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6-23
[서소문 포럼] 국정원이 남북 정상회담에서 손 떼야 하는 이유
[서소문 포럼] 국정원이 남북 정상회담에서 손 떼야 하는 이유
국정원이 남북 정상회담에서 손 떼야 하는 이유
[중앙일보] 입력 2017.06.23 02:37
기자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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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비밀송금 환전소 노릇 한 대한민국 정보기관
편향적 ‘적폐’ 청산으로는 국민 신뢰 회복 어려워
이영종통일전문기자·통일문화연구소장“빨갱이 잡던 내가 이런 일을 맡게 될 줄 꿈에도 몰랐어요.” 곰 같은 몸집의 국가정보원 요원 K씨 얼굴엔 자괴감이 가득했다. 그는 2000년 8월 서울에 온 이산가족 상봉 북측 단장 류미영의 근접경호를 맡았다. 류미영(2016년 11월 사망)은 대한민국 외무장관을 지낸 최덕신의 부인이다. 이들 부부는 1986년 4월 북한 김일성의 품에 안겼다. 육사 출신에 공비토벌 사단장을 지낸 예비역 중장의 동반 월북은 큰 충격을 던졌다. 류미영의 등장을 두고 탈북자 출신 국회의원 조명철씨를 방북단장에 보낸 격이란 우려가 나왔지만 김대중 정부는 그냥 넘겼다. 특급호텔에 최고급 리무진을 제공하고, 두고 간 가족과 상봉하게 했다. 국정원은 대공요원 출신들에게 경호·의전을 책임지게 했다. ‘역사적’ 첫 정상회담 분위기에 도취된 정권과 정보기관엔 류미영의 전력이나 우리 대공조직의 사기는 중요치 않았다.
문재인 정부 들어 남북 정상회담 얘기가 다시 흘러나온다. 과거 막후작업에 관여한 서훈씨가 이달 초 국정원장에 취임하며 더 잦아졌다. 문재인 대통령도 “여건만 되면 평양에 가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쾌도난마(快刀亂麻)식 기대를 부풀리다간 낭패를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절차적 합리성이 중요하다. 김대중(DJ) 정부의 정상회담 비밀송금이 반면교사다. 회담 대가로 천문학적 대북 달러 제공이 이뤄졌고, 북한은 이권 챙기기에 급급했다. 특검은 현대가 북에 보낸 4억5000만 달러의 정상회담 관련성을 밝혀 내면서 “이 가운데 1억 달러는 김대중 정부가 북측에 지원하기로 약속했으나 정부 요청으로 현대가 대신 지급한 것”이라고 결론 냈다.
정치적 활용이란 달콤한 유혹에 빠질 수도 있다. DJ의 대북송금에 특검 칼날을 들이댔던 노무현 정부도 그랬다. 대선을 불과 두 달 남겨놓고 서둘러 정상회담을 치렀다. 평양~개성 고속도로 건설 등 대북지원을 담은 10·4 공동선언은 혈세투입 논란을 낳았고 결국 사문화됐다. “DJ의 정상회담이 선불제였다면 노무현 정부는 후불제란 차이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이젠 국가 정보기관이 남북 정상회담에서 손을 떼는 문제를 깊이 고민했으면 한다. 앞서 두 차례 회담은 국정원장의 지휘 아래 대북차장과 전략부서 베테랑이 총동원됐다. 서훈 원장도 당시 핵심 역할을 했고, 국정원 수장에 오른 주요 배경 중 하나다. 서 원장은 “나만한 기술자가 없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국정원의 비정상적 역할은 이제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대북 정보기관 수뇌부들이 싱가포르와 상하이 호텔방을 전전하며 비밀접촉을 벌이고, 북한 최고지도자가 따라 주는 와인을 받아 마시는 모습은 맞지 않다. 북한에 뒷돈을 대는 데 국정원이 핵심 창구 역할을 맡고, 암달러상보다 못한 환전소 역할까지 했다는 건 참담한 팩트다. 대북 담당 차장이 특검 조사에서 “북측이 군사비로 전용할 우려가 있다는 걸 알았다”고 진술한 대목은 충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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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훈 원장은 19일 국정원 개혁·발전위 출범식에서 “직원들이 PC방을 전전하며 댓글을 달 때 느껴야 했을 자괴감과 번민을 생각하면 마음 아프다”고 말했다. 댓글 사건과 함께 2007년 남재준 국정원장 시절의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를 ‘적폐’ 1순위로 규정했다. 하지만 국정원이 결별해야 할 구태는 이뿐만이 아니란 걸 서 원장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간첩 수괴’의 수발을 들어야 했던 대공요원 K씨의 눈물도 그중 하나다. 대북 불법송금으로 원장이 감방 가는 걸 목도했던 직원들의 절망감도 조직의 트라우마로 남았다.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식으로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다. 가장 큰 적폐는 바로 내게 있다는 자성의 자세가 중요하다.
국정원이 주도하지 않고 어떻게 정상회담을 하겠느냐고 걱정한다면 그건 착각이다. 당국대화와 교류·협력은 주무부처인 통일부에 맡기면 된다. 그렇게 되면 간첩 잡고 대북정보를 캐는 본래 소명이 더 선명해질 것이다. 평양 당국이 ‘국정원을 해체하라’며 핏발을 세울 정도로만 하면 된다. 그게 진짜 적폐 청산이고 국가 정보기관으로서 국민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통일문화연구소장
[출처: 중앙일보] [서소문 포럼] 국정원이 남북 정상회담에서 손 떼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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