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막판이었기 때문에 전투도 소강상태에 들어가서 지루함과 무의미함 때문에 맥이 빠져 있을 때 느닷없이 사단으로 전출 명령이 떨어졌다. 영문을 알 수 없었던 나는 연대에서 사단으로 가는 보급 트럭 적재함에 올라탔다. 월남의 1번 국도를 타고 올라가는 보급용 트럭을 타고 사단까지 4시간이나 걸리는 전출길에서야 비로소 여유 있는 눈으로 월남 땅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월남의 산악지대 모습은 우리나라 산처럼 아기자기한 모습은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고, 한마디로 징그럽게 나무와 넝쿨들이 엉겨 붙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해안선을 따라 남북을 관통하는 1번 도로변 전체가 해수욕장이라 해도 지나치지가 않을 것이다. 추수를 해서 벼를 말리기 위해서 아스팔트 도로 위에 그대로 벼를 널어놓고 그 위로 차가 달리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월남에서 근무하는 동안 가장 이상했던 일은 우리가 베트콩과 전투를 하는 동안 동네 사람들, 특히 꼬마들이 밭둑에 엎드려서 교전하는 장면을 구경하거나 다리 밑에서 한가로이 낚시를 하고 있는 월남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전쟁을 하도 오래 하다 보니 그들에게는 전쟁이 하나의 생활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떻게 내가 사단으로 전출 명령이 나게 되었는지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사단에 도착한 날 밤 내 이름을 부르기에 밖으로 나가보니 이상하게도 사복을 입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복을 보자 순간적으로 혹시 '입대 전의 활동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한 생각이 스쳤다. 그 때까지 내가 군대에서 사복을 입은 사람을 본 것은 보안대원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사복은 부드러운 태도로 차에 타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번에는 차를 보고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도 보기 힘든 고급 세단이었기 때문이다. “월남에도 이런 차가 있나?” 싶을 정도로 매끈한 그 차는 알고 보니 사단장 공관의 차였다. 한국에서 주한 미군의 장성들이 승용차를 이용하듯이 월남에서도 한국 장성들은 승용차를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기야 옆에 튀여 있는 지프차는 에어컨도 안 될 터이니 더운 열대 지방에서 귀하신 분들이 탈 수가 없을 것이다.
직할 부대가 모두 함께 모여 있는 사단 사령부는 거의 서울의 남산 정도의 크기였다. 어리둥절한 체 승용차를 타고 어디론가는 한 참 가더니 어느 큰 저택으로 들어갔다. 그 건물은 사단장 숙소였고 나를 기다리는 사람은 사단장 전속부관인 한 대위였다. 역시 사복을 입은 한 대위의 첫 질문은 "박희도 대령과 어떤 사이냐?"고 물어서 그제야 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내가 떠난 후 정희가 사돈의 팔촌이 되는 박희도 대령에게 나를 찾아보아 달라고 부탁을 했던 모양이었다. 박 대령은 자기가 육사 생도대장 시절의 제자였던 한 대위에게 나를 찾아서 사단으로 전출 시키도록 부탁을 한 것이었다. 자신도 월남전에서 대대장으로 근무했던 박 대령은 나중에 "경거망동 하지 말고 은인자중해서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기 바란다."고 손수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한 없이 고마운 일이기는 하지만 박희도 대령은 하나회 출신으로 후에 2 공수여단장으로 육군본부를 쳐들어간 12.12 반란 5적 중의 한 사람으로 나중에 육군참모총장까지 지낸 이었다. 하여간에 그렇게 되어서 백과 돈, 혹은 학벌이나 특별한 주특기가 없이 정글에서 싸우다가 죽은 5,000여명의 전우들 보기에 부끄럽게 나는 무사히 살아 돌아올 수가 있어 덕분에 나는 80 년대에 곱빼기로 군사 독제에 대항하는 투쟁을 할 수 있었다.
