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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4-11-30 00:00
나는 왜 김일성주석님을 존경하는가?
글쓴이 : minjok
조회 : 5,404
내가 김일성주석님을 만난 것은 1989년 청년축전 때였다.
김현환 박사가 <우리민족제일주의>라는 도서를 출판하고 2004년 3월11일 로스엔젤레스 재미동포서부연합회 사무실에서 출판기념회를 통해 이북의 철학사조를 설명하고 있는 장면. 김 박사는 그동안 이북의 주체철학에 관한 연구저서들을 출판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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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동포들도 약 70여명이 참석하였고 그 때 나는 재미동포 대표들과 함께 주석궁으로 가서 존경하는 김일성주석님을 직접 뵙는 기회를 가졌다. 주석님께서는 우리 대표들을 보시자 "반갑습니다. 우리 연설은 생략하고 식사나 같이 합시다." 하시면서 우리를 식탁으로 안내하셨다. 나는 그때 대표들 중에서 나이도 제일 어렸고 콧수염을 하고 있었다. 내가 제일 말석자리에 앉다보니 주석님과 바로 마주보며 앉게 되었다. 주석님께서는 긴장한 우리들을 의식하시고 "여기 까만 감자떡이 있는데 한번 드셔보세요. 감자는 얼어도 먹고 썩어도 먹습니다. 감자는 버릴게 없습니다. 나는 감자 박사입니다." 큰 소리로 말씀하시면서 손수 감자떡을 드시면서 우리에게 권하셨다.
그러시면서 항일무장투쟁 시 산에서 감자를 인민들이 캐는 척 하면서 유격대를 위하여 남겨놓은 것을 알면서도 적과 대치한 상태에서 감자를 캐러 내려가지 못해 감자가 썩는 경우가 있으나 나중에 적들이 후퇴하고 나서 썩은 감자를 캐서 떡도 해먹고 국수도 해먹던 일을 재미있게 이야기 해주셨다. 주석님은 어려운 국가원수라기 보다는 가까운 이웃 할아버지처럼 느껴졌다. 그날 주석님께서는 우리 재미동포 대표들에게 많은 동포대중을 묶어 애국사업에 기여하도록 하라고 하시면서 단결해야 힘이 있다고 강조하시었다.
그리고 나는 1991년 4월 명절과 1992년 주석님 생신 80돐이 되는 4월명절 때 조국통일북미주협회대표들과 함께 주석님을 다시 만나 식사를 같이 하는 기회를 가졌다. 지금도 기억되는 것은 "여러분들은 미국에 사는 동포들이니까 미국실정에 맞게 애국운동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시면서 미국법도 지키고 미국인들과도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고 강조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세 번 주석님을 뵈올 때마다 계속 강조하신 것은 재미동포들의 통일단결이었다.
내가 주석님을 마지막 뵙고 2년 후 뜻하지 않게 존경하는 주석님께서 서거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만사를 제쳐놓고 평양을 향하여 달려갔다. 주석궁에 누워계신 주석님의 영구 앞에 나는 엎디어 엉엉 울었다. 그후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인자하신 주석님의 영상은 내 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
나는 내가 존경하는 주석님을 생각하며 자주 회고록과 전집, 그리고 전기를 읽으며 역사에는 결코 우연이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였다. 주석님께서 인민의 지도자로서 그렇게 존경을 받게 된 것은 우선 그의 가족의 전통적인 애국심, 특히 아버님이신 김형직선생님과 어머님 강반석여사의 애국심의 영향이 컸으며 아버님께서 남겨놓으신 혁명조직인 조선국민회(1917년 3월23일 결성) 회원들의 도움의 영향이 컸다. 김형직선생님의 <지원의 사상>은 개인의 출세를 위한 원대한 뜻을 가지라는 의미가 아니라 조국과 민족을 위한 투쟁의 길에서 참된 보람과 행복을 찾는 혁명적 인생관을 갖고 대를 이어가며 투쟁하여 기어이 나라의 광복을 이룩해야 한다는 백절불굴의 혁명의 정신을 뜻한다. 언제인가 김형직선생님은 아들인 주석님과 주석님의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서 다음과 같이 <지원의 사상>을 말한 적이 있다.
"나라를 독립시키지 못할 바에야 살아서 무엇하겠습니까? 내 몸이 찢기어 가루가 될지언정 일본놈들과 싸워 이겨야 하겠습니다. 내가 싸우다 쓰러지면 아들이 하고 아들이 싸우다 못하면 손자가 싸워서라도 우리는 반드시 나라의 독립을 성취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아버님의 사상을 주석님 자신이 그대로 이어받아 항일혁명투쟁을 전개하였고 현재는 자신의 아드님이신 김정일국방위원장님께서 대를 이어 민족의 자주위업을 수행해 나가고 있다. 이처럼 북조국의 계승은 결코 왕조의 세습이 아니라 조국의 자주적 해방을 위한 혁명전통의 계승이다. 또한 김형직선생님으로부터 주석님께서 가장 깊게 받은 교훈은 혁명적 동지에 대한 사상이다. 주석님은 어린시절부터 아버지께서 조국독립을 위하여 동지 하나를 얻기 위하여 천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다니시는 것을 보았다. 주석님은 "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통하여 동지를 사랑하고 귀중히 여기는 도리를 배웠다."고 쓰고 있다. 또 아버님의 동지애 사상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아버지는 동지를 얻는 일로부터 투쟁을 시작했다. 나라와 민중을 위한 진심만 있으면 좋은 동지를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문제는 뜻이고 마음이다. 돈은 없어도 뜻만 통하면 서로 동지가 될 수 있다. 동지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만이 좋은 동지를 얻을 수 있다."
