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연재들의 제목을 상기하면 이 연재의 제목은 "조선전쟁의 동기"라고 하든가 "누가 조선전쟁을 일으켰는가"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이 연재의 제목을 교조적으로 달지 않기로 하었다.
그 이유에 대한 대답으로 다음의 사례를 든다. 최근에 평양에 새로 증축된 전승기념관을 참관한 여러 사람들과 대화해 보면 교포들인 경우에는 "미제는 조선전쟁의 도발자"라는 다큐를 보았다고 하고 외국인들은 "누가 조선전쟁을 일으켰는가"라는 다큐를 보았다고 한다. 한 방에서 같은 학술내용을 놓고 해설내용과 방법이 이렇게 엇갈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를 독자들이 자체로 생각해 보기 바란다.
이 연재를 시작하기에 앞서 한가지 명백히 밝힐것이 있다.
그것은 조선전쟁의 특수성이다. 이것을 정확히 지적하지 못하면 오류를 범하게 된다.좌이든 우이든 다 앵무새가 되고 만다. 정확히 조선전쟁을 이해하고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 조선전쟁이 남긴 경험과 교훈을 찾자면 조선전쟁의 특수성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
조선전쟁의 특수성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2차 세계대전후 미국의 신식민주의 정책의 결과로 초래된 첫 대리전쟁, 민족내전인 동시에 2차 대전후 새로 탄생한 신생 사회주의 진영과 미국을 중심으로 재편성된 제국주의 진영이 모든 전력을 다 하어 맞붙은 처음이자 마지막인 유일한 전면 대결전이라는 것이다.
(베트남전쟁은 사회주의 진영이 분열된 상황에서 벌여 졌으므로 대비되지 못한다.)
다른 역사가, 군사가들도 이렇게 평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렇게 평가한다.
솔찍히 미국은 조선전쟁에 대해 거의나 언급하지 않는다. 한국이 악에 받쳐 북조선이 남침했다고 고아대면 거기에 드문히 응수할 따름이다.
조선이 미국과 한국의 북침설을 말 하는 것과 미국과 한국이 북조선의 남침설을 말 하는데는 하늘땅 차이가 있다. 불과 한 글짜가 다른데 내용에서 어떻게 엄청난 차이를 가져 오는가 하는 질문이 나올 것이다.
조선이 말하는 북침설은 누가 조선을 침략해도 자기를 수호하고 오히려 더 강력하게 맞받아 쳐 침략자들을 KO 시킬 수 있는 자위적 국방력이 준비되었다는 선포라면 한국이 말하는 남침설은 북의 강력한 타격에 저들의 운명이 끝장나는데 겁을 먹은 보수세력의 비명소리이다.
그러기에 양심있는 역사가들과 군사전문가들은 조선전쟁에 대해 말 할 때 조선전쟁의 필연성과 북과 남의 전쟁준비상태를 고찰하지 누가 전쟁을 먼저 시작했는가를 고찰하지 않는다.
나의 견해를 먼저 밝힌다. 조선전쟁은 (미국에 대한 환상에 빠지고 "멸공"정신으로 세뇌된) 한국이 (대북정보수집능력이 부족하고 과대망상증에 빠진) 미국을 믿고 (무력통일기회만 노리던) 북조선을 섣불리 건드린 것으로 하어 일어 난 전쟁이다.
이것은 조선전쟁기간 미 국회청문회에 나타난 브랫들리 대장이 한 말을 잘 새기면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잘못 선택한 대상에 대해, 잘못 선택한 장소에서,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전쟁을 하고 있다."
브랫들리는 이 말로써 조선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 바로 미국이며 미국의 가장 큰 실책은 김일성 수상과 조선에 대한 파악도 없이 조선의 수에 놀아 나는 전쟁을 하는데 있다는 것을 실토하고 말 았다. 동시에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며 조선의 영도자인 김일성수상의 천재적 기질을 인정했고 김일성 수상이 있는 한 누가 미국 대통령을 하고 어느 미군 장성이 조선전쟁을 지휘해도 절대로 조선을 이길 수 없다는것을 미 국회의원들에게 정확히 설명했다.
