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식 후회없는 인생을 위한 바른 선택의 원리
비운의 문인 춘원 이광수
구 한말 탁월한 문인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장편소설 작가인 춘원(春園) 이광수는 평북 정주에서 출생하여 천애고아(天涯孤兒)로 성장하였습니다. 일본 명치학원(明治學院) 중학부를 졸업, 1915년 와세다 대학을 다닌 엘리트입니다. 1917년 [청춘]에 [소년의 비애], [어린 벗에게] 등의 단편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하였고 1917년 [매일신보]에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적 장편 [무정]을 발표하여 한국 문학사에 신기원을 이룩하였습니다.
19세 때 백혜순씨와 결혼하였으나 곧 이혼한 후 한 여인과 베이징으로 떠납니다. 거기서 그는 온갖 악조건 속에서 독립운동에 전념하는 독립투사들의 눈물겨운 모습을 목격하고 민족적 분위기를 안은 채 귀국하여 활동하다가 도일(渡日)하여 이듬해에 3.1독립만세 운동의 기초가 되는 "2.8 독립선언서"를 초안합니다. 그리고는 이를 외국으로 보내는 사명을 띠고 상하이에 도착한 것이 1919년 2월 5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상하이에서의 독립운동의 속사정은 너무나 열악하여 춘원 같은 천재의 눈으로 볼 때 조선이 근대화된 문명국가인 일본을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즉 마음속으로부터 "우리 민족의 독립은 현실적으로 가망이 없다"라고 단정지은 것이지요. 사실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굴레는 환경 그 자체가 아니라 환경에 대하여 "더 이상 소망이 없는 것으로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춘원은 상해 임시정부의 홍보로 "독립신문"을 펴내는 일을 맡는 동안 도산 안창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와 긴밀한 사제적, 동지적. 육친적 관계를 맺게 되어 일생 동안 그의 이념노선과 충고를 따르고자 결심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부터 좌절한 춘원은 "독립신문"을 그만두고 귀국하면서 도산과 결별하는 길을 걷게되는데 친일적인 성향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일본총독부의 정책에 적극 협조하였을 뿐 아니라 스스로 창씨를 일본식으로 개명하여 "가야마미쓰오"(향산광랑, 香山光郞)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1944년 11월 대동아 문학자 대회에 참가하여 다른 식민지 작가에 뒤질세라 맹활약을 하는 가 하면 학병권유의 글을 발표하고 대중연설을 번갈아 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경기도 사능에서 춘원은 일본의 항복소식을 듣고 마을 사람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치며 잔치 분위기에 휩싸였으나 서울로부터 친일파 처단이라는 불길한 소식을 전해듣습니다. 피신을 권유하는 말을 듣지 않고 그대로 머물며 [나의 고백], [돌 베개]를 비롯한 몇몇 글을 썼는데 그 주조는 "나는 민족을 위하여 살고 민족을 위하다가 죽은 이광수가 되기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진실로 입증되기에는 너무나 멀리 와 버렸습니다. 그는 반민특위에 의해 1949년 2월 7일 효자동 자택에서 체포당하여 투옥되었습니다. 아들의 혈서가 담긴 탄원서와 건강의 악화로 3월 4일 출옥하게 되었으나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7월 북한 당국에 연행된 뒤 1950년 자강도 강계군에서 병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구 한말 최고의 지식인 중 한 사람이었던 춘원의 생애를 되돌아 볼 때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당시 최고의 학벌과 탁월한 문학적 재능을 지녔던 그가 말년에는 얼마나 많은 후회를 했겠습니까? "일본이 망하고 독립될 것을 조금만 미리 알았더라면" 땅을 치며 후회했을 것입니다. 올바른 선택은 지식의 영역을 넘어선 그 어떤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수 많은 지식인들이 춘원과 같은 선택의 오류를 범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빨리 해도 늦는 것이 "후회(後悔)"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후회 없는 인생을 살기 위해 매 순간의 삶에서 올바른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종말론적으로 선택하라
올바른 선택을 위한 비결 중 한가지는 미래에 일어 날 일을 확실히 알고 오늘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를 "종말론적 선택"이라 이름붙여 봅니다. 춘원 이광수는 불과 1년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1944년 창 씨를 개명하고 학도병을 권유하는 등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미래를 알기 위해 노력합니다. 선거철이나 입시 때만 되면 서울의 미아동 거리가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합니다. 자신과 자식들의 미래를 알아보려고 무속(巫俗)인들을 찾는 사람들로 말입니다. 요즈음은 인터넷을 통한 무속 사이트가 과학의 옷을 입고 성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주는 무속(巫俗)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운명론적으로 돌아 가지만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들마다 선택의 자유가 있고 더구나 창조주께서 선택하실 수 있는 권한과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방정식을 풀 때 변수가 몇 차원만 올라가도 풀어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 번이라도 맞선을 보신분은 실감할 것입니다. 