그는 아버지께서 한 평생 어느 당파에도 가담하지 않았으며 어떤 권력도 추구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나라의 광복과 근로민중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한 몸을 서슴없이 바치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는 물욕과 사리사욕도 없었으며, 자신을 생각하기에 앞서 민족을 생각하고 자신의 가정을 생각하기에 앞서 조국을 먼저 생각하며 찬바람을 맞받아 일생을 쉬임 없이 걸어가심으로서 인간으로서도 청렴하게 살았고 혁명가로서도 결백하게 살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래서 주석님은 "어떻게하나 아버지의 뜻을 이어 한 생을 독립운동에 바치겠다는 이념"을 갖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위에 지적한 바와 같이 주석님은 아버님의 혁명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아버님이 사귀어 놓은 조선국민회 조직원들의 도움을 받았다. 한창 혁명활동을 하던 과정에서 철주 동생과 김 형권 삼촌을 잃었고 그리고 어머님도 병으로 잃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를 지도자로 아끼며 따르던 김혁, 차광수, 최창걸 등 혁명동지들을 수도 없이 잃었다. 이러한 피바다 위에서 주석님의 오늘의 위대성이 형성된 것이다. 그의 위대성은 결코 하늘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요, 땅에서 솟아난 것도 아니라, 그의 희생적 민족해방운동과 반일투쟁이라는 혁명적 투쟁 한 가운데서 무수한 혁명동지의 지원아래 이룩된 것이다. 주석님의 항일혁명활동에 대한 기록을 읽노라면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한 우리 민중의 투쟁의 역사가 소상히 눈에 어리어 온다. 그러면서 나는 김혁이 작곡 작사한 <조선의 별> 노래를 조용히 불러본다.
민중사상의 결정체
주석님의 일생을 돌이켜 보면서 두 번째로 그분에 대한 한없는 존경심을 갖게 되는 점은 바로 그의 민중에 대한 깊은 사랑의 정신 때문이다. 그의 위대성은 바로 그 분이 민중을 하늘같이 모시고 민중 속에 민중과 더불어 그리고 민중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신 데 있다. 이러한 민중을 하늘같이 모시는 사상에서 주체사상이 태동되었고 결국 이 사상은 종래의 사회주의 고전사상인 맑스-레닌주의를 계승하면서도 혁신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주석님은 그의 민중사상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이민위천>, 인민을 하늘 같이 여긴다는 이것이 나의 지론이고 좌우명이었다. 인민대중을 혁명과 건설의 주인으로 믿고 그 힘에 의거할 데 대한 주체의 원리야말로 내가 가장 숭상하는 정치적 신앙이며 바로 이것이 나로 하여금 한 생을 인민을 위하여 바치게 한 생활의 본령이었다."
이 <이민위천>사상이야말로 주석님의 모든 노작의 매 페이지마다에 흐르는 근본사상으로 그가 어려서부터 아버님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상이다. 그가 어렸을 때 중국으로 이주해서 살게 되었지만 아버님은 그를 일부러 고국에 보내어 학교를 다니게 했다. 그 깊은 뜻은 바로 주석님이 중국화 되지 않고 우리 인민의 위대성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가 어려서 아버님의 권고로 조국에서 2년간 공부한 후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우리 조선민중에 대한 감상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 인민이 어떤 인민인가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 인민은 소박, 근면, 용감, 강의한 인민이었다. 어떤 고난과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억센 인민, 불의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비타협적인 인민이었다. 민족개량주의자들은 반동적인 <자치운동>을 벌이고 있었으나 노동자와 농민, 청년학생들을 포함한 광범한 인민대중은 피를 흘리면서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모습에서 그 어떤 힘으로써도 훼손시킬 수 없는 민족의 존엄과 강철같은 독립의지를 뜨겁게 감수하였다. 그리고 그 때부터 우리 인민을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인민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이런 인민을 잘 조직동원한다면 얼마든지 나라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신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아버님의 의도대로 조선민족, 조선민중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형성된 주석님의 혁명사상은 민중을 우매하고 미개한 계몽대상으로만 보아오던 종래의 사고방식에서 탈피하여 민중이야말로 스승이며 혁명을 추동하는 기본동력이라고 간주하게 되었다. <인민들 속으로 들어가라!> 이 구호는 주석님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좌우명이 되었다. 주석님은 실로 인민적 품격과 인민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지도자로서 인민들 속에 들어가 직접 그들의 육성, 숨결, 눈빛, 표정, 말투, 손짓, 몸가짐을 자신의 눈과 귀, 손으로 손수 접촉하여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고 강조했다. 그것은 인민들 속에는 철학도 있고 문학도 있고 정치경제학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민중 속에 들어가는 것은 보약을 먹는 것과 같고 들어가지 않는 것은 독약을 먹는 것과 같다고 믿고 있던 주석님은 생전에 다음과 같이 생을 총화하셨다.
