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을 다녀오면 무조건 병장이었다. 왜냐하면 파월 장병들은 군대 생활을 할 만큼 하기도 했지만 봉급을 미군이 주기 때문에 시간이 되면 무조건 진급을 시키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나는 일병으로 갔다가 일병으로 돌아왔다. 
사연은 이렇다. 하루는 본부 중대 서무계가 나를 부르더니 다음 달에 진급을 하게 되는데 상병 진급을 하면 한 달치 봉급을 사병계를 주어야 한다고 충고를 했다. 나는 한 편에서는 총을 맞아 죽는 사람도 있는데 행정병들이 당연히 되어야 할 진급을 가지고 그런 부정을 저지른다는 사실에 분노해서 나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서무계가 "너 그러면 끝까지 진급 못해."라고 했다. 나는 설마 그럴 수가 있을까 했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물론 어떤 때는 분을 참을 수가 없어서 부관부 사무실로 들어가 모두 쏘아죽여 버리고 자살을 할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었다. 그러나 그러기엔 내 인생이 너무 아까워 포기를 했었다. 아니 나에게는 그 보다 더 큰 계획이 있었다.

하루는 정훈교육이 있으니 각 참모부의 필수 요원만 남기고 전원이 사단 백마극장으로 집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좀처럼 참모부 병력을 동원하는 일이 없었는데 무슨 일인가 싶었더니 본국에서 유신헌법이 통과되었다면서 유신헌법의 정당성에 대한 교육을 하는 것이었다. 사단 극장에서 정훈대장이 장교, 하사관, 사병의 3개 그룹으로 나누어 연속적으로 교육을 했다. 유인물로 나누어준 헌법 개정안을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흩어 보아도 대통령의 임기제한 규정이 없는 것이었다. 무슨 세상에 뭐 이런 헌법이 다 있나 싶었다.
순간 입대하기 전 제6대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씨가 이번 선거가 국민의 손으로 뽑는 마지막 선거가 될 것이고 이번 선거에 실패하면 총통제가 될 것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아!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제 영원히 끝났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삼선개헌 반대 운동을 하면서 같이 고생하던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야 군대에 있으니까 어쩔 수 없지만 그들은 앞으로 한국에서 어떻게 살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물론 나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역만리 타국에서, 더욱이 일개 사병으로서 무슨 길이 있을 수 있겠나?
누구와 터놓고 이야기 할 수도 없는 참으로 답답한 심정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머지않아 철수를 해서 본국으로 돌아가야 할 터인데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는 아무런 희망을 가질 수가 없는 형편에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PX에서 항상 외톨이로 맥주를 홀짝 홀짝 마시고 있는 두꺼비 같이 생긴 녀석을 만나게 되었다.
사단 사령부 병력은 대부분이 행정병이라서 옷차림이 깨끗한 법인데 이 녀석은 군복도 꾀죄죄하고 어벙벙한 것이 한 눈에 척 봐도 고문관처럼 보였다. 내가 접근해서 말을 붙여도 귀찮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나왔다. 나는 그런 모습이 더 재미가 있어서 자꾸 말을 시켜 보았다.
그러다가 내가 정말 놀란 것은 도수가 많이 나가는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길레 대학물은 먹었을 은 것 같아 보이기에 장난삼아 “어느 학교 다니다 왔냐?”라고 물으니까 “서울 상대”라고 하면서 우습게 보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흘겨보는 것이었다. 그제야 나는 그의 처지가 이해가 되었다.
‘군대는 보직’이라는데 서울 상대씩이나 다니던 녀석이 공병대 작업병으로 근무하자니 영 조합이 안 맞았던 것이다. 더욱이 신 상병은 사교적(집 사람은 사기꾼적이라고 하지만)인 나에 비하면 엄청 비사교적인 타입이었다. 그러니 스스로 왕따를 자초하고 있었다. 멋대가리 없던 무뚝뚝한 경상도 사내가 슬슬 보따리를 풀어 놓기 시작하고 보니 결국 나와 같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신 상병이 신수가 훤해져서 나타났다. 웬일인가 했더니 뒤늦게 나마 서울대 출신의 가치를 인정 받아 사단 내에 건물수리 용역을 맡고 있던 빈넬이라는 필리핀 회사(당시에는 필리핀이 우리 보다 형편이 나았다)로 파견을 나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자리는 사병들이 부러워하는 사단에서 단 두 명 밖에 없는 자리였다. 실력이 있고 공병대에 근무하다 보니 드디어 그에게 기회가 온 것이었다.

