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13

1402 52일 동안 3만5000명 학살...신은미 - 오마이뉴스

52일 동안 3만5000명 학살... 대체 누구 탓입니까 - 오마이뉴스

지난 세 차례 북한 여행을 다녀온 뒤 내게는 북한에 두고 온 수양딸과 수양조카가 생겼다.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정을 나눈 그들이 다시 보고 싶어서, 더 많은 북한 동포들과 소통하고 싶어서 올해도 다시 북한에 다녀왔다. 지난해 8월 15일부터 8월 26일까지 한 차례 그리고 9월 4일부터 13일까지 또 한 차례 북한을 여행했다. 새 연재 '재미동포 아줌마, 또 북한에 가다'를 통해 북한 동포들의 지금과 북한의 여러 명소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 기자말

북한의 유도 영웅 계순희와의 만남은 내가 북에서 경험한 가장 인상적인 만남 중 하나다. 그를 만난 뒤 나는 통일의 절박함을 가슴으로 느꼈다.

통일이 되면, 아니면 꼭 완전한 통일이 아닐지라도 다방면에 걸친 교류를 통해 준통일 또는 사실상의 통일(de facto unification)을 이룬다면, 우리는 '전쟁공포'로부터의 해방인 '평화'와 경제 성장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마음으로 느끼는 통일의 감동은 남북 스포츠 영웅들이 통일 조국의 깃발을 함께 들고 다정하게 국제대회에 등장하는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릴 때 체험할 수 있지 않을까.

계순희 선수를 만나고 돌아와 호텔 바에서. 운전기사 철남동생(왼쪽)과 탈피(북어)를 다듬고 있는 평양의 둘째 수양딸 설향이.
▲  계순희 선수를 만나고 돌아와 호텔 바에서. 운전기사 철남동생(왼쪽)과 탈피(북어)를 다듬고 있는 평양의 둘째 수양딸 설향이.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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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싱글벙글한다. 식사 전 대동강 맥주나 한잔 하자며 일행을 인도해 호텔 2층의 카페로 간다. 계순희 선수를 만나게 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연신 하면서 말이다.

북한 관광 중 안내원이 '여행일정이 바뀌었다'며 목적지를 가르쳐주지 않을 때, 열이면 열 모두 놀랄 만한 일정이 잡혀 있었다. 손님을 깜짝 놀라게 해 기쁨을 더하기 위함이다. 남편 또한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취소된 일정에 대한 미련 때문에 그리고 미리 가르쳐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매번 불평을 늘어놨다.

누군가로부터 전화를 받고 행복한 미소를 짓는 설향이.
▲  누군가로부터 전화를 받고 행복한 미소를 짓는 설향이.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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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로비에서 저녁식사 메뉴를 이야기하던 중 설향이가 전화를 받으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말투로 봐서는 남자친구임이 분명하다. 내가 유심히 귀 기울여 듣고 있자니 자리에서 일어나 멀리 걸어가며 통화한다. 평양의 둘째 사위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궁금증만 더해진다.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설향이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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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향아, 전화를 참 다정히 받는구나."

설향이의 얼굴이 갑자기 붉어진다.

"아닙니다. 고저 아는 사람인데…."
"얘, 설향아, 누구냐고 묻지도 않았는데 아니라니…. 남자친구지?"
"아닙니다, 오마니."

홍조를 보이며 부끄러워하는 설향이의 표정과 초롱초롱한 눈망울에서 옛 이야기가 돼 버린 나와 내 남편의 모습을 본다.

순대를 소스에 찍어? 북한에선 이렇게 먹습니다

순대와 육회 전식
▲  순대와 육회 전식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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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향이가 화제를 돌리려는지 어서 저녁식사를 하러 가잔다. 식당 테이블에 앉으니 주식을 들기 전 전식으로 무엇이 좋겠느냐고 설향이가 묻는다. 북한 식당은 전식과 주식을 항상 구별한다. 전식을 먹은 뒤 주식이 나오는데 주식은 주로 냉면·온면·온반·잣죽·조개죽 등 속을 편하게 해주는 우리 전통음식들이다.

