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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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덕의 임진왜란 열전] '임진왜란 열전(列傳)'을 시작하며



종합

[김시덕의 임진왜란 열전] '임진왜란 열전(列傳)'을 시작하며



  •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 입력 : 2015.03.01 04:00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KBS가 광복 70주년 기획 사극으로 ‘징비록’을 방영하기 시작했다. 왜 지금 ‘징비록’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3년 전으로 시계바늘을 돌릴 필요가 있다. 2012년은 임진왜란 421주년, ‘7주갑(七週甲)’이 되는 해였다. 당시 기념행사와 보도, 출판이 줄을 이었다. 나도 임진왜란에 대한 전근대 일본의 문헌과 담론을 소개하는 책을 냈다. 여러 학회와 강연장에 나가 발언할 기회도 있었다.

    임진왜란이라고 하면 다 아는 줄 알지만 정작 전문으로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다 보니 그때만 해도 나를 포함해 관련 연구자와 작가들이 총동원된 듯 했다.

    이듬해인 2013년. 기념비적인 해가 지나갔으니 열기도 식을 줄 알았다. 적어도 8주갑인 2072년까지 그런 붐은 다시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다니던 연구소도 그만두고 시간강사를 하며 집필에 몰두했다. 대학 도서관을 오가며 한·중·일 삼국의 관련 자료를 모았다. 그 때 쓴 책이 ‘교감 해설 징비록’(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었다.

    뜻밖에도 임진왜란 열풍이 사그라질 거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의외의 불쏘시개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었다. 2014년 7월 방한한 그는 서울대 공개 강연에서 임진왜란 얘기를 꺼냈다. “400년 전 조선에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양국 국민은 전쟁터로 같이 했다”면서 일본이라는 ‘공적’에 맞서 조선과 명이 연합했던 역사적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 아닌가.

    그전부터도 중국은 종종 임진왜란 때의 조-명 동맹을 한국전쟁 당시 북한-중국 동맹과 관련짓곤 했다. 하지만 국가주석이 한국에 와서 임진왜란 때의 조-명 동맹을 말한 것은, 다소 비약을 무릅쓰고 해석하자면, 한국전쟁에 대한 재해석이자 기존 대북 혈맹 관계에 대한 재고를 암시한 것이라고까지 할 만한 사건이었다.

    시 주석은 이날 “명나라 등자룡(鄧子龍) 장군과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함께 전사했다”며 “지금도 명나라 장군 진린(陳璘)의 후손이 한국에 살고 있다”는 말도 했다.

    그의 발언에는 배경이 있었다. 시 주석은 이보다 앞선 4월 29일 신장위구르 자치구를 전격 방문했다. 이 지역은 다민족 국가인 중국에서도 민족·종교 갈등이 첨예한 곳이다.

    그는 이곳 무장경찰대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경찰봉을 가리키면서 "명나라 장수 척계광은 중국 동해안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할 때 뾰족하게 자른 대나무로 왜구의 접근을 막은 다음, 병사들이 앞으로 나아가 왜구를 무찔렀다"며 "좋은 전술과 효과적인 무기가 중요하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다.

    중국 서쪽 끝에서 ‘왜구’를 언급하며 국난 극복을 강조한 시 주석이, 몇 달 뒤 중국 동쪽 끝 한국에서 ‘왜란’을 상기시키며 한·중 협력을 강조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다. 중국 지도부는 ‘왜구’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치하에서 통일된 일본을 연속적인 존재로 간주하겠다는 의중을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 한국에 대한 메시지도 담겨 있다. 중국은 19세기만 해도 위구르 지역의 독립운동을 누르고 러시아의 남진을 막을지, 동해안의 군사력을 길러 일본의 북상을 막을지 우선순위를 두고 새방파(塞防派)와 해방파(海防派)가 대립했다. 시 주석의 발언은 21세기 중국이 동서 국경 지역을 동시에 관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나타낸 것으로도 해석된다.

    나아가, 중국이 이렇게 부활했으니 한국은 이제 한·미·일 삼국 동맹에서 이탈해 (다시) 중국 영향권으로 들어오라고 제안하는 것으로도 읽힌다.
    시진핑의 7월 방한 강연 이면에 이런 포석이 깔려있음은 당시 여러 언론에서도 지적했다.

    중국의 숨은 의도야 어떻든, 시 주석이 유독 임진왜란에 주목하고 이순신을 비롯한 여러 관련 인물을 거론한 것은 우리 국민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뒤이어 7월 30일, 영화 ‘명량’이 개봉됐다.

    이 영화에 대한 신드롬에 가까운 열풍과 거센 논쟁에 대해서는 재론할 필요가 없을 터다. 그 사이 일본의 임진왜란 연구자이자 김경호 일본 팬클럽 회장이기도 한 사지마 아키코 교수가 KBS ‘역사저널 그날’에 출연해 헤드뱅잉을 선보여 화제가 된 일도 있었다. 2014년 임진왜란은 다시 한국 사회의 화두로 떠올랐다.

    그해 하반기, 내게도 한 영화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임진왜란 영화 제작에 대한 자문 요청이었다. 아마 계획대로라면 이 영화는 내년쯤 개봉될 것이다.