월남에 있던 한국군 중에서 사고를 내고 간혹 캄보디아로 도망을 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캄보디아는 중립국이었기 때문에 일단 그 곳을 가면 제3국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나는 어느 부대의 경리 장교가 부대의 월급을 수령해 오다가 운전병과 경계병을 살해하고 캄보디아로 튀었다는 소문을 듣기도 했다. 어느 날 작심하고 나는 앞으로 기회를 보아 캄보디아로 도망갈 생각을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신 상병은 대단히 호기심을 보이면서도 자기는 용기가 없어서 같이 가지는 못하겠지만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고 했다. 사실 제대를 해 보았자 불안만 기다리고 있을 뿐인 나와는 달리 경남고에 서울상대 출신인 신 상병이야 한국을 등질 필요가 없었다.

일단 동지가 생겼으니 일이 빨리 진행되었다. 우리 같은 사병들이 캄보디아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헬기로 가는 방법 밖에 없었다. 나는 내 개인 공간이 전혀 없는 내무반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 보다 행동이 자유스럽고 공간이 있는 신 상병이 캄보디아 지도와 당분간 정글에서 생활할 수 있는 물품들을 준비하기 시작 했다. 물론 부대에서 구할(훔칠) 수 있는 물건은 최대한으로 구해서.
헬리콥터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꿍꿍이가 있어서 뜸을 들여 놓은 건이 있었다.

당시에 한국군은 헬기가 없었고 사단에 미군 헬기 중대가 파견 나와서 사단의 운송을 책임지고 있었다. 백마 사단 사령부는 모든 직할대가 함께 있기 때문에 남산만큼 넓었다. 피터슨이라는 미군 헬기 조종사가 저녁 마다 조깅을 하다가 사단 교회가 있는 언덕에서 돌아갔다. 교회에 자주 갔던 나는 그 동안 그와 친해졌었다. 전략적으로 그와 친해지기 위해서 신상병과 그의 막사에 자주 놀러 갔다.
상대는 미군 중위고 우리는 미군의 눈으로 볼 때는 보 잘 것 없는 한국군 사병들이다. 이런 차이를 극복하고 피터슨과 가까워지기 위해서 신 상병이 제대 후 곧 미국 유학을 갈 계획이라고 꾸며댔다. 신 상병이 나보다 영어를 잘해서 이야기가 잘 먹혀 들어갔다.

나와는 팬티 바람의 조깅 중에 만났을 때 이름이 피터슨이라기에 나는 처음부터 이름을 불렀지만 신상병과는 군복을 입고 막사에서 만났으니 자연히 신 상병은 말끝마다 “sir"를 붙였다. 피터슨은 그러지 말고 이름을 부르라고 했다. 참 점잖은 친구였다.
피터슨의 비위를 잘 맞춰서 헬기를 태워 달라고 해서 일단 뜨기만 하면 사정을 해 보고 안 되면 할 수없이 총으로 위협을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가능한 한 미리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 한국의 정치적 상항이 급변해서 나는 아무래도 귀국하면 감옥에 갈지 모르겠다고 연막을 폈다. 신 사병이 옆에서 정말로 크게 걱정하는 척하는 연기를 했더니 처음에는 무관심하던 피터슨이 슬슬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피터슨이 나트랑에 나가고 싶으면 같이 가자고 했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사병인 내 처지가 행동이 자유스럽지 못했지만 다른 군인이 타지 않고 피터슨이 단독 비행을 하는 기회를 노려야 하기 때문이다. 어디에 떨어지나 일주일 정도는 버텨야 하기 때문에 더블백 안에는 레이션을 쑤셔 넣을 수 있을 만큼 가장 쑤셔 넣었다. 혹시 피터슨이 물건이 가득 든 더블 백을 보고 물으면 인도 상점에 팔 레이션이라고 하기로 했다. 

