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09

일본군 ‘위안부’( 慰安婦) 문제와 한일(韓日)관계 허윤석

 일본군 ‘위안부’( 慰安婦) 문제와 한일(韓日)관계

- 화해와 평화를 위해 직시해야 할 역사와 그를 마주하는 태도에 대하여-


서론

일본이란 한국인들에게 어떠한 존재인가? 다수의 한국인들은 일본에 대해 긍정보다는 부정에 가까운 인상을 갖고 있다. 이는 일본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대학생인 내가 아니더라도, 일반인들이라면 흔히 느낄 수 있을 테다. 지인과의 가벼운 대화에서조차 일본에 대해 긍정하는 의견을 표명하면 곧 주변의 따가운 눈초리로 이어진다. 일본과 관련한 역사, 정치문제라면 말할 것도 없다. 한국인들은 어린 시절부터 일본의 대(對)한반도 식민지 지배역사를 배우면서 자연스레 일본을 향한 적개심을 키운다. 성인이 되면 자신들의 역사관에 반하는 망언을 일삼는 일본 정치인들에게 분노한다. 이러한 역사관을 사회적으로 공유해온 결과, 2018년 근래에는 과거 ‘신일철주금’ 출신의 ‘강제징용 피해자’ 들에 대한 소송 재상고심에서 대법원의 배상판결이 내려졌다.(<대법원전합,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승소' 최종 확정(종합)>, 법률신문, 2018.10.30.)
이 같은 판결에 일본은 1965년 체결된 ‘한일협정’ 에 위반한다고 반발, 그에 연계하여 부품, 소재에 대한 일본의 수출관리의 강화를 실행하였다. 문재인 정부는 이에 대응코자 관(官)이 주도하는 ‘관제 민족주의’(Official nationalism)를 표방한 ‘일본산 제품불매 운동’ 등의 반일 캠페인을 부추겼다. (한국국제정치학회, <한국민족주의 다성적 성격에 관하여> 발표문, 최장집, 2019.03.01.) 이는 친정부 성향의 시민사회를 동원하며 국내외 갈등은 더욱 증폭되었고 현재도 그 해결은 요원해 보인다.

하지만 무엇보다 한일 역사문제에서 중심에 놓여 있는 문제는 ‘위안부 문제’ 이다. 예컨대,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시민단체 ‘정의연(정의기억연대)’에서 활동하는 경력을 바탕으로 현재 국회의원 신분인 ‘윤미향’ 씨를 비롯한, ‘나눔의 집’ 관련당사자들에 대한 기부금 횡령 등의 회계투명성 의혹과 도덕성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는데 이는 일본에서도 주목하고 있다. 그동안 운동의 방향뿐만 아니라 그 도덕적 대의에서조차 비판과 의구심을 표하는 목소리가 터지면서 위안부 문제 해결은 고사하고 시민운동의 위기, 신뢰의 추락까지 거론된다. 이처럼 국내외 안팎에서 다시 한 번 위안부 문제에 관한 조명이 집중되고 있다.

1991년 故 김학순 씨가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출신이라는 점을 폭로하면서 위안부 문제는 전시 성폭력 문제로 출발하여 여성인권과 매개된 국제사회의 이슈로 자리 잡았다. 그로부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한 한일 간 시민운동과 정치적 사건이 이어졌는데, 최근 2015년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문제해결을 위한 한-일간 위안부 협정이 그 일례이다. 하지만 일부 피해자 당사자들과 지원단체의 반대에 부딪치게 되는데 이는 전 국민적 숙의를 거치지 않았다는 점, 일본 측의 소녀상 철거문제 거론 등의 이유로 양국의 정치적 합의는 한국의 정권교체를 말미암아 그 취지가 퇴색되고 말았다.
가장 최근에는 독일 베를린 미테구에 위안부 관련 ‘소녀상’ 설립문제가 다시금 한국과 일본의 국가 간 갈등으로 비화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는 민간에서 다루는 역사문제를 뛰어넘어 국민감정을 동반한 정치적, 외교적 문제로 불거진 만큼,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한 양국 간 지혜를 모아야 한다. 단순하게 일본에 대한 도덕적 비난을 하기 이전, 이에 대한 내부의 치열한 자기검열과 정확한 인식의 전제가 선행되어야 상대를 향한 올바른 비판이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식민지배 문제에 대하여 기존 역사학계를 포함한 다양한 견해를 갖고 있는 타(他)학계, 시민단체 간의 교류와 연구의 지속은 담보되어야 한다. 하지만 작금의 사회적 분위기는 상대의 이견을 존중하고 나의 의견과의 접점을 모색해 나가려는 자세에 동떨어져 있는 듯해 우려스럽다.