    국내뿐만이 아니었다. 영국 공영방송 BBC도 세계 전쟁 영웅 중의 한 명으로 이순신을 선정했다. 나를 비롯한 한·일 양국 임진왜란 연구자들과 인터뷰까지 마친 상태다. 프랑스와 우리나라가 수교 130주년(1886-2016)을 앞두고 기획한 ‘2015-2016 한·불 상호교류의 해’ 행사에서도 이순신은 핵심 테마 중 하나다.

    중국 공영방송 CCTV도 KBS와 임진왜란 다큐멘터리 5부작을 공동제작하기로 하고, 현재 진행 중인 상태다. 여기에도 나를 포함한 한·중 양국의 임진왜란 연구자들이 자문단을 이뤘다. 공동 제작에 걸맞게, 임진왜란을 국제전으로 폭넓게 조망하는 프로그램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KBS 드라마 ‘징비록’은 이런 일련의 국제적인 움직임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사실, 한·중 양국은 임진왜란을 두고 동상이몽 중인지도 모른다. 시 주석의 발언만 해도, 이제 중국은 북한 대신 한국을 임진왜란 때처럼 동맹 파트너로 삼을 의향이 있으니, 한미일 동맹에서 벗어나 일본(과 그 배후의 미국)에 맞서 함께 협력하자는 전략적 의도가 깔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의아한 것은 오히려 임진왜란에 대한 우리 국민의 높은 관심이다. 여기에는 다양한 해석이 따라붙는다. 어떤 분석처럼 이순신으로 상징되는 영웅 대망론에서 비롯한 것일까.

    내가 보기에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1960~70년대의 이순신 신격화를 지금 시기에 대입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이미 많은 이들이 논한 것처럼, 영화 ‘명량’만 해도 주인공은 이순신이 아니라 이순신을 도운 백성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성장동력을 잃고 양극화에 신음하는 한국 사회에서 내부 봉합을 위한 ‘가상의 적(敵)’으로 다시 일본을 상기시키려는 것일까.

    이 역시 설득력이 낮다. 내 나름대로 여론의 추이를 지켜본 결과로는 그렇다. 그동안 나는 일본 내 임진왜란 관련 사항을 연구하고 국내에 소개해 왔는데, 흔히 ‘친일’ ‘매국’이라는 거친 댓글들이 따라붙곤 했다.

    하지만 2012년 이후에는 “이제 무조건 일본을 욕할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보고 우리 자신을 반성해서 임진왜란 같은 일을 다시 겪지 않도록 하자”는 태도가 눈에 띄게 늘기 시작했다.

    의외의 변화였다. 이런 자세야말로 바로 류성룡이 ‘징비록’에서 보여준 의식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나는 임진왜란의 역사적 사실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각 시기별 각국 국민의 생각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있다.

    지금까지 얻은 결론은 이렇다. 2012년부터 이어져온 임진왜란 붐은 아직도 더 커질 여지가 있으며, 이 현상의 진정한 의의는 여전히 해명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올해도 연구자와 작가들은 저마다 최선의 방식으로 의견을 펼칠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나로서는 조심스럽게 추가하고 싶은 한가지 가설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활동한 한·일 양국 인물의 행적이 현대 한국인에게도 어떤 교훈을 줄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임진왜란은 조선왕조 500년의 격변기이면서, 동시에 한반도의 지정학적 판도를 바꿔 놓은 동아시아 역사의 전환기였다. 일본 역사 속에서만 해도 임진왜란은 100년에 걸친 전국시대의 끝에 발발해, 다음 시대의 질서를 낳고 유럽과의 관계를 결정지은 사건이었다. 중국에서도 명·청이라는 제국의 흥망이 뒤따랐다.

    그 역사의 격랑 속에서 조선과 일본 양국의 주역들은 무엇을 생각했고, 어떻게 자신의 역할을 찾아냈으며, 목표 달성을 위해 어떻게 움직였던가. 또 한번 역사가 크게 요동치는 2015년, 함께 복기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앞으로 이어질 글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과 일본의 주요 인물을 1대 1로 맞세워 이야기를 풀어갈까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조선의 선조, 가토 기요마사와 이순신을 대비시키는 식이다.

    이미 알려진 사실은 가급적 반복을 피할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과 명의 상황과 인물 행적에 대해서는 한명기 교수를 비롯한 다른 전문가들이 소상히 글과 책으로 남겨놓았다. 각 인물들의 행적이 종종 가문과 지역, 정파의 문제로만 해석되거나 논란에 휩싸이는 것은 피하고 싶다.

    연재 순서는 다음과 같다. 각 인물 쌍에 대한 글은 월 1회씩, 수 회에 걸쳐 나눠 연재될 것이다. (인물 및 순서는 변동 있을 수 있음)

    1) 선조 vs. 도요토미 히데요시 : 최고결정권자
    2) 류성룡 vs. 이시다 미쓰나리 : 최고위 참모
    3) 이순신 vs. 가토 기요마사 : 대표 장수
    4) 광해군 vs.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 잊힌 주역
    5) 김응서 vs. 고니시 유키나가 : 협상 주역
    6) 이덕형 vs. 소 요시토시 : 협상 실무자
    7) 사명대사 vs. 겐소 : 막후 조정자
    8) 손문욱 vs. 김충선(사야가) : 진영을 오간 사람
    9) 광해군 2 vs. 도쿠가와 이에야스 : 전쟁 이후 권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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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시덕의 임진왜란 열전] 선조 vs 도요토미 히데요시③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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