"나는 인민들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혁명활동을 시작하였고 오늘도 인민들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혁명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인민들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인생을 총화하고 있다."
주석님은 그의 생신 때마다 생일잔치 상을 차려주려는 간부들의 성화를 뿌리치고 몰래 민중 속에 들어가 현지지도하면서 시간을 보내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 간부들이 생각해낸 것이 그의 생일날인 4월 15일을 기념해
세계적인 예술제를 만들었던 것이다.
주석님은 두메산골, 외딴섬, 농장, 도시, 공장 등 이북 어느 곳이나 현지지도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사방팔방을 돌며 인민들과 대화하고, 부탁하고, 인민들에게 배우며 한 생을 사셨다. 그는 반일혁명 당시에도 혁명을 한다는 사람들이 자꾸 사대주의에 빠져 국제당에 승인이나 받으려하고 웃자리나 차지하려는 것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새 세대 청년 사회주의자들에게 당부했다.
"무산대중을 위한 혁명을 한다면서 대중을 떠나 자꾸 위로만 올라가면 어떻게 하는가, 우리는 아래로 내려가자, 아래에 내려가 노동자, 농민들 속으로 들어가자."
그는 위로 올라가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아래 즉 민중 속으로 내려가자고 호소하면서 "혁명가의 생명은 군중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되며 군중을 떠날 때 끝이 난다."고 강조해 말했다. 주석님은 선행세대의 운동전략이나 노선, 그리고 소련과 동구사회주의 나라들의 운동전략이나 노선은 결국 혁명의 주인이며 혁명의 추동력인 인민대중을 믿지 않고 외면한 것이었기 때문에 동구사회주의가 붕괴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수 백만 민중의 조직된 힘에 의거해야 일제를 타도할 수 있겠는데 지난 시기 운동가들은 혁명도 독립운동도 특수한 몇몇 사람들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사회주의 운동가들도 <기초축성>은 하지 않고 몇몇 상층인물들로써 당중앙을 선포하는 방법으로 당을 쉽게 만들었으며 민중 속에 깊이 들어가지 않고 3인 1당, 5인 1파 식으로 서로 분열되어 헤게모니 싸움이나 벌렸다고 그는 비판했다. 주석님의 분석에 의하면 소련과 동구사회주의의 몰락도 결국 따지고 보면 민중 속에 들어가 민중을 조직사상적으로 통일단결시켜야 했는데 단지 정권차원에서 행정명령식으로 먹이는 방법으로 민중을 통치하려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주석님은 혁명의 실패는 혁명의 주체이며 추동력인 민중의 힘을 믿지 않고 민중 속에 들어가지 않은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출신이 좋은 몇몇 사람들만으로는 혁명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민중을 대담하게 믿고 그들을 조직 사상적으로 조직해야 된다고 그는 믿었다.
통일단결의 비결
내가 주석님을 존경하는 세 번째 이유는 그가 민중을 통일단결시켰기 때문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혁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첫째도 둘째도 운동가들의 통일단결이며 조직성원들과 민중의 일심단결이다.
그리고 나는 1991년 4월 명절과 1992년 주석님 생신 80돐이 되는 4월명절 때 조국통일북미주협회대표들과 함께 주석님을 다시 만나 식사를 같이 하는 기회를 가졌다. 지금도 기억되는 것은 "여러분들은 미국에 사는 동포들이니까 미국실정에 맞게 애국운동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시면서 미국법도 지키고 미국인들과도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고 강조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세 번 주석님을 뵈올 때마다 계속 강조하신 것은 재미동포들의 통일단결이었다.
내가 주석님을 마지막 뵙고 2년 후 뜻하지 않게 존경하는 주석님께서 서거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만사를 제쳐놓고 평양을 향하여 달려갔다. 주석궁에 누워계신 주석님의 영구 앞에 나는 엎디어 엉엉 울었다. 그후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인자하신 주석님의 영상은 내 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
나는 내가 존경하는 주석님을 생각하며 자주 회고록과 전집, 그리고 전기를 읽으며 역사에는 결코 우연이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였다. 주석님께서 인민의 지도자로서 그렇게 존경을 받게 된 것은 우선 그의 가족의 전통적인 애국심, 특히 아버님이신 김형직선생님과 어머님 강반석여사의 애국심의 영향이 컸으며 아버님께서 남겨놓으신 혁명조직인 조선국민회(1917년 3월23일 결성) 회원들의 도움의 영향이 컸다. 김형직선생님의 <지원의 사상>은 개인의 출세를 위한 원대한 뜻을 가지라는 의미가 아니라 조국과 민족을 위한 투쟁의 길에서 참된 보람과 행복을 찾는 혁명적 인생관을 갖고 대를 이어가며 투쟁하여 기어이 나라의 광복을 이룩해야 한다는 백절불굴의 혁명의 정신을 뜻한다. 언제인가 김형직선생님은 아들인 주석님과 주석님의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서 다음과 같이 <지원의 사상>을 말한 적이 있다.