3. 조선전쟁에서 발휘된 김일성 수상의 천재적 지략
이와 유사한 제목으로 된 글들이 인터넷의 곳곳에 보인다. 그러나 나의 마음을 틀어 잡는 글은 별로 없다.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내용보다 너무도 단편적이며 지나친 신화적허구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실지로 김일성 수상의 예지에 대해 서술한 일부 내용들은 너무 과장된 신화처럼 느껴지며 김일성 수상의 담력을 서술한 일부 내용들은 무모한 고집처럼 느껴진다. 그 이유는 김일성 수상에 대해 너무도 모르고 여기저기서 자료를 긁어다가 모았기 때문이다.
조선전쟁에서 발휘된 김일성 수상의 천재적 지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선전쟁의 필연성을 인정한데 기초하어 자체의 군사력을 꾸리고 강력한 전략적인 대미대남정보수집역량을 마련한 것이다. 이것이 제일 중요하다.
여기서 앞의 두 내용은 다른데서도 많이 찾아 볼 수 있으므로 그만한다.
이 글에서는 주로 김일성 수상의 지략을 뒷받침한 전략적인 대미대남정보수집에 대해서만 간단히 소개한다.
조선전쟁기간 북의 정보수집능력은 상상을 초월하었다. 어느 정도인가? 한국의 청와대나 국방부는 말 할것도 없고 대만과 일본, 지어 미 8군 사령부에까지 그의 촉수가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조선전쟁 전기간 김일성 장군에게는 미 8군과 한국군의 인사변동관계, 주요 작전기획내용들이 빠짐없이 전달되었으며 김일성 장군만 알고 있는 극비밀리의 전자기술정찰소조는 유엔군과 한국군의 주요 병력이동을 실시간으로 감시하었다.
한두가지 사례만 든다.
1950년초 장제스가 비밀리에 맥아더를 만나 조선전쟁에 대만이 참전하는 문제를 토의하나 장제스는 애매한 입장을 취하다가 포기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지만 정 알고 싶으면 대안친선유리공장에 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바로 장제스가 대만으로 돌아 온 다음부터 대만시장에서 콩가격이 급격히 오르고 중국인들이 콩을 사들이느라 분주히 뛰어 다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1950년 봄에 대만에서 콩가격이 변동하는 것을 무심히 대했지만 이미 20여년동안 산속에서 일본과 싸워 온 경험이 있는 김일성 수상은 전쟁에 이용되는 전략물자인 콩의 가격이 오르고 특히는 콩산지인 중국인들이 구입하는 것을 보아 햇콩이 나오기 전인 1950년 여름에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것을 예측했으며 콩의 구매양으로부터 전쟁에 참전할 병력규모를 정확히 타산했다. 실지로 조선전쟁이 터진 후 이 콩은 주요 군수물자로 둔갑하어 유엔군에 공급되었다.
1949년에는 전쟁준비가 충분히 되어있지 않은것으로 하어 이승만의 북침기도를 대남정보역량과 내무성 경비대에 의거하어 파탄시킨 김일성 수상은 1950년에는 무력통일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으려고 결심하고 1950년 봄까지 전쟁준비를 완료한다.
그리하어 1950년 봄까지 급히 중국에서 조선인 부대들을 소환하어 전쟁준비를 최종적으로 완료하며 농촌동원을 구실로 모든 부대들을 황해도와 강원도에 이동시켜 2선에 배치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막을 당시 민족보위성을 제외한 다른 정부기관들, 지어 외무성과 내무성도 알지 못했다. 이런 판에 맥이더와 이승만이 이것을 감촉할리 만무하다.
그때 한국에 날아 든 미 국무장관 덜레스와 맥아더 대장을 비롯한 미국의 주요 인물들의 움직임과 발언내용은 다음 날이면 김일성 수상의 책상우에 놓였다. 지어 이승만과의 단독회담 사진과 필름까지도 말이다. 한국군의 주요 인물들도 모르는 맥아더의 11개조 단독훈령정보까지 그대로 평양에 직송되는 판이니 더 말 해서 무얼하겠는가?
(소련과 중국이 조선을 배반한 1990년대이후에 와서야 겨우 1950년대 조선의 실태에 대해 외곡된 정보를 몇건 얻어 보고 큰 일이나 난것처럼 아우성치는 한국이 이제 조선과 감히 전쟁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 독자들이 자체로 판단해 보길 바란다.)
