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는 나의 전적으로 개인적인 경험이었으나 이번 희분부터는 주변의 전우들의 경험과 여러 가지(주로 온라인) 리서치를 통한 자료들을 참고해서 쓴다. 아마도 내가 쓰는 월남전 이야기는 대양의 한 바가지 물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한 바가지 물에서도 바닷물의 기본적인 속성은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쟁이 한 창 진행 중일 때 이미 전쟁에 대하여 부정적인 여론이 대세를 이루었다. 1971년 6월13일 뉴욕타임스가 '펜타곤 페이퍼'란 기밀서류를 입수해 기사화해서 미국 내에서도 조차 '잘못된 전쟁'이라는 규정이 지어졌다. 이 서류에는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의 구실이었던 '통킹 만 사건'이 북베트남의 도발이 아니라 미국의 조작이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1964년 8월 북베트남 어뢰정이 공해상에서 미국 구축함 매독스호를 선제공격해 미군이 베트남전에 개입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이 함정은 '데소토'라는 정보수집 함정이었으며 북베트남 어뢰정이 미군 함정을 공격했다는 증거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히피 머리에 나팔바지를 입은 청년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반전' 데모를 벌였다. 불행히도 당시 한국은 박정희 군사정권의 철저한 언론 통제 탓에 그런 정보를 접할 수 없어서 알지 못했을 뿐이다.

나는 월남전 다큐를 만들기 위해서 채명신 장군 생전에 오랜 시간 인터뷰를 했었고 이세호 장군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비서실장이었던 한인수 장군(당시 대령)과도 오래 동안 이야기를 했었다. 그들을 통해서 일개 병사가 접할 수없는 고급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월남전이 이길 수없는 전쟁인줄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임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롬멜 장군이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전쟁을 수행했듯이 비극적이지만 지는 전쟁도 수행해야만 하는 것이 군인의 역할인 것이다. 이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망(철수)을 가면서도 지휘관의 공명심 때문에 애꿎게 부하 장병들이 수 없이 죽어나갈 수 있는 것이 전쟁인 것이다. 실제로 맹호부대는 철수를 앞 둔 72년 4 월 안캐 패스 작전 때 지휘관들의 공명심 때문에 단 3일 간 75명 전사, 104명 부상이 발생했다.

모순같이 생각되지만 가장 쉬운 싸움은 실제로 전쟁터에서 총을 들고 싸우는 전쟁이다. 비록 육체적으로는 힘이 들지만 명령에 따르기만 하면 되니까 두려움만 극복한다면 가장 쉬운 일 일수가 있다. 전쟁터에서 말단 사병은 자기의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도 언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물론 대강의 윤곽은 알 수 있겠지만 주어진 명령에 따를 뿐이기 때문이다. 훈련에서부터 실전까지 그저 서라면 서고 앉으라면 앉을 뿐이다.
지금은 춘천에서 터널이 뚫려 단숨에 통과 할 수 있지만 새카맣게 내려다보이는 낭떠러지가 아찔한 배후령 고개의 달팽이처럼 꼬불꼬불한 비포장도로를 아슬아슬하게 넘어서 오음리에 있는 파월 교육대에서부터 전혀 모르는 길을 가기 시작했다. 월남에 도착하여 주변에는 둥근 철조망이 5중으로 설치돼 있었고, 밤에는 밖에서 기어 들어올지도 모를 베트콩을 감시하기 위해 전등불이 촘촘히 밝혀져 있는 기지까지도 모르고 갔다. 작전을 나가서도  긴장 속에서 1 M 앞을 알 수없는 정글 속을 한발 한발 옮기는 것도 모르는 길이었다.
나무 뒤에, 바위틈에, 숲 속에, 나무 위에, 베트콩이 숨어 있다가 따다닥. . .쏘지나 않을까? 보이지 않는 부비트랩 선이 나무 사이에 연결돼 있지는 않을까? 그 무섭다는 독창이 바늘처럼 솟아있는 함정이 위장돼 있지나 않을까? 몰라서 불안한 것뿐이었다. 어디를 가는지도 알지 못하고 헬리콥터를 타고 작전지에 가서는 지루하게 기다리다가 찰라 같은 순간 동안 총질을 하다가 헬기를 기다리다 돌아왔다. 월남전은 전선도 없고 누가 적인지 우리 편인지도 알 수 없고 진군도 없고 승리도 없는 전쟁이었다. 

'한국군의 월남 참전 민간인 학살'기사가 심심치 않게 나와서 참전 군인들의 심사를 불편하게 만든다. 나라 안의 ‘군 의문사 사건“ 조차도 진실을 밝히기 어려운데 50년 가까운 세월 전에 일어난 타국에서의 전쟁 상황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한 진실을 한국군 측에서 인정하고 사실을 밝히는 것이 어찌 쉽겠는가? 
부대와 작전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한국인 작전 지역에 민간인이 들어가 살 수도 없거니와 영농지역이 있으면 주간에 농사일을 하기 위해서 한국군의 검문 검색을 받는다. 물론 그런 지역 민간인들 대부분이 항상 베트콩과 연관이 되어 있을 가능성이 많다. 비록 그렇더라도 한국군과 전혀 관계가 없는 지역이 아니라 한국군에 의하여 통제되고 있는 전술 지역에서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민간인 학살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비둘기 부대 소속 소대장이었던 김종수 소위는 1968년 7월15일 소대원들을 이끌고 야간에 예정된 매복지점이 아닌(국방부 보고서)곳에 매복하고 있다가 자정이 넘은 새벽 1시경, 그곳을 통과하는 베트남인 7명을 검거, 체포했다. 
이 와중에 갑자기 한 명이 도주했다. 김 소위는 즉각 소대원을 시켜 추격, 사살하게 했다. 나머지 6 명을 끌고 이동하는 중에 이번에는 두 명이 도망쳤다. 그 둘은 그만 놓쳐버렸다. 나머지 4명도 거세게 반항하며 도망치려 하자 다급한 나머지 부하들에게 사살할 것을 명령했다. 그 다음날 도주한 두 명이 그 지역 군수에게 사건 내용을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보고했다. 양민을 학살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선동에 편승한 그 지역 베트남 주민들이 한국군 부대 앞에 몰려와 대대적으로 거센 항의 시위를 벌였다. 낭패가 된 사령부 지휘부는 부랴부랴 사건 수습책 마련에 부심하게 됐다. 김종수 소위는 혼자 죄를 뒤집어쓰고 15 년형을 살았으니 그는 주월한국군 참전 역사 가운데 최악의 희생양이라 할 수 있다. 