"나라를 독립시키지 못할 바에야 살아서 무엇하겠습니까? 내 몸이 찢기어 가루가 될지언정 일본놈들과 싸워 이겨야 하겠습니다. 내가 싸우다 쓰러지면 아들이 하고 아들이 싸우다 못하면 손자가 싸워서라도 우리는 반드시 나라의 독립을 성취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아버님의 사상을 주석님 자신이 그대로 이어받아 항일혁명투쟁을 전개하였고 현재는 자신의 아드님이신 김정일국방위원장님께서 대를 이어 민족의 자주위업을 수행해 나가고 있다. 이처럼 북조국의 계승은 결코 왕조의 세습이 아니라 조국의 자주적 해방을 위한 혁명전통의 계승이다. 또한 김형직선생님으로부터 주석님께서 가장 깊게 받은 교훈은 혁명적 동지에 대한 사상이다. 주석님은 어린시절부터 아버지께서 조국독립을 위하여 동지 하나를 얻기 위하여 천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다니시는 것을 보았다. 주석님은 "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통하여 동지를 사랑하고 귀중히 여기는 도리를 배웠다."고 쓰고 있다. 또 아버님의 동지애 사상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아버지는 동지를 얻는 일로부터 투쟁을 시작했다. 나라와 민중을 위한 진심만 있으면 좋은 동지를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문제는 뜻이고 마음이다. 돈은 없어도 뜻만 통하면 서로 동지가 될 수 있다. 동지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만이 좋은 동지를 얻을 수 있다."
그는 아버지께서 한 평생 어느 당파에도 가담하지 않았으며 어떤 권력도 추구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나라의 광복과 근로민중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한 몸을 서슴없이 바치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는 물욕과 사리사욕도 없었으며, 자신을 생각하기에 앞서 민족을 생각하고 자신의 가정을 생각하기에 앞서 조국을 먼저 생각하며 찬바람을 맞받아 일생을 쉬임 없이 걸어가심으로서 인간으로서도 청렴하게 살았고 혁명가로서도 결백하게 살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래서 주석님은 "어떻게하나 아버지의 뜻을 이어 한 생을 독립운동에 바치겠다는 이념"을 갖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위에 지적한 바와 같이 주석님은 아버님의 혁명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아버님이 사귀어 놓은 조선국민회 조직원들의 도움을 받았다. 한창 혁명활동을 하던 과정에서 철주 동생과 김 형권 삼촌을 잃었고 그리고 어머님도 병으로 잃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를 지도자로 아끼며 따르던 김혁, 차광수, 최창걸 등 혁명동지들을 수도 없이 잃었다. 이러한 피바다 위에서 주석님의 오늘의 위대성이 형성된 것이다. 그의 위대성은 결코 하늘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요, 땅에서 솟아난 것도 아니라, 그의 희생적 민족해방운동과 반일투쟁이라는 혁명적 투쟁 한 가운데서 무수한 혁명동지의 지원아래 이룩된 것이다. 주석님의 항일혁명활동에 대한 기록을 읽노라면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한 우리 민중의 투쟁의 역사가 소상히 눈에 어리어 온다. 그러면서 나는 김혁이 작곡 작사한 <조선의 별> 노래를 조용히 불러본다.
민중사상의 결정체
주석님의 일생을 돌이켜 보면서 두 번째로 그분에 대한 한없는 존경심을 갖게 되는 점은 바로 그의 민중에 대한 깊은 사랑의 정신 때문이다. 그의 위대성은 바로 그 분이 민중을 하늘같이 모시고 민중 속에 민중과 더불어 그리고 민중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신 데 있다. 이러한 민중을 하늘같이 모시는 사상에서 주체사상이 태동되었고 결국 이 사상은 종래의 사회주의 고전사상인 맑스-레닌주의를 계승하면서도 혁신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주석님은 그의 민중사상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이민위천>, 인민을 하늘 같이 여긴다는 이것이 나의 지론이고 좌우명이었다. 인민대중을 혁명과 건설의 주인으로 믿고 그 힘에 의거할 데 대한 주체의 원리야말로 내가 가장 숭상하는 정치적 신앙이며 바로 이것이 나로 하여금 한 생을 인민을 위하여 바치게 한 생활의 본령이었다."
