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육군 정보요원’ 김용장이 답해야 할 의문들
설갑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영문판 번역자2019.05.16 16:03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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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장씨가 소속됐던 미 육군 정보보안사령부(INSCOM)의 1980년도 연례보고서 원문(2018년 10월 기밀 해제). INSCOM의 부대배치 현황이 표로 정리되어 있다.
최근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둘러싼 정보요원 두 명의 주장이 파장을 낳고 있다. 1980년 5월 미 육군 501 정보그룹 소속 군사정보 전문가로 광주 공군기지에서 근무했다는 김용장과 광주 주재 501 보안사 상사였던 허장환이 논란의 중심이다.
김용장은 꿈같은 증인이었다. 헬기사격부터 사살명령까지 5월의 모든 의문에 완전한 답변을 내놨다. 그 답변은 허장환의 주장과 일치한다. 다만 보안사 요원 신분이 확인된 허장환과 달리 김용장의 신분은 자신의 주장 외엔 증거가 없다.
김용장이 501그룹 시절 받은 포상은 그가 501그룹 종사자였음을 증명할 뿐 광주에서 군사정보 전문가로 일했다는 증거는 아니다. 보안상 직책을 명기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공개된 501부대의 두 상급기관, 육군 정보보안사령부(INSCOM)와 국방정보국(DIA) 문건에서 광주 근무 “한국인 정보전문가”의 흔적은 찾기 힘들다.
증언의 정확성도 문제다. 김용장은 지난 13일 국회에서 1980년 광주에 CIA나 국무부 직원이 없었다고 했다. CIA 요원 상주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광주에는 국무부 소속 미 문화원이 있었다. 미국의 5·18 초기 정보는 문화원 직원들의 작품이었다. 20년 넘게 광주의 미 육군정보 요원이 이들의 존재를 모를 수 없다.
김용장은 지난 14일 광주 회견에서 1980년 5월21일자 DIA 문건 중 3개 문항이 자신의 보고에 기반했고, 그중 하나는 사살명령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원문을 보면 그것은 사살명령이 아니라 자위권 허가였다. 사살명령의 존재 여부를 떠나 이 보고서에 대한 김용장의 증언은 보고서와 천양지차인 것이다.
김용장은 이 회견에서 80년 당시 501의 기능이 여단에서 그룹으로 축소됐다고 말했다. 사실이 아니다. 대북 감청이 주임무인 501부대는 1986년 여단으로 승격돼 지금도 평택에 주둔하는 등 축소된 적이 거의 없다. INSCOM의 1980년 연례보고를 보면 그의 증언과는 반대로 휴민트 구조는 계통이 강화되고 인원도 늘었다.
연례보고에서 한국인 전문가의 흔적도 찾기 힘들다. 당시 501그룹에는 미군 194명, 직접고용한 민간인은 고작 두 명이었다. 그중 하나가 김용장이었을까. 그러한 특기자가 굳이 광주 공군기지에 20년간 배치됐을까? 게다가 당시 501부대 배치는 광주를 제외한 5개 기지에 한정됐다.
5·18 관련 DIA의 최초 보고서는 5월19일에 나왔다. 그날 광주시내에서 시위를 목격한 2명의 미 공군장교의 목격담으로 구성됐다. 정보장교가 아니었던 이들이 기지 귀환 후 심상치 않은 시내 상황을 미 공군 정보체계에 보고했고, DIA가 이를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두번째 보고는 5월20일, 광주 관광호텔 외국인 투숙객들과 선교사로 보이는 미국인들을 면담한 뒤 작성한 것이다. 이 초기 문건들에서 한국어에 능통한 정보전문가의 흔적은 없다.
김용장은 지난 3월 JTBC 인터뷰를 통해 세상에 나왔다. 그는 취재진에게 1980년 당시 미대사관 무관 제임스 영과 교류하는 사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난달 같은 취재진을 만난 영은 김용장을 모른다고 했다.
그즈음 나는 INSCOM에 당시 김용장과 4명으로 구성된 그의 팀이 작성한 보고서의 정보공개를 요청했고, 그런 기록을 찾을 수 없으나 DIA나 태평양사령부에 남아있을 수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 후 두 기관에 정보공개 요청을 했으나, 한 곳에선 기록이 없다는 답을 받았고, 다른 한 곳에서는 답신이 아직 오지 않고 있다.
김용장과 허장환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5·18 역사를 민주화항쟁이 아닌, 사전 각본에 따라 연출된 학살극으로 재평가해야 할 것이다. 광주시민들이 한 무리의 나약한 피해자로 전락하더라도, 그것이 진실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엄중함에 비춰 김용장은 1980년 당시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공식 기록을 통해 밝히지 않고 있다.
