제로 시작된 것은 정부 수립 훨씬 이전인 1945년이다. 해방의 해(年)에 벌써 대결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남북을 각각 점령한 미국과 소련이, 그 이후에는 남한과 북한이 서로 확연히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이념적으로 완전히 다른 당을 세워나가고, 찬탁과 반탁으로 나뉘면서 대결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1945년이 이후 한반도의 상황을 대부분 규정해버렸다.
전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안문석 교수가 원고지 5,500매 분량으로 북한 현대사를 전5권으로 집필했다. 국내 최초로 북한 현대사를 사건과 사실과 기록을 바탕으로 가장 객관적으로 집필한 것이다. 수많은 자료에서 사실(史實)을 찾아내서 기자의 눈과 학자의 눈으로 북한 현대사를 꿰뚫고 있다. 북한의 대표적인 역사서인 『조선통사』, 『조선전사』 등과 『김일성 선집』, 『김일성 저작 선집』, 『인민의 지도자』, 『김정일 위인상』 등 북한 자료의 진위를 정밀하게 파악하고 통찰력 있게 북한 현대사를 분석했다. 또한 남한의 학자들의 논문과 단행본, 조선인민군의 수기를 통해 균형 잡힌 시각과 안목으로 왜곡되고 잘못된 사실들을 바로잡기도 했다.
북한 현대사 70여 년을 탁월한 안목으로 꿰뚫다
『북한 현대사 산책』 제1권 : 해방과 김일성 체제 (1945~1949년)
북한의 1940년대는 김일성의 역사라 해도 좋을 만큼 그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그는 민주기지론을 제기하고, 북한을 사회주의화한 뒤 남한으로 확산시키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는 정부 수립 이후 국토완정론을 제시하고, 이를 실현하려고 전쟁을 일으켰다. 1945년을 깊이 보면 아쉬움이 많다. 소련이 태평양전쟁에 뒤늦게 참전해 북한에 들어오게 된 것이 답답하고, 미군 대령 2명이 한반도 위에 그은 선 하나로 분단이 되었다는 것도 원통하다. 패전국 독일이 분단된 것처럼 패전국 일본이 분할 점령되었어야 했는데, 한반도가 나뉘었다는 것도 분한 일이다. 하지만 1940년대 한국 현대사의 아픈 점은 남북한의 핵심 인물들이 통일의 기회를 마련하지 못하고 오히려 분단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좌우 합작을 이루고 통일임시정부를 마련하는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있었다. 여운형과 김구다. 하지만 힘이 없었다. 먹을 것이 많은 데로 몰리는 것이 정치의 생리 아닌가. 이들 곁엔 먹을 것이 많지 않았다. 결국 둘 다 권총을 맞고 한국 현대사의 뒤안길로 처연히 사라져갔다. 하긴 이들보다 먼저 간 이가 있었다. 현준혁이다. 누구보다 철저한 공산주의자였던 그도 민족주의자 조만식과 협력하다가 총을 맞았다.