인격을 가진 두 사람이 만나서 가정을 이룬다는 것이 결코 내 뜻이나 상대방의 일방적인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지구상에는 60억의 인구가 거미줄처럼 얽혀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살아갑니다. 그러한 복잡한 인과관계를 정확히 점쳐낸다는 것 자체가 지나친 욕심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 미래는 전혀 알 수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물속에서 사는 물고기가 바다의 전체적인 윤곽을 보기 어렵듯이 사람이 사람 사는 세상을 알기 어렵지만 세상을 창조하신분은 알고 계십니다. 성경에는 미래에 확실히 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창조주께서 우주와 인간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마지막 결산의 때에 관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요한계시록이라는 예언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 두었습니다.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이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우더라"(요계20:12-15)
어떤 사람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그만이다"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죽음이 모든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생각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죽으면 끝이 아니라 죽은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평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의 시험은 한시적으로 우리의 미래를 좌우합니다. 수학능력 평가 시험은 대학생활을, 입사 시험은 직장생활을 좌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날 하나님 앞에서의 평가는 영원을 좌우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섰을 때 나는 어떤 모습이기를 원하는가" 이것이야말로 선택의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다.
성경에는 일개 노예의 신분에서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된 한 요셉이라는 소년의 이야기를 길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이는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로서 이복형제들의 미움을 사 이집트 노예로 팔려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당시 권세가인 보디발 장군집의 노예가 된 그는 용모가 빼어나 장군의 처로부터 유혹을 받게됩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에 대한 전설이 있습니다. 요셉이 일이 있어 보디발의 처가 머무는 곳을 방문했을 때 그녀는 요셉의 옷을 잡고 늘어 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옷을 벗어버리며 유혹을 거절했습니다. 그녀가 말합니다. "왜 그대는 나의 청을 거절하는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내려다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그녀는 요셉의 옷을 가지고 그녀 방에 있는 신상의 머리를 푹 덮어 씌웠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자 이제 신은 더이상 우리를 지켜보지 못한다. 그러니 내 청을 들어다오" 요셉이 말합니다. "당신이 섬기는 신은 돌로 새겨 만든 것이기때문에 눈을 가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두려워 하는 신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기에 눈을 가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유혹을 이겨냈습니다. 요셉의 선택의 기준은 출세나 쾌락에 있지 않았습니다. 더 높은 하늘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땅의 시험에 통과한 자라고 반드시 하늘의 시험을 통과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하늘의 시험을 통과한 자는 땅의 시험에도 넉넉히 통과하는 법이지요.
자신의 사명을 기준으로 선택하라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의 저자 스티븐 코비는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동서고금의 위인들을 깊이 연구하여 그들의 공통된 습관 일곱 가지를 밝혀 내었습니다. 그 결과 훌륭한 사람들은 올바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선택하는 기준은 자신의 사명에 근거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명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존재하는 목적이 사명입니다. 길가에 피는 꽃 한 송이,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도 존재의 목적이 있습니다.