이 <이민위천>사상이야말로 주석님의 모든 노작의 매 페이지마다에 흐르는 근본사상으로 그가 어려서부터 아버님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상이다. 그가 어렸을 때 중국으로 이주해서 살게 되었지만 아버님은 그를 일부러 고국에 보내어 학교를 다니게 했다. 그 깊은 뜻은 바로 주석님이 중국화 되지 않고 우리 인민의 위대성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가 어려서 아버님의 권고로 조국에서 2년간 공부한 후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우리 조선민중에 대한 감상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 인민이 어떤 인민인가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 인민은 소박, 근면, 용감, 강의한 인민이었다. 어떤 고난과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억센 인민, 불의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비타협적인 인민이었다. 민족개량주의자들은 반동적인 <자치운동>을 벌이고 있었으나 노동자와 농민, 청년학생들을 포함한 광범한 인민대중은 피를 흘리면서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모습에서 그 어떤 힘으로써도 훼손시킬 수 없는 민족의 존엄과 강철같은 독립의지를 뜨겁게 감수하였다. 그리고 그 때부터 우리 인민을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인민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이런 인민을 잘 조직동원한다면 얼마든지 나라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신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아버님의 의도대로 조선민족, 조선민중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형성된 주석님의 혁명사상은 민중을 우매하고 미개한 계몽대상으로만 보아오던 종래의 사고방식에서 탈피하여 민중이야말로 스승이며 혁명을 추동하는 기본동력이라고 간주하게 되었다. <인민들 속으로 들어가라!> 이 구호는 주석님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좌우명이 되었다. 주석님은 실로 인민적 품격과 인민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지도자로서 인민들 속에 들어가 직접 그들의 육성, 숨결, 눈빛, 표정, 말투, 손짓, 몸가짐을 자신의 눈과 귀, 손으로 손수 접촉하여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고 강조했다. 그것은 인민들 속에는 철학도 있고 문학도 있고 정치경제학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민중 속에 들어가는 것은 보약을 먹는 것과 같고 들어가지 않는 것은 독약을 먹는 것과 같다고 믿고 있던 주석님은 생전에 다음과 같이 생을 총화하셨다.
"나는 인민들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혁명활동을 시작하였고 오늘도 인민들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혁명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인민들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인생을 총화하고 있다."
주석님은 그의 생신 때마다 생일잔치 상을 차려주려는 간부들의 성화를 뿌리치고 몰래 민중 속에 들어가 현지지도하면서 시간을 보내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 간부들이 생각해낸 것이 그의 생일날인 4월 15일을 기념해
세계적인 예술제를 만들었던 것이다.
주석님은 두메산골, 외딴섬, 농장, 도시, 공장 등 이북 어느 곳이나 현지지도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사방팔방을 돌며 인민들과 대화하고, 부탁하고, 인민들에게 배우며 한 생을 사셨다. 그는 반일혁명 당시에도 혁명을 한다는 사람들이 자꾸 사대주의에 빠져 국제당에 승인이나 받으려하고 웃자리나 차지하려는 것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새 세대 청년 사회주의자들에게 당부했다.
"무산대중을 위한 혁명을 한다면서 대중을 떠나 자꾸 위로만 올라가면 어떻게 하는가, 우리는 아래로 내려가자, 아래에 내려가 노동자, 농민들 속으로 들어가자."
그는 위로 올라가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아래 즉 민중 속으로 내려가자고 호소하면서 "혁명가의 생명은 군중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되며 군중을 떠날 때 끝이 난다."고 강조해 말했다. 주석님은 선행세대의 운동전략이나 노선, 그리고 소련과 동구사회주의 나라들의 운동전략이나 노선은 결국 혁명의 주인이며 혁명의 추동력인 인민대중을 믿지 않고 외면한 것이었기 때문에 동구사회주의가 붕괴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수 백만 민중의 조직된 힘에 의거해야 일제를 타도할 수 있겠는데 지난 시기 운동가들은 혁명도 독립운동도 특수한 몇몇 사람들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사회주의 운동가들도 <기초축성>은 하지 않고 몇몇 상층인물들로써 당중앙을 선포하는 방법으로 당을 쉽게 만들었으며 민중 속에 깊이 들어가지 않고 3인 1당, 5인 1파 식으로 서로 분열되어 헤게모니 싸움이나 벌렸다고 그는 비판했다. 주석님의 분석에 의하면 소련과 동구사회주의의 몰락도 결국 따지고 보면 민중 속에 들어가 민중을 조직사상적으로 통일단결시켜야 했는데 단지 정권차원에서 행정명령식으로 먹이는 방법으로 민중을 통치하려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주석님은 혁명의 실패는 혁명의 주체이며 추동력인 민중의 힘을 믿지 않고 민중 속에 들어가지 않은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출신이 좋은 몇몇 사람들만으로는 혁명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민중을 대담하게 믿고 그들을 조직 사상적으로 조직해야 된다고 그는 믿었다.
통일단결의 비결
내가 주석님을 존경하는 세 번째 이유는 그가 민중을 통일단결시켰기 때문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혁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첫째도 둘째도 운동가들의 통일단결이며 조직성원들과 민중의 일심단결이다.
주석님이 반일혁명투쟁을 전개할 때도 운동권이 사분오열되어 있었다. 민족진영과 사회주의진영 속에서도 수많은 파쟁들이 서로 싸우고 중상모략하며 역량을 낭비하고 있었다. 새 세대 청년 사회주의자들도 이 속에서 많은 고민을 하였고 실제로 희생도 많이 되었다. 한 번은 참모장 차광수가 주석님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우리 서로 믿음과 사랑 속에 공산주의 운동을 할 수 없을까? 분파와 헤게모니 싸움이 없이 말이요!"
