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우리에게 북한이란 무엇인가?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모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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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우리에게 북한이란
무엇인가?
등록 2017-07-11 18:12
과연 우리에게 북한이란 무엇이었고 지금은 무엇인가? 우리 북한관이 어떻게 변
천되어 왔고 지금 그 현주소는 무엇인가? 과연 현재 남한의 북한관은 평화공존
모드 조성에 적합한가? 외교·통일 문제에도 타자에 대한 접근의 심성적 기반이
되는 상대에 대한 태도 내지 입장은 매우 중요하다.
문재인 시대의 새로운 대북 접근이 성공하려면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대
북의식부터 반성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북한 ‘위협’을 뻥튀기하는 일만큼이나
북한에 대한 우월의식 역시 허구적이며 백해무익일 뿐이다.
이명박·박근혜 적폐 정권이 몰락한 뒤로 9년간이나 퇴보만 거듭해온 남북관계가
드디어 다시 평화공존과 협력 모드를 향한 길에 오르리라는 기대가 생겨났다. 한
데 오랜 퇴보의 기간을 뒤로하고 남북관계를 다시 본궤도에 올리자면 우리는 먼
저 한 가지 본격적 물음에 대한 답을 시도해봐야 할 것이다. 과연 우리에게 북한
이란 무엇이었고 지금은 무엇인가? 우리 북한관이 어떻게 변천되어 왔고 지금
그 현주소는 무엇인가? 과연 현재 남한의 북한관은 평화공존 모드 조성에 적합
한가?
누군가를 상대할 때 대상에 대한 ‘나’의 생각부터 먼저 정리해보는 게 인생의 철
칙이다. 외교·통일 문제에도 타자에 대한 접근의 심성적 기반이 되는 상대에 대
한 태도 내지 입장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어느 시기보다도 남북간의 접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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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활기를 띨 것 같은 지금 바로 이 시점에 이와 같은 반성적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지금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지만 1950~70년대만 해도 한국의 당국자들에게 북
한이란 두려운 존재인 동시에 일종의 모방 대상이기도 했다. 두렵다는 것은 여러
차원에서였다. 남한보다 군수기업 등 중공업까지 포함한 공업화를 먼저 실행한
북한의 군사력도 두려웠지만, 무엇보다 이미 ‘제3세계형 복지국가’로서의 모습
을 갖춘 북한의 매력적 면모가 남한 평민들에게 알려질까봐서 두려웠던 것이다.
이미 1950년대 말에 북한은 무상의료와 교육, 그리고 주거 배분제 등을 자랑할
수 있었는데, 한국은 당시에는 돈이 없으면 병원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아이를
대학에 보낼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게다가 일본군 장교 출신이 대통령으로 있는 나라에서는, 항일무장투쟁의 경력
이 있는 사람들이 요직에 두루 포진된 북한의 민족주의적 명분도 늘 눈엣가시였
다. 그래서 특히 1970년대에 박정희 정권은 주체사상의 존재를 의식한 듯한 ‘민
족 주체성’을 유독 내세우려 했다. 북한에서 이미 1950년대부터 국책사업으로
진행되었던 고전 국역사업을, 민족문화추진회를 통해서 남한에서도 가시적으로
전개하고, 북한의 사회과학원을 의식해서 남한에서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을 세웠다. 북한의 ‘애국열사’ 우대와 경쟁하듯, 박정희가 집
권하자마자 독립운동 베테랑들에게 훈장 수여·추서를 시작했다. 물론 사회주의
적 독립운동 관련자들은 제외되었는데, 김일성의 ‘빨치산파’와 갈등을 빚은 여타
의 계파 출신 독립투사들이 숙청에 희생되거나 그늘진 곳에서 살아야 했던 건 북
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에 대한 그 당시의 열등감과 대결의식의 상징은 바로 그 유명한 ‘양지축구
단’이었다. 1966년 월드컵에서 북한팀이 강자 중의 강자인 이탈리아를 꺾고 8
강전까지 올랐을 때 박정희와 그 가신들은 그 충격의 여파로 국가, 즉 중앙정보
부의 집중 지원을 받는 최강의 팀을 만들어야 한다고 마음을 먹었다. 정보부 부
장 김형욱이 “손수 챙겨주는” 속칭 ‘양지팀’에 군에 입대했거나 입대해야 할 나
이의 선수들이 차출되어, 전폭적 지원과 함께 대기업 임원 수준의 월급을 받게
되었다. 그 당시로서는 천당 국경이라고 할 수 있는 서유럽으로 전지훈련까지 가
는 ‘특전’도 누렸다. 김형욱이 실각되면서 이 팀도 권력자들의 시야에서 멀어져
결국 북한 선수들과 맞붙기도 전에 흩어지고 말았지만, 그 당시에 한국 권력자들
이 북한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는지는, 이 팀의 존재가 잘 보여준다.