갑자기 순대가 생각났다. 함경북도 해칠보 해변에서 북한의 동포들과 '통일의 순대춤'을 췄음에도 정작 함경도 음식인 순대를 맛보지 못했다. 나는 전식으로 순대를, 남편은 육회를, 설향이는 쇠고기 석쇠구이를, 영길 아우와 운전기사 철남 아우는 장어구이를 주문한다.

'송악소주'와 함께 전식이 가지런히 올라온다. 남한에서는 순대를 소금이나 새우젓에 찍어 먹는데 이곳 북한에서는 간장이 들어간 듯한 소스에 찍어 먹는다. 순대 한 점을 집어 소스에 담가 입에 넣으니 은은한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쫄깃쫄깃한 것을 보니 분명 찹쌀로 만든 순대다. 순대 특유의 기름 냄새는 전혀 없다. 씹으면 씹을수록 녹말의 단맛과 선지의 고소함이 다음을 재촉한다. 아! 이제까지 맛보지 못한 순대의 맛이다.

남편은 소주와 함께 육회를 입에 넣으며 감탄사를 연발한다. 날고기를 싫어하는 내게도 권한다. 억지로 한 입 먹어본다. 붉은 마른 고춧기름에 버무린 육회가 오감을 자극한다. 깜짝 놀랐다.

나는 평소에 스테이크를 먹을 때 적어도 '미디움'을 선호한다. 겉만 살짝 익혀 피가 줄줄 흐르는 스테이크를 즐기는 남편은 항상 나를 놀려대며 비웃곤 했다. 내가 먹는 스테이크는 스테이크가 아니라 '비프 져키(육포)'라면서 말이다.

지금 내가 맛본 육회는 날고기라는 생각이 전혀 들질 않을 정도다. 프랑스의 육회인 '뵈프 타르타르' 그리고 소스에 찍어 먹는 일본의 '고베 육회'도 내게는 별로였다. 그러나 오늘 이곳에서 맛본 육회는 나를 급기야 '생식가'로 만들 지경이다. 미국에 돌아가면 집에서 요리해볼 작정으로 육회에 들어간 양념이 무엇인지 수첩에 기록한다. 간장, 소금, 참기름, 고춧기름, 마늘, 생강, 물엿, 맛술, 배, 잣, 파, 참깨, 메추리알 노른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름이 전혀 없고 결대로 찢어놓은 쇠고기 살이 필요하다.

오늘 하루, 많은 것을 경험했다. 흥남과 함흥을 비롯해 울림폭로를 거쳐 평양으로 돌아와 북의 유도 영웅 계순희 선수와의 조우까지. 게다가 훌륭한 우리의 민족음식으로 저녁식사를 했다. 내일은 황해도 해주를 관광하고 돌아오는 길에 신천박물관이라는 곳에 들른다고 한다.

안중근 장군과 김구 선생님의 고향땅 

아침, 남편이 꽤 흥분돼 있다. 그 이유인즉슨 남편의 본관인 해주에 가기 때문이다. 남편은 해주 정씨다. 남편이 이번 관광 일정에 해주를 넣어달라고 했던 이유는 오로지 남편의 본관 때문이었다. 다른 특별한 이유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를 태운 차가 또 사리원을 지난다. 벌써 네다섯 번째 이곳을 지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설향이는 차 안에서 졸린 눈을 억지로 뜨고 있느라 안간힘을 다한다.

사리원이 고향이신 한 재미동포 할아버님이 생각난다. 그분은 2012년 5월 우리에게 전화를 걸어 사리원 사진을 부탁하셨다. 그 할아버님은 "옛집이 생각나면 술을 마시고 <고향의 봄>을 불러보지만 목이 메어 노래를 끝까지 불러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시곤 했다(관련 기사 : 북한 신혼부부, 결혼식 마치고 어디 가나 봤더니...).

