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20

"한국에 대한 핵공격은 미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

"한국에 대한 핵공격은 미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


"한국에 대한 핵공격은 미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
미국이 핵미사일을 실전배치한 쿠바에 대하여 해상봉쇄를 했듯이 북한에 대한 해상봉쇄와 최후통첩은 가능한가?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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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미사일 위기의 교훈
 1961년 4월, 케네디 대통령은 취임하자 마자 쿠바의 카스트로 정권을 제거하기 위하여 피그 만에 친미 게릴라 부대를 상륙시켰으나 격퇴당하여 국제적 창피를 보았다. 두 달 뒤 비엔나에서 있었던 미소(美蘇) 정상 회담에서 소련 공산당 서기장 흐루시초프는 케네디 대통령을 만만하게 보고 노골적인 협박을 했다. 그는 케네디를 과소평가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1962년 여름 흐루시초프는 카스트로를 설득, 그해 9월부터 쿠바로 중거리 핵미사일과 전술핵무기를 들여보내고 미사일 발사대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사정거리 2000~4500km의 핵미사일은 미국의 코 밑에 배치되어 워싱턴 뉴욕 등 미국의 심장부를 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미국 합참은 쿠바의 소련 미사일은 세계적 범위에서 전략적 균형을 바꿀 정도라고 평가하였지만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동의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은 약5000개의 전략 핵무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소련은 300개밖에 되지 않았다. 수십 기의 핵미사일이 쿠바에 배치된다 한들 균형을 무너뜨릴 정도는 아니라고 보았다. 
 흐루시초프는 불리한 핵전력(核戰力)을 보완하고 쿠바를 방어하며 이탈리아와 터키에 미국이 배치한 핵탑재 가능 미사일을 무력화(無力化)시키기 위하여 모험을 한 것이다. 소련 지도부에선 반대자도 많았지만 흐루시초프는 일단 배치가 끝나면 유약한 케네디는 기정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우겼다. 
 그해 10월 미국 CIA가 U-2 정찰기의 쿠바 미사일 기지 건설 사진을 판독, 케네디 대통령에게 보고하면서 대책회의가 연일 열렸다. 케네디는 보안에 신경을 썼다. 언론에 사태가 보도되면 대응책을 마련할 시간에 쫓기게 되고 졸속 결정을 내릴 위험이 있는데 다행히 정보가 새지 않았다. 나중에 케네디는 '나에게 48시간의 여유밖에 없었더라면 폭격을 결정하였을 것이다'고 했다. 해상봉쇄가 아닌 폭격이나 침공작전을 폈더라면 쿠바의 소련군 사령관이 핵무기를 사용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미국의 대책반은 쿠바에 소련이 핵폭탄까지 반입하였는지에 대한 확실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논의를 진행하였다. 미사일용 메카톤급 핵폭탄뿐 아니라 100개나 되는 전술핵무기도 들어와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 것은 냉전이 끝난 뒤이다. 미국이 북한에 대한 군사적 조치를 취할 경우에도 '북한이 핵미사일을 실전 배치하였는가'에 대한 확증(確證) 없이 해야 할지 모른다. 케네디는 쿠바 해상 봉쇄를 결심하면서 핵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3분의 1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국에 대한 핵공격은 미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
 케네디 대통령은 1962년 10월22일 저녁 7시 중계방송을 통한 연설에서 쿠바에 대한 해상봉쇄(공격용 무기의 반입 금지)를 선언하고 소련에 대하여 핵미사일을 철수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이 연설의 핵심은 다음 대목이다. 
 '(앞으로) 쿠바 지역에서 발사되는 핵미사일이 우리의 동맹국이나 자유진영의 나라를 타격할 경우, 미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우리는) 소련에 대한 전면적 응징을 가할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
 미국이 핵무장한 북한에 대하여 군사조치를 취할 경우에도 비슷한 경고를 할 것이다.
 '북한 지역에서 발사되는 핵미사일이 우리의 동맹국이나 자유진영의 나라를 타격할 경우 미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 북한정권에 대하여 전면적 응징 조치를 취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북한은 압도적인 핵보복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핵폭탄으로 한국, 일본, 괌,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없을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은 연설에서 자신의 선택이 핵전쟁으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점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가 선택한 길은 어렵고도 위험한 길임이 분명합니다. 이 길이 어디로 갈지, 얼마나 많은 대가(代價)와 희생을 치러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무엇보다 큰 위험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유의 대가는 항상 비싼 법입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항상 그 대가를 지불하였습니다. 우리가 절대로 선택하지 않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항복하거나 굴복하는 길입니다.'
 그는 또 봉쇄의 표적이 카스트로 정권이지 쿠바의 일반 주민이 아니란 점을 밝힌다.   
 1962년 10월26일 미군은 데프콘 2를 발령했다. B-52 전략 폭격기는 핵폭탄을 싣고 하늘에서 대기하였다. B-47 중거리 폭격기는 여러 비행장으로 분산되어 출동 명령을 기다렸다. 1436대의 전략 폭격기중 8분의 1이 공중 대기 상태에 들어갔다. 145기의 대륙간탄도탄 미사일이 발사 명령을 기다리는 태세에 돌입하였다. 145대의 핵무장한 요격기도 비상 대기. 반면 소련은 대응 태세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다. 핵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다는 견해는 과장이라고 한다. 미국은 핵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으나 소련은 얼어붙었다는 것이다.
 미국도 이탈리아 터키의 미사일 철수
 쿠바 미사일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도 북한에 대한 군사적 조치를 연구하고 있을 한국과 미군의 전문가들에겐 시사점이 많다. 
 *케네디 대통령은 합참 등 군 지휘관들의 강경론을 누르고 막후 협상의 문을 열어놓았다. 폭격으로 시작된 위기였다면 핵전쟁이나 전면전으로 악화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해상봉쇄로 시작하니 선택지가 많아져 여러 가지 수단을 사용할 수 있었다. 케네디는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을 밀사로 삼아 워싱턴 주재 소련 대사 아나톨리 도브리닌과 접촉하게 하였다.
 *압박만 한 게 아니라 소련에 양보할 카드를 준비하였다. 
 *기선(機先)을 빼앗긴 흐루시초프는 미국의 압도적 군사력이 총동원된 상태에서는 군사적 대응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결국 타협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흐루시초프는 쿠바에 배치된 소련 미사일과 폭격기를 철수시키는 대신에 몇 가지 중요한 양보를 얻는다.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는 공개적 약속과 이탈리아와 터키에 배치된 미국의 주피터 미사일을 철수한다는 밀약(密約)이 그것이다. 미국은 완승(完勝)을 추구하지 않았고, 흐루시초프는 완패(完敗)하지 않았다.
 *문제는 터키와 이탈리아에서 미군 미사일을 철수한다는 미국의 약속을 비밀에 붙이기로 한 점이다. 이를 발표문에서 빼버리니 흐루시초프가 완패한 게임으로 비쳐지게 되었다. 국제적으로 소련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었다. 그 2년 뒤 흐루시초프는 소련 공산당 정치국 회의에서 해임되는데 가장 큰 이유가 쿠바 미사일 사건 대응 실패였다. 
 