ML파(막스 레닌파), 화요파, 연안파 등 종파분자들은 하나같이 공명주의와 소부르조아 영웅주의에 물젖은 행세군들이었고 고질적인 사대주의자, 교조주의자들로서 운동을 파괴분열시키는 데 광분하였다. ML파들은 노동자와 빈고농만이 혁명의 동력이 될 수 있다고 믿고 테러나 일삼고 김주석을 중심으로한 새 세대 청년 사회주의자들이 애써 꾸려놓은 조직을 다 파괴시키곤 했다. 이리하여 그들은 사회주의자들과 민중을 이간시켜 놓곤 했다. 또한 주석님은 애국심이라는 공통적인 사상감정만 있으면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다 같이 민족해방을 위한 하나의 괘도에서 서로 화합하고 단결하고 협력할 수 있다고 보고 부단히 민족주의자들과의 연합전선을 시도했다.
"우리 서로 믿음과 사랑 속에 공산주의 운동을 할 수 없을까? 분파와 헤게모니 싸움이 없이 말이요!"
ML파(막스 레닌파), 화요파, 연안파 등 종파분자들은 하나같이 공명주의와 소부르조아 영웅주의에 물젖은 행세군들이었고 고질적인 사대주의자, 교조주의자들로서 운동을 파괴분열시키는 데 광분하였다. ML파들은 노동자와 빈고농만이 혁명의 동력이 될 수 있다고 믿고 테러나 일삼고 김주석을 중심으로한 새 세대 청년 사회주의자들이 애써 꾸려놓은 조직을 다 파괴시키곤 했다. 이리하여 그들은 사회주의자들과 민중을 이간시켜 놓곤 했다. 또한 주석님은 애국심이라는 공통적인 사상감정만 있으면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다 같이 민족해방을 위한 하나의 괘도에서 서로 화합하고 단결하고 협력할 수 있다고 보고 부단히 민족주의자들과의 연합전선을 시도했다.
물론 그는 민족주의운동의 한계점을 잘 알고 있었다. 민족주의운동은 민중을 떠나 상층운동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민중들과 이탈하여 상층의 몇몇 사람들끼리만 모여 앉아 말공부와 권력다툼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순전한 계급혁명이라면 노동자와 농민대중만이 혁명의 동력으로 되겠지만 조선혁명의 성격자체가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혁명인 만큼 노동자, 농민은 물론, 청년학생, 지식인, 애국적인 종교인, 민족자본가들도 다 혁명의 동력으로 보고 민족해방에 이해관계를 가지는 모든 반일애국역량을 다 집결하고 다 동원하자는 것이 주석님의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이었다. 그는 민족해방이라는 대전제를 첫 자리에 놓는다면 어떤 민족운동진영과 어떤 계급, 계층과도 손을 잡을 수 있다고 보았다. 민족을 첫 자리에 놓고 모든 문제를 생각해야 된다. 민족이 있고서야 계급도 있고 주의도 있지 민족이 없이 공산주의, 민족주의는 해서 무엇하며 하느님은 믿어 무엇하겠는가고 주석님은 물었다.
그가 생전에 차광수, 김혁, 최창걸을 포함한 무수한 혁명동지들을 잊지 못해 한 것은 그들이 과거운동에서 통일단결의 중심이 없이 각 당 각 파가 저마다 영웅호걸행세를 하면서 파쟁으로 혁명운동을 말아먹던 교훈을 찾고 영도의 중심, 통일단결의 중심이 있어야 한다는 진리를 뼈에 사무치도록 깨닫고 주석님 자신을 통일단결의 중심으로 내세워 역사상 처음으로 통일단결의 새 역사를 피로서 개척했기 때문이었다.
민중의 자랑이고 영광이며 무궁무진한 힘의 원천인 참다운 통일단결의 시원을 열어놓고 우리 나라 사회주의운동에서 처음으로 영도자와 민중의 일심동체를 이룩한 통일단결의 새 역사를 이들 새 세대 청년 사회주의자들이 이룩했기 때문에 주석님은 반일투쟁에서 큰 공을 세울 수 있었고 해방후 새 사회주의 조국을 건설하는 데서도 혁혁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새 세대 사회주의청년들은 자리다툼 때문에 조국에 불화를 조성한 적도 없고 의견의 차이로 그들이 생명으로 내세운 통일단결을 파괴해본 적이 없었다고 주석님은 회고하였다. 동지들의 역사적 공적은 지도자를 내세우고 그 지도자의 두리에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쳐 혁명투쟁을 전개한 바로 그 때로부터 조선의 민족해방투쟁은 "민족성"이라고 까지 비판받았던 고질적인 파쟁과 당파로 얼룩진 과거의 분열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통일단결의 장을 개척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주석님은 지적했다.
주석님을 중심으로 철통같이 뭉친 새 세대 청년사회주의자들은 국적, 계급, 사상, 신앙, 재산정도, 남녀노소의 차이를 뛰어넘어 각계각층을 망라하는 반일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고 전 조선민족의 항전으로 나라를 찾겠다고 생각했다. 주석님은 진한장, 장울화 같은 부자 중국청년들도 공청생활을 잘 했다고 회고하고 있으며, 손정도 목사같은 종교인들, 민족자본가들까지 다 동원하여 거족적인 반일항쟁을 전개했다. 왜냐면 그들은 모두 애국애족심을 갖고 있는데 그것이야말로 위대하고 순결하고 신성한 감정이며 민족단합정신이야말로 그 애국애족심 중에서도 정수를 이루는 최고의 넋이기 때문이다. 지금 북조국은 주석님의 계승자인 김정일국방위원장님을 중심으로 당과 민중이 일심단결하여 그 어떤 제국주의나 지배세력에 대항하여 자주성을 굳게 지켜 나가고 있다. "엽전들은 별 수 없다. 모이면 싸우고 사분오열된다. 그것은 우리 민족성이 그래서 어쩔 수 없다. 민족개조론을 주장한 이광수 등이 옳았다." 이러한 주장은 분단하여 통치하는 제국주의자들의 분열논리에 불과한 일시적 현상이라는 것이 북조국의 일심단결의 징표가 잘 말해주고 있다.