이 글은 그동안 한국에서 통용되었던 일본군 ‘위안부 상(像)’ 을 고찰해보고 일면적이기 보다는 다면적인 위안부의 모습 또한 주목하며 편견에 휘둘리지 않은 관점으로 문제를 이해하려 한다. 이를 통해 기존의 피상적인 위안부 이해보다 정확하고 객관적인 위안부 개개인의 모습을 살펴볼 것이다. 또한 위안부 문제해결을 둘러싼 공방과 정치적 역사를 고찰하며, 한일관계 개선을 위한 역사문제의 결착 및 화해와 평화가 가능할 것인지 내 나름의 주관적 판단 하에 그에 대한 대안 역시 제언하고자 한다.


본론

1. 세간에 통용되었던 위안부 이미지에 대한 고찰- 그 복잡성과 구조적 강제

먼저 위안부는 어떻게 정의되어야 할까? <제국의 위안부>의 저자인 세종대학교 박유하 교수는 기존 한국사회에서 일반적인 위안부 이미지라고 수용되어진 ‘강제로 끌려간 20만의 어린소녀들’이라는 명제에 적지 않은 결함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 2015, 제1장 5부) ‘20만’이란 숫자는 남성들의 징집으로 인해 발생한 일본 내 노동력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일제가 법적조치인 근로동원제도를 통한 공장으로 순환과 배치를 목적으로 한 ‘정신대’ 의 모집에서 나온 말이다. 정신대와 위안부는 엄연히 다른 존재였다. 주로 가난이나 가부장제 속 제국의 공적교육의 시스템 내 보호를 받지 못했던 여성들이 취업사기나 인신매매 등으로 위안부가 되었던 측면에서 정신대랑은 분명히 구분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조선인 위안부로 등용된 여인들의 수는 어떻게 추정할 수 있을까? 수량경제사를 전공한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의 추정법에 의하면, ‘당시 위안시설의 지역별 분포’를 기준으로 추정한 조선인 위안부 명수는 약 5,500여 명, ‘일본군인들에게 지급된 콘돔숫자’를 기준으로 추정하면 약 3,500여 명 정도가 나온다고 한다. 그 외의 다른 추정법도 대략 수천 명 수준의 위안부 명수가 나온다고 한다.(<영화 ‘귀향’ 의 역사왜곡과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7가지 오해>, 미디어워치, 2018. 04.14.)

