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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시인 백석의 사망 25주기였다고 한다. 이 사진은 가장 유명한, 25세때 사진. 일본 Aoyamagakuin대학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영어교사를 하던 시절이다. 사랑에 살던 모던보이라고 해서 식민지 청년으로서의 이런저런 자괴감을 느끼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어두운 그림자같은 건 보이지 않는 해맑은 얼굴이다. 물론 한장의 사진이 모든 것을 말하는 건 아니지만 북한에서 찍힌 어두운 만년의 얼굴을 보고 나면 슬퍼지는 사진.
백석은 그가 존경해 이름까지 따왔다는 일본인 시인 이시카와(石川)타쿠보쿠가 죽은 해인 1912년에 태어났다. 이시카와는 1910년에 한국이 합방되었을 때 착잡한 심정을 노래하기도 한 사람.
같은 해에 이른바 대역사건이라는 이름의 사회주의자 탄압사건에 크게 자극받았고, <닫힌 시대의 현황>이라는, 어두운 시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글을 남긴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로부터 고작 2년후에 그는 가난에 시달리다 폐결핵으로 죽었다. 그 때 나이 고작 26세. 이 사진은 22세 때 사진이다.
제국의 청년 이시카와가 시대에 대한 절망과 가난을 노래하고, 그를 사랑한 식민지청년이 아름다운 여인과 서정을 노래했으나 해방이후 더 이상 시를 쓰지 못했던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역사다.
그런데 그런 그를 ‘민족시인’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는 것 같다. 이 사진을 볼 때마다, 나는 무덤속 백석으로부터 그런 무거운 월계관을 벗겨 주고 싶어진다.
174이소, 李昇燁 and 172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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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석의 “사슴”이 ‘식민지 근대화’에 대한 반격이라는 주장까지. 백승종이라는 사람이 썼는데 그 백승종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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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 사람으로 세상읽기] 시인 백석[평전, 사람으로 세상읽기] 시인 백석4- Li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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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 사람으로 세상읽기] 시인 백석
입력 2015.12.1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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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1912~1996)은 ‘식민지 조선’의 탁월한 시인이었다. 평안북도 정주 출신인 그는 꾸밈없는 고향사투리로 시를 썼다. 한국인의 평범한 일상생활을 생생하면서도 아름답게 기록한 점에서 그는 한 사람의 역사가요, 일제가 강요하는 억압의 근대에서 벗어나 ‘자율의 근대’를 꿈꾼 민족지식인이었다.
그는 신구(新舊) 지식을 섭렵한 천재였다. 19살에 이미 ‘그 모(母)와 아들’이란 단편소설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될 만큼 글재주가 뛰어났다. 어려서 배운 한문을 비롯해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및 일본말에도 능통한 백석이었다. 고향 부자 방응모가 준 장학금으로 그는 도쿄 아오야마(靑山)학원 전문부 사범과(영어)에 입학하였다. 최우등으로 학업을 마친 백석은 귀국길에 올라 교사 또는 기자로 생계를 꾸리며 적잖은 시를 썼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근대의 다양한 문예사조와 사상을 널리 접하였지만 그는 자신의 시어에서 현학을 철저히 배제했다. 살아 숨 쉬는 고향의 입말이 아니고서는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되살릴 방법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사슴’으로 ‘식민지 근대화’에 반격
본명이 백기행(白夔行)인 그는 ‘독립시인’이었다. 1930년대에는 각종 문인 단체가 있었으나 어디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옛말대로 온갖 흐름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자신만의 독립적 세계를 유지했다. 여기에는 오산학교 시절의 은사 고당 조만식 선생의 가르침이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같은 학교의 선배 시인 김소월 역시 그의 지향점이었다.
그래도 백석은 소월보다 한층 적극적이요, 어느 면에서는 투쟁적이었다. 백석의 시 ‘정주성’(1935년)은 ‘홍경래의 난’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시어를 통해, 오래 전에 좌절되고만 민중의 꿈은 눈부시게 부활한다. “날이 밝으면 또 매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푸른 배)를 팔러 올 것이다”라고 했듯 전통은 반드시 이어질 운명이다.