자주사상의 결정체
그가 생전에 차광수, 김혁, 최창걸을 포함한 무수한 혁명동지들을 잊지 못해 한 것은 그들이 과거운동에서 통일단결의 중심이 없이 각 당 각 파가 저마다 영웅호걸행세를 하면서 파쟁으로 혁명운동을 말아먹던 교훈을 찾고 영도의 중심, 통일단결의 중심이 있어야 한다는 진리를 뼈에 사무치도록 깨닫고 주석님 자신을 통일단결의 중심으로 내세워 역사상 처음으로 통일단결의 새 역사를 피로서 개척했기 때문이었다.
민중의 자랑이고 영광이며 무궁무진한 힘의 원천인 참다운 통일단결의 시원을 열어놓고 우리 나라 사회주의운동에서 처음으로 영도자와 민중의 일심동체를 이룩한 통일단결의 새 역사를 이들 새 세대 청년 사회주의자들이 이룩했기 때문에 주석님은 반일투쟁에서 큰 공을 세울 수 있었고 해방후 새 사회주의 조국을 건설하는 데서도 혁혁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새 세대 사회주의청년들은 자리다툼 때문에 조국에 불화를 조성한 적도 없고 의견의 차이로 그들이 생명으로 내세운 통일단결을 파괴해본 적이 없었다고 주석님은 회고하였다. 동지들의 역사적 공적은 지도자를 내세우고 그 지도자의 두리에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쳐 혁명투쟁을 전개한 바로 그 때로부터 조선의 민족해방투쟁은 "민족성"이라고 까지 비판받았던 고질적인 파쟁과 당파로 얼룩진 과거의 분열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통일단결의 장을 개척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주석님은 지적했다.
주석님을 중심으로 철통같이 뭉친 새 세대 청년사회주의자들은 국적, 계급, 사상, 신앙, 재산정도, 남녀노소의 차이를 뛰어넘어 각계각층을 망라하는 반일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고 전 조선민족의 항전으로 나라를 찾겠다고 생각했다. 주석님은 진한장, 장울화 같은 부자 중국청년들도 공청생활을 잘 했다고 회고하고 있으며, 손정도 목사같은 종교인들, 민족자본가들까지 다 동원하여 거족적인 반일항쟁을 전개했다. 왜냐면 그들은 모두 애국애족심을 갖고 있는데 그것이야말로 위대하고 순결하고 신성한 감정이며 민족단합정신이야말로 그 애국애족심 중에서도 정수를 이루는 최고의 넋이기 때문이다. 지금 북조국은 주석님의 계승자인 김정일국방위원장님을 중심으로 당과 민중이 일심단결하여 그 어떤 제국주의나 지배세력에 대항하여 자주성을 굳게 지켜 나가고 있다. "엽전들은 별 수 없다. 모이면 싸우고 사분오열된다. 그것은 우리 민족성이 그래서 어쩔 수 없다. 민족개조론을 주장한 이광수 등이 옳았다." 이러한 주장은 분단하여 통치하는 제국주의자들의 분열논리에 불과한 일시적 현상이라는 것이 북조국의 일심단결의 징표가 잘 말해주고 있다.
자주사상의 결정체
네 번째로 내가 주석님을 존경하는 이유는 그의 사상의 위대함 때문이다. 그가 창시한 주체사상은 "사상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주석님은 사상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사상적 결합이 아니고서는 아버지의 친구도 다 소용없다. 지난 날의 친분관계나 인정만 가지고서는 혁명투쟁을 함께 해 나갈 수 없다. 사상이 변하고 신념이 변하면 의리나 인정도 동시에 변하는 법이다. 지난 날 죽자살자 하면서 가깝게 지내던 사이에 틈이 생기고 인간적 결렬이 생기게 되는 것도 다 어느 한 쪽의 사상이 변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고 장담하던 우정이나 동지적 유대도 어느 일방이 사상적으로 변질되면 금이 가기 마련이다. 사상을 고수하지 않고서는 의리나 친분관계도 지켜낼 수가 없다."