이러한 고급정보들에 기초하어 1950년 6월말에 이승만이 미국의 비호밑에 다시금 북침을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한 김일성 수상은 이번에는 지난 해처럼 국부적인 전투가 아니라 전면전쟁으로 번져 지며 그 어떤 방법으로도 절대로 이 전쟁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지자 주저없이 주동적으로 맞받아 치는 방법으로 전쟁을 맞이할 것을 결심한다. 그러던 중 한국군이 25일 일요일 새벽 4시에 38선을 넘는다는 정보가 들어 오자 즉시에 조선인민군의 일부 부대들에 북침하는 한국군을 4시경에 익측타격할데 대한 명령을 하달한다.
(그런데 이 명령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아 한국군의 북진에 아무런 장애를 주지 못했다.)
한국군이 38선을 넘어 북조선의 내무성 경비대와의 전투끝에 1~2시간동안 1~4km전진했을 때 드디어 2선에 배치되었던 조선인민군의 실체가 나타났다. 복싱으로 말 하면 전혀 생각치 못했던 뒷손타격에 걸려든 것이다. 막강한 조선인민군의 단 한번의 반타격에 한국군의 전열이 붕괴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1950년 6월 25일 아침 7시에 있은 사건이다.
그 이후에 벌여 진 사태에 대해서는 너무도 잘 알려 졌으므로 그만둔다. 또한 미 24사 사단장 딘 소장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취급되었으므로 그만둔다.
이외에 맥아더가 그처럼 치적하는 "크로마이트"작전기획과 원산상륙기획도 이미 김일성 수상은 8월부터 알고 있었으며 미 8군 사령부에서도 극비에 논의되던 릿지웨이의 하기 및 추기공세정보도 1951년 봄부터 알고 있었다. 이외에 아이젠하워의 신공세기획과 "스맥스작전"기도에 대해서도 사전에 정확히 통보받았다.
그러기에 조선전쟁은 역사상 유례없는 비밀없는 전쟁이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미국의 개로 전향한 박헌영과 이승엽 때문이고 유엔군의 입장에서는 성시백, 노남교와 같은 유능한 북의 첩보원들 때문이다. 1953년초 조선에서 박헌영과 이승엽을 적발제거하자 전략적인 대북정보수집능력을 잃어 버려 눈과 귀가 없는 병신신세가 된 미국으로서는 더는 전쟁을 계속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또한 김일성 수상이 직접 조직한 전자기술정찰소조의 능력도 만만치 않았다. 그 능력을 보여 주는 한두가지 사례만 이야기한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전쟁기간 신의주일대에서 감행된 미군의 대공습에 대해 알 것이다. 이 대공습은 박헌영과 이승엽의 통보를 받고 당시 신의주와 수풍일대에 있던 김일성 수상을 제거하려고 미 5공군이 조직한 특수작전이다. 그러나 북조선의 기술정찰소조가 미 5공군의 폭격기들에서 발신하는 전파를 감청해독하어 결정적인 시각마다 김일성 수상이 대책하고 은폐할수 있게 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거의나 없을 것이다.
건지리의 최고사령부에 대한 집중폭격도 사전에 정확히 감청해독했으며 그러기에 인명피해가 전혀 나지 않았다.
맥아더가 실각하면서 한 말이 있다. "나의 가장 큰 실책은 김일성 장군에 대해 너무도 모르는 것이다. 누가 나를 대신하어 유엔군 사령관을 하든지 김일성 장군이 있는 한 나처럼 될 것이다."
이러한 김일성 수상과 맞서 싸울 용기가 나는 자가 있으면 이제라도 나서 보라. 오죽하면 맥아더가 손들고 물러 나고 브랫들리가 하소연하고 클라크가 울었겠는가?
이처럼 조선전쟁은 김일성 수상의 천재적지략이 가장 높은 경지에서 발휘되고 그에 의해 지난날 약소민족으로 천대받던 조선민족이 강대국인 미국과 당당히 맞서 싸워 전 세계앞에 영웅적민족으로 이름떨친 역사적 사변이다. 이것은 을지문덕이나 강감찬, 이순신 같은 것은 대비도 되지 않는 반만년 조선역사에서 처음으로 있은 대격변이다. 이것을 부정하려는 자가 있으면 온 민족의 지탄을 받을 용기를 내서 한번 나서 보라.
미국은 결국 가장 비열한 전쟁수행방식을 취하는 것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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