사단에서의 생활은 낮에는 행정을 보고 밤에는 보초를 서는 일이었다. 남산만 한 사단 전체의 경계에 50 M 마다 늘어선 초소 안에 들어가서 보초를 서는 것이었다. 초소 앞에는 " 이곳은 내가 살 곳이요, 죽을 곳이다."라는 팻말이 전혀 심각하지 않게 세워져 있었다. 오후 6시부터 보초를 서는데 9시부터는 1 시간씩만 서지만 첫 번째 보초는 9시까지 3 시간을 서야 한다. 시간이 길어서 모두들 싫어했지만 나는 언제나 자원해서 첫 번째 보초를 섰다. 나는 복잡한 내무반보다는 혼자 조용히 있고 싶기도 하지만 책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보초를 서면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더욱이 적에게 아군의 위치를 알려질 수 있도록 초소에 불을 켜는 일은 걸리면 영창깜인 일이었다. 초소의 위치가 실제로는 적이 접근 할 수 없는 곳이기는 하지만 군대 논리상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철모를 두른 고무줄에 충전된 배터리를 달고 앞에는 큰 널빤지로 가려서 전방에서 빛이 보이지 않도록 하고 밤마다 책을 읽었다. 그러니까 보초를 서는 것이 아니라 저녁마다 3시간씩 독서를 하는 셈이었다. 문제는 책이 없어서 어떻게 내 손에 들어왔는지 모를 무슨 '철학적 소고'인가 하는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중대에 있을 때 매복과 정찰을 나갔었지만 직접 적과 마주쳐 전투에 참여해 본 경험이 없는 나에게 정말로 심리적으로 가장 부담이 되었던 것은 베트콩이 아니라 사단에 와서 겪게 된 영어 때문이었다. 사건은 처음 입대할 때 뭔가 좀 있어 보이려고 인사기록카드에 대학 때 VUNC(지금은 없어진 용산 미군 기지 내에 있던 UN군 사령부 방송)에서 견습을 한 것을 근거로 'VUNC 아나운서'라고 과장 기록을 한 것이 문제였다. 사실은 유엔군사령부 방송국이었지만 대북 전문 방송이기 때문에 직원이 전체가 한국 사람이었고 나는 남한의 대학생활을 소개하는 프로를 만들고 있었다. 아마 그 기록을 본 부관부 인사과장은 내가 유엔군 사령부에 근무했다고 생각해서 영어를 잘하는 것으로 판단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때까지 내 영어는 그 시절 모두가 그렇듯이 한 번도 실전에서 사용해보지 못한 교과서 영어이었던 것이다.
미군 헬기 중대에 헬기 통역병으로 파견 나가 있는 병장이 2 주간 한국으로 휴가를 가게 되었는데 내가 영어를 잘하는 것으로 잘못(?) 판단이 되어서 대신 자리를 메우게 된 것이다. 당시 월남에서 한국군은 헬기가 없고 헬기 수송은 미군이 맡아서 했기 때문에 엠브런스에 해당하는 환자수송 헬기도 전적으로 미군에 의존해야 했었다.
긴박한 전투현장에서 부상당한 병사를 헬기로 수송을 해야 하는 일은 부상당한 병사뿐만 아니라 미군 조종사와 미군 의무요원들의 목숨까지 달린 극도로 위험한 임무였다. 휴가를 떠나는 병장이 인수인계를 하면서 정작 필요한 영어는 상황이 발생하면 어차피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요란한 헬기 소리 속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서 하는 것이니 너무 걱정 하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상황이 발생해서 혹시라도 통역을 잘못 할까보아 두려워서 상황이 발생하지 않기만을 기도하면서 하루 종일 분주히 뜨고 내리는 헬기 소리 속에서도 혹시나 출동하기 위해서 나를 부르지나 않나 하는 긴장 상태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내가 있는 동안 한 번도 출동할 일이 발생하지 않았지만 미군들 사이에서 지내려니 내 영어가 객지가 아닌 본토에서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당시는 영어로 쓰여 있는 것은 보이면 무조건 기억이 아니라 머리에 인쇄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 글을 쓰려고 당시 미군들 사이에서 더스토프라고 불렀던 호송헬기를 찾아보았더니 그런 말은 없고 메드백 (MEDVAC-Medical Evacuation)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상하다. 당시 모두 더스토프라고 했는데..'했는데 하고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다.
찾아보니 'Dust Off' 이었고 먼지(Dust)가 땅(Ground)에 붙어(On)있다가 떨어지면(Off) ‘먼지가 날린다.’ 는 뜻이었다. 즉 우리 식으로 하자면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뛴다. 혹은 눈썹이 휘날리도록 뛴다.’의 의미 정도일 것이다.
젊어서 영어 때문에 고생하던 팔자가 늙어서도 변치 않아 내가 제일 잘할 뿐만 아니라 남보다도 더 잘할 수 있는 한국말을 쓰지 못하고 지금도 이국에서 영어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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