주석님의 위 고백은 그 자신이 혁명과정 속에서 무수한 동지적 배신과 그로 인해 많은 동지들의 희생과 살을 에이는 것 같은 고통을 맛본 산 체험의 기록인 것이다. 사람들이 어려운 기로에 처했을 때, 이해관계가 맞부딪쳤을 때 그 진가 즉 그의 사상성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주체사상에서는 지식과 사상을 구별해보고 있으며 사상을 인간의 요구와 이해관계를 반영한 의식형태로 정의내리고 있다. 그가 반일혁명투쟁 한가운데서 죽을 고비도 많이 넘기고 많은 동지도 잃었는데 막상 어려운 때 생명까지도 서슴치 않고 의탁할 수 있는 결백하고 견실한 혁명적 의리와 동지애는 역시 근로하는 민중들 속에 있음을 체험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그 어느 누구에게 지배나 착취받지 않고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 세계를 창조적으로 개척해 나가려는 근로민중의 주인정신이 바로 자주사상이다. 주석님과 그를 단결의 중심으로 믿고 따르던 새 세대 청년사회주의자들은 바로 사람들을 대할 때 그들의 명성, 경력, 지위를 보기에 앞서 그의 자주사상과 혁명에 대한 입장, 인민에 대한 관점부터 먼저 보는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자주사상을 생명으로 여기고 일심단결한 이들은 조선혁명은 조선사람들 자신이 책임지고 조선인민의 힘에 의거하여 수행하여야 승리할 수 있으며 혁명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를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투쟁했다. 그들은 과거의 민족주의운동과 사회주의운동진영의 노선과 전략들이 조선의 산 현실에 발을 튼튼히 붙이지 못하고 사대사상에 빠져 남의 것을 모방이나 하는 심중한 약점을 갖고 있었음을 알았다. 그러나 주석님과 그의 동지들은 모든 문제를 자체의 실정에 맞게 자주적으로 사고하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풀어나갔다. 맑스, 레닌, 스딸린의 명제가 어떻고 트로츠키의 주장이 어떻다는 것이야 러시아인들이나 떠들어 댈 것이지 조선사람이야 조선의 얼을 가지고 제나라 혁명을 잘 하기 위해 힘써야지 젊은이들이 자기 얼도 없이 남들의 명제나 맹목적으로 외우고 다니며 거들먹거리는 종파주의, 사대주의, 교조주의를 주석님은 시종일관 비판했다.
주석님은 조선혁명과정 속에서 아버지, 어머니, 동생, 삼촌, 그리고 무수한 동지들을 잃었다. 그가 그들을 그렇게 못잊어하는 것은 단순히 부모자식간의, 형제간의, 그리고 동지간의 사랑 때문만이 아니라, 그 사랑을 관통하는 사상이 참답고, 고결함으로 그 사랑이 영원하고 성스럽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강철도 아니거니와 그 강철보다 약하고 변이성이 많은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의 사상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스스로 통제하고 조정할 능력을 갖고 있다. 문제는 동요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동요를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는 데 있다. 혁명가를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역경을 순경으로 만들 줄 아는 강의하고 창조적이고 희생적인 인간들이기 때문이라고 주석님은 결론내리고 있다.
소박한 민중의 아들로 태어나 오로지 조선민중을 위하여 민중과 더불어 한 평생을 바쳐온 주석님의 생애를 회고하며 나는 인간이 참으로 바른 사상을 갖고 올바른 대의를 위해 살아갈 때 얼마나 고상해질 수 있으며 얼마나 위대하고 성스러워질 수 있는지 알게 된 것 같다. 예수, 석가모니, 마호apt, 간디 등 모든 위대하고 성스러운 분들이 다 주석님같은 분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결국 위대하다는 것은 남을 위하여, 특히 억압받고 소외되고 착취받는 민중을 위하여 얼마나 자기자신을 희생시켰는가에 달려있다. 그의 전 생애에 흐르는 그의 넓고 높은 도량과 고매한 사회주의적 덕성, 탁월한 영도력, 그리고 혁명적 의리와 동지애의 숭고성은 우리 민족, 민중과 더불어 영생할 것이라 확신한다. 나는 주석님의 생애와 사상을 회고하면서 계속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았다. 만약 주석님과 그의 혁명동지들이 <혁명에 대한 책임감>을 내동댕이치고 만주 눈벌판에서 좌절해버렸다면 과연 조선의 미래는 어떻게 되었을까? 조선의 자주의 역사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까? 아니 조선의 자주의 역사가 과연 제국주의의 맹공격 앞에 생존이나 했을까? 주석님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셨다.
"나는 그 때 우리가 주저앉으면 조선이 다시 소생하지 못한다는 자각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죽어도 조선을 구원할 사람들이 따로 있다고 생각했더라면 우리는 라자구 등판의 눈사태 속에 파묻혀 더는 일어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 혁명에 대한 책임감은 결국 우리에게도 지금 무겁게 엄습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재미동포들도 이 책임감만 없다면 모두 자본주의 물결 속에 매몰되어 물질 위주의 삶이나 살아갈 것이다. 주석님의 생애는 과거의 일로, 그저 재미있는 회고거리로 넘겨버릴 수 없는 무서운 채찍을 동반하고 있다. 우리도 지금 여기서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을 위한 변혁운동을 계속 추진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원의 사상이며, 계승의 의미이다.
우리는 주석님을 지금 여기 미국에서 부활시켜야 한다. 그분의 생을 통하여 우리에게 몸소 보여준 애국애족의 길, 통일단결의 길, 희생의 길, 자주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주석님을 회고나 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분처럼 살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도 주석님처럼 영생의 삶인 사회정치적 생명을 얻을 것이다.
(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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