당시 사리원 사진을 찍은 우리는 할아버님께 사진을 보내드렸다. 할아버님은 우리에게 전화를 걸어 "사리원의 고목나무 거리가 옛 모습 그대로"라며 끝내 울음을 터뜨리시고야 말았다.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흐느낌에 나는 함께 눈물을 흘리며 고통스러워 했다.

밭 한가운데 구호가 보인다.
▲  밭 한가운데 구호가 보인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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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인공위성 발사를 기념하는 듯 '우주를 정복한 정신으로 경제강국을 건설하자'는 구호가 밭 한가운데 걸려 있다. 북한은 구호의 나라다. 전국이 구호로 뒤덮여 있다. 이 구호들만 잘 읽고 다녀도 북한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다. 희천 발전소 건설 당시에 나왔던 '희천 속도', 요즘 들어 가는 곳곳 붙어 있는 '마식령 속도', 흥남-함흥 공업단지 건설을 의미하는 '함남의 불길' 등이 북의 오늘을 보여준다.

평야가 발달해 논이 많은 황해도는 풍요로워 보인다. 이곳에서 수확한 쌀을 산세가 험한 함경도까지 운반해야 하는데 운송수단이 걱정이다. 고속도로에도 운송트럭이 드문드문 다닐 뿐이며, 철로를 달리는 열차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철로를 따라 전선이 있는 것으로 보아 모든 열차를 전기로 운행하는 것 같다. 북은 전기가 부족하다던데 정상 운행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북한에는 석탄이 풍부하다고 하니 혹시 예전에 쓰던 증기기관차가 아직까지 남아있다면 꺼내 쓰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황해도 해주의 수양산
▲  황해도 해주의 수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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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깬 영길 아우가 멀리 산을 가리키며 "해주가 다가온다"고 한다. 수양산이란다. 남편이 갑자기 흥분하며 말을 잇는다.

"여보, 여기가 바로 임시정부 주석이신 김구 선생님과 대한의군 참모중장이시며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 사령관 안중근 장군님의 고향이야. 내가 이곳에 와보고 싶었던 이유는 해주가 내 본관이기도 하지만, 이곳이 바로 그분들께서 태어나신 곳이기 때문이었어. 어떤 곳인지 두 눈으로 보고 싶었지."

남편은 한참 동안 설명을 하는데, 내 머릿속에 들어온 단어는 김구 선생님과 안중근 의사의 고향이라는 것뿐이다. 훌륭하신 두 분의 고향이라니, 나도 감격이다.

남편은 안중근 의사의 관등을 줄줄이 외우고 있다. 나는 그를 의로운 일을 한 사람으로만 알았지, 일본군과 대적한 '대한의군'의 야전군 사령관인 줄은 몰랐다. 그렇다면 그 분은 당연히 전쟁포로로 후일 석방됐어야 했던 게 아니었을까. 안중근 장군님에 대한 역사교육을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미네소타 대학 유학 때 만난 한 일본인 학생이 떠오른다. 기악을 전공하는 그 일본인 학생과 나는 구한말 한일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는 '구라파 유학을 하고 돌아온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 의회민주주의에 얼마나 큰 공헌을 했는지 아느냐'며 내게 열변을 토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한 테러리스트에 의해 살해됐다'는 말로 열변을 마무리 지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이렇게 답했다.

"이봐, 테러리스트란 무고한 민간인과 적군을 구별하지 않고 마구 폭력을 행사해 공포를 조장하는 범죄자를 뜻해. 바로 너희들 옛 제국일본의 군인들 같이 말이야. 안중근은 적국 수뇌의 심장을 겨눈 조선의 의사였어."

지금와 생각해 보니 내가 안중근 장군님에 대해 조금만 더 알았더라면 '의사'라는 말 대신 '장군'이란 호칭을 썼을 텐데…, 아쉽다. 문득 그 일본인 친구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역사교육의 중요성을 다시금 되새긴다.