백석은 33편의 시를 묶어 시집 ‘사슴’을 세상에 선보였다(1936년). ‘고방’, ‘가즈랑집’, ‘여우난곬족’ 등 수록작품의 목차만 쓱 훑어보아도 고유문화에 대한 그의 애착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만 하다. 33이란 숫자도 의미심장하였다. 3ㆍ1 독립선언 때 민족대표의 숫자를 떠올리고, ‘33천(天)’이란 불교적 세계관을 보여주면서, 한국 민중이 길하게 여기는 완전수 9로 노름판에서도 제일 끝수가 높은 ‘가보’다.
더 중요한 사실도 있다. ‘사슴’은 도시문명으로 상징되는 ‘식민지 근대화’에 대한 반격이라는 점이다. 시인은 일제가 근대화를 운위하며 숨통마저 끊어버리려 했던 한국의 가치와 전통을 되새기고 그 부활을 꾀하였다. 그리하여 소설가 이효석은 “잃었던 고향을 다시 찾았다”고 찬탄했고, 시인 박용철은 “모국어의 위대한 힘”을 재삼 느끼게 되었다고 호평하였다.
물론 그때도 견해 차이는 있었다. 시인 오장환은 백석의 시가 삶의 진실을 드러내지 못한다고 비판하였다. 또 임화는 백석의 “야릇한 방언”을 지방주의라고 낙인 찍었다. 임화 등도 탁월한 문인이었지만 백석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하였다.
전통의 미덕과 자율의 근대 함께 소망
여러 정황으로 보아 백석은 1930년대 한국인이 당면한 문화적 위기를 누구보다 심각하게 고뇌했고, 그래서 끝없이 방황하였다. 그 때는 민족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머지않아 한글조차 노골적인 탄압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징병과 징용의 피비린내가 휩쓸 판이었다. 한국은 위기의 심연으로 침몰하는 한 척의 배였다. 그때 백석은 고향의 순수한 토속 말을 가지고 그 뱃전에서 초혼가를 외쳤다고 봐야 한다. 역사의식 또는 각성된 문화적 자의식, 이것이 그 시인의 생명이요, 특장이었다.
‘목구(木具)’라는 시 몇 줄을 읽어보자.
“내 손자의 손자와 나와 나의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 수원백씨(水原白氏) 정주백촌(定州白村)의 힘세고 꿋꿋하나 어질고 정 많은 호랑이 같은 곰 같은 소 같은 피의 비 같은 밤 같은 달 같은 슬픔을 담는 것 아 슬픔을 담는 것(…)”
시인은 ‘슬픔을 담는 것’이 목구, 즉 나무로 된 목기라고 했다. 아름답고 유구한 그 전통이 끝없는 슬픔에 싸여있었기에 시인의 비애가 절절했다. 그런데 그가 노래하는 그 전통은 일제의 압박으로 박살 날 만큼 허약한 것이었던가? “힘세고 꿋꿋하고 어질고 정 많고 곰 같고 소 같고 피의 비 같고 밤 같고 달 같”은 그 전통이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인가.
백석이 노래하는 비운의 당사자는 얼핏 그 자신을 포함한 ‘수원 백씨’ ‘정주 백촌’ 사람들로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파고들면 이야기는 확 달라진다. “내 손자의 손자와 나와 또 나의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라고 했으니, 사실은 한국 사람 모두가 운명의 당사자다. 과거, 현재, 미래를 초월해서 그런 것이다. 그럴진대 백석은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 민족의 위대한 전통을 또렷이 기억하고, 부활의 주술을 걸었다고 평가해야 한다.
적극적으로 말해, ‘목구(木具)’는 총독부가 추구하는 ‘경성’(=서울)의 근대화를 부정한 것이다. 다른 시에서도 보이듯, 백석은 식민지의 근대를 제국주의의 가면, 전통의 파괴로 간주했다. 그는 고유 전통의 미덕을 바탕으로 자유와 평등의 날개를 단 자율적 근대를 소망한 시인이었다.
식민지에서도, 북에서도 비운의 삶
시대는 백석을 일탈과 방랑의 길로 내몰았다. 민족차별의 문제 역시 그 가운데 하나였다. 피지배층인 한국인으로서, 그는 일본군국주의자들이 강요하는 구조적 차별에 분노했다. ‘팔원’에서 일본인 순사 집에서 식모살이하는 한국인 소녀의 얼어터진 손등에 눈물을 흘린 이유다. 식민지 사회 내부의 계급적 갈등도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여승’은 옥수수를 팔며 생계를 잇던 시골여성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절간으로 피신한 사실을 폭로하였다. 절간으로의 도피는 결국 미봉책이란 점에 시인은 고뇌했다.