1980년대에는 한국의 경제 규모나 전투력이 북한을 훨씬 능가했지만 한국 지배
자들은 여전히 상당한 대북 공포의식을 지니긴 했다. 1985년만 해도 구로공단
전자업체 노동자의 임금은, 잔업수당 등 각종 수당을 다 포함해도 10만~12만
원 정도였고 노동시간은 주당 60~70시간이었다. 군사독재국가인 만큼 ‘시민’으
로서의 권리들도 사실상 박탈되어 있었다. 대북 무장충돌이 발발할 경우에 상당
수가 지옥적인 조건하에서 사는 한국 서민들이 정권에 어디까지 충성할 것인지
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1989~1992년 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들이
남북한의 관계구도와 남한에서의 대북 의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북한 경제의 생명줄이었던 소련이 망한데다가 또 하나의 우방인 중국이 남한과
수교해 버렸다. 북한은 대일 수교로 맞서려고 시도했지만 미국의 압력으로 수포
로 돌아가 사실상 외교·안보 차원의 고립에 빠졌다. 동시에 남한에서는 임금이
상승하고 기초적 민주주의가 쟁취되는 등 국민통합에 필요한 여러 여건이 충족
되기 시작했다. 관계가 이처럼 역전되는 순간, 남한 지배자들이 품었던 과거의
열등감은 바로 우월의식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 당시 소련에서 한국학을 공부하면서 1990년부터 한국 방문자들을 만나기 시
작한 나에게 북한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놀랍기만 했다. 운동권 출신들 중에 소
련에 소장된 자료를 이용해 북한 역사·사회를 더욱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사
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한국인 방문객들은 북한이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으
며 머지않아 ‘자멸’되어 한국에 자연스럽게 흡수되리라고 여기고 있었다. 한때
“무서운 강적”이었던 북한은, 이제는 그들에게 “가련한 패배자”로 비쳤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김일성 주석의 사망이 알려진 날이었다. 나는 그때 한
국노총이 보낸 사절단을 안내하고 있었다. 그 구성원들 중에 한 명이 “아쉽다.
분단 이전의 상황을 기억이라도 하는 늙은이가 그나마 통일에 더 적극적이었을
텐데”라고 평했지만, 나머지는 주석 사망이 계기가 되어 ‘붕괴’가 곧 오리라고 기
쁘게 내다봤다. 김일성 사망 이후에는 끔찍한 대량 아사 사태가 뒤따랐던 ‘고난
의 행군’ 시기가 펼쳐졌지만, 사망자가 가장 많았던 초기의 시절에 한국 정부는
인도적 지원조차 거의 하지 않았다. “빨갱이들을 자멸하게 놓아두어야 한다”는
신념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자멸’은 오지 않았다. 그러자 김대중 정권은 당장의 ‘흡수’가 아닌 한국
경제권으로의 점차적이고 평화적인 ‘편입’을 목적으로 하는 햇볕정책을 가동시
켰다. 상호 인정과 평화공존을 지향한 것은 이 정책의 큰 공로였지만, 그 출발점
중의 하나 역시 “저개발 국가 북한”의 저임금 노동력을 “선진국 문턱에 선
대한
민국”이 이용해서 이윤을 남겨야 한다는, 지극히 자본주의적이고 우월의식에 가
득 찬 구상이었다.
이명박 정권의 출범과 함께 ‘햇볕’은 보수 결집을 위한 적대심
의 구름에 가려 더 이상 보이지 않았지만, 무한한 우월의식은 그대로 남았다. 단
1950~70년대로 다시 부분적으로 돌아간 듯 이 우월의식과 섞인 것은 핵·미사
일 개발에 성공한 북한에 대한 ‘위협론’의 확산이었다. 물론 1950~70년대와 달
리, 지배자들은 ‘북한 위협’에 대한 자신들의 프로파간다를 훨씬 덜 믿었다. 북한
이 자살이나 다름없는 대남 선제공격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기 때문이다.
문재인 시대의 새로운 대북 접근이 성공하려면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대
북의식부터 반성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북한 ‘위협’을 뻥튀기하는 일만큼이나
북한에 대한 우월의식 역시 허구적이며 백해무익일 뿐이다. 비록 생활수준이나
체제는 달라도, 북한이 일찌감치 성취한 나름의 복지체계나 열강으로부터의 정
치·외교적 자율성, 즉 진지한 의미의 주권도 경제개발 내지 제도적 민주주의만
큼이나 중요한 근대적 가치임을, 우리가 깨달아야 한다.
북한 인권에 문제가 대단히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도 마찬가지다. 분단의
양쪽이 병영화되어 있는 만큼 인권사회 실현은 구조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평
화공존으로의 길은 바로 남북한 양쪽 인권개선의 길이기도 하다. 한데 그 길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졸부와 같은 오만한 마음을 버리고 상대방의 역사적 성취와
장점들도 객관적으로, 겸손하게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지금도 일부 탈북자들
이 부유한 남한을 떠나 다시 가난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그 고향의 공동
체적 가치 중에는 우리가 배울 만한 점도 어느 정도는 있지 않겠는가?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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