북한의 군사 요충지 해주 그리고 서해 5도

우리를 태운 차량이 해주로 진입한다. 해주 들어 가는 길 초입에 있는 검문소 앞에 차가 멈춰선다. 영길 아우가 서류봉투를 들고 검문소에 들어가 한참 지나서야 나온다. 2011년 첫 북한 여행 당시 원산에서 금강산에 갈 때도 같은 경험을 했다. 차 밖에 나가 지루함을 달래며 담배를 피우던 남편이 검문소에서 나온 영길 아우와 함께 차에 오른다. 자리에 앉자마자 영길 아우가 남편을 보며 말한다.

"형, 원래 검열을 하는 중간에는 안내원 외에 차 밖으로 나와서는 안 됩니다. 검열관이 밖에 나와 계신 형을 보더니만 '가서 차 안으로 들어가라고 얘기하라'는 걸 제가 '우리 동포니 일 없을 거요'라며 설득했시요."
"아니, 왜 나오면 안 돼?"
"이곳이 군사지역이라서 그렇습니다. 외부인에 대한 검열이 아주 철저합니다."

야외학습 나온 해주의 초등학생들
▲  야외학습 나온 해주의 초등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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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창 밖으로 야외학습을 나온 아이들이 보인다. 물놀이를 가는지 튜브를 매고 있는 아이도 눈에 들어온다. 인솔한 선생님을 비롯해 아이들 모두 밝은 색 옷을 입고 있다. 그리고 그 옷 위에는 여지 없이 영어가 적혀 있다.

차로 해주 시내를 일주한 뒤 소현서원이라는 곳에서 도시락을 먹고 신천박물관으로 향한단다. 해주는 황해남도의 도청소재지인 만큼 백화점도 보이고 제법 큰 건물들도 눈에 띈다. 남편은 1000여 년 전 이곳에서 자기 조상들이 태동했다며 주위 산세를 유심히 관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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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태운 차량이 바닷가로 향한다. 영길 아우가 바다를 가리키며 "저곳 공화국(북한) 영해 한가운데 연평도가 있다"고 말한다. 연평도란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다행히 안개에 가려 연평도는 보이지 않는다.

'군사 요충지'라던 영길 아우의 말에 서해 5도가 '분쟁의 바다' 한가운데 있다는 걸 실감한다. 여기서 벌어질지도 모르는 작은 분쟁이 조국 강산을 초토화하고 민족을 말살할 전면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개성공단과 마찬가지로 이곳에도 공단이 들어설 계획이었다고 누군가에게 들은 기억이 난다. 만일 이곳에 공단이 들어선다면 그 부지는 평지가 발달된 이곳 바닷가 쪽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그렇다면 이곳은 '해주공단'이 아닌 '해주평화단'이 됐을 텐데. 그리고 이 해주 앞바다에서는 남의 어선과 북의 어선이 함께 조업하는, '분쟁의 바다'가 아닌 '평화의 바다' '민족의 바다'가 됐을 텐데. 남과 북의 지도자들에게 호소한다. 어서 빨리 만나 민족의 안녕을 이야기하라고.

북한에서 만난 율곡 이이

소현서원을 끼고 흐르는 계곡에 앉아 도시락을 먹는 우리들
▲  소현서원을 끼고 흐르는 계곡에 앉아 도시락을 먹는 우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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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시를 떠나 소현서원에 도착한다. 계곡 옆에 자리를 잡고 평양에서 가져온 도시락을 먹는다.

서원을 끼고 비교적 폭이 넓은 냇가가 계곡을 타고 흐른다. 계곡에는 아홉 개의 구비가 있다. 우리가 도시락을 먹고 있는 이곳의 지명은 '석담리'. 그래서 이 계곡을 '석담구곡'이라고 부른단다. 한 여인이 물속에서 유유히 수영을 즐기고 있다.