『북한 현대사 산책』 제2권 : 전쟁과 사회주의 건설 (1950~1959년)
북한의 1950년대는 전쟁, 김일성 권력 공고화, 숙청, 종파투쟁, 독자성 추구의 역사였다. 하지만 민족의 단일성과 동질성이라는 측량하기 어려운 가치를 잃었고, 북한 사회의 다양성이라는 어느 것에 못지않은 가치도 상실했다. 1953년 휴전은 우여곡절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이승만은 반대하고, 김일성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가 협정에 서명했다. 한반도 통일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제네바 정치 회담은 당시 세계를 지휘하던 인물들이 모두 모였지만 아무런 소득 없이 막을 내렸다. 그렇게 굳어진 정전 체제가 지금도 한반도를 규정하고 있다. 한편 김일성 세력의 중공업 우선 정책에 대해 연안파와 소련파 가운데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김일성 개인숭배에 대해서도 반감을 품은 세력들도 있었다. 북한의 1950년대 후반은 김일성 세력이 이들 반대파에 대한 제거 과정의 시기이기도 했다. 1961년 제4차 당대회에서 김일성 세력이 승리를 선언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북한 현대사 산책』 제3권 : 주체사상과 후계체제 (1960~1979년)
북한의 1960∼1970년대는 전제정치 체제와 세습 체제를 완성하는 시기였다. 1960년대에는 김일성 유일사상 체계와 김일성 유일지도 체계를 세웠고, 1970년대 중반에는 김일성이 주장하는 여러 혁명 이론과 대중지도 방법 등이 보태져 ‘김일성주의’가 되었다. 김일성 유일체제 형성 과정은 김정일 후계체제 구축 과정과 동전의 양면이었다. 유일체제를 만들어가면서 김정일 후계체제를 구축해갔다. 그래서 김정일은 김일성 유일체제 형성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아버지를 세우는 것은 곧 자신을 세우는 것이었다. 갑산파를 비롯한 유일체제 반대 세력에 대한 숙청을 주도한 것도 김정일이었다. 김일성 개인숭배 작업을 지휘한 것도 김정일이었다. 1960년대 중후반에는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와 수교를 확대하면서 비동맹 외교에 적극성을 보였다. 하지만 깊이와 폭에서 한계가 많았다. 북한의 관심은 북한식의 사회주의 체제를 세우는 데에만 있었다. 그것이 북한의 현실이었다. 그 핵심에는 물론 김일성이 있었다. 김일성 주변에는 가산제 국가 체제하에서 권력과 부를 분여받은 항일빨치산 세력들이 있었다. 이들에게는 김일성 유일체제가 바람직했고, 김정일의 권력 승계도 나쁘지 않았다.
『북한 현대사 산책』 제4권 : 김정일과 고난의 행군 (1980~1999년)
북한의 1980∼1990년대는 권력 이양기이면서 체제 위기의 시기였다. 1980년 김정일이 대중에게 공개되면서 후계자로 확정되어 군권과 국가기관을 장악했다. 김일성의 권력은 김정일로 서서히 옮아갔다. 김정일은 국가기관을 중심으로 권력을 이어받으면서 1983년에는 중국을 방문해 중국의 지도부와 대면 교류도 시작했다. 1990년에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에 선출되고, 1991년에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올라 군권을 장악했다. 1990년대의 북한 경제는 훨씬 어려워졌다. 1990년대 중반에는 특히 식량난이 극심했다. 배급 체계는 붕괴되고 주민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장마당으로, 산으로, 심지어는 중국으로 가야 했다. 굶어죽는 사람도 많았다. 북한 당국은 ‘고난의 행군’을 외치며 주민들의 희생과 악전고투를 요구했지만, 당국의 장악력은 떨어지고 사회 이완 현상은 점점 심해졌다. 서구와 중국의 지원으로 위기를 겨우 넘길 수 있었다.
『북한 현대사 산책』 제5권 : 김정은과 북핵 위기 (2000~2016년)
북한의 2000∼2010년대는 변화의 시기였다. 실리사회주의를 추구하거나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에 진전도 있었다. 2000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으로 은둔의 세계에서 탈출했다. 그 자신도 그렇게 말했다. 분단 이후 첫 남북정상회담은 김정일을 은둔에서 벗어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합의도 이끌어냈다. 남과 북이 이야기하는 통일 방안이 유사한 점이 있음을 확인하고 그 방향에서 통일 논의를 해나가기로 한 것이다. 남북이, 그것도 남북의 정상이 통일 방안을 놓고 진지하게 논의한 것은 처음이고, 합의도 처음이다. 하지만 김정은 정권 이후 세 차례의 핵실험은 한반도를 전쟁의 공포로 몰아넣고 남북 관계를 경색시켰다. 2016년 북한은 ‘자강력 제일주의’를 부쩍 강조했다. 자신의 능력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는 것이다. 김정은이 생산 현장에서 이를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1960년대의 자력갱생과 같은 모토다. 자력갱생은 주민의 노력 동원에 이용되었고, 외부와의 교류를 방해했다. ‘자강력 제일주의’도 같은 방향으로 흐를 가능성이 농후했다.
소련은 왜 김일성을 선택했는가?