드디어 기다리던 기회가 왔다. 2주 후에 한국군 업무가 아니고 미군의 업무로 나트랑 공항에 단독으로 갈 일이 있단다. 나트랑까지는 헬기로 30분 밖에 안 걸린다. 30분 안에 결판이 나야 한다. 국경 너머 아무 마을에 나 내려달라고 사정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시끄러운 헬기 안에서 영어로 피터슨을 어떻게 설득할 것이냐 하는 생각을 자면서도 하고 잤다. 최악의 경우 피터슨을 총으로 위협해야만 할 경우도 상상하기도 괴롭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이 잘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신 상병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 모래 원대복귀 하란다. 부대가 곧 철수할 모양이다.”
문제가 생긴 것이다. 신 상병이 원대복귀 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 탈출 작전은 절대로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든 물건을 신 상병이 가지고 있는데 신 상병이 사라진다니 나는 기가 막혀 있는데 신 상병은 그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도 안 쓰고
“그런데 큰일 났어. 나 총을 잃어버렸어.”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내 문제 때문에 멍하고 있다가 그 소리에 정신이 들어
“뭐야? 야! 이 씹 새끼야! 너 군인 맞아?”
“글쎄 이 회사에서 총을 쓸 일이 없으니까 어디다 처박아 두었는데 도저히 몬 찾겠다.”
“뭐 이런 정신없는 새끼가 있나? 씹할 놈! 할 수 없다. 나트랑에 나가면 살 수야 있지만 하루 밖에 시간이 없는데 나갈 수도 없고 피터슨에게 부탁해 보자.”
우리는 허겁지검 피터슨에게로 달려가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어렵게 부탁을 했다. 총을 구해달라니 피터슨도 난감해 하면서 “Stupid!"를 연발 하면서 기다리라고 하더니 어디서 M16 소총 한 정을 구해왔다. 역시 미군은 부자여서 그까짓 총 한 정 정도 가지고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우리는 피터슨에게 감사 감사 했다.

총을 얻어 들고 돌아온 신 상병으로서는 지옥 문 앞까지 갔다가 돌아온 기분이었겠지만 나로선 이건 뭐 꼭 원님 지나가려고 길 닦아 놓았더니 거지가 먼저 지나간다는 속담 꼴이라 기분이 씁쓸했다. 하여간에 캄보디아를 가기 위해 헬기를 얻어 타려고 그 동안 피터슨에게 온갖 정성을 기울였는데 결과적으로 신 상병의 목숨을 건진 셈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단히 무모하고 서툰 계획이었다. 만일에 내 계획대로 헬기를 탔더라도 피터슨이 국경을 넘었다며 월남 땅 아무 곳에나 내려놓으면 나는 도로 잡혀 올 수밖에 없었다. 보이는 국경이 없기 때문에 항공 지리를 전혀 모르는 나로서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아마 계획했던 대로 되었다면 지금쯤 캄보디아 어느 산골에서 농사를 짓고 살고 있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까무잡잡한 아이들 주렁주렁 낳고. 10월 유신 덕분에…….

나중에 안 일이지만 실제로 참전 군인은 캄보디아로 이민 정착 시키려고 하는 시도가 있었다. 프놈펜에 주재한 한국대사관의 모 인사를 통하여 비공식적이긴 하나 당시 프놈펜 정부의 진심이 담긴 지원요청이 있었다. 주 월남한국군에서 현지에서 제대하는 군인들 중 캄보디아에서 살아보고 싶은 인원들을 모아 편성 장비시켜 약 1개 사단 규모를 캄보디아로 파병시켜 주면 땅은 필요한 만큼 마음대로 줄 터이니 농기구를 가지고 들어와 개발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한국군이 점령한 지역의 소유권을 인정하겠으나 단 한국여자가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단서가 붙었다. 이 웃지 못 할 요청인지 제안은 청와대까지 보고는 되었지만 미군과 한국군이 모두 철군하는 상황에서 당연히 불가능한 사항으로 종결되었다. 

사실 철수 계획이야 오래 전에 잡혀 있었겠지만 나 같은 사병이 군사비밀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단 철수 명령이 떨어지니까 부대가 갑자기 정신없이 돌아갔다. 신 상병은 공병대로 원대 복귀가 되고 나는 밤낮 없이 부대 철수를 위해서 짐 싸는 작업에 동원 되어 우리는 그 후 만나보지도 못했다. 갱상도 사나이답게 무뚝뚝했던 신 상병!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렇게 해서 결국 나는 끝까지 일병으로 있다가 귀국한 30만 파병군인 중에 ‘유일한 존재’가 되었다. 내가 그것을 알게 된 것은 귀국을 하고 육군본부 중앙경리단에 월급을 수령하러 갔을 때였다. 담당자가 내 계급을 보더니 “뭐야? 일병? 이 자식! 천연기념물이네!”라고 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