한 번도 그는 드러내놓고 민족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자를 자처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민족과 계급 문제에 대한 백석의 관심은 뿌리가 깊었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그였기에 함부로 ‘카프’ 계열의 사람들과 뒤섞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역시 정의와 평등의 사회개혁을 염원하였다.
‘백석은 순수 민족시인이다’ ‘이념과는 거리가 먼 방랑의 시인 또는 자유의 시인이다’ ‘해방 뒤 백석이 비록 북한에 눌러앉았다 해도, 그것은 이념 때문이 아니었다’ ‘북한에서 그는 아동문학에 전념했으나, 결국 문단에서 축출되었다’. 이런 식의 평가가 한동안 대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백석이 과연 북한의 정치적 이념과는 아무 상관도 없었는지 의아하게 여기는 학자들도 있다.
백석의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해방 당시 백석은 만주에 있었다. 그가 만약 사회주의 체제를 반대하였다면, 남쪽으로 내려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어에 능통했던 백석이었다. 그는 사회주의에 일말의 기대를 걸었던지, 평양으로 내려가 은사 조만식 선생의 통역비서를 맡았다. 은사가 숙청된 뒤에는 문학 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러다가 1959년 백석은 함경남도 삼수의 국영협동농장으로 옮겼다. 농장생활에서 그는 공동체문화의 단초를 발견하고 북한체제를 찬양하기도 했다.
6ㆍ25전쟁이 있자 남쪽에서는 백석의 아름다운 서정시도 금서가 되었다. 냉전적 사고의 결실이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말 백석의 시들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 화려한 귀환에 다들 열광했다. 언어의 주술사 백석은 시로써 우리 전통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또,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고 불의와 불평등이 사라진 새 세상을 꿈꾸었다. 안타깝게도 그 꿈은 식민지에서도, 북한에서도 파탄으로 끝났다. 그럼 여기서는 과연 가망이 있는 것일까.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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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막스를 읽은 지식인들은 양반, 상놈이 없고 부자도 빈자도 없이 인민이 주인이 되는 평등한 공동체 세상을 꿈꿨을 것이다. 그러나 북으로 간 문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완전히 다른 현실이었다.미제 앞잡이로 스파이 누명을 쓰고 처형되거나 개인주의를 청산하지 못한 나약한 정신의 소유자로 찍혀 오지 집단 농장으로 쫓겨났다. 소수의 살아남은 자들은 평양시에 살며 작가동맹 사무실로 출근했다. 그들은 수령의 교시에 따라 당과 인민을 찬양하고 선동하는 글을 협동조합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처럼 썼다.
백석, 이태준, 박태원, 홍명희, 김기림, 이용악, 오장환. 김남천. 우리말을 너무나도 아름답게 쓴 문인들.
북으로 간 그들은 대부분 처형되었다. 이상인 공산주의를 선택했으나 현실은 1당 독재체제인 비극속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혁명가도 있었다. 그 중에는 살아남았으나 아무 글도 쓰지 않은 백석같은 시인도 있었다. '아마 그는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쓸쓸하고 고독하고 슬프고 그리운 것이 가득한 그는 당이 원하는 새로운 사회주의 인간형이 될 수 없었을테니까.. 그는 북에서도 오지인 양강도 관평에서 양새끼를 받고 돌자갈 밭을 일구다 1996년 죽었다.
마지막 문장에서 슬픔인지, 안타까움인지, 안쓰러움인지 끔찍함인지 알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만약 내가 그 시대에 살았더라면 분명히 막스를 읽었을 것이고 성향상 사회주의 혁명노선을 지지했을 것이며 북쪽을 당연히 선택했을 것같다. 그 이후 내가 과연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무엇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고 무엇도 하지 않고' 그리 살 수 있었을까.
작가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인 능력은 무엇도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라고 말한다. 젊은 시절에는 동의하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안다. 불의한 상황과 시대에 자기 원칙과 존엄을 지키며 견디고 끝내 살아남는 사람은 정말 강한 사람이란걸.