김일성이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된 데에는 소련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 제25군 군사위원 레베데프는 소련군 극동군 소속 고위 장성들이 대일전 이후 제88특별정찰여단에 있던 김일성을 조선의 주요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삼아 입북시켰다고 증언했다. 소련군 연해주군관구 사령부 군사위원 스티코프에게서 김일성을 평양에 들여보낼 테니 그에게 주택과 자동차를 지급하라는 지시도 받았다고 한다. 다시 말해 스티코프가 김일성 지지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스티코프가 극동경비국 사령관을 할 당시 김일성이 있던 제88특별정찰여단이 극동경비국 소속이었다. 당시 이 여단의 책임자는 중국인 저우바오중이었다. 그는 김일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스티코프는 그를 통해 김일성의 항일투쟁 등에 대한 정보를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이 여단 내 한인의 리더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이런 인연으로 김일성을 알게 된 스티코프가 그의 지원자가 되었다.
사회 개혁과 북조선노동당 창당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출범하자 김일성 세력은 토지와 산업시설의 소유, 노동제도, 남녀평등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개혁했다. 토지개혁은 ‘모든 토지는 농민들에게’라는 모토로 시작되었고, ‘북조선 노동자 및 사무원에 대한 노동법령’을 공포하면서 노동자의 권리를 분명히 정리했다. ‘북조선의 남녀평등권에 대한 법령’을 시행해서 정치, 경제, 문화,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남녀가 평등한 권리를 갖도록 했다. 그리고 민족반역자, 즉 친일파의 토지는 작은 것이라도 모두 몰수해 친일파를 청산했다.
북조선공산당은 조선신민당과 합당 작업을 본격화해 북조선노동당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북조선노동당은 민주적인 자주독립국가의 건설, 일본인·민족반역자·지주의 토지 무상몰수과 무상분배, 일본인·민족반역자 소유의 공장·광산·철도 등 주요시설 국유화, 8시간 노동제, 남녀 동일 임금제, 남녀평등 선거제 등을 제시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성립 이후 추진해오던 민주개혁의 내용을 당의 강령에 포함해 그 시행을 재차 강조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김일성은 1948년 9월 9일 10시 모란봉극장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 앞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을 공식 선포했다. 이때 김일성은 8개 정부정강을 발표했다. 첫째, 국토완정과 민족통일의 선결 요건이 되는 미소 양국 군대의 철수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둘째, 조선 인민의 이익을 배반하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적극 협력한 친일파와 민족 반역자들을 처벌한다. 셋째, 토지개혁과 산업국유화, 노동법, 남녀평등법 등 민주개혁을 더욱 공고화할 것이다. 넷째, 경제의 식민지 예속성을 청산하고 조선 인민의 복리를 향상시키기 위해 자주적 민족경제를 건설할 것이다. 다섯째, 교육과 문화와 보건 분야의 발전을 위해 힘을 쓸 것이다. 여섯째, 인민정권기관을 더욱 발전시킬 것이다. 일곱째, 여러 자유애호국가와 친선 관계를 맺도록 노력할 것이다. 여덟째, 외래 침략 세력에서 국토를 보위하고 민주개혁의 성과를 보호하기 위해 인민군대를 강화할 것이다.
김일성은 왜 남침을 계획했는가?
1949년 3월 3일 모스크바에 도착한 김일성 일행은 스탈린에게 남침 계획을 밝히면서 소련의 지원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미국의 개입을 우려해 전쟁을 반대했다. 군사적으로도 미국은 비대칭 전력인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중국의 마오쩌둥도 전쟁을 반대했다. 중국은 타이완 해방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스티코프도 김일성의 남침에 반대 의견을 보냈다. 첫째, 남북한의 군사력이 비슷하다. 둘째, 미국의 개입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북한이 남한을 공격하기에 군사적·정치적으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그 대신 그동안 해오던 남한 내 빨치산투쟁을 강화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했다. 김일성이 1949년 초부터 모스크바와 베이징에 남침 의사를 적극 개진했지만, 스탈린이나 마오쩌둥도 쉽게 동의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 정부를 세우면서 국토완정을 내세운 김일성은 군사적으로 남한을 공격·점령하는 방안을 치밀하게 준비해나갔다. 소련과 중국을 다시 설득하고 모든 준비도 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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