나의 사명은 나의 자아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만약 내가 죽어서 관속에 있다고 합시다. 가족들과 지인(知人)들이 문상을 올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마음속으로 한 마디씩 나의 삶에 대하여 평가를 할 것입니다. 부정적인 평가도 있을 것이고 긍정적인 평가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 앞에서 대부분 좋은 점을 상기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 때 나는 그들로부터 어떤 평가의 말을 듣는다면 가장 행복할까요? 바로 그 듣고 싶은 말이 나의 자아상입니다. 그리고 미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자아상을 점검해 보지 않은 채 바쁜 일정 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내 삶의 출발점은 무엇이며 종착점은 어디인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리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지에 대한 의식이 희미합니다. 그러니 오늘 올바른 선택을 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당장 눈앞의 이익이나 쾌락을 좇는 것은 방향 없는 항해와 같아서 나의 미래를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오늘 나의 모습은 지금까지 내가 내린 크고 작은 선택의 결과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사주 팔자에 내 미래가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같은 날 같은시에 태어난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들이 다 같은 삶을 사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인생의 선택가운데는 무엇을 먹을 것인가 하는 사소한 것에서부터 배우자의 선택과 같이 돌이킬 수 없는 중요한 선택들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의 선택과 같이 이 땅 뿐만 아니라 영원의 세계를 좌우하는 선택도 있습니다. 어쨌든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올바른 선택은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자신이 되고 싶은 미래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인간의 상상력은 놀랍습니다. 훌륭한 사람들은 이처럼 자신이 미래적 자아상이 뚜렷한 사람들이고 개인적인 사명 선언문을 글로 써서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이 었다고 스티븐 코비는 말합니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자신의 사명이 과연 성경이 지지하는 것인지를 꼭 점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미래적 자아상이나 사명이 다 바람직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선배들의 선택에서 배우라
올바른 선택을 위한 세 번째 비결은 훌륭한 선배들의 삶에서 배우자라는 것입니다. 처음 가는 길이 어렵지 누군가 한 번 갔던 길은 쉽습니다. 해 아래 새것이 없듯이 우리의 고민을 선인들도 했습니다. 우리와 비슷한 선택의 기로에 서서 고뇌하고 잠 못 이루던 밤이 그들에게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위인들의 전기와 글을 주의 깊게 탐독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설 때 위인들의 글을 읽으십시오. 마더 테레사를 읽고 리관유의 자서전을 읽고 간디와 성 프란치스코를 읽어 보십시다. 마틴루터킹과 마틴 루터, 존 칼빈의 글들을 읽고 도전을 받으십시다. 또한 현재 생존해 있는 인물들의 자서전을 읽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됩니다. 저는 특히 기독교인으로 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 한다면 인생의 길잡이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모델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는 책은 성경이었습니다. 성경속에는 성공한 사람, 실패한 사람들의 수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들이 왜 실패했는지 무엇이 성공의 요인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장점은 본 받고 실패한 사람들의 실패 요인이 내 삶에서 재현되지 않도록 노력하면 될 것입니다.
아가피아 공동체에서 운영하는 [꿈의 학교](교장: 송명현)에서는 자서전 과정이 있는데 나는 그 프로그램을 참 좋게 생각합니다. 청소년들이 그들의 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시기에 위인전기를 50여권 독파한 후 자신의 자서전을 써 보는 것입니다. 살아 온 날은 있는 그대로 쓰면 되고 앞으로 살아갈 날은 위인들의 삶을 참고하여 미리 써 보는 것입니다. 종이에 써 보는 것은 단순히 암기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한 영향력이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미래를 그려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중요한 선택에 있어서 확실하게 차이가 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의 방향감각을 가지게하는 고전 한 권을 곁에 두라
비행기나 배가 항해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나침반과 지도와 같은 도구가 꼭 필요하듯이 인생을 항해하는데 있어서도 그러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올바른 목적지까지 안내하는 나침반과 지도는 신구약 성경말씀입니다. 예부터 '책 속에 길이 있다'라는 격언이 있듯이 책 중의 책인 성경말씀 속에 길이 있습니다. 성경말씀은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인류의 영원한 베스트 셀러요 고전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서양문명의 두 개의 축은 헬라 철학과 기독교 성경입니다. 후회 없는 인생을 위하여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선택하기 전에 성경을 한 번쯤은 읽어보는 것은 천하보다 소중한 자신의 삶에 대한 최소한의 신실함일 것입니다.
2001-11-03 18:2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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