한국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일독을 권한다. 거의 십 년 만에 신간 소설책을 읽었는데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184You, 崔明淑, Jeonghee Park and 181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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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n Bida replied·1 reply
- 역시 김연수 작가인가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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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yun Woo Kwon8년의 내공이 느껴지더군요. 전과는 많이 다르게 정제된 감성을 볼 수 있어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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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이 추천하신 책 저도 읽어볼게요. 저는 백석 평전 읽고 넘 맘 아파서 한동안 좀 힘들었던 기억이 나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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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un Young Koh그 마음을 생각하면 목이 메여요.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라 읽기가 힘드실 거에요. 마음이 참 아파요. 자기가 얼마나 사랑받은지도 모르고 갔어요. 북한 사람들 백석이라는 이름도 모르고 북한 문학사에서는 존재하지도 않는 이름이지만요. 겨울밤에 <여우난곩족>이나 <흰바람벽이 있어.> 얼마나 아름다운 시인가요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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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나보고 싶은 책 이네
요.. - ---
Favourites · tS8p hcJaouttmnnuarcysoiarr Sategdt f00r:eie06d ·
오늘은 시인 백석의 사망 25주기였다고 한다. 이 사진은 가장 유명한, 25세때 사진. 일본 Aoyamagakuin대학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영어교사를 하던 시절이다. 사랑에 살던 모던보이라고 해서 식민지 청년으로서의 이런저런 자괴감을 느끼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어두운 그림자같은 건 보이지 않는 해맑은 얼굴이다. 물론 한장의 사진이 모든 것을 말하는 건 아니지만 북한에서 찍힌 어두운 만년의 얼굴을 보고 나면 슬퍼지는 사진.
백석은 그가 존경해 이름까지 따왔다는 일본인 시인 이시카와(石川)타쿠보쿠가 죽은 해인 1912년에 태어났다. 이시카와는 1910년에 한국이 합방되었을 때 착잡한 심정을 노래하기도 한 사람. 같은 해에 이른바 대역사건이라는 이름의 사회주의자 탄압사건에 크게 자극받았고, <닫힌 시대의 현황>이라는, 어두운 시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글을 남긴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로부터 고작 2년후에 그는 가난에 시달리다 폐결핵으로 죽었다. 그 때 나이 고작 26세. 이 사진은 22세 때 사진이다.
제국의 청년 이시카와가 시대에 대한 절망과 가난을 노래하고, 그를 사랑한 식민지청년이 아름다운 여인과 서정을 노래했으나 해방이후 더 이상 시를 쓰지 못했던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역사다.
그런데 그런 그를 ‘민족시인’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는 것 같다. 이 사진을 볼 때마다, 나는 무덤속 백석으로부터 그런 무거운 월계관을 벗겨 주고 싶어진다.
518You, 김희숙, Naran Jung and 515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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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주의가 언급되니 ... 요즘 초기 사회주의 운동을 하셨던 지운 김철수 선생 자료를 살펴보면서 이런저런 그분의 이야기를 제 블로그외 페이스북 담벼락에 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민족주의 단체인 김구 선생의 임시정부와 민족주의적 자칭 사회주의 운동가들에 대한 증언이 나오더군요. 코민테른 사회주의 혁명자금을 서로 차지하려고 (1) 사회주의 운동가를 모함하여 암살하고 (2) 일본효민공산당 창당지원을 문제삼아 친일파라 비난하고 김구 임정이 일본효민공산당 관여인사들을 일경에 밀고하여 일망타진 시키고 (3) 김구 임정이 사회주의 운동가들을 이간질 시켜 패권다툼을 버리게 만들어 결국 스탈린 코민테른에 미움을 받아 고려인 지도자들이 처형되고 20만 재러고려인이 혁명화 유배를 당하게 되고 그와중에 3만이 얼어죽고 굶어죽었다고 하더군요. ... 민족주의가 진정한 독립운동의 발목을 잡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찹착한 중이었습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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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정 경무국장 김구 선생이 오명직 노종균 등 2명의 자객을 보내 식사를 마치고 나오던 김립 선생을 권총으로 여러발을 쏘아 제압하고 통장과 인감을 강탈했지요.함께 식사를 마치고 나오던 지운 김철수 선생 눈 앞에서 이루어진 일이지요.지운 선생의 육필 증언을 제 페북과 블로그에 그분의 서화와 함께 사연을 소개하고 있답니다.공산당자금 사기사건이랍시고 김구선생이 코민테른 자금을 노리고 벌인 사건이지요.