1970년 11월 27일, 백마 29연대 2중대 3소대장이 매복을 나갔다가 민간인 5명을 베트콩으로 오인하여 오인사격을 하고 귀를 잘라다 전과보고를 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때 마침 갓 부임한 전두환 연대장은 사단장에게 보고를 하고 이세호 사령관은 고민 끝에 대통령께 죄송하다는 편지를 보내고 이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은 친필로 쓴 편지를 보냈다.

"친애하는 이세호 장군,

12월 21일자 귀하의 편지는 오늘 23일 접수하여 내용을 자세히 읽었습니다. 요즘 월남 국내에서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한국군에 의한 양민살해사건에 관하여서는 합참의 한무협 장군에서도 상세한 보고를 이미 받고 있습니다. 소녀살해사건은 불행한 일이기는 하나 작전상 만부득이한 사건이 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백마부대 29연대에서 발생한 양민살해사건에 관하여서는 각급 지휘관은 물론 말단 병사에 이르기까지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이 같은 불상사가 재발하지 않겠금 각별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전과를 조작 보고하기 위하여 양민을 살해하고 하물며 죽은 자의 귀를 절단하는 비인도적 행위는 국군의 명예와 지금까지 수많은 전우들의 피의 대가로서 쌓아올린 국군의 공적을 하루아침에 완전히 무너뜨리는(무효화 시키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나 하는 통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국군이 월남에 간 기본 목적과 정신을 다시 한 번 전 장병이 상기하고 재인식할 시기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귀국을 해서 명예롭지 못한 일로 2 주간 국방부 호텔(?)에 머물게 되었다. 국방부 호텔은 법무부 호텔과 존재 목적이 달라서 숙박 시설이 아니라 교육시설이다. 즉 병신이 되지 않는 선에서 수감자에게 단기간에 최대의 고통을 주는 것이다. 그래야 영창을 나간 다음 영창에 대한 좋은(?) 소문이 많이 나서 다른 병사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이쯤 하면 그 방법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지내야 하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도 빽이 통해서 나는 고참 헌병인 후배 덕분에 틈틈이 영창에서 나와 창고에서 월남전에서 기록했던 헌병대 문서를 정리하는 사역을 했었다. 문서를 정리하다가 한국군이 월남에 있는 동안 민간인을 대상으로 저지른 범죄 기록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물론 내 임무는 그것들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소각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지금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하게 기억되는 것은 대부분이 강간 사건이었고 살인 피해 배상은 물소 두 마리인가 세 마리 값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당시 월남에서는 물소가 우리나라 시골의 황소만큼 값이 나가기는 했지만 사람값이 그렇게 쌌던 것이다. 당시에는 병력이 이동하다 잠간 휴식 하는 국도변에 공중변소처럼 담요로 칸막이를 쳐놓고 남편은 손님을 부르고 아내는 손님을 받는 매춘 업소도 있었다. 그러면 병사들이 군화를 신은 체 바지만 내리고 일을 보는 것이다. 전쟁터란 인간이 보통 때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 곳이다. 

국방부 기록에 의하면 베트남에 참전한 주월 한국군 가운데 561명의 장사병(將士兵)이 범죄에 연루되어 전범(戰犯)으로 구속, 처벌되었다. 범죄 내용은 항명(抗命), 명령위반, 상관구타 및 살해, 무단이탈, 탈영 등 주로 하극상이 최다로 우리 한국군 자체 내부의 문제에 연류 된 사건이어서 현지 베트남인들과는 무관한 것이다. 베트남인들과 연계된 사건가운데 소위 민간인 즉 양민학살 사건에 연루되어 처벌받은 숫자는 우리 군(軍) 내부의 기강해이로 발생한 사건에 비하면 극 소위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어로는 ‘부수적 피해’라고 번역이 될 수 있는  Collateral Damage는 군사용어가 있다. 전쟁을 하는 당사자들은  전쟁 중 일어나는 민간인의 죽음과 사회 기관 시설 파괴를 ‘부수적’이라고 표현하지만 당한 사람들에게는 천추의 한이 맺힐 일이다. 그러나 솔직히 생사가 한 순간에 갈라지는 전투에 참전했던 병사들에게는 월남인들의 안전은 생각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 밥을 먹다가 길을 가다가 아니면 휴식 중에 앉아있는 돌멩이에도 부비츄랩이 매설되어 있으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안전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인정하고 사과하고 보상을 해야 할 때이다. 그것마저 부인한다면 일본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