현재 생존해있지 않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강제5>, 35, 87, 96쪽)과 더불어 당시 위안부 모집광고를 낸 ‘경성일보’(1944년 7월 26일자), ‘매일신보’(1944년 10월 27일자) 등의 언론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회적 분위기, 당시 일본정부의 내부방침이나 실정법 등을 종합적으로 보아야 한다. 그로부터 한국인들에게는 너무 익숙한 이미지인 스무 살이 되지 않았던 어린소녀 위안부들의 사례나,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일본국가가 주체가 된 ‘불법적’ 이고 직접적인 ‘강제 연행’은 예외적 소수임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물리적 강제성을 경험한 위안부의 개인적 체험이 증언으로 남겨져 있기에 ‘강제연행은 존재하지 않았다’ 고 단언 할 수는 없다. 개인이 갖고 있는 주관적 체험은 국가권력이 독점하고 있는 객관적 기록이나 지식의 보이지 않는 바깥을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보이지 않는 역사적 사실을 보완하고 서사적 완결성을 위해 존중되어야 한다. (<기억과 권력: 이용수 vs. 정의연 진실공방에 관하여>, 슬로우 뉴스, 2020.5.11.) 그러나 이 같은 개인의 주관적 체험이 역사의 일부를 보충할 수 있겠지만 역사서술의 전체와 조화되지 않은 경우, 합리적으로 추론 가능한 다른 ‘경우의 수’ 도 고려해서 판단해야 한다. 확증편향적인 사료의 취사선택은 올바른 역사적 이해를 어렵게 만들어 갈등해결에 멀어질 뿐이다.
일본제국의 경찰이나 군인이 사기나 인신매매 등을 법적으로 단속했던 정황, 위안부로 모집된 인원 중에 나이가 너무 어리다거나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감언이나 사기성 취업으로 연행된 경우가 공식적으로 확인된 경우, 일본군부가 이들을 돌려보낸 사례(나가사와 겐이치, <한커우 위안소>, 1983, 221쪽)가 있다는 점은 결코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다. ‘일본군의 노예사냥으로 끌려온’, ‘소녀위안부’가 위안부의 평균적인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결국 위안부는 ‘전쟁 범죄’와 ‘물리적 강제동원’의 측면보다는 식민지 제국이 ‘세력 확장’을 위해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구조적, 사회적 강제’ 속 제국의 일원으로서 남성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역할을 수행하도록 요구받았던 측면에서 정의할 수 있는 가난한 ‘20세 전후’의 여성들이다.(<일본군 전쟁포로 심문 보고서 제 49호>: 한국인 위안부들) 흔히들 한국과 일본 간의 민족적, 피지배적 관점이나 국가권력에 의한 여성개인의 희생 등으로 분류해 위안부를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학계에서 합의할 수 있는 위안부의 보편적이고 종합적인 이해는 ‘가부장제 하의 국가권력의 확장으로 희생당한 여성’ 문제라고 볼 수 있다.(‘동아시아화해와평화의목소리’ 창립기념 심포지엄 <역사를 마주하는 방식> 발제문, 박유하, 2016.6.20.)

당시 그들의 자유와 권리를 제약하고 그러한 가부장적 식민지 위계구조를 운영해온 당사자로써 최종 책임은 일본제국이자 일본군에 있다. 하지만 사태가 복합적인 만큼, 우리는 위안부들을 직접적으로 구속했던 이들, 주로 조선인 ‘업자’이자 ‘포주’들의 존재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국의 경제적 착취시스템에 가담하여 이익을 편취한 이들의 책임도 같이 물어야 후대에 국가가 잘못된 정책이나 명령을 내렸을 경우, 그에 얽매이지 않은 채 보편적 도덕을 지킬 수 있는 책임 있는 개인의 위치를 지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녀들을 직접적으로 구속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갖기도 한 ‘주인’ 들은 전차금 반환이라는 명목 하에 그녀들의 수입 대부분을 갈취하였고 아프거나 일하기 싫을 때도 성노동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위안부는 자기 몸의 주인일 수는 없고, 인도에 반하는 ‘성노예’ 이다.

이같이 조선인 업자와 포주, 우리 안의 협력자(딸을 위안부로 넘기는데 일조한 부모나 마을의 주민 등의 사례)등의 불편한 진실 역시 마주해야 한다. 한편으로 최근 이영훈 교수가 <버마군 위안부 관리소 업주의 일기> 등을 근거로 자발적으로 매춘에 나선 위안부의 사례, 위안부 개개인이 파업할 권리를 행사했다는 정황을 제시하며 기존의 성노예설의 문제점을 반박했다. 결국, 위안부로 동원된 이들의 모습은 결코 하나로 등치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설사 자발적인 그녀들의 존재가 있을지언정, 매춘 등의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직업에 나서도록 만든 것은 여성을 인격이 아닌 수단으로 취급하는 근대의 남성 중심적-가부방적 사회풍토가 낳은 차별이었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매춘이냐 아니냐를 구분 지으려는 시도 역시 한국사회의 순결성에 대한 욕망과 매춘에 대한 차별적 시선 다름 아니다.