설산 장덕수 선생에게도 그 자금을 유용했다고 소문내서 미국유학길에 동경에서 태러를 당하기도 했구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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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堅持直操(견지직조) - 金立 선생의 삶]BLOG.DAUM.NET[堅持直操(견지직조) - 金立 선생의 삶]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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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 1894년 12월 10일 ~ 1947년 12월 2일) 선생에 대한 오해와 그 진실]BLOG.DAUM.NET[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 1894년 12월 10일 ~ 1947년 12월 2일) 선생에 대한 오해와 그 진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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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도 고등학교 시절 문학을 공부하면서 일제시대 문학은 모조리 '식민지 지식인의 슬픔' '저항정신'으로, 산업화 시기(1960~70년대) 문학은 모조리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으로 도매금으로 묶어버리는 걸 보며 참 답답하다 생각했습니다. 말로는 주입식 교육이 나쁘다면서 비판적 문학감상 창의적 사고를 떠들지만 정작 제대로 된 문학감상론을 '주입'조차도 못하는 저질 교육이었습니다. 저도 수능을 친지 10년이 넘었으니 지금의 자세한 사정이 어떨는지 정확히는 몰라도 요즘 주류담론들이나 시민사회단체, 교육계 주도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제 기준에서 볼 때 악화되면 악화됐지 개선되진 않았을 것 같네요. 역사교육도 온갖 사소한 '독립운동단체' 이름들은 일일이 외우게 하면서 정말 중요한 세계사적 흐름은 가르치지 않는 엉터리 교육이죠.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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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에서 파리로 가지고 온 백석 시집을 오늘 읽었어요. 가족중 한명이 좋아했던 시인이라 이 시집이 여기 파리까지 제 이삿짐에 어떨결에 딸려왔습니다. 제가 이렇게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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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ongjin Kim다행이네요.^^백석 평가도 결국 냉전 종식 효과이긴 해요. 저도 좋아하는편이긴 하지만 누가 어떻게 발견했는지도 한 번쯤 검증이 필요한데 국문학계에서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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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유하복합(혹은 혼합)적인 사람, 복합(혹은 혼합)적인 결과물인지도 모르겠습니다.한 개의 제국, '절반쯤 일본'으로 교묘하게 진화된 식민지, 그러니 일본어의 사용 강제는 당연한 (심지어 꼭 그렇게 해야 할) 수순이었겠지요. 와중에 일종의 '고대어'로서 격하된('국어'가 아닌 '조선어'가 된), 그리고 모든 국가권력이 행하는 정책에 거치적걸리니 (좀 양보해서 표현하더라도) 될 수 있으면 쓰지 않아 주었으면 할, 조선어로 매력적인 시가 남발(?)되는 것을 방치(?)할 권력은 없었을 것 같고요. 말과 글에 의한 국가와 민중의 선동이 일상이던 시대였을 것이니 더욱요.그러니, '그저 좋아서 쓰는 그 행위조차도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아무리 권력이 쉬이 건드리지 않는 부잣집 출신이라도 말이다, 그러니, 우리 말을 쓰는 사람들만의 정서를 꾸준히 시로 짓는 그 행위 자체에 소극적(?)이나마 고민과 반항의 마음이 없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저항'이라는, 인문계에서는 약간 이념화된 이 단어를 빼고 '반항'이라고 적은 이유는, 아마도 그는 이념이고 뭐고 간에 하여간 스스로 느끼고 있는 감각과 감정을 자기 편한 대로(=있는 그대로) 글로 남기고 싶어했을 뿐이었을 것이다, 라는 추측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자기 출신과 행적이랑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념이 지배하는 '고향땅'에 남았을까 (아마도 그가 '민족의 말을 가장 잘 다루는 몇몇 중의 하나이므로 정치적 이용가치가 있겠다'고 생각한 당시의 공산주의자들의 설득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하는 생각도 하고요.어쨌거나 남은 것은 시, 그 시가 누구의 영향을 받았거나, 무슨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에서 우러나왔거나 간에 어쨌든, 그 시가 우리말로 생생하고 아름답고 찌르르 하니, 그는 결국 우리말 쓰는 사람들의 시인, 속칭(?) '민족시인'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휴우, 아무래도 그 타이틀은 이제 백석에게는 오염이라 아니할 수 없겠네요. 민족시인의 관점에서는 백석이 오염일 수도 있겠고요. 서로 영 부담스럽긴 합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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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엄청 잘생겼네요. 스타일도 지금 봐도 멋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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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i Young Kim꽤 비싼 옷을 즐겨 입었다니까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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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졸업논문이 "이시가와 타쿠보쿠"였어요.그의 발자취를 따라 북해도 까지 갔었든 기억이 납니다ㆍ^^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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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shik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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