 미국도 몰랐던 전술핵 100개
 미국은 북한에 대하여 모든 핵프로그램의 폐기를 요구하면서 해상봉쇄 등 군사적 조치를 취할 때에도 협상과 양보안을 준비할 것이다. 이 안에 한국의 국익(國益)을 해치는 내용이 들어가 있을지 모른다. 미국이 터키에 배치된 미군 핵미사일을 철수할 때도 터키 정부의 반대가 있었으나 묵살되었다. 북한정권은 핵을 포기하는 대가로 무엇을 요구하고 나올 것인가? 한미동맹 해체 또는 평화유지군으로 위상 변경, 미북(美北) 평화협정 체결 및 수교 등이 예상되고 중국은 이를 응원할 것이다. 미국이 북한과 타협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안전을 해치지 않도록 하려면 대북(對北) 군사적 조치에 적극적으로 참여, 발언권을 확보해두어야 한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1962년 11월20일에 끝난다. 소련은 42기의 미사일과 일류신 28 폭격기 편대를 쿠바에서 철수시켰다. 후일담이 많다. 30년 뒤에 밝혀진 사실인데, 해상봉쇄 당시 쿠바에 있던 소련군은 100개 정도의 전술핵을 가지고 있었다. 대포 및 폭격기용이었다. 미국은 그때 전술핵 배치 사실을 몰랐다. 철수 대상 목록에도 들지 않았다. 흐루시초프는 이 전술핵을 쿠바에 넘겨 주어 카스트로를 달래보려 했다. 소련 공산당의 고참 정치국원 미코얀은 쿠바로 가서 위기 수습을 맡는데, 카스트로의 심리 상태가 불안정한 것을 보고는 전술핵을 넘기면 큰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미코얀은 여러 시간의 설득 끝에 카스트로로 하여금 전술핵에 대한 미련을 접도록 만들었다. 전술핵은 해상봉쇄가 끝난 1962년 12월 선편(船便)으로 소련을 향하여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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