2. 위안부 문제해결을 둘러싼 공방에 대하여- 운동의 한계, 사죄와 보상을 둘러싼 갈등

앞서 살펴보았듯이 한국인들이 알고 있었던 위안부의 실체도 ‘반쪽’ 에 불과하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 외에도 패전 이후 일본군에 의해 집단적-조직적으로 학살당했다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오히려 위안부의 대부분은 포로로 수용되었고 “위안부들이 가득” 탄 배를 타고 돌아온 것으로 드러난다.(<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1>, 한울, 1993, 63쪽) 하지만 패전 후, 군인에 의해 죽음의 위협을 겪은 체험(전(前) 위안부 강일출 씨의 증언)도 존재하며, 일본군과 함께 자결하거나 소련으로 포로로 잡혀가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다소 존재한다.

이렇게 위안부가 처해있는 전장의 상황에 따라 겪었던 다양한 개인적 체험이 알려지면 역사적 사실을 마주하는 사람들의 태도 또한 달라져 왔다. 특히 위안부의 보상방식을 둘러싸고 정부와 학계, 지원단체의 입장은 조금씩 달라져왔다. 먼저 일본정부는 위안부에 대한 일본군의 관여가 확인된다는, 1993년 관방장관이었던 고노 요헤이(河野洋平)가 공식적으로 사죄표명을 하였다. 이윽고 1994년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수상은 국민모금과 국가모금을 혼합한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우호 기금’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국가적, 국민적 사죄형태를 바탕으로 약 60여명의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모금과 총리명의의 사죄편지가 함께 전달되었다. 그러나 지원단체들은 ‘국가배상’ 과 ‘법적책임’ 이라는 형식에 집착하며 일본의 이 같은 보상이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일축하며 반발하였다. 이후 20 여 년 지속했던 일본에 대한 맹목적인 비판과 비난은 위안부 문제해결을 진심으로 바라온 90년대 일본의 ‘양심적’ 일반시민들의 마음조차 등 돌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현대 일본은 전전(戰前) 일본과 동일시하려는 사고와 현대 일본에 대해 계속되는 냉소적 태도는 일본국내의 ‘혐한’ 보수파의 반동에 영향을 주었다. 한일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정치적으로 일본의 우경화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법적 책임을 주장하는 역사학자 박노자 교수는 17세기 국제법의 전시강간 금지와 인신매매 방지를 근거로 일본의 법적책임을 추궁하지만, 이는 적국의 여성과 일본군의 군속으로서의 ‘동지적’ 관계의 성격을 지닌 위안부와 동일시한다는 측면에서 하자가 있다. 또한 박 교수는 국제여성인신매매방지 조약에서 교묘하게 조선을 비준에서 제외한 점을 지적하지만 일본 교토 불교대학의 이승엽 교수의 포스팅에 따르면 “조약 자체에 (본토의 법을) 식민지 및 속령 등에 적용하지 않을 수 있다는 양해내용은 영국 등의 지배국들 역시 마찬가지”라고 명시했다.

1965년 전후처리에 대한 보상의 성격을 지닌 한-일 협정과 그와 관련된 미국을 중심으로 한 냉전질서 또한 법적 책임을 추구하는데 제약이 되는 요소이다. 결국 식민지배이자 제국의 문제이기도 한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두고 법적 배상을 고집하는 지원단체의 주장은 현실을 곡해할뿐더러 피해자들의 의사와 관련 없는, 상처 해결을 위한 실효성 있는 방안이라고 보기 어렵다. 당사자를 설득하고 피해자들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보다 윤리적이고 합리적인 방안을 모색해야 할 때다.

무조건적인 운동의 비판이 아닌 그 공과(功過)를 정확히 구분 지으며 이해해야 앞으로 어떠한 방향으로 문제해결에 나설 것인지 논의가 가능하다. 운동의 선봉에 선 정의연은 위안부뿐만 아니라 미군기지 출신 여성들이나 아프리카나 베트남 지역의 성폭력 피해 여성들과도 연대하면서 여성주의 운동의 외연을 넓혔지만 이들의 운동이 결과적으로 ‘내전 성폭력’ 과 ‘위안부’ 의 이해를 같게 함으로써 국내외 안팎으로 위안부에 관한 인식의 편향, 기만을 초래했다.
그들의 운동 중 하나인 ‘평화의 소녀상’ 에 투영된 이미지는 평화를 바라는 여성의 보편적 아픔에 대한 표현인가? 오히려 일본에 대한 저항과 증오로 무장한 치마저고리 입은 10대 소녀의 투사이미지의 측면이 정치적으로도 상업적으로도 소비되는 것이 작금의 행태이다.(‘소녀상의 예술학’ 토론회, 최범, 2016) 소녀상에는 다분히 순수 피해자와 가해자로 나누는 이분법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인식의 전제된다. 결국 이 같은 전제는 전체 위안부를 설명할 수 없으며 결코 진실이 아니란 점을 상기해야 한다.