소현 서원의 석담구곡에서 수영을 즐기는 북한여인
▲  소현 서원의 석담구곡에서 수영을 즐기는 북한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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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소현서원은 율곡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활동을 했던 곳이다. 이곳의 표현을 빌리자면 '봉건유교교육'을 하던 조선시대의 학교인 셈이다.


서원에는 유학자들을 모시는 사당이 있고, 학생들을 가르치던 강의실과 기숙사 건물이 있다. 한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지방의 한 고을에 이런 고등교육 기관이 있었다니, 조선은 분명 문화국가였음이 틀림없다.

서원의 보존 상태는 좋았다. 관리도 비교적 잘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북한에 와서 율곡 선생님을 만나다니 뜻밖이다. 내가 기억하기로 율곡 선생님께서는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이곳으로 낙향하셨는지 궁금해진다.

비극의 박물관

신천 박물관 내부 모습. 당시 학살당한 희생자의 수가 기록돼 있다.
▲  신천 박물관 내부 모습. 당시 학살당한 희생자 수가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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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군 사건이란?
한국전쟁 당시 황해도 신천군에서 신천군 주민 3만5000여 명이 학살됐던 사건이다. 북한에서는 이를 신천대학살이라 부른다. 이 사건에 대한 남과 북의 시각 차이는 뚜렷하다.

북한은 '한국전쟁 중 서울을 탈환한 미군이 38선을 넘어와 10월 17일부터 52일 동안 3만5000여 명에 이르는 무고한 양민을 학살했다'고 주장한다
. 또한 국제민주법률가협회는 '코리아에서의 미군 범죄에 관한 보고서'(1952.3.31)를 통해 신천군 사건의 가해자가 미군이라는 결론을 냈다.

반면 남한에서는 기독교 우파 세력이 지주·성직자 등을 처형한 공산주의 세력에 복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학살이라고 보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2002년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신천군 사건을 다루면서 '좌우 대립의 결과물'이라는 해석을 내놨다.

아직까지 신천군 사건의 학살 주체가 누구인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 편집자 주
소현서원을 떠난 우리는 바로 옆 신천군에 있는 한 박물관으로 향한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신천군민들이 대량학살을 당했는데 그 숫자가 수만에 달한다는 설명을 듣고 기겁했다.

충북 영동의 노근리라는 곳에서 미군이 수백 명의 피난민들을 터널 속에 몰아놓고 총질을 해댔다는 사실을 알고 지금까지도 분노하고 있는데, 이곳 황해도 신천군에서 수만의 희생자가 발생했다니 믿고 싶지 않을 뿐이다.

박물관에 도착해 자료실과 현장을 참관했다. 무자비한 학살의 흔적이 남아 있다. 더이상 자세히 묘사하고 싶지 않다.

일제의 학정에 시달리다 겨우 찾은 조국에서 또다시 다른 민족에 의해 비참한 죽임을 당하다니, 분노를 넘어 자괴감이 나를 짓누른다.


문득 일제시대 일본군의 만행을 기록했던 사진들이 떠오른다. 일본군인들이 체포된 조선독립군들을 조선인들이 보는 앞에서 목을 베는 사진이다. 그 사진 속에는 바지저고리를 입고 두 손을 허리춤에 얹은 채 서 있던 조선인들이 일본군 사이에 섞여 있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앞잡이'들일 게다.

미군은 누가 누구인 줄 알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였을까. 여기에도 분명 앞잡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전에는 일본군을 따라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미군을 따라 허리춤에 권총을 찼던 우리 동포들 말이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 이건 누구의 탓도 아니다. 모든 게 우리 탓이다.

신천박물관에 있는 희생자 묘역에 헌화하는 모습
▲  신천박물관에 있는 희생자 묘역에 헌화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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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 묘역에 헌화하며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한다. 침묵 속에 박물관을 떠나 평양으로 향한다. 차 안, 아무도 말을 하는 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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