항쟁과 학살이 뒤얽힌 광주는 민주주의의 큰 성과이지만 민초들에겐 깊은 상처다. 온갖 혼란과 몽니 속에 진상규명은 요원한 채, 또 5월은 덧없이 흘러가고 있다.
최근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둘러싼 정보요원 두 명의 주장이 파장을 낳고 있다. 1980년 5월 미 육군 501 정보그룹 소속 군사정보 전문가로 광주 공군기지에서 근무했다는 김용장과 광주 주재 501 보안사 상사였던 허장환이 논란의 중심이다.
김용장은 꿈같은 증인이었다. 헬기사격부터 사살명령까지 5월의 모든 의문에 완전한 답변을 내놨다. 그 답변은 허장환의 주장과 일치한다. 다만 보안사 요원 신분이 확인된 허장환과 달리 김용장의 신분은 자신의 주장 외엔 증거가 없다.
김용장이 501그룹 시절 받은 포상은 그가 501그룹 종사자였음을 증명할 뿐 광주에서 군사정보 전문가로 일했다는 증거는 아니다. 보안상 직책을 명기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공개된 501부대의 두 상급기관, 육군 정보보안사령부(INSCOM)와 국방정보국(DIA) 문건에서 광주 근무 “한국인 정보전문가”의 흔적은 찾기 힘들다.
증언의 정확성도 문제다. 김용장은 지난 13일 국회에서 1980년 광주에 CIA나 국무부 직원이 없었다고 했다. CIA 요원 상주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광주에는 국무부 소속 미 문화원이 있었다. 미국의 5·18 초기 정보는 문화원 직원들의 작품이었다. 20년 넘게 광주의 미 육군정보 요원이 이들의 존재를 모를 수 없다.
김용장은 지난 14일 광주 회견에서 1980년 5월21일자 DIA 문건 중 3개 문항이 자신의 보고에 기반했고, 그중 하나는 사살명령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원문을 보면 그것은 사살명령이 아니라 자위권 허가였다. 사살명령의 존재 여부를 떠나 이 보고서에 대한 김용장의 증언은 보고서와 천양지차인 것이다.
김용장은 이 회견에서 80년 당시 501의 기능이 여단에서 그룹으로 축소됐다고 말했다. 사실이 아니다. 대북 감청이 주임무인 501부대는 1986년 여단으로 승격돼 지금도 평택에 주둔하는 등 축소된 적이 거의 없다. INSCOM의 1980년 연례보고를 보면 그의 증언과는 반대로 휴민트 구조는 계통이 강화되고 인원도 늘었다.
연례보고에서 한국인 전문가의 흔적도 찾기 힘들다. 당시 501그룹에는 미군 194명, 직접고용한 민간인은 고작 두 명이었다. 그중 하나가 김용장이었을까. 그러한 특기자가 굳이 광주 공군기지에 20년간 배치됐을까? 게다가 당시 501부대 배치는 광주를 제외한 5개 기지에 한정됐다.
5·18 관련 DIA의 최초 보고서는 5월19일에 나왔다. 그날 광주시내에서 시위를 목격한 2명의 미 공군장교의 목격담으로 구성됐다. 정보장교가 아니었던 이들이 기지 귀환 후 심상치 않은 시내 상황을 미 공군 정보체계에 보고했고, DIA가 이를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두번째 보고는 5월20일, 광주 관광호텔 외국인 투숙객들과 선교사로 보이는 미국인들을 면담한 뒤 작성한 것이다. 이 초기 문건들에서 한국어에 능통한 정보전문가의 흔적은 없다.
김용장은 지난 3월 JTBC 인터뷰를 통해 세상에 나왔다. 그는 취재진에게 1980년 당시 미대사관 무관 제임스 영과 교류하는 사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난달 같은 취재진을 만난 영은 김용장을 모른다고 했다.
그즈음 나는 INSCOM에 당시 김용장과 4명으로 구성된 그의 팀이 작성한 보고서의 정보공개를 요청했고, 그런 기록을 찾을 수 없으나 DIA나 태평양사령부에 남아있을 수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 후 두 기관에 정보공개 요청을 했으나, 한 곳에선 기록이 없다는 답을 받았고, 다른 한 곳에서는 답신이 아직 오지 않고 있다.
김용장과 허장환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5·18 역사를 민주화항쟁이 아닌, 사전 각본에 따라 연출된 학살극으로 재평가해야 할 것이다. 광주시민들이 한 무리의 나약한 피해자로 전락하더라도, 그것이 진실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엄중함에 비춰 김용장은 1980년 당시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공식 기록을 통해 밝히지 않고 있다.
항쟁과 학살이 뒤얽힌 광주는 민주주의의 큰 성과이지만 민초들에겐 깊은 상처다. 온갖 혼란과 몽니 속에 진상규명은 요원한 채, 또 5월은 덧없이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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