일본이 행한 총 2번의 사죄보상에 대해 피해 할머니의 80%가 받아들였음에도 모두 거부하며 정의연의 활동에 비판적인 할머니들을 억압, 배제하려는 정황에서 드러나듯이 결국 운동 관계자들은 대의에 취해 자기반성과 성찰 없이 자신들의 ‘정의로운’ 행위에만 정당화하려고 한다. 무엇보다 당사자인 일본을 설득시키지 못한 우리 안의 반성도 필요한 시점이다.


결론

사실 역사논쟁은 그 자체로 끝이 보이지 않는다. 역사논쟁의 대부분은 어떠한 역사적 기록을 두고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대한 ‘역사인식의 방법’으로부터 시작된다. 근대 역사학의 대가인 랑케는 어떠한 선입견이나 편견에도 휘둘리지 않는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역사관을 역설했지만 어쩌면 이는 인간 스스로 안을 수밖에 없는 지적, 인식 한계와 결함을 인정하지 않는 오만한 태도일지도 모른다. 랑케가 서술한 역사서 또한 당시 루터파 종교관에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는 점은 개개인이 역사를 바라볼 때 사용하는 개인들의 앵글이나 스키마는 외부적으로 부과되는 여러 환경적 요인에 의해 형성되며 만들어진다는 것을 시사한다.

역사적 사실이라고 흔히 이용되는 사료나 자료 등도 사실은 그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이 기록해놓은 이야기이다. 우리들의 관점에서 이들의 기록이 편향성을 가지는지 구체적인 객관성을 지니는지는 판단하기는 어려운 문제이다. 결국 역사에 있어 진리를 찾으려는 시도는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헛된 것일지 모른다. 그렇기에 서로 다른 앵글을 갖고 있는 학자, 전문가들끼리의 상호 연구와 토론 등을 통해 보완해 나가야 한다. 그렇게 역사적 진실에 한 발짝 나가야 한다. 누구나 인간이라면 안을 수밖에 없는 결함이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마찬가지도 위안부 문제도 그러한 측면에서 봐야한다. 하나의 정형화 된 진리를 설정해놓고 그에 부합하는 자료만 취사선택하는 것이 아닌 이질적으로 보이는 것들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만이 사실의 입체성과 다면성에 입각하여 정체되었던 문제해결의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다. 궁극적으로 위안부 문제 등 한국과 일본의 식민지 지배역사문제는 우리 안에 남아있는 제국주의의 잔상을 극복하고 피해자들이 안았던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화해와 연대로 밝은 미래를 열고자하는 동아시아 평화공동체를 위해서라도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다.

또한 미국과 중국 등의 강대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국제질서가 계속되면서 한반도 내에서의 냉전적 구조는 존속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해결에 제약요소이기도 한 냉전적 구조의 혁파를 위해 일본과의 역사 갈등의 관리 및 화해와 평화관계의 구축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자유롭고 개방된 공간에서 민감한 역사문제에 대해서도 논의와 숙의의 과정은 보장되어야 한다. 

나는 과거 제국과 피(被)제국 관계였던 일본과 한국이 평등하고 대등한 가운데 평화와 우호가 중심이 되는 세계질서를 만드는 데 기여했으면 한다. 불신과 대립이 아닌 믿음과 협력의 시대를 열어가야만이 과거 역사 속 개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피해자의 기억을 집단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정치적 폭력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 주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식민지배에 대한 피해자와 우리 내면의 해방으로 이어지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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